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09.06.16 10:22
촛불세대? 도전과 자살 사이
[김용민 교수 비판] 계급을 말하지 않는 촛불세대 찬양론



최 근 잘못된 교육제도로 인한 10대들의 자살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고, 그 유형도 참 다양한 편이다. 가장 최근에는 5월 28일,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거짓말을 해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중학생 자매가 자살하였고, 그 외 성적비관으로 고교생이 투신자살, 학교에서 체벌 110대를 맞은 후 자살, 무단 조퇴 후 투신자살 등등.

어쩌면 10대들의 각종 자살 소식은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전 대통령의 '서거'에 비해선 주목해야 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최근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정리한 청소년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06년에 하루 평균 1.8명의 청소년이 자살하였다고 하니,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안타까운 자살과는 정반대 방향으로의 이슈도 끊이질 않는 다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시사평론가이자 한양대 겸임 교수인 김용민씨의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충대신문> 6. 8)」는 제목의 칼럼이 그 대표적 사례인데, 촛불시위 초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사회의식을 형성한 10대가 대학생이 되거나, 혹은 투표권을 얻게 되면 사회가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치에 눈뜬 10대 여학생들’…?

사실 이런 류의 주장은 반복되어 제기되어 왔는데, ‘10대 여학생들이 정치에 눈뜨게 되었다’거나 ‘때 묻지 않는 세대의 발랄함’, ‘10대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현상을 봤을 때 이들이 성인이 되면 무엇인가 사회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 서울광장의 촛불소녀들 (사진=손기영 기자)

사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슈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반대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서울시와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입시경쟁을 강화하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 또한 중요한 이슈였다.

이번 촛불시위에 참여한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설문조사나 연구결과를 봐도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가 촛불시위에 참가하게 된 주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더구나 촛불시위의 아이콘은 다름아닌 ‘촛불소녀’였는데,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직접행동이 있고 나서도 여전히 그 주역인 10대들의 억압적인 일상생활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의문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10대들이 “대학에 들어올 내년 또는 내후년쯤이면 아마 우리 대학 사회도 생존의 쟁투장이 아니라 가치와 사상이 꽃피는 진정한 지성의 전당”이 될 것이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인데 이들 소위 촛불세대들이 대학을 바꾸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만한 이들이라면 왜 당장 자신이 다니는 중고등학교, 아르바이트 현장을 바꾸거나 개선하지 못 하고 자살을 선택하느냐이다.

촛불… 바뀐 게 없다

물론 안타깝게 자살을 선택한 10대들은 촛불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학과 사회를 변화시킬 위대한 세대가 왜 자신이 당장 속한 교육환경을 바꾸지 못할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실 프랑스 68혁명 사례만 봐도, 10대들이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대학평준화 및 국유화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현상이 ‘촛불시위’를 ‘세대론’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시도의 결과이며, ‘세대’라는 개념이 ‘계급’을 대체한 사회분석의 단위가 된 것의 귀결이자, 보수화된 민주화운동 세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우선 ‘촛불시위’에 대한 세대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2002년으로 돌아가보면 이 문제는 명백해진다. 사실 2002년에는 ‘촛불세대’가 아니라 ‘광장세대’라는 명칭이 붙었고, 10대와 20대의 정치적 의식과 집단적 경험을 분리하지도 않았다.

월드컵 응원과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로 인해 광장문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투표권을 얻으면 공공적 관심과 토론이 증대할 것이라는 내용이 그 당시 ‘광장세대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바로 그 광장세대가 현재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며, 뭘 해도 늦은’ 88만원세대 혹은 IMF세대가 되어버렸다.

소위 촛불세대론의 문제는 현 ‘촛불세대’와 전 ‘광장세대’의 차이 및 다른 결과를 예상하는 타당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광장세대’의 부모들은 70년대 학번의 특권적 세대였고, ‘촛불세대’의 부모들은 386세대였다는 설명은 마치 부모세대의 정치성향을 그대로 물려받거나, 자식이 순응하는 영향을 받는다는 가정이 있는데, 과연 386세대의 부모님들은 어떤 정치성향이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설명으로는 현 ‘촛불세대’는 우열반 등장, 0교시 부활 등 억압적 경쟁이 정치적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것이고 이것이 미친 소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반해, ‘광장세대’는 억울하게 깔려 죽은 두 여중생과 무죄판결난 미군과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분노 등으로 참여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즉 ‘광장세대’는 즉자적 의식을, ‘촛불세대’는 대자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인데, 자신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모순과의 관계를 깨닫는 계급의식적 자각이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일 뿐더러, ‘광장세대’는 그러한 계급의식적 자각을 왜 하지 못 하였고, ‘촛불세대’는 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광장세대와 촛불세대를 가르는 어거지

만약 ‘촛불세대’가 그런 계급의식적 자각을 할 수 있었다면, ‘광장세대’도 그런 계급의식적 자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수단을 사고하고 주목해야지 현 20대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세대 간 갈등과 분열 조장은 그야말로 오래되고 낡은 계급적 단결 만큼의 유용한 함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사회분석으로서의 ‘세대’ 개념, 촛불세대론이 20대에게 퍼붓는 비난과 조롱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의 보수화, 386 및 민주화 운동세대의 보수화라는 맥락과 관련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과연 그들은 20대 때 ‘계급’ 아니라 ‘세대’를 사회분석의 기본단위로서 사고하였는지, 혹은 ‘계급’을 ‘세대’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에게 공통된 ‘계급에 대해서 말하기 않기’는 역설적으로 기득권화된 그들의 계급적 성격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촛불세대 찬양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위대한 촛불세대가 대학에 입학하면, 혹은 투표권을 획득하면 사회가 바뀔 것이라는 것인데 왜 그들이 대학에 입학해야 꼭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지, 왜 투표권이 없는 당장, 지금의 청소년으로 사회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꿀 수 없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촛불세대 찬양론은 마치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이므로, 지금 당장은 인권을 유예당하고 공부에 매진해야 되는 존재로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68혁명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에 거리로 나온 10대들은 대학생도 아니었고, 투표권도 없었으나 대학생, 노동자와 연대하며 교육제도와 사회를 바꾸어 냈다.

어른 돼서 하라고요?

지금 촛불세대 찬양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68세대의 용기와 담대함, 상상력은 잊어버리고 보수화되어버린 채로 촛불세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를, 그들이 투표권을 얻는 시기를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16살 때부터 꾸준히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오며, 20대 중반인 지금까지 내가 만든 청소년인권단체의 회원인 내 입장에선 촛불세대는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연대’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촛불세대에 판돈을 걸겠다고 하지만, 과연 어떤 연대를 하였는지, 정말로 판돈을 걸어본 적은 있는지 궁금하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장 죽음을 선택하는 10대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다른 민중열사처럼 ‘열사’라는 칭호도 얻지 못 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처럼 추모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나는 ‘촛불세대’를 마냥 찬양하지 못 하겠다.

대신 노동자, 철거민, 청소년의 안타까운 죽음도 전직 대통령의 서거만큼 추모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면서, 위대한 촛불세대의 서거를 추모하겠다.


2009년 06월 15일 (월) 09:59:18 무직인꿈틀이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redian@redian.org
무직인꿈틀이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의 다른기사 보기 












꿈틀이가 현재 아수나로 회원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ㅎㅎ 활동을 안 한 지 어언 1년이 넘었기에.
뭐 여하간 글 내용에 대해 아수나로 내에서 큰 반대가 없다면 굳이 태클 걸 이유는 없는 듯.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9.08 12:29



옛날에 썼던 글들 짜깁기 혹은 재정리에 가까운 글들이네요;

흠...

시민운동가 대회에 낼 원고로 쓴 거예용.

총총.







촛불소녀, ‘도전’과 ‘희석’의 줄다리기




잠시 옛날이야기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라거나 사회 참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혹은 청소년들의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단체들이 종종 1920년대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이라거나 1960년의 4.19, 1980년 광주,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 등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운동들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했는지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과연 청소년들의 권리가 인정되거나 쟁취되었는가? 혹은 이런 방식으로 청소년들(만)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공론화되었는가? 항일독립이나 민주화의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청소년들이 이야기하고 요구안으로 내걸었던 교육과 학교와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다.
  ‘성인’들의 역사는, 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이나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에 청소년들이 참여하면서 내걸었던 교육에 대한 요구,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 등은 잊어버렸다. 그들의 운동은 단지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일 뿐이었으니, 사학재단의 비리와 교사의 체벌폭력까지도 독재정권과 연관 지으며 투쟁했던 80년대 고등학생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묻혔다고 밖엔 할 말이 없다. 묻힐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묻혔다는 건 확실하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선명한 주장 없이 청소년들이 거대담론(민족독립이든 광복이든) 속에 뛰어들면서 했던 정치적인 활동들이,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나 지위를 증진시키는 데 명확하게 기여한 것 같지도 않다.




다시 지금 이야기 : “촛불소녀”

  그리고 나는 2008년 촛불집회의 현장에서도 그런 복잡한 문제를 생각한다. 광우병 이슈에 묻혀서 청소년들의 다양한 요구들이 묻혔다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그래도 일단은 촛불집회 자체에서 사람들이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5월에 촛불집회를 처음에 시작한 주역은 청소년들이었다고 말하며, 청소년들이 역사적 주체이고,(독립운동, 4.19, 광주, 민주화운동 등등의 양념과 함께)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여기서 ‘어른들’이나 ‘비청소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이 이야기한다. 오죽하면 청소년들까지 나오겠느냐고 말하고, 청소년들이 기특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어른들이 해주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집회현장에는 아이들/청소년들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혼재해있다.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들을 대상화하려고 한다. 내 눈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힘과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축소시키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활동을 예외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이를 기존 사회의 틀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두려는 마음들이 엿보인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촛불집회 현장에서의 청소년들에 대한 태도는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보수적이다.
  ‘미성년자’(차별적인 표현이다.)는 부모 동의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촛불집회 웹홍보물, 밤 10시 이후에 ‘미성년자’는 자진 귀가시키겠다는 방침,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나눔문화의 종이피켓과 집회현장에서의 구호들, 중고등학생들의 등교거부는 백안시하면서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지지하는 ‘여론’, 등교거부를 포함하여 청소년들의 행동을 알리는 홍보물을 삭제하는 안티명박카페와 정책반대시민연대 카페 운영진, 예비군이라고 칭하는 남성들의 여성과 청소년 등은 뒤로 물러나라는 폭력적인 행동 방식들, 집회가 경찰과의 충돌로 좀 위험한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가끔씩 다가와서 말을 걸며 위험하니까 그만 집에 가라고 ‘반말로’ 말하시는 어르신들, 연행자들 중에서 ‘미성년자’는 석방하라는 구호들, 연행되는 여성 청소년의 사진에, 사실과 다르게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라는 캡션을 다는 신문 기사들(이건 청소년과 여성이 중첩된 보호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초등학생 연행에 분개하며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대상화는 완고했다. 거기에 대한 청소년들의 직접적인 ‘도전’조차도 흡수할 정도로. 마치 청소년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도전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는 듯이. 밤샘시위를 할 때 만들어진 토론의 장에서 한 청소년이 청소년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쓰는 사례라거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구호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 발언에 대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박수와 환호였다. 박수와 환호가 무슨 문제냐고? 그 박수와 환호가, 그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년이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눔문화의 구호를 패러디해서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라는 문구를 락카로 새기곧 다녔지만, 그 문구를 본 한 촛불집회 사회자는 “자신들이 지켜줄 테니 어른들은 마음 놓고 촛불을 들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른들이 더 열심히 해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자.”라고 발언했다. 몇몇 사람이라도 그런 청소년들의 문제제기에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전반적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촛불소녀는 촛불집회 속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아이콘이었다. 간단하게 해석하면, 촛불소녀는 청소년들(특히 여성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촛불집회의 공간을 열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는 아이콘이다. 또한 촛불소녀가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언되고 다양한 표정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이미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정치적인 도전을 희석시키는 많은 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촛불소녀는 학교의 두발규제와 복장규제에 딱 맞는 머리 모양과 단정한 교복을 갖춰 입고 있으며, 순수하면서 또 당찬 ‘소녀’의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었다. 촛불소녀는 현재 집회현장이나 운동 속에서의 청소년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문제작이었으며, “촛불”이라는 상징(비정치적인, 순수한, 소망 기타 등등의 표현들과 연결되는)과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지켜줘야 할 약자, 혹은 순수한 존재로서의 (여성)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촛불소녀’를 만들어서 유포한 나눔문화가 촛불소녀를 만들기 전부터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를 구호로 띄웠다는 점, 또한 촛불소녀 기획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촛불소녀의 코리아> 카페의 공지에 올라가 있는 글 중에는, 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며, 청소년들의 행동을 깜찍하다고 표현하는, 시선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글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촛불소녀”라는 상징의 내용과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그 속에 청소년들에 대한 보호주의적/차별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촛불소녀 자체의 죄이건, 아니면 사회적 현실의 죄이건. 촛불소녀는, 청소년들의 도전과 이 사회(청소년들 자신도 포함한)의 희석이 만난 결과물이며 줄다리기 과정에서 나온 흔들리고 변화하는 아이콘이다.




뒤늦게 설명하는 “왜”

  여기까지의 내용을 잘 따라오지 못하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나열한 여러 사례들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청소년 보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거나 그런 인식들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잘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건데 뭘 그리 까칠하게 구는지 불쾌해 할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문제만으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위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일정한 제한을 두면서 통제하려고 하는 방식(밤늦게 들어가라고 하는 거라거나, 등교거부-휴교시위에 대한 반감이라거나)들은 너무나 한계가 많다. 딱 잘라 말해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증진시키고 청소년들에게도 해당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물론 지금의 한국 사회는 비청소년들에게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다.)를 실현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계속 억압받아 왔기에 2000년대 이후로 종종 드러나고 늘어나고 있는 청소년들의 행동이 지금 시점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한다면, 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을 비록 지금까지는 부당하게 유보되어 왔지만 당연한 것, 잊혀진 권리가 자신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여기서 “잊혀진”이란 표현은 물론 비유이다. 권리는 되찾아지기보다는 창조된다. “잊혀진”이 이중피동이며 “잊힌”이 옳다는 딴지는 보류한다. “잊힌”보다는 “잊혀진”이 더 멋있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청소년들은 분명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약자이다. 그러나 약자이기 때문에 보호해주고 약자이기 때문에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어떻게 약자가 아닌 지위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보호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한계이다. 지금, 청소년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이 사회의 희석과 한계선 긋기와 충돌하는 도전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감히 “청소년은 촛불소녀가 아니다”라는, 자칫하면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뉴라이트가 쓴 것처럼 보이는 문구를 택할 것이다. 청소년은 촛불소녀가 아니다. 청소년은 촛불소녀의 프레임과 이미지를 넘어 더 나아가야 할 존재이며,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6.30 01:46
촛불이 낳은 고민들 속에서



촛불과 청소년인권 사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여러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알고 있으실 겁니다. 그 중에서도 아수나로서울지부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함께하고 있는데, 어차피 제가 서울지부 외의 다른 지역 사정 같은 걸 잘 아는 것도아니니까 아수나로 서울지부의 이야기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최근 집중하고 있는 문제는 단연그 촛불집회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자율화가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할 정부의 의무를 포기한 인권침해라는 내용의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제출하고,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의 빨강물고기 인권교육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도있기는 했으나 거의 대부분의 활동이 촛불집회에 관련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촛불과 청소년인권사이"라고 달아보았지요.

  아수나로(서울지부 뿐 아니라)가 처음에 초점을 맞춘 것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찰이나 교육청 그리고 학교들의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촛불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여러단체들이 청소년들을 차별적으로 대하거나 보호주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수나로차원에서 <현재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운동에 대한 청소년인권단체로서의 우려>라는 글을 써서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단체들이나 카페들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좀 까칠한 글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반응이 그리 좋았던 거 같진 않습니다. ㅋㅋ;
  (참 관련 글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요런 성명서도 썼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5월 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메시지가 돌면서,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청소년들의등교거부에 대해 그토록 알레르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이 사회는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불복종 행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을 반겼던 것에 비하면 잘 이해가가지 않는 모습이지요. -_-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저항 의지의 표현이었던 5월 17일 휴교시위문자메시지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교육공동체 나다 및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5.17 청소년행동 공동준비모임"을 꾸리고 열심히준비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단체들과의 의견 충돌이나 마찰도 좀 있었구요. 여하간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고 탈도 많고 했던5.17 청소년행동을 끝냈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흑흑... (휴교시위 문자 처음 돌린 사람을 잡아서 집회 준비에동참시켜야 합니다!!!)

  그 이후에도 아수나로 서울지부는 5.17 청소년행동 공동준비모임에서, 이 이른바'촛불정세' 속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와 청소년들만의 목소리를 어떻게 하면 낼 수 있을지 고민해왔습니다. 촛불정세는 분명청소년인권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전개시키고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촛불정세는 여러 가지이야기들을 모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또는 "광우병" 또는 "반 이명박"에 묻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으며, 더 많은청소년인권에 대한 이야기들을 묻어버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촛불집회 안에서도 청소년들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이나 보호주의적인시선들은 여기저기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5.17 청소년행동 공동준비모임(in 서울)은 "거리를 학교로 도로를칠판으로"라는 표어와 함께 거리에 락카칠을 하고 사람들과 함께 분필로 아스팔트에 글씨를 쓰며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전단지와선전물 등으로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홍보활동을 했습니다. 효과는 얼마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요-.



"촛불소녀"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활동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이제 이 촛불정세가 던져주고 있는 고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이 촛불정세는, 청소년들(10대들)이 그 처음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비롯해서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정치/사회 참여와 그런 정치/사회참여를 이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 복합적인 측면이 모여 있는 상징적 아이콘이바로 "촛불소녀"입니다.

  "촛불소녀"는 처음에는 나눔문화라는 단체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기획의도가 청소년들의주체성, 적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그려내는 것이었는지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있습니다. 제가 나눔문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나눔문화가 촛불소녀를 만들기 전부터"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지켜주자"("우리들"이란 표현도 문제지요.)라는 종이피켓을 나눠주고 있었고 촛불소녀 기획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나비판은찾아볼 수 없었으며, 촛불소녀를 만든 이후에도 그런 종이피켓들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나눠주고 있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합니다.또한 <촛불소녀의 코리아> 카페의 공지에 올라가 있는 글 중에는, 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며, 청소년들의행동을 깜찍하다고 표현하는, 기존 비청소년들(어른들)의 여러 차별적 시선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촛불소녀"라는 상징의 내용과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청소년들에 대한 보호주의적/차별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촛불소녀는 현재 집회현장이나 운동 속에서의 청소년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문제작이었으며, '촛불'이라는상징과 함께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지켜줘야 할 약자, 혹은 순수한 존재로서의 (여성)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기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촛불소녀"는 이 촛불정세 곳곳에서 눈에 띄는 청소년들에 대한차별적/보호주의적 시선들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촛불소녀의 이미지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것같습니다. 촛불소녀가,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난 상징이라는 것은 분명한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촛불소녀는, 처음 그 아이콘과 단어를 만들어냈던 기획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촛불정세 속에서두드러지는 청소년들의 활발한 활동 속에서 청소년들의 적극성을 표현하는 아이콘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동시에 집회 현장에서"촛불아줌마" "촛불노동자" "촛불대학생" "촛불회사원" 기타 등등의 표현들이 등장하면서, 처음에 '촛불'과 '소녀'를결합시킴으로써 강조되었던 촛불소녀의 그 '특별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희석되기도 했습니다.

  촛불소녀는 요컨대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촛불집회 안에서도 강고한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보호주의 사이에서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는이미지입니다. 청소년들은 그리고 그런 변화하는 면들, 이중적인 면들이 아수나로와 같은 청소년인권단체를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인것이지요. 청소년들의 평등한 정치적 권리나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촛불정세와 청소년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려고 할 때, 이런이중적인 부분들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서울지부는, 함께하는 단체들과 함께 더욱 더 집회 현장과 촛불정세 속에도 고집스레 자리잡고 있는 '미성년자' 보호주의나 차별들에도전하려 할 것이라는 점이겠군요. ^^; 청소년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이런 고민들을더 나누고 심화시킬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소식지에 넣을 글로 쓴 것입니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6.23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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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마 -_-;


-“기특하고 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집회장에는 정치적 선동 등 청소년이 보고 들어선 안 되는 내용들이 많다. 청소년들은 판단 능력이 떨어지므로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


  두 대사 중에, 위의 것은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는‘민주시민’이 할 거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대사는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미쳤는갑제’가 할 거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닯은 것 같지 않나요?
  우리는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청소년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차별이 많다는 것이, 별로 맘에 들지 않습니다. 많은‘어른’들은 종종 청소년들을 단지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 행동에 나서는 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취급합니다. 청소년들을 미래의 희망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현재에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미래로 유예된 인적 자원이라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떠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지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인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는 평등한 인간입니다.

  안 그래도 공부 압박에, 어떤 X같은 학교에서는 집회 나가면 징계한다고 공갈협박하고, 경찰에서 찾아와서 협박하고, 미쳤는갑제는 헛소리하고, 부당한 탄압에 충분히 힘듭니다.

  그런데 열심히 집회하러 나와도 미성년자는 부모동의서 갖고 오란 홍보물에 좀 그렇고,“아이들이 무슨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종이피켓에도 좀 그렇고, 예비군복 입은 아저씨들이 뒤로 가라고 하는 것에도 좀 그렇고,“미성년자 석방하라”라고 외치는 것에도 좀 그렇습니다. 차라리 청소년들이 “왜 우리만 훈방하냐 모두 석방하라”라고 외치는 건 어떨까요?


  청소년 여러분~_~ 함께 요구합시다. 우리를 보호 대상으로만, 기특한 애들로만 보지 말라구요. 우리는 당당한 우리의 주장을 가진, 동등한 정치적 주체들입니다.









촛불소녀에 거는 은근 태클



  나☆문화라는 단체에서 처음 만든“촛불소녀”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촛불소녀가 설령 만든 사람 입장에선 청소년들의 적극성을 드러내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하더라도, 촛불소녀는 그런 식으로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촛불과 함께‘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기존의 약자로서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나눔☆화 분들은 여전히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청소년들을 대상화하는 종이피켓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소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촛불소녀 카페의 한 공지 글에는, 청소년들을 순수하고 특수한 존재로 대상화시키고 있었고,“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려고 촛불소녀를 만들었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촛불소녀를 까냐구요? 우리는 촛불소녀가 오히려 청소년들을 보호해줘야 할 대 상의 이미지로 만드는 면이 있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또 우리는 촛불소녀가 청소년들의 활동을 특 별한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그리고 또 혹시 기억나시나요? 청소년들 사이에 등교거부(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가 돌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습니다. 그중에는 대학생들이 동맹휴업할 때는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도 있겠죠. 그건 어쩌면 청소년들이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서 행동하고 불복종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아닐까요?

  많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라고 합니다. 마치 모든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고, 어른들이 할 일인데 청소년들이 나오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말이죠. 그리고 촛불집회를 처음에 청소년들이 시작한 것에 대해 기특하다고 말합니다.
  그건 어쩌면 청소년들의 행동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결국 정치와 사회의 주체는 어른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른들이 좀 죄가 많은 건 사실이긴 하지만(-,.-) 이런 집회나 시위가 어른들만 해야 하는 일인 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우리의 의지로 나선 겁니다. 우리의 행동은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게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함부로 기특하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 아닐까요?


  우리 모두, 평등한 관계로 만나고 행동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요구합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cafe.naver.com/asunaro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6.19 16:16


“미성년자”, “아이들이 무슨 죄냐”, “촛불소녀” 그 공통점



완고한 청소년 차별/대상화/보호주의

  ‘그들’은 이야기한다. 촛불집회를 처음에 시작한 주역은 청소년들이었다고. 청소년들은 대단하다고. 청소년들은 역사적인 주체라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한다. 청소년들이 기특하고 (마음 놓고 공부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어른들이 해주겠다고.
  집회현장에는 아이들/청소년들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혼재해있다.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들을 대상화하려고 한다. 내 눈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힘과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축소시키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활동을 예외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어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두려는 마음들이 엿보인다. 반드시 어른들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집회현장의 많은 청소년들도 그런 사고방식들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렇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촛불집회 현장에서의 청소년들에 대한 태도는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보수적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그랬다. ‘미성년자’(차별적인 표현이다.)는 부모 동의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촛불집회 웹홍보물, 밤 10시 이후에 ‘미성년자’는 자진 귀가시키겠다는 방침,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눔문화의 종이피켓과 집회현장에서의 구호들, 중고등학생들의 등교거부는 백안시하면서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지지하는 ‘여론’, 등교거부를 포함하여 청소년들의 행동을 알리는 홍보물을 삭제하는 안티명박카페와 정책반대시민연대 카페 운영진, 예비군들의 여성과 청소년 등은 뒤로 물러나라는 폭력적인 방식들, 집회가 경찰과의 충돌로 좀 위험한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가끔씩 다가와서 말을 걸며 위험하니까 그만 집에 가라고 반말로 말하시는 어르신들, 연행자들 중에서 ‘미성년자’는 석방하라는 구호들, 연행되는 여성 청소년의 사진에 사실과 무관하게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캡션을 다는 기사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대상화는 완고했고, 그 완고함은 청소년들의 ‘도전’조차 ‘흡수’해버렸다. 밤샘 가두시위가 경찰의 연행 등으로 대충 소강상태에 빠지고 시청 광장에 마련된 소규모 자유발언-토론의 장에서 한 청소년이 청소년들에게 반말을 쓰는 사례,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 위험하다고 ‘미성년자’는 가두시위 중에 일찍 집에 가라고 하던 사람 등을 예시로 들면서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 그 발언에 대해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그 박수와 환호가 그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년이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나☆문화의 손피켓을 패러디하여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락카로 거리에 글씨를 새겼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 문구를 본 촛불집회 사회자는 “자신들이 지켜줄 테니 어른들은 마음 놓고 촛불을 들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른들이 더 열심히 하자.”라는 식으로 진행 중 발언을 했다. 연행되었던 청소년이 쓴 「“미성년자 석방하라”의 함정」이라는 글을 비롯하여, 청소년들이 자신의 주체적인 면을 강조하고 촛불 속에서의 차별과 보호주의, 대상화를 비판한 표현들은 오히려 어른들이 더 미안해하고 더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인 것 같았다. 몇몇 사람이라도 그런 청소년들의 문제제기에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전반적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좀 우회해서, 패러디해가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그들에게는 ‘도전’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기특한 행동이거나 재롱이었을지는 몰라도.

“촛불소녀”에 거는 태클

  이런 상황에서 나눔☆화의 “촛불소녀”가 등장했다. 촛불소녀가 설령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하더라도, 촛불소녀는 그런 식으로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기존의 여성 청소년들의 약자로서의 이미지(‘촛불’이라는 상징물과 결합하여 더욱 강화된)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촛불소녀, 촛불백수, 촛불노동자, 촛불대학생, 촛불국회의원… 이런 말들을 만들어서 나열해보면 “촛불소녀”가 ‘소녀’로서 가지는 독특한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눔문☆는 여전히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우리들”이란 표현도 문제다.)라는 종이피켓을 나눠주고 있었고, 촛불소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촛불소녀는, 현재 집회현장이나 운동 속에서의 청소년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문제작이었다.
  ≪촛불소녀의 코리아≫ 카페의 공지에 올라가 있는 <촛불소녀에 대해 많이 궁금하셨죠? 질문이 많아 올립니다^^>라는 글에는, 촛불소녀가 만들어진 것이 청소년들을 대상화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해주는 말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하며, “우리사회에서 가장 순수한 정신과 민감한 감성을 가지고 / 정의와 용기를 간직한 촛불소녀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마지막 희망”이라면서, “아이들의 깜찍하고 용감한 행동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지켜주자고 말하는 것과 KBS를 지켜주자고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아이들을 지켜주자면서 “촛불소녀”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청소년들을 대상화하는 입장을 청소년(촛불소녀)의 이름으로 표방하는 것이 가지는 모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청소년들을 순수하고 특수한 존재로 신비화시키고 있었고, 청소년들을 미래의 존재로 만드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행동을 “깜찍하다”라고 ‘어른’이 말하는 것 속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진짜 도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눈치 보면서 빙 둘러 말하던 방식을 포기하겠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그것을 성년/미성년(어른/아이) 구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청소년들을 대상화시키고 보호주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들은 이 사회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행동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청소년들에게는 미안하고 기특해 하는 태도가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직접 도전하겠다. 그런 차별과 대상화에 맞서서 직접 비판하고 도전하겠다. 촛불집회에 나오는 이른바 ‘시민’들은, 이명박 반대를 외칠 때는 함께하는 사람들일지 몰라도, 청소년인권의 문제에서는 단지 ‘시민’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