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6. 3. 24. 13:34

[공현의 인권이야기] ‘소비자’의 권리를 넘어서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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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소비자여야 하는가 아닌가

“우리가 교육의 소비자인데 학교/교사가 우리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학생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만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간혹 듣게 되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교육을 ‘서비스’로 보고, 학교도 ‘교육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수요자(소비자)의 요구에 맞추라고 하는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 속에서 학생들이 겪는 현실은 모순적이다. 어느 서비스에서 소비자, 고객을 그렇게 막 대한단 말인가.

물론 답은 명확하다. 어느 대학 총장이 “학생은 피교육자일 뿐”이라고 밝혔듯이, 교육의 그림 속에서 학생들은 소비자가 아니다. 그 친권자‧부모들이 소비자일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차라리 ‘상품’에 가까운 위치다. 교육의 결과물로 Before(이전) After(이후)를 보여줘야만 하는 존재들. 노동자처럼 밤늦게까지 학교나 학원에 붙잡혀 공부를 해서 ‘스펙’을 높여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임금이나 노동3권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성적을 입증하고 전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제발 소비자 정도의 대우만 받아도 좋겠다.”라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는 과연 학생이 소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을 반대해온 사람들은 교육소비자니 교육수요자니 하는 말 자체에 경계심부터 가지고 보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육을 시장적 모델로 보게 되고 경쟁과 차별이 만연하고…’ 하는 이야기 말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소비자이면 안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매력에 따른 차별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공교육은 일단은 많은 부분이 무상이라서 와 닿는 소리는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험은 대개가 ‘제법 괜찮은’ 것이다. “손님은 왕이다” 같은 말로 대표되듯이 많은 감정노동자들의 친절과 봉사도 받을 수 있다. 물론 불량한 제품과 서비스 제공, 알 권리 무시 등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겠지만 수는 적은 편이며, 소비자는 그런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 결국 ‘학생인권 보장’이라는 게 학교가 학생을 고객처럼 모시는 것, 또는 학생이 소비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도 생겨난다.

시장주의적 접근, ‘소비자’ 모델이 가지는 한계를 나는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곤 한다. “소비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의결할 수 있나요?” 소비자는 구매력이 있다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고 봉사를 제공받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 중에서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소비자는 기업의 바깥, 결정과 생산 영역의 바깥에 있다. 만일 학생이 소비자라면, 학생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교육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참여할 권리도 없을 것이고, 학교의 편의에 따라 소비자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지금 정부가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듯이. 우리가 민주적인 학교를 요구하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그것은 ‘소비자’의 위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애초에 ‘교육’이라는 과정은 교사에 의해 제공되는 서비스를 학생이 받기만 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소비자’라는 개념에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위 사진:교육청의 시각을 보여주는 홍보포스터

소비자에 머물지 말아야 할 이유

운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도, 정부가 인권이나 복지를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을 ‘소비자’처럼 생각하는 많은 경우와 마주치게 된다. 여러 복지정책이 그렇고, 심지어 정치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이제는 ‘정치 소비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소비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소비자로서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를 보면, 학생들이 소비자 대우라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정치소비자협동조합’을 표방한 조직이 직접민주주의와 능동적 참여를 주창하는 것을 보면 약간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문제점도 명확하다. 먼저 구매력이 적은 사람들은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일례로, 거대 정당들의 주류 정치인들은 이번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표가 적을 것 같아 보이는’ 성소수자보다는 혐오세력에 동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밖에도 많은 소수자들, 표가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의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 아예 정치구매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논외가 되어 버린다. 경쟁은 ‘공급자’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표로 정치를 사고, 정치인들이 표를 받고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를 ‘판매’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보편적 인권 보장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표의 주인을 넘어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 ‘소비자’는 함께 참여하고 만들고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다. 주어진 상품들 중에서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함께 만들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일견 소비자는 많은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선택할 권리 말고는 많은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본래 왕은 단지 좋은 대접을 받고 호화로운 의전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의 주권자이며 결정권자이다. 왕은 ‘고객’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비자’와 ‘왕’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많은 경우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소비자의 권리 이상으로 주인의 권리가 필요하고, 평등한 참여와 공동의 연대(책임)가 필요하다.

상품이나 노예, 없는 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의 자리는 신분상승처럼 느껴지기 쉽다. 모든 것이 시장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위치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권은 ‘소비자’의 권리와는 다르다. 인권운동이 ‘소비자 마인드’를 경계하는 것은 단지 시장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그 걸로는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야기하고 추구하는 인권은 그 이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78 호 [기사입력] 2016년 03월 23일 18:37:3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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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10. 17. 16:10

(대학입시거부선언운동 포스터)
http://cafe.daum.net/wrongedu1




줄 세우기 무한경쟁교육에 반대한다


교 육의 목적은 우리가 좀 더 사람답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육은 과연 어떤가요? 사람을 점수 매기는 것, 줄 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경쟁시키는 것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수능과 대입은 우리의 수학능력을 검정해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평가로 우리를 등급으로 나누고 줄 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숫자로 점수 매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어떤 이는 숨 막히는 압박감을 견뎌내야 하고, 어떤 이는 아예 경쟁에서 밀려난 낙오자 취급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가치는 점수로 성적으로 등수로 백분위로 매겨지고 있습니다. 이건 인간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상품을 위한 품평이고 경쟁일 뿐입니다. 무한경쟁은 교육이 아닙니다. 줄 세우기 무한경쟁교육에 반대합니다.



획일적인 정답만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주입식교육에 반대한다


시 험을 위한, 경쟁을 위한 교육은 우리들에게 정답을 외울 것을 강요합니다. 주어진 정답을 얼마나 잘 외웠는지, 시험을 내고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가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교육은 학생들이 함께하는 과정이 아니라 교사가 강사가 조용히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답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일방적인 과정이 됩니다. 이런 교육이 학생들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요?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입니다. 학생들에게 이미 정해진 정답을 일방적으로 외우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찾아가고 체험하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입니다. 다양한 답을 인정하는 교육, 체험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교육, 참여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원합니다.



교육과정에서 학생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학 생들은 학교에서 인간으로서의 여러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두발복장단속, 숱한 차별들, 폭력들이 당연한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학생들이 목소리를 냈다가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경쟁의 압박이나 공부 부담 그 자체가 인권침해가 됩니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수직적인 권력관계를 내면화한 학생들 사이에서도 차별과 폭력이 일어나곤 합니다. 몇몇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많습니다. 학교가 더 효율적으로 값싸게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것은 학생인권침해의 원인입니다. 이는 인간보다 학생보다 성적이, 입시가, 성과가 더 중요시되는 비정상적인 교육의 모습입니다.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육 과정에서 우리의 인권은 더욱 잘 보장되어야 합니다.

 


교육의 목표가 입시와 취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 육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우리의 소질을 계발하고, 사람답게 더 잘 살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입시준비학원, 취업준비학원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입시나 취업에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교육이 시험을 보기 위한 도구, 생존을 위한 스펙 쌓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입시, 취업 위주의 교육은 그 내용도 우리들의 삶에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는 ‘시험 봐서 점수 매기기 좋은 것’들로 채워집니다. 그럴수록 지식은 삶에서 동떨어지게 되고, 학생들이 진짜로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교육의 목표가 입시와 취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 체험과 만날 수 있는 교육을 요구합니다.



누구나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예산이 확보되어야 한다


대 학등록금은 1년에 수백만원, 학교에 따라서는 천만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학교육은 돈 많은 사람들만이 별 부담 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대학 뿐 아니라 고등학교 학비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치솟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육열"은 단지 정부가 사회가 교육을 함께 책임지지 않고 개인의 부담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어느 학교든 전반적인 교육예산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학교 시설은 열악하고, 교사의 종류와 수는 부족하고 학급당 학생수는 너무 많습니다. 교육예산 부족은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좋은 교육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라 모두가 누리는 권리입니다. 사회에서 정부에서 교육에 많은 예산을 배정해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의 완전한 무상교육, 보편적인 교육 환경 개선을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대학을 가야 한다는 편견과 강요에 반대한다


한 국에서 대부분의 중고등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꼭 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대학 진학율이 80%를 넘어서는 현실에서, 일단 대학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대학을 가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은 낙오자나 못난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성공한 삶’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단 대학이라는 공인된 기관을 졸업해야만 좀 먹고 살 만하다는 경제적인 이유부터,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거부감이 있습니다. 대학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 더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하나의 선택지여야만 합니다. 대학 밖에서도 다른 많은 공부나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을 모두가 가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에 반대합니다.

 


대학과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학벌차별과 학벌사회에 반대한다


이 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고졸보다는 대졸이, 대졸 중에서도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더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임금부터 시작해서 많은 상황에서 차별을 받게 되고, 사람들도 학력과 학벌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곤 합니다. 이런 사회의 모습은, 모두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그리고 더 이름값 있는 대학을 가야 한다는 압박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결코 학력이나 학벌만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습니다. 학력이나 학벌에 대한 차별이 사라져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고, 평등한 기회가 보장될 수 있습니다. 학력과 학벌에 대한 차별들을 금지하고 사람들의 차별적인 생각들을 바꿔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누구나 최소한의 먹고 사는 걱정 없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을 것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사회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 리 사회의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배경과 학력, 학벌을 확보해둬야 좋은 직업을 가지고 소득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조금만 삐끗하면 저소득층, 빈곤층으로 추락할 거라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지금과 같은 경쟁교육과 사회를 유지하는 악순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 대학을 가지 않고 특출난 능력과 운으로 억만장자가 된다고 해도 그건 극소수의 이야기일 뿐, 오히려 그런 운과 재능이 없는 많은 이들을 대학에 목을 매야 합니다. 생존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집을 잃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회보장과 복지제도를 바꾸고 경제구조를 바꿔가면서, 모두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를 요구합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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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9. 21. 17:36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소식지인 아수라장 ( http://news.asunaro.or.kr/ )에 싣기 위해 쓴 글입니다.





무상급식 그거, 참 별거 아닌데


  지난 8월 24일, 서울에서는 무상급식의 지원범위와 대상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제는 전(前) 서울시장)의 꼼수로 들어간 시행 년도나 "단계적", "전면적"과 같은 문구를 빼고 그 논쟁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는 결국 "소득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초등학생/중학생에게"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인지, 아니면 "소득이나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만" 급식비를 면제할 것인지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무상급식"이란 것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급식을 따로 급식비 받지 않고 제공하는 정책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건 바꿔 말하면 그냥 무상급식을 할 거냐 말 거냐의 논쟁인 셈이다.

  입장을 막론하고, 지금 한국에서 '무상급식'에 대한 논란은 과열되어 있다. 한국 정부의 예산이 한 해에 200~300조를 넘는 게 보통인 마당에, 그 1%도 안 되는 몇천억 정도1) 예 산 더 쓰는 것 가지고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상급식 하나 한다고 보편적 복지가 시작되고 학교에 차별이 사라지며 공동체의식이 길러지고 가계에 보탬이 된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결국 "무상급식"을 하나의 상징 삼아서 복지정책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내세우며 싸우고 있는 건데, 이 "무상급식"이라는 게 아무래도 덩치도 작고 복지 정책으로서 실제로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닌지라 논쟁이 자꾸만 산으로 가게 된다. 그러니, 이 조그마한 무상급식 하나 가지고 그리 아웅다웅 하는 꼴이 안타까울 수밖에.


무상급식의 인권적 의미와 장점?

  뭐 어찌 되었건 나는 무상급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편이다. 교육권과 먹을 권리는 인권 중의 하나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수준을 보장받아야만 한다. 특히 국제인권협약들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동등하게 개방되도록 하기 위해서, 초등교육은 무상이어야 하고 국가는 그럴 능력만 있다면 중등교육, 고등교육(대학)까지도 점진적으로 무상화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설령 빈곤층에게 교육비를 면제하거나 지원하는 등의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육비를 면제받기 위해서 별도의 증명 절차 등을 거쳐야 하는 그 자체가 교육을 받는 데 하나의 장벽이 되기 때문에, 교육은 공짜가 되어야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급식 역시 교육과정의 일부이고 교육에 들어가는 돈이기 때문에 무상교육 원칙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니, '먹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엄격한 적용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무상급식을 포함한 무상교육은, 우리 사회가 사람의 먹을 권리, 그리고 교육받을 권리를 사회가,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당연한 권리로 평등하게 보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친권자들에게, 모든 시민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야 비로소 교육은 친권자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는 '투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권리가 된다. 친권자가 자녀에게 "내가 내 돈 내서 너 학교 보내니까 내 말 들어!"라고 윽박지르는 소유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가 책임지는 보장적 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상교육, 무상급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만화. 시사IN 205호(2011.08.20.) 중에서 인용


  또한 무상급식은 효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본래 '선별적 복지'에는 '선별'에 대해 추가적인 비용이 들게 된다. 국가가 개인의 정보를 모으고 사용하는 걸 제한하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부처들이 개인의 소득이나 재산 전체를 파악하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때문에 빈곤층에게 급식비를 면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빈곤층인지를 입증하고 확인하고 선별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 사람이 정말로 빈곤층인지를 선별하는 과정 자체가 다 공무원들 인건비 등등 돈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오세훈 전 시장께서 주장하신 돈 못 버는 하위 50%만 급식비를 면제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의 맹점도 여기에 있다. 지금처럼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그 이하를 파악하는 방식에서도 여러 맹점이 생기는 판국에, 전체 시민들의 소득을 파악해서 그걸 반으로 자르는 선을 정하고, 그 선 위인지 아래인지를 다 선별하도록 하겠다고 한 셈이니, 행정적으로 가능한 일일 리가 없다.

  보편적인 복지를 하게 되면 소득을 파악하는 것은 세금을 징수하는 국세청에서만 하고, 대신에 소득과 재산이 더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많은 합당한 세금을 내도록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 외의 다른 복지 시스템에서는 선별에 들어가는 절차와 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세금 정책과 함께한다면 보편적 복지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물론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방식이 나은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이 나은지는 그때그때 영역과 성격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무상급식 따위!

  가끔, 내가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것을 놓고 그런데 왜 복장자유화에는 찬성하냐고 딴지 거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는 무상급식을 단순히 '상대적 박탈감', '눈칫밥' 정도 수준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듯싶다. 일단 복장을 자유화함으로써 생기는 개성의 자유 실현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급식을 유상으로 함으로써 생기는 일은 도저히 없을 것 같으니, 이 둘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수다. 만일 이처럼 무상급식과 강제교복을 비교하려면, 무상급식이라는 게 도시락을 싸오거나 외출해서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뜻하기라도 해야 한다. 뭐, 지금 많은 학교들이 도시락을 싸오거나 외출해서 다른 음식을 사먹는 것 등을 금지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급식비를 학교가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로, 학교의 억압적이고 일괄적인 방식과 문화의 문제이다. 특히나 학교들은 급식 자체에서도 학생들의 선택권을 더 늘릴 필요도 있겠고. 급식의 질 향상과 식단의 다양성, 선택권 보장은 무상급식 이후에 급식을 계속 개선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아니면, 무상급식과 강제교복을 비교하려면, 교복이 모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거나 모든 학생들, 청소년들에게 옷을 살 돈이나 상품권이 주어지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솔까말, 나는 강제교복을 없애고 복장을 자유화하면 돈이 없어서 옷을 못 사는 빈곤층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에, 그러면 옷 살 돈을 정부에서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 이 역시 무상급식처럼 가능하면 모든 청소년들에게 충분한 옷 살 돈을 주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일 터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미안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대부분의 '경제적으로 좀 사는' 나라들에서는 현실이다! 아동수당 제도라고 들어보셨는가? 아동수당은 1926년에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작된 건데, 아동이 있으면 소득이 얼마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그 집에 돈을 주는 제도이다. 국가에서 양육을 책임지는 방식인 것이다. 독일은 월 184유로(약29만원정도)에 아동이 많을수록 추가수당이 있고, 스웨덴은 16세 이하 아동에게 월 950크로나(약12만원)에다가 학교에 다니면 주는 추가 수당, 병이 있으면 주는 추가 수당, 아동이 많으면 주는 추가 수당 등 여러 추가 아동수당이 있다. 이웃 나라 일본 역시 2010년부터 15세 미만 아동 1인당 월 26000엔(약36만원 정도)의 아동수당을 준다. 지금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좀 사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에 가입한 국가들 중에 아동수당 제도가 없는 데는 미국, 터키, 멕시코, 한국뿐이다. 2)

  그래서 최근에 독일에 가있는 분이 한국의 무상급식 논란 이야기에 대해 독일은 무상급식을 안 하는 이유를 얘기하길 ① 독일은 오후까지 수업을 안 해서 학교에서 밥을 안 먹는 경우가 많고 ② 독일은 급식을 무상으로 주기보다는 급식비나 밥 사먹을 돈을 국가에서 준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무상급식을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후진성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 흑흑.

  물론 아동수당이 한국에 도입되면 죄다 사교육비로 지출하고 말 거라는 씁쓸한 예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아동수당 제도를 도입하면 친권자들이 가지는 그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벌어서 너에게 돈을 이만큼 투자했다." 하는 의식은 많이 누그러질 거라는 생각도 든다. 또한 그 돈이 반드시 아동․청소년들에게 독자적으로 쓸 수 있는 용돈/생활비의 형태로 쥐어지게 만드는 제도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기사 그런 식으로 따지면 무상급식 덕에 굳는 급식비마저도 사교육비로 지출될 가능성이 있으니, 이건 복지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쟁교육의 문제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무상급식을 생각할 때마다 영 찝찝하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고등학교, 대학교도 모두 무상교육으로 만들라는 요구쯤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최소한 아동수당은 되어야 좀 복지 정책으로서 제대로 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기본소득3)은 못할망정. 그러니까 이제 우리(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들)도, 좀 강하게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라에다가 우리한테 돈 좀 내놓으라고. 아동수당도 내놓고 교육비도 좀 더 쓰라고. 체벌을 하라고 하지 말고 교사 수, 교실 수를 늘리라고. 빈곤층 핑계 대며 교복을 입히지 말고, 옷 사 입을 돈을 내놓으시라고. 그 별 거 아닌 무상급식 따위 하나 가지고 벌벌 떨지 좀 말란 말이다!





1) 주민투표 당시 자료를 보면, 서울시 초등학교 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실시에 필요한 예산이 약 600억 수준이었다. 급식 질을 좀 더 높인다고 해도 900억 정도일 테니, 전국 실시에는 최대 4000억 이하일 것이다.

2) 한국에서도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 대표 발의하여 12세 미만까지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던 적이 있다. 당연히 아직 통과 안 됐지.

3) 모든 국민들에게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 쉽게 말해 매달 모두의 통장에 30만원씩 국가가 입금을 해준다고 상상해보시면 된다. 보편적 복지 중 현금 부문의 완결판.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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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ㄷㄷ

    쓰레기같은글 잘읽었습니다

    2011.09.22 01:26 [ ADDR : EDIT/ DEL : REPLY ]
  2. ㅇㅇ

    "한편에서는 아동수당 제도를 도입하면 친권자들이 가지는 그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벌어서 너에게 돈을 이만큼 투자했다." 하는 의식은 많이 누그러질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은 진보적 상식 - 애들 키우느라 뼈빠진다(그래서 복지가 확충되어야 한다) - 속에 감춰진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신선하네요.

    2011.09.22 14:20 [ ADDR : EDIT/ DEL : REPLY ]
  3. 하얀저고리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2011.09.25 10:20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0. 7. 1. 03:13

청소년들이 독립적으로 살기 위한 조건은?

청소년의 입장에서 본 기본소득 운동

공현



기본소득은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보장한다는 구상이다. 재산이 있든 없든,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에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 개개인에게 매달 균등한 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무상급식이나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현물 급여에 속하는 데 비해 기본소득은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개개인에게 기본소득을 얼마씩 보장해야 할지는 주장하는 사람이나 모델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최저생계비 안팎에서 왔다 갔다 하는 듯하다. 정부에서 정해둔 최저생계비(꽤나 적지만) 기준으로 보면 대략 50만 원 정도인 셈이다.

한국에서는 작년부터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꾸려져서 기본소득 운동을 해가고 있다.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기본소득과 기본소득 운동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기본소득과 여성’, ‘기본소득과 장애인’, ‘기본소득과 청소년’ 같은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있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연계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득이기 때문에 기존의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에서 배제되어 있거나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이 더 큰 이해당사자가 된다. 그 일환으로 지난 6월 19일, 기본소득네트워크의 제안으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대학생사람연대가 공동 주최한 ‘기본소득과 청소년’ 토론회가 열렸다.



가족과 교육을 변화시키는 기본소득

첫 발제자인 기본소득네트워크 김성일 씨는 “간섭받지 않을 자유”,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전제 조건으로서 기본소득의 개념과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 다음으로 기본소득 도입이 학교․교육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가정․가족에서 청소년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리고 개인화․시장화 된 교육과 대학, 20대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기본소득의 의의 등에 대한 발제들이 이어졌다. 발제자들은 대체로 여러 가지 문화적, 제도적 걸림돌이 있긴 하지만, 기본소득이 청소년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기본소득은 지금까지의 가족, 세대 중심의 복지 정책과는 달리 개인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복지제도의 중점을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두는 것 자체가 패러다임의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제도는 우선 가족(정확히는 부모나 보호자, 후견인 등)의 경제력에 종속되어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밑받침이 된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자의든 타의든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청소년에게 아주 어려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사회와는 달리, 가족의 틀을 벗어나더라도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10대, 20대가 자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한 소위 ‘정상가족’을 가진 청소년과 그렇지 못한 청소년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도 보탬이 될 것이다.

청소년들이 기본소득을 직접 받음으로써 생기는 변화 외에도,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인해 생기는 사회 변화는 청소년들의 삶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육이다. 교육의 방식과 내용은 노동시장이나 경제 구조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의 사회에서는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력을 쌓고 입시경쟁 및 취업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학력(學歷)과 학벌이라는 차별 기제를 쥐고서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공부하게 만들고,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경쟁에 참여하도록 몰아넣는 모양새다.



만일 기본소득이 도입되어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정규직 노동자나 전문직이 되지 못하더라도 일정한 생활수준이 더 쉽게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이런 경쟁은 완화된다.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이나 고등학교 등을 졸업하지 않는 것의 위험부담이 줄어든다. 기본소득은 사회에서 학교가 갖고 있는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키고, 입시경쟁을 위한 학교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의 삶을 위한 교육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삶 전반에 걸쳐 생계에 대한 두려움과 압력을 줄여주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유를 위한, 투쟁을 위한 실탄”

이날 토론회에서 주로 쟁점이 되었던 것은 기본소득 도입이 과연 그만큼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1살 정도의 아동들에게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지급하고 어떻게 사용하게 할 것이며, 민법상 경제적 권리가 제한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들도 언급되었다. 또한 한국의 문화적 풍토상 기본소득을 부모/보호자/후견인의 간섭 없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대체로 사회 구조에서 기본소득 도입이 과연 얼마만큼 변화를 견인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컸던 것 같다. 자본에 의해서 소비의 주체로만 역할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기본소득을 명품 소비 등에만 사용한다면 기본소득은 그렇게 큰 역할을 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기본소득이 시장화를 극복하는 제도가 되기보다는 전부 사교육비로 들어가는 게 되지 않겠냐는 우려도 나왔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과 계속 학교에 적응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서 상류층이 되는 학생들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결과적인 양극화 문제 등도 토론의 주제였다. 현실적으로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는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큰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영역에서 기본적인 공공재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은 학교와 가정에 종속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삶을 바꿀 가능성을 안고 있는 제도이다. 기본소득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이, 청소년들의 생활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삶은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기본소득은 다른 여러 복지를 포함해 제도·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 가족과 교육, 사회를 바꾸기 위한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운동이 없이는 도입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날 김성일 씨는 기본소득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위한 실탄”이라고 했다.

토론회를 마치고,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제도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든 학교든, 누군가의 눈높이에 맞는 인간이 되고 경쟁에서 승리하고 성적이나 뭔가를 달성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으며 사회 전체가 우리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경쟁과 예속 속에서 살아야 하는 청소년들을 비롯하여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은 그 의미 자체로 즐거운 제도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209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30일 16:36:37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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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6. 17. 16:13


 

"기본소득과 청소년"
:청소년과 기본소득의 적절한 만남

일시 :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14시
장소 : 민주노총 서울본부 1층 아동청소년센터

사회 : 밤의마왕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토론자 :
김성일 (기본소득네트워크) : "기본소득, 간섭받지 않을 권리"
발칙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학교을 엎어버리는 기본소득"
박정훈 (대학생사람연대) : "기본소득과 대학생"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패륜적 기본소득"

주최 :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학생사람연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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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원고는 수정하는 대로 올리겠슴둥;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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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에는 꼭 가야겠습니다. 졸음과 귀차니즘을 이기고서어엉 (어째 서울로 옮기고 나니 귀차니즘이 심해졌어어어) …아, 그리고 혜원이 하고 따이루 씨가 참석하는 지 알 수 있을까요. 별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2010.06.17 16:28 [ ADDR : EDIT/ DEL : REPLY ]
    • 따이루는 올 확률 반반
      혜원은 아마 오려나;; 원래라면 올 텐데 지금 강원도 가있어서... 안 올 확률이 높을걸요

      2010.06.18 17:14 신고 [ ADDR : EDIT/ DEL ]
    • …라고 생각했었는데, 못 가게 되었습니다. 교지 회의 시간이 재조정되었어요! 엉엉엉. (…)

      2010.06.18 22:35 [ ADDR : EDIT/ DEL ]
  2. 오 이거 가보고 싶다. 근데 난 군인이긔... ㅠㅠㅠㅠㅠ

    2010.06.17 18:4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 오고 싶어한다는 것도 좀 의외?

      2010.06.18 17:14 신고 [ ADDR : EDIT/ DEL ]
    • 아니 요즘 심심해서 (...)
      그리고 예전에는 이런거 보더라도 그닥 감흥이 안왔는데,
      군인이 되고 나서부터 좀 감흥은 오더군.
      무엇보다 친구가 뭘 그리 열심히 하나 궁금하기도 하긔 ㅇㅇ

      2010.06.19 09:42 신고 [ ADDR : EDIT/ DEL ]

흘러들어온꿈2010. 1. 27. 15:21


[기고]당신의 ‘근로능력 유무’는 어떻게 점수로 판단되는가?

기초생활수급자 근로능력 판정기준의 반인권성



최예륜


어떤 종류의 절망을 택할 것인가

거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고, 혐오감을 줄만큼 외모가 불결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복지 급여일까…….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짓밟힌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가 복지 수급인가.

올해 1월 1일부터 보건복지가족부가 시행하고 있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가난한 국민들을 정부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더럽고,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제도의 틀에 가둬놓겠다는 것이다. 당장 올해 1월부터 기초생활수급자들은 평가시험대에 올라 생면부지의 평가공무원이 묻는 치욕스러운 문항들에 답하고 온 몸과 정신을 시험하는 차가운 눈빛을 견뎌내야만 한다. 수급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근로무능력자’가 되어 40만원(1인 가구 현금급여기준) 남짓한 수급비를 받으며 관리와 시혜의 대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에서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료급여 수급권 제한(1종에서 2종으로 전환)과 맞바꿔치기하고 희망 없는 일자리(‘자활’의 전망이 부재한 자활사업 참여)에 가둘 것인가. 물론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조차 주어지지는 않지만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상처와 절망은 면할 길이 없다.

근본 배경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한계

2009년 12월 29일 보건복지가족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7조 2항의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 대한 기준을 변경하여 고시했고 그에 함께 근로능력 판단 기준을 새롭게 만든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근로능력 판정제도」를 발표하여 2010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판단하기 어려운, 노동능력 유무를 판별하겠다는 정부의 평가 잣대 만들기 시도는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근본 한계에서 비롯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연령, 성별, 노동 유무, 장애 유무에 무관하게) ‘소득이 일정액(최저생계비) 이하’에 처한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러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시행 10년을 거치며 그 제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생필품 항목을 무차별 생략한 자의적 계측조사와 정부 예산 논리에 짜맞춘 최저생계비 기준이 10년째 점점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다. 2010년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50만원, 4인 가구 136만원에 불과하여 평균소득의 30%를 약간 웃돈다. 재산 한 푼 없어야 통과한다는 최저생계비 기준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춘 후에도, 가족이 있다고(수 십 년째 연락이 두절되었더라도) 간주부양비를 책정한다. 그것도 최저생계비 120%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라도 말이다. 다행히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모두 너무 가난해서 이 기준을 통과한 그야말로 최고로 가난한 수급자들에게 다음으로 닥치는 것은 근로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조항이 기초생활보장법 하의 조건부수급조항이다. ‘근로능력이 있는 자는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수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의료급여법 적용 기준으로 직결되어 버린다.

위 사진:2010년 1월 13일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모습

누군가의 근로능력은 그 어떤 고매한 법으로도 규정할 수 없기에, 기초법도 감히 ‘근로능력자/무능력자’를 명시한 바는 없다. 단지 지난 10년간 돈 많은 지방자치단체, 착한 공무원 만나면 다행이 되어버리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그런데 2009년부터 ‘부정수급자’가 심각하게 늘었다느니 하며 수급기준을 엄격히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복지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비수급 빈곤층 410만 명이 수급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가, 5천여 부정수급 가구를 걸러내는 것이 시급한가! 우선은, 일할 수 있는데도(일할 사회적 환경은 안 되더라도) 일하지 않고 수급비를 받는 사람을 걸러내겠단다. 전체 수급자 160만 명 중 17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2009년 용산구청에서 자행된 수급권자 무더기 강제전환사태는 의사 진단서만으로 근로능력을 판단토록 한 보건복지가족부 지침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파장이 일자,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겠다고 의사협회 등과 머리 맞대고 만든 것이 올해부터 시행되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이다.

수급자 인권 짓밟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의 문제점

복지부의 근로능력 판정기준은 질병, 부상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의학적 평가기준>과 외양과 태도(자세)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활동능력 평가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준으로 ‘근로능력자’를 색출해 자활사업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다. 의도 또한 문제지만 그 발상과 기준, 방식들이 한 마디로 ‘반인권’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우선, 개인의 ‘근로능력’을 타인이 판단하도록 한다는 점 자체가 문제다. 겉으로는 수급자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돕고 싶다면 당사자에게 ‘자활사업’의 전망을 제시하고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이치에 맞다. 자활사업에 참여해도 일반 수급보다 전혀 살림살이가 나아질 전망이 없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노동능력을 계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노동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자활사업을 수급을 명분으로 강요하는 의미밖에 없다. 한 사람의 노동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본인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노동능력이 취약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도 본인이 원한다면 노동을 ‘징벌’이 아니라 삶의 희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판정기준의 문제점이다. 겉으로 아무리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더라도 질병에 대한 의학적 판단기준과 외양과 태도를 관찰한 자의적 판단기준은 ‘근로능력’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복지부는 제도를 내놓으며 ‘근로능력 없는 자’의 기준을 ① 18세 미만/65세 이상, ②중증장애인(1~2급 장애인, 3급 중복 장애인), ③질병․부상 또는 그 후유증으로 3월 이상의 치료 또는 요양이 필요한 자, ④임산부, ⑤공익요원 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에도 위배되는 몰상식한 규정이다. 개인이 처한 조건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일정한 지원을 받으며 노동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대목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③ 집단에 대해 판정기준을 들이대 재평가하겠다고 한다.

셋째, 특히 ‘활동평가’ 기준의 반인권성이다. 활동평가 기준으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면, ‘외모가 혐오스럽고 옷이 더럽고 냄새가 나는지 여부, 집중력 없고 산만한지 여부, 자포자기하거나 작심삼일이 되는 상황여부, 자기 분에 이기지 못하거나 쉽게 좌절하는지 여부, 학력이나 연령 정도’가 평가기준으로 총 10항목 , 40점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총 3점 이하의 점수를 받아야만 근로능력이 없음을 판정받게 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럽고 혐오스런 이미지로 표현해 빈곤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최저생계비 조차 마련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사람들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있다. 더구나 평가 항목별 기준들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들을 고스란히 담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빈곤층이 빈곤하게 된 이유, 혹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마치 개인이 지저분하고 산만하며, 책임감 없고 자포자기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으로 낙인 찍어 빈곤층 개인의 문제인양 환원하고 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층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보건복지가족부가, 빈곤층을 낙인찍는 항목을 만들어 기초생활수급자의 인권을 짓밟고 있다.

위 사진:2010년 1월 13일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모습

수급권자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자

지난 1월 13일 위와 같은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했다. 만들어진 이후 기초생활수급당사자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갈수록 숨통을 조여 오는 제도의 틀에 속한 기초생활수급자도, 듬성듬성한 그물 같은 제도의 구멍에 빠져나와있는 기초생활수급권자도 이제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수급권자 권리를 말살하는 용산구청과 복지부에 항의하며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이 구성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오히려 옥죄어 왔던 기초생활보장제도 이제 10년이면 참을 만큼 참았다. 복지수급은 빈곤한 국민들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임을 수급 당사자의 목소리로,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함께 외쳐야 할 것이다.

덧말. 분노게이지 상승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2009년 12월 31일,「근로능력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규정」(보건복지가족부고시 제2009-243호)를 찾아보시길.


덧붙이는 글
최예륜 님은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으로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에서 활동합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87 호 [기사입력] 2010년 01월 20일 13:12:24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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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8. 11. 1. 10:55



개그경제2기...(정확한 출처를 모르겠다. 동영상 자체야 미인 과외 선생을 부르는데 낚였다는 내용의 개그만화일화인데; 자막은 누가 고쳐넣으신 건지...)

보면서 웃기는 했는데;;

변변한 직업도 없이 자식을 기르면서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있고 자기 집을 재산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절대 흔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_-

물론 저런 상황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의 전도된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는 할 터이다. 국회의원 총선이 뉴타운 투표가 되는 판국이니...
실제로 뉴타운이 되거나 하면 자기 집 없는 세입자들에게는 별 혜택도 없고, 뉴타운 재입주율이 20% 언저리라는 게 현실이지만-_-;



주식투자를 부끄러워 해야 하는 이유 (인권오름)

부동산 값은 떨어지는 게 내 입장에선 좋고-
(아 언제쯤 전세금 할 만한 돈을 모을까.. 내년에 겨우 500만원 달성인데)

주식도 체감은 잘 못하겠다.

다만 물가는 살벌하게 체감이 된다 ㅎㄷㄷ...



문제는 정부는 경제를 살려라, 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달까...
생태주의적 이유에서건 사회주의적 이유에서건 "경제 살리기"에 애초에 동의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뭔가 다른 대안을 모색하자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 프레임은 경제를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로만 사고/표현을 가둬버린다.
그나마 상용구 중에서는 "민생" 같은 단어가 가장 내 고민에 근접할 텐데-

실제적인 삶과 행복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고,
절충적/단계적으로는 복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텐데, 하는 막연한 고민 뿐.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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