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2010. 1. 27. 15:21


[기고]당신의 ‘근로능력 유무’는 어떻게 점수로 판단되는가?

기초생활수급자 근로능력 판정기준의 반인권성



최예륜


어떤 종류의 절망을 택할 것인가

거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고, 혐오감을 줄만큼 외모가 불결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복지 급여일까…….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짓밟힌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가 복지 수급인가.

올해 1월 1일부터 보건복지가족부가 시행하고 있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가난한 국민들을 정부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더럽고,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제도의 틀에 가둬놓겠다는 것이다. 당장 올해 1월부터 기초생활수급자들은 평가시험대에 올라 생면부지의 평가공무원이 묻는 치욕스러운 문항들에 답하고 온 몸과 정신을 시험하는 차가운 눈빛을 견뎌내야만 한다. 수급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근로무능력자’가 되어 40만원(1인 가구 현금급여기준) 남짓한 수급비를 받으며 관리와 시혜의 대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에서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료급여 수급권 제한(1종에서 2종으로 전환)과 맞바꿔치기하고 희망 없는 일자리(‘자활’의 전망이 부재한 자활사업 참여)에 가둘 것인가. 물론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조차 주어지지는 않지만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상처와 절망은 면할 길이 없다.

근본 배경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한계

2009년 12월 29일 보건복지가족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제7조 2항의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에 대한 기준을 변경하여 고시했고 그에 함께 근로능력 판단 기준을 새롭게 만든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근로능력 판정제도」를 발표하여 2010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판단하기 어려운, 노동능력 유무를 판별하겠다는 정부의 평가 잣대 만들기 시도는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근본 한계에서 비롯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연령, 성별, 노동 유무, 장애 유무에 무관하게) ‘소득이 일정액(최저생계비) 이하’에 처한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러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시행 10년을 거치며 그 제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생필품 항목을 무차별 생략한 자의적 계측조사와 정부 예산 논리에 짜맞춘 최저생계비 기준이 10년째 점점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다. 2010년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50만원, 4인 가구 136만원에 불과하여 평균소득의 30%를 약간 웃돈다. 재산 한 푼 없어야 통과한다는 최저생계비 기준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춘 후에도, 가족이 있다고(수 십 년째 연락이 두절되었더라도) 간주부양비를 책정한다. 그것도 최저생계비 120%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라도 말이다. 다행히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모두 너무 가난해서 이 기준을 통과한 그야말로 최고로 가난한 수급자들에게 다음으로 닥치는 것은 근로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조항이 기초생활보장법 하의 조건부수급조항이다. ‘근로능력이 있는 자는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수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의료급여법 적용 기준으로 직결되어 버린다.

위 사진:2010년 1월 13일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모습

누군가의 근로능력은 그 어떤 고매한 법으로도 규정할 수 없기에, 기초법도 감히 ‘근로능력자/무능력자’를 명시한 바는 없다. 단지 지난 10년간 돈 많은 지방자치단체, 착한 공무원 만나면 다행이 되어버리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그런데 2009년부터 ‘부정수급자’가 심각하게 늘었다느니 하며 수급기준을 엄격히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복지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비수급 빈곤층 410만 명이 수급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가, 5천여 부정수급 가구를 걸러내는 것이 시급한가! 우선은, 일할 수 있는데도(일할 사회적 환경은 안 되더라도) 일하지 않고 수급비를 받는 사람을 걸러내겠단다. 전체 수급자 160만 명 중 17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2009년 용산구청에서 자행된 수급권자 무더기 강제전환사태는 의사 진단서만으로 근로능력을 판단토록 한 보건복지가족부 지침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파장이 일자,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겠다고 의사협회 등과 머리 맞대고 만든 것이 올해부터 시행되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이다.

수급자 인권 짓밟는 근로능력 판정기준의 문제점

복지부의 근로능력 판정기준은 질병, 부상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의학적 평가기준>과 외양과 태도(자세)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활동능력 평가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준으로 ‘근로능력자’를 색출해 자활사업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다. 의도 또한 문제지만 그 발상과 기준, 방식들이 한 마디로 ‘반인권’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우선, 개인의 ‘근로능력’을 타인이 판단하도록 한다는 점 자체가 문제다. 겉으로는 수급자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돕고 싶다면 당사자에게 ‘자활사업’의 전망을 제시하고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이치에 맞다. 자활사업에 참여해도 일반 수급보다 전혀 살림살이가 나아질 전망이 없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노동능력을 계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노동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자활사업을 수급을 명분으로 강요하는 의미밖에 없다. 한 사람의 노동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본인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노동능력이 취약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도 본인이 원한다면 노동을 ‘징벌’이 아니라 삶의 희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판정기준의 문제점이다. 겉으로 아무리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더라도 질병에 대한 의학적 판단기준과 외양과 태도를 관찰한 자의적 판단기준은 ‘근로능력’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복지부는 제도를 내놓으며 ‘근로능력 없는 자’의 기준을 ① 18세 미만/65세 이상, ②중증장애인(1~2급 장애인, 3급 중복 장애인), ③질병․부상 또는 그 후유증으로 3월 이상의 치료 또는 요양이 필요한 자, ④임산부, ⑤공익요원 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에도 위배되는 몰상식한 규정이다. 개인이 처한 조건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일정한 지원을 받으며 노동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대목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③ 집단에 대해 판정기준을 들이대 재평가하겠다고 한다.

셋째, 특히 ‘활동평가’ 기준의 반인권성이다. 활동평가 기준으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면, ‘외모가 혐오스럽고 옷이 더럽고 냄새가 나는지 여부, 집중력 없고 산만한지 여부, 자포자기하거나 작심삼일이 되는 상황여부, 자기 분에 이기지 못하거나 쉽게 좌절하는지 여부, 학력이나 연령 정도’가 평가기준으로 총 10항목 , 40점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총 3점 이하의 점수를 받아야만 근로능력이 없음을 판정받게 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럽고 혐오스런 이미지로 표현해 빈곤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최저생계비 조차 마련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사람들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있다. 더구나 평가 항목별 기준들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들을 고스란히 담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빈곤층이 빈곤하게 된 이유, 혹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마치 개인이 지저분하고 산만하며, 책임감 없고 자포자기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으로 낙인 찍어 빈곤층 개인의 문제인양 환원하고 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층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보건복지가족부가, 빈곤층을 낙인찍는 항목을 만들어 기초생활수급자의 인권을 짓밟고 있다.

위 사진:2010년 1월 13일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모습

수급권자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자

지난 1월 13일 위와 같은 반인권적 근로능력판정기준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했다. 만들어진 이후 기초생활수급당사자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갈수록 숨통을 조여 오는 제도의 틀에 속한 기초생활수급자도, 듬성듬성한 그물 같은 제도의 구멍에 빠져나와있는 기초생활수급권자도 이제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수급권자 권리를 말살하는 용산구청과 복지부에 항의하며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이 구성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오히려 옥죄어 왔던 기초생활보장제도 이제 10년이면 참을 만큼 참았다. 복지수급은 빈곤한 국민들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임을 수급 당사자의 목소리로,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의 이름으로 함께 외쳐야 할 것이다.

덧말. 분노게이지 상승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2009년 12월 31일,「근로능력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규정」(보건복지가족부고시 제2009-243호)를 찾아보시길.


덧붙이는 글
최예륜 님은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으로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에서 활동합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87 호 [기사입력] 2010년 01월 20일 13:12:24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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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2. 28. 02:06
아수나로 북에 실으려고 쓴 글...

쿨럭.




청소년의 두 가지 ‘빈곤’

 1
  자, 당신이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어느 가난한 청소년이라고 상상해보자. 아마도 당신의 집은 어느 허름하고 오래된 주공아파트이거나, 반지하나 지하층일 것이다. 집에 습기가 차거나 책꽂이 뒤편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기보다는 퀘퀘한 냄새에 몸이 찌뿌둥한 집.… 아니면 ‘달동네’라고 불리는 그런 곳, “가파른 계단길이 보이고 집집마다 벽이 거의 맞대어 있는 듯하였다. 연희의 엄마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연희는 공사장에서 벽돌로 소꿉놀이를 한다.…”(소설 비누인형 중에서) 이런 서술이 낯설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당신은, 담임 교사가 당신이 기초생활수급자인지 급식비 면제인지 어떤지 학생들 모두가 있는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래야 한다. 비록 수업료나 학교운영지원비는 면제라고 해도 준비물 값이라거나 교재 값 등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기에, 제대로 수업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의 가정이 어중간하게 돈을 벌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가난하다면(이른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보다는 돈을 조금 벌지만 여전히 살기는 초 어려운 사람들) 더욱 곤란한 노릇이다. 게다가 당신이 성적이 좋을 가능성은 별로 많지가 않아서,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학교에서 당신은 듣보잡 취급을 받을 것이며,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거나 보충수업을 받는 것이 부러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 등을 보상받기 위해 폭력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더해 다른 학생들의 삥을 뜯는 그런 청소년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집에 가도 그리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탓에 당신은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가난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어른들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거나, 방임되어 있을 것이다.(‘소년소녀가장’이나 ‘조손가정’도 많을 것이다.) 지역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에 나가는 것은 먹을 걸 주기도 하고 집안 일을 걱정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걸 도와주기 때문에 당신이 조금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공부방 선생님들도 항상 일손과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많은 관심을 계속 주긴 어렵다. 안 좋은 주거환경과 식생활, 그리고 주변에서 관심을 많이 못 주는 탓에, 당신은 가벼운 병에 걸려도 영양 상태가 안 좋거나 제때 치료받지 못해서 큰 병으로 발전할 위험이 그나마 조금 사는 청소년들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2
  또 다른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빈곤층이라고 할 만한 집은 아니고, 부모가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인 청소년이다. 당신은 비록 아주 비싼 것이나 호화스러운 물건을 맘대로 지르거나 ‘꽃보다 남자’의 F4처럼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진 못했지만, 이때까지 넉넉한 용돈을 받으며 적당히 풍족하게 살아왔다. 수업료나 학원비 같은 건 모두 부모님들이 계좌이체로 처리할 문제였고 당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아서 그 금액이 얼마인지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중학교 2학년 즈음에 부모와 진로 문제로 크게 다투고 가출을 했다고 하자. 당신은 가출을 해서 가정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자마자 돈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잠은 어찌어찌 친구 집을 전전하며 해결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교통비, 식비, 옷값 등등 사는 게 쉽지가 않을 것이다.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처음 나올 때 챙겨 나온 돈도 곧 떨어질 텐데, 알바를 해보려고 해도 부모 동의서가 필요할뿐더러 당신은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았다. 당신이 만일 여성 청소년이라면 돈을 벌거나 잘 곳을 얻기 위해 성매매를 할지도 모른다. 혹시, 정말 만에 하나, 복권에 당첨되어서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집을 얻을 만큼의 목돈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렇더라도 당신은 ‘민사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보호자 없이는 당첨금을 받기도 어렵고, 그 돈으로 집(전세든 월세든) 계약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인권침해

  “가난”(家難)이란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집(家)이 어렵다(難)는 뜻이다. 이 단어 속에 경제적으로 부유한지 빈곤한지를 판단하는 단위가 “집”(가족, 가정)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그 청소년의 경제적 지위 ― “계층”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 는 그 청소년이 속한 가족/가정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 친권자(부모나 후견인, 때로는 공공시설. 보호자.)가 돈을 얼마나 벌고 돈을 얼마나 갖고 있냐에 따라 청소년의 경제적 지위도 정해진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요컨대 소득이 적고 재산도 적은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가족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 청소년들도 빈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빈곤”, “가난”, 말은 참 쉽게 하고 있지만, 빈곤이란 건 쉽지 않은 문제다. 빈곤이라는 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꼭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조건이라는 소리다. 소유하고 소비하는 물질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에서 빈곤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가 낮다는 의미도 된다. 가난은 우선 주거·식사·건강 등 물질적인 면에서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협하고, 장기적으로는 청소년들의 자존감이나 성격 등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2008년 7월 5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행진에 참가했던 한 청소년이 집에 돌아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청소년이 자살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렇게 명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 청소년의 집은 기초생활수급 가정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며, 그 청소년의 담임 교사는 기초생활수급자 명단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읽어가며 공개했고,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을 차별하는 말도 종종 했다는 일 등이 알려졌다. 이런 것들이 그 청소년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아무 영향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공교육은 다분히 ‘계급적’이다. 이건 이제 너무 노골적이어서 비밀도 폭로도 아니다. 부자 동네로 유명한 서울 강남지역이 입시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고, 입시경쟁에서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안정적인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이다. 주거환경, 사교육, 부모나 가족들의 직업과 학력수준, 성장환경에서 익히게 되는 언어나 문화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어쨌건 이미 공정한 경쟁이니 기회의 평등이니 하는 환상들은 깨진 지 오래다. 무상교육이나 복지제도도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고, 하물며 사교육이나 보충수업 등의 개인적 교육비 투자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기게 만드는 입시경쟁 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힘겹게 교육받더라도 쾌활하고 즐겁게, 순수하게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도 낡은 환상이다. 물론 어딘가에 그런 청소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차별이나 열등감, 학벌사회 등은 저소득층 청소년들 중 다수가 입시경쟁에서 탈락하거나 아니면 아예 학교를 때려치우고 알바를 전전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교사들 중 대부분이 빡센 입시경쟁이나 임용고시 경쟁을 통과한 엘리트이고 빈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주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가난한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학교교육도 문제지만,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더 큰 문제는 주거환경이나 가정환경일지도 모른다. 열악한 주거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도 문제고, 돈 벌어 먹고 사느라 바빠서, 아니면 아예 신경써줄 다른 가족이 없어서 인간으로서 또는 청소년으로서 필요한 지원이나 관심을 제때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어른들의 폭력이나 학대를 당하기도 하고, 그렇게 몸에 각인된 폭력성과 상처들은 그 청소년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지역공부방,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등에서 이런 청소년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등에 지원을 늘리고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시켜서 지역적으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지원하고 돌보며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겠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심리적인 면을 돌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좀 더 현실적인 생계 보장과 실질적인 지원이 가능한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는 정도 이외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결국 심각한 빈부격차/양극화와 계급을 없앤다거나, 입시경쟁을 없앤다거나,(“가난한 청소년들도 입시경쟁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자.” 라는 말은 좀 뭔가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하는 다분히 근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빈곤은, 이 자본주의 사회 최대의 문제 중 하나니까.


‘청소년’ 자체의 계급성

  앞서,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욱 늘어놓았지만 이번에는 ‘청소년’이라는 것 자체가 빈곤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가난”의 뜻을 설명하면서 빈곤을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단위가 가정/가족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경제적 상태가 그 가족의 소득이나 재산에 달려 있는 게 보통이라고 하더라도, 한 가족 안에서도 경제적 지위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사회적 임금에서나 가족 안의 지위에서나 여성이 남성 가부장과는 다른 경제적 지위나 권한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일종의 계급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는 경제적 권리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여성이 일종의 ‘노예’ 신분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청소년들 또한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다른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경제적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가? 여기서 경제적 권리는 단순히 ‘(사유)재산권’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의식주, 문화생활 등)을 보장받고 자유롭게 사회적 생활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권리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이 사회는 청소년들이 필요한 돈이나 의식주 등을 가정/가족에게서 제공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아주 ‘가난한’ 경우가 아니면 청소년들의 의식주나 경제적 권리 등은 굳이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가정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청소년’, ‘친권자(부모 등)의 소유물이 아닌 청소년’ 등을 꿈꾸기 시작하는 순간, 이런 인식은 효력을 잃게 된다.
  우선, 청소년들이 가정/가족의 지원으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은 결코 공짜도 아니고 친권자의 일방적인 희생도 아니다. 거기에는 경제적 지배의 성격이 있어서, 많은 경우에 이런 경제적 지원에는 대가가 따른다. 친권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 열심히 공부할 것, 친권자의 말을 잘 들을 것, 진로 결정시에 친권자의 의견을 중요하게 고려할 것 등등이 대표적이다. 친권자(대개 부모들)가 청소년들에게 가지는 독점적인 영향력 또한 이런 경제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88만원세대』에서 우석훈, 박권일 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경제적 종속성이 20대 중반까지도 계속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는 매우 포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청소년들은 만20세 미만은 ‘미성년자’라는 민법의 규정에 따라 민사 계약(그러니까, 보통 돈이 오가는 계약.)을 할 권리가 원칙적으로 없다. 계약을 하더라도 보호자/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하거나, 보호자/친권자가 그 계약을 사후에 취소해버릴 수 있다. 청소년들의 임금 노동(종종 ‘알바’라 불리는)에도 많은 제한이 뒤따른다. 한 마디로 청소년들이 돈을 벌고 쓰기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다. 하긴, 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더라도 한국의 경제 상황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저임금 착취, 부동산 가격 및 물가 등을 볼 때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겠지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청소년들은 모두 (굳이 빈곤 계층의 가정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잠재적인 무산 계급’(재산/생산수단 등이 없는 계급)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가족이 제공하는 보호·통제·지배·지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헐벗은 몸뚱아리만 가지고 아무런 경제적 권리도 없이 살아남기 힘든 존재가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이 쉽게 그걸 포기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이런 인식에 다소의 무리가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들에 대한 친권자/부모의 지배, 사회적인 통제 등을 말할 때는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문제, 또는 계급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를 요구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청소년들에게 일해서 돈을 벌 기회를 제공하라는 뜻이 아니다.(당장은 그런 의미가 포함되겠지만.) 경제적 권리 중에 노동인권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노동인권이 곧 경제적 권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전반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청소년들이 알바를 하면서 ‘어느 정도 안전한 환경에서 착취당할 권리’를 요구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국가나 사회가 청소년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생활하지 않더라도 의식주와 생활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다. 모든 청소년이 7살 때부터 강제적으로 독립적 생활을 하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원한다면 독립적 생활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가 실현된다는 것은, 가족/가정이라는 사회적 기반과 ‘미성년자’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 타격을 가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매우 ‘불온한’ 요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인권은 이 사회의 테두리와 한계를 넘어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될 수 없다.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 사회의 근본적인 밑그림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렇게 못 할 짓인가? 나는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루어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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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2. 20. 12:15






크리스마스는 정말 즐겁고 행복한 날일까?
크리스마스 때마다 쓰나미처럼 거리에 넘실거리는 가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온정주의...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니다.
울지 않고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겠다는 산타는 대체 뭥미?!
사랑하고 연애하라고 외치며 소비를 조장하는 이 거리. 그런데 그속에도 동성애 커플들이 설 곳은 많지 않다.
크리스마스 때 반짝하는 자선 분위기는 이 사회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으면서 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는다.
 
크리스마스 악령들을 퇴치하는 안티 크리스마스 게릴라 액션!



게릴라 이동 경로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악령이 출몰하는 곳곳!
인사동 북인사마당 1시 - 종각역 2시- 명동 거리 3시 (예정. 악령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바뀔 수도...)
 
게릴라 아이템 : 악령퇴치 전시물, 저항 캐롤, 블랙 산타 퍼포먼스, 안티 크리스마스 카드 증정 등등
 
게릴라 드레스 코드 : 검은 계통의 옷과 모자
 
게릴라 긴급 연락책 : 한낱 011-9014-8304 (같이 하시고픈 분들은 문자나 전화를 살포시 ^^)




(홍보물이 아직 최종 완성본은 아니고,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 Rateen이나 사회공공성연대 등이 같이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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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족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좀 외연이 넓어진 "안티 크리스마스" 행동 계획.

가족주의의 환상 속에서 가려지는 가족 속에서 아동(청소년), 여성 등이 놓여 있는 권력관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건 기본이고...

"착한 아이"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크리스마스의 연애 분위기가 이성애중심적이라는 것 (그런데 나는 "연애"를 하라고 요구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도 넣고 싶었다, 사실)

크리스마스의 '자선'이라는 게, '베푸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만 드러낸다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정말 빈곤하거나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복지, 사회공공성, 구조적 개선 등이지 크리스마스에만 반짝하는 '베품'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사실 나처럼 당장 통장에 880원 있는 사람은 이런 '베품'의 대열에도 낄 수 없다 -_-; 지금 당장은 베품 좀 받고 싶네 그랴, 뷁!)



(크리스마스 자선의 적나라한 현실 -_- 어쩌면 "착한 아이" 이데올로기와도 연관될지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에서는 이것저것 재밌는 일들을 많이 기획하고 많이 한다. 그래서 좋다.
하지만 23일은 일제고사고
24일은 안티크리스마스다.

으아아아아아아아ㅏㄱㄱㄱㄱ
ㅠㅠㅠㅠ



그럼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안티 크리스마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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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 케빈 !!!

    2008.12.25 20:23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7. 14. 20:10


  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모욕적인 행위들 ― 약물검사,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의 ‘엄한 질책’ ― 이 저임금을 유지하는 일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별로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하면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이 실제로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직장내의 독재주의에 또 다른 기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관리자들은 자신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라면 곧 모든 일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받은 인상과는 다르다. 나는 일부 냉소주의자들과 자신들의 힘을 잘 안배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반면, 실제 게으름쟁이나 약물중독자, 도둑은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임금이나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너무나 미미한 일자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때로는 슬프기까지 했다. 사실상 이들은 일을 제대로 하는데 관리자들이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웨이트리스들은 손님들에 대한 주인의 인색함에 화를 냈고, 객실 청소부들은 때때로 시간제한 때문에 일을 꼼꼼히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으며, 매장 직원들은 관리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과도한 재고로 매장을 어지럽히는 것보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어했다. 그들에게 맡겨두면 스스로 업무에 대한 협동과 분담 시스템을 고안했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황에 대처할 줄 알았다. 실제로 복종을 강요하는 일 외에 관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악순환은 경제가 아니라 극단적인 불평등 문화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기업의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과 심지어 더 메이즈의 사장과 같이 시시한 기업가들도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실제 경험보다는 계층에 대한 편견 ― 종종 인종적인 문제이기도 한 ― 과 관련이 있어서 자신들이 직원으로 뽑는 계층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약물검사나 성격검사와 같은 모욕적인 방법들과 강압적인 관리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용이 들며 ― 관리자 한 명당 1년에 2만 달러 이상, 약물검사 1회당 100달러 등 ― 이러한 억제를 위한 비용 상승이 임금을 높이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억압을 초래한다. 거대한 사회일수록 비슷한 순환을 겪는 것 같다. 감옥과 경찰에 훨씬 더 많이 투자하는 반면, 집합적으로 ‘사회적 임금’이라고 통칭하는 빈민들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삭감하고 있다. 또한 거대한 사회일수록 억압에 드는 비용은 필요한 서비스를 확장하고 복구하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된다. 이는 우리를 더 심각한 불평등의 상태로 몰아가는 비극적인 악순환이며, 결과적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은 억압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저임금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 내 설명은 피상적인 것밖에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게 벌고 있다는 것이다.


                                        - 바바라 에렌라이히, 『빈곤의 경제』, pp.252-254. 옮긴이 홍윤주. 청림출판.



바바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를 다 읽었다.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험하며 기록한 수기.

빈곤의 경제라는 제목은 뭔가 경제학 서적 같은 느낌이 드는데,
원제는 'Nickel and Dimed'로, 이쪽이 좀 더 책의 내용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읽으면서 주거 임대료 문제와, 서비스 저임금 노동의 노동 조건(그리고 그 비인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청소년노동인권이나 비정규직 생각도 많이 했고...


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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