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11. 8. 24. 19:31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주 장하는 글은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이다.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주장을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글이라고 다 똑같을 리야 없다.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글, 개인적으로 쓰는 글, 언론에 발표하는 글, 토론회 때 쓰는 글 등등이 같을 수야 없다. 쉽게 말하면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밑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고 붙는 것과 “공현”이라고 붙는 것과, 한 10명 모인 토론회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과 수만명이 읽는 신문 지면에 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장하는 글의 종류를 대표적인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나는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성명과 논평이다. 성명과 논평은 단체 회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단체의 정해진 입장을 알리는 글이며, 동시에 언론 등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발표하는 글이다. 두 번째는 칼럼이나 언론기고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명의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발표하는 형태의 글이다. 가장 전형적인 논설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발제문이나 토론문이다. 발제문이나 토론문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는 칼럼과 비슷하지만 발표 방식이 언론에 직접 전문을 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성명이나 논평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주로 토론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자료집에 실린다.

이제부터 이러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이나 자잘한 방법 같은 걸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중 어떤 글이든 내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하자.



① 성명/논평


성명/논평에 관해서, 우선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그건 바로, 대체 성명과 논평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글이 성명이냐 논평이냐 하는 것을 구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의 성격을 비교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 설명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성명이 어떤 사안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고 외치는 거라면, 논평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분석하고 평하는 것이다. 성명은 요구 사항이 비교적 뚜렷하고 논평은 주장이나 입장은 드러나지만 요구 사항을 그렇게 뚜렷하게 적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성명은 상대적으로 길고 완결된 글이고, 논평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결하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성격과 색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며, 또한 보도자료 등에 첨부하여 주장을 표현하거나 행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밝힐 수 있는 글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직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우선 성명이나 논평으로 입장과 주장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대충 면피를 하곤 한다.(별로 좋은 관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명/논평은 ‘연명’(성명서 내용에 동의하고 거기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하는 단체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명을 받아서 발표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연명해서 성명/논평을 내는 것은 그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핵심 단체들을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열심히 성명 쓰고 제안하고 활동하는 건 1, 2개 단체인데, 언론에 “133개 시민사회단체들은…”이라고 나가면 그 1, 2개 단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해야 할지 역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명/논평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단체의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라서 어떤 내용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자. 성명/논평을 쓰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사안을 우리는 어떤 성격의 사안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기로 했는가? 어떤 정책에 대해서라면, 찬성인가, 반대인가, 부분적 찬성/반대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반드시 언급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얽힌 복잡한 사안일 경우 각각 비중은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 (심지어 문단의 개수나 분량까지도 생각해가며 써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장이 딱 찬성 반대로 나눠지지도 않고, 다양한 입장들이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의 입장과 주장을 표현 하나에서부터 분량까지 잘 컨트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교원평가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입장이 현재 안에 대한 찬/반인지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찬/반인지, 대안은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지, 전교조의 입장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현재 정세 돌아가는 걸로 볼 때 이런 말은 필요하긴 하지만 비중을 줄이는 게 좋겠다든지, 여하간 이런저런 골치 아프고 미묘한 조정이 필요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표현이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성명/논평의 틀을 지나치게 딱딱하게 정해놓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재미가 없고, 단체의 개성도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혀서 막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순서 정도는 소개하겠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 성명서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어떻다.” 거기에서 어떤 말을 사용해서 이 사건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규정하고 있는지를 읽는 이가 알게 하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대충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리드’(리드 : 신문의 뉴스 기사에서 본문의 앞에 그 요점을 추려서 쓴 짧은 문장.)를 떠올리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를 쓰게 된 배경, 즉 사건의 개요를 간추려서 넣어줘야 한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부분에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거나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한 정보는 안 쓰기도 하고, 짧은 논평 등에서는 간단한 한 문장 정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쓴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서 심층적인 분석을 써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은 교사가 사학재단에 의해 해임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는 학생인권과 진정한 교권이 상충되지 않으며, 억압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쓴다거나 뭐, 기타 등등…. 이 분석 속에도 물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단체의 주장과 입장이 반영될 것이다.

성명의 경우에는 마지막에 주장과 요구사항이 들어가곤 한다. 요구를 하는 대상이나 책임을 묻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면 좋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다면, 써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전체 요지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평의 경우에는 특별히 요구사항을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우려를 표한다.”, “다시 한 번 충고한다.”, “지적한다.” 같은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_-)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성명/논평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참신한 성명/논평을 만들 수 있다. 성명/논평은 논리적인 글이지만, 꼭 딱딱한 논리적 표현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비유나 패러디 등을 알맞게 활용하는 것은 성명/논평을 더 널리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말이나 다른 글 등의 형식을 차용하는 패러디는 성명/논평에 곧잘 사용되는 인기 있는 방법이다.


성 명/논평을 쓸 때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문체’ 문제이다. 하나의 글은 아무래도 한 명이 쓰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이 한 문단씩 써서 글을 조립한다면, 오 내용이 중언부언 겹치게 되고 글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성명/논평은 한 사람 개인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성명/논평을 쓸 때는 지나치게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성명/논평을 한 개인이 쓰고서 바로 발표하는 일은 별로 없다.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가며 고치는 작업도 여러 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한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때부터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명/논평이 어떻게 발표되고 읽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 역시 성명/논평을 어떻게 쓸지, 성명/논평의 분량을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명/논평이 발표되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3가지다. ▲ 언론에 배포해서 보도 ▲ 단체 홈페이지, 이메일 등을 통해 ▲ 직접 인쇄하고 배포.

마지막의 직접 인쇄, 배포하는 방식은 과거 외국에서는 많이 이용된 듯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배포용이라면 전단지 형태로 더 알아보기 쉽게 꾸며서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모임 안에서 나눠주거나 돌려 읽기 위해 성명을 인쇄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행사에서는 성명 자체를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기관에 성명/논평을 팩스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성명/논평은 그 분량이 2페이지(즉 양면 인쇄했을 때 1장 안에 들어가도록)를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길어도 3~4페이지 이내의 분량이어야 한다.

성명/논평이 언론에 발표될 때는 성명/논평의 전문이 실리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은 일부를 인용하여 실리곤 한다. 따라서 성명/논평을 쓸 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딱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 성명/논평의 핵심적인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강조해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선정적이거나 재치 있는 표현 등을 넣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입시가 사형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와 “입시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의 수가 적지 않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언론에 잘 보도되겠는가? (뻔한 소리지만, 사실과 다른 표현, 억지스러운 표현, 반감을 살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수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홈페이지나 이메일 등 웹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 있다. 웹의 유연한 특성상 이 방식의 경우에는 별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지는 않다. 여기저기 퍼나르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바꿈을 자주 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충분히 띄우거나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 혹은 웹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련된 링크를 함께 삽입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성명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이 땅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는 오래전부터 무시당해 왔다. 특히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들은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치사찬란한 태클을 걸고있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에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짜증의 마음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잠 시 과거를 상기하자면, 2003년에도, 2005년에도 청소년들의 집회에 대해 정부는 까칠하게 반응했었다. 법을 개정해서 ‘미성년자’를 집회에 동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교사들과 장학사들을 동원해서 청소년들의 내신등급제 반대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참가를 봉쇄하려고 했었다.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집회 뒤에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2008 년, 올해에도 발전은커녕 퇴보한 뻘짓들만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점점 커지자, 교육부와 교육청은 또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집회 참가를 막도록 하는 지침을 학교로 내려 보내고 있다. 교사들을 동원해서 집회장 주변에 배치하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돌려보내는 괴악한 짓도 여전하다. 몇몇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놓고 “연필 대신 촛불”을 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이 몇 마디 하니까 10대 팬들이 무작정 따라 나왔다, 아직 미성숙하고 충동적이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에 속은 거다, 등등 헛소리를 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놀이문화가 없어서 청소년들이 놀러 나오는 거라는 이상한 분석을 내놓으며 청소년들을 어떻게든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고 있다.

올 해에는 경찰과 검찰까지 가세해서, 5월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를 얼토당토않게도 “업무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수사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인권의식 미성숙한 검찰총장부터 인권교육을 시켜야 한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경찰이 문자메시지를 추적해서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만나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교장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짓이며, 이미 인터넷에서는 ‘미성년자가 촛불집회 참가하면 사법처리 된다.’라는 식의 사실과는 다른 공포 조성 유언비어가 떠도는 판인데, 이에 대해 경찰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도 대체 경찰이나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가?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는 교육청 같은 애들을 막는 것 아닌가 싶고, 만일 정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교육부, 교육청, 학교는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여러분에게는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고 거기에 참여할 권리,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류의 캠페인이라도 전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들이 정말 민주 정부이고 인권 경찰이라면 해야 할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저 안타까운 정부기관들은,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건지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또 한 아수나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들이 비단 정부나 경찰, 일부 언론들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 청소년들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철없는’ ‘충동적인’ ‘미성숙한’ ‘미래로 유보된’ 존재로 보는 인식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할 청소년들조차 거리로 내모는 정부”라는 표현 속에도, “철없고 순진한 아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주장에서도, “어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못해서 어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미래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여는 주최측의 “미성년자들은 부모동의서가 없으면 연행당할 수도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 청소년들은 자진 귀가 조치시킵니다.”라는 안내 문구에서도,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도 가입한 아동권리협약 등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의견반영권 등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을 비청소년들과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왔다. 비단 정부나 언론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과 때로는 몇몇 ‘청소년들’ 또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행동 자체에 반대하진 않더라도 그 행동의 의미를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이고 시혜대상인 것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청소년들은 누가 내몰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학업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냥 철없고 순진하지도 않고, 부모동의서가 없다고 연행당한다거나, 밤 10시 이후에 집회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도 없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는 운동의 주체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사회를 ‘물려받는’ 그런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이며,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학교자율화 조치 등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와 언론들, 그리고 행사 주최측과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언론 등은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고 깎아내리는 모든 조치와 발언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1.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행동 등에 개입하고 있는 주최 측과 참가자들은 청소년들을 보호주의적, 시혜적, 차별적 태도로 대우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우하라.

청 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다른 항의/불복종 활동,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응팀 구성, 청소년들이 평등한 주체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과 발언 등을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함께 적극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08년 5월 8일


이 성명은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발표한 성명 중에서도 '그나마' 널리 알려지고 웹에서 ‘펌질’이 된 성명들 중 하나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이라는 시의적 상황 때문에 여러 촛불모임, 게시판, 아고라 등에 ‘펌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이 성명 자체로도 촛불 정국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과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는 좋은 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며 평가해보자.



② 칼럼 등 언론기고문


칼 럼 등 언론기고문은 글 전문을 언론을 통해 대중에 공개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잘 써야만 하는, 부담 백배의 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소재가 별로 주목 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언론에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의 문체와 발상, 그리고 단체의 주장 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언론기고문이 언론에 실릴 경우에는 그만큼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주장을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잘 써야 하고 쓰기 어렵지만 잘 써서 잘 발표할 경우에는 효과가 큰 글”이라는 것이다. 뭐, 언론기고문을 써서 숱하게 언론에 실려도 완전 무반응인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언론기고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한층 더 꼼꼼하게 주제와 개요를 검토하고 준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언론기고문은 다른 그 어떤 글보다도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독자가 가장 많고 독자층이 가장 폭 넓은 글이기 때문이다.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라. 웬만큼 많이 공론화가 되어서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 이상은 사안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지 말고, 간단한 설명이라도 넣는 게 좋다.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해야 할 때라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일반인’이 아니라 기고하는 언론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독자와 「경향신문」 독자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조선일보」에서 여러분의 글을 실어줄 일도 별로 없겠지만…) 뭐, 「레디앙」처럼 활동가들 좌파들만 주로 읽는 좌파 오타쿠스러운 언론이나 「교육희망」, 「우리교육」처럼 교사들이 주로 읽는 언론의 경우에는 좀 더 독자층을 좁게 상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언론기고문에서는 매체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분량과 문체이다. 보통 일간지 등 지면에 글이 실리는 언론에서는 원고지 10매 이내(A4로는 1장 이내)로 글을 써야만 한다. 종이 지면이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체 역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실리는 글에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를 요구하는 것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신문지면의 한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간지나 월간지 등 잡지 형태의 매체의 경우,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종이 지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간지보다는 제약이 적다. 일간지처럼 한 면 안에 글 여러 개를 배치해넣는 방식이 아니라 책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월간지 등에서는 일간지보다 더 심층적이고 자세한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소한 원고지 20~30매 이상의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간행물이 나오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긴 원고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월간지가 원고지 20~30매 이상을 요구한다면 계간지는 원고지 40~50매 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반면, 인터넷 언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량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인터넷 지면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지만 않다면 글의 분량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A4로 2장 분량이든 4장 분량이든, 그 인터넷 언론의 서버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인터넷 언론에서는 문체에 대해서도 다소 관용적인 편이다.

마지막으로, 언론기고문은 글이 언론에 실리고 배포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글이 간행물이 언제 나오고 배포되는지 이것저것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아예 글 중에서 글을 쓰는 시점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시점에 맞춰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밖에 언론기고문을 쓰는 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론기고문은 특별히 표준화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뭐 그냥 일반적인 논설문 식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거나, 두괄식 등 여러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칼럼 등 언론기고문은, 여러 가지 형식이 가능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모양새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능성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언론기고문은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개인의 문체와 사상이 잘 드러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언론기고문은 보통 개인의 이름을 달고 발표하더라도 "(단체 이름) (직함)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를 단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므로, 단체의 입장과 개개인의 개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쓰는 것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체에서 사업의 일부로 회의를 거쳐서 기획적으로 기고하는 언론기고문의 경우에는 단체의 공식 입장 역시 녹아들어가도록 써야 한다.



③ 발제문, 토론문


발제문과 토론문은 토론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내용과 요지를 정리해서 쓰는 글이다. 이 역시 통상의 주장하는 글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성명서나 칼럼에 비해서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형식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줄글로 써도 되고, 짤막짤막하게 "~임." "~라고 생각함." 같은 문장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토론문을 만들어도 된다. 경우에 따라선 자료들과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해석만 잔뜩 제시한 발제문도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그 안에서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면 훌륭한 발제문 및 토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원래의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정리해두고 넘어가자. 발제문은 토론을 시작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해 정리하고 토론할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토론문은 그 발제문에서 제시한 자료와 토론 거리 등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즉 발제문은 단순히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토론에 필요한 자료, 방향, 내용을 제시하는 글이며, 토론문은 이 발제문을 보고 쓰는 글이다. 상대적으로 발제문이 길이가 더 길고 토론문이 길이가 더 짧을 때가 많다.

발제문을 쓸 때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발제문에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발제문은 단순히 주제를 설명하기만 하는 글도 아니고, 특정한 입장과 주장이 없이는 좋은 발제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문은 어디까지나 토론의 시작을 여는 글이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겠는가.

토론회는 대개는 발제자 1~2인이 발제를 하고 토론자들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 토론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발제자가 발제를 한 뒤에 바로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제자가 1~2인일 때야 뭐 어려울 것 없겠으나,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발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발제자들은 어떤 성격의 발제자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교수 등 학계 사람, 정부 관계자, 활동가는 각각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발제를 할 것이다. 또는 한 사안을 놓고도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발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서 토론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 맡는 발제문을 쓰면 된다. 토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제와 토론을 할 때 한 가지 팁을 전하자면, 절대로 토론회를 할 때 발제문이나 토론문을 줄줄 읽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이고 토론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안다.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점자책이든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이든 통역이든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여하튼 토론회에서 자기 발제문과 토론문을 줄줄 읽는 것은 토론회를 매우 지루하게, 여러분의 발제/토론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때는 자기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압축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상 깊은 일화나 예시를 들면 아주 좋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일부러 발제문 및 토론문에는 쓰지 않고 토론회 현장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하나 정도 준비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을 그대로 읽지 말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발제 및 토론을 발표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짧으면 5분 정도 주어진다. 20분이라고 해도 A4 용지로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분량이고, 5분이라면 A4 용지로 한 페이지 얘기하면 끝난다. 그러므로 글을 그대로 읽지 말고, 발표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팁. 발제자와 토론자를 3, 4명 이상 요구하는 '그런 류의' 토론회들은 미리 준비된 발표자들의 발제 및 토론만 1시간씩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계획을 짤 때 시간을 40분 정도에 맞추더라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넘겨 발표하기 때문에 1시간을 넘는 게 다반사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오는 청중들은 대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따분해하고 집중력을 잃고 있기 십상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위트 있고 재미있게 쓰고 발표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보자. 아 물론 아주 엄숙한 학자들이 모인 학계 발표회 같은 데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뭐든지 독자들과 청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발제문과 토론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과 토론문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자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토론회를 할 때는 단지 토론회를 여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그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보도하도록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명 및 논평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기자들이 뽑아서 쓸 만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문구가 부각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은 발표를 할 때도 강조하도록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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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이런 상상을 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성명서’라는 걸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근데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단체의 입장은 회의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에 뭐라고 쓸지는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러이런 걸 철폐하라고 하면 되는구나. 대안으로 이런 걸 요구하자고 했지.” 그런데 결론을 먼저 써놓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아 우리 단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몇 줄 쓰면 되지 대체 뭘 쓰란 거야?!” 막막한 마음에 회의록을 보자 “~~이런 부분을 짚어야 할 듯.” “A가 B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해.” 뭔 놈의 회의록에 요구사항들만 많다. 짚긴 뭘 어떻게 짚으란 거야? ㅅㅂ!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글은 운동에서 많이 쓰게 되는 몇 가지 유형의 글들에 있어서, 시대의 명문장가 타이틀을 딸 정도로 잘 쓰게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럭저럭 욕 안 먹을 정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운동을 위한 실용적인 글들도 글은 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모든 글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제1편은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에 대해 알아보자.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아와 개성의 표현이라거나 우주의 영감을 수신하여 원고지에 글자를 심는 일이라거나…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심플하고 평범하게 말하면 그건 문자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심플한 정의에서부터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3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사람 ② 글을 읽는 사람 ③ 매체. 운동을 하면서 쓰는 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이 3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에 여러분은 “글 쓰는 사람은 나잖아. 바로 여기 있는데 뭘 더 생각해?”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글을 쓰는 여러분 자신을 잘 모른다. 실제로 글을 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대체 뭘 쓰려고 한 거지?”라는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가 이 글로 대체 뭘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를 확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헷갈려 하며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경험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주제이다. 주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략 1~2문장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한 글 안에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제는 복합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아래의 짧은 글만 보아도 글 안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체벌금지 해야 한다」
/ C모님 / 체벌금지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최종안

요 즘 들어 체벌금지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육감이 새로 뽑힌 탓인지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는 이미 체벌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경우도 교사들의 체벌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중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그걸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겠나.
체 벌은 폭력이다. 내 주위 어른들이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것들을 생생하게 재현까지 하면서 말하는걸 보면 그런 폭력의 경험이 기억에 오래남긴 남나보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오장풍’ 사건을 두고 “아직도 저런 체벌이 있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런 폭력들이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말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어느 몇 명의 교사들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은 때릴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에서부터 비롯된 문제다. 오장풍처럼 손으로 학생들을 퍽퍽 날려보내지 않더라도, 단 한 대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있다.
교 육감들이 체벌금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회에서 학교의 체벌만을 문제 삼고 있는 요즈음에도, 가정에서의 체벌은 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꼭 없어져야하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나쁘다는 논리가 가정에 체벌만 비켜갈 순 없다.
공 익광고에서는 가정이 우리의 안식처인 양 이야기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교보다 더 무서운 곳일 수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폭력을 몸으로 깨닫고, 학교에서 맞고 오면 가정에서도 또 맞고, 교사에게 맞고 오면 잘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체벌을 부추기는 것도 가정이다. 학교나 가정이나 체벌이 있는 이상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학습시키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동학대 수준까지 가야 폭력으로 인정할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체벌을 ‘사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특히 가정에서의 체벌은 학교의 체벌보다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이 더 심각하다.
학 교에서의 체벌금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정에서의 체벌금지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가정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청소년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체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일단 사건 하나 터졌으니 막고 보자는 식으로는 정말 청소년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 글에서 주제가 뭔지, 전하고 싶은 부수적인 메시지들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연습문제다. 킁. 어쨌건 주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라는 건, 결국에 이 글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개요’를 짜라는 것이다. 개요는 쉽게 말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써내겠다는 계획표 같은 것이다.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듯이 “서론 - 본론1 - 본론2 - 결론” 이런 식으로 개요를 짤 필요는 없다. 그런 개요는 논설문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가끔 그런 형식을 벗어난 논설문도 있고, 논설문 외의 글들도 그런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결론 내용이 제일 앞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런 방식의 개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쓰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서로 해서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대략적인 계획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에 숙련되면 그런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 미숙할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메모해두는 게 좋다. 개요를 짜지 않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다보면 “어라 내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더라?” 하며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개요가 있다면 그럴 때 개요를 확인해보면 되지만 개요가 없다면 혼란스러운 글이 되고 만다. 물론 글을 쓰던 중에 삘 받아서 짜뒀던 개요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다. 개요는 자기가 이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을 가진 채 써가다가 계획을 수정하는 것과, 애초에 계획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② 글을 읽는 사람
  불행한 이야기이지만, 미숙한 글쓴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하얀 모니터 화면과 깜빡거리는 커서 혹은 하얀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벅찬데 그 너머에 눈에 안 보이는 독자들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궁극적으로는 “이 글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독자의 존재를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글쓰기의 일반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독자를 생각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매우 위대한 예술가이며 작가여서 예술적이며 상식 파괴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다. 이상처럼 “13인의MB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써도 된다. (그게 인정받거나 팔릴지는 별개로) 하지만 일단 우리는 실용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용 글쓰기에서 이상의 시처럼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용 글쓰기의 경우에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망한다.
  그럼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예상독자/가능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 독자들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나? ▲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등등.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벗어나 벅차게 사랑할련다.」
/ R모님 / 학생 연애 탄압 관련 언론 기고문 초안

나는 동성애자다. 동성애자지만, 뭐 다를 거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뭐, 그냥 청소년집단을 걸고 넘어진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드 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경수-태섭 커플을 보고 부러워서 흑흑 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불편하신 분이 있었나보다. 뭐 영화 ‘친구사이?’의 마지막 키스신에서 한 외국인이 ‘하나님의 보편적 세상시청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계신데 안 두렵냐’라는 말이었지만, 뭐 나한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했었는데 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봤는데 세상에 가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이 대책없는 구호를 보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학교는 청소년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조차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무성적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알면 써서 내게 하라는 이반검열이 그렇고, ‘불건전한 이성교제’ 처벌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억압과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이 어우러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린다.
수많은 학교의 징계규정에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징계하는 규정이 있다.
불 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그 두 어절 뭣도 아닌 단어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이성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거지.), 나의 사랑조차 부정당하고, 나 자신조차 부정당한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난 게이니까 그래, 학교에서 애인 만들어서 뽀뽀하고 키스해도 상관없는 거지?)
이제 좀 집어치우자 그 단어. 그 이성애중심주의적이고, 연애탄압적이고, 순결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그 단어.
이제는 좀 게이여도, 좀 문란해도 봐줘라.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진다.
걱정하지마라, 아 걱정된다면 콘돔사용법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해라. 음순 음경 운운하는 그 따위 성교육이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을 부르는거니까.
이제 좀 다시 보길 바란다. 100일, 500일, 1000일되서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연애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게 뭐하는 짓인가.
이제 내가 연애를 해도, 그게 설상 남자여도 걔랑 성관계를 가져도 상관없는 ‘미성숙한 이성교제’라는 단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 커플들과 게이, 레즈비언 커플도


  이 글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을 쓰게 된 배경이나 여러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던져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중 다수가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한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없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거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독자들도 설득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휘나 정보를 섞어가며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경우는 비교적 그 잘못이 명백한 편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두발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주로 읽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정부 관계자가 읽을 글, 어른들이 읽을 글은 서로 다른 어조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로 읽게 될 매체에 “두발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라는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학부모들이 두발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라고 쓰는 게 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단체 내부 사람들끼리 읽을 기획서나 제안서를 쓸 때와, 외부의 사람들이 읽을 기획서나 사업 설명을 쓸 때는 다르게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일부러 불친절하고 막 나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글들은 독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글은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매체
  매체는 쉽게 말해 글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발표되고 전달되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으로 매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량이다. 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혹은 요구되는 글의 분량은 얼마인가? 분량은 글의 주제와 메시지, 전개 방식 등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그밖에도 이 글이 인터넷 언론에 실리는 글인지, 신문지면에 실리는 글인지, 책에 들어가는 글인지, 토론회 자료집에 실리는 글인지, 말로 옮겨야 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인지, 이메일로 보내는 글인지, 첨부할 사진은 칼라인지 흑백인지 등등 여러 가지 매체의 형식들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매체를 고려하는 글쓰기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해 신문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은 “최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의 도입부를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몇년 몇십년 동안 간행되고 팔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책에 실릴 글에 그런 표현이나 도입부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분량과 발표형식, 전달시기 등이 매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다. 이런 여러 매체를 고려한 글쓰기는 구체적으로는 기고문(칼럼 등), 성명서, 토론회 발제문/토론문 등등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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