걸어가는꿈

왜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까칠하냐구요?

공현 2011. 1. 7. 01:06




왜 인문학 교육에 까칠하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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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무언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여러 오해를 낳습니다.
(저항적) 청소년운동 ― 예를 들면 아수나로 ― 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 ― 예를 들면 인디고서원, 정세청세 등등 ― 이 비슷한 부류라고 믿는 것이 그런 오해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애초에 (저항적) 청소년운동이 어떤 건지 제대로 그 의미와 양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대체로 세계를 단순한 대립쌍이나 진영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이런 겁니다.

(저항적) 청소년운동은 입시교육에 반대한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입시교육에 비판적이다.
청소년운동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비슷하다.

(저항적) 청소년운동은 좌파적인 주장을 한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사회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교양을 돕는데 이는 좌파적인 성격이 있다.
청소년운동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비슷하다.

물론 '비슷하다'라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공통점이 있다'라고 쓰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차이점'은 더 크다는 데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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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분명히 말해서 (저항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이 청소년을 보는 방식은 확연히 다릅니다.

(저항적)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사회변화의 주체이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주체입니다. ― 혹은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조직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교육'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내용의 교육을 해서 더 나은 '성인' 혹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또한 (저항적) 청소년운동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삶과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청소년과 공부하는 청소년,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습니다.

(저항적) 청소년운동의 과정에서 운동 주체들이 힘을 기르고 서로 공동의 인식을 갖추기 위해 인문학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빌려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혹은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참여한 사람들 중 어떤 청소년들이 그 교육 때문에 삶의 방식이 바뀌어서 (저항적) 청소년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항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분명히 그 결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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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 청소년운동이 지향하는 것이 '좋은 어른'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합시다. 물론 그런 것도 (저항적) 청소년운동의 통시적(通時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효과일 수 있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수적인 효과입니다. (저항적) 청소년운동은 지금 여기에서 청소년들의 조직적 지속적 저항과 행동을 만들어내려고 아둥바둥 발버둥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는 당연히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까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건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앎의 외피를 둘러쓰고 청소년들을 계속해서 '공부하는 존재'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편승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존재"라는 식의 개드립은 삼가도록 합시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여하간 굳이 '청소년 인문학 교육'을 할 때 이미 그러한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뭣보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은 자기 삶에 불만을 가진 청소년들을 일정하게 흡수해버립니다.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인문학과 사회학을 적당히 짬뽕시킨 칵테일을 학습하고 토론합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된 다음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서 자기가 뭔가 대단한 걸 했다고 느낍니다. 토론회를 기획해서 토론이나 세미나를 하고서 학교와는 다른 세계를 접하고 즐거워 하며 자신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을 먹으면서 진흙탕 밑바닥에서 아둥바둥 발로 뛰고 있는 청소년운동에 대해서 그분들은 '평'을 하지요. 자신들이 청소년운동의 주체나 일원으로서 그 문제에 책임을 지고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한 발 물러나서 '평'을 하는 겁니다. 속으로든 겉으로든, 좋은 평이든 나쁜 평이든, 참 열불 터지는 일입니다.

저는 청소년 인문학 교육을 한다고 하는 곳들을 볼 때마다 항상 이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들이 모여서 점령군에 대한 악담을 나누든 작당 모의를 하든 무시하십시오. 그런 말을 실컷 나눈 후에 자신감이 커지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 욕구불만을 해소한 후에는 오히려 행동력을 잃는 법입니다. 그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십시오. 그들은 표현의 노예가 될 겁니다."    - 피를 마시는 새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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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을 조직화하고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청소년 인문학 교육의 경로를 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또는 활동가로서나 사람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 인문학 교육을 듣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제가 청소년 인문학 교육을 무지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교육이 꼭 필요하고 또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육에 참여하는 청소년 분들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청소년 인문학 교육이 마치 일종의 (저항적) 청소년운동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싫은 거고, 청소년 인문학 교육이 그 이미지와 프레임으로 잠식하고 있는 영역 중 일부는 '부당한 점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청소년 인문학 교육이 초래할 수 있는 여러 효과들 중에 어떤 효과는 (저항적) 청소년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뿐이지요.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항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 인문학 교육 사이에는 어느 정도 긴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 둘은 '청소년'에 대한 관점이든 그 사회적인 효과이든 주체에 미치는 효과이든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양보할 수 없는 대립도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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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뭐 아수나로에서 활동한다고 하는 분들 중에서도 아수나로를 무슨 인문학 교육 하는 곳 마냥 그런 관계 설정을 하는 분들도 실제로 있으니까 이건 '실제로 그러하다'라기보다는 '그러해야 한다', 라는 일종의 가치지향적인 논설문이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