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09. 10. 24. 22:49



아수나로에서 공부모임 할 때 쓰려고 정리한 겁니다.
이것 외에도 탈학교(deschool이라고 해야 하나) 이론 쪽도 다른 사람이 정리...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가장 많이 참고했고 인터넷에서 검색도 하고 해서 정리한 겁니다.





경제재생산

  경제재생산 이론은, 요컨대 학교 교육이 경제 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우선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제도는 경제적 성공이 개인의 능력과 자격증, 교육적 성취에 의해 좌우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계급구조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난 엄마 아빠가 부자니까 나도 잘 삼 ㅋ”이면 사람들이 기분이 매우 나쁘겠지만, “난 (엄마 아빠가 부자라서 이것저것 지원을 받아서)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니까 능력이 있는 거고 능력이 좋은 내가 잘 사는 건 당연함” 식이라면 사람들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크게 분노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면 학교 교육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계급이 대물림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재생산 이론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학교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하는 문제이다.(보울즈와 진티스(긴티스?)라는 학자들이 주장한 건데, 미국 교육을 주 모델로 한 분석이다.) 학교 교육을 살펴보면, 어떤 학교냐에 따라서 다른 교육 방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에서는 강한 규율을 강조하고, 대학교는 자율성을 강조한다. 상류층이 다니는 사립고등학교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규율이 약하다. (한국 학교의 경우는 반례가 많이 발견되긴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대학이 자율성이 줄어들고 규율이 강화되어가는 것은 전 고등학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상류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성격이 약화되었기 때문일지도.)
  규율과 통제, 감독을 강조하는 교육에서 학생들은 지위와 권위에 복종하도록 유순함을 배운다. 반면에, 지배계층을 양성하는 학교나 대학에서는 자율적 판단을 강조함으로써 지도력을 개발한다. 학교의 수준이나 종류에 따라 학교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위계적 역할 분업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학교 졸업 후 자신이 사회에서 가지게 되는 위치(노동자, 관리자, 자본가, 전문직 등등)를 더 쉽게 받아들이고 적응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학교교육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있고 사회는 누구에게나 능력과 업적에 따라 높고 권위 있는 지위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에 의한 사회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도 특목고-자사고 및 서울대 진학률 등의 통계는 그런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는 한국의 교육이 어째서 그토록 경쟁적인가에 대해 사회학적 해답을 준다.

 

요약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노동계급의 자녀는 노동계급으로, 자본가계급인 자녀는 자본가계급으로 재생산하는 역할을 함. 그리고 불평등한 구조를 은폐, 정당화함.

비판 : 경제재생산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딱 학교의 형태와 사회경제적 구조가 대응하지는 않음. 경제적 불평등과 체제가 학교 교육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음. 반례들이 많음. 학생들의 능동적 역할이나 교육, 문화의 자율성 간과 (폴 윌리스의 저항이론. 노동계급 학생들의 반항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계급 재생산으로 이어지는지 ‘간파’와 ‘제약’ 개념으로 분석...) (문화재생산 이론 등)

 



문화재생산

  이러쿵저러쿵 비판이 있어도 경제재생산 이론은 학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기초를 제공한 이론이다. 문화재생산 이론은 경제재생산 이론에 대한 비판, 보완의 성격이 있다. 문화재생산 이론을 쉽게 간추리면, 경제재생산 이론의 기본 성격을 공유하면서도 “잘 사는 애들이 어떻게 학교에서 잘 성공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문화재생산 이론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문화에 주목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식적인 지식, 문화는 지배계급 내지는 중류계층의 지식이고 문화이다. 지배계급의 학생들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이런 형태의 지식, 문화를 습득하며 익숙해져 있다.(독서라는 이름이든 교양이라는 이름이든 뭐든...) 이런 것을 ‘문화자본’이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자본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학업성취가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 잘 사는 집의, 전문직 부모를 둔, 지배계급의 학생들은 이미 유리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클래식이나 가곡을 가르칠지언정 대중가요나 힙합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클래식이나 가곡 등에 더 익숙한 쪽은 좀 사는 애들일 가능성이 높다. 음악 뿐 아니라 활자화된 지식들, 교과서에 사용된 단어 등 거의 모든 교육내용에서 그런 자본의 불평등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탓에 문화자본의 불평등이 경제자본의 불평등과 차이가 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90년대 이후로는 점점 일치하고 있다. 서울대에 가는 학생은 돈이 좀 있는 전문직 부모를 둔 아이들이 많다는 통계 등.
  학교의 기준이 되는 문화나 지식 자체가 계급적인 것이지만, 과학/학문 등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는 잘 알아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학교교육에서의 문화재생산은 계급간의 불평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학교에서 좋은 학생, 나쁜 학생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가 제공해준다.
  문화재생산 이론은 경제재생산 이론에 비해 교육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경제적 성공과 학문적 성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좀 잘 사는 집 학생이라고 해도 학교에서 실패할 수는 있다. 교육체제는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성취를 가늠한다.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는 더욱 정당화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학업 성취가 100%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자녀는 동일한 졸업장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약 : 제도교육에서 가르치는 문화는 잘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친함. 이 문화는 학생들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해줌. 그래서 특정한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학교교육에서 더욱 성공함. 교육에서의 성공은 가정에서 얻은 교양이니 배경지식이니 그런 것의 영향을 받음. 교육에서의 성공/실패가 꼭 경제적 성공/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잘 사는 애들은 이런 성공을 더 잘 써먹을 수 있고 실패해도 어느 정도 커버 가능.

 

# 경제재생산과 문화재생산 모두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 학교 교육은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체제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외의 것을 잘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교육은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에서 군말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 재생산이론은 학교의 역할, 기능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경제재생산과 문화재생산 이론을 공부함에 따라, 우리는 학교에서 당연한 것으로 주어지는 수업, 공부, 규율 등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정당하고 중립적인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단지 “교육은 ~~해야 하는데 현실은 이렇지 않다.”라는 관념을 벗어나서 교육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도대체 불합리해 보이는 이런 경쟁과 규율들은 왜 있는 건지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 이는 음모론은 아니다. 재생산 과정은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며 ‘자연스럽게’ 관련되고 있는 것. 특정한 사람들의 의식적인 의도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활동조차도 중립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활동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교육과 이데올로기』 中)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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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9. 25. 17:56

 모든 사회학자는 대중이 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예언자에 맞서 자기 안에서 싸워야 한다……. 예언적 사회학이 누구나 체험을 통해 무질서하게 마주치게 되는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해 자연 발생적 사회학이 제시하는 해답들을 허위로 체계화하는 데 만족할 경우, 그것은 자연히 상식이 제시하는 설명의 논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텔레비전만큼이나 친숙한 현상들 속에서 '전세계의 변동'에 대한 설명 원칙을 구하는 예언적 사회학자들에 의해 아주 단순한 설명들, 순진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하게 되는 그러한 설명들이 매우 빈번하게 내세워진다.

(P. 부르디외, J. -C. 샹보르동, J. -C. 파세롱, 『사회학자라는 직업』 中

파트리스 보네위츠 지음, 문경자 옮김,『부르디외 사회학 입문』동문선, 에서 재인용)

 

위의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풀어 쓰자면,

모든 사회학자는 사람들이 자기가 사회적인 '예언'을 해주길 바란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하려 들면 안 된다.

일상 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자연히 등장하게 되는 지식들을, 대중들이 원하는 그런 예언을 해주려는 목적으로 엉터리로 체계화시키게 되면 그것은 자연히 '상식'에 연결된다.

(부연하자면 부르디외는 상식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과학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위험한 것이므로 사회학자는 상식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예언적 사회학자'들은 순진하고도 소박하고 또 상식적인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런 식의 단순하고 허위적인 설명을 지껄이게 된다.

 

사회학적 예언자가 되는 것은, 반드시 사회학적이지 않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파트리스 보네위츠,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 동문선 中)

 

 

그렇다면,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사회학은 철학이나 정치학과는 달리 사회적인 것의 기능 논리를 규정하려 한다기보다 그것을 묘사하고자 한다. (중략) 그 매커니즘을 기술함으로써 사회학자는 자신의 과학적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자는 투사도 사회철학자도 아니다.

(중략)

 설령 사회학이 행동이 아니라 인식을 제1의 목적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사회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위자들로 하여금 모든 지배 형태에 대항하여 ― 이 지배 형태들은 지배에 대한 부정 자체에 근거해 있는 만큼 더욱 효과적인데 ― 투쟁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의 수단들을 제공한다.

(출처는 상동)

 

"모든 과학은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그것을 토대로 미래의 일을 예측해야 할 의무가 있다."

라는 것도 편견이 아닐는지. -_-

적어도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사회와 그 저변의 메커니즘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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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시간이 나는대로 공부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부르디외의 사회학 텍스트들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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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부하고 싶다.

    2009.09.27 20:43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