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1. 12. 28. 10:18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062.html

친권과 가족을 혁명하라 [2011.12.26 제891호]

[노 땡큐!]



원래 있다가 분량 관계상 빠진 부분


얼마 전 19살 청소년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알려졌다. 그 친권자가 아들에게 입시에서 성공할 것을 요구하며 학대를 해왔다는 등 자세한 이야기가 알려지자, 입시경쟁 교육이 부른 비극적 사건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이 과잉된 친권의 문제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며 친권자를 죽였다는 기사를 읽고, 이는 일종의 ‘정당방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1990년대에 여성단체들이 자신을 계속 성폭행해오던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여성의 행동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번에 그 '어머니 살해' 사건 때문에 쓰게 된 글. 원래는 친권 이야기는 좀 더 순서를 뒤로 미루고, 가출한 청소년들 이야기도 좀 섞어서 쓸 생각이었는데, 그 사건 등 이야기를 쓰고 나니 분량이 오버되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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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8. 11. 00:49



청소년 독립 불가능 사회



  먼저, 청소년들이 독립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재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독립은 아주 어려운 노릇이고, 대개는 부모-보호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 살게 된다. 가정이 얼마나 많은 청소년인권침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공간인지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몇 년 전에 개정이 되긴 했는데, 사실 민법의 친법 관련 조항에는 “자식은 친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런 식의 조항이 있었다. 설령 민법에서 그런 표현 자체는 수정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청소년들의 그런 현실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모-보호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처지는 청소년인권 문제의 중심에 위치한다. 논리적으로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청소년들을 ‘지도’할 수 있는 것조차도 부모-보호자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보호자는 대리인으로서 청소년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 생활, 이후 삶의 진로 그 무엇도 부모-보호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정말로 모 씨처럼 가출을 결행하지 않는 이상은.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부모-보호자의 선의에 의존해야만 하는데, 부모-보호자가 항상 믿을 만하거나 사랑스럽거나 신뢰가 가는 상대일 수는 없는 게 또 현실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독립’은 청소년들의 이런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대개의 대안이 그렇듯이 이 또한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우선은 역시 돈 문제. 2009 아동청소년종합실태조사 보고에 따르면 9-11세 중 5만원 이상의 용돈을 받는 건 2.6%에 그쳤다. 12-18세에 5만원 이상의 용돈을 받는 건 28.5%에 불과했다. 5만원 미만의 용돈 중에서 필수적으로 쓰게 되는 돈을 좀 쓰고 그 나머지를 아무리 저축해봤자 쓸 만한 독립 자금이 되는 건 요원해 보인다. 일을 하고 싶어도 만15세가 넘어야 노동을 할 수 있고, 임금은 쥐꼬리보다 좀 많은 정도이다. 게다가 부모-보호자에게 “17살 때부터 나가서 살고 싶으니 취직을 할 수 있게 보호자동의서를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오냐, 그래라.” 할 부모-보호자가 얼마나 있을까.
  사실 한국 사회에서 ‘독립’은 0대, 10대뿐 아니라 20대 초반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주거비다. 보증금 500에 월세 30만원 정도는 되어야 쓸 만한 집을 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엄청 작은 원룸이나 고시원, 매우 건강에 안 좋은 반지하(라지만 저 가격 이하면 거의 지하다. 서울 기준으로 500에 30이 보통 반지하-지층 방) 신세를 져야 한다. 보증금이 없어서 그런 곳에 들어가더라도 1달에 꼬박꼬박 20~30만원씩이 주거비로 지출되는 건 웬만한 정규직이 아닌 한 경제적으로 꽤 부담이 된다. 수도권 지역 특히 서울의 경우 집값 문제가 더 심각하다.
  게다가 민법상으로는 만19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은 원칙적으로는 혼자서 집 임대차 계약 같은 것을 맺기가 어렵다. 계약 자체가 효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호자가 와서 쏼라쏼라 하면 무효화될 수 있기 때문에 대개는 12살이나 16살 쯤 되어보이는 청소년이 와서 집 계약을 맺으려고 하면 보호자에게 연락부터 하려고 할 것이다. 뭐 간혹 그냥 둘러대면 뚫리는 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 만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뭐 부모-보호자가 갑부여서 초기자금을 왕창 받지 않는 게 아니라면, 독립할 수 있는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경로는 ‘그룹홈’(공동생활주거) 뿐인데, 수가 매우 적고 자격도 제한적이며 정부 지원도 열악하다.
  청소년들의 독립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이지 않은 시선, 독립적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상당수 청소년들의 상황(소위 ‘소녀-소년가장’이거나 빈곤층이거나 해서 혼자서 생활을 꾸려가본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의 수는 많지 않다.), 고립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도시적 삶의 문제 등등 그밖에도 고려해야 할 문제는 널려 있다. 이는 뭐 음모론적으로 말하면 청소년들의 독립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가정에 종속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더 분석적으로 이야기하면 청소년들의 독립 같은 건 아예 상상하거나 염두에 두지도 않고 구성되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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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나로 청소년독립팀에서 짧게 쓴 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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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본소득네트워크에도 올려주시면 감읍할듯 'ㅅ'

    2009.08.11 12:14 [ ADDR : EDIT/ DEL : REPLY ]
    • 올렸습니다-만, 도움이 될지 @_@;;

      2009.08.11 12:57 신고 [ ADDR : EDIT/ DEL ]
    • 실은 얼마전 대학생사람연대 실천단 신문에 게재한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말입니다.

      <해방적 기본소득>

      돈이 없어서 굶어죽고, 학교급식비 못내서 눈칫밥 먹어야 하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어제의 동료에게 몽둥이를 들이밀고, 우리 아이 학원 보내기 위해 남의 부모를 직장에서 쫓아내야 하는 이 시대에, 기본소득은 최소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양심의 해방을 약속한다.
      기본소득은 강제된 관계로부터의 해방 역시 약속한다. 노동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비자발적 피부양자가 스스로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독립성을 약속한다. 배우자의 선택, 부모자식 관계의 선택에 있어 금전적 장애만큼은 확실히 사라질 수 있다.
      근본적이진 않아도, 기본소득이 가져오는 작고 많은 해방들은 근본적 해방으로 나아갈 거대한 추진력이 될 것이다. 공권력의 폭력에 분노하면서도 내일 출근시간 때문에 참아야 할 필요도 없고, 부당한 노동과 비양심적 노동의 강요에 조금 더 용기 있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투표일 종일근무를 강요하는 반민주적 상사에게 타이거 어퍼컷을 날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009.08.11 18:43 [ ADDR : EDIT/ DEL ]

딱딱한꿈2008. 1. 10. 15:06

 어슴푸레한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하나 가득 그려져 있는 낯선 프레스코화였다. 주제는 '아브라함의 수난'. 창세기에 수록된 에피소드다.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어느 날 주님의 계시를 받고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두터운 신앙심을 지닌 그는 아들을 속여서 모리야 산 정상으로 데려간다.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아들을 칼로 찌르려는 순간 주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이것은 모두 너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성서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알렉산드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 이야기가 '이사악의 수난'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수난'인 것일까. 가정교사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비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신뿐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모양이다. 번득이는 단검을 치켜든 노인의 모습을 반쯤 잠에 취한 채 바라보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겨우 생각이 났다.


(요시다 스나오 지음, 김진수 옮김, 『트리니티 블러드 7 Reborn on the Marse Ⅳ 성녀의 낙인』 中)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이 괴로웠으니까 아브라함의 수난일 터이다. 그러나 이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역시 무서웠을 것이므로 이삭의 수난도 될 터이다. '아브라함의 수난'이라는 일방적인 이름에는 이삭의 입장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은 독선적인 작명센스가 반영되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댈 때면 부모 가슴에는 피멍이 맺힌다고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매를 댈 때면 스승 가슴에 피멍이 맺힌다고 한다. 실로 '부모의 수난', '스승의 수난'인 셈이다. 허허.


 누구 마음에 피멍이 들건, 일단 제껴두기로 하자.

  부모나 스승은 자식과 제자에게 가치관을 강요한다. 어쨌건 그들은 그 위치상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가치관을 강요하게 된다. 특히 자식과 제자가 미성숙한 상태일수록 모방이나 역할 모델이라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그것이 이루어진다. 또, 해당 사회의 예절이나 관습 등을 제재할 수도 있다. 잘못을 하면 혼을 내고, 잘하면 칭찬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조금 더 자라서 머리가 굵어지면, 이제 마찰이 일어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는 특별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을 명령한 존재는 '신', 절대자다. 절대로 옳은 존재다. 하라면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에 저렇게 알기 쉽게 명령을 내려주는 절대자따윈 없는 듯하다. 부모의 가치관도, 스승의 가치관도 따져보면 다분히 상대적이다.


  물론 자식이나 제자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면 말릴 수는 있다. 비단 부모나 스승의 입장뿐 아니라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조건이랄까.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사회가 힘을 통해 강제하는 내용이다.(공동체의 형벌이란 건, 공리주의적인 방식 외의 것으론 사실 정당화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정당화하지 않는 길을 택하겠다. 형벌은 다수가 그들을 위해서 합의하지 않은 소수에게 힘을 행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떨까? 그런 경우에도 부모나 스승은 자식과 제자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충고를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이란 대체 뭘까? 자식이나 제자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라면, 의사능력이 있는 상태라면, 원칙적으로 부모나 스승은 그들과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은연중에라도 그들의 위치를 이용해 그들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이삭에게 충고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난 아버지를 거역하고 달아나라고 충고하겠다. 에리히 프롬은 불복종을 통해 인간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은 신이므로, 이삭이 도망쳐봤자 신앙심 부족이라며 재앙만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당신이 납치당했다고 하자. 그리고 납치자는 당신을 방에 가둬둔 채 채찍으로 때리면서 "난 널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자, 날 사랑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넌 행복할 수 있어. 다 널 위한 거라니까."라고 한다고 하자. 당신은 분명 그를 사디스트에 미치광이라고 여길 것이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자식이나 제자를 두들겨 패면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이런 것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정도의 문제는 있다;)

 아무리 때리는 사람이 "내 가슴에 피멍이 들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가 가해자란 점은 변함 없다. 그들의 마음고생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범죄자가 아무리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도 그를 무죄로 처리하는 일은 없다.


  사회 분위기상 체벌이 가능한 징계란 점은 인정하겠다. (사실은 인정하기 싫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회 분위기상"이라는 단서로, 기실 체벌은 금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읽는 분들 중에 체벌을 당연시하는 분들을 위해 단서를 단다.)

그러나 체벌로 자신들의, 기성 세대들의 가치관, 혹은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겠다. 체벌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와 인류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치를 제외한다면,(결국 교육이란 인간 사회가 구성원을 생산해내는 일이므로.)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사실 올바른 교육자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자유로운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큼, 말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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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 10. 12:41

[내 말 좀 들어봐]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소년 따이루, 자유를 찾아 집을 나오다

따이루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온 그날

난 2006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왔다. 집에서는 '어린 것이 뭘 아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빨갱이들한테 휘둘리지 말고 학교나 열심히 다녀라, 쪽 팔린다' 이런 반응이었다. 가족들은 몇 달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몇 개월이 지나도 애가 점점 더 빨개지는 것 같고 머리만 커지는 것 같으니깐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금시간이 생기고, 컴퓨터를 할 때마다 감시를 받고, 통화 내역도 조회하고, 주변 친구나 활동가들 연락처를 여기저기서 모아서 연락망까지도 은밀히 만들었다. 난 이걸 블랙리스트라고 부른다. 학교에 전화해서 내 학교생활과 친구에 대해 알아내는 건 기본이었다. 집이랑 학교가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해 통화하는 것도 물론이구. 너무 화가 났다. 나를 통제하고 보호하려고만 하고, 나와 대화는 하려 하지 않는 그런 자세와 행동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가 캐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화가 났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기분 나쁘다, 문제 있는 거 아니냐'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러겠냐면서 오히려 나한테 화내고……. 쥐뿔도 없는 나는 그냥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들로부터 독립할 힘도, 돈도 그 무엇도 없었으니깐. 그렇게 싸우다 지고, 외출금지 당하면서 겨우겨우 살았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던 따이루~


2007년 11월 11일에 큰 집회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강경대응 하겠다 어쩌겠다 하면서 난리를 쳐서 엄마아빠는 내가 저기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일요일에 교회 갔다 어디도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특히 집회는 절대 가지 마!”라고 경고를 했다. 순간 급당황;; 하지만 가고 싶었던 집회고, 무조건 집회 가지 말라고 협박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짜증났다. 그래서 정성 가득 감동적인 편지를 한 장 써놓고 집회에 갔다. 편지 쓰면서 집에 가면 욕먹고 일주일 정도 외출금지 당할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었다. 통금 10분전. 집회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데 집안 분위기가 완전 얼음장이었다. 아빠가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보더니 어디 갔다 왔냐, 왜 갔냐, 왜 엄마아빠 말 씹고 가냐, 죽고 싶냐면서 취조와 협박을 하셨다. 난 완전 쫄아서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오늘은 참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무기한 외출금지다. 엄마아빠 있을 때만 허락받고 컴퓨터 켜고 숙제만 해라. 텔레비전 보지 말고 성경말씀 읽어라!” 헐;; 이런 표정으로 문 쪽에 얼어붙은 채 가만 서있었다. 그때 방에서 날 째려보던 아빠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를 잡아당겨 내동댕이치면서 패기 시작했다. 마음이 얼어서 그런지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근데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무서웠다, 아빠의 그 살기어린 눈빛이. 그때 엄마가 외치더라구. “왜 애를 패요? 차라리 내보내요.” 그 순간 난 본능적으로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지금 얹혀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돈 나갈 구멍은 많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집을 나오고 나니 하나에서 열까지 다 힘들다. 그 중에 좀 더 많이 힘든 것 중 하나는 텅텅 빈 지갑!

계획된 출가가 아니라서 모아둔 돈도 없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인맥도 없고, 알바를 하려고 해도 노동부의 허가증이 필요한 나이여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지금 얹혀사는 곳은 신림이고 학교는 구로여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해서 차비도 많이 든다. 밥 사먹느라 또 돈 들고…….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생기다보니 빚이 몇 만원이나 생겨버렸어. 거기다 앞으로 급식비에, 학교운영지원비에, 고등학교 가려면 입학금에 교복 값, 준비물 값, 소풍·수련회비도 내야 하는데……. 아프면 병원비도 내야하고 계속 얹혀살기 그러니까 월세도 내야 하는데……. 아무리 아껴 살아도 돈 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내가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그래서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간절히 느끼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간절히 원했던 것 중 하나가 무상교육이었는데, 엠비(MB)가 되셨으니 투잡(two job) 뛰어야 겨우 학교 다닐 것 같다─┌이런……. 아픈 것도 걱정이다. 특히 의료보험적용 힘든 치과. 난 이가 성하지 않은데,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 못갈 생각하니깐 너무 싫어 미칠 거 같다. 투잡도 모자란 것 같다. 추가 부업으로 인형 눈이랑 봉투도 열심히 붙여야겠다!

두 번째로 날 힘들게 하는 건 보호! 알바를 하려 해도, 핸드폰을 만들려 해도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어쩔 수가 없다. 보호자동의 없이 할 수 있는 게 손꼽힐 정도다. 그나마 엄마와 옛날에 했던 약속 중 하나가 '고등학교 입학에 한해서 보호자 동의를 해 준다'여서 고등학교 갈 돈만 되면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고 내가 할 일들인데 나보다 왜 보호자가 중요한 걸까? 내가 가고 싶은 길과 부모님이 갔으면 하는 길이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둘은 분명 서로 다른 인격체니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도 축소판도 아닌 한 인격체잖아. 그런데도 청소년에게는 선택할 권리도,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 나갈 권리도 없다.

“걸리면 집에서 쫓겨나.” 청소년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활동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막막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세상은 돈 없으면 죽으라고 하니 더 막막해진다. 그러고 보니 왜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런 미친 세상으로부터는 우릴 보호하지 않는 거지? ㅋㅋ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 후 선생님의 중재로 엄마와 협상(?)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협상은 그냥 엄마와 나의 생각 차이만 확인하고 별 진전 없이 끝났다. 그렇게 두 달이나 지났다. 정해진 것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면서 살다보니 그런지, 사는 게 불안정해서 그런지 폐인생활 모드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 메일을 보냈다. 엄마는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만 하셨다. 그래서 직접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양보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엄마는 '통금 7시!'를 계속 주장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금시간이 오후 7시면, 친구들하고 놀지도 못하고 인권운동을 하지 말라는 거랑 다름없다-_-

하지만 이 협상에서 인권운동 하는 걸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오직 깡 하나만 갖고 하는 이런 불공정한 협상에서 이 정도 성과를 건져 내다니, 부라보~ 노동자들이 회사랑 싸우는 거랑 청소년이 집이랑 싸우는 거는 상당히 비슷하다. 노동자나 청소년이나 ‘깡’ 하나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 기계를 멈추고 서비스를 중단할 ‘깡’, 집을 나올 ‘깡’. 그나마 노동자들은 빈약하게라도 법의 보호를 받지만, 가출한 청소년은 법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청소년의 가출할 권리, 독립적으로 살 권리도 노동자의 파업권 이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 아닐까. 이 권리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나와 부모님의 생각 차이는 두 달 정도의 가출로는 뛰어넘기 힘들 것 같다. 집에 들어가는 조건인 ‘무조건적인 오후7시 통금’에 동의할 수 없기에 난 여전히 집을 나와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독립해서 사는 걸 꿈꾸고 있다.

가출 후에 찾은 길

가출을 한 후에 얻은 게 은근히 많다. 미역국 안 질기고 적당히 담백하고 고소하게 끓이는 법, 김치볶음밥 타지 않고 맵지 않게 만드는 법, 김치찌개 고소하고 얼큰하게 끓이는 법, 쓰레기를 반으로 줄이는 법, 빨래를 깨끗이 냄새 안 나게 하는 법, 청소 빨리 잘 하는 법 등등과 같은 생활의 지혜를 배웠다. 당장 내 앞의 일들과 좀더 먼 미래에 대해 계획도 세우고 의지도 다졌다. 나를 지지해주고 힘들 때 도와주고 필요할 때 태클도 넣어주는 진짜 친구들도 만났고, 집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추억들도 만들었다. 그리고 8만3천원의 빚(ㅋㅋ). 가장 큰 건 '나'를 찾으려 노력했고 '나'를 찾을 길을 발견했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원하는 가치관을 자유롭게 외치면서 난 나를 찾아 나갈 거다.

가출 후 힘들어 하면서도 좋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건 분명 이 사회에서 가장 따뜻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가장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가족이 나에게 주었던 보호와 억압의 벽을 부수고 나온 지금!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지금이, 내가 보이고 내가 개척하는 이 길이 좋다. 후회는 없다.

[끄덕끄덕 맞장구]
집을 나온 뒤 친구네에 얹혀살며 두 달이란 긴 시간을 보낸 따이루. 워낙에 단단하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라, 자유가 주는 달콤함과 여유 때문인지 때론 배짱이 정말 두둑해보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막막함과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10대 때 청소년 인권을 포함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가족들이 말리거나 금지해 활동을 접는 청소년을 여럿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생존과 교육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의 처지에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부모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선, 부모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사회에선, 청소년은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편견을 버리지 않는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래서인지 인권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을 약속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따이루의 싸움이 더욱더 힘겨워 보이고 안쓰럽습니다.

대개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청소년에게는 철없는 아이, 반항적인 아이, 위험에 빠지기 쉬운 아이라는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생고생하지 말고 양보하고 집으로 들어가라’라는 충고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백기 투항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이나, 사실 그/녀들이 부모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패도 내밀 수 없는 약자라는 사실은 간단히 잊힙니다.

최초의 둥지를 떠나온 청소년은 아무 자기 보호막도 없이 차가운 거리에 서고 살아남기 위해 위험하거나 착취적인 관계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다행히 따이루는 피신에서 가출, 독립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지지해주고 먹을거리도 챙겨주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있는 집 청소년은 유학이다 연수다 해서 부모와의 갈등을 잠시 회피할 수 있겠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은 어떨까,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집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청소년이 주어진 둥지를 떠나 독립적으로 새 둥지를 만들 권리가 보장된다면, 그 세상은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안락한 삶 때문에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부모가 지어준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안락함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길을 찾아 나선 따이루가 더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싸움에서 따이루가 꼭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뜻도 용기도 열망도 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따이루가 좀더 유리한 위치에서 부모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 버티는 시간 동안의 고단함을 지켜보고 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배경내]
◎ 따이루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입니다.
인권오름 제 86 호 [입력] 2008년 01월 09일 11:53:49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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