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버림 받았단 착각을 못 버린 사람의 미련

공현 2012. 9. 26. 11:46




버림 받았단 착각을 못 버린 사람의 미련

 


   업으로 삼고 있는 청소년운동의 성격상,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여러 사람들이 청소년일 때 당사자로서 청소년운동에 함께하다가 나이를 먹고 청소년이 아니게 되면서 운동을 떠났다. 어떤 이들은 내게 또는 운동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더 많은 이들은 인사도 없이. 내가 원체 사람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 않는 성격이라서, 그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단 식의 뻥은 차마 못 치겠다. 그러나 나로선 이례적이게도 많은 사람들, 수십명 단위로 헤아려야 할 만큼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물론 안다. 알고 있다. 그 사람들 중 청소년운동이나 나를 버린사람은 아마 없으리란 것을. 그들은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고, 일부는 운동에 실망하거나 상처받고 떠났을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버림받은 듯한 서러움에 몸을 태우곤 한다. 버린 이는 없는데 버림받은 사람만 있다. 요구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에게서 과거에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의 모습을 겹쳐보곤 한다. 인권캠프에 온 청소년에게서, 학내투쟁을 하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에게서, 거리에서 홍보물을 받고 가입한 열의가 넘치는 회원에게서, 과거에 그와 비슷하게 찾아오고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지금 이 학교의 서명운동 계획을 이야기하며 나는 동시에 두발자유 1인시위를 했던 어느 고등학생과, 학칙 개정을 위해 설문조사를 했던 어느 중학생 학생회장과 얘기했던 과거의 메아리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몰래 감상적인 기분에 잠긴다. 감상의 상이 상처를 뜻한단 걸 알고 있는가?


  감옥에서 시간이 남는 동안 나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전보다 더 많이 말이다. 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들, 또는 그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들, 내 소식을 듣고 그 사람들이 느꼈을 것들, 학생인권조례나 최근 운동 소식을 들으며 했을 생각들. 이 글을 보고 누군가 그런 이야길 전해주면 좋으련만.

  

  최근엔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또 몇몇 시들을 생각하다가 한 사람이 다시 떠올랐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을 같이 했던 이슬이란 사람이다. 단체에서 같이 소풍인가를 갔다가, 잔디깎기에 잘린 풀 내음을 맡으며 내가 피 냄새 같다라고 하자, 이슬이 자긴 별로 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 좀 심통이 난 내가 상상력이 부족한 거라고 무례하게(!) 말했는데, 이슬은 그럼 넌 ~~생각한 적이 있어?’ 라고 대꾸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 꽤 충격적이고 신성한 연상이고 표현이라고 느꼈던 건 분명하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안 느낀다고 해서 타박을 준 나의 어리석음을 단번에 깨닫게 해줄 만큼. 부끄러운 나의 흑역사이고 다시금 사과하고 싶은 과오이다. 여하간 그래서 지금도 시를 쓰려 할 때면 이슬이 생각난다. 밖에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만들기가 한창일 텐데, 소식 들었을까.


   이슬 말고도, 찰기, 스칼리, 루돌프, 주댕이, 빅뱅, 찬연, 바라나기나열하기 힘들어서 차마 더 못 쓸, 아니면 내 마음의 맺힌 것 때문에 이름을 쉽게 못 부를 많은 사람들,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기도 했고 상처를 주기도 했던(연락하고 지냈던 사람들은 뺐다.). 아직까지 짧은 소식이라도 받아보길 기대하고, 청소년운동에 대해 관심 가지고 있을 걸 바라는 내가 어리석은 걸까. 그저 내 미련인 걸까. 감옥에선 참, 미련도 생각도 많아지나 보다. 그래, 그렇게 감옥 탓으로 돌리며, 마무리 하자. 얘기할수록 미련만 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