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2. 1. 9. 15:17
[성명]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경찰공권력 대거 투입과 사법 처리 강화 조치는 
학생간 폭력을 막지 못하는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최근 학생 간 폭력으로 자살하는 학생에 대한 보도가 줄이어 터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청소년의 인권을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이번 경찰의 신년 발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계엄령 선포라고까지 느껴지는 충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경찰의 이같은 대응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2012년 신년 발언에서 학생 간 폭력 사건에 대해 1만 2천 명에 달하는 외근 형사를 동원하고 청소년에게 이례적인 구속수사를 일반화하는 등 '학교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또 학원가, 공원, 학교 주위, PC방, 오락실 밀집지역 등 주로 청소년이 이용하는 공간이면 학교가 아닌 곳도 형사를 집중 투입한다고 밝혔고, 여성·청소년계 형사들이 맡았던 청소년 관련 범죄를 해당 부서보다 규모가 10배 이상인 형사, 수사과 인력을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포를 조성하는 폭력적인 분위기로 학생 간 폭력을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은 과거 독재 정권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로 시민들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주장만큼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여태까지 학생 간 폭력을 '골칫 거리'라고 생각했던 학교들은 학교의 폭력적인 권력 구조를 이용해 학생 간 폭력을 없던 것으로 만들며 은폐, 축소해왔다. 또 교사들이 학급을 쉽게 운영하기 위해, 교실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학생들을 이용함으로써 학급을 통제해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일부 청소년들의 폭력은 '폭력은 안된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와 학교의 위선에 대한 조롱이자 배운 대로 실천하는 '모범적' 태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같은 경찰공권력의 대응은 청소년을 일상적으로 감시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이때문에 청소년이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잃어 학교나 교사의, 급우 간 폭력에 더욱 취약해질 수 있다. 학생 간 폭력이 일어나는 교실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힘 센 단 두세 명의 학생들의 폭력을 막지 못하고 더 힘 센 사람, 교사나 경찰에게 자신의 안전을 구걸하는 현상은 청소년이 폭력에 이미 취약해져 있는 집단이라는 증거이다. 학생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기는 더 큰 폭력인 것이다.
 
  학생간 폭력이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처벌 및 통제 강화라는 정책 역시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한국의 학교는 두발 단속, 복장 검사, 야자 인원 조사 같은 단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난무하는 현실이 보여주듯, 이미 지나치게 많은 감시와 통제가 있어왔다. 또 '스쿨폴리스'가  ‘학교 담당 경찰관제’라는 이름으로 17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매 번 몇 년을 주기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한다는 내용의 정책들이 재탕, 삼탕되어 발표되고 있지만 학교 폭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기존의 감시와 통제의 낡은 방식에 의존하는 해결책들은 지속적으로 실패해왔던 단골 뻘타 정책인 것이다.
 
  왕따 문제를 비롯한 청소년 인권 문제는 감시와 처벌의 집중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단지 청소년의 인권을 저해하는 폭력일 뿐이다. 이에 우리는 청소년을 향한 경찰공권력 강화 움직임을 중단하길 요구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대책을 청소년의 권한을 강화하고 학교에 인권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에서 찾기를 권고한다. 



2011년 01월 0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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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2. 1. 6. 15:59

치안, 정치, 청소년인권운동, 학생간폭력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구별하며 대립적인 개념으로 정립합니다. (저도 번역된 책 하나 안 읽고 소개하는 글들만 읽은 잘 모르는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들을 여기서 무리해서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감히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의 중요한 부분을 다 생략해버리고(?!) 개략화해서 이용해보겠습니다.)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치안은 이미 합의된 것 속에서 공백, 보충, 불일치를 제거하는 것이고, 정치는 지금의 사회와는 불일치를 일으키는,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고 보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 거칠게 요약하면 치안은 현재 사회의 ‘합의’ 속에서 지금의 사회를 유지하는 작용이고, 정치는 ‘불일치’를 일으키며 지금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용입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인권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봅니다. ‘성문화된 인간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 또한 인간이며 그 권리가 자신의 권리임을 주장할 때, 그 실천과 불화 속에 인권의 의미가 있고 그러므로 인권은 곧 정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인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권은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가지지 않고, 자신들이 갖지 않은 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라고.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포함한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은 인간의 권리로 성문화되어 있는 것들이 어째서 현실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보장되지 않는지 질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청소년은 어째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폭력을 당해도 그것을 폭력이라 부를 수 없지? 청소년은 어째서 자기 사생활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지? 청소년은 어째서 학교 운영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지? 청소년은 어째서 공부해야만 하는 존재로만 생각되고 놀 시간도 여가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지? 이처럼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당하고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서 배제당한 청소년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청소년인권운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청소년인권운동도 분명 ‘정치’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집중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소위 ‘학교폭력’ 문제, 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학생간 폭력․차별․괴롭힘’(너무 기니까 앞으로 그냥 ‘학생간 폭력’이라고 부르겠다.)은 청소년인권운동의 문제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학생간 폭력’은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학생간 폭력’은 폭력이고 범죄이며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지요. 그리고 ‘학생간 폭력’에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거나 하는 과정 역시 이미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합의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학생간 폭력’에 국가․사회가 대처하는 것은 현재 합의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 활동이며, 정치와는 반대되는 활동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학생간 폭력’에는 합의되지 않은 부분들,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학교폭력’이라는 명명에 대한 문제제기에서부터(“왜 ‘학교폭력’은 ‘학교에 의한 폭력’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아니고 ‘학생들에 의한 학생에 대한 폭력’만을 뜻하는가?”), ‘학생간 폭력’의 피해자가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학교가 은폐하는 문제, 피해에 대한 구제의 미흡함, 그밖에 학생간 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 방식이나 관행의 문제점 등), 또는 ‘학생간 폭력’ 중에서도 장애․성소수자․이주민․경제력 등 다른 사회적 차별의 요소가 포함된 경우들, 그리고 ‘학생간 폭력’의 성격을 규정하고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등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쟁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쟁점들은 초중고등학생들이나 청소년들 일반의 사회적 조건과 권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거나, 또는 그 안에서도 다시 또 다른 소수자인 이들이나 폭력 피해자들의 권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의 영역에 속합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국가가 ‘학생간 폭력’ 문제를 ‘치안’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면, 청소년인권운동의 차원에서는 비교적 ‘학생간 폭력’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청소년인권운동은 ‘학생간 폭력’의 문제가 치안의 방식만으로 해결 불가능하며 (치안 역시 필요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조악한 비유를 들자면, 예를 들어 절도 등 ‘생계형 범죄’가 증가한다면 국가는 그 범죄를 제거하고 처벌하고 대응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고, 좌파나 빈민운동 단체 등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조적 해결책(부의 재분배나 빈곤층, 노동자계급의 권리 문제 등)을 이야기할 텐데, 그와 대충 비슷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학생간 폭력’ 문제가 모두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듯해서 ‘학생간 폭력’ 문제를 접할 때마다, 어줍잖게도 자크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 개념이 떠오르는지라 적어보았습니다. ^^;; 운동 단체에 ‘치안’적 역할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날 때가 있는가 하면, ‘정치’ 차원에서만 학생간 폭력 문제에 접근하는 게 너무 공허해보일 때도 있지요. 사안을 정리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학생간 폭력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저 말고도 다른 활동가 분들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올리고 논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매우 짧은 지식으로 쓴지라 호...혹시 자크 랑시에르 공부하신 분께서 태클을 걸어오셔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글이니;; 랑시에르의 개념 자체을 가지고는 '지적질'해주시면 겸허히 받아들입니다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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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3. 3. 17:14
아수나로북, 학생간 폭력 글로 새로 쓴... 거의 마감에 빠듯하게 맞춰서 썼는데 정작 원고에 안 넣어 보냈다가 다시 넣고 이러쿵저러쿵..............

요즘은, '솔직함'이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많이 한다.





“학교폭력”? 학생간 폭력? 학교의 폭력? 사회의 폭력?



  어쩌면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소위 “학교폭력”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권침해 문제는 청소년인권운동에게는 취약한 부분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싸우는 청소년인권운동에게 청소년들이 폭력의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사안을 다루는 것에 곤란함을 느껴왔다는 것이다. 다른 사안들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모르겠달까….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복잡한데, “학교폭력”을 정부라거나 이 사회가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빌미랄까 도구로 이용해먹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교폭력”은 일진회 사건 등이 이슈화된 이후로 청소년들의 미성숙성, 충동성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사용되었고 청소년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심정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을 너무 풀어놔줬기 때문에 “학교폭력”이 발생하며, 청소년들을 더 빡세게 두들겨 패가며 학교 교육에 붙들어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던 것이다. 학교 안에 CCTV(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것도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시행되고 있으니….
  사실, “학교폭력”은 그 명칭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이 “학교폭력”이란 말은 1990년대 중반에 유통되기 시작한 말이다. 1990년대 중반이면 청소년인권운동이 그 첫발을 내딛던 시기이기도 하다. 처음에 “학교폭력”이 심각하다는 말이 뉴스에 나왔을 때 거의 최초의 온라인 청소년인권모임이었던 ‘중고등학생복지회’ 사람들은 “드디어 선생들이 학생들 패는 게 뉴스에 나오나보다!”하고 TV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웬걸, 거기서 나온 건 학생들 사이의 폭력만 나오고,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아서 좀 벙쪘다고 한다.
  이처럼 “학교폭력”은 실제로는 “학생들 사이의 폭력”을 가리키면서 “학교폭력”이란 명칭을 쓰고 있으며, 이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른 수많은 폭력들 ― 교사의 체벌, 언어폭력, 입시경쟁과 강제적 교육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구조적 폭력 ― 은 ‘폭력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 물론 반대로 긍정적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학생간 폭력”은 학생들이 나쁘고 악독해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는 의미로.
  어찌 되었건, 이런저런 어려움과 곤란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인권운동은 ‘학생간 폭력’ 문제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학생간 폭력에 대해 청소년인권운동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라는 100% 완성된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름 이런저런 고민들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일부 날라리 양아치들의 문제?

  학생간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학생간 폭력이 일부 문제가 있는 ‘날라리’, ‘양아치’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이런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격리하거나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죄는 사회적인 것이고, 더군다나 그 범죄 행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회적 원인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일부 ‘문제집단’을 만들어서 그 문제집단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찍고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이런 해결방식은 반인권적이기도 하다.
  학생간 폭력의 유형을 딱딱 나눠서 이야기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예를 들 수는 있을 것이다. 빈곤이나 낮은 성적, 가정 환경 등의 문제로 자존감이 낮거나 차별받는 학생들이 자신들을 표현하고 표출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택하는 경우, 집이 부유하거나 성적이 좋거나 선배라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학교 안에서 권력이 있는 학생들이 그 권력을 이용해서 다른 소수의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경우, 획일적인 생활 환경에 길들여져서 자신과 다른 차이가 있는(장애, 피부색, 말투, 성적 지향 등) 학생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그 소수자 청소년을 괴롭히는 경우, 청소년들 사이에 우발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 등등…. (이 중에서 청소년들 사이에 우발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는 때때로 큰 부상이나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겠다. 보통 문제시되는 ‘학생간 폭력’은 일방적이거나 지속적으로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들이니까.)
  학생간 폭력은,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인 요인들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가해/피해 학생들의 성장사이든 계급적 위치이든 아니면 이 사회의 획일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이든…. 특히 빈곤 청소년들은 가정 환경, 사회적 차별, 입시경쟁교육에서의 탈락과 열패감 등의 요인 때문에 가해자가 되기 쉽다.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학교폭력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어쩌면 사회 구조적인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폭력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은 보통 퇴학, 징역 등의 처벌을 뜻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보통 가해자 청소년들을 사회에서 탈락·배제시킴으로써 더 많은 범죄자들을 만들어내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역으로 말해서 학생간 폭력은, 일부 정신이 이상하거나 폭력성이 과도한 문제적 개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학생간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여러 가지 조건들은 그것이 빈부격차이건 가정에서의 폭력이건 수직적 권력 구조이건 경쟁적 교육환경이건,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간 폭력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폭력의 재생산이다. 학생간 폭력의 가해자들 중 상당수가 어떤 형태로든 폭력의 피해자였던 경험과 상처가 있다고 한다. 가정에서 당한 폭력이건, 교사에게 당한 폭력이건, 다른 학생에게 당한 폭력이건. 실제로 학생간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몇 년 뒤에 학생간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들은 몇 차례 보고된 바 있다. (관련해서는 청소년폭력예방재단 등에서 나온 사례 자료들을 참고하시라.) 그리고 선후배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의 형태들은 종종 교사가 학생들에게 ‘기합’을 주거나 체벌을 가할 때의 모습들을 모방한다. 이런 폭력의 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군사주의·군대식 문화 등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폭력은 재생산된다. 폭력의 상처를 몸과 마음에 아로새긴 사람들은 그 폭력을 다시 재현하기 쉽다. 학생간 폭력을 이야기할 때 교사의 체벌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하는 많은 폭력들,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체벌이나 학대 같은 폭력들에 대해 간과하고 갈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학생간 폭력은 철저하게 사회적인 폭력이다.


학생간 폭력이 없어지려면…

  학생간 폭력에 대해 우리가 단기적 조치로 요구할 것은 많다. 우선,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의 명예’를 따지며 이를 덮고 은폐하려고만 드는 많은 학교들의 태도와 행태는 당장 고쳐져야 한다. 학생들의 존엄성, 인간성보다 학교의 명예(그리고 일부 교장, 교감 등의 승진)를 더 중요시하는 듯한 이런 태도는 계속 문제가 되어 왔다. 지난 2008년에도 강원도 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학생회장이 폭력을 휘둘러서 다른 학생이 죽은 사건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학교 측의 태도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사건이 있었다. 학생간 폭력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부모들은 학교 측의 태도 때문에 자기 자식이 학교로부터 버림 받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학교(교장, 교감, 교사들을 포함해서)에서 학생간 폭력 문제 해결에 성의 있게 임하기만 해도 학생간 폭력 문제는 많이 감소할 것이며, 못해도 피해 학생들은 더 적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피해 학생의 치료에 드는 비용을 국가, 학교가 제대로 부담하지 않고 있는 현실도 문제다. 학교안전공제회에서 규정상 학생간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집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학교측은 학생간 폭력 사건에 책임을 지는 것을 회피하는 일이 많다. 학생간 폭력의 피해자들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치료하기 위한 치료비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곤 한다. 보편적인 건강권 보장의 측면에서라도 이를 이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학생간 폭력의 가해자들(때로는 피해자들에게도)에 대한 대응 방식도 문제다. 한국의 형벌 제도는 보통 처벌 위주로만 되어 있고, 이는 청소년들에 대한 형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학생간 폭력 가해자들을 그냥 훈방시키거나 ‘강제전학’ 보내는 정도로 사건을 덮는 것도 문제이고, 가해자들을 ‘소년원’에 처넣는 게 능사인 줄 아는 것도 문제이다. 학생간 폭력이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가해자들에 대해서도 폭력 재발을 방지하고 가해자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조건들, 심리적 상황들을 개선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그것이 상담이건 다른 생활 환경의 제공과 치유이건.
 
  그러나 방금 언급한 조치들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학생간 폭력 자체가 완전히 예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 사후적인 조치일 뿐이다. 학생간 폭력, 또는 “학교폭력”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차라리 그냥 학교를 없애 버리는 게 어떠냐(사실 반 정도는 농담이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그 해법은 쉽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학생간 폭력이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이 상호작용해서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간 폭력이 지극히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런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하나하나 오래 걸리더라도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학교폭력”을 없애기 위해 감시카메라들을 학교에 설치하겠다고 날뛰는 것 이상의 더 좋은 대책이 나오리라 믿는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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