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14. 7. 26. 18:10




3년 전에 1번을 쓰고 들어간 글을 겨우 3편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홀가분하다...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1 : 글쓰기의 일반적 기본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2 : 주장하는 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3>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 : 기획안, 회의록 등

 

  설명하는 글이라고 하면, 보통은 ‘설명문’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하다가 써야 하는 ‘설명하는 글’은 그런 산문 형태의 글은 아닐 때가 많다. 뭐, “○○라는 개념/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글을 쓸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에는 인터넷검색이나 자료 편집의 기술이 더 요구될 때도 많다. 여기에서는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로 ‘기획안’과 ‘회의록’을 설명하려고 한다. 기획안이나 회의록은 보통 우리가 ‘글쓰기’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글들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것들이 ‘글’이기는 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기획안과 회의록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글의 종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획안과 회의록은 둘 다 회의에 관련된 글이다. 기획안이 회의 등을 하기 전에 자료로서, 함께 보고 논의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회의록은 회의의 결과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글이다. 둘 다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는 글인 셈인데, 회의록이 실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와 결론 등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기획안은 우리 머릿속의 구상, 계획,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획안과 회의록 역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내용으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매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매체는 기획안이나 회의록이 이용되는 환경, 사용처라고 넓게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읽는 사람에게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인가? 쓰는 사람이 설명하고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이러한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라도 설명해보겠다.

 

 

① 기획안

 

기획안은 말 그대로, 일을 기획한 것을 정리한 문서이다. 기획의 대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대외활동, 워크샵이나 MT, 토론회, 캠페인… 몇 년 이상의 활동을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고 일회성 30분짜리 행사를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1박2일 놀러갈 때도 어디를 갈지, 몇 명이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는지, 뭘 하고 놀지 등의 계획을 짠다. 기획안이란 본질적으로 그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기획안을 어떤 경우에 쓰고 어디에 쓰이는지부터 생각해보자. 기획안은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활동, 할 활동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그 공유를 바탕으로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수정한 기획안에 따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른 단체 등에 기획안을 보냄으로써 활동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즉 기획안은 ① 논의를 위한 기초 자료 ② 활동할 때 지침 ③ 타 단체나 외부로의 전달 등의 용도로 쓰인다. 이런 용도들을 보면 기획안이 하나의 ‘설명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안의 구성에 정답은 없다. 어떤 활동이냐, 어떤 용도냐에 따라 어느 정도 수준의 세밀함이 요구되는지, 어떤 항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들을 제시하겠다.


기획안의 구성은, 일단은 육하원칙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물론 여기에서 ‘어떻게’나 ‘무엇을’ 안에 다종다양한 정보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획안의 항목들은 그 자체로 기획안의 개요가 될 것이다. [1.취지 2.장소 3.내용] 등…. 우선은 뭐, 기획안에는 당연히 활동의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이름은 기획안 제목에 들어가기도 하고, 중간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활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잘 짓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은, ‘왜’이다. 즉 이 활동을 제안하게 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이유 또는 배경. 활동의 취지라는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배경 설명을 우선 한 뒤에 활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와 ‘어디서’, 즉 시간과 장소가 있다. 이는 기획안에 상대적으로 짧게 들어갈 때가 많지만, 그런 주제에 많은 고려를 요구한다. ‘왜’가 우리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라면, 시간과 장소는 외부의 요건에 가장 많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부분에는 활동하는 기간을 포괄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일시를 다 넣는 경우도 있다. 장소 자체가 활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장소 후보는 몇 개의 안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집회신고라든지 대관신청이라든지 날씨라든지 상황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 활동을 기획하는 경우는 전체 기획안에서는 별도의 장소 서술을 하지 않거나, 포괄적으로 지역만을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과 ‘어떻게’는 활동의 내용과 방법을 뜻한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들어가게 된다. 행사라면 행사의 구체적인 진행 순서, 토론회라면 담을 주제와 내용 등이 들어가야 한다. 대규모의 기획안이라면 활동 방법에 대한 총론부터 각론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기획안은 실제 활동을 위한 제안이므로, 일의 진행순서나 일정표를 첨부하기도 한다. 예산이나 재정에 관한 항목도 들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항목들은 처음에는 가장 생략할 일이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디어 논의를 위한 초안 수준에서 구체적인 진행 순서나 내용이나 일의 진행순서 등을 담을 필요는 없다. 예산을 생략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조정해서 더 풍성하게 보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 처음 기획안을 만들어볼 때 너무 겁먹지는 말자. 외부로 보내는 기획안에서는 분량과 가독성, 보안을 위해 일부러 생략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누구’가 있다. 이는 물론 활동을 누가 하는지를 말하며, 기획안을 제안하고 논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사의 참가자가 누가 될 것인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를 적어줘야 할 때도 있다. 또한 다른 단체에 제안하는 경우, 어떤 단체들이 참여해서 어떤 역할들을 함께하길 기대하고 요청하는지 명확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아래는 토론회 기획안의 예시이다. 일의 진행 순서 등 좀 더 채워지면 좋을 것들이 눈에 띄는데, 동시에 그런 부분을 생략해서 어떤 내용의 행사를 하려는 것인지는 더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기획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세밀하게 하고 어떤 부분을 간략하게 할 것인지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그때그때 고려할 문제이다. 여러분이 이런 내용의 행사를 준비한다면 기획안을 어떻게 쓸지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학교 휴대전화 규제 문제 관련 청소년인권 토론회 기획안>

1. 행사명 청소년인권 토론회 <학교, 휴대폰금지압수 괜찮?>

 

2. 행사 취지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거나 압수하는 등의 일은 사실 몇 년 전부터 벌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2007년은 특별히 휴대폰 금지 및 압수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전지역 교장단은 <휴대전화 안 가져오기 운동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원 청명고등학교에 대해 휴대폰을 전면 금지하는 교칙 조항이나 휴대폰을 압수하는 등의 행위는 인권침해이니 시정하라는 권고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4월 14일에 열렸던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청소년인권 집회도 그 요구사항 중 하나로 “휴대폰 등 소지품 검사 압수 폐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겨레와 방송3사 등의 언론이 학교의 휴대폰 금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휴대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휴대폰 금지에 대한 논쟁지점의 설정과 내용 있는 토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각 단체들도 뚜렷하게 입장을 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휴대폰 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담론은, 오직 언론에 나온 단편적인 인터뷰와 인터넷 뉴스에 달린 별 내용 없는 덧글들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휴대폰 문제가 명백한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 휴대폰 문제에 대하여 교사단체, 학부모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의 입장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3. 행사 일시와 장소

2007년 6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 (변경될 수도)

??? (미지센터, 청소년문화의 집, 전교조 서울지부, 노동사목회관, 대학교 등 검토 중)

 

4. 토론회 패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인 (참교육실장이나 학생생활국장으로 요청)

참교육학부모회 1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인 (청소년)

인권단체나 사회단체 활동가 1인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에 요청)

 

5. 진행

◎ 사회자가 5분 정도 학교 휴대폰 문제에 관한 올해 상황을 정리하고 행사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 (5분)

◎ 청소년 -> 교사 -> 학부모 -> 인권사회단체 순으로 약 3분씩 자기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여 발제. (15분)

◎ 사회자가 발제 내용에 따라 쟁점을 하나나 둘 뽑아 패널들에게 질문을 하여 토론을 시작하고 각 패널들이 자유롭게 주고 받는 토론. 사회자는 논의를 벗어나거나 이야기가 계속 공전할 때만 개입. 시간이 다 되면 사회자가 짧게 정리. (1시간)

◎ 질의응답 및 플로어 참여 자유토론 (20분~30분)

 

6. 예산

장소대여료 (0원~10만원)

다과 및 음료수 (1만원)

각 패널 토론비 (3만원~6만원 문화상품권 등으로 지급)

약 5만원~17만원 예상됨.

 


기획안의 포인트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이다. 그런 점에서 기획안은 내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또 읽는 사람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많은 고려를 해야 하는 글쓰기이다. 내가 이 기획안을 회의 자리에서 받는다면, 이걸로 충분할까? 또 무엇이 궁금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쓴 기획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그 사람이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아이템이 된다. 그리고 기획안도 혼자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의견을 반영하여 함께 완성해간다고 생각하자. 처음 논의를 위한 기획안을 쓴다면, 아예 어떤 항목과 정보가 들어가면 좋을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람마다 궁금한 부분이나 판단에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는 제안을 받는 사람들에게 맞춤형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획안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더 독자에 맞춘 글쓰기가 가능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회의록

 

회의록이야말로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종류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회의에서 나온 발언, 회의의 내용, 결과를 기록한 것을 회의록이라고 한다. 그냥 “회의 기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회의록은 작성하여 이메일로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인터넷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며, 또는 다음 회의에서 자료로 첨부가 되기도 한다.


회의록은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회의란 우리가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공통의 의견을 만들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견과 결정을 제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기록을 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억력에만 의존을 해야 하고, 기억력이 나쁘거나 건망증이 있는 사람이 활동에 펑크를 내면서 각종 트러블이 발생하고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현실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해서 공유해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 회의록에 잘못 기록된 게 있으면 나중에는 그것이 다툼이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의록 작성을 맡는다면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회의록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속기형 회의록이고 다른 하나는 요점정리형 회의록이다. 속기형 회의록은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모두 기록하는 방식이다. 모든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말투를 바꾸거나 윤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건 주된 내용은 모두 담는 것이다. (법원이나 정부기관의 회의록이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곤 한다.) 조금 더 덜 힘들게 회의 중에 나온 반복된 발언이나 농담 등은 일부 생략하고 주된 논의의 내용만 따라가며 속기하듯이 작성하는 방법도 있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각 안건에서 굵직하게 논의된 내용과 결론만 적는 방식이다. 회의록을 쓰는 사람의 취사 선택과 편집 능력이 요구되는 방식이라 하겠다. 여기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안건의 내용과 결론만 적는 간단한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각 안건에 무엇이 쟁점이 되었고 이 쟁점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까지 설명하는 형태도 있다. 어떤 회의록이든 회의 시간과 장소, 참가자, 무슨 회의였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시작해보자.


속 기형 회의록을 쓰는 것은 보통 회의의 논의가 중요할 때이다. 논의의 흐름이나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토론의 맥락 등이 중요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면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또는 논의가 복잡해서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기 어렵고,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논의의 맥락과 결론을 이해시켜야 할 때도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논의를 정리해가며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정리할 목적으로 속기형 회의록을 선택하기도 한다. 구글드라이브 등 공동으로 회의록을 실시간 작성하는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그런 경향도 생겨났다. 속기형 회의록에서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기록 속도, 기억력 등이다. 아무리 속기형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속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취사선택하여 편집해가며 쓰는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논의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이 은근히 많이 요구된다.


요 점정리형 회의록은 단체 회의에서 쓰는 일반적인 회의록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글쓰기 능력이 필요한 회의록이기도 하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에 들어가야 할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② 안건에서 주되게 논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③ 결론은 무엇이었는지. 이 3가지만 잘 기록해도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다 쓴 셈이지만, 당연히 말만큼 쉽지는 않다. ②가 특히 어렵다. 무엇이 주되게 논의된 것이며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만만치 않은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 어렵다면 일단은 ③번, 결론만이라도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보자. 결론 부분에도 역시 육하원칙이 어느 정도 적용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기로 했는지. 물론 안건에 따라서는 누가라든지 어디서 등을 생략해도 좋은 안건들도 있다. 안건 논의가 끝난 후에 결론이 뭔지 한 번 문장의 형태로 정리를 해보자고 하는 것도 회의록을 쓸 때 정리를 수월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②의 내용을 판별하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예를 들어 회의 참가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을 벌인 쟁점 사항은 무엇이 쟁점이었으며 누구와 누구가 어떤 입장 차이로 논쟁을 벌였는지 기록하는 것이 좋다. 쟁점이 아니었어도 ‘우려사항’이라고 지적한 것이나 활동을 진행하면서 ‘염두에 둘 것’으로 언급한 것은 기록하는 것이 좋다. 결론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논거가 있다면 그것도 적자.


회 의록을 쓸 땐 매체는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 속기형으로 쓸지, 요점정리형으로 쓸지 정도만 고려하자. 헷갈릴 때는 이를 미리 함께 확인하고 회의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회의록에서 안건에 따라 어디에는 속기형을, 어디에는 요점정리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의록에서 ‘쓰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회의의 내용을 ‘내가’ 무엇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전달할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슨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정보인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록의 어려운 점이다. 최종적으로 회의록 작성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역시나 ‘읽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읽는 사람은 회이에 참석하지 않은 제3자이거나 미래의 회의 참석자들이다. 나중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회의록을 보게 될 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한두 달 뒤에 이 회의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무엇을 궁금해할까, 무슨 정보를 찾으려 할까 상상해가며 쓰는 것도 회의록을 내실 있게 만드는 요령이 될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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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2. 3. 8. 01:03


한고학연(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해산에 부쳐

(이 글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쓰는 글로, 제가 속한 단체의 입장은 아닙니다.)


지난번, <전청련 해산에 부쳐>라고 쓴 글에 이어 또 이런 글을 쓰게 됐습니다. 서글픕니다. 지난번에는 저보다도 더 늦게 청소년운동에 나타난 단체(전청련)의 해산을 기리는 글을 썼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 전에 만들어졌던 단체, 한고학연의 해산을 기리는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느 단체의 해산에 대해서, 같이 운동을 하는 다른 이들이 무관심하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서글프기도 합니다. 뭐, 저는 애매하게 흐지부지 공중분해 되어버리지 않고 '공식 해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단체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단체들에게 동시대에 활동해온 활동가로서 예의를 갖추고 싶은 것입니다만, 그런 것도 어쩌면저의 독특한 성벽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시작할 무렵에 출범했던 단체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한고학연)는 제가 청소년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05년에 출범했던 단체입니다. 출범 초기부터 학생회 연합이라는 형식이나 명칭 때문에, "한총련의 고등학생 판이냐"라는 식의 언론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죠. 그리고 그때문에 한고학연 초기 멤버들이 많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뭐 저는 그 당시부터 생각했던 게, 패기 있게 "우리는 한총련 같은 것보다 더 대단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출범한다!"라거나 "한총련이든 뭐든, 우리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디 한 번 보든가!" 하고 응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긴 합니다만.

한고학연을 한총련에 비교한다거나 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든 지향점이든 활동 내용이든, 여러 모로 참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요. 사실 저는 한고학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비정치성을 비롯해서 운동론에 대한 의견 차이도 있었고, 만들어진 뒤 약 5년간, 한고학연이 했던 활동이라는 게, 학생회 관련 캠프나 워크샵 몇 번을 연 것과, 설문조사를 몇 번 하여 발표한 것 외에는 없었거든요. 저는 적어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고등학생 조직으로서, 아니, "고등학생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조직, "고등학교 학생회의 권한을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학생회 연합 조직으로서 해야만 했고 할 수 있었던 일들이 그 5년간 훨씬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해산을 결정한 한고학연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지난 한고학연의 구성원들이 공개적으로 평가하고 논의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고학연의 활동에 대한 저의 평가나 호불호를 떠나서, 한고학연이 해산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마음 찡한 슬픔을 느꼈습니다. 비록 내가 몸 담지는 않았지만, 내가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에 시작되었던 조직. 그 조직이 이제 공식해산 했다는 것이 저를 왠지 감상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한고학연은 2008년 무렵, 아니면 그 이전부터 활발한 활동은 없긴 했습니다. 그래도 '공식해산'이라는 게 주는 느낌이 그렇군요.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은 청소년운동에서 나름의 짧은 한 시대가 졌다는 신호 중에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저는 청소년운동에서 저와, 그리고 아수나로 등 제가 몸담고 있는 조직들과 다른 견해와 운동론과 형태를 가진 조직이 꼭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설령 다른 조직들이 서로 욕하고 비판하더라도, 어쨌건 각자가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청소년운동의 발전과 사회 변화를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운동을 건강하게 만들 거라고 믿습니다. 한고학연의 해산은 '비정치성'이나 '학생회 연합'의 형태를 내세운 운동의 한 형태가 다시 한 번 실패하고 소멸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동의했던 방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슬퍼하고 또 쓸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 하기만 하진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고학연은 '비교적' 역사가 긴 편인 조직이지요. 그리고 대의원 선거 등을 통해 매년 조직을 새로 구성해오던 단체 특성상 한고학연을 거쳐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한고학연의 해산을 결정한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고학연을 거쳐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고학연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은, 한고학연의 해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저 가슴 아파 하며 침묵하거나, 비난하지만은 않길 바랍니다. 한고학연에 실었던 꿈이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청소년운동의, 또는 좁게 보더라도 고등학생운동 또는 고등학교학생회의 발전이었다면, 한고학연 활동과 역사와 해산에 대해서 각자의 정리와 평가가 나오길 바랍니다. 저 역시 많은 단체, 모임, 운동들을 만들고 때로는 실패하고 흐지부지되고 사라지는 경험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짐한 것은, 이걸 단지 나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나와 나 이후에 청소년운동을 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밑거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리를 하고 기록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에 가슴이 한켠이 아프신 분들도 많겠지만, 아파 하기만 하지 마시고, 그런 형태로라도 마음을 달래주시길 감히 부탁드려봅니다. 청소년운동을 계속 해나갈 한 사람으로서요.

한고학연을 처음 만드신 분들도, 한고학연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신 분들도, 한고학연의 공식해산이라는 결정을 내리신 분들도, 모두 애쓰셨습니다. 저도 더 애쓸 것입니다. 한고학연 해산 소식에,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끼지만, 앞으로 저도 더 많은 활동으로 한고학연의 역사에 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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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굴

    전청연, 한고학연에 대해 쓴 글이지만, 왠지 그 시대를 함께 건너왔던 공현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신한테 쓴 애도의 글 같다.
    한고학연의 해산을 마음 아파할 사람들에게 공현이 쓴 말 그대로를, 공현에게 돌려주고 싶다. 녀석~

    2012.03.08 18:00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2. 1. 12. 22:31


사람은 누구나 무게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땅에 딛고 서있게 해주는 질량. 사람을 묶어두는 닻들.
나를 청소년운동에 묶어두는 것들도 있다. 내가 청소년운동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그건 누군가의 말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태도나 모습일 때도 있다. 힘들어질 때도 이를 악 물고 넘어설지언정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만드는 매듭들. 그런 매듭은 내가 처음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바로 최근까지도 새롭게 계속 계속 생겨나고 있다.


내가 처음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 "두발자유를 위해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라고 묻던 다른 청소년의 말.
아수나로가 10년은 가는 청소년단체가 되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 다른 활동가(이 사람은 학생인권, 청소년인권 운동에만 10년이 넘게 있다.)의 말.
전국중고등학생연합 시절부터의 청소년운동의 역사나 거기에서 자기가 배운 것, 앞으로 아수나로에 전해지고 이어졌으면 하는 정신이나 교훈들을 나에게 하나라도 더 전하려 애쓰던 '선배'(?) 청소년활동가.
청소년운동에서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선배'가 없고, 동년배는 우리 둘밖에 없는 삘이니, 우린 우리의 '후배'(그냥 운동을 조금 더 늦게 시작했다는 점에서-)들이 그런 처지에 처하지 않게 하자고 말하던 동년배 활동가.
학교 안에서 학내운동을 하다가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상처입고,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그런 일이 적었으면 한다는 학생 활동가.



그 모든 게 나를 여기에 딛고 서있게 했던 것들.
내가 청소년운동(또는 아수나로) 그만둘까 어쩔까 하는 소리를 절대 쉽게 할 수 없게 하는 것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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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중고등학교 때 체육시간이 평생 건강인거 같아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2012.01.13 09:0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1. 10. 18. 12:25
어린이책시민연대 회보에 부탁 받고 썼던 글입니다.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받는 질문들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등등 학생인권 활동도 하고, 교육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활동, 청소년 노동자들에 관한 활동도 하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활동 등등 여러 가지다. 활동을 하다보면 질문을 많이 받는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술자리에서, 운동을 막 시작한 다른 청소년에게서, 등등…. 그런 질문들 중에서 한 번 대표적인 질문 몇 가지에 대한 대답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게 아마 나에 대해서, 내가 하는 청소년운동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가장 좋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질문 1 : 어떻게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됐나요?


첫 번째로, 자주 받는 질문은 청소년인권이나 학생인권에 어떻게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흔한 질문이다. 인터뷰 같은 걸 할 때면 누구나 앞부분에 배치할 만한 질문. 그렇지만 나는 그 흔한 질문에 항상 대답하기가 어렵다. 어떤 계기로 자기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인권을 알려면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걸까? 굳이 따지자면 청소년으로서의 삶은 매 순간이 그런 '계기'로 가득 차 있는 것 아닐까.

나에게 초면부터 반말을 하는 어른에서부터 나를 오직 성적으로만 측정하는 입시 교육이나 친권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가족의 시스템까지, 미시적인 데서부터 거시적인 데까지, 청소년들의 일상은 모두 '계기'이다. 나 역시 특별히 뭐뭐가 싫었다기보다는, 그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청소년들이 받아야만 하는 온갖 비민주적인 불합리한 억압과 규제들 전반에 대한 짜증이 쌓여 있었다. 교복, 두발규제, 등교시간 등에서부터 진로나 입시의 문제까지, 모두 모두 모두! 아마 다른 청소년활동가들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나 자기 삶에 대한 불만보다는, '행동'일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나 불만을 행동으로 표현하게 될까? 여러 가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문제가 얽혀 있을 법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운동'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냥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식적인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집단적 지속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하는 '운동'을 하게 될까?

나 같은 경우, 일단 '행동'에 나서게 되는 데까지는 별다른 문턱이 없었다. 그냥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이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단발적이고 개인적인 항의와 행동 등을 학교 안에서 했었다. 그렇게 하면서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았다. 고민이라곤 그저 부모님이 활동하는 것 때문에 불이익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과, 대입 등 진로 문제 정도? 애초에 성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을 하면서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와도 괘념치 않았다. 교사가 불러서 나무라면 "지금 저한테 중요한 게 뭔지는 제가 결정해요."라고 당돌하게 대답하곤 했다. 원체 고민 없이 사는 스타일이라서 그렇다.

그러다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2005년, 고3이 되고난 후였다. 2005년 5월 7일, 혹시 아직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모르겠다.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며 청소년들 1000여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1주일 뒤인 14일에는 '두발자유'와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 집회가 열렸다. 2주일 연속으로 열리는 청소년들의 거리집회에 언론도 인터넷도 술렁거렸다. 나도 신문으로 인터넷으로 그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두발자유 집회에 참가하러 광주에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단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비로소 '운동'이라고 할 만한 걸 의식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친구들을 모아서 소모임을 만들고, 모임에서 같이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계획을 짜서 활동도 하고, 지역에서 두발자유, 학생회 법제화 등을 요구하는 작은 집회를 준비했다. 말하자면 '운동'이라는 걸 남들이 하는 걸 보고서 "오 저런 방법이!" 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두발자유, 학생회 법제화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준비할 때(결과적으로는 한 20명이 왔고, 소나기까지 내려서 망했다.) 아수나로에서 도와주겠다고 온라인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 이후에 꾸준히 교류를 했고,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가입도 하게 되었다. 아수나로는 원래 "청소년인권연구포럼"으로 과거에 청소년운동을 하다가 20대가 되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를 하고 청소년인권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였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이름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바꾸고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활동하는 활동 단체로 성격을 전환했다. 처음에는 두발자유 운동을 주로 했고,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여러 활동에 함께하고 학교 밖에서는 거리 집회, 서명운동 등을 꾸준히 벌였다. 그렇게 나는 '어느샌가', '자연스레' 청소년인권활동가가 되어 있었다.



질문2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왜 아직도 청소년운동을 해요?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더 높은 빈도를 자랑할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바로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왜 청소년운동을 해요?"이다. 하도 많이 질문을 받다보니 이제는 그냥 웃으면서 "그러게요."라고 대답하고 넘기고 싶을 정도다. 하기사 내 나이도 이제 20대 초반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스물넷.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궁금할 법도 하다. 내가 활동하는 단체 안에서 최고령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주변에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9로 시작하는 상황에서 앞자리가 8로 시작하는 나는 대단히 노땅 취급을 받곤 한다.

이 질문 역시 대답하기 다소 곤란하다. 대답할 만한 어떤 거창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했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라서요." "왜 청소년인권활동가죠?"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니까요." "왜 이제 청소년이 아닌데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냐니깐요?" "청소년인권활동가라서요." … 물론 질문한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대답도 아니고, "그건 그냥 관성이잖아!"라거나 "말장난하지 마세요." 같은 비난을 듣기 딱 좋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진실에 가까운 대답인 것을. 나는 내가 청소년인권활동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청소년운동을 한다는 게, 그게 내 삶이고 내 일이니까 한다는 게 그렇게 말장난 같이 들리는 걸까?

그래서 나중엔 이걸 좀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해보았다. "왜 사는지 이유를 필요로 하진 않잖아요? 청소년운동이 그냥 제 삶이 된 거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대충 끄덕끄덕 하는 것 같긴 하던데, 말하는 내가 닭살이 돋는다는 게 문제다. 가장 솔직한 대답은, "아니 뭐 19살까지 청소년운동하다가 스무살 되어서 싹 손 떼는 게 더 얄밉고… 계속 하고 싶고… 어쩌다 보니…"일 것이다. 관심 가지고 있고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해도 좋다. 애초에 아수나로 자체가 과거에 20대가 되면 청소년운동에 딱 발을 끊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비청소년들도 청소년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열어놓고 시작한 단체였기 때문에 단체 안에서의 어려움도 별로 없었다. 사실, 20대 됐다고 해서 청소년운동에 관심 끊고 발 끊는 것, 그건 그것대로 또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나이주의는 여러 가지 난관이 되고 있다. 비록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나이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 나이가 많다고 해서 권력을 가지거나 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쉽고, 밖에서 보기에도 편견을 가지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청소년운동 안에서, 단체 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들, 주의할 부분들이 많아져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감수하고라도, 나는 청소년운동을 계속 할 것이다.



질문3 너무 이상적/급진적이지 않아요?


세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청소년운동이 너무 이상적, 급진적이지는 않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질문을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때로는 조롱의 형태로, 때로는 걱정의 옷을 입고, 때로는 화를 내며 던진다. 청소년운동은 두발자유 정도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로 교복을 입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고, 복지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입시경쟁교육을 없애기 위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학생들을 점수로 평가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을 시험보기로 만들어버리는 시험을 폐지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학교 교육에 대한 선택권, 더 나아가면 전 사회적인 탈학교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대학 안 나와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라!", "중간기말부터 수능까지 시험을 폐지하라!" 올해 3월에 우리가 열었던 집회의 주요 요구들이었다.

청소년운동의 이야기들이 교육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이야기하며 나이가 몇 살이든 정당 가입, 정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청소년들에게 온갖 것을 금지하는 청소년보호법을 폐지하고, 청소년들에게 정말 유해한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함께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한다.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혹시 임신을 하게 되면 비난 받지 않고 잘 낳아서 양육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부모, 보호자 등 친권자가 자녀에 대해 너무 많은 권력과 책임을 지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지금과 같은 가정을 폐지하고, 사회적인 양육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예 '미성년자'라는 차별적 말을 없애자는 것, 사람은 누구나 다 미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이를 기준으로 누구는 미성숙하고 누구는 성숙하다고 나누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우리가 함께 사회적으로 서로의 인간다운 삶을 책임지자는 것, 그것이 나처럼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이런 요구들은 물론 지금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다. 그러나 한 번 역으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주장들을 놓고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은, 과연 이런 얘기들이 '급진적'이어서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이것 자체에 반대하는 걸까? 만일 그 이야기 자체에는 동감하지만 바꾸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함께 조금씩조금씩 바꾸어가면 될 것이다. 청소년운동의 이야기들은 이런 것들이 청소년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하니, 우리 사회를 이런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자는 제안인 것이다.

2005년에 두발자유 운동을 할 때, 그 당시에는 두발자유를 이야기하더라도 염색/파마의 자유까지 주장하는 것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2011년 8월 초, 주민발의에 성공한 서울 학생인권조례안은 원칙적으로 염색/파마 등의 자유까지 완전히 보장하고자 하고 있다. 최소한 염색/파마 등 머리카락의 색깔과 형태를 바꾸는 게 너무 급진적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다.

차별금지, 체벌금지, 두발복장자유, 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 등을 대표적인 내용으로 세워두고 거리에서 4개월 동안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운동을 하면서 두 가지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다. 어른들은 역시 아직도 학생인권에 대해 무관심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마음, 역시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서 해야 겠구나 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도 6년 전 내가 처음 청소년운동을 하던 때보다 학생인권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인상을 받았고, 우리의 활동이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2010년 9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을 때도, 2011년 7월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완전히 성사되었을 때도,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 처음에 학생인권운동이 시작되었던 1995년에만 해도 학생인권조례라는 게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너무 성급하다. 기다려라."라는 말은 "안 해주겠다."라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일 때가 많다. 그 말에 그저 기다리다보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그나마 천천히, 세상이 바뀌어 간다.

무엇이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변화가 급진적일지 점진적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온힘을 다해 주장하고 부딪쳐야 겨우 약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곤 한다. 그래서 너무 급진적/이상적이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한 발 물러나서 얘기하지 말고 직접 현실 속에 서서 행동하면서 본다면, 급진적인 것은 없다. 그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고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바라는 마음과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만들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운동이다. 그것이, 내가 이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청소년운동을 하는 자세인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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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통일감 있고 좋네요. 잘 쓰겠습니다..... ^^

    2011.10.19 01:37 [ ADDR : EDIT/ DEL : REPLY ]
    • 감사합니다 ^^; 사실 이거 청탁 받을 때 주제가 좀 여러 개를 같이 넣어달라고 요구 받아서 고민 끝에 정한 형식이었어요

      2011.10.20 01:24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11. 8. 31. 17:50

어느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청소년들, 중고등학생들의 운동에 관해서 교육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쓴 글입니다 ^^;;





청소년인권운동, 온라인에서 거리로


  한국의 저항적인 청소년운동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까지도 얘기해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청소년들의 인권과 권익을 주장하는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운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온라인에서 모이다

  그 시작은 온라인 PC통신과 인터넷이었다. 첫 발단은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1995년, 강원도 춘천에 사는 "최우주"라는 고등학생이 강제적으로 자율학습․보충수업을 시키는 것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게시판에 올리면서, PC통신에서는 학생인권에 관한 뜨거운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최우주 군의 학교 문제, 함께 따라가봅시다."라는 토론방이 개설되었고 그 자리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인권 문제를 토로하고 토론을 진행해갔다.
  그 결실로 1995년 12월경, PC통신 <하이텔>에 "중고등학생복지회"(학복회)가 만들어졌고 이어 PC통신 <나우누리>에도 학복회가 생겨났다. 학복회는 온라인 모임에서 시작돼, 단체로서의 활동력을 많이 갖추지는 못했지만 학생인권의 이슈를 제기한 ‘최초의 청소년인권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학복회는 인권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학생 인권 운동을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학복회는 1998년, 교육부에서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하겠다고 했다가 이를 취소하자 항의하면서 자체적으로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학생의 인권 역시 보편적 인권 안에 존재하며, 학생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자신이 지닌 기본권을 정당히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학생들, 특히 중,고등학생들은 이러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삶의 현장인 사회에서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인권은 공공연히 침해당하고 있으며, 편견과 인습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암묵적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학생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마저 당사자인 학생이 아닌 성년자가 중심이 됨으로써 일방적 보호, 훈육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나아가 이 나라의 왜곡된 정치구조와 맞물려 당국은 학생문제를 투표권자인 성년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정책을 남발하여 학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우리는 학생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지닌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이므로 그에 따른 마땅한 권리를 가짐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학생 스스로 보장하고자 합니다.

1. 학생은 나이, 성별, 학교 성적 등 어떠한 기준으로도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2. 학생은 과도기의 세대가 아닌, 인격을 가진 사회구성원으로서 외부에 의한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3. 학생은 헌법에 보장된 모든 기본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표현의 자유,행동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가집니다.
4. 학생은 쾌적한 환경에서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5. 학생은 학교의 방침에 따른 일방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요구하고 보장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6. 학교에서 학생의 모든 자치 활동은 교사나 학부모 등 타인에 의해 제한될 수 없습니다.
7.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매체를 접할 수 있고 자유로운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보장받을 권리를 지닙니다.
8. 학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9.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활동을 스스로 판단하여 할 수 있으며 학생이란 신분으로 노동현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10. 위와 같은 학생의 모든 권리를 부당한 기준으로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11. 학생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지킬 책임을 지닙니다.
12. 학교, 가정, 국가를 비롯한 사회는 위의 권리를 보장하며 합당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13. 정부는 이와 같은 사항을 법으로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천구백구십팔년 십일월 삼일 학생의날
하이텔 중고등학생복지회, 나우누리 학생복지회



  1990년대 후반, 중고등학생복지회 외에도 인터넷에서 여러 청소년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채널텐, 네틴, 원, 아이두, 사이버유스 등이 있다. 공간들에 따라 성격 차이는 있지만, 이들 인터넷 공간들은 주로 청소년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소통하는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했다.
  채널텐(Ch.10)은 97년 5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웹진이었다.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의 웹진’이라는 모토를 걸고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했으며, 청소년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오갔다. 아이두는 10대들의 포탈 사이트 형식으로 블로그, 게시판, 토론, 일기장, 사전, 기타 등등의 다양한 컨텐츠들을 생산해왔다. 이곳도 청소년들이 직접 서버를 만들고 사이트를 개설하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사이버유스는 정부(한국청소년개발원)의 돈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사이버유스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삶, 인권에 대해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을 중시했고. 사이버유스에서 청소년들은 우리SEX(성), 자퇴, 만18세 선거권,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인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고, 또 조금씩 퍼져나가던 청소년인권도 활발하게 이야기되었다.

  2000년, 채널텐, 아이두, 사이버유스의 세 사이트는 함께 “웹연대 위드(WITH)”를 구성하여 두발규제 반대 운동, 노컷운동을 전개했다. 노컷운동은, “자르지마” 배너, 국제행사에 나갔다 온 한 교사가 쓴 한국의 두발규제에 대한 비판 글 등을 매개로 온라인에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두발규제에 반대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은 2000년 하반기 즘에는 16만 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웹연대 위드는 두발규제 등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여론을 온라인을 통해 형성해가는 역할을 했으며, 서명운동을 통해 청소년들의 의지를 표현했다. 웹연대 위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오프라인에서의 캠페인 활동 등을 하면서 두발자유 운동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온라인서명운동이 중심이 되고 거리 캠페인 등이 결합했던 '노컷운동'은 온라인에서 첫 시작을 했던 청소년인권운동이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노컷운동'으로 교육부에서는 각 학교별로 토론회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두발규제를 개정하라는 일종의 ‘두발자율화’ 조치를 내리게 되었고, "학생의 인권"이라는 것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거리로 나서기까지

  2000년대 초중반은 많은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진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 개인들이 체벌, 강제적 자율학습, 입시경쟁, 청소년 노동권, 학생회, 청소년 정보인권, 종교의 자유 등 청소년인권의 의제들을 발굴하고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시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청소년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자는 제안, 학교 안에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일구어나가려는 움직임, 언론을 통한 이슈화에 초점을 맞춘 활동 등등 여러 가지 운동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더 나은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시행착오와 실패 속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이 꼴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이 시기는 청소년운동이 지지부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글을 올리고 서명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내 조직을 만드는 일은 학교에서 활동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일부 사립학교 등에서만 '사학분규'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나는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2년, 3년이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어버리면서 모임도 흐지부지 흩어지고 운동의 맥이 끊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국면 전환의 계기는 '거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촛불집회' 등 거리시위는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미군장갑차 사건 때문에 일어난 여중생 추모 ․ 반미 촛불집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도 많이 있었다. 거리 촛불집회의 흐름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로 계속 이어졌다. 청소년운동의 주체들 역시 이런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런 촛불집회들이 청소년운동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2005년 5월이 되어서야 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의 이슈를 가지고 모인 자발적인 촛불집회라는 '사건'이 터졌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상대평가 내신등급제 도입을 발표하자 5월 7일, 학생들은 입시경쟁에 반대하며 자살학생 추모 촛불집회에 참가하러 모여들었다. 그 촛불집회는 우발적이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추모 촛불문화제로 기획했던 자리가, 학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문자메시지가 돌았고 점점 규모가 커져서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자리가 된 것이다. 교육청 장학사들과 학교 교사들의 방해 속에서도, 그날 촛불집회에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교육 정책에 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집회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005년 2월부터 2차로 두발자유 운동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이 바로 일주일 뒤인 5월 14일, 두발자유 집회를 열었다. 낮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2차례 최대 300여명이 참여했던 그날 두발자유 집회에서는 두발자유 뿐 아니라 전반적인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목소리를 냈다.
  그날 거리집회가 바로 청소년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한 번 모이고 흩어졌고, 지속적인 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거리에서 청소년들의 잠재적인 불만과 힘을 확인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거리집회의 힘은 여러 학교 안에서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학내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이러한 거리집회, 촛불집회의 역사는 2008년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로도 연결된다.)
  청소년운동을 해온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은 2005년 5월의 그 '사건'을 계기로 반성과 토론을 새롭게 시작했다. 과거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여러 방법론들이 제시되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등의 단체들, 모임들이 생겨났다. 이런 움직임들은 2006년, 2007년에도 연달아서 학생인권을 요구하는 거리집회가 열리고 학교 안에서는 학내시위, 서명운동 등이 계속 일어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거리에서, 그 다음은?

  2005년 이후 거리로 나섰던 청소년인권운동은 이제 다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의 사건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성과였지만, 동시에 어떻게 학교 안에서 좀 더 광범위하게 운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또한 경기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학생인권 보장 조치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역에 뿌리 내린 청소년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청소년들은 한국 사회에서 많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고, 입시경쟁이나 여러 차별 등 속에서 부당한 대우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청소년 정체성의 특성상 거기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은 좀처럼 굳건하게 만들어지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몇 년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도 많고, 또 애써 단체를 만들거나 조직화를 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청소년이 아니게 되면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온라인에서 시작해서 거리로 나서며 계속되어 온 청소년운동은,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나마 나아졌지만 여전히 미흡한 학생인권, 더 심해지고 있는 경쟁적인 교육, 가족 안에서의 인권,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확보 등등 과제는 많기만 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운동이 더 많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우리 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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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광흠

    이 글을 e노트에 옮겼습니다^^

    2011.09.07 09:37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1. 8. 24. 19:31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주 장하는 글은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이다.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주장을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글이라고 다 똑같을 리야 없다.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글, 개인적으로 쓰는 글, 언론에 발표하는 글, 토론회 때 쓰는 글 등등이 같을 수야 없다. 쉽게 말하면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밑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고 붙는 것과 “공현”이라고 붙는 것과, 한 10명 모인 토론회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과 수만명이 읽는 신문 지면에 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장하는 글의 종류를 대표적인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나는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성명과 논평이다. 성명과 논평은 단체 회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단체의 정해진 입장을 알리는 글이며, 동시에 언론 등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발표하는 글이다. 두 번째는 칼럼이나 언론기고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명의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발표하는 형태의 글이다. 가장 전형적인 논설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발제문이나 토론문이다. 발제문이나 토론문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는 칼럼과 비슷하지만 발표 방식이 언론에 직접 전문을 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성명이나 논평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주로 토론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자료집에 실린다.

이제부터 이러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이나 자잘한 방법 같은 걸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중 어떤 글이든 내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하자.



① 성명/논평


성명/논평에 관해서, 우선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그건 바로, 대체 성명과 논평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글이 성명이냐 논평이냐 하는 것을 구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의 성격을 비교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 설명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성명이 어떤 사안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고 외치는 거라면, 논평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분석하고 평하는 것이다. 성명은 요구 사항이 비교적 뚜렷하고 논평은 주장이나 입장은 드러나지만 요구 사항을 그렇게 뚜렷하게 적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성명은 상대적으로 길고 완결된 글이고, 논평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결하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성격과 색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며, 또한 보도자료 등에 첨부하여 주장을 표현하거나 행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밝힐 수 있는 글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직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우선 성명이나 논평으로 입장과 주장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대충 면피를 하곤 한다.(별로 좋은 관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명/논평은 ‘연명’(성명서 내용에 동의하고 거기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하는 단체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명을 받아서 발표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연명해서 성명/논평을 내는 것은 그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핵심 단체들을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열심히 성명 쓰고 제안하고 활동하는 건 1, 2개 단체인데, 언론에 “133개 시민사회단체들은…”이라고 나가면 그 1, 2개 단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해야 할지 역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명/논평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단체의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라서 어떤 내용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자. 성명/논평을 쓰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사안을 우리는 어떤 성격의 사안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기로 했는가? 어떤 정책에 대해서라면, 찬성인가, 반대인가, 부분적 찬성/반대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반드시 언급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얽힌 복잡한 사안일 경우 각각 비중은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 (심지어 문단의 개수나 분량까지도 생각해가며 써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장이 딱 찬성 반대로 나눠지지도 않고, 다양한 입장들이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의 입장과 주장을 표현 하나에서부터 분량까지 잘 컨트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교원평가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입장이 현재 안에 대한 찬/반인지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찬/반인지, 대안은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지, 전교조의 입장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현재 정세 돌아가는 걸로 볼 때 이런 말은 필요하긴 하지만 비중을 줄이는 게 좋겠다든지, 여하간 이런저런 골치 아프고 미묘한 조정이 필요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표현이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성명/논평의 틀을 지나치게 딱딱하게 정해놓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재미가 없고, 단체의 개성도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혀서 막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순서 정도는 소개하겠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 성명서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어떻다.” 거기에서 어떤 말을 사용해서 이 사건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규정하고 있는지를 읽는 이가 알게 하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대충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리드’(리드 : 신문의 뉴스 기사에서 본문의 앞에 그 요점을 추려서 쓴 짧은 문장.)를 떠올리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를 쓰게 된 배경, 즉 사건의 개요를 간추려서 넣어줘야 한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부분에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거나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한 정보는 안 쓰기도 하고, 짧은 논평 등에서는 간단한 한 문장 정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쓴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서 심층적인 분석을 써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은 교사가 사학재단에 의해 해임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는 학생인권과 진정한 교권이 상충되지 않으며, 억압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쓴다거나 뭐, 기타 등등…. 이 분석 속에도 물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단체의 주장과 입장이 반영될 것이다.

성명의 경우에는 마지막에 주장과 요구사항이 들어가곤 한다. 요구를 하는 대상이나 책임을 묻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면 좋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다면, 써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전체 요지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평의 경우에는 특별히 요구사항을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우려를 표한다.”, “다시 한 번 충고한다.”, “지적한다.” 같은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_-)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성명/논평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참신한 성명/논평을 만들 수 있다. 성명/논평은 논리적인 글이지만, 꼭 딱딱한 논리적 표현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비유나 패러디 등을 알맞게 활용하는 것은 성명/논평을 더 널리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말이나 다른 글 등의 형식을 차용하는 패러디는 성명/논평에 곧잘 사용되는 인기 있는 방법이다.


성 명/논평을 쓸 때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문체’ 문제이다. 하나의 글은 아무래도 한 명이 쓰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이 한 문단씩 써서 글을 조립한다면, 오 내용이 중언부언 겹치게 되고 글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성명/논평은 한 사람 개인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성명/논평을 쓸 때는 지나치게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성명/논평을 한 개인이 쓰고서 바로 발표하는 일은 별로 없다.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가며 고치는 작업도 여러 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한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때부터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명/논평이 어떻게 발표되고 읽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 역시 성명/논평을 어떻게 쓸지, 성명/논평의 분량을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명/논평이 발표되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3가지다. ▲ 언론에 배포해서 보도 ▲ 단체 홈페이지, 이메일 등을 통해 ▲ 직접 인쇄하고 배포.

마지막의 직접 인쇄, 배포하는 방식은 과거 외국에서는 많이 이용된 듯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배포용이라면 전단지 형태로 더 알아보기 쉽게 꾸며서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모임 안에서 나눠주거나 돌려 읽기 위해 성명을 인쇄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행사에서는 성명 자체를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기관에 성명/논평을 팩스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성명/논평은 그 분량이 2페이지(즉 양면 인쇄했을 때 1장 안에 들어가도록)를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길어도 3~4페이지 이내의 분량이어야 한다.

성명/논평이 언론에 발표될 때는 성명/논평의 전문이 실리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은 일부를 인용하여 실리곤 한다. 따라서 성명/논평을 쓸 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딱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 성명/논평의 핵심적인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강조해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선정적이거나 재치 있는 표현 등을 넣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입시가 사형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와 “입시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의 수가 적지 않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언론에 잘 보도되겠는가? (뻔한 소리지만, 사실과 다른 표현, 억지스러운 표현, 반감을 살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수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홈페이지나 이메일 등 웹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 있다. 웹의 유연한 특성상 이 방식의 경우에는 별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지는 않다. 여기저기 퍼나르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바꿈을 자주 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충분히 띄우거나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 혹은 웹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련된 링크를 함께 삽입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성명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이 땅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는 오래전부터 무시당해 왔다. 특히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들은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치사찬란한 태클을 걸고있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에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짜증의 마음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잠 시 과거를 상기하자면, 2003년에도, 2005년에도 청소년들의 집회에 대해 정부는 까칠하게 반응했었다. 법을 개정해서 ‘미성년자’를 집회에 동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교사들과 장학사들을 동원해서 청소년들의 내신등급제 반대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참가를 봉쇄하려고 했었다.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집회 뒤에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2008 년, 올해에도 발전은커녕 퇴보한 뻘짓들만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점점 커지자, 교육부와 교육청은 또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집회 참가를 막도록 하는 지침을 학교로 내려 보내고 있다. 교사들을 동원해서 집회장 주변에 배치하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돌려보내는 괴악한 짓도 여전하다. 몇몇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놓고 “연필 대신 촛불”을 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이 몇 마디 하니까 10대 팬들이 무작정 따라 나왔다, 아직 미성숙하고 충동적이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에 속은 거다, 등등 헛소리를 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놀이문화가 없어서 청소년들이 놀러 나오는 거라는 이상한 분석을 내놓으며 청소년들을 어떻게든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고 있다.

올 해에는 경찰과 검찰까지 가세해서, 5월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를 얼토당토않게도 “업무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수사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인권의식 미성숙한 검찰총장부터 인권교육을 시켜야 한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경찰이 문자메시지를 추적해서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만나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교장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짓이며, 이미 인터넷에서는 ‘미성년자가 촛불집회 참가하면 사법처리 된다.’라는 식의 사실과는 다른 공포 조성 유언비어가 떠도는 판인데, 이에 대해 경찰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도 대체 경찰이나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가?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는 교육청 같은 애들을 막는 것 아닌가 싶고, 만일 정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교육부, 교육청, 학교는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여러분에게는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고 거기에 참여할 권리,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류의 캠페인이라도 전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들이 정말 민주 정부이고 인권 경찰이라면 해야 할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저 안타까운 정부기관들은,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건지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또 한 아수나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들이 비단 정부나 경찰, 일부 언론들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 청소년들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철없는’ ‘충동적인’ ‘미성숙한’ ‘미래로 유보된’ 존재로 보는 인식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할 청소년들조차 거리로 내모는 정부”라는 표현 속에도, “철없고 순진한 아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주장에서도, “어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못해서 어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미래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여는 주최측의 “미성년자들은 부모동의서가 없으면 연행당할 수도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 청소년들은 자진 귀가 조치시킵니다.”라는 안내 문구에서도,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도 가입한 아동권리협약 등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의견반영권 등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을 비청소년들과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왔다. 비단 정부나 언론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과 때로는 몇몇 ‘청소년들’ 또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행동 자체에 반대하진 않더라도 그 행동의 의미를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이고 시혜대상인 것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청소년들은 누가 내몰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학업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냥 철없고 순진하지도 않고, 부모동의서가 없다고 연행당한다거나, 밤 10시 이후에 집회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도 없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는 운동의 주체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사회를 ‘물려받는’ 그런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이며,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학교자율화 조치 등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와 언론들, 그리고 행사 주최측과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언론 등은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고 깎아내리는 모든 조치와 발언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1.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행동 등에 개입하고 있는 주최 측과 참가자들은 청소년들을 보호주의적, 시혜적, 차별적 태도로 대우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우하라.

청 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다른 항의/불복종 활동,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응팀 구성, 청소년들이 평등한 주체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과 발언 등을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함께 적극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08년 5월 8일


이 성명은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발표한 성명 중에서도 '그나마' 널리 알려지고 웹에서 ‘펌질’이 된 성명들 중 하나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이라는 시의적 상황 때문에 여러 촛불모임, 게시판, 아고라 등에 ‘펌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이 성명 자체로도 촛불 정국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과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는 좋은 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며 평가해보자.



② 칼럼 등 언론기고문


칼 럼 등 언론기고문은 글 전문을 언론을 통해 대중에 공개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잘 써야만 하는, 부담 백배의 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소재가 별로 주목 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언론에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의 문체와 발상, 그리고 단체의 주장 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언론기고문이 언론에 실릴 경우에는 그만큼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주장을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잘 써야 하고 쓰기 어렵지만 잘 써서 잘 발표할 경우에는 효과가 큰 글”이라는 것이다. 뭐, 언론기고문을 써서 숱하게 언론에 실려도 완전 무반응인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언론기고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한층 더 꼼꼼하게 주제와 개요를 검토하고 준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언론기고문은 다른 그 어떤 글보다도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독자가 가장 많고 독자층이 가장 폭 넓은 글이기 때문이다.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라. 웬만큼 많이 공론화가 되어서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 이상은 사안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지 말고, 간단한 설명이라도 넣는 게 좋다.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해야 할 때라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일반인’이 아니라 기고하는 언론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독자와 「경향신문」 독자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조선일보」에서 여러분의 글을 실어줄 일도 별로 없겠지만…) 뭐, 「레디앙」처럼 활동가들 좌파들만 주로 읽는 좌파 오타쿠스러운 언론이나 「교육희망」, 「우리교육」처럼 교사들이 주로 읽는 언론의 경우에는 좀 더 독자층을 좁게 상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언론기고문에서는 매체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분량과 문체이다. 보통 일간지 등 지면에 글이 실리는 언론에서는 원고지 10매 이내(A4로는 1장 이내)로 글을 써야만 한다. 종이 지면이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체 역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실리는 글에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를 요구하는 것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신문지면의 한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간지나 월간지 등 잡지 형태의 매체의 경우,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종이 지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간지보다는 제약이 적다. 일간지처럼 한 면 안에 글 여러 개를 배치해넣는 방식이 아니라 책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월간지 등에서는 일간지보다 더 심층적이고 자세한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소한 원고지 20~30매 이상의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간행물이 나오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긴 원고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월간지가 원고지 20~30매 이상을 요구한다면 계간지는 원고지 40~50매 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반면, 인터넷 언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량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인터넷 지면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지만 않다면 글의 분량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A4로 2장 분량이든 4장 분량이든, 그 인터넷 언론의 서버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인터넷 언론에서는 문체에 대해서도 다소 관용적인 편이다.

마지막으로, 언론기고문은 글이 언론에 실리고 배포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글이 간행물이 언제 나오고 배포되는지 이것저것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아예 글 중에서 글을 쓰는 시점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시점에 맞춰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밖에 언론기고문을 쓰는 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론기고문은 특별히 표준화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뭐 그냥 일반적인 논설문 식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거나, 두괄식 등 여러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칼럼 등 언론기고문은, 여러 가지 형식이 가능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모양새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능성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언론기고문은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개인의 문체와 사상이 잘 드러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언론기고문은 보통 개인의 이름을 달고 발표하더라도 "(단체 이름) (직함)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를 단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므로, 단체의 입장과 개개인의 개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쓰는 것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체에서 사업의 일부로 회의를 거쳐서 기획적으로 기고하는 언론기고문의 경우에는 단체의 공식 입장 역시 녹아들어가도록 써야 한다.



③ 발제문, 토론문


발제문과 토론문은 토론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내용과 요지를 정리해서 쓰는 글이다. 이 역시 통상의 주장하는 글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성명서나 칼럼에 비해서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형식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줄글로 써도 되고, 짤막짤막하게 "~임." "~라고 생각함." 같은 문장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토론문을 만들어도 된다. 경우에 따라선 자료들과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해석만 잔뜩 제시한 발제문도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그 안에서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면 훌륭한 발제문 및 토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원래의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정리해두고 넘어가자. 발제문은 토론을 시작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해 정리하고 토론할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토론문은 그 발제문에서 제시한 자료와 토론 거리 등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즉 발제문은 단순히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토론에 필요한 자료, 방향, 내용을 제시하는 글이며, 토론문은 이 발제문을 보고 쓰는 글이다. 상대적으로 발제문이 길이가 더 길고 토론문이 길이가 더 짧을 때가 많다.

발제문을 쓸 때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발제문에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발제문은 단순히 주제를 설명하기만 하는 글도 아니고, 특정한 입장과 주장이 없이는 좋은 발제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문은 어디까지나 토론의 시작을 여는 글이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겠는가.

토론회는 대개는 발제자 1~2인이 발제를 하고 토론자들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 토론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발제자가 발제를 한 뒤에 바로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제자가 1~2인일 때야 뭐 어려울 것 없겠으나,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발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발제자들은 어떤 성격의 발제자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교수 등 학계 사람, 정부 관계자, 활동가는 각각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발제를 할 것이다. 또는 한 사안을 놓고도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발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서 토론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 맡는 발제문을 쓰면 된다. 토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제와 토론을 할 때 한 가지 팁을 전하자면, 절대로 토론회를 할 때 발제문이나 토론문을 줄줄 읽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이고 토론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안다.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점자책이든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이든 통역이든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여하튼 토론회에서 자기 발제문과 토론문을 줄줄 읽는 것은 토론회를 매우 지루하게, 여러분의 발제/토론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때는 자기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압축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상 깊은 일화나 예시를 들면 아주 좋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일부러 발제문 및 토론문에는 쓰지 않고 토론회 현장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하나 정도 준비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을 그대로 읽지 말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발제 및 토론을 발표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짧으면 5분 정도 주어진다. 20분이라고 해도 A4 용지로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분량이고, 5분이라면 A4 용지로 한 페이지 얘기하면 끝난다. 그러므로 글을 그대로 읽지 말고, 발표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팁. 발제자와 토론자를 3, 4명 이상 요구하는 '그런 류의' 토론회들은 미리 준비된 발표자들의 발제 및 토론만 1시간씩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계획을 짤 때 시간을 40분 정도에 맞추더라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넘겨 발표하기 때문에 1시간을 넘는 게 다반사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오는 청중들은 대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따분해하고 집중력을 잃고 있기 십상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위트 있고 재미있게 쓰고 발표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보자. 아 물론 아주 엄숙한 학자들이 모인 학계 발표회 같은 데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뭐든지 독자들과 청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발제문과 토론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과 토론문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자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토론회를 할 때는 단지 토론회를 여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그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보도하도록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명 및 논평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기자들이 뽑아서 쓸 만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문구가 부각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은 발표를 할 때도 강조하도록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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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이런 상상을 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성명서’라는 걸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근데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단체의 입장은 회의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에 뭐라고 쓸지는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러이런 걸 철폐하라고 하면 되는구나. 대안으로 이런 걸 요구하자고 했지.” 그런데 결론을 먼저 써놓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아 우리 단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몇 줄 쓰면 되지 대체 뭘 쓰란 거야?!” 막막한 마음에 회의록을 보자 “~~이런 부분을 짚어야 할 듯.” “A가 B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해.” 뭔 놈의 회의록에 요구사항들만 많다. 짚긴 뭘 어떻게 짚으란 거야? ㅅㅂ!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글은 운동에서 많이 쓰게 되는 몇 가지 유형의 글들에 있어서, 시대의 명문장가 타이틀을 딸 정도로 잘 쓰게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럭저럭 욕 안 먹을 정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운동을 위한 실용적인 글들도 글은 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모든 글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제1편은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에 대해 알아보자.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아와 개성의 표현이라거나 우주의 영감을 수신하여 원고지에 글자를 심는 일이라거나…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심플하고 평범하게 말하면 그건 문자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심플한 정의에서부터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3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사람 ② 글을 읽는 사람 ③ 매체. 운동을 하면서 쓰는 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이 3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에 여러분은 “글 쓰는 사람은 나잖아. 바로 여기 있는데 뭘 더 생각해?”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글을 쓰는 여러분 자신을 잘 모른다. 실제로 글을 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대체 뭘 쓰려고 한 거지?”라는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가 이 글로 대체 뭘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를 확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헷갈려 하며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경험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주제이다. 주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략 1~2문장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한 글 안에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제는 복합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아래의 짧은 글만 보아도 글 안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체벌금지 해야 한다」
/ C모님 / 체벌금지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최종안

요 즘 들어 체벌금지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육감이 새로 뽑힌 탓인지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는 이미 체벌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경우도 교사들의 체벌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중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그걸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겠나.
체 벌은 폭력이다. 내 주위 어른들이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것들을 생생하게 재현까지 하면서 말하는걸 보면 그런 폭력의 경험이 기억에 오래남긴 남나보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오장풍’ 사건을 두고 “아직도 저런 체벌이 있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런 폭력들이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말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어느 몇 명의 교사들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은 때릴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에서부터 비롯된 문제다. 오장풍처럼 손으로 학생들을 퍽퍽 날려보내지 않더라도, 단 한 대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있다.
교 육감들이 체벌금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회에서 학교의 체벌만을 문제 삼고 있는 요즈음에도, 가정에서의 체벌은 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꼭 없어져야하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나쁘다는 논리가 가정에 체벌만 비켜갈 순 없다.
공 익광고에서는 가정이 우리의 안식처인 양 이야기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교보다 더 무서운 곳일 수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폭력을 몸으로 깨닫고, 학교에서 맞고 오면 가정에서도 또 맞고, 교사에게 맞고 오면 잘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체벌을 부추기는 것도 가정이다. 학교나 가정이나 체벌이 있는 이상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학습시키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동학대 수준까지 가야 폭력으로 인정할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체벌을 ‘사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특히 가정에서의 체벌은 학교의 체벌보다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이 더 심각하다.
학 교에서의 체벌금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정에서의 체벌금지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가정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청소년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체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일단 사건 하나 터졌으니 막고 보자는 식으로는 정말 청소년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 글에서 주제가 뭔지, 전하고 싶은 부수적인 메시지들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연습문제다. 킁. 어쨌건 주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라는 건, 결국에 이 글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개요’를 짜라는 것이다. 개요는 쉽게 말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써내겠다는 계획표 같은 것이다.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듯이 “서론 - 본론1 - 본론2 - 결론” 이런 식으로 개요를 짤 필요는 없다. 그런 개요는 논설문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가끔 그런 형식을 벗어난 논설문도 있고, 논설문 외의 글들도 그런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결론 내용이 제일 앞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런 방식의 개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쓰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서로 해서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대략적인 계획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에 숙련되면 그런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 미숙할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메모해두는 게 좋다. 개요를 짜지 않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다보면 “어라 내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더라?” 하며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개요가 있다면 그럴 때 개요를 확인해보면 되지만 개요가 없다면 혼란스러운 글이 되고 만다. 물론 글을 쓰던 중에 삘 받아서 짜뒀던 개요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다. 개요는 자기가 이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을 가진 채 써가다가 계획을 수정하는 것과, 애초에 계획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② 글을 읽는 사람
  불행한 이야기이지만, 미숙한 글쓴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하얀 모니터 화면과 깜빡거리는 커서 혹은 하얀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벅찬데 그 너머에 눈에 안 보이는 독자들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궁극적으로는 “이 글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독자의 존재를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글쓰기의 일반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독자를 생각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매우 위대한 예술가이며 작가여서 예술적이며 상식 파괴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다. 이상처럼 “13인의MB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써도 된다. (그게 인정받거나 팔릴지는 별개로) 하지만 일단 우리는 실용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용 글쓰기에서 이상의 시처럼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용 글쓰기의 경우에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망한다.
  그럼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예상독자/가능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 독자들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나? ▲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등등.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벗어나 벅차게 사랑할련다.」
/ R모님 / 학생 연애 탄압 관련 언론 기고문 초안

나는 동성애자다. 동성애자지만, 뭐 다를 거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뭐, 그냥 청소년집단을 걸고 넘어진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드 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경수-태섭 커플을 보고 부러워서 흑흑 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불편하신 분이 있었나보다. 뭐 영화 ‘친구사이?’의 마지막 키스신에서 한 외국인이 ‘하나님의 보편적 세상시청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계신데 안 두렵냐’라는 말이었지만, 뭐 나한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했었는데 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봤는데 세상에 가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이 대책없는 구호를 보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학교는 청소년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조차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무성적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알면 써서 내게 하라는 이반검열이 그렇고, ‘불건전한 이성교제’ 처벌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억압과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이 어우러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린다.
수많은 학교의 징계규정에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징계하는 규정이 있다.
불 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그 두 어절 뭣도 아닌 단어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이성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거지.), 나의 사랑조차 부정당하고, 나 자신조차 부정당한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난 게이니까 그래, 학교에서 애인 만들어서 뽀뽀하고 키스해도 상관없는 거지?)
이제 좀 집어치우자 그 단어. 그 이성애중심주의적이고, 연애탄압적이고, 순결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그 단어.
이제는 좀 게이여도, 좀 문란해도 봐줘라.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진다.
걱정하지마라, 아 걱정된다면 콘돔사용법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해라. 음순 음경 운운하는 그 따위 성교육이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을 부르는거니까.
이제 좀 다시 보길 바란다. 100일, 500일, 1000일되서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연애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게 뭐하는 짓인가.
이제 내가 연애를 해도, 그게 설상 남자여도 걔랑 성관계를 가져도 상관없는 ‘미성숙한 이성교제’라는 단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 커플들과 게이, 레즈비언 커플도


  이 글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을 쓰게 된 배경이나 여러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던져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중 다수가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한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없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거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독자들도 설득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휘나 정보를 섞어가며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경우는 비교적 그 잘못이 명백한 편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두발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주로 읽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정부 관계자가 읽을 글, 어른들이 읽을 글은 서로 다른 어조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로 읽게 될 매체에 “두발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라는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학부모들이 두발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라고 쓰는 게 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단체 내부 사람들끼리 읽을 기획서나 제안서를 쓸 때와, 외부의 사람들이 읽을 기획서나 사업 설명을 쓸 때는 다르게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일부러 불친절하고 막 나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글들은 독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글은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매체
  매체는 쉽게 말해 글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발표되고 전달되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으로 매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량이다. 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혹은 요구되는 글의 분량은 얼마인가? 분량은 글의 주제와 메시지, 전개 방식 등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그밖에도 이 글이 인터넷 언론에 실리는 글인지, 신문지면에 실리는 글인지, 책에 들어가는 글인지, 토론회 자료집에 실리는 글인지, 말로 옮겨야 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인지, 이메일로 보내는 글인지, 첨부할 사진은 칼라인지 흑백인지 등등 여러 가지 매체의 형식들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매체를 고려하는 글쓰기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해 신문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은 “최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의 도입부를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몇년 몇십년 동안 간행되고 팔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책에 실릴 글에 그런 표현이나 도입부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분량과 발표형식, 전달시기 등이 매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다. 이런 여러 매체를 고려한 글쓰기는 구체적으로는 기고문(칼럼 등), 성명서, 토론회 발제문/토론문 등등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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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1. 6. 10. 10:23
안티조선 운동사 - 10점
한윤형 지음/텍스트



‘또 하나의 역사’ 『안티조선 운동사』 소개글인지 서평인지


『안티조선 운동사』 서평을 쓰려고 개요를 간단하게 메모해보았다. 하지만 그 개요로 글을 다 쓰지 못하고, 몇 번이고 그 개요를 다시 쓰고 다시 썼다. 도무지 리뷰의 맥락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안티조선 운동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안티조선 운동사』에 일부 그 책임을 돌리고 싶다. 『안티조선 운동사』에는 읽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으면서 ‘독후감’에 이런 내용을 넣어야지, 하고 메모했던 많은 것들이 도무지 하나의 통일성과 논지를 가지고 정리되지 않는 상황과 씨름해야 했다. 읽은 이에게 단일한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의 소재를 제공해주고 새로운 생각들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그건 역사책에 있어서는 차라리 장점이 아닐까? 그래서 그냥,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몇몇 생각들이나 지점들 중에서 소개할 만한 것들 두엇을 골라서 소개하는 걸로 서평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안티조선 운동사』의 표지에 적혀 있는 부제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이다. 책을 처음에 집어 들었을 때는 너무 부제가 거창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더랬다. 15~20년 남짓한 사회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가지고 ‘또 하나의 역사’라니,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그 부제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다른 독자 분들도 그럴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단순히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사회운동에 대한 역사 정리에 그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 ~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안티조선 운동’ 관점에서의 조망이며 한윤형의 정치평론이다. 그리고 특히 노무현 정부(나는 사실 노무현 정부가 안티조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에 대한 한 안티조선 운동 참여자의 평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안티조선 운동이란 프리즘으로 바라본 지난 15년간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p.15. 여는 글.)


예를 들어서, 다음은 『안티조선 운동사』에서 노무현 지지층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이 ‘집단’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보려 한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 강준만의 ‘실명 비판’과 진중권의 ‘키보드워리어질’은, 심지어 《조선일보》와 전쟁을 벌이며 나온 노무현의 개혁 정치조차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광할 준비가 된 ‘집단’이 없었다면 무의미했다. 물론 강준만, 진중권, 노무현, 그리고 기타 여러 등장인물들은 이 ‘집단’의 정서를 구체화하고, 정교화하고, 더 큰 덩어리로 만든 공로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집단’의 열망에 주어진 ‘해답’으로 존재했을 뿐이지, 그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pp.248~249)


즉 한윤형 씨는 『안티조선 운동사』를 운동사인 동시에 안티조선 운동과 노무현 정부가 탄생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해석 또는 평론으로 위치 지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안티조선 운동의 자료를 모으고 기록한 ‘백서’나 사료 모음, 또는 역사기록 정도로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안티조선 운동사』는, 비록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저자 ― 한윤형 씨의 정치적 견해나 평론, 그리고 논설이 삽입되어 있긴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나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쓰려면 아마 어느 정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지 아주 그냥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한윤형 씨가 실제로 작업 과정에서 그런 부분 때문에 고생을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결과물인 이 책 안에는 특별히 망설이거나 어려워 한 듯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도 한윤형 씨 자신이 안티조선 운동의 참여자였으며 안티조선 운동을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성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극우 헤게모니론을 근거로 《조선일보》를 기타 신문과 구별하는 논의가 여전히 유효한지는 더 따져 봐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장집 사건에서 《조선일보》의 ‘마지막 기동전’을 보았으며, 그 후에도《조선일보》의 과장․왜곡 보도의 수준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현격히 다른 수준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극우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실행자로 《조선일보》를 지목해 낼 수 있을지는 알수 없다.”(p.128)


어쩌면 나도 ‘조중동문’의 ‘기동전’의 피해자 중 하나라고 슬쩍 한 숟갈 얹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0년 7월 동아일보가 주도하고 조선일보,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이 가세했던 ‘아수나로-진보교육감 공격’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그들을 까기 위해서 아수나로의 일제고사/교원평가제 반대 행동 등에 관해서 ‘홍위병’ “청소년들이 날뛴다.”라는 식의 보도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심지어 1면까지 사용해주었고 조선일보도 2면과 사설 등에 자리를 내며 아수나로가 어떤 단체인지 소개까지 해주셨다.

아수나로는 주민직선 교육감들이 선출되기 이전부터 일제고사 반대 행동을 했고 교원평가제에 대해 (더 급진적으로, 점수화하는 평가가 아닌 학생들이 직접 학교운영, 교원인사 등에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일제고사 반대 행동 같은 경우도 2008년 10월이나 2009년 3월의 활동이 규모 면에서나 실천 방법(농성, 오답선언, 등교거부 등) 면에서나 가장 컸다. 그런 점들에 비추어 볼 때 그 보도는 다소 생뚱맞은 일이었다. 서울시 곽노현 교육감 등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7월 교육부 일제고사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최장집 사건 같은 데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것도 ‘극우 헤게모니’에 위협이 될 만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기동전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사』의 지적대로 과연 지금 시점에서 조선일보가 그러한 ‘극우 헤게모니’의 대표적 주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수나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게 동아일보였듯이, 오히려 동아일보나 문화일보 등이 그러한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미 언소주, 행언련 등 지금의 언론운동은 사실상 ‘조중동’ 내지는 ‘조중동문’ 등에 대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으면서 내게 가장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은 동아일보 이야기였다. 내가 운동을 시작한 게 2004~5년 무렵, 그리고 사회적인 여러 사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길게 잡아봐야 2002년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2000년 10월, 한겨레신문 정연주 논설위원의 손에서 탄생했던 “조중동”이라는 조어가 굳어진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동아일보는 높은 빈도로 조선일보보다 더 악의적인 보도를 해왔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조선/중앙보다 더 개혁적인 위치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좀 낯설게 들릴 수밖에 없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안티조선 운동사』를 읽어보시라. 『안티조선 운동사』는 조선일보 이야기 뿐 아니라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이 어떤 역사를 거쳐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진영 논리를 넘어


“이런 논리에 다가서면, 여기에는 ‘우리 편은 우리 편이니까 옳고, 상대편은 상대편이니까 그르다’는 자폐적인 답밖에 남지 않는다.”(p.268)

“참여정부는 대단히 미심쩍은 논점을 손에 쥐고서 조중동과 분쟁을 일으켜 그들의 몰상식함을 이끌어 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를 반대한다면 이런 저열한 의사소통 방식을 넘어서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저열한 의사소통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소위 개혁 언론들은 참여정부가 그어 놓은 전선에 따라 별수없이, 혹은 자의에 의해, ‘조중동과의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이를테면 공정한 잣대로 쌍방을 평가하지 못하고 ‘패싸움’에 휘말린다는 인상을 주었던 셈이다. 그 결과 참여정부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더 ‘《조선일보》 비판’ 활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됐다.”(pp.361-362)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를 비판함으로써 한국 언론들에게 중론이나 여론을 관성적으로 대변하고 답습하는 것을 넘어 공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강제해야 했다.”(p.464)


『안티조선 운동사』가 반복해서 주문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운동이, 정치가, 언론이, 담론이, ‘진영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안티조선’은 공정성과 당파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조선일보가 취해오던 왜곡된 진영 논리를 넘어서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은 그런 문제의식을 과연 얼마나 견지했는가? 스스로가 조선일보식의 저급한 편향성, 저열한 의사소통 방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닌가? 때문에, ‘발전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안티조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언론운동이 ‘발전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또는 조중동)만 없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조선일보(또는 조중동)가 사라져야 한다.’가 되어야만 한다.

(‘조선일보=친일파’라는 공식을 이용해 안티조선이 대중화되던 시절을 서술하면서 한윤형 씨가 던지는 “운동은 어디까지 단순화될 수 있는 것일까?”(p.190)라는 질문에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나는 한윤형이라는 저자를 좋아한다. 한윤형 씨의 장점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장점은 ‘공정하게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한윤형 씨의 글쓰기는 당파적이지만, 최소한의 공정성이라는 룰을 지키려고 애쓴다. 우군에게만 특별히 너그럽지도 않으며,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일도 없다. 당파성의 근거가 되는 기준도 명확한 편이다. 그때 당파성은 일종의 실용성이 되기도 한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특히 그런 한윤형 씨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책이다.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운동이기 때문에 좀 더 너그러워도 좋을 법하건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라는 말 자체도 안티조선 운동에서 등장했던 말(정확히는 유시민 씨가 쓴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작 이 말을 한 분이 또는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공정하게 편파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안티조선 운동사』를 놓고서 한윤형 씨 ― 10대 무렵부터 안티조선 운동에 빚을 진 어떤 한 사람은 ‘공정하게 편파적인’ 그 자세를 가능한 한 유지하고 있으면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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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4. 30. 23:42

‘운동사회 나이주의 깨기 활동’ 제안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함께 제안하는 글입니다.)



  혹시 누군가가 청소년운동이 기존의 시민사회운동들과 폭넓게 연대하고 있는가 물어보면, 참 “글쎄요…”라는 대답만 나올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가 힘이 딸려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못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의 ‘싸가지 없음’도 한 몫하고 있을 겁니다. 솔직히 아수나로나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라고 하면 까칠한 애들, 싸가지 없는 애들이란 인식이 적지는 않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초면에 반말질하는 꼰대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그런 거에 사사건건 문제제기하는 게 얼마나 싫겠어요. “나이도 어린 게”.

  하지만 그건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싸가지 없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운동사회의, 어른들의, ‘감수성 없음’, ‘개념 없음’의 문제지요. 운동사회의 ‘나이주의’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나이주의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나이 적은 사람들을 더 ‘아랫사람’ 취급하고, 또 운동의 자원도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인식과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한 번, 정식으로 본격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사실 우리가 그동안 그런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개인적으로만 대처해온 것도 사실이지요. 슬슬 이게 ‘우리’ 문제가 아니라 ‘니네’ 문제라는 걸 확실하게 까발리고 치는 게 어떨까요? 예, 마치 ‘성폭력’이 그 여성의 행실이나 지나치게 까칠하고 민감한 여성들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되던 시대에서, 최소한 운동사회 안에서 ‘성폭력’이 문제라는 공감대에 이르게 된 과정처럼 말이지요. 1999년 ‘컵깨기 행사’ 같은 이미지도 같이 떠오릅니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같이 가야 할 겁니다. ① 선언문 발표나 칼럼 써서 기고하기 ② 퍼포먼스나 액션 ③ 뱃지 만들어서 달고 다니기 등등. 우선은 나이에 따른 ‘반말’, ‘하대’ 문제부터 접근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초면에는 나이에 상관 없이 존댓말을”, “반말과 존댓말은 친소(친하고 안 친하고)를 표현하는 것이지 위계를 표현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같은 취지로요. 물론 그 외에도 나이에 따라서 맡는 직위가 달라진다거나 하는 고질적인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일단은 그게 청소년들 입장에서는 가장 상징적으로 첫 말문을 열기 좋은 주제인 것 같아요.

  ‘연대’가 단순히 서로에게 몸을 대주는 게 아니라면, 우리 입장에서 ‘연대’란 것은 우리의 정치와 감수성이 다른 운동에 녹아들어가는 과정이겠지요. 그리고 그 과정은 평화적이고 화기애애한 방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일종의 도전이자 투쟁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적극성을 가지고 평등한 ‘연대’의 길을 열어 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냥 “청소년인권운동이란 게 있다더라.”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직접 우리 입장을 들이밀기 위해서, 또 하나의 투쟁을 제안합니다. ‘운동사회 나이주의 깨기’를. 여기에 공감하신다면 먼저 계획부터 같이 짜볼까요? ^^


2011년 4월 30일 공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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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취지를 표현하는 부분은 중간쯤이지만... 사실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은 마지막 문단.

    2011.04.30 23:4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진냥

      이 글에 동의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도 얼렁 반말하는 사이가 되어야 할텐데요..ㅋㅋ
      +나 담주에 서울가는데 한번 볼 수 있었음 해요..

      2011.05.01 00:07 [ ADDR : EDIT/ DEL ]
  2. 나이주의보다... 엘리트주의 먼저 제거했으면 싶어요. 운동판 꼰대들은 경력운운, 시위참여횟수 운운, 성과운운...뭐 하다가 교도소 다녀온것도 경력이고... 동성애자 운동권에선 커밍아웃한게 훈장이니깐... 난 그런것들이 더 역겨와요.. -자주 공현님 티스토리 지나가는 조곤올림-

    2011.05.01 02: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어떤 노동운동 연사분의 약력에 모모집회하다가 "교도소 복역"이란게 떡하니 있더군요. 또 화염병 만드는걸 아주 자랑스레 말하고, 죽창의 각도는 이래야한다는 둥...법치도 무시하면서 기업보고 노동법 지키라고...^^;; 어이없다는...

      2011.05.01 02:26 신고 [ ADDR : EDIT/ DEL ]
    • 청소년운동가들 마음을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는게.... 저도 18,19살부터 집회 시위현장에 있어서..그런말 많이 들었어요. 보통 나이주의+엘리트주의가 섞인 비아냥인데. "아직 어려서 운동경험이 없어서 미숙하네. " 어떻게보면 별뜻없어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느낄 수 있거든요. 사실 동료로
      생각하진 않더라구요. 마냥 귀엽고
      기특한(?)존재였죠. 그런대접 받기 싫은 객기에 편한복장 추구했는데...거의 정장차림에 명함파서 돌렸던 기억.. 그땐 "안녕"이 "안녕하세요"가 되더군요. (운동도 비즈니스다.)란 생각이 들던 경험.

      2011.05.01 02:34 신고 [ ADDR : EDIT/ DEL ]
    • 까만이

      노동운동 내부의 나이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약력에 교도소 복역을 넣는 것과 엘리트주의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교도소 복역과 같은 투쟁경력은 그분들의 치열한 삶에 대한 훈장이고,상처고,자랑거리입니다. 그런 것마저 '엘리트주의'로 몰아세우면 그분들께 뭐가 남나요? 피억압과 피탄압을 자랑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탓해야 할 것이지, 그분들에게 그걸 '자랑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2011.05.06 15:59 [ ADDR : EDIT/ DEL ]
    • 까만이

      만약 그런 자랑이나 추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시위경력이 적은 활동가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엘리트주의'나 '경력주의'(적절한 이름은 아닙니다만)라고 비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헌법에 나와있는 '법치주의'와 '노동법을 준수하라'는 결코 같은 차원에서 얘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은 애초부터 공정하지 않고, 지배층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안다면) 이해하기 편해집니다. 지배층은 '법'을 피지배층의 저항과 반란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노동자구속, 파업을 불법이라고 규정 등등. 하지만 노동법의 경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법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지배층에게 유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 책은 전태일 열사의 무기였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법치주의는 지배층의 언어이고 '노동법을 준수하라'는 피지배층의 언어입니다.

      2011.05.06 16:07 [ ADDR : EDIT/ DEL ]
    • 까만이

      그래서, 만약 '법을 왜 지켜야 하는가'를 규명하지 못할 바에야 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들에게 '법치주의를 지켜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지배층이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법을 어기는 것과, 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의 치열한 투쟁 과정에서 법을 어기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도소 복역, 죽창사용, 화염병 사용등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 과감히 말하건대, 교도소갔다오고 죽창을 들고 경찰에게 맞서고 화염병을 던지는 일이, 투표일날 진보정당 후보한테 한표 찍는것보다 훨씬 가치있고 아름답고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죽창사용,화염병투척 등은 몰라도 교도소출입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시는 시각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의 교도소에 갇혀있는 수많은 양심수와 구속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이, 대체 왜 '법치'라는 기준에 재단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지배층의 입맛에 따라 법을 정하고 재판을 하고 집어넣는데, 그 교도소를 갔다왔다고, 그걸 좀 자랑했다고 해서 엘리트주의라고 비난받아야 합니까? 법을 어겨서라도 생존권을 쟁취하겠다는, 숭고한 일을 그렇게 조롱하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2011.05.06 16:17 [ ADDR : EDIT/ DEL ]
    • 까만이

      불법투쟁경력이 있는 노동자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시는 건요, 마치 맨날 맞고사는 약한 아이가 어느날 힘센 아이에게 대들었는데 '약한 아이도 때렸으니까 똑같다'라고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런 불법이 있고 저런 불법이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반복하자면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들에게, 투쟁경력은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경력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좋지 않지요. '역겨웠다'라고 표현하신 그런 부분들에 대해 비판하시는 게 더 좋을것 같습니다.


      쓰다보니 본문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네요. 나이주의 깨기 활동에 대한 제안글에 이런 댓글을 남겨서 공현님께 죄송합니다. 저도 한 청소년의 입장으로서, 앞으로 수없이 겪을 운동의 현장에서, 운동가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나이주의 깨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곤님께 단 댓글들은, 첫번째와 두번째 댓글에 대한 얘기입니다. 세번째 댓글에는 공감합니다.

      2011.05.06 16:32 [ ADDR : EDIT/ DEL ]
    • 까만이님께. 부족한 제 식견에 따끔한 지적감사합니다. 우린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격지심을 거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나이를 먹고 더 많이 성찰하면서 깨달아가기에 과거를 무기로 삼지 말아야함을 알지만 그래도 하나의 예로서 제 이야길 합니다. 동성애자라서 많이 얻어터지고 다닙니다. 커밍아웃해서 더욱 주변에 적이 많지요. 저에게 염산테러를 한 사람을 찾아가 뼈마디 마디를 분질러놓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종종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저는..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라 혁명주의자가 아닌, 잘해봤자 개혁주의자 정도라서 까만님과 의견이 다른것이므로 조롱의 의미는 아닙니다. 제 시각에선 당연히 그리 보이고 생각될 뿐이죠.저는 법이 지배계층의 권력도구로만 쓰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남용으로 분명 억울한 희생자도 발생하지만 법이 없어서 더 억울한 인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의 이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의 차이이죠. 윽박지르지 말았으면 합니다.

      2011.05.07 01:58 신고 [ ADDR : EDIT/ DEL ]
    • "나 이만큼 열심히 살았어요. 나 이만큼 아팠어요. 좀 알아주세요." 제가 제 과거를 매번 강의때마다 하나의 최악의 사례로 들려줄때의 제 자신의 심리 이면엔 그런것이 있더군요. 까만님, 저에게도 노동운동가들에게도 염산테러나 교도소복역보다. "지금 여기에 맞서며 살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훈장은 없을겁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하고, 성과를 냈다."는 자랑 좀 하는게 뭐가 어때. 그 마음이 정말 간사하다는걸 깨달았을때 무척 부끄럽더군요.

      2011.05.07 02:10 신고 [ ADDR : EDIT/ DEL ]
    • 그러니까 제 "염산테러"나 어떤 노동운동 연사의 "교도소 복역 약력"은 엘리트주의인거 같습니다. "너넨 이런거 못하지? 이러고도 살 수 있겠어? 난 이렇게 살때 (용기없는)너넨 뭐했어?" 같은...그런 엘리트주의, 운동가들이 없었으면(분명 그들의 행동은 귀감이 될만하지만...) 미천한 인민이 이렇게라도 살수 있었겠냐는 그 묘하고 역겨운 운동가들의 자격지심과 엘리트주의와 우월감들이 무척 싫더군요.

      2011.05.07 02:16 신고 [ ADDR : EDIT/ DEL ]
    • 무튼 까만님, 저는 서울대나온(많이 배웠다는 의미의 엘리트주의) 어떤 운동가의 계몽주의에 입각한 선동성 발언도 싫어하고, 운동판의 터줏대감이랍시고 곤조부리는 (많은 경험을 했다는 의미의 엘리트주의) 것도 싫어서요. 존대 안했다고 혼나는 것보다 " 경험이 없어서 모른다."란 소리가 더 문제 많은듯하여.. 쓴것일뿐 조롱의 의미는 아니었답니다. 저의 저항은 18살의 노동절의 노동자 시위에서 부터였거든요. 노동운동판은 조금은 아날로그를 지양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느껴요. 저는요.

      2011.05.07 02:27 신고 [ ADDR : EDIT/ DEL ]
    • 까만이

      사실 방금 위에 제가 조잡하게 써놓은 것들이, 바로 어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는 제 얇디얇은 종잇장같은 식견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었고, 생각의 차이를 거세하고 조곤님을 윽박지르고자 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구속재벌은 없고 구속노동자가 수백명에 이르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 분노 때문에, 조곤님의 댓글에 반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법의 얘기를 지나쳐서, 노동운동과 엘리트주의에 대해서 짧은 제 느낌을 조잘대보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공현님이 주장하신, 조곤님이 경험하신 이른바 '엘리트주의' 또는 '경력주의'를 몸소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운동경력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운동가들과 뭔가를 함께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집회장에 나가면, 운동가가 아닌 나이 지긋하신 노동자분들이, 제 어깨를 두드려주시고 반말을 하시고, 그런 건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집회장에서 연사로 나오신 분들이 그렇게 경력을 자랑한다고 느낀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패악들, 역겨움들을 경험하신 조곤님께 제가 감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곤님의 문제제기에 공감하고 그런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조금은 자랑할 수도 있지 않냐, 그런 자랑이 정말 비겁한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면, 거기에 있어서는 조곤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과 체화의 문제이니깐요.
      다만 '많은 경험을 했다는 의미의 엘리트주의'는 '많이 배웠다는 의미의 엘리트주의' 보다는, 약간은, 조금은, 쬐~끔은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냐.. 하는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말씀하셨듯이, 귀감이 될만한 행동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제1차적 문제이기도 하고.. 물론 운동을 통해 그런 폐단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건 당연한 거겠지요. 다만, 이해는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온정주의도 아니라,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구속을 당해야 하는 현실, 그리고 구속경력이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선차적으로 이해하자는 겁니다. 그런 이해 없이 '경력주의 몰아내자'... 이 구호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력주의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의 구속노동자, 구속노동운동가들에게도요..

      2011.05.07 20:50 [ ADDR : EDIT/ DEL ]
    • 까만이

      윽박지르는 것처럼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솔직히 불법,불법,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를 낙인찍는 시선을 평소에 많이 봐와서인지, 약간 흥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조곤님이 스스로에게 아플수도 있는 경험까지 얘기하시며 반박에 대답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선 남기신 첫번째 댓글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짧게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맞습니다. 법에는 '권력의 남용으로 분명 억울한 희생자도 발생하지만 법이 없어서 더 억울한 인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의 이점'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태일 열사의 예시를 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의 본질, 그러니까 법이 왜 만들어졌나 하는 성격에 대해서는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한진중공업에 다녀왔습니다. 수십년간 노조에서 활동을 해온 노동자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청업체의 비정규직들이 노조를 만들면 대기업들이 아예 그 하청업체를 없애고 노동자들을 취직 못하게 하는 것을 손바닥 뒤집듯 해도, 법으로는 그걸 처벌할 방법이 없드랬습니다.
      그런데,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채길용 문철상 지부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아야 한댑니다. 이들은 부당하게 해고된 사람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고자 했는데, 그게,크레인 위에 올라가는 행동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지 않을수 없지 않습니까? 살기 위해서는요? 법을 지키고, 투쟁하지 않고, 순순히 해고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혁명주의자이건 개혁주의자이건 상관없이, '법은 공평하지 않다'는건 솔직히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게 아닐까 합니다.
      애초부터 법이 불평등하다면, 정당한 방법을 행사해도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나라라면, 때로는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생존권을 지켜야 하는 나라라면, 왜 그 '법'을 지켜야 하는지요..
      님과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구조는 공평한가 그렇지 않은가'인것 같습니다. 사실 노동자들의 불법 투쟁들은 단순한 개인적 복수의 차원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억압받는 이유는 이 사회의 구조가 불공평하고 불평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을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면, 사장을 죽이거나 그랬겠지요. 하지만 이땅에서 구속되어온 노동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이 해온 것들은 무엇이냐? 업무방해, 공무집행 방해, 집시법 위반..... 이게 대체 사람들에게 얼마나 피해가 간다고, 감옥에 쳐넣고 콩밥을 먹이는 겁니까. 이게 저 지배자들이 해온것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잖아요. 처절하고 눈물나는 저항이죠..
      다 안지키는 법따위를 지켜서 손해보느니 차라리 법을 어기고 만다. 단순히 이런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투쟁을 해도 '불법'으로 낙인찍히는 현실입니다. 무슨 특별히 불법행위를 일부러 하려고 한게 아니라, 바로 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행동을 했는데도, 불법으로 잡아넣는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리고 경영진이 자기들 이윤을 위해, 이익을 위해 막무가내로 정리해고를 해도, 그래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 십수명이 자살하고 그 아내가 유산을 해도, 그건 '합법'입니다. 근데 거기에 항의해서 계란 좀 던지고 페인트탄 좀 던졌다고 붙잡아서 경찰서로 연행해 가는게 이 땅의 현실입니다. 그 잘못의 크기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데, 사람을 죽이는건 저자들인데, 왜 우리만, 왜 우리가 불법이 되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2011.05.07 20:52 [ ADDR : EDIT/ DEL ]
    • 까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맞서며 살고 있다" 이 말은 참 귀감이 되네요. '자랑'들은 이해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은 결코 숭고한 행위가 아니죠. 지금 여기에 맞선다는건, 참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요. 염산테러에 관련한 조곤님의 이야기,..에 대해서요. 제 생각입니다만, 그런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경력주의'가 아니에요. 전혀 듣는 사람에게 역겹지 않고, 자격지심도 아니고 엘리트주의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니잖아요. 그걸 드러낸다고 조곤님한테 뭔가 큰 이익이 되는것도 아니잖아요. 스스로의 비밀스런 아픔을 얘기하고 공유하는 것을, 일부 노동운동가들의 '역겨운' 행동 따위와 동일시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공감은 인간의 아름다운 능력입니다. 경력주의 운동가들이 은근슬쩍 요구하는 '존경'과는 아예 그 급이,차원이 다른..

      주제넘게 잔소리한것처럼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단지 선의의 표현입니다.

      아, 공현님 블로그에서 내용과 상관없이 주제를 확장시킨 것 같아, 공현님께도 다시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__)

      2011.05.07 21:17 [ ADDR : EDIT/ DEL ]
    • 하청업체 노조에 대한 탄압은 매우 가슴 아파요. 특히 잔금을 주지않고 채권등으로 지급하는 대기업의 행태.힘이 세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고있는 행위에 대해서, 마음아프고 그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보수주의자이니까. 죄송하고 속상한 마음을 대신 전합니다. 까만이님의 설명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더이상 논란을 만들지 않고 싶어서. 이쯤에서 끝내기로 해요.

      2011.05.07 21:26 신고 [ ADDR : EDIT/ DEL ]
    • 때때로 나의 정당한 행동이 전혀 관계없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피해가 되기도 할때. 두 문제를 달리 결론짓고 해결해야 한다는걸 이젠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전 노동집회에서 더이상의 분신자살이나 영정사진이나 그밖의 폭력들, 전경을 희롱하고 자극하는 일체의 행위들이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행동이 억울하고 가슴아픈 인민의 마음을 보듬는 일로 인식되는 것에 조금은 회의적입니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사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해보면 우리 행동들에 정당하든 정당하지않든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2011.05.07 21:39 신고 [ ADDR : EDIT/ DEL ]
  3. 저는 반말 존댓말의 구분이 그냥 동아시아의 문화인 줄 알았는데 중국어에는 그런 게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무튼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나이주의를 어떻게 좀 아주 그냥 박물관으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주의 타파하는 것 역시 일종의 민주화 운동이 아닐까 합니다.

    2011.05.03 01:1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1. 3. 30. 08:04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두번째 소식지
아직도 먼 학생인권 (경향신문특집기사)
운동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초간단 우편용 서명지가 나왔습니다!
시민연속특강이 진행되고 있어요!
활동일정 (3월 30일 ~ 4월 6일) 학생인권시민연속특강 학생인권으로 여는 행복교육의 오늘
일정확인하기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하기 배너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홈페이지
학생인권제정운동서울본부 트위터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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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3. 13. 22:22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제대로 된 교육, 행방불명된 학생인권을 함께 찾으러 가요!

3월 19일 토요일 오후 3시 청계광장 옆 서울파이낸스센터

주최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www.asunaro.or.kr) / 후원 :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시험을 위한 시험, 등수를 위한 시험, 없애버려!
- 중간기말부터 수능까지 시험을 폐지하라!

●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을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
● 줄 세우기가 목적인 시험 대신,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는 ‘진단’과 ‘평가’를!


여러분들은 일 년에 시험을 몇 번 치시나요? 중간고사, 기말고사, 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 모의고사, 수능까지. 그 외에도 때에 따라 쪽지시험을 치기도 하고, 어떤 학교는 매주 주간고사나 월말고사를 치기도 합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적게는 일 년에 네다섯 번, 많게는 일 년에 스무 번도 넘게 칩니다. 대체로 한 달에 두세 번은 시험을 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날짜만 기다리다보면 금세 졸업을 하는 게 학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일 년에도 골백번씩 치다보면 마치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중간기말고사와 ‘학교RPG’의 최종 스테이지인 ‘수능’을 치기 위해서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들도 수업시간에 “이건 시험에 나오니까 꼭 알아둬”라든지 “이 부분은 수능에서 거의 안 다루니까 알아서 읽어봐”라는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시험에 나오니까 중요한 걸까요, 중요하니까 시험에 나오는 걸까요? 그 ‘중요하다는 것’은 뭘 하는 데 중요하다는 걸까요? 정말 헷갈리기 짝이 없습니다.

이처럼 지금의 교육은 마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라면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쓰는 게 아니라, 냄비를 쓰기 위해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만약 교육의 목적과 수단의 앞뒤가 제대로 맞는 얘기가 되려고 한다면, 배운 것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을 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점수를 더 받으려고 공부가 재미없는 것이나 골치아픈 것이 되게 만드는 시험은 아니어야 합니다. 시험을 안 쳐도, 점수를 매기지 않아도 공부를 하는 것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돼야 합니다.

지금처럼 시험을 치기 위해서 교육을 한다면, 시험범위에 맞춰 진도에 쫓기게 되어 교사와 학생 모두가 피곤해지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또 시험에 잘 나오는 부분은 교과서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밑줄을 치고, 읽으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은 어쩌면 학생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일 텐데도 대충 훑어보고 지나치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황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또 학생들이 진정으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과 같이 단순히 성적을 내서 등수를 매기기 위한 모든 시험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일정부분만큼 배웠을 때에 그 부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평가를 하고 난 다음에는 그 결과를 바탕으로 부족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복습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겠지요. 이렇게만 된다면 지금처럼 성적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일이 사라지거나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또 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매우 슬픈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시험 하나 없앤다고 해서 모두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말하는 지금의 교육이 가진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등수를 매기기 위한 시험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학생들이 서로 경쟁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들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평준화한다든지,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제도들이 마련돼야 하겠지요. 이 부분들은 <실종신고>의 다른 요구를 소개한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시험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학생들이 진정으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교육, 우리 손으로 만들어보아요!



입시경쟁.학벌 없는 사회, 대학 안 가도 되는 세상!

- 대학 안 가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라!


● 명문고, 명문대 가는 건 모두의 목표일 순 없다! 학교 줄세우기 NO! 획일적 입시경쟁 NO!

● 내가 나온 학교가 내 가치를 결정하진 않는다! 학벌 학력 차별 금지!

● 대학 안 나와도 모두가 하고픈 일을 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라!



"먼저 대학이나 가라." "대학 안 나오면 알바, 비정규직밖에 못한다." "명문대 가야 사람 대접 받는다." ……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들어본 고등학생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은 대학 입시를 위해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을 향한 경쟁은 계속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 좋은 중학교에 가야 합니다. 학창시절 12년 동안 강요받는 인생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버린', '학교에서 내놓은' 취급을 받곤 합니다. 그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상위권, 중상위권 학생들도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목포에서 한 고등학생 분이 분신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 이유 역시 성적 등 스트레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에 갔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이 사회에서 학벌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학벌은 수입이 높은 직업을 가지는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이나 사회 상류층에서 좋은 학벌은 이제 ‘기본’이 되어 그 이외에 쌓아야 할 스펙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SKY대학을 졸업해도 정말 작은 부분까지 남보다 위로 올라서야만 그나마 풍족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SKY대학을 안 나와도, 고졸이어도, 잘 먹고 살고 잘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고, 학생들은 이 불안한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기 위해,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 바둥거려야 합니다.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는 사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학벌을 가지고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 보기 좋은 것, 부모가 시키는 것을 향해 달려가야만 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큰 일이 나고 인생을 망칠 것처럼 가르칩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12년을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 단 하루 만에 수능이라는 방법으로 평가당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창시절 내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끌어안고 , 남보다 위에 설 궁리를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육은 학생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자발적이고 흥미 있는 것이 아닌, 불안에 밀려 꾸역꾸역 해야 하는 강제 노역으로 바뀝니다.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학벌이 없는 사람을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사회의 풍조를 바꾸려면 대학을 획일적으로 줄세워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꿈은 ‘좋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인생의 한 선택지일 뿐 절대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학생들은 누구나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은 서열 없이 평준화해서 어느 대학이라도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존중받고 원하는 교육을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학벌과 상관없이 노력하기만 하면 생활하기에 알맞은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한국처럼 대학진학율이 높은 사회, '대학 나오는 게 당연한'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모든 중고등학생들의 목표가 좋은 대학 가는 것인 것처럼 교육하는 나라도 별로 없습니다. -_- 선진국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대학을 안 나온 사람들도 충분히 사람답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나마 한국과 비슷하다는 미국이나 일본도, 대학에 진학할 뜻이 있는 학생들 외에 다수 학생들은 입시경쟁에 목매달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우리는 바랍니다. 대학을 안 나와도 된다고,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학벌과 학력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학생들이 먼저 오로지 좋은 학벌만을 향해 달리기를 강요하는 지금의 교육제도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한테 돈 좀 내놔!!

- 교육예산 확보하여 누구나 쾌적한 학교를!


● 화장실에 온수는 좀 나오게! 학교 시설 개선, 좀 더 쾌적한 학교를!

● 학급당 학생 수 줄이고 교직원을 더 뽑아서 좀 더 나은 교육을!

●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실현, 나아가 미친 대학 등록금도 무상으로 ㄱㄱ!


학교 다니면서 "우리 학교 시설 너무 좋다~"라고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물론 진짜로 시설도 좋고 번쩍번쩍한 학교도 있지만 그런 학교는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냉난방도 제대로 안 해주는 학교, 따뜻한 물도 제대로 안 나오는 학교, 탈의실이나 동아리실도 없는 학교, 운동장도 작거나 없는 학교, 급식이 형편없는 학교, 화장실이 낡거나 부족한 학교가 태반입니다. 심지어 밖에서 보이는 운동장이랑 외관은 엄청 좋아 보이게 꾸며놨는데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학교도 있습니다.

시설뿐만이 아닙니다. 별로 넓지도 않은 한 반에 30~40명의 학생들이 같이 생활해야 하고, 교사들의 수도 학생들과 진지하게 교류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 이런 시설, 이런 교육환경의 학교에 다니는 데 교재비, 교복비, 급식비 해서 얼마나 돈이 많이 드나요? 고등학교는 또 등록금을 1년에 4번, ·40만원, 50만원씩 내야 합니다. 헐 -_-

왜 그런지 이유는 뻔합니다. 한국 정부가 교육에 쓰는 돈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교육예산을 GDP(국내총생산. 그러니까 한국 안에서 1년 동안 총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알려주는 수치입니다.)의 6% 수준까지 올리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예산은 2009년에 GDP의 5.0% → 2011년 4.55%로, 늘어나기는커녕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사 수가 부족하고 시설도 안 좋은데, 정부에서는 돈 아낀다고 교사 채용도 거의 안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핀란드, 프랑스, 영국, 덴마크 등의 선진국들은 이미 학교 시설 등이 대체로 갖춰져 있어서 시설 마련에 돈을 크게 쓸 일이 없는데도 GDP 대비 5.5% 정도의 교육예산을 매년 쓰고 있습니다. 학교도 교실도 더 늘려야 하는 한국은 당연히 그보다 돈을 더 써야겠죠?)


어른들은 맨날 우리에게 너희는 미래의 새싹이고 잘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들이는 노력을 보면 그런 건 다 거짓말이거나, 우리들을 공부시키려는 낚시 같습니다. 우리를 진짜로 생각해주고 있다면 당연히 교육에 돈을 좀 더 들여야 하지 않나요? 4대강 삽질할 돈, 좀만 빼서 학교 화장실에 따뜻한 물 좀 나오게 하고 급식 질 좋게 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부동산 투기하는 어른들한테 세금을 좀 더 걷어서라도 고등학교 등록금을 초등학교, 중학교처럼 공짜로 하고, 미친 듯이 높은 대학 등록금도 낮춰서 공짜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육 선진국으로 유명한 핀란드는 한 반 20명쯤 학생들과 2명의 교사가 수업을 운영하곤 한다고 합니다.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한 반 20명에 교사 1명, 아니면 한 반 30명에 교사 2명 정도는 되어야 좀 나은 교육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돈이 없다는 건 핑계입니다. 한국의 경제력은 이미 세계 10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개드립에 따르면 한국은 G20을 개최한 선진국입니다. 학생들은 누구나 좀 더 쾌적한 학교에서 교육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학생들이 더 편하고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학교, 학생들이 더 나은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교실 환경, 모든 학생들을 위한 무상교육을. 단순히 경제규모가 얼마다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교육, 좋은 교육환경이라는 면에서 만족하고 자랑할 만한 사회를 만들어야죠?






내가 다니는 학교운영, 내가 결정한다!


- 학생에겐 권력을, 학교에는 민주주의를!

● 표현의 자유 등 민주적 권리 보장은 기본 중의 기본! 

● 생활규정부터 수학여행 일정까지, 학교운영에 학생참여권 보장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데, 왜 대한민국의 학교에는 민주주의가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걸까요? 작년 경기도 성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 후보 한 명이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연설문을 썼다고 학교가 그 내용을 삭제하라고 압력을 주었지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생회가 학교의 체벌실태를 고발한 신문을 발행하려 하는 것을 교장이 막았습니다. 성적이 낮으면 학생회장, 학급회장(반장)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학교도 많습니다.

이래놓고도 학교는 뻔뻔하게도 민주시민을 양성한다고 자처합니다. 이렇게 반민주적인 학교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걸까요? 학교 내에서의 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학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비판이나 주장을 했다고 압력을 주거나, 징계를 하는 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민주적인 행위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선거 출마에 자격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 안에서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학생회는 할 수 없는 것만 왜 이리 가득한 걸까요? 화장실에 휴지 놓는 것조차 교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학생회가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권익에 반하여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요.


학생회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은 학교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규정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이 수업은 이런 식으로 하는게 좋다, 등교시간이 너무 이른 것 아니냐, 수학여행은 어느 장소로 언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등등 학생들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운영에 참여하여 의견을 내고, 결정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학교의 예산 등을 심의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들은 학부모, 교사 등과 함께 동등한 권한을 갖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곳은 아니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요구하고 외쳤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나서서 권력을 쟁취하고 학교민주주의를 요구할 때입니다.



학생도 인간이다! 두발자유 등 인권 보장!

- 규제와 폭력 대신 존중과 소통을


● 두발복장자유화, 강제자율․보충학습, 소지품 압수 중단!
● 성적․외모․돈․장애․성 등에 의한 차별 중단!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을!
● 학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체벌금지, 언어폭력 금지, 벌점제 폐지! 학생을 무시하고 통제하고 패는 교육이 아니라 존중하고 소통하고 대화하는 교육을!
● 교육과학기술부의 학생인권 침해 합법화 방안, 갖다 버려!
● 학생인권조례, 학생인권법 등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 마련!

학생도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학생도 사람으로서의 권리,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지금도 많은 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두발규제, 복장규제, 언어폭력 등 많은 폭력과 반인권적인 통제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동안 많은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여온 끝에, 그리고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서울에서는 체벌금지가 발표되면서, 학생인권 상황이 다소 개선된 학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대다수 중고등학교에 두발복장규제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강제적으로 자율학습, 보충수업을 시키고 아침 7시, 7시 반까지 등교하게 하는 학교들도 많습니다. 수업시간 중 사용만 약속을 만들고 조심하게 하면 될 것을 휴대전화, 음악기기, 전자기기, 책 등을 아예 금지하거나 압수해버리는 모습도 여전합니다. 쇠파이프로 죽도로 목도로 학생들을 두들겨 패고 ‘오리걸음’ 같은 체벌을 하는 학교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성적으로 차별하고, 벌점을 통해 생활 하나하나까지 점수로 규제하며 학교에서 내쫓는 모습은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자율화’라며 학생인권 문제를 학교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니, 이젠 체벌을 허용한다고 하고 학교장이 학생의 인권을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려고 하면서 학생인권 침해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인권은 학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모든 학교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본선입니다. 지방자치가 각 지역에서 살인, 강도, 폭행을 합법화할지 처벌할지 알아서 하게 하는 게 아니듯이, 인권은 학교장의 손에 그렇게 맡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학생인권조례, 학생인권법과 같은 모든 학교가 지키게 할 제도가 필요한 겁니다.

학교는 사육이 아닌 교육을 해야 합니다. 교육은 고통이 아닌 소통이어야 합니다.

두들겨 패거나 벌점을 매기는 교육이 아니라 소통하고 대화하는 교육. 숨통 트이는 교육. 잘못을 하면 두들겨패거나 쫓아내는 게 아니라 잘못을 알게 하고 민주적, 합리적인 처벌과 예방을 하는 학교. 학생들을 같은 머리 같은 옷 안에 가둬두고 획일적인 성적으로 차별하는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다양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교육. 막말과 욕설이 아니라 서로 간의 존댓말과 친밀함, 예의가 있는 교실.

불가능하다구요? 꿈 같은 소리라구요? 최소한 학생도 인간이고 인격체라는 걸 인정하고, 두발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부터 보장해나가기 시작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학생도 인간이라는 그 당연한 진실을, 현실로 만듭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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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7. 21. 15:34




애들은가라? 쳇-_- 꼰대는가라!
발칙한 청소년활동가들의 발칙한 수다한마당!

 

인권,환경,평화,참여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발칙한 청소년활동가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활동가'대회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고 노력하는 당신이 청소년활동가!

 

꺠알같이 재미질 청소년활동가대회 끌리지 않나요?ㅋㅋ

왁자지껄한수다, 뜨거운토론, 신나는놀이가 대기타는중!


모두들 2010청소년활동가대회'쳇[chat]'으로 놀러오세요!

 


일시: 2010.08.05(목)~07(토) / 2박3일
장소: 오덕훈련원(경기남양주축령산국립공원)
참가비 : 5000원(면제도가능!멀리서오는분은차비지원도!)


cafe.daum.net/youthm

* 자세한내용과 참가신청은 청소년활동가대회카페로 *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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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 좋은 대회다... 장소도 적절...

    2010.07.21 18:04 [ ADDR : EDIT/ DEL : REPLY ]
  2. 오덕훈련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0.07.27 13:08 [ ADDR : EDIT/ DEL : REPLY ]

소리나는꿈2009. 6. 9. 12:50


길 그 끝에 서서
글 박현욱
곡 지민주
편곡 마구리밴드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 것처럼

눈 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하지마
그건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걸 확인하는 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하지마
그건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걸 확인하는 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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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한국의 정치 상황, 표현의 자유 등 민주주의에서 기본적인 가치들의 상황이
198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2009년이며, 사회상황도 다르고, 우리의 대응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즘 연달아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6월 10일에 모이자고 외치는 걸 보면
사람들은 2009년의 문제를 1980년대식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것 같다.
새로운 길을 만들기보다는 원래 있던 길들을 다시 찾아서 가려는 것 같지만,
그건 결국은 뒤로 돌아가는 일이다.

난 차라리 길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을 하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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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을 보실 지 모르겠으나 글 제목에 '지민경'님 아니라 '지민주'입니다.

    2015.03.30 22:21 [ ADDR : EDIT/ DEL : REPLY ]
  2. 노래를 잘 들었어요.^0^ 언제 들어도 좋네요

    2015.03.30 22:22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10. 2. 22:38

임시 야간 숙소 (1931년)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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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방법이 있기에 한겨울에 동사(凍死)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줄어들 것이고 또 누군가는 한순간이라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자에게 나는 분노하거나 냉소하겠지.
그 알량한 투쟁으로 누구를 행복하게 해왔느냐고 물어보겠지.
누구누구를 행복하게 해왔노라고 하면
그것이 저 사람들이 자신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

저 사람들은 착취의 시대를 짧게 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겠지. 그러니까 그것을 근거로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겠지, 나나 당신처럼.


나는 항시 다른 사람에게 별로 상처주지 않고 그렇게 하는 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 한비야 씨나 테레사 씨 등을 보다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부러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타자화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 나 자신이 그러한 '자선'을 정치적으로 부정하는 쪽에 속하니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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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

    저거 너가 준 만화책에 나오는데.

    2008.10.04 00:08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와 동시에 그 사람들은 그저 그런 것에서 머무르기 마련이지.
    테레사가 정치적으로 어떤 의도로 그런 자선을 해왔는지를, 그런 종류의 자선이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를.

    2008.10.14 01:07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 것에 머무르는 걸 비판하는 게 우리의 위치지만, 그러나 그 비판이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은 그리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는 비판이겠지.

      2009.05.28 12:29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