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 5. 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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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깊게 파고들면 순진무구한 아이 희생자와 타락하고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식의 구도 자체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4.05.14 20:31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14. 4. 4. 13:52

오늘의교육 19호에 쓴 겨울왕국 리뷰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168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또는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 『겨울왕국』(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1000만 관객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원제 Frozen).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것은 일단 순수한 감탄이었다.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니! 머리카락 한 올, 눈송이 하나하나를 보다보면, 『겨울왕국』의 캐릭터들과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그래픽적인 노고를 들였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캐릭터들의 표정은 풍부하고 눈짓 하나 미묘한 입가의 움직임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디즈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이 웅장함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아니라 섬세하고 꼼꼼한 표현으로도 하나의 경지를 이룩했음을 입증했다. 사람들이 『겨울왕국』 캐릭터들에 마치 실제의 존재처럼 몰입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으리라. 물론 『겨울왕국』의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다. 「Let it go」,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등 많은 노래들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에도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시청각적인 쾌감을 흘려보내고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겨울왕국』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임을 느끼게 된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텍스트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잘 완성된 이야기와 같은 뜻은 아니다. 『겨울왕국』의 이야기는 잘 되짚어보면 구멍이 많고, 전개에서 황당한 면도 있으며,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그런 이야기의 구멍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커버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에 대해 아주 간명하게 정리했던 바 있다.

 “여기서 스토리의 유려함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거의 조각이불과도 같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게 큰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분절된 덩어리들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석을 통해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주 교묘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dcdc님 말마따나 다들 '덕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인 거죠.” (www.djuna.kr 2014년 1월 30일)


 
설득력과 짜임새가 아주 좋다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겨울왕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애니메이션을 누구는 성장담으로, 누구는 자매애로, 누구는 익살극으로 받아들였다. 『겨울왕국』이 『라푼젤』에 이어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상을 정면으로 깨고 있다는 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부분 등은 이미 많은 화제가 되었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한 채널A의 무리수 같은 것은 소소하면서도 씁쓸한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인 나는 『겨울왕국』에서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를 읽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숨기며 살아온 엘사

『겨울왕국』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엘사는 '아렌델' 왕국의 공주다. 엘사는 얼음과 눈에 대한 마법의 힘을 타고났다. 그런데 엘사가 어릴 적 동생인 안나를 실수로 다치게 한 사건 이후, '아렌델'의 왕과 왕비인 엘사의 부모는 엘사가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마법의 힘을 비밀로 숨기도록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이 된다. 하나는 엘사가 마법의 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엘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녀라고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부모는 그만 바다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엘사는 부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 방 안에만 있으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다. 그리고 몇 년 후, 엘사는 21살에 여왕으로 즉위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엘사가 갑자기 마법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엘사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안나와 다투다가 무심코 마법의 힘이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사람들은 엘사의 힘에 놀라 엘사를 “마녀”, “괴물”이라고 비난하고, 엘사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튀어나오는 마법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엘사는 그대로 성 밖으로 도망친다. 호수를 얼려서 만든 얼음의 길을 따라, 북쪽 산으로. 그 뒤로 아렌델에는 폭주하는 엘사의 힘 때문에 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추위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렌델에 찾아온 추위를 해결하고 엘사와 화해하기 위해서 엘사를 찾아가는 안나의 모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엘사가 자신의 마법의 힘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사의 마법의 힘이 엘사의 정신 상태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마법을 억제시키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는 데 서툴러지게 만들었다. 안나의 사고 이후에 엘사가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고 감추려 할수록 엘사는 더욱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점점 마법의 힘은 커져가지만 그것을 대하는 엘사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엘사가 절망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수록, 또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힘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엘사의 마법의 힘은 더 심하게 폭주하고 눈보라도 점점 더 심해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듯이.

사실 자신을 숨기는 것은 엘사 본인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성을 뛰쳐나와 산 위에서 「Let it go」를 부르면서 엘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기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살더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쓰면서 살겠다고 외친다. “And the fears that once controlled me can't get to me at all. It's time to see what I can do. To test the limits and break through.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날 구속했던 두려움도 이제 날 전혀 잡을 수 없어.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볼 때야. 한계를 시험해보고 돌파하기 위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규칙도 없어. 난 자유야!)”

찾아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하는 안나에게, 엘사는 자신은 산 위에서 혼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 때문에 아렌델에 추위와 눈보라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엘사가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자, 그때까지는 그래도 다소 진정되어 있던 날씨도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엘사가 완전히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안나의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겨울왕국』 속 엘사의 모습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겨울왕국』의 텍스트 속에는 청소년보호주의에 대해 굉장히 유효적절한 비판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자. ‘너희를 위해서’라며 학교 안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며 지내다가 ‘대학 가고나서’, ‘어른이 되고나서’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므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집과 학교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뒤에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너희는 아직 미성숙하니 정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스무살이 넘으면 정치에 관심도 가지고 투표도 열심히 하라고 하는 식이다. 술담배를 금지하다가 스무살을 넘으면 짠 하고 술도 담배도 스스로 알아서 잘 적당히 하기를 기대하는 식이다. 공부만 하면서 지내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나이값’을 하라면서 자기 삶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 참여의식 등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반면 청소년들이 어떤 권리나 참여의 기회를 요구하면, 과연 니네가 잘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마치 완벽하지 못하면 어떤 권리도 기회도 가져선 안 된다는 듯이.

그러나 엘사가 나이를 먹고 21살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힘을 자동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숨기며 보낸 시간은 엘사의 상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엘사를 숨기며 길렀던 엘사 부모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나가 크게 다치는 것을 본 뒤에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힘을 감추고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연러운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겁을 먹은 엘사 부모의 양육은, 결과적으로 온 나라가 얼어붙는 더 큰 사고를 초래했다. 엘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엘사 때문에 성 안에서 몇 년을 갇혀 지냈던 안나 역시 그렇다. 만일 안나가 미리부터 다양한 연애경험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애정에 굶주려서 연애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품고서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몇 시간만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썸도 좀 타보고 밀당도 해보고 짝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그랬다면, 좀 더 신중하고도 능숙하게 연애 관계를 꾸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고, 청소년들을 공주처럼 키우려고 하는 어른들이여, 기억할지어다. 그러다가 나중에 첫 눈에 반했다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사람이 능력을 가지게 되고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엘사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 방에 숨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자기 자신을 두려움 없이 알아갈 기회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의 이해와 도움이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보호’를 핑계로 한 금지와 통제가 아니다. 나이를 먹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청소년들이 자동으로 성숙해지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을 경험하고 자신을 알아가며, 때로는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와 권리가 필요하다. 실수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감당해주는 안전망과 지원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청소년들은 설령 실수를 한다고 해서 엘사처럼 온 나라를 얼려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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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28. 11:10

http://www.redian.org/archive/68571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반론] 서윤님의 레디앙 칼럼 글에 대한 반론



By   /   2014년 3월 28일, 9:50 AM 



제가 활동하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2014년 3월 21일, “반핵과 탈핵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수나로 인천지부가 3월 20일에 열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 김익중 교수 초청 탈핵 강연>에서 이 행사의 표어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배포한 전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같은 내용을 온라인에도 게시한 것입니다.


그 뒤에 아수나로의 회원이며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도 가입되어 있던 이가 그 글을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 올리면서 페이스북에서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글을 행사 주최 단체들 중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YWCA 등의 홈페이지에도 올려뒀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녹색당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2012년 선거 당시 이 구호에 대해 아수나로가 문제제기한 적이 있으며 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이에 대해 서윤님이 이런 글(관련 글 링크)을 레디앙에 쓰셨더군요. 일단 여기에서 교사와 학생 관계를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예시”라면서 끌어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는 관계도 아니구요. 혹시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후덜덜, 무서운 일입니다만. 글 전체를 살펴보면 아무래도 교육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탈핵운동의 표어 이야기가 그냥 예시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럼 해당 표어에 대한 논쟁 이야기를 굳이 가져올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논변이 산만하고 예시가 부적절하며 추상적인 개념에 휘둘린 글이라 하겠습니다.



평등은 교육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하간 해당 글의 가장 주된 논지가 “교사와 학생은 평등할 수 없으며 위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니 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서윤님은 평등이라는 개념이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들고 오면 여러 논의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 글이 상위 개념들을 끌어와서 논의를 거칠게 퉁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서윤님은 한편으로는 ‘평등’이나 ‘교육’ 같은 개념을 본인이 생각하는 좁은 의미로만 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도 도대체 무엇이 평등인지, 같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다르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사용할 때 세밀한 정의가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런 논의 없이 ‘평등’을 ‘동일’하거나 ‘등가의 교환(호혜)을 할 수 있는 관계’라는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글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이 ‘역할’과 ‘위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학교-교육에서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역할이 다른 것이 곧 상하관계, 위계를 만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역할과 자리의 다름이 교사를 학생의 ‘윗사람’으로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라는 주장도 ‘베풂의 질과 양’을 대체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왜 그게 ‘동등’해야만 ‘평등’한 건지,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적혀 있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지만 장애인에게 보조를 받는 것은 별로 없으니 장애인과 위계적인 관계를 맺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서로 평등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서도 그다지 서로에게 ‘동등한 질과 양의 베풂’을 주고받지 않고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원래 인간관계 안에서 얻는 이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질과 양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교사가 학생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과 삶의 의미를 느끼고 또 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그 관계에서 교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고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배움’의 관점으로만 그 ‘호혜’를 평가하려 드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현실 속에서 ‘지적 권위’ 등의 문제를 얘기한다면 같이 고민을 나눠볼 만도 하겠습니다만…. 추상적이면서도 자의적으로 정의된 호혜니 평등이니 하는 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위계가 없으면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단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루려는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 서윤님에 따르면 후배, 후임자, 자녀 등과 그 상대 역할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다가올 이야기지요.

근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그렇습니다. 일단 학습자의 경험에 중심을 둔 교육, 무형식 교육 등을 다루는 여러 교육학적 논의들이나 탈학교론의 주장을 깨끗이 무시하는 셈이지요. 혹시 지극히 ‘학교화’된 고정관념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아래 엄기호님의 논의도 역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여야 비로소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가. 평등한 관계에서만 대화가 일어나요.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가정할 때만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요. (……) 그런데 지금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가요? 우정의 관계인가요? 여러분도 처음에 교사가 됐을 땐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교사들 인터뷰를 해 보면 선한 마음으로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100이면 100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분들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그냥 애들한테 가서 장난치고 떡볶이 사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친구 같은 교사가 되려고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우정의 관계이고, 우정의 관계는 평등을 전제로 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면서 학생과 교사를 평등한 우정의 관계로 안 바라봤어요. 친구라기보단 ‘큰형님’이 되려 했죠.” (엄기호, 〈당신은 학생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 [오늘의 교육 제13호(2013년 3․4월호)])


엄기호님의 주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엄기호님은 이 앞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평등’하다고 이야기합니다.(서윤님이 혹시 이것이 자신의 ‘상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서 굳이 덧붙여둡니다.) 그리고 평등해야만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지요.

저는 엄기호님의 논리 전개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성실하게 성찰한 결과이며 ‘들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평등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에서 교육이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평등은 1차적으로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 평등’에 불과하다구요?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바로 실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평등은 누군가가 더 열등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역할’의 차이 등을 ‘위계’, ‘상하관계’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등한 관계에서의 만남과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것입니다.

서윤님이 학생인권조례 공청회에서 들었다는 학생 분의 발언은 아마 그런 생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크 랑시에르 등의 논의도 좀 더 붙여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만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보호주의를 반영하고 활용한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 표어가 아이들에 대한 ‘보호주의’를 활용한 것이고, 탈핵운동 내의 아동․청소년관(觀)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후로는 그냥 ‘청소년’이라고 쓰겠습니다. 10대 또는 0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주십시오.)

그 결과 청소년들을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문구가 되었구요. 물론 이 문구 하나 때문에 청소년들이 배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구를 포함해서 탈핵운동,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회 전반의 청소년관 자체가 청소년들을 배제하지요. 이 문구는 단지 그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시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청소년이 무력하고 약한 희생자, 어른들이 책임지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불려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청소년, 실제로 보호대상 맞습니다.

그런데 비청소년도, 실제로 보호대상이 맞습니다. 이건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특히 방사능 물질의 경우, 정도차가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해롭고 모두가 보호받아야 합니다. 왜 굳이 “아이들”을 콕 집어서 쓰는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따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서윤님의 말처럼 좀 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위계’ 속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주장 아닐까요? 그것은 보호나 보장을 시혜로 보는 것이니까요. ‘보호’가 위계와 차별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를 주체에서 배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이유가 되며, 누군가를 보호대상의 자리에만 위치시키는 ‘보호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A4 1쪽의 짧은 글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믿었습니다.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이라면,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차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전반적인 청소년관을 성찰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설명이 참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징후는 실은 2012년부터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2012년 글입니다.


“SNS에서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녹색당’이란 구호가 적힌 작은 손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 이에 대해 ‘청소년과 아동에 대한 보호주의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생겼다. (……) 다음날 아침에는 ‘청소년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이라고 수정된 손현수막이 사무처에 도착했고, SNS에 바로 사진이 올라갔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깐,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소년 운동을 했던 활동가가 말을 걸어주었다. 본인도 그 청소년 단체의 지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껴안고 가야한다고.” (송준규, 〈풀뿌리들의 놀이터〉, [공동선 104호]. (관련 글 링크) 에서 인용.)


“청소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이라니,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표어입니까? “아이들에게”를 바꾸다보니까 나온 괴작인 셈입니다. 게다가 “청소년과 함께”라니, 그 ‘함께하는’ 주체에서 청소년이 떨어져나왔다는 문제점은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아이를 청소년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어린이’보다는 ‘아이’라는 말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라는 말 자체를 갖고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실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청소년운동도 껴안고(?) 가야 하니까”라는 얕은 발상에서 나온 표어라고 할 만합니다. (옆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청소년운동을 했다는 활동가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저랑 면담 좀 하실래요? ^^)


저는 “아이들”이 “다음 세대”를 뜻한다는 변호가 기만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수백년이나 수천년 후에 40대, 50대, 60대 모습을 한 미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나이가 적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순수함, 무고함, 약함,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 결국 이 표어가 보호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청소년을 동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활용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포스터와 홍보문구에서 보이듯 ‘내 아이’, ‘내 자녀’, ‘우리 아이’를 내세우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탈핵을 주장하는 분들이 거론하는 것이 주로 2030년 탈핵인 것으로 압니다. 다소 유보적 입장의 정당도 2040년을 이야기하더군요. 독일은 2022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먼 미래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룰 수 없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나요? 저는 실제 내세우는 정책을 봐도 그렇고, 저 표어의 효과 면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를 가리킨다는 변명은 문제제기를 피해가려는 불성실한 답변일 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만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연대’도 평등에서부터


이 글을 통해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평등’이나 ‘위계’나 ‘교육’이나 ‘아이들’ 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쓰다가 그것 자체에 경도된 나머지 인정할 부분마저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포함하여 환경-생태-녹색운동에 청소년보호주의나 청소년 차별의 문제가 상당히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생태-녹색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이나 여러 영역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교육단체, 환경단체 등이 다수 참여하는 ‘아이건강국민연대’가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청소년운동과 마찰을 빚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은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을 하고, ‘평등’을 요구하겠지요. 교육뿐 아니라 연대 역시 ‘평등’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이번에 간단한 글을 하나 써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탈핵운동을 하는 분들 등이 청소년운동과 연대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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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8. 30. 02:12

2012년에 옥중에서 썼던 글인데 이제야 올리네요

보호주의 비판 글이긴 한데

동시에 약간 정치적 권리 운동으로 연결되는 부분도 있구요. "어른 독재 타도"라는 문구의 발상 자체가








타도! 보호 독재, 어른 독재





  얼마 전 아이건강국민연대라는 단체가 ‘학생 스마트폰 규제 법안’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체는 몇 년 전엔 청소년 게임 중독 대책이라며 청소년 온라인게임 셧다운제를 주창했었는데, 이번에는 스마트폰이 문제란다. 언론들이 청소년에게 스마트폰은 마약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보도들을 쏟아내는 것도 게임 때와 판박이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청소년 보호’는 오랫동안 상식이었으니까. 때론 만화로부터, 때론 술․담배로부터, 때론 성(性)으로부터, 때론 정치로부터, 아동․청소년은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독재 사회

  그리고 그 상식이 나를 화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뛰고프게 만든 적이 많다. 당하는 입장에서 그 ‘보호’란 높은 확률로 금지와 규제와 차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청소년들은 보호의 대상일 뿐이므로, 어른들은 마음대로 무언가를 규제해도 된다. 설령 그것들이 어른들은 아무 규제도 당하지 않는 것들이더라도.


  솔직히 나는 담배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유해한데 청소년의 흡연만 금지시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어른들에게도 게임․인터넷 과몰입 문제가 큰데도 청소년들에 대해서만 규제 논의가 쏟아지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청소년들에겐 너무나 쉽게 금지와 규제를 들이민다. 청소년운동은 몇 년 전부터 이러 문제들을 ‘청소년 보호주의’라 이름 붙이고 반대하는 활동을 해왔다.


  청소년 보호주의가 지금껏 일방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권익과 의견을 발언할 사회적 힘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부터 입법이나 정책 결정 과정까지,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결정 과정 전반에 참여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적 당사자인 사안에서조차 발언할 수 없다. 설령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목소리를 모으고 권리를 행사할 조직화된 세력도 전혀 없다시피 하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다른 많은 약자들에게 그러하듯,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독재 주체로 말하면 ‘군부 독재’ 대신 ‘어른 독재’, 형태로 말하면 ‘개발 독재’ 대신 ‘보호 독재’ 치하에 청소년들은 살고 있는 셈이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라는 그 흔한 말, 경제발전을 위해 유신독재를 한 거란 얘기와 참 닮은 꼴 아닌가?


  청소년을 규제하는 형태의 정책이 아니더라도 또는 소위 진보적이라 분류되는 정책이더라도 ‘보호 독재’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예컨대 무상급식이 그렇다. 무상급식 논쟁에선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가 주인공으로 표출되고 고려된 적이 없다. 학생들은 항상 수혜자나 피해자로, 차별적 급식 때문에 불쌍하게 피해를 입는 존재 같은 것으로만 나타났을 뿐이다. 또한 학생들이 급식운영 등에 참여할 권리, 음식의 질을 함께 관리할 권리, 스스로 선택하여 먹을 권리 등은 빼놓고 급식을 공짜로 주는 것만 얘기될 때, 그 밥은 어른들이 먹여주는 게 될 뿐이다. 먹는 게 아니라 먹이는, 먹여지는 밥. 인권이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민주주의여 만세

  개발 독재 비판이 개발이나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듯, 나 역시 보호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사람은 폭력, 차별, 착취, 궁핍 등으로부터 사회적 보호를 필요로 한다. 신체적 약자이며,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지는 아동․청소년은 어떤 경우엔 더 많은 보호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보호, 그리고 규제와 금지로 당사자를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보호는 차별과 억압의 세련된 얼굴 아닐까. 그래서 미국의 작가이자 현대 사회의 틀을 벗어나려 시도한 사상가인 리 호이나키는 ‘아동기’를 가리켜 “근대적 형태의 면역결핍증”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건강국민연대 같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그리고 아이건강국민연대의 “국민”에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하긴 그 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가 독재 사회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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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9. 9. 16:09


[성명] 금지와 검열을 남발하는 청소년 보호주의 정책을 중단하라!


  최근, 정부의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에 대한 통제가 심각하다. 지난 5월 제정된 '청소년 온라인게임 셧다운제도'와 그 직후 이루어진 청소년들이 게임을 이용할 때 엄격한 보호자 동의 확인을 거치도록 한 법 제정은 대표적이다. "술", "감기약"(항정신성 약물이란다!) 등의 단어만 들어가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하고 "사람들 햄버거를 처먹으며 나를 비웃어 미간을 찌푸리지마 동정은 됐고"(일통 「거지」) 등의 노래가 내용이 염세적이고 비속어를 쓴단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는 청소년보호위원회 및 음반심의위원회의 블랙코미디스러운 검열은 더더욱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이밖에도 게임물등급위원회의 자의적 등급 심의, 그리고 이번의 청소년 '멀티방' 및 복합게임장 출입 금지 법 제정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처럼 연이어서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보호주의적 정책들을 정부가 계속 밀어붙이고 있으며, 입법부인 국회에서도 이를 견제하려는 이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실정이다. 정부와 국회가 '꼰대'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청소년들의 놀 권리와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고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반인권적이다. 청소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들을 자유가 있다. 문화를 사회가 공익을 이유로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러 의견이 분분한 주제이며, 청소년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놀이에 대해 '합리적이고 필요 최소한의' 제한만을 가하더라도 논란이 있을 수 있는 판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는 자의적이고 불합리하며 폭압적인 규제들을 강행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청소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코딱지 만큼밖에 안 하면서 청소년들의 생활에 대해 금지, 금지, 금지만을 늘려가고 있다. 이러한 청소년 보호주의 정책들은, 어른들이 보기에 '학생답고 단정해' 보이는 모습을 만들기 위한 두발복장규제와 질적으로 다를바 없다. 거기에는 청소년들의 삶과 권리에 대한 진지한 고려는 없고, 청소년들을 통제하고, 어른들의 틀 안에 가둬두려는 욕심 뿐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만의, 또는 지금 이러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주무부처로 지목받고 있는 여성가족부만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셧다운제도가 처음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의 일이었다. 청소년보호법으로 대표되는 청소년 문화에 대한 통제, 보호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음반심의, 게임심의 등이 자의적 기준과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비판은 계속 제기되었다. 수년 전에는 상대적으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심의·검열이 이루어져서 문제가 잘 불거지지 않았던 것 뿐, 그 방식과 기준이 자의적이고 모호하다는 문제는 그대로이다. "모든 문화 예술 행위는 반드시 성경(기독교)의 잣대로 심판된다"(강인중 현 음반심의위원장)라고 대놓고 말하는 괴악한 인물이 심의를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설령 '상식적인 어른들'이 심의를 한다고 해도 그 근본적인 문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청소년들을 염려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는 높지만, 청소년들을 존중해야 한다거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너무나 작은 사회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청소년들 자신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청소년들을 어른들의 눈으로 재단하고 통제하려고만 하는 정책들로 이어지고 있다. 부처 개편에 따라 보건복지가족부, 여성가족부 등을 오가며 청소년 정책을 입안해온 관료들의 꼰대성도, 그리고 청소년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면서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거의 듣지 않거나 요식적으로만 듣는 모습도, 모두가 계속 반복되어온 문제인 것이다.

  청소년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보호"를 내세우며 청소년들 자신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통제와 금지를 외치는 청소년 보호주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러한 정책들을 강행하고 있는 정부와 국회, 특히 그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를 규탄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청소년들의 복합게임장 출입 금지, 온라인게임 셧다운제도, 보호자 동의 확인 등 청소년들의 놀 권리, 문화적 권리를 무시하는 정책들을 즉각 폐지하라!

1. 자의적으로 "청소년유해매체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음반, 게임, 영상 등에 대한 검열을 중단하라!

1. 청소년들의 삶과 문화를 통제하는 청소년보호법을 폐지하고, 대신 청소년을 포함하여 사람들에게 유해한 사회 환경을 없애가고, 청소년들의 인권과 삶의 질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라!

1. 청소년 정책을 '가족'의 관점,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만드는 지금의 체계를 버리고, 청소년을 주체로 보고 청소년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위한 체계를 도입하라!

1. 청소년들에게 전면적으로 청소년 관련 정책 및 사회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


2011년 9월 8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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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5. 21. 09:53
천주교인권위에서 청탁받아서 쓴 원고
사실 좀 급하게 써서 날림티가 난다;;;




보호주의를 넘어서야 다른 길이 보인다

 

혹시 선생님… 당신은 환자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약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정의의 아군인 자신이 지켜주고 있다…. 그 감각이야말로… 바로 차별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차별이란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환자를 지키려하고 있어요…. 이것도 어떤 의미론 차별입니다…. 즉 당신은 환자를 자신보다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선입니다….

- 『헬로우 블랙잭 9』

  한국 사회에서 “~주의”라는 말이 붙은 단어들은 보통은 그렇게까지 긍정적인 의미로 유통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이념 알레르기’ 때문일까? 여하간 여기 제목에 단 “보호주의”라는 말 또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무슨 무역 보호주의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청소년보호주의다. 본의 아니게 “~주의”의 부정적인 용례를 하나 더 만든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뭐 내가 “보호는 필요하지만 보호주의는 싫다!” 뭐 이렇게 “보호”에 “~주의”를 붙이면 주의해야 할 나쁜 게 됩니다, 하는 식의 나이브(naive:소박한)한 말장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굳이 ‘청소년보호’라고 하지 않고 ‘청소년보호주의’라고 한 것은 청소년(=아동, 미성년자 등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 발상이 어느 특정인의 의견이나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제도들로 짜인, 제법 잘 작동하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아, 물론 보호주의와 별 연관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호’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행위나 생각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는 필요할 수도 있지만 보호주의는 싫다!”라는 말이 100% 틀린 것만은 아니긴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청소년보호주의가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체 뭐가 그리도 듣기 싫어서 “~주의”씩이나 붙여가면서 이렇게 태클을 거는 걸까? 분명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가 나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데 싫다고 하는 게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보호가 그렇게 좋기만 할 것일까? 골목골목마다 포돌이와 같이 붙어 있는 안내문에 써있는 말들처럼, 정말로 청소년선도, 청소년보호는 우리 사회와 인류가 지켜나가고 실현시켜야 할 가치일까?

   보호라는 건 보통 누가 받는 것인가? 바로 약자가 받는 것이다. 아무래도 약자에게는 강자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유해환경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신체적/사회경제적으로 약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보호를 제공받게 되며, 그것은 청소년보호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제도나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 ‘보호’의 영역은 실로 광범위해서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수많은 ‘보호’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청소년보호주의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의심이 든다. 이건 보호를 핑계로 한 통제일 뿐인 것 아닐까? 특히 청소년보호주의가 청소년들을 차별하고 청소년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데 동원되는 순간 이런 의문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학교에서 학칙을 정하는 일에 청소년들이 참여할 권리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때조차도 보호주의가 작동하고, 집회에 나가거나 할 때도 보호주의가 적용되면서 “밤10시 이후 안전 귀가”하라거나 “집회장을 청소년유해매체, 청소년통행금지구역으로 하자.”(by 조갑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부당하게 적은 임금을 받는 때에도 보호주의가 내놓는 대안은 하나, 바로 ‘보호자동의서’가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 식의 대안뿐이다.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면서 성에 관한 정보들은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어놓고, ‘동성애’를 청소년유해물로 지정하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차별 속으로 내몰던 것도 청소년보호주의였다.

   왜 보호해준다는 좋은 소리가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걸까? 그건 청소년보호주의가 근본적으로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보호주의의 가장 커다란 전제는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보호주의는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의견과 입장을 고려하기보다는, 비청소년들의 관점에서 청소년들을 어떻게 보호, 선도, 관리할지를 생각한다. 청소년보호주의는, 청소년에 대한 무시, 배제, 차별과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보호주의는 다른 청소년인권 침해를 정당화해주는 알리바이, 변명거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청소년들이 현재 사회에서 약자인 것은 분명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한 측면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청소년들이 약자인 것은 불가피하고도 본질적인 것인가? 그리고 청소년보호주의는 과연 적절한 대안인가?

  청소년보호주의가 적절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점은, 청소년보호주의로 인해 청소년들은 사회적 경험을 쌓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청소년보호주의는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면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경제활동을 할 기회, 성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화 컨텐츠들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하거나 제한한다. 그리고 그 결과 청소년들은 더욱 더 가정과 학교에만 갇히게 되고, 더욱 더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성에 대한 왜곡된 지식만을 얻게 된다. 청소년들이 약자라며 보호해주겠다고 하는 청소년보호주의는 결국 청소년들을 약자인 채로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윤진 교수는 청소년 권리 제한의 부당성을 고찰하면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므로 권리를 제한한다는 것은 청소년들이 경험을 쌓고 실수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를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의 이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약자인 것, ‘미성숙’한 것은 비단 청소년들의 생물학적인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서 약자이거나 ‘미성숙’한 것은, 오히려 사회경제적으로 그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총량이 적다거나 신체적으로 좀 약하다거나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서 약자가 되는 것은 어른(실은 주로 30~50대)중심의 방식 및 가치관,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통제와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의 인식 속에서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엡슈타인 박사는 10대들의 충동적 행동이나 범죄 등에 대해서 10대들의 뇌가 어쩌구저쩌구하는 경향에 반대하면서, 그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의 성(性)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청소년들의 성(性)을 통제하는 이유는, 물론 뭐 16살 전에 임신을 하면 자궁에 질병이 생길 위험이 몇 배 더 높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애 낳아서 잘 기를 수 있냐는 거다. 그런데 임신했을 때 애를 낳아서 기를 수 없는 건 사실 청소년들이 근본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청소년들에게는 경제력이 거의 없고 청소년들의 독립이나 자립을 잘 인정하지도 지원하지도 않는 사회 구조 때문이며, 비혼모나 10대 부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의 성(性)적 권리도 보장하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청소년들이 더 이상 경제적 약자도 아니게 되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청소년들이 학교와 보호자(부모 등)의 품 안에서만 살지 않아도 되도록 지원하고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주의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청소년들의 성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쪽을 택한다. 성교육도 실제적인 것보다는 통제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고 만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요컨대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인데 그 약도 증상을 완화하는 진통제인 정도이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놓고서 “너희들은 약자니까 보호해줄게.”라고 말하지만, 청소년들이 약자인 상태를 극복하게 도와주기는커녕 청소년들이 계속 약자인 상태로 남아있게 하고, 그 와중에 생겨나는 문제들을 조금 완화시켜주는 데 그치고 있다는 소리다. 청소년보호주의는 또 하나의 차별이다.

   그러므로 보호주의를 넘어서는 일은 당장 모든 보호를 철회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상태를 그대로 둔 채로 모든 보호를 철회해버리면, 이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이건 뭐 그냥 죽어나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보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보호주의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진정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다. (온갖 부작용들이 산재한) 진통제나 증상 완화가 아니라, 그 원인을 치료하고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사회적 약자가 아닐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길.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라면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길. 그 길들은 청소년보호주의를 극복한 다음에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보호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청소년들의 문제, 청소년인권을 바라보는 한, 그것은 한 꼰대 ‘비청소년’들의 시혜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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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4. 25. 01:39

청소년보호법, 도대체 넌 누구냐?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보호주의팀

(난다, 주댕, 개굴, 엠건이 청소년보호법을 함께 공부하고 정리한 글이에요. 짝짝짝~^^)


□ 청소년보호법의 탄생

- 1997년 청소년보호법(청보법)이 제정됨.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인터넷을 통한 매체들의 생성, 유통의 범람 가능성) 청소년들이 사회나 문화 속에서 주체로서 한참 등장하기 시작하자,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기에 이름. 



□ 청소년보호법의 주요 내용

○ 핵심 개념들부터 짚어볼까?

청소년: 만 19세 미만의 자(생일이 아니라 연 나이로 계산. 그러니까 20살이 되면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도 청보법 올가미에서 벗어난다는 말쌈~)

청소년 유해약물등: 주류, 담배, 마약류, 환각물질, 중추신경에 작용하여 습관성, 중독성, 내성 등을 유발하여 인체에 유해작용을 미칠 수 있는 약물 등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약물.

청소년 유해물건: 음란한 행위를 조장하는 성기구 등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성관련 물건. 청소년에게 음란성, 포악성, 잔인성, 사행성 등을 조장하는 완구류 등.

청소년 유해업소:

- 출입․고용금지업소: : 청소년의 출입과 고용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인정되는 업소. 노래방, 사행행위영업, 무도장업, 음성대화 또는 화상대화 매개업, 유해매체나 유해약물 등을 제작, 생산, 유통하는 영업 등

- 고용금지업소: : 숙박업, 이용업, 목용장업, 비디오물소극장업 또는 게임제공업, 유독물영업, 만화대여업 등

• 청소년 통행금지/제한구역

- 청소년에게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구역으로 청보법 시행령에 규정을 두고 있음.

- 금지구역은 24시간 통행 금지, 제한구역은 일정시간 동안 통행이 금지되는 구역을 말함. 다만, 친권자, 후견인, 교사 기타 당해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자를 동반하는 때에는 통행할 수 있음.

• 청소년 유해행위

△성적 접대나 이러한 행위의 알선․매개

△접객 행위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장애기형 등 형상을 공중에게 관람시키는 행위

△청소년에게 구걸을 시키거나 청소년을 이용해 구걸하는 행위

△청소년 학대 행위

△손님을 거리에서 유인하게 하는 행위

△이성혼숙을 하게 하는 등 풍기 문란 영업행위나 그를 목적으로 장소를 제공하는 행위

△다류를 조리․판매하는 업소에서 청소년으로 하여금 영업장을 벗어나 다류를 배달하는 행위를 하게 하거나 이를 조장 또는 묵인하는 행위

청소년 유해매체: 청소년보호위원회 또는 각 심의기관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하여 고시한 매체물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기준(법 10조)

• 청소년에게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인 것이거나 음란한 것

• 청소년에게 포악성이나 범죄의 충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

•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형태의 폭력 행사와 약물의 남용을 자극하거나 미화하는 것

• 청소년의 건전한 인격과 시민의식 형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비윤리적인 것

• 기타 청소년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명백히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것

청소년은 성적 욕구를 느끼면 안되나? 범죄 충동은 매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폭력을 미화하거나 시민의식을 해치는 것은청소년에게만 금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선정성, 폭력성, 반사회성, 비윤리성 등등 이 모든 모호한 기준을 판단하는 건 도대체누구야?



□ 청보법 때문에 나타나는 장면들

• 청소년 유해 매체물 표시, 포장, 판매 금지/ 등급 또는 나이 제한 표시

• 청소년 구입을 제지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한 무인판매장치에 의한 전시 금지

• 방송시간 제한, 방송 제한 조치

• 광고 선전 제한

• 노래방, 찜질방 등 청소년 고용이나 출입 또는 시간 제한

• 청소년 통행금지, 제한구역의 지정

• 사이트 접속, 게임물 등 차단

• 청소년 유해행위 처벌

• 기타 등등

☞ 이 모두가 가능해지려면 불심검문(경찰, 업소 주인 등),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이나 선도위원회 활동(청소년선도 띠를 두른 분들이 준 사법권력으로 기능), 사전심의(자율규제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미리 판단) 등이 이루어지기 마련.



□ 청소년보호법의 역할

: “너희에겐 보호라는 올가미가 필요해!”


○ 엄청 쫀쫀한 왕 중의 왕 - 청보법

- 청보법은 ▸유해매체, 유해약물, 유해물건 등이 청소년에게 유통되는 것 ▸유해업소에 청소년이 출입․고용되는 것 ▸청소년을 폭력학대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통해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음.

- 왕 중의 왕: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판단할 때, 영비법(영화및비디오의진흥에관한법률) ,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에관한법률 등 다른 심의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 그만큼 유해성을 판단하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의 힘이 막강.

- 왕 쫀존 시스템: 청보법은 국가에서 가정까지 이어지는 청소년 관리․통제 시스템을 만들어두고 있음. 가정과 사회에는 청소년을 제지, 선도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는 규제 의무를부여하고 있음. 무엇보다 일상 곳곳에 ‘금지된 것’을 탐하는 청소년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도록 만들었다는 점, 청소년스스로도 이 시선을 의식하고 조심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말 쫀쫀하다고 볼 수 있음.


○ 청소년보호위원회

-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심의, 규제하기 위한 정부기관. 다른 심의기관이 청소년 유해 여부를 심의하지 않을 경우 심의를 요청할 수있는 권한 부여. 유해매체물 관련 단체에 자율 규제를 요구하고, 결정 내용의 확인을 청보위나 각 심의기관에 요청할 수 있도록함. 


○ 청보법은 누구를 겨냥하고 있나?

- 청소년보호법의 1차 규제 대상은 비청소년임.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청소년을 통제하는 효과를 낳게 됨. 처벌되거나 처벌의 위협을받는 것은 비청소년이지만, 이로 인하여 원하는 표현물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청소년임. 또한 청소년은 금지된물건, 금지된 장소 등에 접근할 때 비로소 자신이 청소년임을 인식하게 되고 통제와 감시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됨.게다가 이 법을 위반한 청소년에 대한 불심검문, 보호처분 등이 가능해짐.

예) 청소년 통행금지구역, 그 파생 효과

=> 구역 안에 들어갔을 때 청소년은 사회가 허락한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청소년임을 알게 됨.

=& gt;청소년 통행을 금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업주들에게도 유리하고 여성의 성을 매수하는 이들에게도 유리함. 청소년의 존재는 가족의존재를,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 따라서 청소년이 그 구역에서 사라질 때 그 구역은 더 자유롭게 성업할 수 있음.

=> 국가가 청소년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끔 하는 선전 효과.



□ 청보법에 따라 떠오르는 의문들


1) 청소년의 심신에만 독자적으로 유해한 영향을 주는 매체, 약물 등은 존재하는가?

- 청소년기의 생물학적, 심리적 특성을 일반화할 수 있나. 개인 단위로 접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사춘기라는 규정조차 거짓으로 꾸며낸 시기는 아닐까?

- 청소년 유해약물로 지정된 것은 (유해성 판단에 대한 세부 논의는 제쳐두고서라도) 청소년에게만 유해한 것은 아닐 것임. 성장기 청소년의 건강에 더 해를 미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차이보다는 유해약물이 건강에 미치는 해악이 갖는 동일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함. 또 어떤 신체적 조건에 놓인 청소년과 어떤 질환에 걸린 비청소년의 동일성이 더 클 수 있음. 그런데 청소년 대상만을 규제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겐 제대로 된 판단력이 없다는 차별적 인식을 퍼뜨리고 있는 것 아닌가.

-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된 것은 폭력성, 선정성 등이 주로 이유로 제시되는데, 이는 청소년을 우발적, 충동적 범죄를 잘 저지르는 위험한 존재로 은연중에 그려내고 있음. 


2) 유해 매체, 어떻게 규제하는 게 맞나?

- 청소년에게 특별히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매체가 있든 없든, 나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나쁜 매체는 있을 수 있음. 그렇다고그걸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괜찮은가? 표현 자체를 금지하고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표현물에 대한 비판을통해 규제(사회적으로 도태시키는 것)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예) 포르노에 대한 규제 시도

캐 서린 맥키넌(Catharine Mckinnon & 안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은 반포르노 조례 제정운동을 전개.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간주하여 포르노업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조례는 표현의 자유제한이라는 더 큰 해악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성평등의 이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연방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음.

그녀들이 제시한 포르노 판단 기준은 아래와 같음.

△ 여성이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성적 대상이나 상품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수치나 고통을 즐기는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강간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묶이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당한 상태에서 성행위의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종속되거나 노예의 모습으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의 신체가 부분화되어 그 부분으로 여성이 축소된 경우

△ 여성이 본래 창녀인 것처럼 묘사된 경우

△ 여성의 성기가 사물이나 동물에 의해 삽입되는 것을 묘사한 경우


☞ 이에 대해 김도현 교수(서강대 법대)는 포르노가 자행하는 ‘해석폭력’에 대하여 즉자적,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하는 현행 청보법은정의롭지도 못하고 실효성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음. 해석폭력에 대해서는 해석폭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 포르노의 문제점에 대한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야 하고, 왜 문제인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왜곡된 재현에 대해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해주는것이야말로 청소년들이 원하는 ‘진정한 보호’일 수 있음. 


3) 청보법은 실제로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가?

- 청보법은 청소년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보장하지 않음. 청소년들을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해버리는 셈. 그 바람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보지 못했던 청소년들은 또 다른 삶의 계획이 아니라 도피로서의 가출이나 성매매 문화, 상업적 놀이문화를 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정작 ‘보호’가 필요한 곳에 청보법은 없다: 금지된 청소년 유해행위는 청보법이 아니라 다른 법률에 의해서도 충분히 규제 가능. 학교와 가정 등에서 이루어지는 진정으로 유해한행위는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음. 고용 제한 업소를 통해 청소년 일자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외려 비공식 노동을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청보법은 청소년들을 무력화시킨다: 청소년을 계속 약자인 상태로 고정시켜 버리고 비청소년이 대신 보살펴주는 일방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청소년을 취약한 존재로계속 강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 필요한 정보,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고 성찰하고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를제공할 때 청소년의 힘은 커질 수 있음.

- 보호주의에 대한 반대는 모든 ‘보호’, 아니 지원의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아님. 단, 보호라는 것이 청소년을 약자의 상태로 고정시키는 것에는 반대하는 것. 보호의 철회가 아니라 보호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호와는 다른 것이어야 함. 누군가가 보호의 대상으로만 고정될 때 통제가 허용되기 마련. 청보법과보호주의는 청소년의 미성숙함을 전제로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음.


4) 청보법이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될 가능성은 없는가?

- 청보법 자체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객체화하고 있고 청소년의 욕망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측면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세대간 연대를 막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미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 함.

- 대개 유해성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폭력성, 음란성, 선정성, 사행성 등을 떠올리지만 ‘반사회성’은 잘 떠올리지 못함. 반사회성은 청소년의 정치성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

예)1997 년 8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의 계간 회원지 <서울청년> 8호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고시한 적이 있음. 노동자연대가 펴낸 소책자도 반사회성을 이유로 유해매체물로 지정된 적 있음. 이 사례를 볼 때, 청소년유해성을 기준으로 정치사회 관련 출판물에까지 청보법 확대 적용이 가능해질 수 있음.

-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조갑제는 야간 광화문을 청소년 통해제한구역으로 정하자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음.


5) 비청소년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청소년과 성인 모두의 생활세계 전반을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되었음. 생활세계 전반이 감시망 아래놓이게 됨. 비청소년은 청소년 보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으로 짓눌리고 자기 삶과 인권을 반납하는 일들도 일어남.

- 세대간 분리와 불평등: 성년과 미성년을 기준으로 두 세계를 인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새로운 적대전선이 형성. 청소년의 세계가 순수의 세계인 양 허구화.다양한 문화경험 차단. 또한 청소년은 보호의 객체로, 비청소년은 보호의 의무자로 만듦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원천적으로 배제

- 하나의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 국보법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했다면, 청보법은 청소년 유해에 관심을표하고 통제함으로써 비로소 윤리적 시민권이 획득할 수 있도록 함. 사실상 특정 집단의 도덕적 히스테리를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으로포장하는 것이기도 함.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함 : 자체 ‘가위질’유도.


6) 보호주의를 넘어선 지원은 어떻게?

- 청소년의 사회, 경제적 위치를 고려할 때 그이들에게 독자적으로 필요한 지원은 무엇일까? 보호주의를 넘어서면서도 청소년에게 필요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 어떤 맥락에서 보호가 동원될 때, 보호주의로 전환될까?

1) 사람이 가진 보편적 욕구를 청소년에게는 인정하지 않을 때

2) 청소년을 너무 특별한 존재로 일반화할 때(일반화는 대상화와 같은 말)

3) 청소년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을 때

4) 청소년에게 기회 자체를 차단할 때

5) 어떤 부족함 또는 어떤 실수를 청소년이란 존재 전체의 무능력, 미숙함으로 곧장 등치시킬 때

6) 구조나 타인의 잘못을 청소년의 미성숙함, 잘못으로 돌려버릴 때


- 보호주의는 채찍뿐 아니라 당근을 제공하고 있기도 함. 그렇다면, 보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런 ‘당근’을 주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청소년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나?

[예 1]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비청소년보다 가볍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음. 훈방이 된다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대신보호처분(사회봉사, 보호관찰, 소년원 송치 등)을 받기도 함. 가벼운 형사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청소년기에 자유의 박탈이 가져올수 있는 기회의 제한, 심리적 영향 때문. 대신에 형사처분보다 더 사법적 엄격성이 덜 요구되기도 함.

[예 2] 성을 판매하는 10대 여성이 있을 경우, 현재는 그 여성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10대의 성을 매수한 성인만을 처벌하고있음. 보호주의에 기반한 청소년성매매방지특별법이 10대 여성에게는 처벌을 피할 통로를 열어주고 있는 셈.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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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1. 30. 17:53
[문화연대 성명]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청소년보호법 전부개정법률안’ 입법 시도를 중단하라 !


보건복지가족부는<청소년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에 이어 <청소년보호법 전부개정법률안>(이하<청보법개정안>)을 입법예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아동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공고히”하겠다는 법률 제안 취지와는 달리, 이번 <청보법개정안>은 기존 <청소년보호법>이 가졌던 문제점은 전혀개선하지 못한 채 청소년의 문화권 권리를 크게 침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뿐 아니라 문화예술 활동을 위축시킬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이번 <청보법개정안>은 입법예고 이전에 파기되는 것이 옳다.

청소년에 대한 규제와 관리만 더욱 강화하는 <청보법개정안>

보 건복지가족부가 준비 중인 <청보법개정안>에서는 ‘아동청소년’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법률안에 따르면, 만 19세미만의 자를 ‘아동청소년’이라 하되 매체물에 대해서는 만 18세 미만의 자를 ‘아동청소년’이라 정의하고 있다. 또한 이미입법예고된 <청소년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에서는 ‘아동’이란 18세 미만의 자를, ‘청소년’이란 9세 이상 25세미만의 자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아동’, ‘청소년’, ‘아동청소년’이 각기 다른 연령기준을 가짐으로써 타법률 및 정책과의혼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아동청소년’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동청소년’ 개념이 다분히 행정편의적인 발상임과 동시에 청소년을 보호와 규제,관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정부 청소년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2월 국가청소년위원회가 담당하는 청소년 관련업무가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된 이후, 정부는 청소년 정책을 ‘가족 및 보육’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아동청소년정책실’의 설치와<청소년기본법>과 <청소년보호법>의 개정을 준비해왔다. 청소년 정책을 기존의 가족 및 보육정책의 관점에서통합하고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겠다는 정책의 방향이 ‘아동청소년’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관점은 법률개정안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동청소년이용제한매체물’의 심의 기준

<청보법개정안>에서는 ‘아동청소년이용제한매체물’을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청소년보호법>과 마찬가지로, 그 기준이 모호하여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잣대로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의 권리를 침해할가능성이 매우 크다. ‘선정적이고 음란한 것’, ‘범죄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반사회적/비윤리적인 것’과 같은기준은,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구실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권력이나자본에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 문화예술작품과 표현물 등에 ‘아동청소년이용제한매체물’이라는 딱지가 붙을 거란 건 쉽게 예상해볼 수있다. 이는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문화예술 창작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또한 이번 개정안은 ‘유통’의 개념을 ‘매개’로까지 확대하고 있어, 정보통신, 언론, 방송, 스포츠 등 모든 문화적 활동에까지<아동청소년보호법>에 근거한 통제와 규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마치 인터넷을 통한 정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이런 조항들은, 국방부의 ‘불온서적’ 해프닝처럼 결국 국민들의 생각까지 통제하기 위해 인터넷 공간에까지정부의 통제와 규제를 전면화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기존의 <청소년보호법>과 마찬가지로, 이번 개정안에서도‘아동청소년이용제한매체물’의 광고와 선전에 제약을 가하는 조항이 존재하고 있어 악용될 소지가 있다. 즉 ‘공중이 통행하는장소’나 ‘아동청소년의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가 없는 정보통신망’에서 광고나 선전이 불가능하다는 이번 법률개정안이 통과되면,‘아동청소년이용제한매체물’의 모호한 규정과 함께 ? 簫朗臼?사회참여적인 콘텐츠, 정부에 비판적인 콘텐츠가 온/오프라인에 아예게시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셧다운제, 방송프로그램 편성 개입 등 청소년활동 및 문화예술에 대한 총체적인 탄압의 근거가 될 <청보법개정안>

< 청보법개정안>의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요소요소의 독소조항들은 청소년활동 및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탄압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청보법개정안>은 이러한 활동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우선 <청보법개정안>은 방송법의 프로그램 관련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청소년방송프로그램’을 일정시간 이상지상파방송사업자가 편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청보법개정안>을 근거로 아동청소년보호위원회가 방송프로그램의 편성 및 내용에 개입할 여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셧다운제’의 도입 또한 청소년의 문화적권리를 침해하는 규정이다. 밤12시부터 새벽6시까지 온라인 게임에 대한 청소년의 접근을 막겠다는 <청보법개정안>의내용은, 그 실효성의 측면에서부터 문제가 크다. 즉 온라인 게임만(!), 그것도 게임의 내용이 아닌 시간으로 규제하겠다는 발상은아예 위헌소지가 클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부족하고, 나아가 청소년을 대상화하고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결과를낳을 뿐이다.

정부의 이번 <청보법개정안>은 청소년의 문화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문화예술 활동을 위축시킬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이번 <청보법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하여 전 국민에 대한 규제와통제가 전면화하는 근거와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 판단한다. 이번 <청보법개정안>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역행하는반민주적/반문화적 법률이다. <청보법개정안>을 즉각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2008년 11월 27일(목)
문화연대(직인생략)













청소년보호법 폐지 운동,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드는 요즈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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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기많은??? 동방신기랑 비 노래들이 음란하다고 걸렸다고 하던데, 팬들이 가사가 전혀 음란하지 않다면서 엄청 반말하더군. 음란한게 뭐 어때서
    근데 위에 게임의 내용이 아닌 시간으로 규제한다는 발상이 위헌이라고 말했잖아. 여기 쫌 이상하지 않나....
    그런데 난 진짜 가끔 사람들이 막 총으로 사람 쏘고 죽이고 하는 게임 하는 거 보면 저런 건 진짜 못만들게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할 때 많아-_- 게임이나 포르노 때문에 폭행사건이 많이 일어난다고 일반화 하는 건 어렵고 그걸 또 청소년한테만 금지하겠다는 발상도 동의하지 않지만, 아예 아무런 영향을 안끼치는 건 아닌 것 같고...
    하아

    2008.11.30 18:5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문화연대도 왠지 그런 측면에서 내용 규제 그런 이야길 한 거 같긴 한데-
      아님 그냥 지금 내용 갖고서 19금 딱지 붙이고 하는 거에 대해 한 발 물러나서 수세적으로 이야기한 걸 수도 있고 -_-;;


      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옹호와, 시장의 문제와,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항상 골칫거리긴 한데. 그래도 나는 사회적 변화를 통해 재현물들을 간접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긴 해. 과도기적으로는 직접적 규제가 있을 수 있지만-

      2008.11.30 21:42 신고 [ ADDR : EDIT/ DEL ]
  2. 제가 작년 이맘때 레포트를 쓴 주제가 청소년의 폭력적 성의식 형성 위험과 개선 방안.....(이었나^^;;) 이었는데, 그 때 청소년위원회 홈페이지를 봤어요. 물론 지금의 한국이 청소년 성교육 관련 해서는 굉장히 어정쩡한 포지션이긴 한데, 청위에 있는 성교육 관련 자료들의 참고문헌을 보니 의외로 제가 읽었던 책들 (청소년리포트 시리즈등등....)도 있었더라구요. 적어도 평균적인 기성세대들의 생각보다는 청위 자료가 조금이나마 더 깨어있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허허....한 해가 지나니 이런 일이;;;
    (음....그 레포트 내용은 제 PC에 고이 잠들어 있네요;; 다듬어서 블로그에 올릴까도 해봤는데^^;;)

    2008.12.02 09:4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8. 4. 21. 17:20


청소년보호주의 씨에게 보내는 결투장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공현


  안녕하십니까, 청소년보호주의 씨. 앞으로 이름이 기니까 “청보 씨”로 부르겠습니다. 아참, 세상에 “청소년보호주의”라고 불리는 동명이주의(同名異主義)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제가 보내는 이 결투장이 잘못 배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가 결투를 신청하려는 ‘청소년보호주의 씨’가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둬야 할 것 같군요.
  제가 결투를 신청하려는 당신은, 대략 두 개 정도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바로 청소년들을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한다면서 청소년들에게 술, 담배, PC방, 노래방, 야한 것 등을 금지시키고 규제하는 것(청보 씨 ①)입니다.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만 아주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청소년보호법’이라는 눈망울이 아주 초롱초롱하게 눈에 잘 띄는 얼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들을 미성숙하거나 능력이 없는 약자로 간주하고 청소년들을 일방적인 시혜의 대상,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청보 씨 ②)입니다. 편의상, 두 사람(사실은 한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걸지도 모릅니다.)을 그냥 한 사람, 한 팀인 걸로 보고 얘기하겠습니다.



결투를 신청하는 이유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청보 씨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청보 씨가 청소년들의 인권에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입니다. 청보 씨 당신은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라거나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이라는 식의, 청소년들에 대한 현재의 차별과 인권제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런 차별과 인권제한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죠. 또한 당신은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보호’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청소년들의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약하고 청소년들을 사회경제적 약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당신은 청소년들에게만 특별한 보호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비청소년들(어른들)에게도 당연히 필요한 보호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일부 비청소년들을 차별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만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노동에 대해서, 근로기준법은 만19세 이상의 비청소년보다 더 짧은 노동시간 제한을 규정하고 있으며, 청소년의 갱도(굴) 안 노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보호’들은, (특히 노동시간이 더럽게 긴 편인 한국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청보 씨 당신은 이런 모두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청소년들에게만 ‘특별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청보 씨 당신은 매우 발이 넓고 권세도 제법 있어서, 뭇 사람들은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신을 옹호하거나 당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 결투가 정당한 것임을, 당신이 얼마나 불의하고 반인권적인 존재인지를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 이 결투장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저는 당신의 잘못을 좀 더 시시콜콜 지적해드리려 합니다.

  먼저, 청보 씨 당신은 청소년들의 밤 10시 이후 PC방, 노래방, 찜질방 출입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청소년을 규제하는 대표적인 사례지요. 당신은 그 이유로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이 잠을 잘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의 가출을 막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청소년들의 자기 생활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PC방을 예로 들어볼까요? 청소년들이 밤 10시 이후에 PC방에 있을지, 잠을 잘지는 청소년들이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 충고나 권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게임 중독이나 PC방에서 게임하다가 죽는 사건 등은 청소년들에게만 일어나는 사건도 아닐뿐더러, 밤 10시 이후에 PC방만 못 가게 하면 게임 중독이 치료되는 겁니까? 무엇보다도, 게임 중독에 빠지게 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게임 외의 현실이 살기가 어렵다는 것일 터인데, 청보 씨 당신은 이런 현실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단지 청소년들의 ‘도피’만을 강제로 막으려 들고 있습니다.
  찜질방만 해도 그렇습니다. 밤 10시 이후 찜질방 출입금지는, 가출한 청소년들이 종종 찜질방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과연 ‘가정’이 청소년들에게 행복한 공간인지, 혹은 반드시 청소년들은 ‘가정’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 ‘가정’ 밖으로 나오는 걸 봉쇄하려 하고 있습니다. 찜질방에서 “청소년 유해환경”이 조성된다는, 청보 씨 당신이 오랜 로비 활동을 통해 꼬드긴 정부와 법원의 주장도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일 뿐이지요. 청보 씨가 생각하는 “유해환경”은 대체 그 실체가 뭡니까?

  아주 민감한 문제 중 하나인 술, 담배 이야기도 해봅시다. 흔히 청보 씨 당신과 당신의 지지세력들은 술과 담배를 청소년에게 금지하는 이유로 청소년의 건강 이야기를 합니다. 청소년기에 술, 담배를 섭취하는 것이 몸에 더욱 해롭다는 거지요. 하지만 술과 담배는 청소년이냐 청소년이 아니냐를 떠나서 해롭습니다. 특히 담배는 어떻게 이야기하건 건강에 해롭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법률이나 사회통념상으로는, 당신의 활약 덕에, 비청소년의 경우에는 담배가 거의 전면적으로 허용되고 청소년의 경우에는 담배가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비례에 맞는 정당한 조치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술, 담배 등은 비청소년에게는 거의 해롭지 않고, 청소년에게는 매우 해로운 것이란 겁니까?
  당신이 술, 담배를 금지하는 그 배경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비청소년들은 스스로 판단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금연 캠페인이나 절주 캠페인 같은 걸 통해서 알아서 덜 하도록 할 수밖에 없지만, 청소년들은 제대로 된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술과 담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차별적 인식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과 친한 친구인 ‘국가주의’ 씨를 위해서 청소년들의 삶을 통제하고 쓸 만한 도구(노동력, 인적자원 등)로 만들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술을 많이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마 건강에 해로울 것입니다. 술과 담배는 사실 서로 그 작용이나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이 많이 다르므로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청소년이냐 비청소년이냐를 가리지 않고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맞습니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절주나 금연을 하도록 캠페인을 하고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담배나 술의 해악에 대해서 교육하고 그것을 절제하도록 하는 게 맞습니다. 아니, 담배는 아예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정책을 만들던가 하자는 이야기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보편적 정책이 아니라 청소년에 대해서만 술, 담배를 금지하겠다는 청보 씨 당신의 발상은, 청소년에 대한 차별적 인식에 근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차별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흔히 영상물이나 게임물에 7세, 12세, 15세, 19세 등으로 나이 등급을 매기는 ‘검열’도 청보 씨 당신의 주된 업무 중 하나지요. 당신이 들이대는 주된 기준은, “선정성”(얼마나 야하거나 성(性)적인가)과 “폭력성”(얼마나 치고 부수고 죽이는가)입니다. (*야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기에 생략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종종 그 내용이나 맥락이 성폭력적이거나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것인지,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인지, 인권침해적인지 같은 걸 판단하지 않고, 단순히 특정 장면에 사람의 벗은 몸이 얼마나 나오는가, 라거나 얼마나 피가 많이 튀는가 등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고 등급 딱지를 붙이고 있죠. 그렇게 나이를 기준으로 일괄적으로 등급 딱지를 붙이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라거나 가치관이라거나 성격이 변화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이없기까지 합니다. 당신의 이러한 규제는 부당하게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고, 차별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영상 등을 통해 자주 접하거나 하면 폭력에 무뎌지고 폭력을 쉽게 받아들이게/사용하게 된다든가, 성폭력적인 장면을 자주 접하게 되면 강간이나 성폭력에 관대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았느니 판단력이 미숙하다느니 청소년들에게만 그것을 금지하는 이유를 이것저것 이야기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러한 정도의 차이가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을 금지하고 비청소년에게는 그것을 허용할 기준이 되는 걸까요? 그럼 제가 한국의 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들이 성폭력에 관대하거나 무감각한 이유로 군대(징병제)와 더불어 성폭력적/폭력적 영상물에 무제한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특히 청보 씨 당신은 청소년들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들로부터 ‘보호’한다고 하면서, 청소년들을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위험한 존재로 은연중에 규정짓고 있진 않습니까? 그러니까 청소년들은 ‘우발적’이고 ‘충동적’이어서 폭력적이거나 성폭력적인 것들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그것에 자극을 받아서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고 보고 있지는 않냐는 겁니다. 실제 범죄율 통계를 봐도 청소년 집단의 범죄율은 비청소년보다 훨씬 낮고, 또한 어느 집단이 통계적으로 범죄율이 높다거나 낮다거나, 그런 것이 그 집단 전체에 대한 차별이나 인권침해의 근거가 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성폭력적/폭력적 영상물이나 게임물은 그 생산을 규제하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그것을 위해 인권교육을 보급하고 성평등적/비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감으로써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몇 세 이하 관람불가 하는 식으로 딱지를 붙일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청보 씨?

  마지막으로, 청보 씨 당신은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면서 청소년들을 오히려 사회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약자’니까 보호해준다면서, 청소년들이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박탈하고, 정치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침해하고, 경제적으로 돈을 벌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청소년들을 계속해서 ‘약자’로 만드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노동의 문제가 있습니다. 청소년노동에 따라붙은 여러 제약들 중에서도 친권자(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하다든가 일할 수 있는 사업장을 제한해둔 것 등은 청소년들이 알바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청보 씨 당신이 부추긴 청소년들의 노동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걸림돌이 되지요.
  청소년들을 노동착취 같은 것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하면서, 청소년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마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아, 물론 청보 씨 입장에서는 청소년들이 경제력을 행사하게 되면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으로부터도 청소년들을 ‘보호’해서 청소년들이 돈을 자유롭게 못 쓰게 해야겠죠.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안전망이 있는 사회,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기보다는, 청소년들의 권리나 자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약자인 청소년들을 규제하는 쪽이 훨씬 편할 테니까요.
  물론, 청소년들의 노동을 제한하는 제도 등은 자본주의 초기에 아동들에게 가해지던 심각한 노동 착취를 제한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허나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와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는 생활이 어려운 사회 현실을 그대로 방치한 상태에서 청소년들의 노동 그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청소년들을 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친권자에 종속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거나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을 권리는 청소년 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인데, 청보 씨 당신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노동에 대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청소년노동에 대해 ‘보호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곤 합니다. 청보 씨의 영향력이 큰 탓이지요. 하지만 청소년노동에 대해서는 보호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이 사회의 노동 전반에서 일어나는 착취 등을 없애려 노력하고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존재를 걸고 당신을 부정하겠습니다

  청보 씨 당신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자면 이보다 더 끝이 없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에서 줄이고자 합니다. 결투를 신청하는 이 글이 너무 길어지면 이상할 테니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청보 씨 당신은 청소년들을 사회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인권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한다는 몇몇 사람들조차도 청소년들을 약자로 생각하고 뭘 베풀려고 하고 차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은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일 뿐 아니라 바로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지요.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여러 ‘보호’들이 단지 청소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죠.
  청소년이건 비청소년이건 범죄 위험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이라는 특정한 삶의 시기에서, 다양한 ‘첫 경험’들이 있을 수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몇몇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호’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을 차별하고 규제하는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청소년 ‘유해환경’(이 또한 그 실체가 모호하기도 하지만)이 있다면 그 ‘유해환경’을 없애거나 바꾸려고 해야 하지, 청소년들을 그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한답시고 가둬두는 것은 이상한 발상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사회경제적 약자인 현실을 벗어나게 해주는 지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교육, 정당한 대우와 경험, 기회 등입니다.
  저는 청보 씨 당신에게 맞서 싸울 것을 이 결투장을 빌어 선언하는 바이며, 저와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도 ‘청소년 보호주의’를 없애고 새로운 청소년인권을 만들어내기 위해 행동할 것입니다. 청소년인권을 요구하며 운동하는 사람들은, "청소년선도보호"라는 말이 사라질 때까지,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청소년보호주의가 없어질 때까지 그 존재를 걸고 당신을 부정할 것입니다. 결투 시일은 오늘부터 당신이 없어질 때까지이며, 결투 장소는 청보 씨 당신이 있는 곳 전부입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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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소년보호주의를 구글에 치니 제일 먼저 나옴..!

    2015.04.18 16:24 [ ADDR : EDIT/ DEL : REPLY ]
  2. 2008년의 공오글현 씨..

    2015.04.18 16:27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