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4. 19. 12:53

위기의 학교 저자 닉 데이비스는 '거대한 사기'로 명명한 영국의 '시험 게임'에서 성적을 조작하는 다양한 수법들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 우선 시험대비 보충수업, 기출문제 풀기, 출제유형 파악하여 연습하기 등을 지적한다. 이 수법들은 한국의 학교에서는 게임 아이템으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0교시, 강제보충, 강제야자, 모의고사, 기출문제, 밤샘학원, 족집게 과외 등 우리에게는 이미 관행화되어 있는 규칙이다.

(우리교육 2009년 3월호 p.121.
「1%만을 위한 시험 게임을 중단하라 - 서울시교육청 '일제고사 꼴찌'가 의미하는 것」 (조진희 서울 영일초 교사) 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뭔가 한국 교육은 정말 막장 테크구나...라는 생각을 찐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경쟁 교육 정책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이고 일제고사니 학력미달이나 학력향상이니 국제경쟁력이니 하는 말들이 국경을 넘어 유통되는 시대라고 하여도...-_-

유럽권도 아니고 영미권에서도 '시험대비 보충수업' '기출문제 풀기' '출제유형 파악하여 연습시키기'를 성적 조작, 부정행위로 본다는 말입니다.
즉 정상적인 교육으로 수업을 하고 지식을 전달하고 학습을 시켜서 그렇게 생긴 능력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게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부'를 시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부정행위이고 정상적인 교육이 아니라는 거죠.

조진희 씨도 적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성적 조작이나 부정행위 축에도 들어가지 않고 아주 일상화된 '교육'입니다.
시험대비 강제 보충수업, 기출문제 풀기, '출제유형'에 맞춘 문제집 풀기......
이런 걸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은 직접 답안지나 성적표에 교사가 손을 대서 조작을 해야 비로소 '조작'이라고 한다는... 쓸데없는 데 엄격하군)



그저께는 이런 기사까지 났더군요.

영국 학교장 1만명, ‘학력평가 거부’


영국의 교장들이 특별히 착해서는 아닐 거 같고, 영국의 정치사회문화적 상황을 볼 필요 + 영국에서는 교장들이 어떻게 선출되나를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교장들은
교사 -- (교장 말 잘 듣고 근무평정 잘 받아서 승진) -- 부장 교사 -- 장학사 -- 교감 -- 교장 
뭐 이런 식의 라인을 보통 타고, 교육관료들 세계에서 위에 말 잘 듣는 사람들이 승진하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런 현실을 바꿀 대안으로 교장임명제(정부에서 하는 교장 돌려막기 짝퉁 말고), 교장선출보직제 같은 게 나오는 거구요.


기사 내용으로 볼 때 저 교장단들이 특별히 인권의식이 있거나 좌파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다만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위치에 서있다는 내용은 곧잘 눈에 띕니다. 한국에서는 현장교사-교장이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란 걸 생각해보면... 일단 저런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긴 하군요.


Posted by 공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

딱딱한꿈2010. 2. 15. 02:19







1

  한국 사회에서 우려되는 현상 중 하나가 조직의 부재이다. 어쩌면 이 말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조직만 있고 개인은 없다, 전체주의적이다, 집단주의적이다 같은 류의 이야기들이었으니까는.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로 들리는 조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분명 쌩뚱맞게까지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지적과 조직이 약하다는 지적은 모두가 사실성을 담고 있다.

  여기서 조직(뭐 커뮤니티나 공동체라고 표현해도 좋다.)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자발성/자기이익/공익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구성된 집단,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을 말한다. 예컨대 지역의 커뮤니티,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학생회, 공익단체, 정당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 개념을 빌자면 이런 조직들을 '자발적 결사체'나 '시민사회'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결사체들은 사회에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집단적 정치 참여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강한 조직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조직들은 대부분 국가 권력이나 대자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로는 보기 어렵고,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인은 없고 조직만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조직은 주로 국가, 학교, 군대, 대기업, 지연, 학연, 그밖에 군사 독재의 부산물로 탄생했으면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조직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일부 친목적 기능을 수행하는 커뮤니티들(부녀회라거나)도 여러 요인들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가능성은 미미하다 하겠다. 요컨대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자본이 조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며, 자발적인 조직화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것으로, "한국은 시민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하다."라는 분석과 비슷한 의미일 뿐이다.



2

  조직의 부재는 개인의 원자화라는 결과를 낳는다. '학생운동'이라는 형태로 80년대-90년대 초에 비교적 높은 자발적 조직화율을 보여주던 20대-대학생들의 현재를 관찰하면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최근에 각광받는 "88만원 세대"(박권일,우석훈)나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 등의 논의들을 보면 각각의 이론적 틀에서 그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라고 쓰면서 정작 아직 서동진 씨 책은 안 읽어봤다 -_- 서평만 읽어봤지;;) 그렇지만 20대의 경우에 이러한 '변화'가 더 눈에 잘 띈다는 것 뿐, 이는 비단 20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낮은 노조조직률, 껍데기뿐인 학생회, 지역 기반 운동의 부진,(지역주의적이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정당들을 제외한) 정당들의 적은 당원 수 등등… 우리는 한국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개인의 원자화가 사회의 보수화를 불러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은 사회 변화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없으며 사회 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된다. 무력감 속에서. 문제들은 항상 개인화되고,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정치적/집단적 해결책은 사라지고 윤리적/개인적 해결책들만이 제시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당한 부당한 피해를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여 행동하고 정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 제도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한다. '신고'처럼 권력기관에 의한 제도적 구제를 요청하는 방식. 아니면, 자신이 사회적 권력자(또는 일종의 영웅.)가 되는 방식. 이 두 방식 모두 대단히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들만이 '현실적'인 방식들로 받아들여진다.

  무력감이 없어야만 민주주의라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지적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계급상승의 꿈이나 출세의 꿈을 꿀지언정 스스로 사회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하여 해답을 도출해내기보다는 권리를 위임하고 권력 기관에 의존한다. 시민 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력한 상황이 역으로 국가 권력을 더 강고하게 한다는 것은 우울한 재생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이라는 말은 기껏해야 공직선출권-피선거권과 선거권 이상으로 얼마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건강하고 잘 굴러가는 정당이 없이는 국회나 정부 등이 잘 기능하기 어렵듯이, 다양한 조직들이 존재하지 않는 - 시민 사회가 약한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운영될 수 없다.




3

  운동의 영역에서, 조직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가진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제도적인 기구들에 의존하는 대응, 이슈파이팅, 입법운동 등등... 파업 등의 방법도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더 두드러지는 문제점이다. (한국의 운동들이 많은 경우 입법운동에 치중하게 되는 것은 이런 우울한 현실 탓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 같은 말들이 시민단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단체들의 운동 방식을 더 개선하기 위한 연구들도 있어야겠지만, 한국 사회 전체가 조직화가 안 되는 판에 그것을 단체들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른바 '대중'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경로들이 매스미디어와 거리선전 등 외에는 거의 없는 상황은 운동 주체들에게 끊임없이 두통이나 과로 같은 건강상의 문제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의 자발적 봉기가 가장 건강하다는 식의 주장은 낭만주의자의 근거 없는 환상이다. 비조직 대중들의 자발성을 역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아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발성이 있죠."라고 말해준 다음에 그런 '대중들' 속에서 기존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현실들을 수없이 많이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구조[조직/공론장]조차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게 될 것임을 과거의 사례들을 들어가며 들려줄 수 있다.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개개인들의 자발성은 촛불집회처럼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아무리 암울하고 원자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사회성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지속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팬클럽이나 인터넷 카페, 동호회 등의 조직들이 촛불집회에서 한 활동들을 연구해보는 게 더 나을지도.)

  그리하여 우리의 과제는 조직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조직이 없다면 조직을 만들면 된다. 긴 시간이 걸리고 매우 어려운 일이더라도, 여하간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조직이 없는 이 현실이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하고 조직화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 청소년 대중 조직화나 청년 조직화 등은 장기적인 해결책 중 일부를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 때 조직화를 경험하고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해결 방식을 경험한 사람들이 30대 40대 50대 60대...(후략)... 가 되어도 조직화되기 쉽다고 가정한다면, 혹은 한나 아렌트 표현대로 '정치적/공적 자유'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말이다.(과거 20대 때 학생운동[조직화]을 경험한 사람들이 꼭 그 이후에 조직화되어 있느냐, 하는 반문이 분명 가능하며, 따라서 이걸 주된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건 매우 뻘쭘한 일이다. 동시에 추진되는 다양한 해결책 중 하나 정도의 위치로 이해해야 한다.) 어쨌건 그런 류의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10대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0대든 80대든, 조직화는 필요한 일이니까.

  여하간, 그리하여, 문제는, 조직화다.






(네스티캣 님의 미디어다음 연재 웹툰, 트레이스에서....)







# 이 글에서 '조직화'나 '조직'을 사람에 따라서 '함께하기'라고 읽든 '공동체'라고 읽든 딱히 반대하지는 않겠다.
Posted by 공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무척 공감하는 글.

    그런데 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에 신경쓰기 보다는 촛불을 미화시키고 다시 촛불이 일어나길 소망하는데만 급급한걸까?
    그렇게 하는게 (마음이든 몸이든) 편해서?

    2010.02.15 10:54 [ ADDR : EDIT/ DEL : REPLY ]
    • 혁명적 상황이란 게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별 부담없이 나서는 상황인 건 맞는 말 같은데, 그렇지만 조직화가 일정 이상 되어 있지 않으면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보이는데 말이지-
      마음과 몸이 편해서라기보다는; 당장 정부에 대응은 해야겠는데, 조직화라는 건 성과를 보려면 길게는 10년을 내다봐야 하는 일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_-;

      2010.02.15 12:50 신고 [ ADDR : EDIT/ DEL ]
  2. ㄹㄷ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건강 지킴이 내 병은 내가 고친다

    2010.09.22 23:12 [ ADDR : EDIT/ DEL : REPLY ]
  3. 곰돌

    이 글이 나왔을 땐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 와서야 이해하겠다는 -_- 모종의 성장이 있었던건지, 여하간 멍청했고 (지금도) 그러한 거 같단 건 사실인둡 흑

    2011.02.08 00:36 [ ADDR : EDIT/ DEL : REPLY ]
  4. 곰돌

    읽을 때 마다 몹시 다른 느낌들이 느껴지는군요...

    2012.03.18 22:42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9. 9. 23. 17:10


과연 경제학은 현실/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가?



대학교 1학년 때 경제원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맨큐의 경제학 책을 가져다놓고 수요 공급 균형가격 완전경쟁시장 고정비용 가변비용 기업의 퇴출, 담합...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었다.
그리 모범생은 아니어서 수업 들은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 중에 교역의 필요성에 대해 배우는 챕터에서 절대우위-비교우위를 설명하던 날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수업을 듣고서 내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했던 게(무려 질문씩이나 하는 학생이었다;)...
일단 분명히 그 이론은 비교우위가 있는 상품에 주력해서 생산하면 총 효용이 늘어난다는 것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까 교수님은 비교우위에 주력하여 생산한 후에 둘 사이에 교환을 통해 둘 모두 이득이 된다고 가정하고 설명을 하셨다. 물론 둘이 교환을 할 수 없다면 비교우위에 주력하여 생산을 하지는 않을 테니 교환이 일어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교환의 결과가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되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교환의 비율 등 뭘 어떻게 교환하냐에 따라서 그 총효용의 증대가 양쪽 모두에 이득이 되지 않고 한쪽에는 손해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않나? 
 
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수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가정하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보증은 없긴 하다."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답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이 완전히 평등하고 합리적인 경제 주체로서 협상을 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둘 사이에는 서로서로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둘은 완전히 평등하고 합리적인 상태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까? 둘의 합리성과 평등에 대한 가정 말고는 저 분배를 보증할 만한 장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장치가 없는 이상, 교역은 양쪽 모두 잘 사는 전략이 아니라 총효용은 늘리지만 한쪽이 다른 쪽을 착취하는 구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수업은 내가 그전부터 의구심을 품어왔던 주류 경제학의 허점 같은 걸 구체적으로 느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비교우위이론에 따른 생산으로 총효용이 증가하더라도 그 총효용이 꼭 공정하게 분배되리란 법은 없다.
경제성장률이 몇%가 되고 GDP가 늘더라도 그게 꼭 모두가 잘 살게 하는 걸나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특정 상품의 우위나 경제규모의 차이(환율 등으로 나타나는), 군사력 등등의 요인으로 불공정한 거래를 하게 되고 불평등은 더 심화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가격균형에 대해서 배울 때도, 노동시장도 똑같이 수요 공급으로 설명하고, 가격하한제가 시장을 왜곡시키는 예로 최저임금제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서...
 '아니 그럼 균형가격이 형성되었을 때 그게 최저임금보다도 아래란 건가? 지금도 최저임금은 완전 쥐꼬리인데? 그거보다 더 아래면 대체 얼마인 건지. 그 임금이 도저히 먹고 살 만큼도 안 될 게 뻔한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런 생각에 도대체 이 경제원론이란 게 무슨 장난질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었다.  (지금이야 "기본소득 도입ㅋ"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당시 배울 때는 교수야 최저임금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지, 그런 답은 경제원론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다.
노동자들은 가격하한제(최저임금) 때문에 실업이 되어서 먹고 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초저임금을 받으며 먹고 살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말인가?

그런 경제학적 명제들 앞에서 생각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류' 경제학은 과연 제대로 된 현실/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숫자놀음은 아닐까?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 - 10점
로랑 꼬르도니에 지음, 조홍식 옮김/창비(창작과비평사)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 - 경제학의 실업이론 비판
초판 2001년
지은이: 로랑 꼬르도니에                          옮긴이: 조홍식
펴낸곳: 창작과비평사



  이들은 실업자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실업자들은 참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실업이론은 이같은 광경이 초래하는 도덕적 상처를 가리기 위해 붙이는 반창고 역할만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적인 설명이 진정 필요한 부분은 실업기간 동안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하고 충격적인 부분인데, 그렇다면 일이 없는 노동자들은 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고통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경제학은 이들이 겪는 고통의 광경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른 쇼를 준비한다. 이 쇼에서는 실업자들이 부자이며 이익을 누리려 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수혜자적 상황에 빠졌고, 그 책임 또한 그들에게 있다고 보여준다.
책 pp.95-96


"경제학의 실업이론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주류경제학의 환상들에 대한 알기 쉬우면서도 통렬한 비판이다.

(대개 신고전주의/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발적 실업'과 같은 사람 홀리는 말을 써가며 실업의 원인은 노동자들한테 있노라고 말하며 최저임금과 복지제도 같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라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인지 이 얇은 책 한 권에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다니!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노동] 경제학에서 실업이론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못 사는 건 게으르고 못나서다"라고 외치던 저 [자유방임주의적이고 기독교도덕적인] 자본주의초기 담론을 더 복잡하고 이론적으로 꼬아놓은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주 합리적으로 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목표를 빨리 간파할 수 있다. 실업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이며, 따라서 불만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깊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자유주의 담론의 문제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심각한 상태인데, 논리적 사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증상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실업이란 자발적 실업이며, 이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실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민의 정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자가 이렇게 복지를 누리고 있는 서민들의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주의적 이상에 기초를 제공하는 유일한 이론에 따르면, 경제활동 인구의 86%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데 왜 자유주의자들은 최저임금제를 철폐하여 완전고용을 이루려고 저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왜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행복해하고 있는 실업자들에게 선을 베풀려고 하는 것일까? 자유주의라는 것이 자본가계급의 경호견이 되려는 정치적 계획이 아니라면(물론 이럴 경우 완전고용이 이뤄져야만 최대한의 이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관심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것은 매우 신비한 현상이다…….
책 pp.72-73

이 인용문과 같은 위트와 비꼬는 말들은 이 책의 장점 중 하나이다.
이런 부분들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점잖은 사람들에게 이런 부분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지만.)


로랑 꼬르도니에 씨는 주류경제학의 실업이론들을 하나하나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동시에 이를 논박한다.
먼저, 주류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시장'의 모델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마치 여가와 노동을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주류경제학에서의 '노동자'의 모델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경제학에서 만든 노동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사먹을지 아니면 15분 더 낮잠을 잘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번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p.35))

특히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고 굉장히 타당한 비판(그러나 잘 수용되지 못하는 비판)을 다시 환기시킨다. 바로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것과 같은 시장도 노동자도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경제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이래야 한다는 당위에 가깝게 되어 버린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면 그것은 "실증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신화"이다.


  이론가들은 시장을 변호하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화, 추상화, 가설 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변명할 것이다. 좋다. 우리는 항상 '마치 ~처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처럼'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실증적 적절성을 전혀 갖지 못한 이 훌륭한 지적 건축물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며, 일부 사람들이 세상에 강요하려 하는 실천적 신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인데…… 그 옹호자들은 이런 분석을 가장 지독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책 p.58


그 이후에 책은 "최저임금 때문에 실업이 발생한다", "사회복지제도(예약임금) 때문에 실업이 발생한다", "노조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늘리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등부터
"게으른 노동자 이론", "겁많은 노동자 이론" 등 노동자들에게 실업의 책임을 돌리는 실업이론들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특히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유효수요'의 문제   그리고  ▲상호보완적 노동(대부분의 노동들이 그렇다)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에 경쟁으로 한 집단의 소득이 양극화되는 현상에 대해 논의한 것은 이론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혹시라도 책을 읽기 전에 이런 논의의 요지를 간단하게 맛보기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 인용문을 읽기 바란다.


  의심의 여지없이 최저임금의 철폐는 반드시 완전고용을 창출하는 미덕을 발휘할 것이다. 만일 가장 비숙련된 노동자 집단의 임금이 자유롭게 변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임금은 상당히 급격한 폭락 끝에 어느 수준에선가 멈춰서서 시장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이다. 나는 한달에 10만원 정도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기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 가격이라면 사업가들은 비숙련 노동자의 고용을 분명히 늘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여기서는 당연히 신고전주의자가 즐겨 사용하는 우화를 소개해야 한다. 최저임금이 100만원일 때 노동조합의 독점권이 제공하는 이익의 일부분을 받으면서 풍요롭게 생활하던 노동자들은 임금이 10만원으로 내려가면 집으로 돌아가 화초나 키울 것이다.
... (중략) ...
  하지만 지적 정직함이 있다면 어떤 임금 수준에서 이런 이론이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밝혀야만 한다(이런 작업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 유연성을 막고 있는 요소들을 제거할 경우 임금이 즉각적으로 폭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정통 이론이 말하는 것과 다르지만 말이다. 다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면 최저임금제는 실업의 원인이 아니라, 실업의 가장 비참한 결과를 제한하는 구원의 방파제인 것이다.
  우선은 자유주의 담론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시발점에서부터 살펴보자.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자들이 가장 낮은 (한계)생산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일부가 실업상태에 있는 이유는 최저임금이 같은 직종의 비숙련 노동자의 완전고용에 해당하는 (한계)생산성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사업가들이 합리적이라면 비숙련 노동자들의 (한계)생산성이 최저임금보다 떨어지는 순간 이들의 채용을 중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용의 문이 닫히는 것은 어느 노동자가 전체 노동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최저임금보다 조금 적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고용주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1년에 1800만원이라고 하자. 이는 르노(Renault)의 고용주가 공장에 한 명의 비숙련공을 채용하더라도 1년 동안 라구나(Laguna) 자동차 한 대도 더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한 명의 1년 자동차 생산량이 평균 열여섯 대 가까이 되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경제학자들이 우리에게 르노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 한 명을 더 채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낮은 그의 생산성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한계생산성이 정말 극적으로 하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역설 중 하나는 숫자가 나오기만 하면 경제학자들은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르노의 고용주는 아마 추가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는 이유가 한계생산성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추가로 자동차를 생산하더라도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수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기업이 노동자의 채용을 중단하는 이유는 노동자의 생산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신비로운 요정이 나타나 완전고용의 상태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갑자기 노동자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수요의 한계라는 가능성을 잠시 고려해보면, 최저임금제 같은 제도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최저임금이 실업의 원인이 아닐 뿐더러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발생한 실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한 장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pp.74-77


  경쟁제도에서 피해를 보는 자들은 다른 종류의 경쟁자들보다 필요로 하는 일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많은 사람들이다. 만약 어떤 회사의 이사(理事)가 최저임금의 100배(간단히 말해서)를 번다면, 피아노 이사 우화의 경우 이 사람은 꼬리일꾼인 셈이다. 좀더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사는 경리와 경영을 담당하여 돈을 셀 줄은 알지만(그의 능력) 노동자처럼 나사를 돌릴 줄은 모르기 때문에 경영 인력에 비해 육체노동을 제공하하는 노동력이 과잉공급되는 상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육체노동자들이 이사들처럼 경리를 담당하거나 경영을 할 수 없다고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제 같은 제도의 기능은 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인해 협상력이 취약해진 노동자집단의 소득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최저임금은 일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이중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의의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이중의 고통이란 실업으로 인해 이들의 임금이 계속 하락하는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고통과 바로 이 하락 경험을 초래하는 요인인 실업이라는 고통이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최저임금에 대해 반대입장을 보일 때 그것이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성격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이 최저임금이 비숙련('비숙련'이란 것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노동자의 한계생산성과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담론은 유효수요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의 무능력(또는 의지의 결핍)을 감추는 데 필요할 뿐이다. 문제는 실업이 존재할 때 수요량을 늘리기 위해 노동의 가격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수요를 이동시키는 데 있자. 그것은 각각의 가격 수준에서 노동의 수요량을 늘리는 것이며 최저임금의 수준에서도 모두가 일을 갖게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수준을 확장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현대 경제이론의 맹점을 보여주는 부분인데, 최근에 사람들이 거의 고정관념처럼 선호하는 의식은 신이 늙은 케인즈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가 유효수요 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경제학자들 중의 한사람인데도 말이다.
책 pp.82-84





주류경제학이 의심스러운 상식인들을 위한 책


사실 주류 경제학에서 내뱉는 온갖 말들은 '상식'과는 다른 것들이 많다.
(이 책에 소개된 것만 해도 그런데, '최저임금'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은 실업의 결과가 아니라 실업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월 60만원도 안되는 실업수당이 예약임금이 되어서 실업을 일으킨다 등등....)

물론 '상식'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적인 곡예와 비현실적인 추상화, 가정들에 입각하여 나온 이론이 '상식'보다 더 현실/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그러나 '상식인'(요즘 한윤형 씨의 글을 읽다보니 지식인이나 엘리트에 대비되는 '상식인'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들로서는 학자들이 도표와 계산을 제시해가면서 이렇다는데 뭐라고 딱 반박할 말이 안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나, 아니면 빈부격차나 실업 등에 대해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거구나 하고 체념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결국에는 그런 경제학적인 이데올로기들은 하나의 '상식'으로 굳어져버린다.
교과서나 신문에 범람하는 '시장실패', '정부실패', '자발적 실업', '복지수혜자들의 도덕적 해이', '정부는 비효율적이고 시장은 효율적임' 같은 말들의 힘이다. )


그런 주류경제학의 노동시장, 최저임금, 실업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영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찜찜하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찜찜하던 부분은 분명하게 밝혀주는 불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뭔가 분명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 같던 경제학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나 하는 회의가 들게 된다. 그러다가 열성적인 독자라면 결국 새롭고 대안적인 경제학 이론들을 찾아나서게 될 것이다.

나도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최저임금과 일자리, 비숙련 노동 등의 문제를 많이 고민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부분 좀 더 정리된 논리들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 이후로 한국의 복지는 상당 부분 축소되고 있고,
올해만 해도 경제 상황 악화와 일자리 등을 이유로 최저임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재계(자본가들)의 요구 때문에 최저임금이 (물가인상 등과 비교하여)'사실상 삭감'되었다.
청년실업의 문제, 서민 경제의 침체는 갈수록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책은 나온 지 오래 되긴 했지만 대중적인 경제서로 읽힐 만한 의의가 있다.


노동경제학자이면서도 어렵지 않게(물론 노동시장을 설명하는 부분 같은 경우는 좀 머리를 굴려가면서 읽어야 하지만 대체로 쉽게 읽을 만하고 이런 부분은 좀 건너뛰어도 큰 문제는 없다;;) 이론적인 이야기와 상식적인 말 사이를 넘나들면서 좋은 책을 쓴 로랑 꼬르도니에 씨와 이 책을 번역한 조홍식 씨 등에게 다시 한 번 한 독자로서 감사의 뜻을 표한다.








Posted by 공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전 눈앞에 무슨 도표가 있어도 "기본소득ㅋ"

    2009.09.23 20:37 [ ADDR : EDIT/ DEL : REPLY ]
  2. ...라고 해도 어차피 경제학을 반박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정도의 '증거'와 '논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을걸? 내가 보기엔 아직 '체계'라고 부르기도 부족한듯 한데.

    2009.09.29 20:47 [ ADDR : EDIT/ DEL : REPLY ]
  3. 솔직히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전념하는 분야라서, 예언적이거나 당위적 측면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더럽게 많'기는 하지. 나는 근데 아무리 읽어도 '당신들의 가정에는 사악한 사상이 담겨있어'라는 피해망상적인 푸념이 들어있는것 같달까 -_-

    2009.09.29 20:55 [ ADDR : EDIT/ DEL : REPLY ]
  4. '최저임금' 문제만 해도 사실 거기에 대해선 '주류'의 의견이란게 없을 정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너무 높이거나 너무 낮추는 것은 노동환경이나 시장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정도는 대부분 인정하는듯?...하지만 "적당히 올리면요?" 라든지 "기본소득"은요? 라고 물으면 아무도 모름..) 솔직히 자유주의는 지금도 (경제학 내에서) 충분히 까이고 있기도 하고..

    2009.09.29 21:02 [ ADDR : EDIT/ DEL : REPLY ]
    • 책 원본이 나온 게 90년대인가 여하간 좀 오래됐으니까, 현재의 학계의 상황과는 다른 면이 있을 수 있겠지.
      그리고 이거 책은 실제로 읽어보면 나름 경제학자가 쓴 경제학 비판이라서 굳이 외부의 사회학이나 정치학적 논의를 끌어오지 않고 경제학적인 논리로 무장되어 있음(내가 리뷰에는 대부분 생략했지만)
      * "당신들의 가정에는 사악한 사상이 담겨있어" 내지는 "당신들의 가정은 사악한 결과를 유발하고 있어"라는 인식이 있기는 하지.

      2009.09.30 01:39 신고 [ ADDR : EDIT/ DEL ]

딱딱한꿈2008. 1. 12. 17:30

고령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부족한 복지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노동인구 부족을 우려하여 출산을 장려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한때의 베이비붐이 있었던 만큼 현재와 같은 노령인구 증가 현상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생태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시점에서의 출산율 저하 또한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비정상적인’ 베이비붐 이후 출산율이 저하되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자연스런 현상이라 보면, 고령화의 원인은 결국 사람들이 오래 살기 때문이다. 곧 나이에 비해 정정한 인구도 많을 테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복지예산이나 노동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 연령을 높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퇴직정년을 높이는 등의 방법을 쓰려 하면 이제는 청년실업이 문제가 된다고 난리다. 어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고령화 시대가 되어서 노동인구와 복지예산이 부족하다고 떠들어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실업 때문에 노인들을 일하게 하면 안 된단다. 실업이 많다는 것은, 실업자들이 실업을 ‘선택’한 게 아닌 이상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며 노동인구가 남아돈다는 의미다. 자, 대체 노동인구는 부족한 건가, 남는 건가?


  이와 같은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 즉 고령화 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노년 인구를 노동인구로 끌어들이는 간단한 방법을 쓸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분배 없는 성장”과 “일자리 없는 성장”. 애초에 자본은 이윤을 얻으면 그것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보다 기술이나 설비에 투자, 인건비를 절약하여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이런 경향은 신자유주의(신자본주의) 정책으로 “노동의 유연성”이 제고되고 자본이 국외의 값싼 인건비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함에 따라 더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 이야기되는 고령화 시대의 문제를 고령화 자체의 문제인 것인 양 말하는 것은 실로 그 일부가 신자유주의 경향과 결부된 것임을 은폐하는 서술이다.


  신자유주의와 같은 여러 상황을 배제하고 고령화 시대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그 전망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자국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주의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출산 저사망 상태는 고출산 저사망 상태보다 바람직하다. 낮은 출산율을 유지하여 인구를 줄이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우리가 고령화 시대의 문제로 꼽는 여러 현상들은 단지 과거의 고출산 저사망 시대(그 정점은 베이비붐이었다.)에 맞춰져 있는 여러 사회 상황(제도나 의식)이 저출산 저사망 시대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제도와 의식을 재정비하여 고령화 시대의 사회 상황에 맞추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통은 있겠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는 아니라는 소리다. 저출산 저사망과 인구 감소의 원칙을 위배하지만 않는다면,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사회가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고령화 속도를 늦추는 선에서 출산 장려 정책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흐름은 저출산 저사망의 고령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사회 변화를 방해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원자화, 만성적인 실업 상태 또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어떤 의미에서는 잠정적인 실업), 그리고 양극화의 심화는 노동인구를 증대시키는 정책과는 충돌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고령화 시대와 세계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두 난관 사이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자본주의에 굴복하여 고령화 시대 자체의 진행을 막으려 발버둥칠 것인가, 아니면 고령화 시대의 추세와 인구감소라는 대원칙을 옹호하여 자본주의에 맞서 그 경향을 견제할 것인가? 혹은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물론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고령화 시대에 맞춰서 변화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지지하는 것이 그대로 자본주의 반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 국가주의적인 발상에 의거한 인구증가 정책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다.







그냥 고령화 시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느낀 약간의 모순 - 노동인구 부족과 청년실업 - 에 대한 글입니다. -_- 그다지 엄밀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Posted by 공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