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 4. 26. 01:26

‘아동학대’ 문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으로

공현


슬 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해다. 세월호 침몰로 세 자릿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청소년이다. 또한 그 바로 전에는 한 고등학교에서 폭행에 의해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두 차례, 며칠 간격으로 일어났다. 또 그 직전에는 가정에서의 학대로 인해 청소년이 사망한 사건이 신문 기사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에는 고등학생이 체벌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세상을 뜬 일도 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좇아다니기 바쁜, 우울한 상황이다.

워 낙 침울하고도 충격적이었던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마치 한참 전 일 같지만, 바로 1~2주 전까지만 해도 여러 언론은 “○○ 계모” 등의 제목을 달고 아동학대치사 사건과 그 재판을 보도한 기사들로 전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너무 가볍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시위도 등장했다. 사람들의 분노 자체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슈가 된 사건의 가해자를 벌하는 방법과는 별개로, ‘아동학대’ 문제를 예방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가해자가 특별히 못된 놈이라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결론에 멈춰버린다면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구조와 맥락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공식 보고된 아동학대는 6796건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학대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 ‘학대’ 기준에 잡히지 않은 다른 숱한 가정 안에서의 폭력과 인권침해도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보호자인 사람들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과연 자신들은 ‘학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달라고 하고 싶다.


청소년은 부모의 ‘것’이라는 전제


이미 방송을 통해 꽤 널리 알려졌지만, ‘아동학대’의 다수는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 학대의 가해자가 ‘계부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할 뿐이다. 언론 보도 역시 재혼해서 또는 입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굳이 “계모”라는 걸 강조하는 것인지, 참 씁쓸한 행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부모’의 학대에 더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죽였기에 이리도 반응이 뜨거운 것.”(트위터 아이디 @Ramirezi_ 전(前) 진보신당 청소년위원장)이라고.

물 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처럼 되어 있는 것과 ‘아동학대’가 가능한 가정 안의 권력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잔인하고 특출난 사례가 아니면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의 인권침해에 관대하다. ‘아동학대’ 사건의 배경에는 가정 안에서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자기 것’이냐 ‘남의 것’이냐가 아니라, 부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제 자체가 문제이다. 어느 부모가 ‘나쁜 주인’인 것만을 탓하지, 부모가 ‘주인’이 되는 상황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아동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낳는 조건들을 뿌리 뽑아야

사 정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동학대’라는 말보다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Children)’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학대’라는 표현은 마치 정도가 아주 심한 것이나 악의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정도의 문제이거나 특별히 악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며, 신체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사랑의 매는 폭력이 아니다.” 같은 말을 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아동학대치사 사건의 가해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이 둘이 종종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 환경이야말로 ‘학대’를 허용해주는 든든한 ‘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유엔 연구(The United Nations Study on Violence against Children: A/61/299)」(2006)는 서두에서부터 “아동에 대한 폭력이 ‘전통’ 또는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들로부터 정당화되어 일어나는 것을 중단”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위 사진[사진 설명] 유럽평의회 체벌금지 캠페인 포스터

“내 아이인데 무슨 상관이냐.”, “남의 집안 일이니 신경 꺼라.”라는 식의 태도. 자식 양육은 친권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가치관. 그리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권자에 의해 삶과 권리를 규제당해도 된다는 생각. 특히나, 그 바탕에 좋은 뜻이나 애정이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 청소년들은 ‘평등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 이런 것들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양육 방식은 친권자의 재량이라고 쉬쉬할 것이 아니고, 모든 체벌을 비롯한 폭력적인 양육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금지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직하고 비폭력적인 관계 맺기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공부 잘 시키는 우등생을 만드는 부모 되기에 대한 책은 많지만 정작 비폭력적이고 인권적인 부모 되기, 부모 자식간 관계 맺기에 대한 논의는 빈약한 곳이다.

올 해 하반기에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아동학대의 정의를 형법상 폭행이나 상해죄 대상 전반까지 포함함으로써 사실상 가정체벌금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정부나 사법부가 이를 그렇게 해석해 줄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친권자의 ‘징계권’을 들어 사회 상규상 허용될 만한 수준의 체벌은 정당행위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울만 해도 서울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 의해 가정체벌이 금지되었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역시 일부 명문화되었으나, 이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진지한 논의와 과정을 통해서 가정 체벌금지를 선언하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부터 출발해보면 어떨까.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제도이자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집을 나와서 ‘어쩔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같이 활동하는 청소년활동가들 중에는 의외로 가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기간 준비까지 해서 가출을 감행한다. 직간접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타이든, 폭언이든, 감금이나 협박이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대개 그들의 편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들은 대개 그들을 친권자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낸다. 폭력을 당한다고 호소를 해도 경찰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집 나온 청소년은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경찰의 의무인 것처럼. 하긴 경찰 입장에선 아주 틀린 일처리도 아니다. 민법에 따르면 친권자에게는 ‘거소지정권’이라는 것이 있고, 친권 상실이 되지 않는 한 친권자에게는 청소년이 있을 곳을 지정할 권리가 있다.

가출 등의 적극적인 탈출과 저항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가출한 청소년을 잡아가지 않더라도, 어쨌건 집을 나가서 혼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이 살아야 하며 버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청소년들이 놓인 처지인 것이다. 친권자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친권자가 폭력을 가하든 어떻든 간에 같이 살아야만 하는 현실. 이판사판으로 혼자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왔다가는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출’이 사회경제적 하층 가정에서 많은 것은 어차피 잃을 것이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 동학대’에 대처하는 제3자들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당장 폭력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가해자와 떼어놓고 싶어도 그 뒤에 청소년의 삶을 충분히 지원하고 책임질 만한 자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으로 보나, 법제도적 측면에서 보나, 친권자(특히 친부모)에게서 청소년을 떼어놓는 일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게 가정을 깼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마저 있다.

다행히도 반복되는 사건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으로 새로 제정된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학대’를 인지하면 바로 임시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기관이나 예산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가정에서의 폭력을 더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집 밖으로 나와서도 ‘어쩔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삶을 의존하는 선택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가정을 넘어선 공동체이든, 임시 주거와 생활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든, 복지제도와 적절한 노동 시스템이든.

나는, 자신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폭행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않을 권리는 인권이자 주거권의 일종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적 인권체계 역시 가족을 보호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훨씬 강하다. UN아동권리협약은 “부모나 현지관습에 의한 확대가족, 공동체 구성원, 후견인 등 법적 보호자들이 아동의 능력과 발달정도에 맞게 지도하고 감독할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이 이러한 권리(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부모나 후견인이 아동의 능력 발달에 맞는 방식으로 아동을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등의 조항을 통해 부모․보호자․가족의 권한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제도나 친권자의 권한 등에 근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은 현행의 국제적 인권 기준조차도 바꿔야 한다. 가정·가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하나의 제도이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와 인권침해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족제도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의 ‘청소년에 대한 폭력’ 문제에 대처해가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90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24일 11:52:5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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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6. 28. 10:58



격월간 사람에서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 쓴 원고를 수정하여 다시 싣고 싶다고 해서 수정한 거예용.





패륜적 기본소득

공현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 노동 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회구성원들 개개인에게 균등하게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사회가 균등하게,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개개인의 계좌에 매달 정부가 30~50만원 정도의 생계비를 입금해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거나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제도이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며 토론하기 위해 “기본소득과 장애인”, “기본소득과 여성”, “기본소득과 청소년” 등의 주제로 연속적으로 토론회를 열고 있다. 이 글은 6월 1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준비해서 연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서 발제한 원고를 고쳐쓴 것이다.


가정에서의 청소년의 지위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 아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제도로 학교와 가정을 꼽을 수 있다.(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학원’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에 비해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잘 공론화되지 않는다. 이는 학교가 제도화된 공적 공간이며 집단적, 조직적 제도인 반면 가정은 사적 공간,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체벌과 가정에서의 체벌, 학교에서의 종교 강요와 가정에서의 종교 강요 등을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최근에 전교조 교사들이 정치활동을 이유로 대량 해직을 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의 정치적 자유는 학생들의 미성숙을 이유로 문제가 되지만 아무도 부모나 다른 가족의 정치활동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법 제도부터 보자. 민법에는 친권의 효력으로 친권자가 청소년을 보호, 교양할 권리의무(913조), 청소년의 거주지를 지정할 권리(914조), 징계할 권리(915조), 재산 관리권(916조) 등을 명시하고 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부모, 후견인 등의 친권자가 정하는 곳에서만 살아야 하고, 친권자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친권자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이나 용돈 끊기, 외출금지 등의 징계를 당할 수 있으며, 재산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개정이 되긴 했는데, 민법의 친법 관련 조항에는 “자식은 친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단지 법 규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문제이다. 극단적인 예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성적이 잘 안 나온다는 이유로 친권자에게 체벌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가정에서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거나 강압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개인적인 다이어리나 휴대전화 기록 등을 친권자가 함부로 보고 이를 근거로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일, 위치추적 등은 ‘부모의 사랑과 걱정’으로 정당화된다.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할 것인가,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 학원을 갈 것인가 등의 문제도 거의 다 친권자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결정을 하게 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활동가들은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반대와 탄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청소년 자신의 자발성이 없이 100% 전적으로 친권자의 뜻만을 관철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친권자 개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처우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소년의 삶에 대해 친권자가 가지는 지배력은 상당히 강력하고, 그 지배력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은 대부분이 친권자들의 성향에 맡겨져 있다. 제도적․문화적 조건만으로 봤을 때는 청소년들은 ‘친권자의 소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왔다. 아나키즘에서는 근대 사회가 “아동을 부모의 부속물로 바라볼 뿐, 아동 역시 자율적 존재로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어 이야기한다. 꽤 유명한 아나키스트인 바쿠닌 또한 “아동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에 소속된 사회적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아나키즘과 청소년 해방」. 마크 시버스타인 Marc Siverstein 지음.) 페미니즘 쪽에서도 남성 가부장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에 더해서 아동에 대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논의들이 있으며, 우에노 치즈코 또한 세대간의 지배 종료를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제안했던 적이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러한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는 많은 부분 경제적인 종속성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말 안 들어? 그럼 용돈 없어!”, “내 말 듣기 싫으면 나가. 여기가 니 집이냐? 니가 입는 옷 먹는 거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용돈 뿐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친권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친권자가 사용할 수 있는 압박의 수단이란 무궁무진하다.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등 한국 특유의 높은 보육․교육비 때문에 (좀 넓게 잡은) 중산층 이상의 친권자들이 가지는 투자의식과 주도권 등도 크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정 안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청소년 또한 가정의 경제력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어느 정도 협상력과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친권자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보다 독립적이고 덜 의존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미래에 자신들에게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돌려주기를 바라는 친권자들에게는 투자의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노인 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됨에 따라 청소년을 채찍질해서 사회 상층에 쑤셔 넣을 동기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다.
  친권자들도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게 되니까 가정 안에서 경제력의 부담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돈이란 같은 액수더라도 어느 정도 있는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더 효용이 큰 법이다. 가정 안에서 가지는 경제력의 비율이 0에서 10이 되는 것은 발언권이나 협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기본소득 모델에서는 소득이 많은 친권자들은 세금으로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내게 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좀 잘 사는 가정 안에서는 경제력의 분배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차하면 가출할 수 있다는 것도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양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출은 자신이 원하는 주거를 요구하는 일종의 투쟁이나 보이콧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가출을 해도 주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가출의 리스크가 컸다. 이 리스크는 가출 후에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막막함과 정해진 레일에서 삐끗하기라도 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출의 리스크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최저생계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니 가출 후에도 청소년들이 독립적 생활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서 기본소득의 도입은 노동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해 죽어라 스펙을 쌓아야 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는 상황을 개선하게 될 것이며, 가정과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며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훨씬 작아지게 만들어준다. 여차하면 파업이든 태업이든 할 수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본소득은 가출 등 가족의 틀을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안전망이 되면서 청소년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의 독립 시기가 빨라지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지금 주로 청소년들, 그러니까 0~19, 20세 정도까지의 ‘미성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권자의 경제적 지배력이라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생계에 필요한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계속 돈을 모아서 주거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공동으로 생활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학 진학의 보편화에 청년실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점점 늦어지고 있는 독립이 앞당겨진다는 것은 10대, 20대 전반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더 이상 기존의 부모-자식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족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친권자 말 잘 듣고 나중에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효도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덜어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살던 관계가 좀 더 독립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정 안팎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정에서의 권력관계들을 공론화하면서 변화시키는 청소년들의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윤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실로 ‘패륜적’이다.


문화적 어려움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낙관할 수만은 없다. 청소년들의 가정에서의 지위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문화적인 문제나 여러 제도적인 문제들에 얽혀 있다. 민법이나 노동법 같은 데부터 넓게 본다면 교육제도나 선거연령, 사회적 인식 등까지도 모두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삶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달라지면 상층 구조는 다소 오차가 있더라도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낙관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 기본소득 도입 자체에서부터 사회적 인식과 문화적 요인들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 청소년들이 세뱃돈 압수당하듯이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친권자들에게 압수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몇몇 장애인 시설들이 보조금 더 타내려고 장애인들을 데려와서 보조금을 갈취하듯이, 아이 1명을 더 낳으면 그만큼 기본소득을 더 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는 친권자들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면 학생간 폭력에서 ‘삥’을 뜯는 규모가 커지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괴 등의 범죄가 증가하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 도입 초기에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판단능력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명히 청소년들은 (사실은 20, 30대들도 좀 해당) 경제적 주체가 되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안 좋은 쪽으로 발휘한다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나 명품 소비 문화 등에 소득을 다 쓸 수도 있다. 지금도 빈곤층 가정의 청소년에서부터 이런 명품 소비, 신제품 소비 등의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독립에 기여하기보다는 명품이나 10대 마케팅에 주력하는 기업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다면, 친권자에게 손을 벌려서 그런 소비를 하는 것보다는 낫겠으나, 최선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문화적 변화에 더해 어떻게 경제적 주체로서 소비하는 것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을 교육할지, 이러한 소비 문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계획해야 할 문제이다.


가능성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액수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지만,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빈곤하고 더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효용이 있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가정/가족 단위로만 묶여서 생각되어왔고 독립된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거나 보장받은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기본소득 도입의 이해당사자 중에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그 자체로 청소년들을 해방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청소년들이 친권자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금의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패륜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중 하나일 수는 있다.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은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청소년들의 삶이나 교육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과정 자체, 그리고 기본소득에서 청소년들(0세~19세 정도)이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난이도 높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과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역시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운동과 제도는 최소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전까지는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던 그런 새로운 사회로 가는 가능성을 말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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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ma

    밀도 높은 글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2010.06.29 03:39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8. 1. 10. 12:41

[내 말 좀 들어봐]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소년 따이루, 자유를 찾아 집을 나오다

따이루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온 그날

난 2006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왔다. 집에서는 '어린 것이 뭘 아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빨갱이들한테 휘둘리지 말고 학교나 열심히 다녀라, 쪽 팔린다' 이런 반응이었다. 가족들은 몇 달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몇 개월이 지나도 애가 점점 더 빨개지는 것 같고 머리만 커지는 것 같으니깐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금시간이 생기고, 컴퓨터를 할 때마다 감시를 받고, 통화 내역도 조회하고, 주변 친구나 활동가들 연락처를 여기저기서 모아서 연락망까지도 은밀히 만들었다. 난 이걸 블랙리스트라고 부른다. 학교에 전화해서 내 학교생활과 친구에 대해 알아내는 건 기본이었다. 집이랑 학교가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해 통화하는 것도 물론이구. 너무 화가 났다. 나를 통제하고 보호하려고만 하고, 나와 대화는 하려 하지 않는 그런 자세와 행동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가 캐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화가 났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기분 나쁘다, 문제 있는 거 아니냐'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러겠냐면서 오히려 나한테 화내고……. 쥐뿔도 없는 나는 그냥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들로부터 독립할 힘도, 돈도 그 무엇도 없었으니깐. 그렇게 싸우다 지고, 외출금지 당하면서 겨우겨우 살았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던 따이루~


2007년 11월 11일에 큰 집회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강경대응 하겠다 어쩌겠다 하면서 난리를 쳐서 엄마아빠는 내가 저기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일요일에 교회 갔다 어디도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특히 집회는 절대 가지 마!”라고 경고를 했다. 순간 급당황;; 하지만 가고 싶었던 집회고, 무조건 집회 가지 말라고 협박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짜증났다. 그래서 정성 가득 감동적인 편지를 한 장 써놓고 집회에 갔다. 편지 쓰면서 집에 가면 욕먹고 일주일 정도 외출금지 당할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었다. 통금 10분전. 집회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데 집안 분위기가 완전 얼음장이었다. 아빠가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보더니 어디 갔다 왔냐, 왜 갔냐, 왜 엄마아빠 말 씹고 가냐, 죽고 싶냐면서 취조와 협박을 하셨다. 난 완전 쫄아서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오늘은 참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무기한 외출금지다. 엄마아빠 있을 때만 허락받고 컴퓨터 켜고 숙제만 해라. 텔레비전 보지 말고 성경말씀 읽어라!” 헐;; 이런 표정으로 문 쪽에 얼어붙은 채 가만 서있었다. 그때 방에서 날 째려보던 아빠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를 잡아당겨 내동댕이치면서 패기 시작했다. 마음이 얼어서 그런지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근데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무서웠다, 아빠의 그 살기어린 눈빛이. 그때 엄마가 외치더라구. “왜 애를 패요? 차라리 내보내요.” 그 순간 난 본능적으로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지금 얹혀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돈 나갈 구멍은 많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집을 나오고 나니 하나에서 열까지 다 힘들다. 그 중에 좀 더 많이 힘든 것 중 하나는 텅텅 빈 지갑!

계획된 출가가 아니라서 모아둔 돈도 없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인맥도 없고, 알바를 하려고 해도 노동부의 허가증이 필요한 나이여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지금 얹혀사는 곳은 신림이고 학교는 구로여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해서 차비도 많이 든다. 밥 사먹느라 또 돈 들고…….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생기다보니 빚이 몇 만원이나 생겨버렸어. 거기다 앞으로 급식비에, 학교운영지원비에, 고등학교 가려면 입학금에 교복 값, 준비물 값, 소풍·수련회비도 내야 하는데……. 아프면 병원비도 내야하고 계속 얹혀살기 그러니까 월세도 내야 하는데……. 아무리 아껴 살아도 돈 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내가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그래서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간절히 느끼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간절히 원했던 것 중 하나가 무상교육이었는데, 엠비(MB)가 되셨으니 투잡(two job) 뛰어야 겨우 학교 다닐 것 같다─┌이런……. 아픈 것도 걱정이다. 특히 의료보험적용 힘든 치과. 난 이가 성하지 않은데,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 못갈 생각하니깐 너무 싫어 미칠 거 같다. 투잡도 모자란 것 같다. 추가 부업으로 인형 눈이랑 봉투도 열심히 붙여야겠다!

두 번째로 날 힘들게 하는 건 보호! 알바를 하려 해도, 핸드폰을 만들려 해도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어쩔 수가 없다. 보호자동의 없이 할 수 있는 게 손꼽힐 정도다. 그나마 엄마와 옛날에 했던 약속 중 하나가 '고등학교 입학에 한해서 보호자 동의를 해 준다'여서 고등학교 갈 돈만 되면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고 내가 할 일들인데 나보다 왜 보호자가 중요한 걸까? 내가 가고 싶은 길과 부모님이 갔으면 하는 길이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둘은 분명 서로 다른 인격체니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도 축소판도 아닌 한 인격체잖아. 그런데도 청소년에게는 선택할 권리도,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 나갈 권리도 없다.

“걸리면 집에서 쫓겨나.” 청소년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활동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막막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세상은 돈 없으면 죽으라고 하니 더 막막해진다. 그러고 보니 왜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런 미친 세상으로부터는 우릴 보호하지 않는 거지? ㅋㅋ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 후 선생님의 중재로 엄마와 협상(?)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협상은 그냥 엄마와 나의 생각 차이만 확인하고 별 진전 없이 끝났다. 그렇게 두 달이나 지났다. 정해진 것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면서 살다보니 그런지, 사는 게 불안정해서 그런지 폐인생활 모드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 메일을 보냈다. 엄마는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만 하셨다. 그래서 직접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양보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엄마는 '통금 7시!'를 계속 주장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금시간이 오후 7시면, 친구들하고 놀지도 못하고 인권운동을 하지 말라는 거랑 다름없다-_-

하지만 이 협상에서 인권운동 하는 걸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오직 깡 하나만 갖고 하는 이런 불공정한 협상에서 이 정도 성과를 건져 내다니, 부라보~ 노동자들이 회사랑 싸우는 거랑 청소년이 집이랑 싸우는 거는 상당히 비슷하다. 노동자나 청소년이나 ‘깡’ 하나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 기계를 멈추고 서비스를 중단할 ‘깡’, 집을 나올 ‘깡’. 그나마 노동자들은 빈약하게라도 법의 보호를 받지만, 가출한 청소년은 법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청소년의 가출할 권리, 독립적으로 살 권리도 노동자의 파업권 이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 아닐까. 이 권리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나와 부모님의 생각 차이는 두 달 정도의 가출로는 뛰어넘기 힘들 것 같다. 집에 들어가는 조건인 ‘무조건적인 오후7시 통금’에 동의할 수 없기에 난 여전히 집을 나와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독립해서 사는 걸 꿈꾸고 있다.

가출 후에 찾은 길

가출을 한 후에 얻은 게 은근히 많다. 미역국 안 질기고 적당히 담백하고 고소하게 끓이는 법, 김치볶음밥 타지 않고 맵지 않게 만드는 법, 김치찌개 고소하고 얼큰하게 끓이는 법, 쓰레기를 반으로 줄이는 법, 빨래를 깨끗이 냄새 안 나게 하는 법, 청소 빨리 잘 하는 법 등등과 같은 생활의 지혜를 배웠다. 당장 내 앞의 일들과 좀더 먼 미래에 대해 계획도 세우고 의지도 다졌다. 나를 지지해주고 힘들 때 도와주고 필요할 때 태클도 넣어주는 진짜 친구들도 만났고, 집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추억들도 만들었다. 그리고 8만3천원의 빚(ㅋㅋ). 가장 큰 건 '나'를 찾으려 노력했고 '나'를 찾을 길을 발견했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원하는 가치관을 자유롭게 외치면서 난 나를 찾아 나갈 거다.

가출 후 힘들어 하면서도 좋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건 분명 이 사회에서 가장 따뜻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가장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가족이 나에게 주었던 보호와 억압의 벽을 부수고 나온 지금!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지금이, 내가 보이고 내가 개척하는 이 길이 좋다. 후회는 없다.

[끄덕끄덕 맞장구]
집을 나온 뒤 친구네에 얹혀살며 두 달이란 긴 시간을 보낸 따이루. 워낙에 단단하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라, 자유가 주는 달콤함과 여유 때문인지 때론 배짱이 정말 두둑해보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막막함과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10대 때 청소년 인권을 포함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가족들이 말리거나 금지해 활동을 접는 청소년을 여럿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생존과 교육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의 처지에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부모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선, 부모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사회에선, 청소년은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편견을 버리지 않는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래서인지 인권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을 약속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따이루의 싸움이 더욱더 힘겨워 보이고 안쓰럽습니다.

대개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청소년에게는 철없는 아이, 반항적인 아이, 위험에 빠지기 쉬운 아이라는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생고생하지 말고 양보하고 집으로 들어가라’라는 충고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백기 투항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이나, 사실 그/녀들이 부모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패도 내밀 수 없는 약자라는 사실은 간단히 잊힙니다.

최초의 둥지를 떠나온 청소년은 아무 자기 보호막도 없이 차가운 거리에 서고 살아남기 위해 위험하거나 착취적인 관계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다행히 따이루는 피신에서 가출, 독립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지지해주고 먹을거리도 챙겨주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있는 집 청소년은 유학이다 연수다 해서 부모와의 갈등을 잠시 회피할 수 있겠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은 어떨까,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집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청소년이 주어진 둥지를 떠나 독립적으로 새 둥지를 만들 권리가 보장된다면, 그 세상은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안락한 삶 때문에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부모가 지어준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안락함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길을 찾아 나선 따이루가 더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싸움에서 따이루가 꼭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뜻도 용기도 열망도 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따이루가 좀더 유리한 위치에서 부모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 버티는 시간 동안의 고단함을 지켜보고 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배경내]
◎ 따이루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입니다.
인권오름 제 86 호 [입력] 2008년 01월 09일 11:53:49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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