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영화 [방문자] - 누가 왜 내 방문을 두드리나? -'방문'과 '변화'-

공현 2008. 1. 31.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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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일 감독
- 상영시간 91분
- 2006년 11월 개봉


누가 왜 내 방문을 두드리나?

- '방문
'과 '변화' -



1 호준

  호준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정체된 인물이다. 비판은 있으나 힘이 없다는 인식. 무력감. 호준이 가장 힘이 넘치는 순간들에서,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싸움을 벌이고 택시 안에서 싸움을 벌일 때, 나는 오히려 그런 무력감을 느꼈다. 대학 동창들과 만나서 벌이는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호준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동창들처럼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세상에 적극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중고차를 팔아야 하는 시간강사의 열악한 경제 여건. 이혼. 이상의 좌절.
   “우리들이 믿었었던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들은 이제는 유행이 지난 이야기라고 해.”
 
(동물원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中)
  호준의 분노와 짜증은, 무력한 자기 자신과 거대한 이 체제를 동시에 향하고 있다.


  그러한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호준이 택하는 방식들은 참 단순하고 치졸하다. 체제를 이루는 요소인 동시에, 체제 자체는 될 수 없는 개개인들에게 시비를 거는 일을 통해 그는 자신이 그래도 그들과는 다르다는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영화관, 택시, 술집….
 
  그리고, 그는 성판매 여성(엔딩 크레딧을 보면 “섹시녀”로 이름 붙여진 -_-)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과 힘을 확인하려 든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지배적 체제에 편입하지 않는 듯하나, ‘사적인 영역’(?)에서는 성매매를 통해 지배구조에서 지배자의 위치에 서려는 호준의 시도는, “섹시녀”가 호준의 상처를 건드리면서 도중하차한다. 호준이 돈으로 ‘구매’한 “섹시녀”는, 그러나 호준의 책장을 들여다보고, 이혼한 가족의 사진을 봄으로써 호준의 상처를 건드리고 무력감을 자각하게 만들고 “섹시녀”의 위치를 벗어나며, 다음날 아침에는 옆집 주민으로 등장하여 호준을 당황하게 만든다. 성판매 여성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오직 성구매를 했을 때만 남성의 욕망에 봉사해야 한다는 구조를 뒤집었을 때, 호준(남성)은 당황을 느낀다.

  그후에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호준과 “섹시녀”의 관계 변화는 상징적인 것 같다. ① 성매매 관계에서의 ‘오빠’의 위치 - 반말 (사실 호준은 아무한테나 반말을 막한다. 좀 기분 나쁘다. -_-), ② 옆집 주민으로 만났을 때 호준의 “야 너…”하는 당황스러움, ③ 마지막 부분에서 경어를 쓰면서 같이 이불을 터는 모습. ②가 ①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면, ③은 영화 전반에 걸친 호준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 호준이 이혼한 가족들과 관련해서 보이는 과민한 반응이나 “곰 세 마리” 노래 등은 호준의 상처와 무력감이 특히 가족이나 성역할적 부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읽게 한다. 가족사진은 여러 차례 등장하고 호준이 바닥에 버려뒀던 가족사진을 다시 벽에 걸어두는 것도 하나의 상징처럼 나온다.
  한 가지 재밌는 부분은, 호준의 아이는 얼굴이 스크린에 등장하지만 호준의 전(前) 부인은 끝끝내 얼굴이 나오지 않고 목소리만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前 부인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호준이 완전히 그 상처와 화해하고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일까. 그러고 보면 <방문자> 전체에서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로만 나타난다. 어찌 보면 상당히 전통적인 재현 방식인데, 글쎄 <방문자>가 남성 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걸까? 여하간 <방문자>는 끊임없이 생략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의 영화이기 때문에 이혼의 이유라거나 가족에 대해 호준이 강하게 반응하는 이유 등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그와 같은 생략일 뿐일지도. 내 과한 독해인가?

 ** 이 글을 쓰기 전에 <방문자>에 대한 비평이랄까 소개랄까 감독 인터뷰까지 포함해서, 언론에 나간 글을 3편 정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글들 중 어디에도 “섹시녀”와 호준의 관계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일까?




2 계상

  <방문자>가 병역거부자 영화라며 국회에서 상영까지 하게 한 캐릭터, 계상. 확실히 계상과 호준 둘 모두에게 계상의 병역거부와 징역이라는 사건은 하나의 큰 계기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이 영화는 병역거부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계상에게 병역거부와 그로 인한 징역 선고 등은 일상 속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일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인 계상은 문전박대 당하고, 과외자리에서 잘리고, 호준에게 시달리고(?), 어머니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면서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분노를 강하게 표현하지 않는 캐릭터다. 그런 계상이 딱 한 번 강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해 설교하는 호준에게, 그러는 형은 뭐가 그리 잘났냐 식으로 외칠 때다. “형도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거예요?”라고 물을 때다. 계상이라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상처는 법정 변론에서 나온 베트남전 가해/피해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것도 있지만, 실제 영화 전반에 걸쳐 묘사되는 계상의 상처는 여호와의 증인이기에 받게 되는 차별과 멸시인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법정 진술에서만 등장하는 평면적이고 직접적인 진술이고, 영화 속에서 계상의 캐릭터는 거의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
또 한, 웬만해서는 시종일관 웃기만 하고 호준 때문에 화가 났을 때도 화를 내기보다는 묵묵히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던 계상이 그렇게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호준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중학교 친구 중에도 가정 전체가 여호와의 증인인 애가 있었는데, 걔도 이런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는 종교적 소수자라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비록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두 번째 작품 서브스토리로 주인공이 감옥 안에서 계상 같은 존재를 만나거든요. 후에 오태양 씨를 본 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심을 가졌어요. 제 세대는 당연히 군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태양 씨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서브스토리에서 빠져 아예 주인공이 된 거에요. 혼자 원룸에서 지내면서 불현듯 그 사람들이 방문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면 재미있는 스토리가 될 것 같았어요. 그런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서 1주일 만에 스토리가 쫙 그려지더라고요. 운명적인 작품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원래는 시나리오 쓰는데 3~4년 걸리거든요.”

  이렇게 말했다지만, 병역거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병역거부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계상이 병역거부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고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과정들을 모두 검은 생략으로 처리한 것은 이 영화가 병역거부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 종교적 소수자로서 (병역거부 문제도 포함해서) 부당한 차별이나 사회적 멸시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며 또 실제 여호와의 증인의 공동체나 운영방식, 생활방식이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고 저평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은 성소수자·청소년 등에 대해 차별적인 교리를 고수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만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깨어라》라거나 《파수대》를 몇 권만 가져다가 분석해보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호준과 계상 사이의 관계에서 퀴어(Queer) 영화적인 요소를 느낀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낀다.




3 ‘방문’

  <방문자>의 키워드는 ‘만남’이 아니라 ‘방문’이며 ‘변화’이다. ‘만남’은 상호적이지만 ‘방문’은 일방적이다. ‘만남’이 서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방문’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찾아간다. <방문자>에서 ‘방문’의 주체는 계상이며, ‘변화’하는 쪽은 호준이다. 약 90분짜리 영화에 걸쳐 계상은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 호준에게 “신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라”는 설교를 듣긴 하지만 이것이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계상의 마지막 법정 진술이 단지 종교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이, 그 “인간을 사랑하라”라는 호준의 말로 인한 계상의 작은 변화일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보지만 분명한 변화라고 내세우기는 조금 거시기하다. 변화의 단초라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랄까, 감독은 계상의 집에 호준이 찾아가서 있었던 일들과, 계상이 법정에 서는 장면 사이에 있는 검은 암전이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표현하는 부분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변화란 누구의 변화일까?

  여하간에 영화 전반에 걸쳐서 더 많이 분명하게 변화하는 쪽은 호준이다. 혼자 욕실에 벌거벗은 채 부끄러움과 추위와 고독 속에 갇혀 있던 호준을 꺼낸 것은 계상이고, 호준의 질척이는(?) 생활에 걸림돌이 되어주는 것도 계상이고, 병역거부를 통해서 실천하지 않고 무력감과 상처 속에 허우적대던 호준을 움직이는 것도 계상이다. 1에서 언급한 ‘섹시녀’와의 관계 변화를 비롯해서 가족과의 관계, 법정 밖에서의 토악질, 예전에는 오줌을 갈기던(냉소) 간첩이 무기를 묻었던 곳이라는 팻말을 파묻어 버리는(저항) 행동 등은 모두 호준의 변화를 드러내려고 애쓴 부분들이다.

  그런데 그 변화가 계상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계상이 처음에, 그러니까 욕실에 갇히기 이전 장면에서 호준의 집을 ‘방문’했던 목적은 호준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준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며 복음을 수용한 것 같지는 않다. 호준은 계상의 삶의 자세와 세상과의 부딪힘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른 변화의 방향을 모색한다. 그렇기에, <방문자>에서 ‘방문’은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지배적인 관계는 아니다.


  마지막에 영화는, 호준과 계상 사이의 ‘방문’을 상호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한다. 호준은 감옥 안의 계상에게 책을 넣어주고 면회를 가고 “이제는 내가 널 꺼내줄게”라고 한다. 여기서 꺼내준다는 말이 감옥에서 계상을 꺼내기 위해 병역거부에 대한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바로 앞의 “넣어준 책”과 연관시켜 이 대사를 읽는다면 호준이 계상에게 더 많은 세상에 대한 관점들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뭐, 그래도 나는 만약 이 영화에 뒷 이야기가 더 있다면, 나는 계상이 호준의 의도대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호준이 계상의 의도대로 변화하진 않은 것처럼. -_-)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영화 <방문자>를 보면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생각났다. 그 음율 말고,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는 거기에 딸려 있는 말이.

  내 삶에 결정적인 ‘방문자’가 있나 반추해보면, 그건 컴퓨터와 인터넷 회선과 신문과 책과 휴대전화를 통해 온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권운동이라는 녀석이라거나, 시라는 녀석 말이다. (지금 당장으로 보면 어쩌면 상호적인 중요한 ‘방문자’가 하나 있긴 한데, 삶 전반에 걸쳐 어떤 변화가 되어줄지는 두고 봐야겠지.)

  운동이라는 것에서만 보면 지금은 내가 문을 두드리는 역할을 맡고 있긴 한데, 글쎄. 어느 정도 범위에서의 두드림이 적당할까? 게다가 다른 사람은, 내가 바라는대로 변화해주는 그런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방문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문자’란 참 피곤한 자리다. 호준의 온갖 생떼를 감수해야 하는, 그리고 전도는 성공하지도 못한 계상처럼. 하지만 ‘방문자’는 나름 보람찬 자리다.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다른 누군가가 또 나를 ‘방문’해주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