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또 하나의 역사’ 『안티조선 운동사』 소개글인지 서평인지

공현 2011. 6. 10. 10:23
안티조선 운동사 - 10점
한윤형 지음/텍스트



‘또 하나의 역사’ 『안티조선 운동사』 소개글인지 서평인지


『안티조선 운동사』 서평을 쓰려고 개요를 간단하게 메모해보았다. 하지만 그 개요로 글을 다 쓰지 못하고, 몇 번이고 그 개요를 다시 쓰고 다시 썼다. 도무지 리뷰의 맥락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안티조선 운동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안티조선 운동사』에 일부 그 책임을 돌리고 싶다. 『안티조선 운동사』에는 읽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으면서 ‘독후감’에 이런 내용을 넣어야지, 하고 메모했던 많은 것들이 도무지 하나의 통일성과 논지를 가지고 정리되지 않는 상황과 씨름해야 했다. 읽은 이에게 단일한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의 소재를 제공해주고 새로운 생각들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그건 역사책에 있어서는 차라리 장점이 아닐까? 그래서 그냥,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몇몇 생각들이나 지점들 중에서 소개할 만한 것들 두엇을 골라서 소개하는 걸로 서평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안티조선 운동사』의 표지에 적혀 있는 부제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이다. 책을 처음에 집어 들었을 때는 너무 부제가 거창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더랬다. 15~20년 남짓한 사회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가지고 ‘또 하나의 역사’라니,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그 부제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다른 독자 분들도 그럴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단순히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사회운동에 대한 역사 정리에 그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 ~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안티조선 운동’ 관점에서의 조망이며 한윤형의 정치평론이다. 그리고 특히 노무현 정부(나는 사실 노무현 정부가 안티조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에 대한 한 안티조선 운동 참여자의 평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안티조선 운동이란 프리즘으로 바라본 지난 15년간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p.15. 여는 글.)


예를 들어서, 다음은 『안티조선 운동사』에서 노무현 지지층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이 ‘집단’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보려 한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 강준만의 ‘실명 비판’과 진중권의 ‘키보드워리어질’은, 심지어 《조선일보》와 전쟁을 벌이며 나온 노무현의 개혁 정치조차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광할 준비가 된 ‘집단’이 없었다면 무의미했다. 물론 강준만, 진중권, 노무현, 그리고 기타 여러 등장인물들은 이 ‘집단’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정교화하고, 더 큰 덩어리로 만든 공로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집단’의 열망에 주어진 ‘해답’으로 존재했을 뿐이지, 그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pp.248~249)


즉 한윤형 씨는 『안티조선 운동사』를 운동사인 동시에 안티조선 운동과 노무현 정부가 탄생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해석 또는 평론으로 위치 지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안티조선 운동의 자료를 모으고 기록한 ‘백서’나 사료 모음, 또는 역사기록 정도로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안티조선 운동사』는, 비록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저자 ― 한윤형 씨의 정치적 견해나 평론, 그리고 논설이 삽입되어 있긴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나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쓰려면 아마 어느 정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지 아주 그냥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한윤형 씨가 실제로 작업 과정에서 그런 부분 때문에 고생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결과물인 이 책 안에는 특별히 망설이거나 어려워 한 듯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도 한윤형 씨 자신이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였으며 안티조선 운동을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성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극우 헤게모니론을 근거로 《조선일보》를 기타 신문과 구별하는 논의가 여전히 유효한지는 더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장집 사건에서 《조선일보》의 ‘마지막 기동전’을 보았으며, 그 후에도《조선일보》의 과장․왜곡 보도의 수준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현격히 다른 수준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극우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실행자로 《조선일보》를 지목해 낼 수 있을지는 알수 없다.”(p.128)


어쩌면 나도 ‘조중동문’의 ‘기동전’의 피해자 중 하나라고 슬쩍 한 숟갈 얹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0년 7월 동아일보가 주도하고 조선일보,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이 가세했던 ‘아수나로-진보교육감 공격’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그들을 까기 위해서 아수나로의 일제고사/교원평가제 반대 행동 등에 관해서 ‘홍위병’ “청소년들이 날뛴다.”라는 식의 보도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심지어 1면까지 사용해주었고 조선일보도 2면과 사설 등에 자리를 내며 아수나로가 어떤 단체인지 소개까지 해주셨다.

아수나로는 주민직선 교육감들이 선출되기 이전부터 일제고사 반대 행동을 했고 교원평가제에 대해 (더 급진적으로, 점수화하는 평가가 아닌 학생들이 직접 학교운영, 교원인사 등에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일제고사 반대 행동 같은 경우도 2008년 10월이나 2009년 3월의 활동이 규모 면에서나 실천 방법(농성, 오답선언, 등교거부 등) 면에서나 가장 컸다. 그런 점들에 비추어 볼 때 그 보도는 다소 생뚱맞은 일이었다. 서울시 곽노현 교육감 등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7월 교육부 일제고사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최장집 사건 같은 데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것도 ‘극우 헤게모니’에 위협이 될 만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기동전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사』의 지적대로 과연 지금 시점에서 조선일보가 그러한 ‘극우 헤게모니’의 대표적 주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수나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게 동아일보였듯이, 오히려 동아일보나 문화일보 등이 그러한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미 언소주, 행언련 등 지금의 언론운동은 사실상 ‘조중동’ 내지는 ‘조중동문’ 등에 대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으면서 내게 가장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은 동아일보 이야기였다. 내가 운동을 시작한 게 2004~5년 무렵, 그리고 사회적인 여러 사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길게 잡아봐야 2002년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2000년 10월, 한겨레신문 정연주 논설위원의 손에서 탄생했던 “조중동”이라는 조어가 굳어진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동아일보는 높은 빈도로 조선일보보다 더 악의적인 보도를 해왔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조선/중앙보다 더 개혁적인 위치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좀 낯설게 들릴 수밖에 없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어보시라. 『안티조선 운동사』는 조선일보 이야기 뿐 아니라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이 어떤 역사를 거쳐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진영 논리를 넘어


“이런 논리에 다가서면, 여기에는 ‘우리 편은 우리 편이니까 옳고, 상대편은 상대편이니까 그르다’는 자폐적인 답밖에 남지 않는다.”(p.268)

“참여정부는 대단히 미심쩍은 논점을 손에 쥐고서 조중동과 분쟁을 일으켜 그들의 몰상식함을 이끌어 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를 반대한다면 이런 저열한 의사소통 방식을 넘어서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저열한 의사소통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소위 개혁 언론들은 참여정부가 그어 놓은 전선에 따라 별수없이, 혹은 자의에 의해, ‘조중동과의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이를테면 공정한 잣대로 쌍방을 평가하지 못하고 ‘패싸움’에 휘말린다는 인상을 주었던 셈이다. 그 결과 참여정부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더 ‘《조선일보》 비판’ 활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됐다.”(pp.361-362)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를 비판함으로써 한국 언론들에게 중론이나 여론을 관성적으로 대변하고 답습하는 것을 넘어 공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강제해야 했다.”(p.464)


『안티조선 운동사』가 반복해서 주문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운동이, 정치가, 언론이, 담론이, ‘진영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안티조선’은 공정성과 당파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조선일보가 취해오던 왜곡된 진영 논리를 넘어서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은 그런 문제의식을 과연 얼마나 견지했는가? 스스로가 조선일보식의 저급한 편향성, 저열한 의사소통 방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닌가? 때문에, ‘발전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안티조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언론운동이 ‘발전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또는 조중동)만 없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조선일보(또는 조중동)가 사라져야 한다.’가 되어야만 한다.

(‘조선일보=친일파’라는 공식을 이용해 안티조선이 대중화되던 시절을 서술하면서 한윤형 씨가 던지는 “운동은 어디까지 단순화될 수 있는 것일까?”(p.190)라는 질문에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한윤형이라는 저자를 좋아한다. 한윤형 씨의 장점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장점은 ‘공정하게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한윤형 씨의 글쓰기는 당파적이지만, 최소한의 공정성이라는 룰을 지키려고 애쓴다. 우군에게만 특별히 너그럽지도 않으며,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일도 없다. 당파성의 근거가 되는 기준도 명확한 편이다. 그때 당파성은 일종의 실용성이 되기도 한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특히 그런 한윤형 씨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책이다.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운동이기 때문에 좀 더 너그러워도 좋을 법하건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라는 말 자체도 안티조선 운동에서 등장했던 말(정확히는 유시민 씨가 쓴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작 이 말을 한 분이 또는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공정하게 편파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안티조선 운동사』를 놓고서 한윤형 씨 ― 10대 무렵부터 안티조선 운동에 빚을 진 어떤 한 사람은 ‘공정하게 편파적인’ 그 자세를 가능한 한 유지하고 있으면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