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분리주의 메모 3

공현 2011. 3. 31. 11:07

분리주의 메모 1  http://gonghyun.tistory.com/244
분리주의 메모 2  http://gonghyun.tistory.com/297



* 반자본주의 연대론?

서로 다른 조건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르게 전개되는 운동-정치들은 왜 '연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단순히 수단적 협력 이상의 무언가로) 연대를 강조해온 사람들 중 일부 그룹은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해왔던 셈이다.
"서로 다른 운동이지만 각각의 (진보) 운동들은 모두 자본주의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철폐나 근본적 개혁 없이는 각각의 운동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운동들은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 반자본주의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자본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가진) 운동들은 연대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가'에 대한 답 또한 가지고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형태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논리구조는 그대로 둔 채 '인권'이나 '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논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내가 분리주의 메모1, 2에서 비판한 것은, 애매하거나 인상적인 수준의 비판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는 사실은 단일한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총체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운동들은 사실은 단일한 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2) 만일 운동들이 모두 자본주의에 문제제기하고 맞서는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굳이 연대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반자본주의 운동들'은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로 모두 자본주의로 연관되어 있다면, 중고생들의 두발자유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 혁명에는 도움이 되겠지.
 3)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 힘을 합친다는 것만으로는 그래서 어떤 정치,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해주지 않는다. (불충분하다.) 또한 그런 식의 연대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차이를 사장시킨다. (혹은 내부의 차이 자체를 적으로 삼는다.)
 4) 그것이 좀 더 효율적인 투쟁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수단적인 협력 정도로 충분하다. 연대와 협력을 혼용해서 쓰면 뉘앙스로 인한 착각이 일어난다. 수단적인 협력으로 명확히 하자.



* 물구나무 선 독단

사실 나는 '자본주의 철폐'라는 목적을 위해서 연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물구나무 선 논리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에 대한 관념과 이론으로 현실에서의 실천과 운동을 디자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목표나 목적으로부터 현재의 구체적 실천 계획을 역으로 도출하는 것은 목표나 목적이 시공간적으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때나 온당한 일이다. 즉 목표 역시 경험적 현실의 차원에 있을 때, 그 목표로부터 현실의 실천 계획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철폐할 혁명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을 목적으로 삼아서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을 역으로 그려나간다? 물론 그 관념을 공유하는 열성적인 활동가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조건에 놓여 있는 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할 법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배가 고파서 당장 밥을 먹기 위해 장을 보고 밥을 하는 등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최고의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막연한 목적을 가지고 지금 어떤 재료를 사야 하고 어떤 조리를 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막연한 목적에 대해서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 요리를 배우고 연구해서 그런 요리를 실현시키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스스로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세계요리체험여행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인터넷이나 신문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걸 단지 하나의 꿈으로만 간직하고 구체적 노력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목표'와 '지향'

나는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이 비현실적이라거나 그러한 목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을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거기에 이르는 경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자본주의 철폐는 '목표'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향'이나 '가치'의 범주에 두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대략적인 방향성을 규정해줄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실천까지 규정해줄 수는 없다. 지향과 목표를 혼동하면, 막연한 가치를 위해 구체적 실천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비약과 독단이 일어나곤 한다. 막연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 연대를 주장한다면 그 실천 역시 그런 차원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진보, 좌파 등을 규범적으로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어떤 연대를 요구한다는 것은, '규범' 즉 일정한 실천과 행동양식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같은 인권?

이런 문제는 '반자본주의'뿐 아니라 '인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약간 다르지만)
"노동자의 인권이나 청소년의 인권이나 같은 인권이므로 연대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같은 인권'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어째서 그게 '같은' 인권인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다른 성격의 다른 양태의 권리와 욕망인데. 인권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거쳐서 현실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끌어내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 논리적 간극 - 역 미끄러운 내리막길 논증

예컨대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라거나 지금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이라고 이야기하며 연대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드는 근거는 결국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철폐에 대한 논리이다.(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고는 동성애자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거나)
그런데 쌍용자동차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결국 동성애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경험적으로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철폐라는 가정에서부터 논증된 것은 결국 자본주의가 철폐되기 전의 상황, 더군다나 자본주의 철폐가 꽤나 멀게만 보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반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구호로부터 이를 끌어내는 것은 일종의 왜곡된 관념론으로 보인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 철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이상, "쌍용자동차 투쟁은 동성애자 해방에 필수적이다."라는 묘한 명제는 현실의 삶에서 경험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거짓이다. 아니, 적어도 참인지 거짓인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역(逆) 미끄러운 내리막길 논증이다.

(그리고 사실 쌍용자동차 투쟁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고리라거나 하는 판단은 도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내리는 것인가? 그에 대해서 차별금지법이나 일제고사 투쟁이 더 중요한 고리라고 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다의성과 맞닥뜨리지는 않는가? 애초에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진보', '좌파'라는 범주를 '규범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안에서의 위계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규범적인 규정은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합시키려고-동일화하려고 하는 담론을 필요로 하고,(그게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권이든 뭐든) 그 담론의 핵심 개념이나 논의는 특정한 해석-실천-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해석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간혹 나는 마르크스에게 이 말을 이렇게 돌려주고 싶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을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닌 실천이라면, 어떤 운동이 왜 반자본주의적인지 혹은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무엇에/무엇과 연대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게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지금 자본주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이나 가장 약한 고리가 뭔지 해석하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 연대의 불가능성 : 운동의 분리성

연대라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연대를 '서로 다른 운동/정치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사실 근본적인 난점을 전제하고 있다.
A라는 운동과 B라는 운동이 전혀 다른 운동이라면 두 운동은 만날 수 없다.
A라는 운동과 B라는 운동이 만약 운동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고 그 영역에서 만난다면, 그 두 운동은 그 영역에서는 사실 서로 다른 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만남'이라기보다는 운동의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어떤 복수의 운동/정치들을 '서로 다르다'라고 규정한 순간, 운동/정치는 만날 수 없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나 관념적으로는.

연대 활동은 많은 경우에 각 운동/정치의 개성을 죽인다. 예컨대, 어떤 집회나 활동에 연대해서 참여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활동을 하는 사람', '~ 이념을 가진 사람', '~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참여하지 않는다. 그저 집회에 참여한 사람 몇 명, 을 셀 때 집계될 뿐이다. '~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히 한 명의 '시민' 내지는 '인민'으로서 '연대 참여'할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연대 활동'을 과연 운동과 운동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다. ~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한 채로 어떤 운동에 연대한다면 (예를 들어 청소년운동이 차별금지법 운동에 함께 한다면) 그것은 다른 운동과의 만남이라기보다는 그저 ~운동의 일부 영역이 다른 운동과 겹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채로 연대한다면, 그것을 과연 '~운동의 연대'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지지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경험적, 실천적으로 볼 때 그런 게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 같지가 않다. 언론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교사 집회에 교사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장애인 집회에 비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 많이 신경 쓰지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처럼 전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분석과 논의의 대상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런 것들이 얘기거리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 사람

그럼 서로 다른 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일반적으로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여하간 만나고 있고, 또 만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결국 그 답은 개념적인 운동/정치의 외부에 있다. 그것은 운동과 정치가 텍스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외부의 실천으로 ― 인간의 실천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운동은 이념이나 개념, 또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사람들에 그 기반을 두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항상 이념적으로나 정체성적으로나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구성된 존재이다. 운동/정치는 오직 그 사람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이지만, 동시에 20대 대학생이며,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고 인권사상이나 매커니즘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나를 통해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에 대해, 여성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하고 다른 여러 인권운동들과 만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운동을 하는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인 동시에 성소수자이며 동시에 어느 지역의 주민이고 빈민일 수 있으며,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어떤 단체나 사람이 어떤 다른 종류의 활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그 단체/사람에게 왜 이것이 반자본주의 전체 운동에서 중요한지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인가 아니면 여러 과정을 통해 활동에 실제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운동의 내용과 감성에 익숙해지게 되고 친분이 생김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인가?


* 개념과 이론 외부 - 정당화의 불필요

결국 답이 '사람'이라는 식의 이런 이야기는 뻔한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이 주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이는 결국 우리가 운동과 운동 사이의 연대에 관해 "과연 굳이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한지" 되묻는다.
운동과 정치는, 우리가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정의하고 있는 이상 독자적이고 고립적이다. 그것은 심지어 연대를 강조한다고 하는 단체/운동에 있어서도 그렇다. (여기서 고립적이라는 말은 '타자'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서로 다른 운동/정치 사이의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연대는, 개념과 이론 외부의 구체적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라거나 "자본주의적 구조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는 일반화된 명제는 여기에서 부정된다.

모든 정치와 운동은 분리되어 있다. 바디우의 말마따나 본질적으로 먼저 존재하는 것, 주어진 것은 차이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운동/정치는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여러 운동/정치와 운동/정치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재하고-경험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에 의해"


* 문제설정 전환

연대를 이러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게(끌어올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것에 연대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논의를 어떤 단체 안에서 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가 제일 처음 할 일은 협력과 연대를 구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연대요청'이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오는 것들은 '협력요청'일 경우가 많다.
협력에 관해 논의할 때는 여기에 협력하는 게 우리의 운동/정치에 어떤 의미(이익)를 가지는 일인지, 필요하고 가능한 일인지, 우리 운동/정치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을 힘을 합칠 수 있는지 검토하고 논의하면 된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으로 연대하느냐 연대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만약 있다면, 그럴 때 그 이야기는 그 연대가 이론적으로 정당하냐 혹은 반자본주의적이냐 하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동은 다른 그 운동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운동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등에 관한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끝

분리주의 메모를 여기에서 마친다.
이상, 이 글은 연대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나 특정한 이론 ― 태도들을 비판하고, 연대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히 한 후, 협력과 연대를 구분하며 연대에 덧씌워진 뉘앙스를 해체하고, 서로 다른 운동과 정치는 서로 다르게 운동한다는 논지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산만한 메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