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2014. 11. 15. 23:43
페미니스트라는 낙인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10점
조주은 지음/민연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저는 이 책을 2007년에, 나온 직후에 집어들어서 읽게 됐었습니다. 그때도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제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관점이나 센스는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았더군요. ㅎㅎ;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점도 가지게 됐지만, 이 책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에 관련된 내용, 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으로 가족 문제를 보고 교육 문제를 보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유비추론해보자는 생각도 이 책 덕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주은씨가 청소년운동이랑 굉장히 잘 맞을 거 같단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버릇이라는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아이가 말문이 트여 제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할 무렵 부모들이 먼저 가르치는 것은 존댓말이다. ˝~하셨어요?˝라는 높임말부터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잘 듣는 거야˝처럼 순종적인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군다나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권위로 움직이는 권력관계가 된다. …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란 곧 어른들의 권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아이를 의미한다. 가족은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아동, 청소년(녀)들은 가족 안에서 보호와 숨막히는 통제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저항과 비판 속에서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이를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는 욕구는 없는가? 또는 말 잘 듣는 자녀이고자 하지는 않는가?˝(89~90쪽)

˝전시 현장에 있는 어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124쪽)

조주은씨는 아동기 문제를 모성착취, 모성신화와 연관지어서 많이 풀어냅니다. 그리고 가족에 관련해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또, 가족 안에서의 권위나 권력관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죠. 경험이나 사례에 근거하면서도 이론적인 고민, 일반화된 관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에 대해서 어른-아동 문제도 이야기하지만, 역시 페미니즘이니까 남성-여성 문제도 많이 이야길 해요. `사랑`이라는 환상, 성폭력, 불평등한 가사노동이나 양육...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폭력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생각을 보여주는데, 저도 그걸 보고 가족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아이디어를 얻었던 거 같아요.

˝모순되게도,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우아하게 지속하는 반면,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알았던 음악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다. … 계급분류적 문화 행위의 상징성이 궁극적으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의미심장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재생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229쪽)


조주은씨 본인의 논문 주제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정`에 관련된 거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조주은씨는 가족의 문제도 잘 분석해내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적절하게 지적을 하더라고요. 칼럼을 모은 것 같은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러 이슈들과도 관련지어서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읽어볼 만합니다.


다른 활동가 분들이랑 꼭 같이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딱 펼쳐보니까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 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195쪽) 같은 통렬한 서술이 눈에 들어오네요.


다만 다양한 주제들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 문제를 짚으며 다루긴 하는데, 하나하나의 글들이 좀 짧은 편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게 몇 개 있었습니다.



아, 사소한 단점 하나. 책 편집상 쪽수 표기가 책의 제본 안쪽에 돼있는데요. 그거 때문에 쪽수 찾기가 힘드네요;;; 왜 이렇게 했지...

http://gonghyun.tistory.com2014-11-15T14:43:230.31010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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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4. 7. 17:25

--- 사실은 이거, '페미니즘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가 여성학 주간 행사 참여하고 감상문 써내는 거라길래 쓰던 거였다.
근데 열심히 쓰다가 다시 안내를 보니까 그냥 여성학 주간 행사가 아니라 "여성학 주간 학술행사"로 되어 있다. 쿠궁!!
난 학술 행사는 하나도 참가 안했다 -_-;;;;;;
그래서 허탈해져서 그냥 과제로 내는 건 포기하고 원래 계획보다 줄여서 2페이지 정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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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거의 학교 안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학생으로서는 불성실한 내가 오래간만에 학교에서 뭔가를 해볼 일이 생겼다. 3월 30일부터 시작하는 여성학 주간.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10주년 행사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성학 협동과정 그 자체의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울대 안의 여성학이랄까 여성주의랄까 그런 것의 흐름이나 현재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무렵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니스트 박람회> 준비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관악여모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페미니즘 문화제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뭔가 헷갈렸지만 그냥 둘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방할 듯했다.
  하지만 정작 3월 10일로 되어 있던 일제고사가 3월 31일로 미뤄지면서 본업인 청소년인권운동이 3월 31일까지 바빠져 버렸고, 페미니즘 문화제 준비 등은 계속 시간을 쪼개가며 같이 할 수 있었지만, 여성학 주간에는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 3월 31일에 일제고사가 끝나고 그 여파로 거의 이틀간 부족한 잠을 보충해버렸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박람회> 컨셉으로 진행된 전시와 페미니즘 문화제 자체만 참여하고 그 외의 시간은 잠을 자거나 준비 중인 출판 작업에만 매달리게 됐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여성학 주간 행사 중에서 참여한 건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 쓸 만한 이야기도 일단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한 2년 정도 단절되었던 페미니즘 문화제를 다시 살려보자,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아직 이 캠퍼스 안에 있다는 걸 알려보자, 정작 눈에 띄는 페미니스트는 없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들만 무성한데, 그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페미니스트 우리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스트 박람회>라는 컨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우리가 대체 뭘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서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사연)에서는 과거에 사연에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서 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난리부르스에서는 ‘해피엔딩의 조건’으로 상처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대 안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성폭력 같은 선명해 보이는 주제가 있나? 아니, 그런 주제를 찾으려고 하는 게 맞긴 한 걸까?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었다. 퀴어, 연애, 군가산점, 성폭력, 흡연, 옷차림, 가족, 여성가족부…. 이야기할 게 없는 게 아닌데, 마치 주위를 둘러보니 360도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에 길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 상황 같은 그런 느낌. 조금씩 끌리는 것들은 있지만 확 끌리는 건 없는 상태. 굳이 주제를 “페미니스트” 그 자체로 잡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과 사람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미래를 지향한다기보다는, 현재를 점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공들여 만든 전시물들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시되었고,(목요일은 문화제 준비하느라 미처 못했다.) 금요일에는 페미니즘 문화제가 치러졌다. 월요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학교 안을 행진하고, ‘말풍선 터뜨리기’ 뭐 그런 캠페인 겸 퍼포먼스 같은 것도 했고… 좀 아쉬운 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이야기라도 있나 싶어서 스누라이프 같은 곳에 가서 검색을 해봤지만 관련해서 올라온 글은 한 개도 없다. 좀 ‘파문’을 일으켜보고 싶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킁. 퍼포먼스와 문화제는 재미있었다. 비록 사람은 20명 좀 넘게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그래도 서울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련다. 문화제 준비하면서 체감하게 된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적 활동에 걸려 있는 온갖 규제들은 날 짜증나게 했지만. 다음번에 또 준비한다면 좀 더 풍성하게, 그렇게 하고 싶다. 이번에도 충분히 재밌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풍성함이 덜했달까.

  요즘 꽂혀서 듣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온 것처럼.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지민경, 「길 그 끝에 서서」 中)
  이번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를 하면서 든 생각이 딱 이런 거였다. 더 이상 대학교 안의 여성주의 단위로서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는 건 우리가 길 끝에 서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그리고 이번에 해본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는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를 살펴본 자리였다.

추신 : 처음에는 여성학 주간 행사로 신청해서 준다고 한 100만원 그거 많아보였는데 포스터 좀 뽑고 이젤 좀 사고 해보니까, 절대로 돈이 여유 있는 게 아니었다. -_-;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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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3. 30. 11:02


원래는 아즈망가 대왕이나 와라 편의점 뭐 이런 것들의 형식을 빌린, 일종의 연작 4컷 만화 같은 걸 구상했지만
열심히 그리던 걸 일제고사 반대 홍보 뛰다가 분실해서 ㅠ
급하게 그린 2컷짜리... 끙 너무 메시지 성이 강하고 스토리성이 약하잖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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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옷, 캐릭터 귀엽네요. 스토리가 약하긴 하지만(이미 말했어)

    2009.03.30 22:39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양성평등과, 최근에는 더 나아가서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반대하는 평등주의자가 바로 페미니스트죠. (사회적 남성과 여성을 칭하는 '젠더' 보다 '섹슈얼리티' 가 더 성적 소수자들을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이라고 하더군요.) 그냥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너도 페미니스트야." 하셔도 될 듯^^

    2009.03.31 15:0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 복합적인 것을 이제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게 맞나 싶기도 하는 생각도 전 사실 들긴 해요 ㅎㅎ 여하간 페미니스트긴 하지만요-

      2009.04.01 22:08 신고 [ ADDR : EDIT/ DEL ]
    • 사실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라는 게 젠더적으로 여성 뿐 아니라 나이 어린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들을 억압, 차별하기도 했으니까요. '페미니스트' 말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를 아직 못들어봤어요. 그냥 평등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2009.04.03 00:10 신고 [ ADDR : EDIT/ DEL ]

흘러들어온꿈2008. 4. 14. 02:01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조주은) 책 3장 중에서 발췌

 

(청소년인권운동 같이 하는 청소년들과 보려고 타이핑했습니다 헥헥;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되어서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2003년, 대학 캠퍼스 구석구석에는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고, 인터넷 공간 곳곳에는 전쟁에 관한 토론방과 사진, 동영상들이 넘쳐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자보에는 병원에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거나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사진들이 있었다.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알리는 대자보 가운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모이게 했던 것은 피해 받은 어린아이들을 전시한 사진전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육체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울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궁금증이 일었다. 이라크전의 피해자 중에는 여러 민간인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보다 어린이가 받는 고통에 더 민감한 걸까? 그리고 왜 그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까?

     이것은 근대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싹이 트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아동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관련이 있다.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 어린이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해 고안된 장난감이나 특별한 이론들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작은 어른이었고 그렇게 다루어졌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어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아동에 대한 이론과 상품이 쏟아졌다. 아동 관련 서적들의 모든 전제, ‘어릴 때 결정된다’류의 이론들과 그것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그것이다. 몇 세 때 지능이 완성되고 몇 세 때 인격 형성이 마무리된다는 이론들은 결국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책임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전가시킨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면, 혹은 지나친 말썽쟁이가 된다면, 그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어린 시기에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면서 적절한 자극과 애정어린 보살핌을 주지 못했다고 간주되는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게다가 완벽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모든 어머니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 중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보호와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아동기의 신화는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여성들은 ‘제일 중요한 시기에 애하고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입덧 때문에 정류장마다 내려 구토하면서도 견디며 직장을 계속 다녔건만 출산 후 기어이 사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아동기 신화는 일터와 삶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정에 남게 된 중간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근대의 제왕으로 등장한 어린이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각별한 보호와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안의 심각성과 폭력성을 ‘피해 받는 어린이’를 통해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아내 구타의 심각성을 알릴 때 순진무구한 자녀가 받게 될 악영향을 이야기하고,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단결 투쟁’이라는 네 글자를 빨간 머리띠로 두른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이라크 전의 경우에도 이에 반대하는 논리로 힘의 정치니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군수 자본가 따위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 상황에서 고통받는 소녀, 병원에서 붕대를 감고 고통스럽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의 사진 한 장이면 반전 시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어린아이의 위치는 특별하다.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며,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언표의 이면에는 ‘그토록 귀한 이를 지켜냐애 할 누군가’가 있다. 이때 특히 소중한 존재가 아이일 때는 사회와 국가의 책임보다 가족의 개별 책임, 그(부모) 중에서도 콕 집어 어머니(여성)의 책임이 강조된다. 백지와 같은 어린아이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여성, 어머니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밀착은 기혼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데 혼란을 초래한다. 기혼 여성이 자아 성취 욕구 때문에 어린 자녀를 떼어놓고 일하면 이기적인 엄마로 비난받지만, 갓난아이의 병원비 마련 등 어머니 노릇을 위해 노동을 하면 감동적인 일로 칭송받는다.

   

아동기에 대한 새 개념이 아이와 어머니 모두 해방시킨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온갖 이유들로 아이들 일상에 넘치는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 넘치는 관심도 아이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관심 아닐까? 장애인, 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장애인 성인 남녀도 좋은 먹거리를 먹으며 우리 사회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아동에 대한 각별한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 뒤에는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책임져 나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아이들은 미래의 일꾼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을 먹고 훌륭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장애 아동을 다시 배제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더불어 어린이에 대해 과도한 보호와 애정을 강조하는 일은 어머니들로 하여금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고, 그런 보살핌을 받는 아동의 삶 또한 행복하다고만 할 순 없다. 아동기의 신화를 활용해 “내 아이는 달라요”라는 기치를 내거는 유아용품들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에게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안겨주는가?


     나는 이라크전과 한국군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단지 그곳에 어린이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 현장에 있는 어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훌륭한 아이란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한 것인가?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어머니란 어떤 어머니인가? 좋은 아버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동(기)에 대한 정의는 변화하고 있는 시대 현실을 반영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내려져야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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