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2014. 11. 11. 05:22



원래 좀 다르게 편집해서 언론사에라도 기고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아서

그냥 초고 쓴 그대로 올린다.





이방인 - 2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새움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 돌아보기



올해 봄, 반짝 주목을 받았다가 지금은 거의 잊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이방인』 번역 논쟁. 2014년 3월, 새움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새로 번역해서 내면서 지금까지의 『이방인』 번역이 ‘오역’이라고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한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책 띠지에 크게 써넣었고, 출판사는 “25년간 속아온 번역의 비밀”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소설 본문만큼의 분량을 들여 ‘역자노트’를 덧붙였는데, 이 ‘역자노트’란 김화영씨의 번역본을 자신의 번역과 비교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새움출판사 번역본의 역자인 ‘이정서’씨는 이와 함께 몇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살해동기는 ‘태양 때문’이 아니라 ‘정당방위’이며, 또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남자는 레몽의 애인과 남매 관계인 것이 아니라 “기둥서방”(이정서의 표현이다.), 곧 비밀 애인 관계이고 레몽은 악한 사람이나 ‘양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서씨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한국 사람들만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그렇듯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화영씨만이 아니라 다른 역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여러 차례 발언했다. 이정서씨가 무어라고 주장했는지, 이정서씨의 말 일부를 직접 인용하여 소개해보겠다.

“지금 뫼르소가 총을 쏜 가장 큰 이유는 '눈을 찌르는' 칼날 때문인 것이다. 그 번쩍이는 칼을 든 사람은 앞에서 친구(레몽)를 잔인하게 찔렀던 바로 그 위험한 사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25년 동안 우리는 저 엉터리 번역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당해 온 것이다.”  (『이방인』, 이정서 역, 새움출판사. 4쇄. p.208.)


“특히 살인 동기가 태양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이방인>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기 때문에 길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여기서의 오역은 총을 쏘는 장면이 아니라 뒤의 재판 과정중 뫼르소가 답하는 장면을 말한다) 현실 속의 ‘정당방위’라는 의미가 거세된 것이고, 프랑스인들은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게재된 「<이방인> 번역자 이정서 긴급 인터뷰 : 뫼르소의 살해 이유는 태양 때문이 아니었다.」)

“번역 오류 때문에 우리에겐 부조리 개념 자체가 황당하게 돼버렸다. 주인공이 왜 살인을 했는지 이유가 분명한데 태양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한다.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사내는 레몽을 농락한 여자(무어인)의 오빠가 아니라 기둥서방이었다.
까뮈는 무어인과 아랍인을 분명히 구분했고 실제로도 그렇다. 무어인은 스페인계 아랍인이다. 때문에 여자와 사내는 결코 남매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뫼르소의 살인에는 이래저래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았는데도, 기존의 도덕과 종교, 법체계에 의해 그는 사형당하고 만다는 게 부조리의 실체다. 프랑스인들은 알았지만 우리는 몰랐다. 기존 역자가 쳐놓은 관념의 그물에 독자들은 무방비로 끌려갔던 것이다.” (김환기 기자, 오마이뉴스, 2014.04.07.,「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이것 때문이었다 - 새움출판사, 기존 번역 비판하며 출간... "그동안 '부조리' 잘못 이해해"」)




이러한 주장과 함께 출간된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그 출간 직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아실 것 같다. 로쟈씨가 ‘sirènes’에 관련된 내용을 예로 들며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라고 밝히면서 여러 언론들도 이를 보도했다. 그리고 이정서씨가 자신이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가 맞다고 인정함에 따라, 언론들은 출판사 대표가 익명으로 자신의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내면서 다른 번역자를 강력하게 공격한 사실을 놓고 ‘노이즈마케팅’, ‘도덕성 논란’ 등의 표현을 쓰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뒤에 말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규정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에서 온 답변

그렇게 4월 이후로 언론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 언론에는 채 보도되지 못한 이야기가 또 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댓글란에서는 그 뒤에도 이정서씨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은 이정서씨가 제시한 세세한 오역 지적에 관련된 것에서부터, 카뮈의 철학을 포함한 『이방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특히 한국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검증까지 포함해서 이루어졌다. 이정서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나 출처 등을 제시하며 논쟁을 벌인 것은 주로 ‘고마해라’, ‘indifference’, ‘한말씀’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각종 쟁점들이나 이정서씨가 ‘고마해라’씨를 지목해 이기언 교수라고 짐작한다고 한 것 등 기이한 언행이나 해프닝들은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논쟁이 격해지자 이정서씨가 자신의 『이방인』 해석을 제시하며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이방인』을 출판한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다.)에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정서씨는 그러면서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 출판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따른 법적 책임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가 정말로 프랑스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는 프랑스카뮈연구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이 사안에 대해 문의를 했고, 프랑스카뮈연구회 회장이자 카뮈 연구자인 스피켈(Agnès Spiquel)씨가 5월 중순에 답변을 했다. 스피켈씨는 “아랍인들 중 한 명이 레몽 옛 정부의 남자 형제”라고 답하여 이정서씨의 ‘기둥서방설’을 부정했고, 살인동기에 관련해서는 “만약 뫼르소 바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랍인이 칼을 빼들었으므로 정당방위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볼 때, 카뮈는 우리가 뫼르소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길 바랐”다고 하며 그런 관점에서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참고로, 스피켈씨는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카뮈 플레이아드 전집 편집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자신의 공언을 지키지 않았다. 적어도 ‘기둥서방설’에 대해서는 틀린 것이 너무나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프랑스카뮈연구회를 가리켜 “듣도 보도 못한 단체의 명의를 끌어와 현지에 문의 메일을 보냈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고 하고, ‘번역’이 아닌 ‘해석’의 문제를 묻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반응했다. 바로 자신이 그 해석의 문제에 대해 프랑스에 물어보라고 먼저 이야기한 상황이었기에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정서씨는 그 뒤로도 자신의 주장을 전혀 철회하지 않고, 이제는 ‘카뮈로부터 온 편지’라는 소설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 분량의 대부분이 ‘역자노트’에 실린 내용이나 기존에 이정서씨가 해오던 주장들을 반복해서 싣는 데 쓰이고 있다. 요컨대 귀 막고 자기 말만 반복하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에는 법적으로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음을 검토한 미국 로스쿨 논문을 제시하자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정당방위로 이해하고 논의해왔다는 증거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거나, 오역을 지적하자 “저는 불어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설명드릴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더 이상 토론이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나는 지난 4월부터 이 논쟁에 관심을 가져왔고, 온라인에서 벌어진 주요한 논쟁들은 대부분 쫓아가며 읽어왔다. 누구는 내가 이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놓고 사적인 원한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사적인 원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첫번째로는 내가 『이방인』을 좋아하는 독자이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로는 이정서씨의 주장 방식이나 태도가 내 ‘버튼’을 눌리게 만드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역을 개선할 수 있다면 독자로서 환영한다는 우호적인 마음으로 이 논쟁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가면 갈수록, 이정서씨의 주장은 동의할 수도 옹호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권위에 도전하는 약자’ 위치에 자신을 놓으면서 정작 자신의 주장이 불성실하고 오류투성이인 것에다가 자신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모습은,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번역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어떤 오류들을 가지고 있는지 정리해둠으로써 그 해악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원래 옳은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고, 그 분들에게 적어도 그 주장이 어떤 오류를 갖고 있는지 정도는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가 토론의 자세로나 논리적으로나 너무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함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1) 논리적 불성실



이정서씨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한국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A라고 이해한다.
(2)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B라고 이해한다.
(3) 한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다른 것은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의 (김화영과 다른 역자들의) 오역 때문이다.

이는 소설에 대한 ‘해석’이나 번역의 차이가 아니다. 더 정확히는 해석의 차이가 오역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며, 각각의 사실들을 검증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일 해석의 차이가 번역에 좌우된 것이었다면, 한국어 번역본으로만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A라고 이해해야 하고, 프랑스 원어로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B라고 이해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일단 (1)번은 자세하게 따지지는 않겠다. 이정서씨의 상당히 피상적인 주장(‘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부조리라고 포장해왔다’는 등)이나 줄거리 요약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한국의 『이방인』 이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보거나 카뮈 철학에 대한 연구 자료를 공들여 공부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를 확실하게 알 방도는 없다. 더군다나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방인』에서 피살된 아랍인이 레몽의 옛 애인의 ‘기둥서방’이라는 식의 해석을 한 경우는 없는 듯하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2)부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카뮈연구회로부터 온 답변이 이정서씨의 주장과 모순된다. 또한 논쟁 과정에서 한말씀씨가 프랑스 공영라디오 방송 France Culture의 <Le Gai Savoir> 2012년 10월 21일 방송을 인용하며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의 줄거리에 대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해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반면 이정서씨는 프랑스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이 자기가 주장한 대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혀 제시한 바가 없다.


(2)가 증명되지 않은 시점에서 (3)을 증명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지도 않았고 그 반대의 증거만 있으니, ‘이해가 다른 이유’란 애초에 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정서씨가 역자노트 등을 할애하며 가장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남의 번역을 지적하는 일이므로 이정서씨의 카드는 (3)뿐인 셈인데, 이조차도 부실하다. 예컨대 이정서씨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이 ‘무어인’과 ‘아랍인’이 인종적으로 다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정서씨의 번역도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뒤에 적겠으나 이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다른 번역자의 것과 이정서씨의 번역을 비교해 봐도, 전자에서는 뫼르소의 발포동기가 ‘태양 때문’으로 읽히고 이정서씨의 것에서는 ‘정당방위’로 읽힐 만한 결정적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역자노트’ 등을 읽어봐도 뚜렷하게 어떤 문장이나 어떤 번역이 해석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인지는 상당히 불분명하다. 이정서씨는 이에 대해 ‘전반적인 장면’, ‘인물에 대한 오해’ 같은 말들을 하지만 정작 줄거리 이해에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잘 짚지 못하고 있다. 이는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었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장이 매끄럽게 옮겨지지 못했더라도 줄거리 이해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고, 문장을 잘 다듬어놨더라도 단어 하나를 정반대의 뜻으로 옮겨서 줄거리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정서역에서도 역자의 해석에 맞춰서 오역을 한 경우 등이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렇더라도 큰 줄거리 이해에 별 문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이정서씨의 『이방인』 오역-해석에 관련된 주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빈약하거나, 없다시피 하다. 무엇보다 큰 불성실은 이정서씨가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응당 해야 했을 사전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구체적인 쟁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정서씨는 레몽의 옛 정부는 무어인(Mauresque)이고 뫼르소에게 피살된 사람은 아랍인(Arabe)이므로 혈연관계일 수 없으므로 아랍인은 비밀애인, ‘기둥서방’이었다는 주장을 편다.(이른바 ‘기둥서방설’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Arabe’와 ‘Mauresque’는 인종적으로 명백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반박하면서 제시한 자료들로 밝혀진 것에 따르면 ‘Mauresque’는 무슬림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비유하자면, ‘조선인’과 ‘한국인’이라든지, ‘북방유목민족’과 ‘거란민족’ 또는 ‘양키’와 ‘미국인’이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러 자료들로 프랑스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것이 ‘번역’에서 비롯된 해석의 차이가 아님은 한층 더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이를 제대로 조사하거나 알아보지 않고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며 혈연관계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이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생각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으면서도 그것을 확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을 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논거는 사실 단 하나다. 바로 자신의 『이방인』 해석이다. 자기가 읽어봤더니 이렇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원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정서씨의 해석은 사실은 여러 부분들이 ‘원문’보다는 그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간된 ‘역자노트’에도 포함되어 있는 ‘마리편지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서씨는 “마리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결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들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쉬운 일이었다.”(이 뒤에는 수감 생활 중 경험들이 나온다.)라는 문장을 들며 마리가 뫼르소에게 보낸 편지에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는 말을 쓴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러면서 마리는 예심을 맡았던 ‘차장검사’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정서씨는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에 관해 뫼르소가 마리의 편지 때문에 법정에서 제대로 증언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추가로 밝혔다.(“만약 마리의 이런 편지가 없었다면 아마 뫼르소는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진술들(…)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카뮈<이방인> 레몽의 여자와 아랍인 사내의 관계는?」) 물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이란 구절을, 단지 뫼르소가 자기 경험을 서술하기 전에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 마리의 편지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이 때문에 마리와 뫼르소가 제대로 증언을 못했다는 주장에는, 이정서씨의 상상력 말고는 딱히 근거가 없다. 역자가 정답인 것처럼 제시하기에는 과도한 해석이다. 이정서씨는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갖추지는 않고, ‘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며 마치 자기와 동일하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인 양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정서씨 자신의 소설 해석을 근거로 한 ‘번역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와 한국의 이해가 오역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을 논증할 수가 없다. 오직 다른 사람들과 이정서씨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간혹 보면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논쟁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수차례 주문을 했으나 무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정서씨는 처음부터 자신이 근거를 대기 힘든, 너무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주장을 내질렀다. 이처럼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을 하지 않고 이미 확인된 사실과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불성실함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2) 불명확

이정서씨는 논쟁 과정에서 타인의 논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논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이는 정작 필요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거나 감정적인 표현만 반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새움출판사-이정서씨는 상황을 정리하는 글을 올리며 로쟈씨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비판”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로쟈씨가 쓴 문제의 글을 보자.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 2014.04.06.)

보다시피 로쟈씨가 ‘구글 번역’을 언급한 것은 이정서씨가 타인의 번역을 ‘탄핵’하며 단언한 논리를 비판하면서이다. 즉 이는 이정서씨의 번역관 또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번역 비판에 대한 이야기이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한 게 아니다. 이런 오독은 여기저기서 반복된다. 예컨대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자기 ‘번역’에는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한다. A 번역과 B 번역 둘 다 가능하다고 지적하자, B 번역이 틀렸고 A 번역이 맞다는 소리냐고 반문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명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정서씨 자신의 주장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정서씨의 ‘정당방위설’만 해도 그렇다. 이정서씨는 처음에는 뫼르소의 발포 동기가 정당방위이며 ‘태양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정상참작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가, 또 피살당한 아랍인이 ‘기둥서방’이라는 해석과 정당방위 문제가 따로 떨어지지 않은 문제라는 주장도 했다. 이러한 불분명한 주장은, 뫼르소의 심리 상태를 논하는 것인지 법리적 문제를 논하는 것인지 아니면 뫼르소가 ‘악한을 처단’했다는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번역’의 문제와 ‘해석’의 문제를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뒤섞은 것도 이정서씨였다. 또한, 사람들이 이정서씨의 오역-해석에 관한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이 읽기에 제일 낫다는 사람들의 평이 많다고 반박을 하거나 ‘그래서 김화영 게 오역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반문하는 것도 그러한 행태의 하나이다.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정서씨 번역의 질이나 김화영씨 번역의 질이 아니라, 이정서씨의 ‘오역 비판’ 그리고 ‘오역 때문에 프랑스와 한국이 『이방인』을 다르게 이해해왔다’는 주장의 오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의 논지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토론이 발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의 주장을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반박당한 본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명이나 철회 없이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쟁점인지 정리가 잘 안 된다는 점에서, 이는 논리적인 불성실만큼이나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3) 권력 논리, 진영 논리

마지막으로 이정서씨는 자신의 이런 불명확하고 불성실한 주장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권력 논리’와 ‘진영 논리’를 들고 온다. 이정서씨의 오역-해석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은 모두 “기존 번역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김화영씨의 권위 때문에 사람들이 ‘속아왔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번역에 갇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정서씨 자신은 불문학계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에 부당한 탄압과 비난을 받는 약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비밀을 들춰내고 진실을 밝히려고 분투하는 투사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정서씨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을 때나 가능한 소리이다. 이정서씨의 주장 자체가 반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태도이다. 이정서씨의 태도는 때로는 음모론 신봉자의 태도와 닮아있는 듯 보인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때 곧잘 ‘원문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자신을 비판하는 의견을 대할 때는 그 의견 자체나 그 의견이 근거로 든 ‘원문’ 또는 자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권력이나 진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시 이정서씨가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이정서씨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세상살이의 지혜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권력 논리’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진영 논리’도 등장한다. 김화영 대 이정서라는 구도를 스스로 설정해놓고, 이정서씨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김화영씨를 옹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진영 논리가 일단 깔려 있다. 그 위에, 출판사 간의 이해관계 문제가 더해진다. 이정서씨는 인터넷서점에 안 좋은 평이 남겨지거나,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정서씨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통 두 가지로 지칭한다. ‘불문학도’ 아니면 ‘알바’. 거대 출판사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알바들이 조직적인 음해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정작 이정서씨의 지인들이나 새움출판사 마케터 아이디 등으로 댓글을 달거나 서평을 쓰거나 별점을 준 경우들은 여럿 밝혀졌다는 것이 희극적이다.


그래, 어쩌면 출판사와 연관된 사람들이나 ‘알바’들이 무작정 별점을 깎거나 안 좋은 글을 쓴 경우도 있을 수 있을 터이다. 악플이나 인신공격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김화영씨의 번역에 오역이나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앞서 살펴봤듯이, ‘김화영씨 번역에 오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정서씨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문학 전문가가 아니며 김화영씨라는 불문학계의 권위를 비판했다는 것이 곧 그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를 특히 화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정서씨의 이런 논리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권위에 비판하고 도전하는 것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으며, 약자가 옳은 주장을 하는데도 부당하게 묵살당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정의 감각을 이용해서, 옳지 않은 주장을 옳은 주장으로 둔갑시키고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결국 그런 행동은 사람들에게 냉소적 태도를 가지게 함으로써 역으로 옳은 주장을 하고 의미 있는 비판을 제기하는 약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정서씨는 주장에 대한 비판과 반박 외에 특별히 부당한 압박을 받거나 구체적인 불이익을 입은 것이 없다. 이정서씨 자신이 인신공격성 표현들을 먼저 쏟아내며 허술하면서도 무리한 주장을 했으니, 그에 대해 다소 격한 반박이 제기되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정서씨가 부디 권력 논리나 진영 논리 뒤에 숨지 말고, 자기 주장을 반성적으로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 이정서씨가 잘못한 것

나는 프랑스어라고는 ‘봉쥬르’와 ‘쁘띠’와 ‘꼼시꼼사’밖에 모른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정서씨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어나 프랑스문학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의 수준에서 논리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뭔지 조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외국어능력 이전에 그런 부분에서 이정서씨의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 널리 알기를 바란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프랑스어를 모르고 프랑스어 원문 『이방인』을 읽어본 것도 아니기에 이 논쟁을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동안 프랑스어를 알고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 (이정서씨를 포함한) 많은 분들 덕분에, 이제 누구나 관심이 있다면 이 논의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됐다. 그러니 이 글이나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다른 사람의 주장의 논지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정서씨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이 글도 오해를 받을 것 같다. 그러니 분명하게 해두자면, 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을 사서 다시 읽어봤을 때도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로운 번역 때문이 아니라, 과거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매력과 울림을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의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내가 처음 읽었던 『이방인』을 번역해준 역자 분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더 나은 번역을 찾기 위해 프랑스어나 카뮈에 대해 잘 아는 분들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번역을 해준다면 일개 독자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정서씨는 ‘오역 때문에 한국에서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는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그 근거가 빈약하고 이미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도 많다. 이정서씨가 자기 생각에 더 나은 번역을 선보이고 자기 나름의 상상을 가미한 해석을 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런 해석을 글로 써서 발표한다면 폭넓은 공감과 동의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별 해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빈약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것은 잘못이고 해악이 된다. 더군다나 그런 내용을 내세워서 광고를 함으로써 책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다.(이정서역 『이방인』은 내가 샀을 때 벌써 4쇄가 팔리고 있었는데, 이는 출판계의 불황이라는 조건이나 『이방인』은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고 그 중에서도 새움출판사의 것은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게 팔린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 논쟁 초기에 언론사들이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임이 밝혀지자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핀트가 어긋났다. 출판사 대표가 자기 출판사에서 자기 책을 내는 것은 물론 일종의 전문가 윤리에는 어긋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저자, 편집자, 출판사의 전문가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검증을 하는 시스템을 교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규칙/방법론’을 훼손한 것이지, 도덕적인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덕성 문제는 이정서씨의 주장 그 자체에 있었다. 사실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필요한 검증도 없이 하면서 다른 역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였든, 대표가 아니었든, 변함없이 잘못된 일일 것이다.


나는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새움출판사의 이정서역 『이방인』은 소설 원문에 맞먹는 분량이 ‘역자노트’에 할애되고 있다. 그 덕분에 다른 『이방인』 단행본들이 모두 1만원 미만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데 비해, 분량이 2배인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13,800원이라는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 나도 그 책을 산 한 명의 독자로서 말하는 건데, 가격 절감 차원에서라도 최소한 ‘역자노트’를 떼어내거나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대폭 삭제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중심 홍보 문구는 당연히 빼야 하고 말이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이정서씨가 먼저 스스로 말한 대로 책을 전량 수거하고 폐기 처분하고 석고대죄하는 것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그가 계속 아집을 부리는 것을 보니 그렇게라도 하라고 요구해야 하나 싶을 지경이지만….





토론에 필요한 일정한 태도나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대화가 반복된다. 서로 그냥 자기 할 말만 하는 인터넷에서의 흔한 ‘키보드배틀’이나 댓글 달기와는 달리, 분명 말을 주고받고 있기는 한데, 전혀 진척이 없는 답답한 상태. 새움출판사 블로그를 비롯한 여러 장소들에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보다보니 참 가슴이 갑갑했다. 우리가 모두 프랑스어를 알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모두 이런 토론의 조건과 자세에 대해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정서씨부터 좀 이런 것에 대해 알아보시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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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글이 있는 곳

'모레스크' '아랍' 논쟁에 관한 글  http://joube.egloos.com/9181800

이방인 번역 논쟁 관련한 indiffrence님 블로그  http://indindi.egloos.com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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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격하게 공감하고 갑니다. 저 역시 불어에는 문외한인바, 처음에는 기존 문단 권력에 대한 참신한 반기 정도로 여겼기에 내심 관심 있게 지켜봤지만, 보면 볼수록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제가 느끼던 불쾌감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좀 시간이 흐른 감이 있지만 처음에 의도하신 대로 언론사에 기고하시는 것도 어떨까 싶네요. 충분히 잘 정리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07.16 06:56 [ ADDR : EDIT/ DEL : REPLY ]
  2. ㅁㄴㅇㄹ

    저 또한 공감합니다.
    이정서씨의 이방인은 정말 잘봤습니다. 기존의 번역에 제기한 문제들도 수긍하는 부분이 있었고
    하지만 100% 옳고 100% 그른 번역은 없습니다. 본문 처럼 이정서씨 덕분에 불어를 전혀 모르고도 번역에 대한 이런저런 논쟁을 보아오면서 이정서씨 번역도 100% 맞다고 주장하긴 힘들더군요 저는 두책을 비교해가며 읽고있습니다.
    전공자가 아니라 어디가 맞다고 판단할순없지만 이글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마찬가지로 크게 공감하는 바 입니다.
    자극적인 문구와 확신에찬 역자노트, 이어서 출판된 카뮈로부터 온책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너무 자만한게 아닌가 싶네요

    2016.03.21 00:37 [ ADDR : EDIT/ DEL : REPLY ]
  3. 블루노트

    성의 있고 진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에 대한 논평도 달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여러 책들을 봤습니다만, 어느 한권도 온전히 이해한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김 교수의 번역본을 읽고 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유려하기 짝이 없는 문체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사상가, 평론가, 선동가, 저널리스트였던 까뮈가 절대로 글을 김 교수 문장처럼 썼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굳이 문제 많은 이정서 씨와 비교하자면, 최소한 전달에서만큼은 이정서 씨가 오히려 낫다고 보여지는군요. 그의 번역에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요.

    2016.09.30 22:55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세요? 글에도 드러나 있지만, 저는 번역에 대해 평할 수 있는 전문성이나 지식이 없으며, 단지 이정서 씨의 '주장'의 논리적 문제와 근거의 부실함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을 포함하여 이방인 번역이나 다른 번역에 대한 비평은 프랑스어문학 논문 등이 한두 편 나와 있는 것으로 아니까 그것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유행하던 문체나 시대의 문제 등도 고려해야 하지 단순히 가독성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김화영 역 이방인을 읽어보았으나 의미가 전달이 되지 않는 문장 같은 부분은 특별히 없었습니다.

      2016.10.19 16:40 신고 [ ADDR : EDIT/ DEL ]
  4. 알카퍼네

    19년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방인을 찾아 펼쳤는데 역자의 말에 뜬금없이 기존 역자를 까대는 내용을 거세게 적어놔서 궁금해서 검색하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덕분에 엉터리 번역에 관종짓로 돈벌려고 만든 책을 읽지 않게 되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2019.07.31 15:59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14. 5. 21. 02:45





일전에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이정서역본의 논란에 대해서

http://gonghyun.tistory.com/1057 이런 관전평을 남겼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더 진척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서 역시 한 독자로 의견을 적고자 합니다.






이정서씨의 『이방인』 번역(또는 해석)에 관한 주장은 몇 단계, 몇 갈래로 나눠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크게 논쟁이 되었던 것 중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① 『이방인』에서 레몽의 애인은 무어인("Mauresque")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아랍인과는 인종적으로 다른 것이며 따라서 둘은 혈연관계의 남매일 수 없다. 둘은 실은 비밀 애인 관계인 것이다. (이른바 '기둥서방'설)

   ② 왜 다들 ①과 같은 해석을 도출하지 못했냐 하면, 그것은 김화영씨 등의 "오역" 때문이다. 오역 때문에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이런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던 것이다.


(예컨대 이런 글에서 이정서씨는 반복해서 이를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김화영 번역의 이미지"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http://saeumbook.tistory.com/424 )


(새움 출판사 측이 종종 글을 수정하거나 지우곤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캡쳐를 첨부해둡니다.)



이 둘은 상당히 다른 층위입니다. 이정서씨든 어느 누구든, ①이라고 『이방인』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야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국인 독자들이 ①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해'해온 것이 '번역'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며, 또 이는 다른 언어권 또는 프랑스어를 쓰는 독자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교차 검증해볼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프랑스인들, 심지어 카뮈를 연구하는 프랑스인들마저도 ①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indifference님과 고마해라님 등이 프랑스의 카뮈연구회에 문의하여 답변을 받아냈고, 여기에서 카뮈연구회 측 역시 『이방인』에 등장하는 '아랍인'이 레몽 전 애인과 혈연관계인 남매라는 의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쟁점은 명백하다고 봅니다. 아랍인들 중 한 명이 레몽 옛 정부의 남자 형제입니다. 텍스트 어디에도 그 "무어 여성" 외에 다른 무어인이 특정되어 등장하지 않습니다. 카뮈는 그 아랍인에게 "정부"나 "연인"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 자세한 과정은 여기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indindi.egloos.com/7134167   http://indindi.egloos.com/9001556


저는 굳이 카뮈연구회의 '권위'에 기대어 이정서씨의 '해석'이 틀렸음을 인정하라고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카뮈의 이방인을 꼼꼼하게 읽은 프랑스인들 역시 '기둥서방'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이정서씨의 ②번 주장이 틀렸다는 것만은 아주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해석의 차이는 번역/오역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정당방위'설에 대한 논란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입니다.






사실 이정서씨와 새움출판사측은 이미 이런 문제들이 '번역의 문제가 아닌 해석의 문제'임을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난 해석자가 아니고 번역자이므로"

"그런 것들은 해석의 문제이지 번역의 문제는 아니라고도 하십니다."



( http://saeumbook.tistory.com/424 에서)


(http://saeumbook.tistory.com/440 의 댓글에서)


물론 번역과 해석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역자가 그 상황, 그 장면, 그 메시지를 어떻게 머릿속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에 영향을 미치고, 번역 능력과 방향에 따라 해석도 차이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별개의 면이 있지요.

하지만 이정서씨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이것이 오역으로 인해 비롯된 오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창 레몽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던 중, 해석의 문제를 좀 더 제대로 다투지 않고 엉뚱하게 김화영씨의 번역을 비판하는 연재를 개시한 것에서도 엿보이는 태도입니다.






이정서씨 번역본의 여러 가지 오역들, 그리고 역자노트에서 '오역'이라며 지적한 것들의 오류나 과잉에 대해서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알라딘서재에서는 jaibal 님이 조목조목 지적을 하고 있으시고, (http://blog.aladin.co.kr/717050193) indifference님이나 고마해라님 등도 댓글과 블로그 등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셨습니다. (http://indindi.egloos.com/9008511)


이는 대체로 이정서씨 번역에 오역이 존재한다는 지적과, 이정서씨가 김화영 등의 오역이라고 지적한 역자노트 내용이 오류이거나 과잉이라는 지적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후자의 지적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입니다.






저는 새움출판사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 측은 이 논쟁에서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미 설득력 있게 검증된 문제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고, 명백하게 자신들의 오류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법적인 조치' 등의 언급을 하며 논의를 위축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정서씨 개인 블로그에서 행해지길 바랐다고 하지만, 그 뒤에도 정작 이정서씨 개인 블로그에 올라오던 글들을 출판사 공식 블로그로 그대로 복사해오던 것은 새움출판사 측입니다... -_-)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서 언급한 ②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해석의 차이가 과거 역자들의 번역-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이미 거의 확실하게 검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 자신과 다른 독자들의 작품 해석 차이가 과거 다른 역자들의 오역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공격대상이 되었던 역자들 등에게 사과해야죠.

그리고 적어도 이런 인식("해석의 차이는 오역 때문이었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었다"라는 홍보 문구나 역자 인터뷰의 내용, 역자노트의 일부 내용 등을 수정하고 이미 이를 구매한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작품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자신과 다른 사람 간의 작품해석의 차이가 생긴 것이 오역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새움출판사 『이방인』의 역자노트가 많은 오류와 과잉, 인격적 모욕 등이 있다는 설득력 있는 지적이 많습니다. (뱃고동 논란, 몽삐스 논란, 기타 등등)

그러므로 이후의 판에서는 최소한 이 '역자노트'를 빼거나, 아니면 이정서씨가 번역과정에서 찾은 유의미하고 오류가 아닌 내용 일부만 역자의 말 형태로 남기는 것이 온당한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로서도 이렇게 하고 책 값을 내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잘못된 지적 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하구요.

이정서씨가 애써 번역한 책 자체를 전량회수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 말도 이정서씨가 먼저 꺼냈지만) 그러나, 본인이 애써 번역했다고 하는 소설 본문에 들어간 노고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자노트' 부분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를 이정서씨 등이 고집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본인이 자신의 번역이 더 낫다고 자신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본문만 내면 될 문제입니다.

다만 이는 제가 프랑스어 등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은 아닌 듯하고 프랑스어나 프랑스어-한국어 번역을 잘 아는 분들이 더 잘 말씀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새움출판사는 이미 자극적인 홍보로 많은 수익을 올렸을 것이며, 이 중 상당수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야 옳습니다.


이제 와서 팔려나간 책들을 회수하거나 환불시키기도 어렵다면, 적어도 새움출판사측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이 떨어지거나,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새움출판사나 이정서씨의 잘못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정서씨나 새움출판사가 번역자이자 출판사로서 책임감과 윤리적 관념이 있다면, 제발 부디 언행과 태도를 바꾸고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독자 분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10대 때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 등을 인상깊게 읽었고 좋아했던 독자로서 한달 정도 이 논쟁을 쫓아다니며 보았습니다. 며칠 정도 일이 바빠서 제대로 못 보고 있었는데 많은 일이 일어났더군요. 더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해봅니다.




첨언하여, 아동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등 가정폭력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해온 사람으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이정서씨의 레몽에 관련된 여러 발언들은 아주 불쾌하고 또 번역/해석 논쟁과 별개로 이야기해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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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정서 씨 태도는 매우 불쾌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이 작품 해석과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니 참 답답합니다.

    그나저나 새움지기님이 제 블로그의 주소와 닉네임도 구분 못하는 것을 보고.... 뭐랄까요.... 그냥 말이 안 나옵니다.

    2014.05.21 09:50 [ ADDR : EDIT/ DEL : REPLY ]
    • 이정서씨가 김화영씨의 '오역'이라고 말하는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는 레몽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인데, 이야말로 번역이 아닌 해석의 문제 아닌가 싶습니다. 이정서씨의 레몽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판단은 정말 그 기준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근데 indifference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새움지기가 "indindi"라고 쓴 거 보고 애칭 같아서 살짝 웃었었습니다 ㅎㅎ

      2014.05.22 02:01 신고 [ ADDR : EDIT/ DEL ]
  2. 저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가 이정서라는 사람이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순수하게 오역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방인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이방인에 사용한 같은 마케팅을 이제 영문학 번역에 다시 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영어 단어, 문구,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게다가 이방인 때와 마찬가지로 엉뚱한 해석까지 하더군요. 개츠비는 합법적으로 돈을 벌었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 독자는 모두 기존 번역물이 오역을 한 탓이라고. 아프리카에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가 아프리카도 아니고 한국에 이런 수준의 번역이 나와선 안된다고 봅니다. 그 사람은 나팔이 있고 우리는 각자 소리가 작으니, 소리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요? Help!

    2017.01.26 14:0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프랑스어는 못해도 영어는 좀 할 줄 알았는데 어김없이 어이없는 해석들이 난무하더군요 ㅠ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등에서 글을 기고해볼까 싶다가도, 그렇게 하는 게 결국 또 새움출판사 인지도를 높여주고 '이런 흥미로운 논쟁이 있다니 새로 번역한 걸 사야겠다'하는 식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그래도 기획이라도 해볼지...

      2017.01.28 12:08 신고 [ ADDR : EDIT/ DEL ]
    • 새움출판사에 댓글로 남기신 글들을 예고도 없이 삭제해버리곤 하니, 블로그에 댓글 남기신 건 따로 백업해두시길 추천합니다

      2017.01.28 12:09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11. 4. 1. 07:18

어떤 세계인권선언 번역의 묘한 생략

현병철은 문제지만 문제는 현병철이 아니다

공현


이상한 ‘세계인권선언’의 발견

사실 그 번역문을 올해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2008년 12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서 2008 인권선언 운동을 준비할 때, 세계인권선언 내용을 봐야 할 일이 있어 찾아보다가 국가인권위원회 사이트에서 한 번 흘끗 봤다. 하지만 당시에는 찾으려고 하던 조항을 찾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미처 문제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다른 계기로 자세히 읽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세계인권선언 읽기 운동을 하면서 공식 게재했던 세계인권선언 한글 번역문, 그 중에서도 전문(前文)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그 번역문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청소년인권수첩』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독일의 크리스티네 슐츠 라이츠의 인권교육용 책을 번역한 것인데, 나도 몇몇 절을 한국 상황에 맞게 새로 다듬는 일을 했고 또 몇 개의 장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과 청소년인권 문제에 관한 저술을 청소년인권활동가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공저자가 되었다.

그런데 2010년 12월경에 출간된 『청소년인권수첩』을 받아서 찬찬히 읽다보니, 책 제일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세계인권선언”이 눈에 딱 걸렸다. 전문의 내용이 아무리 봐도 영 내 기억이랑은 딴판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는데, 다음에는 ‘아니 이거, 출판사는 대체 어디서 이런 번역본을 구해서 실은 거야? 역자가 이렇게 번역한 건가?’라고 생각하고 출판사에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책에 실린 세계인권선언 끝에는 떡 하니 출처라고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세계인권선언 국어 번역문”. 아니 이런. 이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번역문이라니. 다시 한 번 찾아보니까 2008년에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운동을 한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 발표한 바로 그 번역문, 나도 한 번 흘끗 봤던 그 번역문이 이 번역문이었던 것이다.

저항권, 법치주의 등의 내용 누락

자, 이쯤 되면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문제라는 건지 궁금하실 것이다. 전문이 그렇게까지 긴 것은 아니니까 여기에 첨부하도록 하겠다.

인류 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 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은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유엔헌장은 이미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했고, 보다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 진보를 촉진하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엔총회는 이제 모든 개인과 조직이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국내적 국제적 조치를 통해 회원국 국민들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모든 인류가 ‘다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 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이렇게만 보면 뭐가 누락된 건지 잘 모르실 테니, 비교할 만한 다른 번역문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아래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게재한 세계인권선언 번역문이다.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됨을 인정하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가 일반인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국가간의 친선관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긴요하며,
국제연합의 여러 국민들은 그 헌장에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더욱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개선을 촉진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회원국들은 국제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증진을 달성할 것을 서약하였으며,
이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이러한 서약의 이행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므로,
따라서 이제 국제연합 총회는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세계인권선언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 및 회원국 관할 하의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하여 힘쓰도록, 모든 국민들과 국가에 대한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단순히 표현상의 차이뿐 아니라 내용이 다른 부분이 제법 있다. 특히나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라는 내용이 통째로 누락된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원래의 뜻에 부합하는 쪽인지는 명백하다. 왜냐하면 영어본에도 “Whereas it is essential, if man is not to be compelled to have recourse, as a last resort, to rebellion against tyranny and oppression, that human rights should be protected by the rule of law”라고 해서 그 내용에 해당하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번역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생략하고 누락시켜가며 한 것일까? 단순히 번역 솜씨나 의역과 직역 사이의 차이일까? 확실히 한국어 문장 자체로만 볼 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번역문의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것 같긴 하다.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이 번역문에 관해서 ‘낭독용’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의역이든 낭독용 편집이든, 그 본래의 내용을 잘 살리는 범위 안에서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통째로 누락된 문단은 그렇게 가볍게 생략해도 될 내용이 아니다. 그 부분은 때때로 “인권이 짓밟힐 경우에는 사람들은 폭정과 압제에 맞서 저항을 할 수 있다.”라고, 세계인권선언의 조항으로는 포함되지 않은 저항권의 뜻을 담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되곤 하는 문구이다. 또한 인권이 법의 지배―법치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 역시 인권과 법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중요한 문장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 전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는 괴상한 오역을 한 것이다.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 실수인가 고의적인 음모인가

이 ‘묘한 번역’ 또는 ‘묘한 생략’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원래 인권 분야의 글을 번역할 때는 어휘의 선택이나 개념의 사용 등에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나 경험이 필요하다. 예컨대 "personal liberty"를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적 자유”라고 번역한다거나, "punitive damages"를 “징벌적 손해배상”이 아니라 “가혹한 손해액” 같은 식으로 번역한다면 내용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금까지 번역 작업에서 그 분야에 관련된 인권단체나 인권활동가들에게 감수를 부탁하고 함께 작업을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 세계인권선언문 오역 역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단체들과 소통과 협력을 잘 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실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낭독용으로 길이를 줄이고 편집을 하다 보니, 실무자 또는 번역자가 그 구절의 중요성을 미처 모르고 생략해버렸는데, 인권단체 등에 의견을 구하거나 협력을 구하지 않고 추진하다보니 그 구절을 누락시킨 게 얼마나 중대한 오역이었는지를 몰랐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좀 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전문 중에서도 인권의 저항적 내용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있고, 또 인권이 법의 상위 가치임을 보여주는 이 구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게 싫었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뺐을 수도 있다. 일종의 음모론처럼 들릴 법한 해석을 하자면, 국가인권위원회는 저항적인 인권을 국가가 포섭하기 위한 국가 기구이고 세계인권선언을 이렇게 번역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뭐, 사실 굳이 그렇게 적극적인 검열이 아니라 해도, “이 구절은 앞으로 내세우기에 좀 그런데”, “이건 인권의 샤방샤방한 느낌과는 좀 안 맞는데” 정도의 껄끄러움만으로도 그 구절을 쉽게 삭제할 수 있었을 법하다.

현병철은 문제지만 문제는 현병철이 아니다

『청소년인권수첩』에 실을 세계인권선언 한국어 번역문을 찾던 출판사로서는 사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공인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히려 문제가 많은 선택이었을 줄이야. 나는 이미 1쇄가 간행되고 있는 『청소년인권수첩』에 국가인권위원회의 번역문이 버젓이 실려 있고 그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게 될 거라는 사실에 아찔해지곤 한다. 더군다나 내가 공저자로 있는 책이라서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 번역문을 가지고 60만 읽기 운동을 했다는 걸 생각해보고 한층 더 아찔해진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국가 공식 인권기구의 ‘뻘짓’ 하나가 이렇게 큰 폐해를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쓴 다음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전화를 하든 공문을 보내든 해서 정정을 요구하고 『청소년인권수첩』에 실린 번역문 역시 바꾸도록 할 생각이다.

이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운동은, 현병철이 아니라 안경환 위원장 시절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번역 역시 안경환 위원장 때 이루어졌다. 물론 무자격에 인권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병철이 위원장으로 있는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현병철 체제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제는 단순히 현병철 또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번 세계인권선언문 번역의 문제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 아닐까? 그것이 협력 부족에서 비롯된 실수이든, 고의적인 누락이든. 단순히 “현병철 어떻게 퇴진시킬 또는 정신 차리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등의 좀 더 적극적인 질문과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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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44 호 [기사입력] 2011년 03월 29일 11:11:47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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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거 인권오름 메일링으로 받고 아 이건 공현이 쓴거구나 하고 느낌 ㅋㅋㅋㅋㅋㅋㅋ

    2011.04.02 22:26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