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10. 12. 21. 16:41


- 예전에 한 번 쓰려고 기획했지만 결국 쓰지 못한 리포트랄까, 소논문 중에 이런 주제가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와 금욕은 과연 배타적인 것인가. 소비하는 소비자와 금욕적 노동자 이 모순적인 둘을 짜맞추는 것이 자본주의의 인간 교육은 아닌가?" 뭐 이런 문제의식인데,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하는 소비 주체와 금욕적인 노동 주체의 형성에 관한 사례 분석"이라고 해야 할까.


- 주로 휴대전화 문제 관련해서 했던 생각인데,
스스로 좌파적이라고 하는 교사들이나 활동가들 중에서는 "청소년에게 휴대전화 사용을 규제하는 것을 반대한다."라는 요구가 휴대전화 이동통신 자본의 손에 청소년들을 무책임하게 던져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즉 그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규제하는 것은 소비를 절제할 줄 알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자본주의적/대안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근데 진짜 그럴까?


- 금욕적이고 자기 절제를 할 줄 아는 인간은 근대 자본주의가 요구한 참고 절약하고 축적하고 노동하는 노동자 상에 가깝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를 많이 하는 소비자들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서는 이런 금욕적 존재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공장이나 직장에서는 이러한 금욕적 자기 통제(노동시간 중에는 휴대전화나 메신져 등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 시간을 엄수할 것 등등)가 요구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규제하는 것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규제하는 것과 닮아 있다."
즉 학교의 휴대전화 규제나 학생 통제는 전혀 대안적이지도 반자본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오히려 "일터에서는 묵묵히 규율을 지키며 일을 하고 일터를 벗어나면 소비자가 되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자본주의적 시민"의 모습과 일치한다.



- 온라인게임 셧다운제에 관해서 그것이 결국 "게임 소비의 자유"를 외치는 것이며 게임업계나 자본주의적 욕망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판을 보았다. 그러나 그 비판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그럼 청소년을 (게임에서든 휴대전화에서든)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은 대안적/반자본주의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서 '소비'='자본주의적'이라는 단순한 도식만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그런 식으로 통제하는 것은 외려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재생산되기 위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훈육은 아닌가??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도입이야말로, 아동/청소년을 구분하고 억압하고 차별하고 보호해온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 아닌가??



- 사실 모든 인간은 소비하고 향유해야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이든 뭐든지 간에 먹고 일하고 노는 등 모든 것들은 소비되고 향유되는 것이다.
그 소비가 다만 화폐로 거래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원론적으로 접근하면 게임은 놀이의 일종이다. 인간은 놀지 않고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놀이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대안적 방식으로 돈을 쓰지 않는 다른 놀이 문화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말이다.



- 상품이 좋은지 나쁜지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해서 규제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반적 사실이다.
무조건적인 판매와 소비의 자유를 주장할 사람은 없다. 당연히 사람에게 해로운 상품은 규제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게 굳이 일반적인 모든 시민들이 아니라 '청소년'인가? 또, 게임에 관해서라면 게임의 내용이 과연 인류 보편의 가치-인권이나 평화 등-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고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왜 게임을 밤에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인가? 게임은 그 자체로 마약이나 독극물 등등 만큼이나 유해한가? 청소년의 경우에 밤 시간에 하는 게임은 일반적으로 유해하단 말인가?

청소년의 문화적 자기결정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청소년들의 참여와 주체 형성을 통해서, 혹은 대안적 문화와 놀이가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게 "청소년에 대한 교육적 책임의 방기"라는 언설은, 역시 청소년들의 입장은 무시하는 꼰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단순히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반대에 그치지 말고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적 놀이 문화나 시설, 제도, 여건을 요구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당연히 옳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강제야자/보충수업에 반대하고 학원과 사교육을 비판하고 입시경쟁교육을 폐지하려고 하고 청소년 문화에 관한 예산과 정책에 그렇게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반대 자체가 소비의 자유를 옹호하고 기업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적 입장이라는 식의 주장은 청소년의 인권 문제와 자본주의 문제 사이의 상호작용을 무시한 단견이다.



-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몰라도, 나는 '분류적으로는 좌파'에 속하겠지만, 어떤 좌파적 도그마("소비는 나쁘다"거나)가 우선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의 경우에는 어떤 사회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인가, 어떤 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할 기회가 보장된 사회인가 등등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런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좌파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는 처음 운동을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활동가일 뿐이다.



- 게임업계의 이해관계와 청소년들의 이해관계가 갈리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http://gonghyun.tistory.com/806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밖에 2010년 12월 22일 토론회에서 발표될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사의 발제문 또한 일독해보신다면 청소년보호정책의 노림수와 문제에 관해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문화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문화를 극복하는 방식은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오늘.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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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0. 6. 13. 12:56

수조 앞에서

 

                                  송경동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

 

 

 

 

 

 

 

 

선물받은,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 중에 하나에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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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좀 멋있는 듯... 걍 어제 워크샵 때 써먹은(?) 것도 멋있었다능

    2010.06.17 00:41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10. 4. 5. 15:46

"야간 교대제 근무는 발암물질"

국제암연구기구 전문가들 정의…"납 성분과 같은 등급"



간혹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석면은 1970년대까지 미국의 공사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던 절연 물질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석면이 폐암 혹은 악성 중피종이라는 복잡한 이름을 가진 암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지만, 당시의 건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매일같이 만지고 사용하는 물질이 암을 유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거예요.


교대제 근무가 발암물질인 이유

   
  
불안하면서도 ‘설마 이렇게 다들 사용하는데 이걸 만진다고 암이 생기겠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석면만이 아니었겠지요.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고무 공장에서 벤젠을 만지던 노동자들도, 크롬으로 도금하던 노동자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하고 있지 않을까요.

덴마크 직업병 판정위원회는 2008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다름아닌 야간 근무를 포함한 교대제 근무를 발암물질로 인정한 것이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1주일에 한 번 이상 20년에서 30년 가량 야간근무를 했던 여성 노동자에게서 발생한 유방암을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국가가 산재보험으로 보상하라는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물론 유방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알려진 가족력과 같은 다른 위험요소가 없는 사람들에 한해서요. 그 결과 간호사, 비행기 승무원 등의 직업을 가졌던 38명의 여성 노동자가 산재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http://www.ask.dk/sw25371.asp)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 중 15%에서 20%가 교대제 근무를 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몇 %나 될까요. 짐작하건데, 20% 보다 결코 작지는 않을거예요.

병원 노동자들, 방송국 노동자들, 운송 노동자들, 제조업 노동자들. 주변을 둘려보면 야간 근무는 이미 일상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발암물질이라니요. 석면이, 크롬이 혹은 흡연이 발암물질인 것은 짐작할 수있는데, 밤에 근무하는 것 자체가 암을 유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납과 같은 등급

덴마크에서의 판정은 사람과 동물을 대상으로한 기존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2008년에는 30여 편의 기존 연구를 분석한 결과, 비행기 승무 노동자에서 70% 가량, 다른 교대제 근무자의 경우 40% 가량 유방암 발생율이 상대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준 논문이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를 들어 야간 근무의 어떤 요소가 암을 발생시킬 것인가를 질문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여러 가설들이 제시되고 또 여러 실험 결과들이 그것들을 뒷받침했습니다. 예를 들어, 밤 시간에 빛에 노출이 되면, 수면 리듬을 파괴되고 또 멜라토닌이라는 암 발생을 억제하는 호르몬 생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의 국제암연구기구(IARC : 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의 결정이었습니다. 2007년에에서 24명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야간 교대제 근무를 유력한 발암물질(IARC 2A, Probable Carcinogen)으로 정의한 것이지요.

이 말은 흡연이나 석면이 속한 발암물질 그룹(IARC 1, Carcinogen) 바로 아래 등급에 야간 교대제 근무가 속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등급으로 분류되는 물질에는 납, 디젤엔진 연소가스가 있습니다.

보통 특정 화학물질이 발암물질인가 아닌가 여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인용되는 국제암연구기구가 야간 교대제를 발암물질이라고 규정한 이 결정은 세계적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20만년 진화와 충돌하는 자본주의 노동환경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야간 교대제가 인간 몸에 좋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인류의 조상을 어디까지 따라 올라갈 수 있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0만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야간 근무제는 오늘날처럼 일반적인 근무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빛에 노출이 되어 일하고, 밤에는 어둠 속에서 지내며 그러한 자연 조건에 맞추어서 인류는 진화해 왔던 것이지요.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또 전기가 발명되면서 밤에도 낮처럼 일할 수 있는, 혹은 일해야만 하는 상황과 조건들이 생겨나면서, 인간의 몸에 부작용이 생긴 것이지요.

과학자들이 야간 교대제가 생체리듬 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실은 20만년 가까이 진화하며 낮과 밤에 길들여진 인간의 몸이 불과 수백년 전에 시작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요되는 노동 환경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의 다른 표현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슷한 문제가 또 다른 유방암과 난소암의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비타민D 합성에서도 발생합니다. 야간 교대제가 밤 시간에 노동자를 빛에 노출시켜 생체리듬을 파괴한다면, 비타민D 결핍은 낮시간에도 건물 안에서 일하면서 태양 빛에 노출되지 못해 생겨난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밤에라도 일할 수 있어, 감사해야 하나

한국 상황으로 돌아와봅니다. 한국보다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인 유럽국가들에서도 덴마크 직업병 판정 위원회의 결정은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아직 야간 교대제를 발암물질로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구요.

하지만, 저는 걱정이 됩니다. 석면처럼, 벤젠처럼, 흡연처럼 처음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규제가 지연되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암물질로 밝혀졌던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그 대가를 누가 치르게 될까요.

노동조합 조직율이 10% 남짓하고, 작업장에서 고용을 보장받을 수 없기에 시키는 일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50%가 넘는,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를 늘려 여성 일자리를 더 마련하겠다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야간 교대제가 유력한 발암물질이라는 과학적인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야간 교대제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요. 밤에라도 일할 수 있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 감사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 아닌가요. 암에 걸리면 보상해주면 되는 건가요.

덴마크에서 스칸디나비아 항공 비행기 승무원으로 30여년을 일하고 나서 유방암에 걸렸던 울라 만코프씨는 산재보상 결정이 난 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http://news.bbc.co.uk/2/hi/uk_news/scotland/7945145.stm)

“만약에 제 직업이 암을 유발하는 줄 알았더라면, 저는 직업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거예요. 절대로요. 암으로 죽는 것이니까요. 저는 살아남고 싶어요”


2010년 04월 01일 (목) 09:08:41 김승섭 / 하버드 보건대학원 직업병 역학 박사과정



나도 밤샘 일 좀 안 하고 싶다 ㅠ_ㅠ
근데 야간 자율학습, 심야 학원교습도 그럼 발암물질로 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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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발적으로 야간 업무를 하게 만드는 인터넷뉴스 바이러스와 경희대 교지 고황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

    흥미로운 기사였죠. 유한킴벌리 등의 회사에서 실시하는 4조 2교대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2010.04.07 17:17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0.04.08 02:47 [ ADDR : EDIT/ DEL : REPLY ]
    • 사실 어떻게 보면 이미 전지구적 생산력은 과잉 생산에 이르러 있을지도 몰라요; 굳이 밤을 새가며 야간 노동으로 생산을 해야 할 만큼, 모두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며 모두 굶어 죽어요, 뭐 이런 상황인 건지는 좀 의문스러워요...

      2010.04.08 17:07 신고 [ ADDR : EDIT/ DEL ]
  3. flyingwhale

    전 지구적 생산력이 과잉생산이라는 말이 참 흥미롭네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04.09 16:16 [ ADDR : EDIT/ DEL : REPLY ]
  4.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1.31 14:48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10. 2. 21. 07:46



자본주의에 대한 짧은 동화 한 편

수조의 우화(The Parable of the Water-Tank)

neoscrum  / 2010년02월20일 10시48분

<수조의 우화(The Parable of the Water-Tank)>는, <뒤돌아보면> 의 작가 에드워드 벨라미의 작품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짤막한 풍자 소설입니다.
소설 <뒤돌아보면>이 1888년 미국에서 백만 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초베스트셀러가 되자, 에드워드 벨라미가 그 후속편으로 내놓은 소설 <평등(Equality)>에 실린 단편입니다.

▲  소설 <평등> 발행 당시를 묘사한 기사내용

오른쪽 사진은 1897년 7월 3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인데, 당시 <평등>에 미국인들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잘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공황 시기) 은행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평등>의 초판을발간하자마자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가서, 단 36시간만에 모든 책이 다 팔렸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 아마도 모든출판사들과 저자들의 꿈이겠죠.)
이 우화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착취, 공황, 실업의 문제를 아주 쉽고 짧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미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많은사회주의자들이 이 단편을 유인물에 담아 뿌렸다고 합니다. 후반부의 대안 부분에는 19세기말의 사회주의가 가진 한계도 조금엿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전반부의 묘사가 워낙 탁월해서 재미있게 읽을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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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의 우화(The Parable of the Water-Tank)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



아주 건조하고 메마른 나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민중들은 물이 부족해 몹시 힘들어했다. 그래서 민중들은 아무 일도 하지못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오로지 물만 찾으러 다녔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물을 찾지 못해 죽어갔다.
그 럼에도 그 나라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활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에 물을 모아저장해놓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자본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민중들이 자본가들에게 가서, 물이 너무 필요하니 마실 수있도록 모아둔 물을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꺼져, 이 멍청한 인간들아! 왜 너희들한테 우리가 모아놓은 물을 줘야 되나. 그러면 우리도 너희들처럼 될 거고, 너희들과 같이 죽어갈 텐데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우리의 노예가 되면 물을 주겠다.”
그러자 민중들이 말했다.“물만 주신다면 저와 제 아이들은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 임금과 물가
이제, 자본가들은 자신의 종족 안에서 지각 있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자본가들은 우두머리, 관리자와 함께 노예들을 모아놓고명령을 내려서, 일부는 샘에서 물을 퍼내고, 다른 이들은 물을 나르고,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샘을 찾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물은 함께 한 곳으로 모았다. 자본가들은 이 물을 담아놓을 거대한 수조를 만들었다. 그 수조의 이름은 시장이었다. 민중들은,자본가들의 노예들조차도 물을 구하러 그 시장으로 갔다. 자본가들이 민중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모든 물은 이 수조에 담을 것이다. 이것이 시장이다. 그리고 물통 하나당 우리는 너희에게 1페니씩주겠다. 그리고 너희와 마누라. 아이들이 마실 물을 우리가 주겠지만, 너희는 우리에게 물통 하나당 2페니를 내야 한다. 그차액은 우리의 이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익이 없다면 우리는 너희를 위해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모두 죽게될 것이다.”
민중들은 이해하는 게 둔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이게 좋아보였다. 민중들은 많은 날들을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 날랐고, 지어나른 물통 하나마다 자본가들은 1페니씩 주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바로 그 수조에서 다시 퍼서 민중들에게 줄 때는, 저거 봐라,민중들이 자본가들에게 물통 하나당 2페니씩 지불했다.
그리고 많은 날들이 지나자, 그 수조가, 즉 시장의 꼭대기가 넘쳐흘렀는데, 이는 민중들이 한 통의 물을 부으면 겨우 물 반통을살 수 있을 정도의 돈 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매번 물을 가져올 때마다 남게 되는 초과량 때문에 수조가 넘쳐흘렀다.민중은 많지만, 자본가들의 수는 적은 데다, 자본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수조는 넘쳐흘렀다.
그리고 물이 넘치는 것을 알게 된 자본가들이 민중들에게 말했다.“내 말 들어봐. 수조, 아니 이 시장이 넘쳐흐르지? 앉아 봐. 그러니까 말이야, 차분히 앉아서 수조가 빌 때까지 더 이상 물을 퍼오지 말아라.”

- 실업
민중들은 자본가들이 물을 구입하지 않아, 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자, 물을 살 수 있는 돈이 다 떨어져서 자본가들에게서물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가들 역시 아무도 물을 사가지 않아서, 더 이상 이익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알게 되자, 곤경에 빠졌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사람들을 큰 길과 샛길, 산울타리로 내보내서 소리치게 했다.“목마른 사람이 있거든수조로 와서 우리한테 물을 사시오! 물이 넘쳐 흐리고 있소!”
자본가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다.“지금은 물이 잘 안 팔리는 불경기야. 광고를 해야겠어.”
하 지만 민중들이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고용하지 않아서, 물을 살 돈을 만들 방법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물을 사겠소?당신들이 예전처럼 우리를 고용하면, 우리도 목이 마르니 기꺼이 물을 사겠소. 그러면 당신도 광고를 할 필요가 없을 거요.”
그러나 자본가들은 민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미 수조, 다시 말해 시장이 넘쳐흐르는데, 우리더러 물을 퍼오라고 너희를 고용하라는 말이냐? 물부터 사라. 그래서 수조가 완전히 비면 너희를 다시 고용하겠다.”
다 시 말해서, 자본가들이 물을 퍼올 민중들을 더 이상 고용하지 않으니까, 민중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퍼다 놓은 그 물을 살 수없었던 것이고, 민중들이 자신들이 예전에 퍼다 놓은 물을 살 수 없게 되니까, 자본가들은 물을 퍼올 민중들을 더 이상 고용하지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이런 말들이 퍼졌다.“공황이다.”
민중들의 목이 탔다. 그것은 이 나라가 조상들이 살던 때처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물을 찾을 수 있도록 열려있지 않았기때문이었고, 자본가들이 모든 샘물과 우물과 수차(水車)와 물그릇과 물통을 모두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수조에 모아져있는 물을 살 수 없었다. 그것이 시장이었다.
그래서 민중들이 자본가들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보쇼. 수조는 넘치는데 우리는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소. 그러니 우리한테 저 물을 주시오. 안 그러면 우리가 죽을 판이요.”
하지만 자본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겐 안 되지. 저 물은 우리 꺼야. 우리한테 돈을 내고 사지 않으면 절대로 물을 못 마셔.”그리고 자본가들은 그들의 방식에 따라 서약하듯이 못을 박았다. “사업은 사업이야.”
하 지만 자본가들은 민중들이 더 이상 물을 사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면 자신들에게 이익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본가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을 막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 만들어왔던이익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이익을 만들 수 없는 것 같아. 우리의 이익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고, 우리가 가진 것때문에 우리가 가난해질 수 있지? 점쟁이한테 사람을 보내서, 이 문제를 해석해달라고 하세.”
그리고 사람을 보냈다.
당시 점쟁이들은 사악한 말에 통달한 사람들이었는데, 자본가들이 가진 물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물을 가지고자신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살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가들을 위해 민중들에게 말을 해주었다. 자본가들은 그다지 이해가 빠른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점쟁이들은 미리 할 말을 준비하지도 않아도, 주어진 임무를 잘 해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점쟁이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문제는 수조는 가득 차 있는데도, 왜 민중들이 더 이상 물을 사러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떤 점쟁이가 이렇게 답했다. “그건 과잉생산 때문이에요.”
다른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다.“과잉공급 때문이에요.”
하지만 두 점쟁이의 말은 사실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다른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태양의 흑점 때문이에요.”
그러나 다른 점쟁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건 과잉공급 때문도 아니고, 태양 흑점 때문도 아니고, 악마가 지나가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신념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 평정
점쟁이들이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서로 논쟁을 하는 사이에, 이익만 아는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그러다 깨어나서는 점쟁이들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당신들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우리는 아주 편안해져. 이제민중들에게 가서 그들이 편안해지도록 이야기를 해줘. 그래야지 그들도 좀 쉬고 우리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잖아.”
하지만 점쟁이들은, 그 무시무시한 학문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내들조차도,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명칭을 달고 다니는 그들조차도,민중들이 돌을 집어던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서 그들 앞에 나가는 걸 질색했다. 민중들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점쟁이들이 자본가들에게 말했다.
“주인님, 우리의 재능이 참 묘한 것이, 여러분처럼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고, 편안한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서 평안을 찾습니다.하지만 목마르고, 배고픈 자들은 그 안에서 평안을 찾지 못하고, 우리를 비웃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풍족한 사람이 아니면 우리의지혜가 닿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란 말이야! 우리 명령을 안 따를 거야?”

- 풍요로 인한 굶주림
그래서 점쟁이들은 민중들 앞으로 나가서, 과잉 생산의 수수께끼와 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목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너무 많기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민중들에게 태양의 흑점을 염두에 둘 것과, 또 신념이 부족하기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점쟁이들이 자본가들에게 이미 말했던 그대로였다. 민중들이 보기에는점쟁이들의 지혜가 쓸데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민중들은 그들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꺼져, 이 대머리 새끼들아! 우릴 갖고 노는 거야? 풍요가 굶주림을 낳았다고? 너무 많아서 아무 것도 없다고?”그리고 민중들은 돌을 집어서 그들에게 던졌다.
자 본가들은 아직도 민중들이 불만을 쏟아내며 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민중들이 수조로 와서힘으로 물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민중들 앞으로 성자들을 내보냈다. (하지만 그 성자들은 가짜목사들이었다.) 성자들은 민중들에게 얌전히 지내고, 목마르다는 이유로 자본가들을 못 살게 굴지 말라고 말했다.
이 가짜 목사인 성자들은 민중들에게, 이 고통은 하느님이 그들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보낸 것이며, 그들이 인내하고 물에 대한욕망을 참아내고 자본가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고통이 지나간 후에 자본가가 사라지고 물이 풍요한 나라로 오는 귀신을 막아주겠다고설교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확실히 신의 예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예언은 자본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항상자본가들에 반대하는 말씀이었다.

- 자선
이제, 민중들이 계속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점쟁이나 가짜 목사의 말에도 잠잠해지지 않자, 자본가들은 손가락을 수조에 흘러넘치는물에 살짝 담가서 그 끝을 적셨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묻어있는 물방울을 수조로 몰려온 민중들에게 확 뿌렸다. 그 물방울의이름이 자선이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의 맛은 엄청나게 썼다.

- 무력
자본가들이 다시 상황을 보자, 민중들은 점쟁이나 가짜 목사인 성자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자선이라고 부르는 물방울도 먹히지않고,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분노하며, 수조로 떼거지로 몰려와 힘으로 뺏으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자본가들은 회의를 열어서 민중들 사이로 비밀리에 사람들을 보냈다. 민중들 중에서 전쟁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사람들을 따로 불러서 교묘하게 그들을 구슬렸다.
“자, 이리 와봐. 자본가들하고 연합하지 않을래? 네가 자본가들의 부하가 되어서, 그들을 섬기고 민중들에 맞서 싸우면, 사람들은수조에 침입하지 못 할 거야. 그러면 너는 물을 많이 가질 수 있을 테고, 너와 네 아이들이 목말라 죽지 않을 거야.”
그러자 힘센 사람들과 전쟁에서 기술을 갈고 닦은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설득하도록 묵묵히 듣고만있었는데, 이는 목마른 삶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가들에게 가서 그들의 부하가 되고, 널빤지와 칼을지급받았다. 그리고 자본가를 위한 방어부대가 되어서, 민중들이 떼를 지어 수조로 몰려들 때마다 그들을 내려쳤다.

- 사치와 낭비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자 수조 안의 물의 수위가 낮아졌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그 물로 분수와 물고기용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목욕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본가들과 아내들, 아이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물을 낭비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수조가 빈 것은 알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공황은 끝났다.”
그 들은 부하들을 내보내서 물을 다시 길어와 수조를 채울 민중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민중들은 물을 길어와 수조에 담고 물 한통마다 1페니를 받았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바로 그 물을 다시 퍼서 민중들에게 줄 때는 2페니씩 받았다. 거기서 그들은 이익을챙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수조는 예전처럼 넘쳐흘렀다.

- 선동가들
그리고 이제, 민중들이 수조를 넘쳐흐를 때까지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자본가들에 의해 낭비될 때까지 목말라하는 세월이 수없이지났을 때, 그 땅에는 선동가라 불리며 민중들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민중들에게, 민중이 함께 힘을 모으면,자본가들의 노예로 살 필요도 없어지고, 더 이상 목마름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자본가들에게는 이 선동가들은 눈의 가시같아서, 이들에게 십자가형이라도 시켜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민중들이 두려워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 했다.

- 선동가들의 이야기
선동가들이 민중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얼마나 더 거짓말에 속고, 그 거짓말을 믿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겁니까? 여러분들이 지금껏 자본가들과점쟁이들에게 들어왔던 모든 말들은 다 그들이 교활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언제나 가난하고비참하고 목마르게 살아야 하는 게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그 성자도 마찬가지에요. 두고 보세요. 그들은 거짓말과 신성모독을저질렀으니 하느님이 다른 이들은 모두 용서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쓰라린 심판을 내리실 겁니다. 어쩌다가 여러분이 수조 안에 있는물을 사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에게 돈이 없다는 게 이유가 될까요? 왜 여러분은 돈이 없을까요? 여러분이 시장이라는 수조에물을 담을 때마다 한 통 당 1페니씩 받고, 여러분이 다시 수조에서 물을 가져갈 때는 한 통 당 2페니씩 지불해야 해서,자본가들이 이익을 챙기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여러분의 결핍으로 채워지고 여러분의 궁핍에서 나오는풍요로움으로 만들어진 수조는 넘쳐흐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또한 여러분이 더 많이 고생할수록, 여러분이 더 열심히 물을찾아서 나를수록, 상황은 더 최악으로 나빠지기만 할 뿐 더 좋아지지 않는 것은 자본가들의 이익 때문인 것이고, 그게 영원히반복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 악마의 모습이 드러나다
선동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민중들에게 말을 하며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민중들이 그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중들은 선동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 신들 말이 맞소. 우리가 우리 노동의 열매를 전혀 갖지 못하는 것은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익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의 노동은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렸고, 우리가 수조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빨리 물이 차 넘치게 되지. 그러면 점쟁이들의말처럼, 너무 많아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하게 되는 거야. 자본가들이 얼마나 독종들인지 잘 봐. 그들의 다정한 자비심은잔혹하기만 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이 우리에게 덧씌운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면 말을 해주시오. 하지만 당신도해방을 향한 길을 모른다면, 잠자코 우리를 놔둬주시오. 그래야지 우리의 비참한 처지라도 잊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러자 선동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알아요.”
민 중들이 말했다. “우리를 속일 생각은 마시오. 이런 일이 시작되던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에 젖어 그 방법을찾았지만, 누구도 해방을 위한 방법을 찾지는 못했소. 하지만 당신들이 방법을 안다면 빨리 이야기 해주시오.”

- 개선 방안
그러자 선동가들은 민중들에게 그 방법을 말해주었다.
“보 세요.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가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이익을 그들에게 바치는 이유가뭐죠? 도대체 자본가들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한다고,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거죠? 하! 자본가들이 여러분들을 모아놓고명령하고, 이리저리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고, 나중에 여러분에게 물을, 그것도 그들이 아니라 여러분이 수고해서 퍼온 물을 주는것 때문인가요? 자, 이제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입니다! 자본가들이 하던 일을 여러분 스스로 하시면 됩니다. 그들이 여러분의노동을 관리하고, 여러분을 모으고, 일을 나눠주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만 하면 자본가들도 전혀 필요 없고, 그들에게 이익을 바칠이유도 없어져요. 여러분이 일한 노동의 열매는, 형제들처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나누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하면 모든사람들이 풍족해지고, 더 필요하다는 불만이 없어질 때까지, 수조는 넘쳐흐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수조가 넘치면, 여러분모두가 즐겁도록 재미있는 분수도 세우고, 연못도 만들면 됩니다. 지금 자본가들이 하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그때는 모든 사람의기쁨이 되는 거죠.”

-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좋아 보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겠소?”
선 동가들이 대다했다. “여러분들 앞에 서서, 사람들을 모으고, 노동을 관리할 사려 깊은 사람을 선택하세요. 이 사람들은자본가들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가들 같은 주인님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형제들이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바를 실천할 관리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익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나눠가질 거예요. 더 이상 주인이나노예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오직 형제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때때로 적당한 때가 되면, 노동을 관리하는 일을대신할 사려 깊은 사람을 여러분이 고르면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당신이 말한 대로 해봅시다. 우리가 해보자고!”

- 모든 일의 결말
자본가들은 함성소리와 민중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점쟁이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가짜 목사들과 자본가들을 지키던, 전쟁기술을 가진 힘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엄청나게 떨었다. 그들은 무릎에서 딱딱 소리가 나도록 떨었다.그리고 말했다. “우린 끝이야!”
하지만 자본가를 위해 예언하지 않고, 민중을 동정하던, 살아있는 신의 진짜 목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민중들의 함성소리와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커다란 기쁨에 즐거워하며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리고 사람들은 선동가들이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었던 모든 일들을 해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은 선동가들이 말했던 것처럼 되어갔다.그 나라에는 더 이상 목마른 사람도 없고, 굶주리는 사람도 없고, 헐벗은 사람도 없고, 추위에 떠는 사람도 없고, 궁핍한 사람도없었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은 친구를 보며 말했다. “내 형제여.”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동료를 보며 말했다. “내 자매여.”
그들은 서로서로 형제와 자매처럼, 모두 하나로 단결하여 살아갔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나라를 영원히 축복했다.

[원문] The Parable of the Water-Tank
[번역] neoscrum(http://blog.jinbo.net/neoscrum)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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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이 '매우 멍청하다'는 가정을 붙힌다면 가능한 우화겠지만 말이지. Besides, Money does not grow on Trees!

    2010.02.23 12:35 [ ADDR : EDIT/ DEL : REPLY ]
    • 내 경험상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는' 매우 멍청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2010.02.23 14:43 신고 [ ADDR : EDIT/ DEL ]
  2. 매우 멍청해'보이는'거지 멍청한건 아냐. '필요한만큼 적당히' 현명하면 되는거지. 멍청하게 행동해도 상관없는 상황에서야 말할것도 없고.

    2010.02.23 22:52 [ ADDR : EDIT/ DEL : REPLY ]
  3. 둠코

    하느님은 그 나라를 영원히 축복; 뭐 우화니까.

    2010.02.28 15:33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9. 8. 20. 15:31

하루의 나라 4하루의 나라 4 - 10점
하마나카 아키라 지음, 나카미치 히루 그림/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만화『하루의 나라』를 소개할 때는 쉽게 낚시가 가능하다.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새로운 독립국을 선포하는 내용이야." 이 말만 들으면 무슨 68혁명처럼 바리케이트를 치고 고등학생들 수백~수천명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두발자유 보장하고 입시경쟁 철폐하라~"라고 외치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만화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실은 나도 이렇게 낚였다... ㅠㅠ)

  학교를 점거한 학생들은 달랑 3명. 목적은 친구의 죽음의 진상을 알리면서, 총리의 음모와 야욕을 좌절시키는 것. 경찰들을 막는 힘은 조직된 학생 대오 같은 게 아니라 일본 정부에 의해 비밀리에 개발된 최첨단 병기 C.A.T ― 눈으로 빔을 쏘고 죽죽 늘어나는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뛰어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와 첨단 보안설비가 되어 있는 학교 건물이다.


*
  『하루의 나라』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만화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의식을 독창적인 설정으로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오락적인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첨단병기 고양이 ‘하루’(원래 죽은 친구의 이름인데, 고양이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준다.)의 성장과 액션, 서서히 드러나는 총리의 음모 등은 이 만화를 한 번 잡으면 놓기 어렵게 만든다. 인물이 평면적이긴 하지만 그건 4권밖에 안 되는 단편에서는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 설정에 억지스러운 부분이 좀 있지만 이 정도면 허용 범위다.



*
 『하루의 나라』는 현재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파시즘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악당 우두머리로 등장하는 사카키 총리는 일본이 경제파탄과 외부의 위협 속에 3등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며, 풍요와 긍지를 가진 일등국을 만들기 위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그리고 약한 인간, 멍청한 인간,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놈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말한다.(인권활동가들은 다 처형임-_-;;)
  파시즘은 사회가 불안해지고 사람들이 이를 강력한 국가를 통해 해소하려 할 때 가능해진다. 마지막 권에 나온 몇 개의 컷은 사카키 총리의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꽤 지지를 얻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컷은 비평과 인용을 위해서 따온 것입니다. 잡아가지 마세요 잇힝.
어쨌건 사카키 총리.



  이에 맞서 고양이 ‘하루’는 담담히 웅변한다. "어째서 그렇게 ‘1등’이 되고 싶은 거지? … 늘 위를 추구하는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아. 하지만, 충만함이 뭔지 아는 삶은 그것만으로 풍요로운 거지. 일등국 따윈 되지 않더라도, 인간은 풍요롭게 살 수 있어." ‘하루의 나라’는 일등국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이 만화가 이러한 대안적인 인본주의를 단순히 기존의 보수적 윤리(예컨대, 만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노약자석 양보 같은)와 구별하지 않는 것은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만 말이다.



*
  다시 현실에서 묻는다. 사카키 총리 같은 캐릭터가 없더라도, 명백한 파시즘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1등’이 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인가?
  사실 '하루의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는 파시즘 쿠데타를 저지하고 기존의 사회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구조(그게 제대로 된 사회주의이든 뭐든)를 만들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에리히 프롬과 조지 오웰이 떠올랐다. 파시즘 국가이든, 사회주의-전체주의(프롬 등은 ‘국가자본주의’라고도 부른) 국가이든, 자유주의-자본주의 국가이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인간은 소외당하고 억압받고 있다고 말한 그들이.
http://gonghyun.tistory.com2009-08-20T06:29:300.31010






다산인권센터 소식지에 원고청탁 받아서 쓴 글인데, 실제로 넘길 때는 분량 제한 때문에 더 줄여서 넘겼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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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양이 스킬이 캐사기

    2009.08.21 11:25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8. 6. 04:32

다 쓰고 나서도 세상에 뭔 캠프 자료집으로 A4 7페이지짜리 글을 쓰나... 싶었던a
그냥 혼자 쓰다가 불 붙어서 마구 써버린...





‘19세 미만’은 왜 ‘미성년자’가 되었나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청소년인권캠프 별세상(2회) “별을 낚다!”



  청소년들에게는, 법적으로 붙어 있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미성년자”라는 이름이죠. 민법에서는 만 20세 미만, 청소년보호법에서는 만19세(사실상 연20세) 미만, 공직선거법에서는 만 19세 미만 등등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미성년자”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으세요? 미성년자라는 말은 ‘아직 성년이 아닌 사람’, ‘아직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 ‘미성숙한 나이의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마치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같은, 괴악한 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한 마디로 차별적인 말이란 거죠.


‘미성년자’라는 굴레

  어떤 사람들을 “미성년자”로 이름 붙이고 “미성년자”로 대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미성년자”라고 불릴 때 그 사람들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다른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의 강요를 당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교육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 참여 같은 문제에서는 전사회적 왕따를 당합니다. 그들은 학교의 교육과 가족의 보호·통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니까, 성숙한 사람들이 그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항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이 항상 더 옳을 텐데. 그러니까 학교를 운영하든 자기 삶의 진로를 결정하든 정책을 결정하든, 그들은 쏙 빼놓고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들은 혹시 무슨 사고를 저지르거나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까 밤에는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보호자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거나 외박을 하거나 하면 안 되죠. 돈을 주거나 돈을 벌 수 있게 했다간 잘못 쓸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조금씩 용돈만 주거나 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그들을 위해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니까 혹시 책이나 그림이나 영화 같은 걸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잘못된 걸 따라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다 미리미리 금지해둬야 합니다. 성행위? 섹스하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거나 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당연히 다 금지해야죠! 그렇게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성욕이나 성적 자유?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청소년의 섹스할 자유? 그게 뭐임? 먹는 거임? 우걱우걱.
  특히 한국에서 더 두드러지는 건데, 이 그들에게는 한 가지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이라는 짐이죠.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미성년자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서, 경쟁은 옵션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국처럼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미성년자’는 자연스러운 걸까?

  그런데 정말로 당연한 일일까요?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게 ‘미성년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꽤나 깐깐한 제한을 가하고 학교에 반드시 다녀야 하게 만드는 등의 일이 꼭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지금 당장 다른 나라들을 봐도 서로서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는 데 나이에 따른 제한이 별로 없다던가, 선거권이 만 16세라던가, 15~16살만 되어도 원한다면 독립해서 살 수 있다던가, 12살에 애를 낳아도 너무 큰 부담 없이 양육할 수 있다든가…. 학교나 교육제도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최근에 좀 뜬 『88만원세대』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주로 한국 20대들의 현실을 다룬 책인데요, 심심찮게 10대들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챕터 제목이 「첫 섹스의 경제학 -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입니다.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 이 말 속에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동거를 상상할 수 있는 10대”들이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실제로 다른 몇몇 나라들에서는 16~18세만 되어도 섹스·동거·독립을 비교적 자유롭게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제도들은 사회가 만든 것입니다.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아동’, ‘어린이’, ‘청소년’, ‘미성년자’ 같은 개념과 제도들이 생겨난 건 500년도 안 된 일입니다. ‘학교’처럼 거의 모든 아동·청소년들이 꼭 다녀야 하는 교육기관이 생긴 건 그보다도 더 가까운 과거의 일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100년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이전에도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다르게 대하는 게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고, 대체로 지금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청소년들의 뇌가 어쩌구저쩌구 호르몬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들을 많이 듣습니다. “주변인”이니 “질풍노도의 시기”이니 “자아정체성 확립”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해가며 청소년들을 규정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나 책 속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들은 100% 과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화가 다른 여러 사회들을 살펴보면,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별로 없는 사회,  ‘질풍노도의 시기’ 같은 것 없이 아주 평화롭게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사회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10대’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고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더 문제행동을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사회에 참여할 권리, 경험을 쌓을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더 의존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능력이 부족하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권리와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식의 뷁스런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오히려, 정말로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성욕이나 성적인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하는 15~16세부터 섹스, 결혼 등이 가능한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글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합니다. 청소년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며 통제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뇌가 아직 덜 익었다거나 그들의 몸 속에서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감정과 행동을 조장하는 호르몬들이 마구 분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 18세까지는 판단력도 없고 멍청하고 비합리적이다가, 만 19세가 넘으면 판단력이 갑자기 짠하고 생기고 삶과 사회에 진지해지고 합리적으로 변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이 사회가 그따위로 생겨먹은 탓입니다.


왜?

  그럼 왜 이 사회는 이따위로 생겨먹은 것일까요? 설마 특별히 어른들이 못돼먹어서, 성격이 안 좋아서, 변태라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동·청소년들의 노동이 금지되기 시작한 때, 청소년들에게 학교에 다닐 것을 요구하고 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만들어갔던 때를 살펴보면 대충 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학교 제도는 아동·청소년들의 삶을 억누르고 ‘배워야 하는 존재’인 ‘미성년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초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아이, 어린이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고 중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청소년기가 보이게 되었거든요.

  처음 유럽에 도시가 생기고 공장이 생기던 때는, 참 비참하고도 끔찍한 노동 착취가 흔하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공장들이 적은 돈을 주고 아이들을 고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임금이 적었던 건,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약한 입장이었고, 따로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숙련되지도 않은 노동자로 주로 단순한 업무에만 고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하루에 최저 10시간 최대 19~20시간씩(!) 일을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하고 위험한 노동에 목숨을 잃었고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10대 후반일 때도 있었습니다.(즉, 노동자들이 20살이 되기 전에 죽었단 이야기!) 빈민이나 노동자 계급에 속했던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한 노동 속에 몸을 망치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응하여, 일정 나이 이하의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받도록 하는 법률들이 18세기 이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는 취학 증명서를 가져오는 아동·청소년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같은 게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아동 노동 금지, 의무교육 도입 등이 이루어진 데는 두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런 끔찍한 현실을 바꾸고 (아동을 포함해서)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게 해야 한다는 노동자들 자신과 양심적인 지지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교육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권리 사상의 발전이었습니다. 참 바람직한 일이죠? 물론 직접 노동 착취를 없애고 사람들이 굶어죽을 걱정 없이 살게 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한 궁여지책일 수도 있지만요.
  반면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노동력이 필요해졌다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더 순종적이고 규율을 잘 따르며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 수 있으며 사회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들 사이의 전쟁 등으로 인해 국가의 말을 잘 따르고 군사화된 국민들이 필요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1800년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지역)에서 시작된 국가주의·군사주의 교육에서 온 것입니다. 당시 프러시아는 중앙집권화된 학교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프러시아의 교육은 순종적인 군인·노동자·공무원을 만드는 교육이었고 복종과 규율을 가르치는 교육이었습니다. 독일 민족주의 교육의 대표자인 얀이라는 사람은 민족부흥을 위해 의무교육이 필요하며, 민족주의적 의미가 없는 교과목의 폐지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이런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적도 있지요. 그밖에도 그 시대에는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학교 교육이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정부에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도입되고 ‘아동’이나 ‘청소년’이나 ‘소년’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오던 1800년대 후반~1900년대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던 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대한제국-한국에서는 청소년, 학생들을 민족의 전사이자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고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세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까지 거치고 난 이후 한국에서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1954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쓴 글을 보면 “여러분이 학교에서 학업을 닦는 목적이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어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성년자’ ― 청소년, 아동들을 따로 구분하고 학교 교육을 받게 한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단 겁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때에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이는 것이 국민으로서 청소년들의 의무라고 밝히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청소년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던 때입니다. 청소년들, 학생들은 조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인적 자원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그 당시 청소년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알고 판단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반공주의와 애국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그건 청소년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다기보다는 청소년들에게 획일적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프러시아 교육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육에서도 군사주의·군국주의적인 모습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과 십 년 전까지도 있었던 ‘교련 과목’도 그렇고, 우리가 체육 시간이나 운동장 조회 때 하게 되는 줄 맞춰 서는 훈련 등도 그렇습니다. 두발복장규제는 특히 군사주의적 냄새가 많이 나는데, 때로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미리 준비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심한 것 또한 청소년들을 이 사회에 순응하게 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리고 한때는 한국에서는 청소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심각했습니다. 섬유, 옷, 봉제 등이 주력 산업이던 1960~70년대에는 평균 15~18세 나이의 청소년들이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재봉틀을 돌리고 마름질을 하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이런 노동 현실에 분노하여 항의하다가 분신하여 돌아가신 노동자 분이 바로 전태일 씨(본인도 17살부터 일을 했던)였습니다. 이러한 아동 노동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산업 구조가 바뀌고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이런 패턴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국·동아시아만의 특색도 없진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유교 문화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인데요. 독특한 ‘가족주의’라거나 교사에 대한 독특한 존경, 나이에 따라 존댓말 반말이 갈리는 등 나이 구별/차별이 쩌는 나이주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한국 ‘미성년자’들의 삶을 괴롭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지요.
  시간이 흐르고 1990년대가 되면서 청소년들의 노동이 줄어들고, 청소년들이 사회에 참여할 이유(반공, 애국, 근대화 등)도 줄어들면서 청소년들은 자연스레 사회에서 왕따가 되어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그렇게 흔하던 중고생들의 동맹휴학이나 학교 점거, 시위 등이 지금은 별로 없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사회의 주체라기보다는 의미있는 소비계층, ‘알 수 없는’ 젊은 세대 정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촛불이다 뭐다 하고난 뒤에야 사회적 주체로서 청소년들에 대한 좀 진지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 편이지요.

  어쨌건 결론을 정리해봅시다. “왜 이 사회에서는 ‘미성년자’를 따로 나누고 통제하고 학교를 보내고 사회에서 왕따시키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그 이유를 대략 요약하자면, 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동·청소년들이 착취를 당하기 쉬웠는데 이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 ②국가와 기업(자본)이 아동·청소년들을 사회에 순응적이고 명령에 잘 따르고 생산성 좋은 국민·군인·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①번 이유는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지금 학교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큰 영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통제는 어른들이 못돼먹어서도 아니고 변태라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지금처럼 국가가 사람들보다 더 우선시되고, 기업이 돈을 잘 벌고, 지금 같은 가족제도가 유지되도록 하는 등, 이 사회를 계속 꾸려나가기 위해 생겨난 제도인 것입니다. 학교는 우리들이 똑똑해지고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국가와 기업(자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지금은 다른가요? 너무 음모론처럼 들린다구요? 하지만 역사를 봐도, 그리고 지금 있는 여러 정책들의 결과를 봐도, 충분히 그럴 듯해 보이지 않나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는 외침

  그래서 우리가 “미성년자도 인간이다.”라거나 “청소년도 인간이다.”, “청소년에게도 인권이 있다.”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쁜 어른들의 편견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고,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가족·가정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건 어쩌면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에 대한 혁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 쉽게 말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거죠.
  어려운 일이더라도 ‘만 19세 미만’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미성년자’가 아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상상하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지금 같은 학교, 지금 같은 가족·가정이 없는 사회는 어떤 세상일지. 그럼 14살짜리 청소년이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애를 낳아서 기르라는 건지. 8살짜리 아이에게도 투표권을 주자는 건지.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 약자가 아니게 만드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쩌면 청소년들 스스로도 사회경제적 약자의 지위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복이 없어지면 아침에 뭐 입고 나갈지 고민해야 해서 싫다는 청소년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통제와 타율과 귀차니즘이 자유나 개성이나 인권에 대해 거둔 씁쓸한 승리.)

  구체적으로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더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외침은,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포함해서 말이죠. ^^






* 참고문헌
『바보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 청소년 만들기와 길들이기』 고미숙, 권인숙, 김현철, 나임윤경, 박노자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아동」 배경내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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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별캠때 이 글 받고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정작 챙겨 읽지 않고 이렇게 허겁지겁 공현씨 블로그를 찾아 읽었네요. (아수나로에서 찾아봤지요.) 쉽고 재미있는 게 딱 제 타입입니다. 한국이 '특이한 케이스'였다는 것에는 조선말-대한제국초 서툴은 근대화와 그 이후 일제의 폭압이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러니하게 일제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교육도 한 몫을 했고요. 뭐 이런 과정을 통해 뿌리깊게 새겨진, 군인 출신 대통령들을 통해 확고화된 파시즘적 사고가 말씀하신 부분일테고요. 무튼 재미있는 글입니다. '진청모'와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런지요?

    2009.08.09 23:52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데 공교육이 민족주의, 국가주의 성향이 강했던 건 한국이나 프러시아나 프랑스나 미국이나 큰 차이가 있지는 않습니다. 저항적 민족주의적 맥락에서의 특색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한국적 특색이라면 유교적인 문화나 가족주의 특색을 봐야 하지 않을지 싶기도.
      사실 이 글에서는 핵가족의 형성, 가족주의의 문제는 분량상-시간상 거의 쓰지 못해서 좀 아쉽습니다.

      네 얼마든지 퍼가세요 ^^

      2009.08.10 00:05 신고 [ ADDR : EDIT/ DEL ]
  2. 유교와 가족주의의 문화 역시 한국의 특색이라기 보다는 역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공통점이죠. 무튼 잘 퍼가겠습니다. 아, 캠프 때 받았던 배경내 씨의 글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 역시 저의 주체할 수 없는 띨띨함에 의해 잃어버렸지요 ㅠㅠ

    2009.08.10 08:47 [ ADDR : EDIT/ DEL : REPLY ]
  3. Cts

    음... 통제하기 편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 그런 '목적'으로 여러 세대 쌓여온게 지금의 상황인것 같아요

    2011.06.24 18:47 [ ADDR : EDIT/ DEL : REPLY ]
  4. KTX 부다

    엄밀히 말해서 청소년을 미성년으로 분류한 역사는 100년정도에 불과하고 초등학생 아동기의 노동금지도 이보다 조금 전인 19세기 후반에서야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의무교육탄생은 길어야 19세기 중반이전을 상회하지 않습니다. 중학교이후의 의무교육이나 청소년기에 대한 미성년규제는 대략 1차대전이후로 정립하게 됩니다.

    2018.11.04 13:57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9. 6. 13. 01:47

예~전에 새내기 새로배움터였나 무슨 세미나였나를 할 때... 장애인 관련해서 커리를 짜달라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발췌작업을 하다가 블로그에 보관해뒀던 부분이다.

김도현 씨의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는 여러 가지로 내 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던 책인 동시에,
좀 많은 부러음(;)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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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농업 노동과 가내 수공업은 노동을 하는 주체 나름의 작업 방식과 속도, 노동 시간이 유연하게 보장되었고, 노동 규율은 그러한 노동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생산량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한 개인은 대개 하나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수행했으므로, 이러한 노동에 대해 자신만의 통제권을 일정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의 형태 속에서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 즉 사지의 일부가 불완전하거나 청력 또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여졌던 사람들 역시 ‘가족 공동체’ 또는 ‘장원 공동체’라는 집단적 노동력의 일부로 통합되어, 나름의 속도와 방식으로 농업과 가내 공업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토플리스E.Toplis는 《장애인에 대한 복지의 제공, Provision for the Disabled》에서 특히 농인과 맹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느리게 변화하는 산재된 농촌 공동체에서 성장해온 맹인과 농인들은 특별한 준비 없이 보다 쉽게 그러한 사회들에서의 노동과 삶에 동화되어 욌다. 농인은 다른 모든 아동들도 얼마간의 형식적인 가르침을 수반한 관찰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농업적 직무들을 혼자서 수행하는 시기 동안에는 그다지 직업의 폭을 제한받지 않았다. 시각 장애도 혼잡하지 않고 익숙한 농촌의 환경들 내에서는 덜 위험했으며, 반복적인 촉각의 기능과 관련된 일상의 직무들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학습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의 환경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랬다. 근대적인 노동의 환경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근대적인 공장 내에서 노동을하는 사람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고 부품이었다. 작업 방식은 획일적이었고 기계의 속도에 사람이 맞춰야 했다.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 식사 시간, 언제 일을 시작하고 언제 끝낼 것인가 까지 강제적으로 정해졌으며, 이러한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주가 정해놓은 노동 규율을 따라야 했다. 생산량은 사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치로 사전에 정해졌다. 개인의 노동은 대부분 전체 생산 과정의 극히 일부분만을 분절적으로 수행했고 그러한 각각의 노동을 전체로 통제하는 것은 별도의 관리자이거나 심지어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방식은 이전의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직무 패턴을 전면적으로 깨뜨리게 된다.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공장 노동에 진입하지 못하고 부랑자로 떠돌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노동의 형태를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며, 어떤 면에서 부랑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저항 방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인 방식의 저항자들 내에는 사지의 일부가 불완전한 사람, 농인, 맹인,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여졌던 사람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과 더불어 이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한 국가의 강제 수용과 훈육이 진행된다. 서구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구빈원workhouse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부랑자들을 수용했던 강제 노역장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할 필요성을 느끼게된다. 핵심적인 목표는 ‘새로운 노동에 적응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적응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질서를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 bodied를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ied를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즉 근대 사회에 들어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구분은 임노동 관계로의 포섭 가능 여부에 따라, ‘불인정不認定 노동’ 계층이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배제 과정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점점 더 심화되어갔다. 기계의 발전 및 생산 과정의 효율화 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할 것을 강제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시간 계산과 표준화된 동작 연구를 기초로 노동의 표준량을 설정하는 테일러 시스템Taylor system과 여기에 중단 없는 생산 흐름을 강제하는 컨베이어벨트를 결합시킨 포드주의Fordism 생산방식은 하나의 생산방식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노동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이 더욱 더 합리화되고, 육체의 정밀한 기계적 동작과 더 빠른 연속성의 반복을 요구받게 되자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 더욱이 그들의 육체적 손상에 합리적 편의reasonable accommodation를 제공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직무를 수행하기에 더욱 부적합했으며 임노동으로부터 점점 더 배제되어 갔다. 그래서 산업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표준적인 노동자의 육체에 부합하지 않아서 노동력이 효과적으로 지워지고 임노동으로부터 배제되는,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냈다.


(김도현(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1부 장애를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발전과 장애 문제」.  pp.69-73.)


 


 “우리의 신체성身體性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1960~1970년대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 운동에서 핵심을 형성했던 푸른잔디회青い芝の會 등의 뇌성마비 장애인 단체들이 외쳤던 정치적 구호이다. 동의대학교 유동철 교수가 앞서 언급한 <장애운동의 성과와 과제>라는 글에서 “중증 장애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속성상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 역시 그러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식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애인들의 실존實存 자체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주체적 인식은 장애인들이 자본주의에서 배제‘당하고’ 있다는 수동적․객체적 인식과 그 질을 달리한다. 단순히 배제만이 문제라면, 장애인들을 현재의 사회에 통합시키면 된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 자체가 장애인의 실존 자체와 충돌한다면 그러한 통합은 새로운 체제,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장애 문제 해결의 대원칙처럼 얘기되고 있으며, 누구도 별 이의를 달지 않는 방향성이 바로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실현이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철저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 왔기에 그 역방향으로의 진전인 통합을 얘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 통합이 어떠한 조건에서, 누가 누구에게로 통합됨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 통합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어 온 주류화mainstreaming이라는 개념, 그리고 여기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정상화nomarlization라는 이념은 결국 비주류인 장애인이 주류인 비장애인의 사회에, 비정상인 장애인이 정상적인 비장애인의 삶의 양식에 맞추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통합은 장애인에게 또 다른 고통과 딜레마를 안겨 줄 뿐이다. 이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지원과 장애인 주체의 노력 속에서 일부의 장애인은 ‘정상화’되어 비장애인의 삶과 함께 흘러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일부의 장애인은 여전히 그 외부에 남게 될 것이며, 이는 잘 해야 장애인 대중 전체에 대한 새로운 분할과 이에 기반을 둔 더욱 공고한 배제가 만들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이라는 구호 속에서 여성은 남성이 차지했던 세계로 편입되고 있지만, 남성도 여성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함께 진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는가를 우리는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은 공사公私 분리라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성적 분업 구조 속에서 기존의 성 역할과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슈퍼 우먼’이 되기를 강요받아왔다. 장애인의 사회 통합 역시 장애인의 몸이 지닌 차이와 경험을 고려한 속에서 비장애인 세계와 장애인 세계의 상호 통합의 과정이어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정의와 관념, 경쟁과 효율성의 원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라는 속도의 문화는 전면적인 혁신과 재조정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장애인이 지금까지 건설해 온 문명 가운데 장애인에게 가장 적대적인 문명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가야만 할 것이다.

   푸른잔디회의 「행동 강령」 중 마지막 다섯 번째는 “우리들은 비장애인의 문명을 부정한다”이다. 근본주의와 분리주의에 기반한 극단적 입장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이러한 강령은 앞의 설명과 결합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보자면 결코 극단적이지 않다. 극소수의 국지적인 사례를 논외로 한다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모든 문명은 비장애인 중심의 문명이었다. 즉 이러한 강령은 자본주의 문명이 비장애인 중심의 문명 중 마지막이 되어야 함을, 새롭게 건설될 세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건설해나가는 문명이 되어야 함을 가열ㄹ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3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의미와 가치.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장애인 운동」. pp.201-204.)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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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 30. 13:25
  루소는 이러한 다두적인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그럴듯한 예에 의존했다. 루소는 두 가지 대립적 이익(세력)이 자신들을 동시에 반대하는 제3의 이익(세력)에 직면했을 때, 이들이 서로 결속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단서를 도출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실존을 전제했고 국민 공동의 적(敵)이 지닌 통합력에 의존했다.
  ......
  그는 국내 정치에도 타당한 민족 자체 내의 통합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따라서 대외 문제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공동의 적을 어디서 발견하는가가 그의 문제였으며, 그러한 적이 시민들의 가슴 속에, 즉 그의 특수한 의지와 이익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해답이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특수의지와 이익들을 합치기만 한다면, 이 숨어 있는 특수한 적이 공동의 적 - 내부에서 민족을 통합하는 - 의 반열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민족 내부의 공동의 적은 모든 시민들의 특수의지의 총합인 것이다. 루소는 아르장송(Marquis d'Argenson)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 가지 특수 이익의 일치'는 제3의 이익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된다. (아르장송은) 모든 이익의 일치가 각자의 이익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

(한나 아렌트. 홍원표 옮김. 『혁명론』. pp.157-158. 도서출판 한길사.)


  인용한 부분에 언급된 루소의 논의는 민족('Nation', '국민', '국가') 내부에서 어떻게 통합을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흔히 고등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할 때 요약본(Summary)으로 접하게 되는 루소의 '사회계약'이 어떻고 '일반의지'가 어떻고 하는 두루뭉실하고 때로는 수사적인 이야기보다 더 핵심적인 논의, 루소의 일반의지론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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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사회 안에도 저 이야기는 적용된다. 요컨대 다른 종류의 사람들, 다른 종류의 단체들, 다른 종류의 운동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은 공동의 '적'이다. 때로 그것은 나치스(마틴 니묄러의 「그들이 온다」는 대표적인 관련 문헌이다.)나 이라크의 미국군대와 같은 매우 위협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때로 그것은 '미국자본'이거나 '초국적 자본'이거나 '보수주의' 같은 조금 더 포괄적인 것이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이름붙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이다.
  때로는, '적'이 있기에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통합을 위해서 '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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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다의어다.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고 시장의 교환가치가 인간을, 삶을 지배하는 체제.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이 상당히 정밀하게 규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는 고전적인 반열에 있다.

  그러나 현재 운동사회에서 다양한 운동들 사이를 오가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대체 무엇인가? 수없이 많은 "자본주의""들"이 있다. 여성을 억압/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있고, 동성애를 억압하고 섹슈얼리티와 출산력을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있으며, 청소년을 억압/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있으며, 생태를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있고... (후략)
  경제적-물질적 욕망과 필요성을 통해서 착취와 억압,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은 명쾌하고 매력적이며 많은 설명력을 갖고 있다. 그러한 설명 방식을 가진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다룬 모델을 차용하거나 거기에서 힌트를 얻음으로써, 다양한 사회운동 영역들이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억압과 착취를 설명하고자 한 것은 타당하며, 역사적인 논거들도 제법 갖고 있다. 현대 사회가 어떻게 그런 구조를 만들게 되었는가, 또는 어떻게 그런 구조를 용인하고 계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고학 말이다. (그런 이론의 명쾌함에 매료되더라도 사회 구조의 복잡성은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하지만 다양한 문제들에 관련된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들은, 그 용례를 두고 따져보면 모두 미묘하게 그 기의와 뉘앙스 면에서 차이들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모두 "자본주의"라는 기표를 갖고 있으며 거기에서부터 여러 가지 혼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적'으로 둔 '좌파'나 '진보' 같은 묶음 개념을 만드는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자본주의'들'을 마르크스의 고전적 '자본주의'(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동은, 가끔씩 그 혼동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헷갈리게 만들며, 또 사람들이 모순되는 것 같은 발언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혼동이 모두 '실수'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한 혼동을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키거나 무의식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좀 더 예민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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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동시에 운동들의 통합이나 연대가, 내부의 특수 이익, 특수 의지들을 '적'으로 삼는 현상을 본다. 이건 중의적으로 풀어볼 수 있다.
  외부에 '적'을 둔 상태에서 통합을 위해 내부의 의지들을 억압하는 것.
  루소의 방식대로 '일반의지' 그 자체가 모든 각자의 특수 의지들을 '적'으로 삼는 것.
  이 둘은 개념적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다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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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의 '적'에 그 근본을 두지 않은 '연대'의 방식을 고민한다. 실제로 운동을 하고 저항을 실천해가는 입장에서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에 '연대'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연대'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연대'가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라져야 한다고 해도 여하간 지금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연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두 '연대'는, 비록 여기서는 같은 '연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더 대안적인, 더 근본적인 '연대'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며, 운동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행동 원리에 대한 고민이다. 운동은 저항인 동시에 대안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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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08. 1. 12. 17:30

고령화 시대와 신자유주의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부족한 복지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노동인구 부족을 우려하여 출산을 장려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한때의 베이비붐이 있었던 만큼 현재와 같은 노령인구 증가 현상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생태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시점에서의 출산율 저하 또한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비정상적인’ 베이비붐 이후 출산율이 저하되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자연스런 현상이라 보면, 고령화의 원인은 결국 사람들이 오래 살기 때문이다. 곧 나이에 비해 정정한 인구도 많을 테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복지예산이나 노동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 연령을 높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퇴직정년을 높이는 등의 방법을 쓰려 하면 이제는 청년실업이 문제가 된다고 난리다. 어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고령화 시대가 되어서 노동인구와 복지예산이 부족하다고 떠들어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실업 때문에 노인들을 일하게 하면 안 된단다. 실업이 많다는 것은, 실업자들이 실업을 ‘선택’한 게 아닌 이상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며 노동인구가 남아돈다는 의미다. 자, 대체 노동인구는 부족한 건가, 남는 건가?


  이와 같은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 즉 고령화 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노년 인구를 노동인구로 끌어들이는 간단한 방법을 쓸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분배 없는 성장”과 “일자리 없는 성장”. 애초에 자본은 이윤을 얻으면 그것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보다 기술이나 설비에 투자, 인건비를 절약하여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이런 경향은 신자유주의(신자본주의) 정책으로 “노동의 유연성”이 제고되고 자본이 국외의 값싼 인건비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함에 따라 더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 이야기되는 고령화 시대의 문제를 고령화 자체의 문제인 것인 양 말하는 것은 실로 그 일부가 신자유주의 경향과 결부된 것임을 은폐하는 서술이다.


  신자유주의와 같은 여러 상황을 배제하고 고령화 시대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그 전망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자국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생태주의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출산 저사망 상태는 고출산 저사망 상태보다 바람직하다. 낮은 출산율을 유지하여 인구를 줄이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은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우리가 고령화 시대의 문제로 꼽는 여러 현상들은 단지 과거의 고출산 저사망 시대(그 정점은 베이비붐이었다.)에 맞춰져 있는 여러 사회 상황(제도나 의식)이 저출산 저사망 시대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제도와 의식을 재정비하여 고령화 시대의 사회 상황에 맞추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통은 있겠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는 아니라는 소리다. 저출산 저사망과 인구 감소의 원칙을 위배하지만 않는다면,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사회가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고령화 속도를 늦추는 선에서 출산 장려 정책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흐름은 저출산 저사망의 고령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사회 변화를 방해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원자화, 만성적인 실업 상태 또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어떤 의미에서는 잠정적인 실업), 그리고 양극화의 심화는 노동인구를 증대시키는 정책과는 충돌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고령화 시대와 세계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두 난관 사이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자본주의에 굴복하여 고령화 시대 자체의 진행을 막으려 발버둥칠 것인가, 아니면 고령화 시대의 추세와 인구감소라는 대원칙을 옹호하여 자본주의에 맞서 그 경향을 견제할 것인가? 혹은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물론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고령화 시대에 맞춰서 변화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지지하는 것이 그대로 자본주의 반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 국가주의적인 발상에 의거한 인구증가 정책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다.







그냥 고령화 시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느낀 약간의 모순 - 노동인구 부족과 청년실업 - 에 대한 글입니다. -_- 그다지 엄밀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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