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142

시 -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 이름모를 벌레가 그의 엉덩이로 기어온다 손가락이 시려운 그와 키스하는 아파트 옆 공원 벤치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가 실눈 뜬 내게로 기어온다 나는 그의 허리를 간질이며 조심스레 슬쩍 인기척을 낸다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는 놀라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고 나 벌레가 된다 내 등을 쓰다듬는 그의 더듬이에 이름을 숨긴 벌레가 된다 알 것 같은 이름을 굳이 숨긴 벌레 셋이 넷이 다섯이 조용히 만나고 있는데 나는 숨을 죽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을 듯한 밤이면 우리는 벌레가 되어 서로 더듬이를 비빌 것이다

어설픈꿈 2008.03.18

수필 - 이웃 거미 씨

이웃 거미 씨 (2006.08.) 내 기숙사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거미 씨 세 명이 집을 지어놨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이웃들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거미집 일부를 건드려서 부숴버리기도 했다. 주로 벽 쪽에 붙어 있는 거미1(편의상의 이름) 씨의 집을 부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와 거미1 씨 둘 다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한두 번 그러고 난 후에는 거미1 씨의 집을 파악하고 움직이다가 거미2 씨나 거미3 씨의 집을 부순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은 그쪽에서 타협을 보았는지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에 안 닿는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 만일 거미 씨들이 없어지기 전에 내 방에 올 일이 있다면, 그 집이 어떻게 절묘한 대각선으로 배치되어서 내 통로를 만들어 주고 있는지 관찰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흔히 ..

어설픈꿈 2008.03.17

시 - 하얀 털을 따라가는

하얀 털을 따라가는 집으로 오는 길에 꽉 조여진 샌달끈을 풀고서 어두워진 오르막을 올라가면 까매진 아스팔트, 발자국이 없는 가로등 불빛이 휘어진 모퉁이에 점점이 흩어진 하얀 털,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 긁힌 자국 같은 털을 따라 눈물의 낙차가 변해온 시간만큼 구겨진 공기 속을 헤집으면 전봇대 밑에 소심하게 찢어진 쓰레기봉투 수거되지 못한 오래된 쓰레기봉투 푯말 하나 없이 집으로 가는 밤 집은 없고 찢어진 봉투만 있는 밤 하얀 털을 따라가는, 까만 밤 ------------------------------------------ 숨을 가다듬고 정말 아주 느린 걸음으로 명상을 실천할 때, 집에 오는 밤길 검은 아스팔트 위에 흰 털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감정, 기억, 털갈이의 흔적. 그걸 본 순간 집..

어설픈꿈 2008.03.17

시 -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증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남자 냄비처럼 파여가는 작은 방에는 달빛이 떨어지는 메마른 소리 당신이 누워있던 닳은 자리엔 우울처럼 고여있는 먼지덩어리 달의 바다엔 물기가 없고 고이는 달빛에도 눈물은 없고 가열해도 가열해도 끓지 않는 남자 검은 바다에 고여있는 먼지 같은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물처럼은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어설픈꿈 2008.03.17

시 - 이제 나는

이제 나는 나의 눈빛은 그를 묶어두기엔 충분히 무거웠지만 잠시 거리를 보는 사이에 떠난 그를 쫓아가기엔 너무나 무거웠네 뱃속부터 그림자처럼 떨려오는 몸뚱아릴 어느 전철 파란 의자에 풀썩 던져두고 시청역을 지날 때면 그의 이름을 기대하고 어느 호선 어느 종점 어느 역에 기대 서서 꼭 지구가 도는 만큼 움직이며 그를 찾아 움직이고 움직이고 움직이며 그저께 어느 전철에 두고 내려 차량기지로 떨어져간 마음들을 줍네 한결 가벼워져 돌아온 나의 마음들 이제 나는 등 뒤 거리에서 그가 앞서오길 기다릴 수 있네 -------------------------------------------------------- 이 시의 첫 구절은 지금을 표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시는 전체적으로 과거를 보고 있다. 이제 나는 내가 ..

어설픈꿈 2008.02.29

시 -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1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시계의 눈금은 열둘밖에 없어서 때론 수십년이 지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게 오랜만에 눈을 뜨게 되어도 시간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감촉은 여전히 서늘하고 아릿하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다 나의 발치에 꿈이 수백개 쌓이는 동안에도 벽에 핀 곰팡이만큼밖에 삶들은 흐르지 않는다 2 그래 무엇이 날 깨웠나 저기를 살피려다 잊었던 숨을 들이쉬면 깨닫는 건 옷자락에 묻어 있는 투명한 냄새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 것이고 나는 또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할 것이고 아무데도 없는 분노를 웅얼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또 불현듯 눈을 뜰 것이다 옷자락에 배어 있는 건 투명한 슬픔의 냄새뿐이기 때문에 눈을 감은..

어설픈꿈 2008.02.22

수필 -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얼마 남지 않은 때이다. 내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동창회에서 1만 원씩을 내라고 하고 있다. 동창회 가입 명목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 돈을 내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며, 지금은 한 발 양보해서 돈을 내더라도 적어도 그 돈을 냄으로 인해 내 이름이 동창회 명부에 오르는 일만은 거부하겠노라고 굳게, 굳게 다짐하고 있다. 공동체의식이 부족하다든가 혼자 튄다든가 모교를 우습게 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나 나는 나의 어설픈 생활 원칙과 알량한 기분을 위해서 그 돈을 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놈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업무상의 경우를 제외하면 내가 사람을 사귀는 기준은 어디..

어설픈꿈 2008.02.17

횡설수설, 고등학교를 사는 방식

횡설수설, 고등학교를 사는 방식 나 자신으로 알차게 살기 위해 우리는 주관시간(단적으로 말해서 시간감각)과 객관시간(단적으로 말해서 시계), 두 가지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주관시관과 객관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대개 서로 상대적으로 느껴진다. “주관시간은 빠르게, 객관시간은 느리게!”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굳이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소리다. 후회를 줄이도록 노력하란 소리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알차게 살지 못한다. 그 주범은 유예, 곧 미루는 것이다. 피씨방에서 와우를 하려고 공부를 뒤로 미루었다가 시험 망치고 후회하지 말라. 지긋지긋한 공부하겠답시고 피씨방 가는 걸 미루었다가 나중에 재미없었다고 ..

어설픈꿈 2008.02.08

수필 - 예외와 반례 사이

예외와 반례 사이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내 자신이 우리 주변의 여러 일들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도 대략 실존감각의 문제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또 그렇게까지 평범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1988년 4월 11일 생임에도 주민등록에는 1988년 2월 25일로 신고가 되어있다. 학교를 일찍 들어가기 위해서 같은 이유가 아니다. 나 태어난 날 기분 좋아서 약주 몇 병(?) 하신 할아버지께서 음력 날짜로 올렸다고 한다. 생일을 앞당겨 신고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드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의도성 같은 것도 없..

어설픈꿈 2008.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