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눈물은 핑하고 돈다

눈물은 핑하고 돈다 눈물은 "핑-"하고 돈다 왼이마가 찌릿하고 떨려오면서 "핑-"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눈물이 눈동자를 돌고 있는 것 "쿵"처럼 거창하지 않으며 "우직"하고 갈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핑-"하고 남은 여운이 보이지 않는 눈물로 흐르는 것이다 운동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그냥 사는 거였다고 말하는 그의 대답을 읽었을 때 "핑-" 눈물이 돌았다 그 높은 곳에 있는 그는 몇 번을 이를 "악" 물고 "핑-"하는 소리를 참았을까 돌고 도는 눈물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설픈꿈 2011.06.30

시 -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잠든 머리가 기울어진 순간에는 왼어깨가 알수없이 간지럽곤 하였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당신의 아직 흘리지 않은 눈물이 어깨 위를 두드리며 간지럽히곤 뭉친 살덩이를 건드리며 스쳐갔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었다 눈을 감아도 고개를 돌려도 간지러운 어깨에 헛깨비처럼 당신의 숨결이 울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왼쪽에 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언제나 오른쪽을 고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설픈꿈 2011.05.09

시 - 이름 없는 증오, 까닭없는 얼굴

이름 없는 증오, 까닭없는 얼굴 굳어가는 혈관에 소주를 맥주를 채워넣던 친구가 갑자기 물어본다 네 증오의 색깔은 무엇이냐고 나는 내심 당황하지만 태연히 아마도 피처럼 검붉지 않겠느냐고 생각이 나는 대로 말한다 돌아오는 길에 묘한 정적이 머리 속에 들려올 즈음 깨닫는다 내 증오에는 이름이 없다는 걸 그러므로 색깔도 없다는 걸 동시에 너의 얼굴이 까닭없이 떠오르고 내가 미끄러지는 이 대로변엔 시작이 없다 동작이 없다 다만 그저 요컨대 예컨대 달려가던 길고양이들만 우연히 차마 이름을 줄 수 없는 내 증오와 아무 까닭도 없이 눈을 뜨고 있는 네 얼굴

어설픈꿈 2011.04.26

비어 있는 책꽂이로부터 어떤 친구를 떠올리며

비어 있는 책꽂이로부터 어떤 친구를 떠올리며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넉넉잡아 50권은 되는 일본 라이트노벨들이 꽂혀 있지만,(현재 사는 서울 집과 대구 부모 집 포함해서...) 과거 내가 모은 라이트노벨은 거의 80-90권 정도에 이르렀었다. 내 라이트노벨 30-40권을 먹고 하늘나라로 튀어버린 녀석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다. 결국 지금 와서 어느 라이트노벨(예를 들면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라거나...)이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 때에도, 혹시 그 책이 그 녀석에게 준 그 30여권들 중에 있었다면, 나는 책장에서 가볍게 그 책을 뽑아 화장실에 가거나 잠이 안 오는 어느 명절 밤을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랑 같은 고등학교 만화동아리에 있던, 나보다 1학년 늦게 들어온 ..

어설픈꿈 2010.09.26

시 - 자화상

자화상 몇살부터일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시청을 지나 서울역을 지나 용산을 지나 신림을 지나는 어느 버스 안에서 밤빛 유리창에 비스듬히 비치는 빗방울 돋아난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삐죽빼죽 알록달록 잘만 그리던 우리의 얼굴이 언제부터 백지 앞에 막막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건지 눈을 믿지 못하게 된 건지 손을 믿지 못하게 된 건지 그리지 못할만큼 추하게 되어버린 건지, 우리의 얼굴이 우리가 서로를 탓하는 사이 눈에서 뺨에서 귀에서 코에서 입에서 여드름에서 흉터에서 돋아난 빗방울들이 빗겨 흐른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수는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설픈꿈 2010.09.02

시 - 옷에게는 고향이 없다

옷에게는 고향이 없다 삐그덕,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이불 위에 던진다, 아무렇게나 우리가 헤집고 다닌 먼지들 우리가 그려온 몸짓의 흔적들 그 모든 것이 주름진 옷으로 내 곁에 눕는다 나처럼 팔과 다리와 가슴과 배와 구멍을 가진 옷은 이마를 찡그리며 더 많은 주름을 삐그덕 찡그리며 내게 말을 건다, 아무렇게나 주름 한 점 없던 날은 없다 그리던 하늘이 높푸른 고향은 없다 당신은 태어날 적 흘렸던 눈물과 피범벅이 된 머리통 주름투성이 미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우리에겐 고향따윈 없다는 말과 머무는 곳 어디든 고향이란 말은 닮은 듯하면서도 사뭇 다르지 않은가 나는 눈가에 배꼽에, 주름을 어루만진다 뱃속에서도 소리가 난다, 삐그덕 던져진 옷은 다시 말을 걸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다시 주름투성이 ..

어설픈꿈 2010.07.18

시 - 나의 분노

나의 분노 나의 분노에는 답이 없다 구부러진 골목길 아무런 낙서조차 없는 벽 앞에 선 갈색 고양이처럼 나의 분노에는 꿈이 없다 더러워진 일기장을 팔랑이다 알람시계를 맞추고 곯아떨어진 자동입출금기보다도 잠이 부족한 알바생의 얼굴처럼 나의 분노에는 이름이 없다 희미한 눈썹의 꿈틀거림 더부룩한 뱃속의 뒤틀림 낙상한 적도 없이 눈두덩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던 눈물방울처럼 나에게는 분노가 없다 내 손으로 부숴버린 휴대전화와 슬픔으로 부어있는 몸뚱아리 말고는 나에게는 분노가 없다

어설픈꿈 2010.05.05

시 - 도시의 생활

도시의 생활 도심에서 숨쉬기란 얼마나 모호한가 먹는 일도 걷는 일도 앉는 일도 구르는 일도 한발짝 떨어져서 흘러가는 일들 도심에서 말하기란 또 얼마나 뻑뻑한가 걸레처럼 쥐어짜는 한마디 두마디도 건조한 피로로만 돌아온다 서걱거리는 나날들이 한줌씩 퇴적된다 끝에서는 검은 아스팔트가 솟아오른 벽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 걸음만큼이나

어설픈꿈 2010.03.16

시 -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모든 것이, 잃은 것 같았다 눈을 감는 것이 괴로웠다 눈을 뜨는 것은 외로웠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려웠다 문에 기대어 있었다 벽이 아닌 신문지들처럼 넘어졌다 아니 글자조차 잃고서 그냥 어느 종이조각처럼 휴지처럼 넘어지고 있다 넘어진 종이조각을 주워 말을 거는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글자를 보여주지 않겠다 테두리만 남은 점선들을 쏟아놓지 않겠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지하로 전철이 달리는 것이 지상으로 전철이 달리는 것이 네가 없는 것이 아무것도 갈아탈 수 없었다 -------------------------------------------------------------- 그럴듯한데... 싶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직설적이기 때문일까? 호흡이 짧다는..

어설픈꿈 2010.01.04

시 - 어느 저녁 무렵

어느 저녁 무렵 불그스레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오면 힘이 빠진 사람은 계단가나 길바닥에 주저앉아도 좋다. 해지기 얼마 전 공원가, 머리칼 없이 뽀얀 두 살배기가 젊은 엄마를 보채며 앙앙대고 있으니까, 벤치에 앉은 양복이 펴든 신문뭉치엔 빽빽한 활자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갈아놓고 있으니까, 검푸른 잠자린 물결에 구겨지는 연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으니까, 그 건너엔, 호수와 백조보트와 다리와 물결에 흔들리며 저무는 텅 빈 하늘이 침묵하니까 힘이 빠진 사람들 불야성의 도시에 등을 보인 사람들은 공원을 거쳐, 저녁을 거쳐, 다시 불빛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해돋이와 해거름 사이에 유리파편 같은 가래를 목이 따갑도록 삼켜 보고는 하는 사람들은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 ------------------------------..

어설픈꿈 200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