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 4. 26. 01:26

‘아동학대’ 문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으로

공현


슬 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해다. 세월호 침몰로 세 자릿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청소년이다. 또한 그 바로 전에는 한 고등학교에서 폭행에 의해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두 차례, 며칠 간격으로 일어났다. 또 그 직전에는 가정에서의 학대로 인해 청소년이 사망한 사건이 신문 기사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에는 고등학생이 체벌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세상을 뜬 일도 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좇아다니기 바쁜, 우울한 상황이다.

워 낙 침울하고도 충격적이었던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마치 한참 전 일 같지만, 바로 1~2주 전까지만 해도 여러 언론은 “○○ 계모” 등의 제목을 달고 아동학대치사 사건과 그 재판을 보도한 기사들로 전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너무 가볍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시위도 등장했다. 사람들의 분노 자체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슈가 된 사건의 가해자를 벌하는 방법과는 별개로, ‘아동학대’ 문제를 예방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가해자가 특별히 못된 놈이라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결론에 멈춰버린다면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구조와 맥락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공식 보고된 아동학대는 6796건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학대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 ‘학대’ 기준에 잡히지 않은 다른 숱한 가정 안에서의 폭력과 인권침해도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보호자인 사람들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과연 자신들은 ‘학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달라고 하고 싶다.


청소년은 부모의 ‘것’이라는 전제


이미 방송을 통해 꽤 널리 알려졌지만, ‘아동학대’의 다수는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 학대의 가해자가 ‘계부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할 뿐이다. 언론 보도 역시 재혼해서 또는 입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굳이 “계모”라는 걸 강조하는 것인지, 참 씁쓸한 행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부모’의 학대에 더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죽였기에 이리도 반응이 뜨거운 것.”(트위터 아이디 @Ramirezi_ 전(前) 진보신당 청소년위원장)이라고.

물 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처럼 되어 있는 것과 ‘아동학대’가 가능한 가정 안의 권력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잔인하고 특출난 사례가 아니면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의 인권침해에 관대하다. ‘아동학대’ 사건의 배경에는 가정 안에서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자기 것’이냐 ‘남의 것’이냐가 아니라, 부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제 자체가 문제이다. 어느 부모가 ‘나쁜 주인’인 것만을 탓하지, 부모가 ‘주인’이 되는 상황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아동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낳는 조건들을 뿌리 뽑아야

사 정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동학대’라는 말보다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Children)’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학대’라는 표현은 마치 정도가 아주 심한 것이나 악의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정도의 문제이거나 특별히 악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며, 신체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사랑의 매는 폭력이 아니다.” 같은 말을 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아동학대치사 사건의 가해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이 둘이 종종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 환경이야말로 ‘학대’를 허용해주는 든든한 ‘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유엔 연구(The United Nations Study on Violence against Children: A/61/299)」(2006)는 서두에서부터 “아동에 대한 폭력이 ‘전통’ 또는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들로부터 정당화되어 일어나는 것을 중단”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위 사진[사진 설명] 유럽평의회 체벌금지 캠페인 포스터

“내 아이인데 무슨 상관이냐.”, “남의 집안 일이니 신경 꺼라.”라는 식의 태도. 자식 양육은 친권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가치관. 그리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권자에 의해 삶과 권리를 규제당해도 된다는 생각. 특히나, 그 바탕에 좋은 뜻이나 애정이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 청소년들은 ‘평등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 이런 것들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양육 방식은 친권자의 재량이라고 쉬쉬할 것이 아니고, 모든 체벌을 비롯한 폭력적인 양육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금지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직하고 비폭력적인 관계 맺기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공부 잘 시키는 우등생을 만드는 부모 되기에 대한 책은 많지만 정작 비폭력적이고 인권적인 부모 되기, 부모 자식간 관계 맺기에 대한 논의는 빈약한 곳이다.

올 해 하반기에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아동학대의 정의를 형법상 폭행이나 상해죄 대상 전반까지 포함함으로써 사실상 가정체벌금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정부나 사법부가 이를 그렇게 해석해 줄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친권자의 ‘징계권’을 들어 사회 상규상 허용될 만한 수준의 체벌은 정당행위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울만 해도 서울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 의해 가정체벌이 금지되었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역시 일부 명문화되었으나, 이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진지한 논의와 과정을 통해서 가정 체벌금지를 선언하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부터 출발해보면 어떨까.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제도이자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집을 나와서 ‘어쩔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같이 활동하는 청소년활동가들 중에는 의외로 가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기간 준비까지 해서 가출을 감행한다. 직간접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타이든, 폭언이든, 감금이나 협박이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대개 그들의 편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들은 대개 그들을 친권자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낸다. 폭력을 당한다고 호소를 해도 경찰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집 나온 청소년은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경찰의 의무인 것처럼. 하긴 경찰 입장에선 아주 틀린 일처리도 아니다. 민법에 따르면 친권자에게는 ‘거소지정권’이라는 것이 있고, 친권 상실이 되지 않는 한 친권자에게는 청소년이 있을 곳을 지정할 권리가 있다.

가출 등의 적극적인 탈출과 저항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가출한 청소년을 잡아가지 않더라도, 어쨌건 집을 나가서 혼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이 살아야 하며 버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청소년들이 놓인 처지인 것이다. 친권자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친권자가 폭력을 가하든 어떻든 간에 같이 살아야만 하는 현실. 이판사판으로 혼자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왔다가는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출’이 사회경제적 하층 가정에서 많은 것은 어차피 잃을 것이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 동학대’에 대처하는 제3자들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당장 폭력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가해자와 떼어놓고 싶어도 그 뒤에 청소년의 삶을 충분히 지원하고 책임질 만한 자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으로 보나, 법제도적 측면에서 보나, 친권자(특히 친부모)에게서 청소년을 떼어놓는 일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게 가정을 깼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마저 있다.

다행히도 반복되는 사건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으로 새로 제정된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학대’를 인지하면 바로 임시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기관이나 예산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가정에서의 폭력을 더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집 밖으로 나와서도 ‘어쩔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삶을 의존하는 선택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가정을 넘어선 공동체이든, 임시 주거와 생활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든, 복지제도와 적절한 노동 시스템이든.

나는, 자신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폭행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않을 권리는 인권이자 주거권의 일종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적 인권체계 역시 가족을 보호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훨씬 강하다. UN아동권리협약은 “부모나 현지관습에 의한 확대가족, 공동체 구성원, 후견인 등 법적 보호자들이 아동의 능력과 발달정도에 맞게 지도하고 감독할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이 이러한 권리(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부모나 후견인이 아동의 능력 발달에 맞는 방식으로 아동을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등의 조항을 통해 부모․보호자․가족의 권한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제도나 친권자의 권한 등에 근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은 현행의 국제적 인권 기준조차도 바꿔야 한다. 가정·가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하나의 제도이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와 인권침해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족제도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의 ‘청소년에 대한 폭력’ 문제에 대처해가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90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24일 11:52:5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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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9. 8. 23:15

[페미니즘인(in)걸]"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청소년과 여성,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 내기

공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뭔가 규정을 어기거나 학교 눈 밖에 나는 짓을 했을 때 가장 두려운 조치는 뭘까? 그야 당연히 체벌이나 욕설, 또는 퇴학 같은 징계들 모두 다 무섭긴 무섭다. 그런데 내 경험상 가장 손써볼 도리가 없으면서도 껄끄러웠던 것은 “집에 전화하는 것”, “부모님(혹은 집안 어른, 보호자) 불러오는 것”이었다. 뭐 이런저런 집안 사정에 따라 다들 조금씩 느끼는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부모/보호자 소환은 공식적인 징계도 아니고 직접 두들겨 패는 폭력도 아니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부담될 것 없으면서, 학생 입장에서는 참 대응하기도 어렵고 압박스러운 스킬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탄압은 버텨냈으면서도 이 집안의 압박 ― 가정탄압 앞에 굴복해야 했다.

교사들의 이 “부모님 모셔와” 스킬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반을 모두 규율할 권력이 부모/보호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사의 권한을 정당화하는 주된 논리 중에서 “부모/보호자로부터 교육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부모/보호자에게는 청소년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또 부모/보호자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하고 지도할 권리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벌을 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가 힘들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부모/보호자들은 청소년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력도 가지고 있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대놓고 대들고 반항하기가 껄끄러운 문화적 심리적 장벽들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학교에서 집에 전화를 하고 부모/보호자를 부르는 일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청소년들 입장에선 저항하기도 힘든 권력자를 불러들이는 조치인 셈이다. 학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은 가족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라면 문제제기를 할 거리가 되는 일들도, 부모/보호자에 의해 집안에서 이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곤 한다. 예컨대 학교 안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해서 징계를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식이 그런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어머니가 자식을 혼내거나 용돈을 깎거나 외출금지를 내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학교가 학교에 반항적인 학생의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거나 하면 사회적 논란이 일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서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부모/보호자와 자식/청소년의 관계가 권력관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부모’라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정상가족 중심적인 용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은 “친권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페미니즘 : 가족 비판의 동지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끊임없이 좋은 곳, 회복되어야 할 곳으로 일컬어진다. 학교에서도 음악시간이면 “즐거운 곳에서 나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동요도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나 화목한 가정을 소재로 한 게 많다.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먹고 싶은 것이나 놀고 싶은 것이나 모두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라고 노래하는 「피노키오」라거나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하는 「어른들은 몰라요」가 가장 투쟁적일 정도?) 영화에서 공익 광고에서 신문에서 법에서 가족은 계속 건강하게 회복되어야 할 곳, 삭막한 사회에서 마지막 안식처 정도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 한편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에 속한 청소년들은 ‘정상 가족’을 당연한 걸로 전제하고 있고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는 사회에서 ‘정상 가족’을 가지기를 소망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들의 삶을 살다보면 과연 가족이 그런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청소년들은 가족에서는 정(情) 같은 것 말고도 생활을 하나하나 규율하고 명령하는 권력도 경험할 수 있다. 가족이 안식처라는 것은 노동에 지친 남성 가부장을 위한 판타지는 아닐까? 청소년에게 가족은 등을 누이고 쉬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공부하라는 압박을 받는 곳, 또 다른 일터, 친권자에게 잘 보이고 생활비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에서는 친권자들에 의해 사랑과 교육의 이름을 달고 체벌이나 감금 같은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때로는 소유욕과 의무감이나 권력의 행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진로나 생활을 놓고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청소년과 친권자 사이의 갈등은, 가족이 순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가족’ 안에서도 충분히 많은 폭력과 권력관계, 사회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가족 비판의 영역에서 청소년운동의 ‘선배’인 셈이다. 페미니즘은 결혼이 불평등한 계약이고 가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으며 여성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가족 제도에 의해 여성들의 성은 통제받는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일터와 사회는 남성들의 공간이고 가족은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여성들에게 가사노동, 양육노동, 감정노동 등을 부담시킴으로써 가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왔다. 여성들에게 가족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일터이다. 그것도 그 일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처럼 가족이 자연스러운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이 얽혀 있는 사회적인 제도라는 관점이 만들어진 것에는 페미니즘의 기여가 컸다. (사회주의-공산주의나 아나키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만드는 데 일부 기여했다.)

페미니즘에 따르면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할 책임을 어머니-여성에게 떠맡기는 걸 정당화하는 ‘모성’ 역시 자연스러운 게 아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비판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이다. 친권자들이 가진 양육의 책임은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할 권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 이데올로기 등을 비판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겪는 억압과 갈등을 어느 개인의 문제 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에서 가장 많은 부분 맞물려 있다. 체벌이나 가정폭력,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과 억압 등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여성과 청소년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할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점,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도 동일하다. 양육의 책임과 그 권력의 문제에서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의 경우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같이 극복해야 할 얼키고설킨 굴레가 된다. 여성 청소년들이 남성 청소년들에 비해 가족 안에서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현실에서도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청소년+이즘ism)이 만나는 교차점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성 가부장 역시 가족 제도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 등의 담론을 보면 지금의 가족 제도가 남성 가부장에게 어떠한 부담을 주고 있고 또 가족의 판타지가 이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가족 제도를 바꾸기 위해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거기에 저항할 동기가 있는 주체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다. 가족을 비판하고 스크래치를 내고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은 동지 관계에 있다.


연대가 가능하든 말든

그러나 현실을 보면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 연대해서 가족을 바꿀 수 있을지, 나는 좀 의문스럽다. 이른바 ‘정상 가족’ 속에서 청소년들은 여성-어머니와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 아버지는 좀 더 무게 있는 라스트 보스 급, 권력자로 존재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만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상 가족’ 안에서는 어머니가 청소년들의 일상생활 속에 권력자로 등장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저항할 때는 청소년과 여성-어머니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여성-어머니가 연합하여 청소년의 삶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성 청소년과 아버지가 여성-어머니를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은 지금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대할 수 없다. 하긴 애초에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이 사회에서는, 가족의 문제를 느끼더라도 그걸 가족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 짓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판이니 이 또한 하나의 탁상공론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에게 가족은 같이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청소년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즘 운동 역시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을 충분히 비판하고 바꾸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하나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로 보고 그 제도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끼리 서로 존중합시다.”, “서로 대화하는 가족을 만듭시다.” 같은 류의 캠페인을 넘어 가족이 사회적인 운동과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시작할 때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가족 안에서의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우리의 다른 이해관계를 내세워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를 내고 태클을 검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218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08일 17:46:26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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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6. 28. 10:58



격월간 사람에서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 쓴 원고를 수정하여 다시 싣고 싶다고 해서 수정한 거예용.





패륜적 기본소득

공현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 노동 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회구성원들 개개인에게 균등하게 정기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사회가 균등하게, 무조건적으로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개개인의 계좌에 매달 정부가 30~50만원 정도의 생계비를 입금해준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거나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제도이다. 한국의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기본소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며 토론하기 위해 “기본소득과 장애인”, “기본소득과 여성”, “기본소득과 청소년” 등의 주제로 연속적으로 토론회를 열고 있다. 이 글은 6월 1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준비해서 연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에서 발제한 원고를 고쳐쓴 것이다.


가정에서의 청소년의 지위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 아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제도로 학교와 가정을 꼽을 수 있다.(하루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학원’도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에 비해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잘 공론화되지 않는다. 이는 학교가 제도화된 공적 공간이며 집단적, 조직적 제도인 반면 가정은 사적 공간,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체벌과 가정에서의 체벌, 학교에서의 종교 강요와 가정에서의 종교 강요 등을 비교해보면 이런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최근에 전교조 교사들이 정치활동을 이유로 대량 해직을 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의 정치적 자유는 학생들의 미성숙을 이유로 문제가 되지만 아무도 부모나 다른 가족의 정치활동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법 제도부터 보자. 민법에는 친권의 효력으로 친권자가 청소년을 보호, 교양할 권리의무(913조), 청소년의 거주지를 지정할 권리(914조), 징계할 권리(915조), 재산 관리권(916조) 등을 명시하고 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부모, 후견인 등의 친권자가 정하는 곳에서만 살아야 하고, 친권자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하며, 친권자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이나 용돈 끊기, 외출금지 등의 징계를 당할 수 있으며, 재산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개정이 되긴 했는데, 민법의 친법 관련 조항에는 “자식은 친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단지 법 규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의 문제이다. 극단적인 예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성적이 잘 안 나온다는 이유로 친권자에게 체벌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가정에서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거나 강압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개인적인 다이어리나 휴대전화 기록 등을 친권자가 함부로 보고 이를 근거로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일, 위치추적 등은 ‘부모의 사랑과 걱정’으로 정당화된다.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할 것인가,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 학원을 갈 것인가 등의 문제도 거의 다 친권자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결정을 하게 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활동가들은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반대와 탄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청소년 자신의 자발성이 없이 100% 전적으로 친권자의 뜻만을 관철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친권자 개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처우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소년의 삶에 대해 친권자가 가지는 지배력은 상당히 강력하고, 그 지배력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은 대부분이 친권자들의 성향에 맡겨져 있다. 제도적․문화적 조건만으로 봤을 때는 청소년들은 ‘친권자의 소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어왔다. 아나키즘에서는 근대 사회가 “아동을 부모의 부속물로 바라볼 뿐, 아동 역시 자율적 존재로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어 이야기한다. 꽤 유명한 아나키스트인 바쿠닌 또한 “아동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에 소속된 사회적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아나키즘과 청소년 해방」. 마크 시버스타인 Marc Siverstein 지음.) 페미니즘 쪽에서도 남성 가부장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에 더해서 아동에 대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논의들이 있으며, 우에노 치즈코 또한 세대간의 지배 종료를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제안했던 적이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러한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는 많은 부분 경제적인 종속성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말 안 들어? 그럼 용돈 없어!”, “내 말 듣기 싫으면 나가. 여기가 니 집이냐? 니가 입는 옷 먹는 거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용돈 뿐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친권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친권자가 사용할 수 있는 압박의 수단이란 무궁무진하다.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등 한국 특유의 높은 보육․교육비 때문에 (좀 넓게 잡은) 중산층 이상의 친권자들이 가지는 투자의식과 주도권 등도 크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정 안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우선 기본소득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청소년 또한 가정의 경제력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어느 정도 협상력과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친권자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보다 독립적이고 덜 의존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미래에 자신들에게 더 많은 부와 명예를 돌려주기를 바라는 친권자들에게는 투자의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노인 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됨에 따라 청소년을 채찍질해서 사회 상층에 쑤셔 넣을 동기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다.
  친권자들도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게 되니까 가정 안에서 경제력의 부담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돈이란 같은 액수더라도 어느 정도 있는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더 효용이 큰 법이다. 가정 안에서 가지는 경제력의 비율이 0에서 10이 되는 것은 발언권이나 협상력의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기본소득 모델에서는 소득이 많은 친권자들은 세금으로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내게 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좀 잘 사는 가정 안에서는 경제력의 분배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차하면 가출할 수 있다는 것도 청소년들의 가정 안에서의 지위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양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출은 자신이 원하는 주거를 요구하는 일종의 투쟁이나 보이콧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가출을 해도 주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가출의 리스크가 컸다. 이 리스크는 가출 후에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막막함과 정해진 레일에서 삐끗하기라도 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가출의 리스크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최저생계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니 가출 후에도 청소년들이 독립적 생활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아가서 기본소득의 도입은 노동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해 죽어라 스펙을 쌓아야 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는 상황을 개선하게 될 것이며, 가정과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며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훨씬 작아지게 만들어준다. 여차하면 파업이든 태업이든 할 수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기본소득은 가출 등 가족의 틀을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안전망이 되면서 청소년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의 독립 시기가 빨라지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지금 주로 청소년들, 그러니까 0~19, 20세 정도까지의 ‘미성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권자의 경제적 지배력이라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20대 초중반의 사람들 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생계에 필요한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계속 돈을 모아서 주거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공동으로 생활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학 진학의 보편화에 청년실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점점 늦어지고 있는 독립이 앞당겨진다는 것은 10대, 20대 전반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더 이상 기존의 부모-자식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족 해체’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친권자 말 잘 듣고 나중에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여 효도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덜어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살던 관계가 좀 더 독립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정 안팎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가정에서의 권력관계들을 공론화하면서 변화시키는 청소년들의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윤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실로 ‘패륜적’이다.


문화적 어려움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낙관할 수만은 없다. 청소년들의 가정에서의 지위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문화적인 문제나 여러 제도적인 문제들에 얽혀 있다. 민법이나 노동법 같은 데부터 넓게 본다면 교육제도나 선거연령, 사회적 인식 등까지도 모두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삶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달라지면 상층 구조는 다소 오차가 있더라도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낙관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 기본소득 도입 자체에서부터 사회적 인식과 문화적 요인들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 청소년들이 세뱃돈 압수당하듯이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친권자들에게 압수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몇몇 장애인 시설들이 보조금 더 타내려고 장애인들을 데려와서 보조금을 갈취하듯이, 아이 1명을 더 낳으면 그만큼 기본소득을 더 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는 친권자들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면 학생간 폭력에서 ‘삥’을 뜯는 규모가 커지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괴 등의 범죄가 증가하는 일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 도입 초기에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판단능력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명히 청소년들은 (사실은 20, 30대들도 좀 해당) 경제적 주체가 되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안 좋은 쪽으로 발휘한다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나 명품 소비 문화 등에 소득을 다 쓸 수도 있다. 지금도 빈곤층 가정의 청소년에서부터 이런 명품 소비, 신제품 소비 등의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독립에 기여하기보다는 명품이나 10대 마케팅에 주력하는 기업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다면, 친권자에게 손을 벌려서 그런 소비를 하는 것보다는 낫겠으나, 최선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문화적 변화에 더해 어떻게 경제적 주체로서 소비하는 것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을 교육할지, 이러한 소비 문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계획해야 할 문제이다.


가능성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액수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지만, 모두에게 같은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빈곤하고 더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효용이 있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가정/가족 단위로만 묶여서 생각되어왔고 독립된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거나 보장받은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기본소득 도입의 이해당사자 중에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그 자체로 청소년들을 해방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도입이 청소년들이 친권자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금의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패륜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중 하나일 수는 있다.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은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청소년들의 삶이나 교육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되는 과정 자체, 그리고 기본소득에서 청소년들(0세~19세 정도)이 배제되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난이도 높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과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역시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운동과 제도는 최소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전까지는 이야기하기도 힘들었던 그런 새로운 사회로 가는 가능성을 말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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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ma

    밀도 높은 글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2010.06.29 03:39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8. 12. 20. 12:15






크리스마스는 정말 즐겁고 행복한 날일까?
크리스마스 때마다 쓰나미처럼 거리에 넘실거리는 가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온정주의...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니다.
울지 않고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겠다는 산타는 대체 뭥미?!
사랑하고 연애하라고 외치며 소비를 조장하는 이 거리. 그런데 그속에도 동성애 커플들이 설 곳은 많지 않다.
크리스마스 때 반짝하는 자선 분위기는 이 사회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으면서 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는다.
 
크리스마스 악령들을 퇴치하는 안티 크리스마스 게릴라 액션!



게릴라 이동 경로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악령이 출몰하는 곳곳!
인사동 북인사마당 1시 - 종각역 2시- 명동 거리 3시 (예정. 악령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바뀔 수도...)
 
게릴라 아이템 : 악령퇴치 전시물, 저항 캐롤, 블랙 산타 퍼포먼스, 안티 크리스마스 카드 증정 등등
 
게릴라 드레스 코드 : 검은 계통의 옷과 모자
 
게릴라 긴급 연락책 : 한낱 011-9014-8304 (같이 하시고픈 분들은 문자나 전화를 살포시 ^^)




(홍보물이 아직 최종 완성본은 아니고,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 Rateen이나 사회공공성연대 등이 같이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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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족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좀 외연이 넓어진 "안티 크리스마스" 행동 계획.

가족주의의 환상 속에서 가려지는 가족 속에서 아동(청소년), 여성 등이 놓여 있는 권력관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건 기본이고...

"착한 아이"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크리스마스의 연애 분위기가 이성애중심적이라는 것 (그런데 나는 "연애"를 하라고 요구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도 넣고 싶었다, 사실)

크리스마스의 '자선'이라는 게, '베푸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만 드러낸다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정말 빈곤하거나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복지, 사회공공성, 구조적 개선 등이지 크리스마스에만 반짝하는 '베품'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사실 나처럼 당장 통장에 880원 있는 사람은 이런 '베품'의 대열에도 낄 수 없다 -_-; 지금 당장은 베품 좀 받고 싶네 그랴, 뷁!)



(크리스마스 자선의 적나라한 현실 -_- 어쩌면 "착한 아이" 이데올로기와도 연관될지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에서는 이것저것 재밌는 일들을 많이 기획하고 많이 한다. 그래서 좋다.
하지만 23일은 일제고사고
24일은 안티크리스마스다.

으아아아아아아아ㅏㄱㄱㄱㄱ
ㅠㅠㅠㅠ



그럼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안티 크리스마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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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 케빈 !!!

    2008.12.25 20:23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