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04.26 01:26

‘아동학대’ 문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으로

공현


슬 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해다. 세월호 침몰로 세 자릿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청소년이다. 또한 그 바로 전에는 한 고등학교에서 폭행에 의해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두 차례, 며칠 간격으로 일어났다. 또 그 직전에는 가정에서의 학대로 인해 청소년이 사망한 사건이 신문 기사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에는 고등학생이 체벌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세상을 뜬 일도 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좇아다니기 바쁜, 우울한 상황이다.

워 낙 침울하고도 충격적이었던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마치 한참 전 일 같지만, 바로 1~2주 전까지만 해도 여러 언론은 “○○ 계모” 등의 제목을 달고 아동학대치사 사건과 그 재판을 보도한 기사들로 전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너무 가볍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시위도 등장했다. 사람들의 분노 자체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슈가 된 사건의 가해자를 벌하는 방법과는 별개로, ‘아동학대’ 문제를 예방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가해자가 특별히 못된 놈이라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결론에 멈춰버린다면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구조와 맥락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공식 보고된 아동학대는 6796건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학대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 ‘학대’ 기준에 잡히지 않은 다른 숱한 가정 안에서의 폭력과 인권침해도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보호자인 사람들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과연 자신들은 ‘학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달라고 하고 싶다.


청소년은 부모의 ‘것’이라는 전제


이미 방송을 통해 꽤 널리 알려졌지만, ‘아동학대’의 다수는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 학대의 가해자가 ‘계부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할 뿐이다. 언론 보도 역시 재혼해서 또는 입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굳이 “계모”라는 걸 강조하는 것인지, 참 씁쓸한 행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부모’의 학대에 더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죽였기에 이리도 반응이 뜨거운 것.”(트위터 아이디 @Ramirezi_ 전(前) 진보신당 청소년위원장)이라고.

물 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처럼 되어 있는 것과 ‘아동학대’가 가능한 가정 안의 권력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잔인하고 특출난 사례가 아니면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의 인권침해에 관대하다. ‘아동학대’ 사건의 배경에는 가정 안에서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자기 것’이냐 ‘남의 것’이냐가 아니라, 부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제 자체가 문제이다. 어느 부모가 ‘나쁜 주인’인 것만을 탓하지, 부모가 ‘주인’이 되는 상황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아동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낳는 조건들을 뿌리 뽑아야

사 정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동학대’라는 말보다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Children)’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학대’라는 표현은 마치 정도가 아주 심한 것이나 악의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정도의 문제이거나 특별히 악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며, 신체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사랑의 매는 폭력이 아니다.” 같은 말을 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아동학대치사 사건의 가해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이 둘이 종종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 환경이야말로 ‘학대’를 허용해주는 든든한 ‘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유엔 연구(The United Nations Study on Violence against Children: A/61/299)」(2006)는 서두에서부터 “아동에 대한 폭력이 ‘전통’ 또는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들로부터 정당화되어 일어나는 것을 중단”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위 사진[사진 설명] 유럽평의회 체벌금지 캠페인 포스터

“내 아이인데 무슨 상관이냐.”, “남의 집안 일이니 신경 꺼라.”라는 식의 태도. 자식 양육은 친권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가치관. 그리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권자에 의해 삶과 권리를 규제당해도 된다는 생각. 특히나, 그 바탕에 좋은 뜻이나 애정이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 청소년들은 ‘평등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 이런 것들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양육 방식은 친권자의 재량이라고 쉬쉬할 것이 아니고, 모든 체벌을 비롯한 폭력적인 양육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금지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직하고 비폭력적인 관계 맺기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공부 잘 시키는 우등생을 만드는 부모 되기에 대한 책은 많지만 정작 비폭력적이고 인권적인 부모 되기, 부모 자식간 관계 맺기에 대한 논의는 빈약한 곳이다.

올 해 하반기에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아동학대의 정의를 형법상 폭행이나 상해죄 대상 전반까지 포함함으로써 사실상 가정체벌금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정부나 사법부가 이를 그렇게 해석해 줄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친권자의 ‘징계권’을 들어 사회 상규상 허용될 만한 수준의 체벌은 정당행위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울만 해도 서울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 의해 가정체벌이 금지되었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역시 일부 명문화되었으나, 이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진지한 논의와 과정을 통해서 가정 체벌금지를 선언하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부터 출발해보면 어떨까.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제도이자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집을 나와서 ‘어쩔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같이 활동하는 청소년활동가들 중에는 의외로 가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기간 준비까지 해서 가출을 감행한다. 직간접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타이든, 폭언이든, 감금이나 협박이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대개 그들의 편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들은 대개 그들을 친권자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낸다. 폭력을 당한다고 호소를 해도 경찰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집 나온 청소년은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경찰의 의무인 것처럼. 하긴 경찰 입장에선 아주 틀린 일처리도 아니다. 민법에 따르면 친권자에게는 ‘거소지정권’이라는 것이 있고, 친권 상실이 되지 않는 한 친권자에게는 청소년이 있을 곳을 지정할 권리가 있다.

가출 등의 적극적인 탈출과 저항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가출한 청소년을 잡아가지 않더라도, 어쨌건 집을 나가서 혼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이 살아야 하며 버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청소년들이 놓인 처지인 것이다. 친권자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친권자가 폭력을 가하든 어떻든 간에 같이 살아야만 하는 현실. 이판사판으로 혼자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왔다가는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출’이 사회경제적 하층 가정에서 많은 것은 어차피 잃을 것이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 동학대’에 대처하는 제3자들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당장 폭력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가해자와 떼어놓고 싶어도 그 뒤에 청소년의 삶을 충분히 지원하고 책임질 만한 자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으로 보나, 법제도적 측면에서 보나, 친권자(특히 친부모)에게서 청소년을 떼어놓는 일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게 가정을 깼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마저 있다.

다행히도 반복되는 사건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으로 새로 제정된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학대’를 인지하면 바로 임시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기관이나 예산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가정에서의 폭력을 더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집 밖으로 나와서도 ‘어쩔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삶을 의존하는 선택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가정을 넘어선 공동체이든, 임시 주거와 생활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든, 복지제도와 적절한 노동 시스템이든.

나는, 자신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폭행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않을 권리는 인권이자 주거권의 일종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적 인권체계 역시 가족을 보호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훨씬 강하다. UN아동권리협약은 “부모나 현지관습에 의한 확대가족, 공동체 구성원, 후견인 등 법적 보호자들이 아동의 능력과 발달정도에 맞게 지도하고 감독할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이 이러한 권리(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부모나 후견인이 아동의 능력 발달에 맞는 방식으로 아동을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등의 조항을 통해 부모․보호자․가족의 권한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제도나 친권자의 권한 등에 근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은 현행의 국제적 인권 기준조차도 바꿔야 한다. 가정·가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하나의 제도이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와 인권침해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족제도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의 ‘청소년에 대한 폭력’ 문제에 대처해가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90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24일 11:52:51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3.10.15 11:22
[성명] 모든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나?
- 체벌에 희생된, 희생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애도하며


  폭력은 나쁘다. 누구도 구타를 당하거나 고문을 당해선 안 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관이다. 폭력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지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가장 기초적인 인권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도 신체를 훼손하고 폭력을 가하는 고문이나 형벌은 두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은 차별의 하나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없애야 한다고 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결국 청소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단 말과 뭐가 다른가? 체벌이 여전히 정당한 것이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 그것이 한국 사회의 청소년인권의 현주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서 체벌금지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부터 있어왔다. UN아동권리위원회 역시 한국에 수차례 학교, 가정,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서 아동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근절할 것을 촉구했다. UN고문방지위원회는 체벌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이고, 고문의 일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체벌금지의 걸음은 굼벵이보다도 더디다. 2011년에야 겨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학교의 장은 법 제18조제1항 본문에 따라 지도를 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됨으로써 학교 체벌이 금지됐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 조항에 대해서도 ‘직접 때리지 않는 형태의 체벌은 허용되는 것’이라는 반인권적 해석을 하며 학교 체벌금지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학교 체벌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은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 등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여 체벌금지를 명시한 지역뿐이다. 이런 지역에서도 체벌은 줄어들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그리고 학원 등 사회 여러 영역에서의 체벌에 대해선 금지하는 규정도 없다.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를 제정한 서울만이 가정 체벌 등이 금지되고 있는데, 이마저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은 형편이다.

  현재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체벌을 겪고 있다.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이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한 청소년이 목검으로 체벌당한 뒤 사망에 이른 것은 그런 와중에 불거진 비극적 사건이다. 우리는 그동안에도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이 계속 있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청소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체벌에 대한 언론보도는 잊을 만하면 나고 있고, 그나마 '과잉 체벌'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정도가 심한 게 아니면 대부분 묻히고 만다.

  학생간의 폭력에 대해서는 그토록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비청소년이 가하는 체벌 폭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중적 태도는 기괴할 지경이다. 정부는 스스로 금지한 학교 체벌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단속도 하지 않고 있다. 언론들도 법적으로 명백하게 금지된 학교 체벌에 대해서조차 ‘과잉체벌 논란’ 따위의 표제를 붙이며 보도하는 둔감함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과잉’ 체벌이 문제이지 체벌 자체는 할 수 있다는 식의 궤변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학살이 아니면 한두 명 정도는 살인해도 괜찮다거나, 죽을 만큼 구타하지만 않으면 주먹질을 몇 번 하는 건 괜찮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체벌’이란 이름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문이자 폭력인 행위가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사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교육이나 훈육을 내세우더라도, 설령 진심으로 선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더라도, 체벌이 폭력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을 위해서 폭력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 그것이 불행이 반복되는 원인이다. 폭력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지 못하는 것, 그러한 상상력의 부족이 폭력의 폐해 중 하나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는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체벌이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를 체벌해서라도 체벌금지를 시키라고 가르치고 싶은 심정이다. 청소년은 맞아도 된다고 하고 있는 정부라면 자신도 맞을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청소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체벌이 폭력일 뿐이며, 교육적이지도 않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정부를 체벌하는 데 도전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하겠다. 절실하게 외치겠다. 정당한 체벌은 없다. 체벌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체벌을 금지한 후 체벌이 없어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것이 청소년도 사람임을 인정하는 필수 코스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13년 10월 13일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21 11:39

서울 학생인권조례의 의미, 꼼꼼히 들여다보기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의미 톺아보기 ⑦

공현

2011년 12월 19일,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서울시의회에서 가결되었다. 2010년 9월 경기도, 2011년 10월 광주광역시에 이어서 세 번째로 학생인권조례가 입법기관에서 가결된 것이다. 비록 그 뒤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재의 요구를 하면서 언제 시행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졌지만, 지방의회가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킨 것 자체의 의미도 결코 작지 않다. 이날 통과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 만든 주민발의안에 교육상임위 시의원들이 일부 수정을 가한 안이다.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 어떠한지, 내용 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두발자유의 보장, 그러나 복장의 한계

우선 학생인권운동이 가장 오랫동안 제기해온 이슈 중에 하나이자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두발자유”, 나아가 용의복장에 관한 조항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이에 대해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 두발 등 용모에 대해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강력하게 천명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두발자유에 관해서 길이 외에 다른 부분은 규제할 수 있다는 듯이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와는 달리, 두발자유 등 개성 실현권에 관해서 완전하게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교육상임위원회에서 수정되는 과정에서 이 조항에도 단서 조항이 붙었다. “다만, 복장에 대해서는 학교규칙으로 제한할 수 있다.”라는 조문이다. 교복폐지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광주학생인권조례의 경우에도 두발의 경우 완전한 보장을 하려 하지만, 복장에 관해서는 “교복을 학교 규정으로 정할 수 있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의 조문이 더 문제가 많다. 광주에서는 교복을 학교 규정으로 정할 수 있다고 했을 뿐, 교복 외의 용의 복장 부분이나 교복의 착용 여부 등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복장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학생인권조례의 경우 매우 자의적이고 포괄적인 복장 규제가 가능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학생인권조례의 취지상 학교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당장은 여러 자의적 용의복장 규제들도 완화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심각한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진보된 학습권 조항

서울학생인권조례가 비교적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조항 중 하나가 학습권에 관련된 조항이다. “제8조 학습에 관한 권리”는 주민발의안에 들어갔던 내용에 더해서 서울시교육청의 자문위원회가 냈던 학생인권조례 초안에 있던 것을 합하여 보완하여 수정된 내용이다. 주민발의안 원안은 아니더라도 더 진전된 수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항에서는 학습권을 “소질과 적성 및 환경에 합당한 학습을 할 권리”로 명시하고, 현장실습 과정에서의 안전과 학습권 및 소수자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담았다. 또한 부당한 상대평가가 아니라 정당하게 평가받을 권리를 학습권으로 포함시켰고, 과도한 경쟁이 오히려 학습권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 등이 한국 정부에 교육권에 관련해서 권고했던 것이 일부 반영된 결과이다. 마지막으로는 “과도한 선행학습을 실시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학습권 침해로 보고 금지했다.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과정에 맞는, 적절한 시간을 들여 배울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학습권 조항은 다소 개략적이고 추상적으로 “배울 권리”, “학습에 참여할 권리”, “공부할 권리”로만 학습권을 파악하던 풍조에서 벗어나서 학생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을 권리로서의 학습권을 적극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평가․경쟁․선행학습 등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학습권(교육권) 침해를 다룬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다만 학생들이 학습에서 부당하고 자의적으로 배제당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등의 문제에 관해 명확하게 학습권의 차원에서 보장하는 조항을 만들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국내 학생인권조례 최초로 명시된 집회의 자유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확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제17조 의사 표현의 자유”이다. 이 조항에서는 국내 학생인권조례 최초로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2009년에서 2010년에 걸쳐, 경기도에서 국내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질 때에도 집회의 자유 조항은 큰 논란이 되었다. 결국 경기도교육청은 논란이 된 집회의 자유 부분을 명시하지 않은 안을 발의했다. 당시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집회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더라도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조항에서 의사표현의 방법 중에 집단적 표현으로서 집회가 포함되는 것이므로 집회의 자유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이를 놓고 “학생들 교내에서 집회 못한다”라고 표제를 뽑아서 보도하는 등 사람들 사이에서 집회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식의 인식이 퍼졌다.

사실 경기도교육청의 말이 맞긴 하다. 만일 경기도학생인권조례의 취지가 학생에게 집회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었다면, 이는 유엔아동권리협약과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위법 위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집회의 자유가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자의적으로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례로 이를 재확인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조항에서 “학생은 집회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이러한 권리를 확인하고 보장했다. 여기에서 집회의 자유는 교내에서 집회를 열 권리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 집회에 참여할 권리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조항 역시 교육상임위원회에서 일부 수정되고 말았다. “다만, 학교 내의 집회에 대해서는 학습권과 안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학교규정으로 시간, 장소,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라는 단서 조항이 붙은 것이다. 다른 학생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안전 등의 문제로 필요최소한의 제한을 둔다는 것 자체는 일견 합리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매우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집회를 규제할 우려가 있다. 예컨대 학교 안의 어디에서 열든 ‘면학 분위기’를 저해하니까 학습권 보호를 위해 집회를 금지한다면? 좀 더 명확한 조건 명시 등을 통해, 학생들의 집회의 자유 행사에 실질적으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꼼꼼하고 촘촘하게 구성한 권리들

그밖에 서울학생인권조례는 학교 현장의 사례들과 연구들을 반영하여 학생인권 보장의 기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애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등의 의견을 반영하여, 단순히 종교의식을 드리는 수업에 대한 선택권뿐만 아니라 학생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학생의 종교 선전을 제한하는 행위” 및 각종 차별 등을 포함하여서 좀 더 구체적으로 유형별로 명시하였다. 또 다른 예로 자치활동에 관한 권리가 있다. “제18조 자치활동의 권리”에서는 학생자치조직과 학생회가 어떠한 권리를 가지는지, 임원 선출, 회의 개최, 예결산 등을 비롯하여 구체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학생자치조직들이 말뿐인 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치를 보장받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세심한 연구와 고려가 엿보이는 조항이다.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에 관한 조항에서도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에 비해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 조항에서는 8개 항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소수자 학생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빈곤, 장애,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운동선수 등 소수 학생”으로만 예시하고 있는 데 비해, 서울은 “빈곤 학생, 장애 학생, 한부모가정 학생, 다문화가정 학생, 외국인 학생, 운동선수, 성소수자, 근로 학생 등 소수자 학생”이라고 하여 좀 더 많은 예시를 들어 조금 더 촘촘한 권리 보장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현재 서울학생인권조례 중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에서는 성소수자에 관해 이런 조항이 있다.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의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정보나 상담 내용 등을 본인의 동의 없이 다른 사람(보호자는 제외한다. 이하 같다)에게 누설해서는 아니 되며, 학생의 안전상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도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본래 보호자/친권자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본인 동의 없이 알릴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보호자/친권자에게 알리는 것이 성소수자 학생들을 더 많은 폭력과 차별에 노출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교육상임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내 자식이 동성애자인 걸 부모인 나한테도 알려선 안 된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라는 식의 반발을 의식하여 결국 “보호자는 제외한다”라는 조문을 넣고 말았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이 각계에서의 사례들과 연구들을 반영하여 최대한 꼼꼼한 권리 보장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후퇴는 더더욱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 증진 및 구제 제도 개선

경기도․광주광역시 학생인권조례에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비교해봤을 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학생인권의 증진에 관한 부분과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 ― 학생인권옹호관 등의 부분이다. 이 부분은 경기도에서 지난 1년간 시행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좀 더 실효성 있게 규정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 역시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회가 공들여 만든 부분에서 많은 부분 가져와서 더 나아지도록 교육상임위가 수정한 부분이다.

우선은 인권교육에 관한 부분에서, 인권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교육감과 학생인권옹호관 등이 할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인권교육을 실시하도록 해도 준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교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이다. 홍보에 관해서도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의 조례는 “교육감은 … 노력하여야 한다”라고만 되어 있으나, 서울의 조례는 이에 더해서 조례 전문을 알리도록 하고 학생인권옹호관 역시 홍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할 책임을 지도록 했다.

또한 학생인권옹호관과 학생인권교육센터라는 기구의 설치를 통해서 학생인권에 관한 정책 추진과 학생인권침해 구제에 관한 업무를 책임지고 총괄할 수 있도록 했고 학생인권옹호관의 신분, 업무, 위상을 좀 더 명확히 했다. 이는 경기도의 시행 경험을 돌이켜보면, 학생인권 정책을 책임지고 추진할 주체가 교육청에 따로 없고 기존의 장학사 등 교육 관료들은 학생인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왕왕 보이며, 학생인권옹호관의 교육청 안에서의 위상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나아가서 학생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조사 및 구제에 대해서 상세한 의무, 조건, 절차, 권한을 명시한 것은, 학생인권이 학교 현장에 정착하도록 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규정개정심의위, 학생의 규정 개정 참여 문제

마지막으로, 내가 서울시의회를 최종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규정개정심의위원회” 문제이다. 이 위원회는 경기도․광주광역시의 학생인권조례에서 모두 두고 있는 기구인데, 서울에서만 제외되고 대신에 학교운영위원회 밑에 “학교규칙소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주민발의안 원안에서는 규정개정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했는데, 교육상임위에서 수정된 안이다. 아마도 기존의 규정개정심의위원회가 학교운영위원회와의 관계 및 위상 설정이 애매하다는 법적 의견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문제는 이러한 수정이 규정개정심의위원회냐 학교규칙소위원회냐 하는 이름의 차이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본래 규정개정심의위원회에서는 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었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서 학생 대표와 “인권 관련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규칙 개정을 학교가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고 학생들이 규칙 개정에 반드시 의미 있는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규칙소위원회는 이러한 학생 대표의 참여에 관한 명문화된 부분이 없다. 학교규칙소위원회를 어떤 구성원으로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항도 없다.

물론 경기도의 경우에도 규정개정심의위원회를 조례가 명시한 대로 제대로 꾸리지 않은 학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학생 대표의 참여를 통해 학생들이 원할 경우에 규칙 개정에 의미 있는 존재로 개입할 길을 확보한 의미는 있었다. 서울에서는 위원회 구성에 학생 참여를 명시하지 않아서, 결국 규칙 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제출이 들러리만 서는 게 될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조례는 지렛대일 뿐이다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최초로 주민발의를 통해 서울시 만 19세 이상 유권자 10만여 명의 참여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시민들의 학생인권에 대한 지지와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두발의 완전한 자유와 집회의 자유 명시 등, 서울학생인권조례는 분명 10~15년 가량 이어온 학생인권 운동의 커다란 성과이다.

또한 서울시의회에서 통과되는 과정 역시 어렵고 고비가 많았던 만큼 의미가 있었다. 동성애자, 임신·출산한 청소년 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 하고 차별 금지에 반대하는 강력한 반인권적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것이다. 비록 경기도나 광주광역시 학생인권조례에도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있었으나, 이 조항은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서울에서 반인권적 공세를 이겨내고 통과됨으로써, 차별 금지 조항은 역설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차별금지와 관련된 쟁점이 과잉 부각되면서, 앞서 언급한 학습권 부분을 포함하여 서울학생인권조례의 한층 더 나아간 내용들이 잘 부각되지 못한 것이나, 규정개정심의위 삭제 문제 등 심각하게 수퇴된 부분들을 놓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좀 서글픈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와,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이 잘 뿌리내릴 수 있을 거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미 만으로 1년이 넘게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해본 경기도를 살펴보면, 학생인권조례가 온전하게 입학한 게 아니라 널리 알려진 일부, 두발 길이 자유화나 체벌금지, 자율보충학습 강제 금지 등만 그나마 힘을 발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학생인권조례가 담고 있는 풍부한 내용들이 모두 다 반영되기 위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과 교사들 등 교육주체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서울학생인권조례에도 학생인권에 관해서 복장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 등 학교에서 제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한계들이 군데군데 있다. 이는 결국 교육청이 조례에 관해서 해설하여 전달하는 지침,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역량과 의지에 의해 좌우될 부분들이다. 물론 조례의 개정이나 법률 개정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예컨대 보호자에게는 성소수자 학생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아웃팅할 수 있게 한 조항은 개정이 필요하다. 규정개정심의위와 관련된 것도 조례를 개정하면 좋겠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아예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버리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일 수도 있어 보인다.

학생인권조례는 하나의 지렛대일 뿐이다. 그 지렛대를 눌러서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 지렛대를 움직일 사람은 첫 번째로는 학생들일 것이고, 두 번째는 교직원 및 보호자일 것이며, 세 번째로는 교육청과 지역 사회의 시민들일 것이다. 그런 지렛대 하나 놓으려고 주민발의를 하고 재의를 해서 다시 의결을 해야 하는 등, 여러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겪고 넘어야 하니 참으로 한숨이 푹푹 나온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생해서 놓은 지렛대를 이렇게 꼼꼼하게 찬찬히 뜯어볼 때면 좀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학생인권, 이제 또 다른 출발점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의 작성에도 참여했고,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에도 같이 했습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8일 13:18:16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19 12:16


“폭력이 부르는 폭력, 차별이 부르는 폭력”

- 학교폭력의 해법 모색과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집담회

 

모십니다.

 

다시금 학교폭력 문제가 사회 전반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학교폭력 문제를 빌미로 학생인권조례를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적 발언들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학교폭력’(학생간 폭력)의 개념을 확장하는 한편,

학교폭력의 해법에 다가서는 접근방식들을 근본적으로 재점점해보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이번 집담회는 참석자 전원이 상호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교폭력문제, 차별과 폭력 문제, 인권과 교육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오신 단체들이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집담회 기획안]

 

 

“폭력이 부르는 폭력, 차별이 부르는 폭력”

- 학교폭력의 해법 모색과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집담회

 

 

■ 때: 1월 25일(수) 오후 2시~5시

■ 곳: 흥사단 강당

■ 공동주최: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 윤명화․김형태 의원실, 전교조,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학생인권조례성소수자공동행동

 

■ 구성

: 집담회는 참석자 모두가 심층적인 분석과 해법을 함께 모색하는 방식으로 진행

: 간략 발제를 요청한 분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참석자들의 의견과 상호 토론을 통해 퍼즐을 완성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

 

- 사회 : 배경내(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1부. [진단] 학교 안 폭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학교폭력의 가해자는 괴물인가? 누가 왜 표적이 되는가? 학교 안 힘의 위계질서와 차별이 낳는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의 악순환을 진단한다.

: 집담회 참가자들의 진단을 들어보면서 ‘학교폭력’(학생간 폭력)에서 ‘폭력 학교’(폭력적 학교구조와 학교문화)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 중요함을 살펴본다.


1) 학교폭력의 가해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경쟁교육, 폭력적 학교문화 진단

- 이희진(교사, 대구학생인권연대)

2) 폭력학교를 피해 짐을 싼 사람들

- 문한뫼(학교폭력 피해 학생)

3) 장애학생에 대한 폭력 : ‘도가니’와 대전 지적장애 학생에 대한 폭력사건을 중심으로

- 최석윤(서울장애인부모회)

4) 성소수자 학생에 대한 폭력 : 아웃팅과 집단폭행, 자살에 내몰린 청소년 성소수자

- 호림(학생인권조례성소수자공동행동 차별사례팀)

5) 국제결혼가정, 이주가정 학생에 대한 폭력

-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6) ‘학교 실적’이 만들어낸 피해자들 : 학교 실적을 위해 죽음의 공장으로 내몰린 현장실습생들(학생 운동선수 인권문제와의 유사성도 포함)

- 하인호(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전교조실업위원회)

 


2부. [해법 모색을 위한 쟁점토론] ‘폭력의 학교, 죽음의 학교’를 넘어서기 위하여

: 학교폭력 문제의 해법을 찾는 접근방식의 근본적 관점을 점검하는 쟁점토론을 위주로 집담회를 진행한다.

: 입시경쟁교육의 문제, 폭력적 사회문화가 학교폭력의 밑불이 되고 있음은 전제로 하고, 그 이상의 구체적 논의를 진행한다.

: 사회자가 쟁점별로 먼저 말문을 열어줄 사람을 초대해서 입장을 들어본 다음, 전체가 논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 주요 쟁점

1. 학교폭력에 대한 침묵과 방관, 악순환 구조, 어떻게 깰 것인가

2. 가해자 처벌 위주의 해법과 피해자(잠재적 피해자) 지원 중심의 대책은 어떤 차이를 만드나

3. 학교폭력 해법에서 교사, 학생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4. 학생인권조례는 학교폭력 예방과 해결에 무력한가

5. 학교를 넘어선 지원망 확충과 성찰적 사회문화 어떻게 만들까

 <각 쟁점별 토론을 열어주실 분들>

◯ 이영탁(전교조 참교육실)

◯ 문재현(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

◯ 둠코(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김선혜(평화를만드는여성회 갈등해결센터)

◯ 김영삼(서울시교육청 생활지도정책자문위)

◯ 이정희(경기도인권교육연구회)

◯ 유정은(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아동청소년인권센터)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12.25 23:09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서울본부 홍보팀에서 언론기고를 하자고 제안해서 쓰게 된 글입니다.  아직  초안이니까 여러 가지 고쳐야죠;;

근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만약 지면에 기고를 한다면 앞부분만 해야 될 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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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 문제에 대한 어떤 계산

- 학생 0.1%와 교사 70%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산수를 잘 못하던 분들에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자,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의 교사 수는 몇 명쯤 될까? 찾아보니 대략 사십만명 정도 된다.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 수는 대략 오백만명 정도 된다. 더 자세한 수치를 제시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매년 변하고 있는 수치니까 이 정도를 잡고 얘기를 해보자.


‘교사를 폭행할 수 있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어떤 이유로든 간에 교사를 폭행할 수 있는 학생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교사가 학생을 모욕했거나 학생에게 폭력을 쓴 경우부터 그냥 순전히 학생 본인에게 정서적 문제가 있던 경우에까지, 이유를 불문하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극소수일 것은 확실하다. 만약에 그 비율을 0.1%, 그러니까 1/1000이라고 해보면 어떨까? 5,000,000×0.1% = 5,000. 즉 5,000명의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할 수 있는 학생들이다. 만약 0.01%라고 하면 어떨까? 약 500명의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할 수 있다는 가정이 된다. 0.1%면 5,000명, 0.01%면 5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자 만약에, 최근 언론에서 교권이 무너지고 있다면서 보도하고 있는 몇몇 사례들은 그 0.01% 혹은 0.1%의 일부라고 한다면?


  상식적으로 0.1%라거나 0.01%라는 수치는 결코 큰 수치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99.9% 그렇다.”라고 말할 때, 이 99.9%는 심리적으로는 100%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어떤 집단의 0.1%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문제도 문제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0.1%를 가지고서 그 집단 전체를 문제집단으로 낙인찍거나 호들갑을 떨면서 체제의 위기를 예언하는 것은 오류이고 과장이다. 지금 몇몇 언론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사례를 찾아서 보도하며 교육의 위기를 부르짖고 “요즘 학생들”의 무서움을 설파하는 모습에서 나는 딱 그런 모습을 본다.

  앞서 설명했듯이 전체 초중고 학생들의 0.01%만 교사를 폭행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수는 약 500명이 된다. 물론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사례가 1년에 500건씩이나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확률을 가정해본 것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몇몇 언론들이 하는 것처럼 몇 년 전 몇 달 전 사건들까지, 지역을 막론하고 찾아다닌다면, 거의 1년 내내 그런 보도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자, 그럼 이제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는 어떨까? 2010년 10월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서울본부와 참교육연구소에서 전국 교사 147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약 70%가 체벌을 한다고 응답했다. “거의 하지 않는다”라고 답한 교사들을 제외하더라도 약 20%의 교사들은 체벌을 ‘자주’ 한다. 전체 교사 집단에 이 비율을 적용해보자. 400,000×70% = 280,000. 400,000×20% = 80,000. 이십팔만명의 교사가 체벌을 하고, 팔만명의 교사가 ‘자주’ 체벌을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원칙이나 한계 없이 ‘자유롭게’ 체벌한다고 답한 교사도 3.8%나 되니까, 이 역시 1만명은 넘는다.

  게다가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 교사 1명은 학생 수십명에게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학생 1명이 교사 여러 명에게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란 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폭력의 영향력은 비교도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체벌금지 이후’에도 여전히 체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추적하기보다는 굳이 학생의 교사 폭행 사건들만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언론은 얼마나 공정한 것일까.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은 센세이션 하지 못하지만 학생이 교사를 때리는 것은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그건 전형적인 황색 언론의 논리이다.

  나는 학생인권운동을 하면서 지난 몇 년 간 교사가 학생의 뺨이나 머리를 때린 사건, 체벌 중에 학생이 골절상을 입은 사건 등 수십건의 ‘선정적인’ 체벌 사례들을 접해왔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사정이나 언론의 무관심 등으로 전혀 공론화하지 못한 사례들이 반을 넘는다. 일상적으로 학생들이 교사에게 맞는 것은 잘 문제가 되지도 않고 교사 집단 전체를 낙인찍을 이유도 되지 않고 교사들의 인권을 부정할 이유도 되지 않지만, 어쩌다가 교사가 학생에게 맞는 사건이 일어나면 문제가 되고 학생 집단 전체를 욕하고 학생들의 인권을 부정할 이유가 되는 세상. 그 모습이 이미 우리 사회가 학생들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쓰고 있으니까 학생들도 교사들에게 폭력을 쓰는, 폭력과 폭력이 맞부딪치는 교실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교사에 대한 폭력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학생이든 교사이든 학부모이든 누구든,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그것은 예컨대 범죄자에 대한 경찰력 행사처럼 엄격한 요건 속에 예외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과 별개로, 일방적으로 선정적인 사례들만을 부각시키며 어떤 사람들을 문제집단으로 낙인찍고 공격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책임감 있는 자세라고 볼 수 없다. 때문에 지금처럼 선정적 사건들을 캐내서 계속 뿌려대기만 하는 그런 언론 보도들은, 불공정하며 무책임하다. 그 언론들은 정작 그런 식의 부풀리기 보도가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와 교사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혹시 그 몇몇 언론들의 보도 추세야말로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꺾어놓기 위한 ‘계산’에 따른 것은 아닌가?


‘학교 붕괴’를 직시하라

  나도 한국의 학교 교육이 붕괴해가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요즘 애들이 선생님을 우습게 봐서’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더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 학교가 부여하는 과업과 수행하는 교육 활동에 냉소적이거나 불참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소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극소수의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하는 것보다,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 자체를 보이콧하고 있는 이 현실이 더욱 큰 문제이다. 학생들의 교사 폭행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비교적 명확하다. 이미 외국에서도 이런 현상에 관한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교육이 노골적으로 계급재생산의 도구가 되고 학교에 차별과 억압이 심할 때, 학교 교육과 사회 현실이 학생들에게 삶에 관한 희망을 주지 못할 때, 학교 교육에 열심히 참여한다고 해서 내가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 학교 수업이 학생들에게 동기를 주지 못하고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할 때 ― 이럴 때 학교 교육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 활동에 열심히 참여할 이유를 잃고 학교를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이미 1980년대, 1990년대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학교 붕괴’ 담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고용 없는 성장과 입시경쟁, 취업경쟁의 모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는 ‘학교 붕괴’ 현상을 확산시키고 가속화시키고 있다. ‘승자독식’의 원리가 득세하고 학교는 입시․취업기관 혹은 졸업장 발급 기관이 된 현실에서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 열의를 갖고 따르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나 또한,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부동산 투기나 해라.”라고 대놓고 말하고, 학생들은 성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좌절하고 체념하던,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런 학교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이와 같은 ‘학교 붕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뭔지, 여기에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입시경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학평준화라거나 복지정책 및 경제정책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커다란 것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안교육이나 탈학교론, 공교육 재편론 등 여러 가지 논의들이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 그리고 학교간 경쟁을 강화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학생인권조례 등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움직임 또한 ‘학교 붕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학생들이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위한 복지를 보장하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학교 생활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 ― 학생인권 보장이야말로 학교가 가기 싫고 믿을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좀 더 재밌고 자발적으로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바뀌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 아닐까? 누구든 진정으로 학교 교육의 붕괴를 우려한다면,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0.02.13 15:04

[페미니즘인(in)걸?] 왜 소수자들은, 여성/청소년들은, 오지랖이 넓은가

‘그래도...’의 반복

난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늘 어느 순간 벽 같은 것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나게 학교 욕, 선생 욕을 하다가도 누군가는 꼭 “너무 우리들 생각만 하지 말고, 선생님 생각도 좀 하자.”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체벌에 대해 수다를 떨 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진짜 그 선생 너무 심하게 때리는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에이, 그 선생님이 좀 심하게 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허용되고 그래야, 우리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학교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친구들의 끄덕거림이 따라온다. 늘 답답했었다. 왜 이 친구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 그냥 그대로 수긍하는 거지?

비슷한 경험은 학교를 그만 두고서 인권활동이라는 걸 하면서도 자주 접했던 것 같다. 인권교육을 가서 학생들의 권리나 인권에 대해 얘기하면 청소년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면서 ‘선생님들’ 걱정을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회사 뒷담화를 까다가 내가 발끈하자, ‘그래도’하면서 ‘사장님’을 옹호한다. ‘사장님’도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보기엔 아빠가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구조적 무감각과 ‘착하게’ 길들여지기

사람들은 쉽게 이 사회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류적인 기준을 흔드는 것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곧잘 ‘인권’을 이야기하고, ‘차별’을 이야기하고,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그 ‘선’을 넘어가는 것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흔들고 침범하는 것이라 여긴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청소년들이 “아직 어린 것들이”라는 말에 맞춰 “그래, 우린 아직 어리니까 좀 더 통제 받아야 해.”라고 생각하거나, 여성들이 이 사회 ‘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더욱 꾸며내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성들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같은 사회적 약자로 닮은꼴인 청소년과 여성, 그리고 약자들은 웃기게도 강자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한 여성성과 약자성(먼저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고)은 약자가 강자에게 훨씬 더 많이 잘 발휘되고 있다. 이는 성인/교사/남성-강자 중심 사회에서 그들 중심의 질서가 학생/여성 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자신들을 둘러싼 억압마저 그들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예전부터 ‘남성/비청소년의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살며 쌓아온 경험들이 우리들 마음 곳곳에 눌러 붙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 강자 입장 내면화하기

소수자/약자들이, 권력 있는 자/강자들을 위하도록. 그래서 이 사회가 뒤틀리지 않고, 뒤집어지지 않게 고정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사회는 우리들을 오랫동안 ‘착하게’ 길들여왔다.

그렇게 길들여진 ‘착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산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착하고 착실했다. ‘야간자율학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유지했다. 학교의 온갖 규제가 고통스러워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려도, 나는 그 순간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 것들을 그만두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그 순간에는 착실하게 참아냈다. 그 순간만 넘기면 되니까. 또는 그 순간에 내 목소리를 내기라도 하면, 눈앞에 징계나 탄압이 떨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낼수록 선생님들이 우리를 때릴 때마다 그걸 계속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괴로웠다. 나는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거기에 그럴 만한 의미를 부여해버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라고. 선생님도 그만한 이유-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보내야 할-가 있어서일 테고, 그건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라고.

먹고 사는 것,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회적 인식도 그렇고,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눈앞에 보이는 탄압이나 징계에 대한 문제 때문에 쉽게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이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입되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강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정당화 시켜야 했다. 나한테 고통을 준 사람도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고, 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덜 불편할 수 있으니. 그리고 그럴 때에야 나는 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그래서 나도 그러한 나 자신과 학교와 체벌하는 교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을 추억할 때처럼. 대학에 가고 나서, 자유시간이 많아지니, “아 그래도 고딩 땐 할 게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수능 보기 전에는 수능공부=쓸모 있는 짓/나머지 전부=휴식이라는 ‘공식’이 있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이게 허물어지고 나니, 참 허무하더라는 것처럼.

너무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만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그래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더 크게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 때는 그래도 좋았지, 그래서 좋았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 체제를 구성한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 단단한 구조를 직시하는 것은 여성으로, 청소년으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착한 아이’로 길들이는 국가의 통제가 점점 더 검은 그림자를 펼쳐오는 이 때, ‘착한 아이’가 아니면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쫓아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때, ‘국가’를 위해서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멈춰야 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때. 우리 이제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커다랗고 단단한 기준을 뒤집을 만한 발칙함과 깐깐함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난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90 호 [기사입력] 2010년 02월 09일 23:31:20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6.09 14:01
*
6월 7일, 종로에서 "쥐덫놓기" 1인시위를 하고 나서(사진은 사진기를 다른 사람 가방에 맡겨뒀는데 못 찾아서 나중에 업로드)
시청광장에서 문화난장도 같이 하고
인권단체 천막에서 경찰폭력 대응 카드도 접고
청소년 피켓도 들고 있고 오승희 호외 등도 나눠주고 하면 노닥거리다가
저녁에 행진을 했다.
사람이 끝도 없었다. 숭례문 어귀에서 다른 일행을 만나려고 잠시 행진 옆에 비켜서서 서있었는데,
원래 우리가 가장 뒤에 처져 있는 쪽이었는데 우리 뒤에도 사람들이 끝도 없이 꾸역꾸역 나왔다.

행진을 하면서 아수나로&나다 사람들은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 "두발자유 체벌금지" 등의 구호도 (우리끼리만) 열심히 외쳤고
뭐 그랬다.
안국동까지 갔다가 경찰차 막혀 있어서 세종로까지 돌아왔다.
돌아와서 할 일도 없어서 맥주 마시고 컵라면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앞쪽이 매우 시끄러워져서
마시던 맥주만 마저 다 마신 다음에 세종로 중심 쪽으로 갔고,
그렇게 언론과 인터넷에서 난리를 떠는 그놈의 '폭력시위' 현장에 있었다.

있다가 나왔다.


*
폭력이라는 말은 너무나 단순하고 선명하다.
폭력시위, 평화시위. 폭력/비폭력. 폭력반대. 얼마나 간단하게 구분짓는 말들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생략하고 삭제한 말들인가.

우리는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수많은 맥락들과 기준들을 읽어내야 한다.

*
이 글이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글이 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서울 광화문의 그 현장에 같이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내 감정과 내 논리와 내 질문들을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이 누군가를 '추궁'하는 글인 것은 맞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답을 요구하는 글이다.



*
6월 7일에서 8일로 넘어가는 새벽, 세종로 사거리 현장은 소화기분말이 마치 안개처럼 떠다니고 있었고
닭장차는 온통 유리창이 깨지고 바퀴가 빠져서 주저앉아 있었다.

의료진은 소화기 분말을 맞은 사람들은 물 안 마시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어서 물을 억지로라도 마시라고 하면서 생수통을 들고 다니고 있었고
인권단체들의 인권침해 감시단은 사람들에게 물병 던지지 말라고, 물병 던진 거 주워서 경찰들이 다시 던져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다친다고 외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쇠파이프인지 깃대를 부러뜨린 것인지 나무막대기인지를 들고 버스 안을 막고 있는 전의경들의 방패를 (심각하게, 진지하게, 깨지라는 듯이) 두드리고 있었고
버스 위에 올라가 있는 전의경들에게 호스로 물을 "찌끄리는"(이정도 표현이 적절해보일 정도로, 애처로운 물줄기였다;;) 사람도 있었다.


*
폭력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고?
그런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면 나는 1차적 책임은 이명박에게, 그리고 경찰에게 있다고 말할 것이다.
청와대로 가는 길만 무조건 사수한다는 방침인지 뭔지,
애초에 행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바리케이트 같은 걸로 닭장차 지붕 위까지 방어하며 세종로를 막아둔 경찰들,
그리고 전의경들을 위험한 곳에 배치해두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전의경들이 위험한 곳에 있으니 배치를 바꾸라고 아무리 가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지휘관들',
소화기를 미친듯이(정말 미친듯이) 뿌리고 무조건 사람들을 막으려고만 하는 사람들...


*
사실 나는 닭장차를 부수는 게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진하는 걸 막으려고 닭장차를 세워두는 게 폭력일지는 몰라도, 지나가기 위해서 닭장를 끌어내거나 닭장차 철창을 뜯어내고 넘어가려고 하는 게 폭력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여기서 '폭력'이라는 건 '협의의 폭력'이다. 폭력은 매우 광범위하고 다의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호스로 물을 뿌리는 건 정말 살수차-물대포에 맞서는 자그마한 저항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병을 던지고(그리고 그 물병이 위치에너지까지 더해서 돌아오고-_-)
쇠파이프 등으로 직접 전의경들을 공격하고
그러는 것을 나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이름붙여진 행위들로 폭력을 부른다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그 현장이 폭력적이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전의경들과 시위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이 감정적으로 매우 '흥분'되어 있었고, (사실 상황상으로 그럴 만도 하지만)
전의경들이 물병을 던질 때 시위하는 사람들은 온갖 욕을 다 했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밧줄을 던지고 물을 뿌리고 깃대를 휘두를 때 전의경들은 온갖 욕설을 다 했고
그런 것들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냉소하거나 욕을 했기 때문이다.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한 민주적인 통제나 소수의 의견이 개진될 여지조차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적'과 '아'를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구별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쇠파이프로 때리고 방패로 찍는 것도 폭력이지만, 이러한 상황 그 자체가 광범위한 폭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
그러나 폭력의 책임을 묻는 게 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왜 이 꼴인지부터 물어야 할 텐데

나는 촛불시위가 '변질'되었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을 뿐이다.



*
나는 동기에 대해 묻고 싶다.

안국동에서 경찰버스에 막혀서 행진이 답보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민주노동당 깃발이 많이 펄럭이던 곳에 있던 사람들이 '골목으로 청와대에 가자'라고 외쳤고
나와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에 두 사람도 그쪽을 따라갔다.
그때 상황이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했지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왜 어떤 생각에서 그들과 함께 갔는지 묻고 싶다.

또한 세종로에서 상황이 점점 가열되고,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그런데도 닭장차는 끌어내려고 하고 (더 위험하다.)
경찰이 직접 진압(또는 연행/체포)될 가능성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시청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시청으로 다 같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도중에 세종로 중심에서 환성이 터지자(아마 닭장차를 끌어낸 거라고 추측한다.)
다시 거기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또, 그 사람들은 전화를 해서 시청광장으로 오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좀 더 "구경"한다고 하거나 좀만 더 "보고" 있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왜 어떤 생각에서 거기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어떤 구경을 하고 싶었는지 묻고 싶다.

항상 폭력의 최전선에서 '몸빵'을 하고 있는 동지에게, 거기에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다.



*
폭력의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폭력의 현장의 최전선에서,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거나 폭력의 한 관련자가 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가?
혹은 자극적인 어떤 폭력에 대한 흥미와 관심과 호기심 - 그것이 직접적인 '쾌'이건 일종의 '숭고'(sublime)이건, 혹은 비탄이건 - 의 충족을 욕망하고 있진 않은가?
일상과 다른 것, 색다른 것을 원하고 있진 않은가?
어떤 '역사적'(역사가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폭력적인 것은 역사라는 역으로 대치된다. 역사를 구성하는 강렬한 '사건'은 종종 폭력적인데, 사람들은 종종 폭력적인 것을 강렬한 '사건'으로 오해한다.) 순간에서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기타 등등의 이유로 도망쳤다는 자책감을 회피하기 위한 것인가? 현장에 있기 위해서인가?
무력감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폭력을 택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앞서 열거한 이런 것들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여기에서 나는 "올바르지 않은" 이란 말의 사용을 피한다.) 자기만족감 추구라고 생각한다. 폭력의 관망자, 혹은 폭력의 행위자로서 동참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폭력 현장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서 기록하는 자체에 부정적이진 않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을 두드러지게 편집하고, 그 편집된 것들을 향유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그 사람들의 동기를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저런 추측을 해볼 뿐이다.
나의 동기는 폭력적 현장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폭력을 '즐기려는'(여기서 즐긴다는 말은 단순한 '쾌'가 아닌 복합적인 뜻이다.) 마음이나 현장에서 도망침에서의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대개는 그렇게 행동한다.




*
현장을 기록(혹은 기억)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다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폭력을 막기 위해서,
(그러나 그 현장에서 폭력을 막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폭력은 보통 매우 압도적인 힘으로 존재한다. 그 폭력을 막는 것은 또다른 압도적인 힘일 수밖에 없다. - 그 힘이 폭력의 형태를 띠건 좀 더 민주적이고 인권적인 형태를 띠건. 그렇기에 우리는 다수의 거대한 힘을 원한다. 전의경들을 넘어서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이유로 그 현장에 머무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런 일들은 괴롭고 '끔찍'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구경하기 위해 혹은 좀 덜 노골적인 표현으로 보고 있기 위해 있던 사람들에게, 보고 싶어하던 사람들에게, 그러한 목적 의식이 있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모르니까 묻고 싶다.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