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3.28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2. 2008.01.31 태안기름유출사건에 대한 고찰
걸어가는꿈2014. 3. 28. 11:10

http://www.redian.org/archive/68571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반론] 서윤님의 레디앙 칼럼 글에 대한 반론



By   /   2014년 3월 28일, 9:50 AM 



제가 활동하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2014년 3월 21일, “반핵과 탈핵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수나로 인천지부가 3월 20일에 열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 김익중 교수 초청 탈핵 강연>에서 이 행사의 표어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배포한 전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같은 내용을 온라인에도 게시한 것입니다.


그 뒤에 아수나로의 회원이며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도 가입되어 있던 이가 그 글을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 올리면서 페이스북에서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글을 행사 주최 단체들 중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YWCA 등의 홈페이지에도 올려뒀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녹색당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2012년 선거 당시 이 구호에 대해 아수나로가 문제제기한 적이 있으며 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이에 대해 서윤님이 이런 글(관련 글 링크)을 레디앙에 쓰셨더군요. 일단 여기에서 교사와 학생 관계를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예시”라면서 끌어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는 관계도 아니구요. 혹시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후덜덜, 무서운 일입니다만. 글 전체를 살펴보면 아무래도 교육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탈핵운동의 표어 이야기가 그냥 예시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럼 해당 표어에 대한 논쟁 이야기를 굳이 가져올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논변이 산만하고 예시가 부적절하며 추상적인 개념에 휘둘린 글이라 하겠습니다.



평등은 교육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하간 해당 글의 가장 주된 논지가 “교사와 학생은 평등할 수 없으며 위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니 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서윤님은 평등이라는 개념이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들고 오면 여러 논의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 글이 상위 개념들을 끌어와서 논의를 거칠게 퉁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서윤님은 한편으로는 ‘평등’이나 ‘교육’ 같은 개념을 본인이 생각하는 좁은 의미로만 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도 도대체 무엇이 평등인지, 같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다르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사용할 때 세밀한 정의가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런 논의 없이 ‘평등’을 ‘동일’하거나 ‘등가의 교환(호혜)을 할 수 있는 관계’라는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글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이 ‘역할’과 ‘위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학교-교육에서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역할이 다른 것이 곧 상하관계, 위계를 만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역할과 자리의 다름이 교사를 학생의 ‘윗사람’으로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라는 주장도 ‘베풂의 질과 양’을 대체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왜 그게 ‘동등’해야만 ‘평등’한 건지,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적혀 있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지만 장애인에게 보조를 받는 것은 별로 없으니 장애인과 위계적인 관계를 맺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서로 평등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서도 그다지 서로에게 ‘동등한 질과 양의 베풂’을 주고받지 않고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원래 인간관계 안에서 얻는 이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질과 양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교사가 학생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과 삶의 의미를 느끼고 또 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그 관계에서 교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고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배움’의 관점으로만 그 ‘호혜’를 평가하려 드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현실 속에서 ‘지적 권위’ 등의 문제를 얘기한다면 같이 고민을 나눠볼 만도 하겠습니다만…. 추상적이면서도 자의적으로 정의된 호혜니 평등이니 하는 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위계가 없으면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단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루려는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 서윤님에 따르면 후배, 후임자, 자녀 등과 그 상대 역할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다가올 이야기지요.

근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그렇습니다. 일단 학습자의 경험에 중심을 둔 교육, 무형식 교육 등을 다루는 여러 교육학적 논의들이나 탈학교론의 주장을 깨끗이 무시하는 셈이지요. 혹시 지극히 ‘학교화’된 고정관념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아래 엄기호님의 논의도 역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여야 비로소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가. 평등한 관계에서만 대화가 일어나요.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가정할 때만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요. (……) 그런데 지금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가요? 우정의 관계인가요? 여러분도 처음에 교사가 됐을 땐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교사들 인터뷰를 해 보면 선한 마음으로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100이면 100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분들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그냥 애들한테 가서 장난치고 떡볶이 사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친구 같은 교사가 되려고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우정의 관계이고, 우정의 관계는 평등을 전제로 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면서 학생과 교사를 평등한 우정의 관계로 안 바라봤어요. 친구라기보단 ‘큰형님’이 되려 했죠.” (엄기호, 〈당신은 학생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 [오늘의 교육 제13호(2013년 3․4월호)])


엄기호님의 주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엄기호님은 이 앞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평등’하다고 이야기합니다.(서윤님이 혹시 이것이 자신의 ‘상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서 굳이 덧붙여둡니다.) 그리고 평등해야만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지요.

저는 엄기호님의 논리 전개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성실하게 성찰한 결과이며 ‘들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평등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에서 교육이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평등은 1차적으로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 평등’에 불과하다구요?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바로 실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평등은 누군가가 더 열등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역할’의 차이 등을 ‘위계’, ‘상하관계’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등한 관계에서의 만남과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것입니다.

서윤님이 학생인권조례 공청회에서 들었다는 학생 분의 발언은 아마 그런 생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크 랑시에르 등의 논의도 좀 더 붙여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만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보호주의를 반영하고 활용한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 표어가 아이들에 대한 ‘보호주의’를 활용한 것이고, 탈핵운동 내의 아동․청소년관(觀)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후로는 그냥 ‘청소년’이라고 쓰겠습니다. 10대 또는 0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주십시오.)

그 결과 청소년들을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문구가 되었구요. 물론 이 문구 하나 때문에 청소년들이 배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구를 포함해서 탈핵운동,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회 전반의 청소년관 자체가 청소년들을 배제하지요. 이 문구는 단지 그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시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청소년이 무력하고 약한 희생자, 어른들이 책임지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불려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청소년, 실제로 보호대상 맞습니다.

그런데 비청소년도, 실제로 보호대상이 맞습니다. 이건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특히 방사능 물질의 경우, 정도차가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해롭고 모두가 보호받아야 합니다. 왜 굳이 “아이들”을 콕 집어서 쓰는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따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서윤님의 말처럼 좀 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위계’ 속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주장 아닐까요? 그것은 보호나 보장을 시혜로 보는 것이니까요. ‘보호’가 위계와 차별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를 주체에서 배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이유가 되며, 누군가를 보호대상의 자리에만 위치시키는 ‘보호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A4 1쪽의 짧은 글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믿었습니다.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이라면,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차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전반적인 청소년관을 성찰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설명이 참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징후는 실은 2012년부터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2012년 글입니다.


“SNS에서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녹색당’이란 구호가 적힌 작은 손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 이에 대해 ‘청소년과 아동에 대한 보호주의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생겼다. (……) 다음날 아침에는 ‘청소년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이라고 수정된 손현수막이 사무처에 도착했고, SNS에 바로 사진이 올라갔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깐,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소년 운동을 했던 활동가가 말을 걸어주었다. 본인도 그 청소년 단체의 지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껴안고 가야한다고.” (송준규, 〈풀뿌리들의 놀이터〉, [공동선 104호]. (관련 글 링크) 에서 인용.)


“청소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이라니,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표어입니까? “아이들에게”를 바꾸다보니까 나온 괴작인 셈입니다. 게다가 “청소년과 함께”라니, 그 ‘함께하는’ 주체에서 청소년이 떨어져나왔다는 문제점은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아이를 청소년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어린이’보다는 ‘아이’라는 말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라는 말 자체를 갖고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실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청소년운동도 껴안고(?) 가야 하니까”라는 얕은 발상에서 나온 표어라고 할 만합니다. (옆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청소년운동을 했다는 활동가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저랑 면담 좀 하실래요? ^^)


저는 “아이들”이 “다음 세대”를 뜻한다는 변호가 기만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수백년이나 수천년 후에 40대, 50대, 60대 모습을 한 미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나이가 적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순수함, 무고함, 약함,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 결국 이 표어가 보호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청소년을 동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활용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포스터와 홍보문구에서 보이듯 ‘내 아이’, ‘내 자녀’, ‘우리 아이’를 내세우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탈핵을 주장하는 분들이 거론하는 것이 주로 2030년 탈핵인 것으로 압니다. 다소 유보적 입장의 정당도 2040년을 이야기하더군요. 독일은 2022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먼 미래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룰 수 없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나요? 저는 실제 내세우는 정책을 봐도 그렇고, 저 표어의 효과 면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를 가리킨다는 변명은 문제제기를 피해가려는 불성실한 답변일 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만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연대’도 평등에서부터


이 글을 통해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평등’이나 ‘위계’나 ‘교육’이나 ‘아이들’ 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쓰다가 그것 자체에 경도된 나머지 인정할 부분마저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포함하여 환경-생태-녹색운동에 청소년보호주의나 청소년 차별의 문제가 상당히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생태-녹색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이나 여러 영역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교육단체, 환경단체 등이 다수 참여하는 ‘아이건강국민연대’가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청소년운동과 마찰을 빚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은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을 하고, ‘평등’을 요구하겠지요. 교육뿐 아니라 연대 역시 ‘평등’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이번에 간단한 글을 하나 써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탈핵운동을 하는 분들 등이 청소년운동과 연대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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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8. 1. 31. 13:45
서울대 환경동아리 씨알의 민재 씨가 쓴 글입니다.
기름유출 사건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과 생각할 거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태안기름유출사건을 보며


서울대 환경동아리 씨 민재(달)



  태안에서 1 만 톤의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대선이라는 큰 사건 속에서도 태안기름유출사고는 관심을 받으며 40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태안을 다녀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손을 통한 방제가 최선이라고 할 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다녀간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작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자원봉사와 삼성의 틀을 넘어서


  하지만 자원봉사에 대한 열광적인 언론 보도는 오히려 많은 쟁점과 현실을 묻히게 하고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자원봉사에 대한 보도는 대선후보와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한 이벤트로 점철되고 있으며, 어민들의 생계 문제와 보상의 어려움은 제대로 이슈화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1차적인 책임의 소재만을 찾아서 이야기하는 운동단체들의 발언도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단일선체를 규제하지 않은 것, 삼성이 제대로 된 사과발언조차 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리고 씨프린스 호 때의 배상처럼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생태계의 재생을 위한 기금 마련을 오염자인 삼성이 부담해야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화석자본주의


  그러나 태안기름유출사고는 자원봉사, 삼성의 책임, 정부의 규제가 적었다는 것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화석연료의 채굴과 운송, 사용에서 일어나는 - 전쟁과 기후변화, 대기오염 등 - 사회 문제와 환경 파괴의 맥락 속에서 이 문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화석연료의 사용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깨닫고, 태안기름유출사고를 한국사회의 반자본주의적, 생태적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사고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화석연료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연료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력과 목재의 불충분한 공급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속화와 공간적 확대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석탄이었으며 이는 곧 대부분 석유로 대체됩니다. 화석연료의 여러 특징이 자본의 가속화된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화석연료는 1) 장소에 관계없이 자본이 원하는 만큼 2) 계절이나 시간에 관계없이 비축하고 투입이 가능하며, 3) 집중화되고 집적화된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기름유출사고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자본주의가 가지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입니다. 전지구적으로 한해 1000여건의 크고 작은 기름유출사고가 일어나며, 90년 대 동안 태안 기름유출량의 100배에 달하는 100 만 톤의 기름이 바다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이것은 70년대에 300 만 톤이었던 것이 줄어든 수치입니다.


  그러니 1차 에너지의 65%(2006년 금액대비)를 석유로 충당하고 있으며, 허베이 스프리트 호의 774배에 달하는 8억 8천 9백만 배럴(유출된 기름의 1 만 배)에 상당하는 석유를 수입하는 한국에서 커다란 기름유출사고가 15년이나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1년에 우리가 쓰는 석유의 0.01%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도 이런 엄청난 재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5년만의 사고이니 다시 계산하면 0.001%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도 이런 파괴가 일어난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니겠지요.



피해는 누구에게로 가는가


  항상 피해는 가장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이번 문제가 얼마나 화석 자본주의와 연관되어있는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창출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적, 환경적 피해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도적, 법적 틀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맨손 어업민들 그리고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 생태계의 많은 생물들은 어렵고 복잡한 배상절차 속에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태안사건은 환경적 피해가 어떻게 약자에게 전가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앞서 배상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배상이라는 것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것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계, 그리고 그와 함께 파괴된 공동체는 결코 원상 복구될 수 없습니다. 주민들은 지역의 해안 생태계에 의존해서 살고 있었고, 그러한 생태계가 장기적으로 파괴된 상황은 곧 공동체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경 문제가 발생하면 1차적으로 자연에 의존하던 - 즉, 근대사회에서 가장 주변부에 위치한 -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결국 생계가 어려워지는 사람들은 누군가 강제하지 않더라도 일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도시 인근 지역으로 이주할 수 밖 에 없으며, 결국 이것은 도시 빈곤층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파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돈을 벌 수단이 사라져 '이주'한다는 것 정도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마을 주민들에게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자원입니다. 수 십 년 동안 함께 한 공동체 생활은 사람 사이의 유대, 고향이라는 장소에 대한 감정 등을 생성해내고 이것은 주민들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공동체가 무너지는 경험은 정서적 공황을 불러오며 이것은 평택, 부안, 새만금 등지에서 주민들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자원은 돈으로 메워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담론은 실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한반도가 세계적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고 근대화의 전철을 타는 순간부터 1차적으로 자연에 의존하던 지역 공동체들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처럼 인클로저 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기제들이 있어 지역 공동체의 붕괴와 근대적 도시의 성장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여기에는 농산물 가격을 저가로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 요인, 신분제의 유산이 남아있던 것처럼 (도시에서나 받을 수 있는 근대) 교육에 대한 열망, 근대적 도시에 비교되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는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습니다. 도시로 나온 이주자들은 임노동자가 되었고,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댐, 골프장, 새만금, 핵폐기장, 기업도시, 재개발 등 근대화의 산물들은 모두 지역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주요한 현상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제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도 넣게 되었습니다. 태안의 사건을 관리하지 못한 사고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아무런 맥락도 가지지 않은 것이 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금까지 공동체를 무너뜨려온 힘 - 즉 근대화와 그 물적 토대로서의 자본주의 - 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한다면, 태안의 공동체 붕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배상의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새만금의 경우 서해안에 위치하고 갯벌에서 맨손어업을 하던 주민이 많았던 점등이 태안 등 서해안 피해 지역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이걸 토대로 기존의 배상 속에서 보인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편견과 구조 그리고 계급적으로 갈리는 상황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실제 보상에서의 문제]


  새만금 공사가 진행되고 보상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구체적으로 보상이 어떻게 주어졌나 보자.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신고를 해야했다. 신고 기간 안에 제대로 신고를 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 이전까지 어업에 종사했더라도 ‘선외’로 구분되어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로 여성이 해 온 갯일의 경우 3년간의 수입을 보상해주는 것이었고 1등급에서 6등급으로 나누어 200~10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주로 남성이 해온 선박 어업의 경우에는 5년간의 수입을 보상해주는 것이었고, 선박이 10톤 미만일 경우 톤수에 따라 3500~7500만원의 보상이 주어졌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최대 2명만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양식업과 같은 면허 어업의 경우 양식장의 시설에 따라 수억의 보상금을 받았다.

  여기서 갯일은 3년, 어선 어업의 경우 5년의 수입을 보상한다는 것에서의 불공평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가구에 2인 제한을 두면서 보통 보상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받게 되었다. 또한 실제 맨손어업에는 여성이 많이 종사하지만 더욱 많은 남성이 보상금을 받았다.(남성 498명 여성 470명) 보상금의 금액에 있어서도 실제 갯일로 벌어들이는 금액보다 훨씬 적은 돈이 제시되었다. 한달 100~200만원, 1년이면 보통 1600만원을 넘어간다. 하지만 3년간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최대 1000만원 이었다.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으로 집행된 보상에 의해 이전까지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여성들의 위치는 급격히 하락했다. 배를 타고 반년 이상 객지에 나가 운에 따라 빚을 지기도, 돈을 벌어오기도 했던 남성들과 달리, 맨손어업을 통한 수입은 꾸준한 소득을 보장했다. 실제로 생계를 짊어진 것은 여성이었다.

  면허어업의 경우 특히 지역유지, 공무원과 손이 닿은 사람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들 만이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건수는 적지만 가장 많은 보상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보상에 대한 불평등은 지역 사회를 더욱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씨알 2005년 여름 새만금 현장활동 자료집 중 - "새만금, 그곳엔 여성들이 있다. 윤박경." 에서 참조한 글]


  물론 태안의 경우 새만금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면허어업과 어선어업/맨손어업 종사자들의 액수 차이, 너무나도 적은 보상비, 그것도 가부장적 구조가 그대로 반영되어서 보상이 된 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세한 어민들, 맨손어업 주민들, 민박집 등 기존의 국가의 관료 시스템으로 잘 통제되지 않던 사람들의 배상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소득을 증빙하는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영세 어민들은 영수증 없이 현장에서 거래를 해왔다고 합니다. 맨손어업의 경우 면허를 갱신해야 하는데, 갱신비, 절차 등이 있어 그냥 면허 갱신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민박집의 경우도 소득 증빙을 할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근대적 국가에 체계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주변에 위치한 사람들은 환경적 부담을 그대로 떠안게 됩니다. 더불어 제대로 신고조차 하지 않고 지금까지 탈세를 저질렀다는 도덕적 비난까지 함께.

  정신적 문화적 자원인 공동체를 잃을 위기에 처하고, 그나마 생계를 이어가던 수단도 사라진 주민들에게 또 하나 남은 장벽은 바로 건강의 문제입니다. 원유는 정제되지 않은 기름덩어리로 다량의 발암물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건 초기에 원유의 30%가 휘발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이것은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에게 다량 흡입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휘발되는 성분은 다방향족 탄화수소와 발암물질인 톨루엔 벤젠 등입니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노령화되어있으며, 일당을 받으며 장시간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장기적인 건강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급성 증상으로 구토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호송된 사례가 생겨난 것과 방제에 투입된 주민의 절반 정도가 여러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짧게라도 노출되는 자원봉사자들에게도 미약하게나마 나타날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는 환경적 피해를 짊어지는 한 가지 양상입니다.



자연통제의 환상


  사건 이후 한국의 관료와 방제 (기술) 시스템은 그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관료와 기술자들을 비웃는 것으로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초기에 정부는 기름유출사고가 그렇게 크지 않으며 멀리 퍼지지 않은 채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 되면서 그 말을 주워 담아야 했습니다. 예상보다 기름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던 것입니다. 미리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요동치는 조류를 따라서 기름은 태안과 보령을 덮치고 그보다 아래에 있는 전라도 제주도까지도 흘러내려갔습니다. 사태 초기에서부터 자연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했고, 자연의 역동성 앞에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내놓은 기술적 해결책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는 것들이었습니다. 유화제의 과다한 사용은 겉으로는 기름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지만 1차적으로 유화제라는 화학물질 자체가 오염을 일으킵니다. 유화제는 다르게 말하면 기름과 물이 섞이게 하는 세제(혹은 계면활성제)입니다. 이 물질 자체가 일으키는 오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성에 대한 인식이 있기에 정부 측에서는 씨프린스호 사건 이후 다음과 같은 자체 수칙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12년 전의 시프린스 호 사고 이후 수심 10m 이하의 해역과 어장 양식장에 3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지역에서는 유화제를 전혀 사용할 수 없으며, 수심 10~20m 지역은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기타 지역은 책임자가 판단 한다"


  2 차적으로는 잘게 분해된 기름이 바다 생물들의 몸에 쉽게 흡수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가라앉은 기름들은 사실상 인위적 처리가 불가능하며, 해안의 바닥에 모여 있다가 수온이 변하면 다시 올라와 2차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구슬처럼 분해된 기름은 손을 통한 방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퍼내거나 흡수시킬 방도가 없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고온고압 세척의 경우에도 다른 문제를 가져옵니다. 갯벌과 바위 틈 모래에는 미생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고온고압(약 80도)의 물로 세척할 경우 열 쇼크로 많은 생물들이 죽으며, 이것은 기름의 자연분해를 더디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명한 사례인 액손 발데즈 호 사건의 경우 고온고압세척을 실시한 해안이 그렇지 않은 해안보다 생태계 복구가 더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고온고압세척 뿐 아니라 큰 가마솥에 돌을 넣고 끓이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방제를 위한 여러 기술들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여러 문제를 복합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오히려 손을 통해서 직접 닦고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적으로 정화되길 바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생태계 친화적인 방법이라고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주장합니다. 해경은 1만 5천 톤의 기름 유출 사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방제시스템을 갖추었고 지휘체계도 해경으로 일원화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나타난 것은 이런 무력함이었습니다.


  근대적 국가는 환경오염이라는 근대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전문가와 그들이 생산해낸 기술지식에 의존하는 관료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환경영향평가라는 제도와 환경부라는 기구는 이러한 관료 제도의 현상 형태입니다. 이런 것들은 과학기술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고, 또한 감소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 데서 나온 제도입니다. 즉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관리가능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국가의 관료 체계는 자연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서울의 대기 질은 여전히 세계 최악의 수준입니다. 팔당 상수원은 그 많은 비용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결코 1급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시화호 또한 - 과학적 예측의 - 대표적인 실패의 사례입니다. 이런 긴 실패의 사례들 끝에 태안 사고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실패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이 요구됩니다. 먼저 근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을 버려야합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객관적이고 이성적, 중립적이라는 단어를 뒤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과학기술 자체가 정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뒤로 한다 해도, 과학기술이 작동하는 제도 - 즉 연구소와 대학, 평가기관들 - 는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근대 과학지식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자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상호작용들 - 아니 생태계의 정의조차도 논쟁거리입니다. - 지하수의 움직임 같은 것들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전문가들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환경 문제를 과학기술이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 문제는 자연과 인간 사회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서울시의 대기질 문제는 대기과학자들이 분석해서 해소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동차로의 이동이 강제되는 도시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기후변화 문제도 과학으로만 풀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화석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에 의한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이윤을 포기하면서 자본이 기후변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할까요.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들은 어떻게든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대신 새로운 자본의 이윤 축적 동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생산되는 바이오연료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에 의한 또 다른 환경 파괴와 원주민의 공동체 파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지오엔지니어링이라 불리는 - 탄소를 포집해 심해에 저장한다던지 하는 - 여러 해법들은 자본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이윤 축적을 도와주면서, 자본에 의해 생겨난 위험을 자연과 인간에게 전가시키는 일입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도 생태 전문가들, 해양 전문가들만이 발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기름의 효과적인 제거와 이중선체 의무화라는 기술적인 해결책에만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과학기술이 밝혀주지 못하는 사회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발언해야만 합니다.

 

   

책임 묻기


  이제 유조선과 인양선이 충돌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봅시다. 유조선(화주는 현대오일뱅크)은 정박 중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인선에 이끌려 움직이던 크레인(삼성물산 소유, 삼성중공업이 임대)이 밧줄이 끊어져 통제 불능의 상태에서 유조선과 부딪힌 것입니다. 단일선체였던 유조선은 검은 원유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폭풍우 속의 무리한 운항, 경고에도 불구하고 운항한 것들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정부는 관련된 실무자들을 처벌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상은 유조선이 들어있는 보험사와 국제유류보상기금(IOPC)이 지불하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사업자 보호를 위해 책임제한조항도 한국 법에 있습니다. 즉 유조선 선주와 삼성 중공업은 몇몇 관련 인사의 처벌만 있을 뿐, 실질적인 배상에는 관여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보험사와 유류보상기금이 주도하는 배상절차는 주민들에게 무척 어려운 과정이고, 청구된 금액의 30%정도만이 인정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본 축적에서 발생한 문제와 충격은 자본주의적 충격완화 시스템 - 보험 - 과 주민과 자연에 대해 비용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완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 3천억 원의 배상한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유류보상기금의 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류오염배상보장법 제 6조에는 "선박 소유자 자신의 손해발생의 염려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무모하게 한"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피해에는 책임제한이 배제된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손해배상한도를 넘어가는 책임에 대해서는 무한책임을 각 회사들이 져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장기적인 공동체에 대한 지원, 생태계의 장기적 모니터링과 기록, 지속적인 방제, 봉사활동의 지원, 의료적 지원 등에 대한 비용이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단일선체에 대해선 한국 정부의 규제가 제대로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단일선체가 분명 사고 피해를 키운 원인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한동안 석유 수입이 계속될 상황에서 이중선체로의 전환이 위험을 어느 정도 줄일 것이라는 것은 고려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하지만 이중선체로 바뀐다고 해서 이 치명적인 유출이 얼마나 통제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선박기름유출사고는 유조선이 아닌 일반 대형선박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세계적인 위험의 분배라는 측면을 보지 못한 채 단일선체라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이것은 한국에서의 기름 유출의 위험을 다른 국가 - 보통, 한국보다 규제가 느슨한 3세계로 - 의 지역사회와 생태계에 이전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석유의 사용이 계속 증대되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일어날 일입니다. 결국 국제적 전망을 가지고 화석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와 생태적 사회로의 전환을 동시에 꿈꾸지 않는다면 한국에서의 이중선체 규제는 보다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닮아갔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연관짓기 : 서해안의 위기


  태안기름유출사건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죽어가는 새의 사진을 보고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파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서해안은 지금 아래에서부터 영광핵발전소, 새만금간척사업, 태안기름유출사고, 석모도-강화도 조력발전소 계획, 한강하구개발이 들어간 서해평화지대 등 여러 사업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해안개발특별법은 이런 경향을 전국의 모든 해안으로 확대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 새만금, 긴 비극의 역사


  서해는 기나긴 간척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백제 때부터 시작된 간척은 점점 그 규모가 커지면서 결국 새만금 간척 사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미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육상화 된 지역을 소규모로 간척하던 고대의 방식과 다르게, 새만금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보도된 33km의 방조제를 바다 한가운데에 만들어 거대한 간척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공구가 막히던 날, 해수 유통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그 이후 갯벌 생명체들의 집단적인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게와 망둥어, 조개들이 살아가던 장소는 지금은 사막처럼 변해서 흙먼지를 날리고 있습니다. 기름 유출로 인한 피해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했고, 어민들은 다시 복구될 거라는 희망도 없이 다른 일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외부 방조제를 다 만든 것에 불과한 새만금 사업을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선전하던 정부는 이제 새만금 특별법을 만들어 남은 공사를 마치려 합니다. 애초에 농업 용지로 공유수면매립면허를 받았던 것을 다시 상업이나 공업 용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며 또한 새로운 환경영향평가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특별법은 이러한 최소한의 조항들을 모두 무력화시켰습니다. 모든 입안권을 전라북도에게 위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새만금은 끝나가는 공사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외부 방조제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내부 방조제 즉 방수제는 외부 방조제의 4배에 달하는 130k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이 끝나고 나면, 상업 용지와 공업 용지로 쓰기위한 땅을 토사로 매립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토사가 요구되며 다시 한국 곳곳의 산이 파헤쳐질 것입니다. 방조제 공사를 하면서도 방조제의 남쪽 끝 해창 갯벌 앞에 서있던 해창산이 사라졌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돌아서 들어가면 허리 아래까지 잘린 산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파괴와 건설이 다 끝나려면 20~30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나긴 비극은 언제야 그 끝을 보여줄까요.


  그러면 이렇게 많은 생태파괴와 공동체를 무너뜨린 사업이 타당성이 있는 걸까요? 정부의 논리는 끊임없이 바뀌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새만금 사업은 농지조성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식량안보의 논리가 주된 이야기였죠. 그러나 전북 주민들은 이 공사가 전북에 파급효과를 가져와 지역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 이야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농지를 만드는 것으로 이것이 달성될까요? 그래서 전라북도라는 지자체에서는 공공연히 공장과 항구를 만드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지역에서 표를 구걸해야 하는 정치인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인제 같은 이들은 대선 기간 동안 새만금을 방문해 두바이와 같은 국제적 도시를 새만금에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결국 애초에 제기된 식량안보의 문제는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전북이 소외된 지역이라는 이데올로기와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이윤을 쫓는 기업이라는 삼위일체는 서해안의 가장 거대한 생태적, 공동체 살해를 불러왔습니다.


-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의 유령


  영광에는 서해 유일의 핵발전소가 있습니다. 핵발전소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기술적인 안전책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고의 위험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배수 문제입니다. 특히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 온배수는 수심이 깊은 동해에 비해 더욱 크고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서해안 지역 곳곳을 들쑤시고 다닌 - 결국 경주에서 안식을 맞이한 것처럼 보이는 - 핵폐기장의 유령도 많은 지역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영덕, 영월, 울진, ‘안면도’, 청하, 장안, 울진, ‘굴업도’, ‘고창’, ‘영광’ 그리고 ‘부안’이 부지로 언급되었고 여기에는 서해안의 많은 지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핵폐기장의 유령이 지나간 곳마다 지역 지원금이라는 유령이 지나갔고 이것은 지역 사회를 찬성과 반대로 갈라놓았습니다. 곳곳에서 투쟁이 벌어졌고, 부안에서는 민란이라고까지 불려진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에도 주민들은 찢어진 공동체를 복구하지 못하고 있고 정신적인 질병들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석모도 강화도 조력발전사업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세계의 여러 나라가 모여 만들어 낸 것이 교토 의정서입니다. 여기에는 3가지 유연성 체계가 동원된다. 공동이행제도, 청정개발제도, 배출권거래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조력발전사업은 유연성체계를 이용해 자본을 축적하려는, 즉 환경 산업의 최첨단에 서있는 사업이다. 조력발전소는 신재생에너지로 선전되어왔다. 화력발전소와 다르게 이것은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곧 친환경적이고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여러 층위의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인천 지역사회에서는 몇몇 단체가 선박의 운해통로를 막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고 있다. 또한 이 사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배출권이 적다는 것도 경제성의 측면에서 문제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거대한 방조제를 쌓아 바다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때 일어날 생태계 파괴 - 그리고 이어지는 공동체의 파괴 - 이다. 방조제가 생길 때 해수의 흐름이 바뀌고, 퇴적, 침식의 작용도 바뀌며, 그곳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 영향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례가 입증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발전과정에서 순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으므로 친환경적 발전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핵발전소와 대형 댐을 통한 발전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볼 수 있다.


- 한강 하구의 개발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한강 하구의 개발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남북 관계의 개선을 경제적 협력의 정도로 평가하는 관행 속에서 지금까지 군사적 긴장 때문에 개발의 압력을 벗어날 수 있었던 민통선 지역과 한강 하구가 새롭게 개발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갯벌 생물과 철새들이 머무르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런 개발은 제고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것은 북한을 자본 주도적으로 통일하려는 경향을 가속화시키는 기제가 될 것이라는 데서도 깊은 우려를 준다.


- 전국 해안의 개발


  해안개발특별법은 전국의 모든 해안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이것은 기존의 환경관련법을 모두 우회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심지어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도 개발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어서 환경부조차도 반대한 법이다.


  이렇게 많은 사례들은 서해안의 생태계와 이에 깊게 의존하는 지역사회의 파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태안의 비극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알리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가와 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을 넘어서


  행정자치부에서는 얼마 전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태안으로 자원봉사를 간 100만명의 사람들을 노벨상 후보로 올리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선의에 대해서 국가는 국가주의적 의미를 덧붙이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10년 전 금모으기 운동에 비견되는 일인 것처럼, 국난을 맞이해 ‘모두’가 함께 위기를 극복했다고 선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국가의 위기였을까요? 우리 ‘모두’가 이걸 극복해낸 걸까요?


  자원봉사에 대한 열광적인 보도, 방제에 대한 진척만을 보도하는 방송과 신문은 사실 삼성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는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바라는 생태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개선을 해내가는 환경주의자들도 - 자본이 아닌 - 삼성이라는 단일 기업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이 생태계를 걱정하고, 주민들과 공동체를 걱정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지점에 서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자원봉사를 갔다고 해서 마냥 희망에 들떠서도 안 됩니다. 결국 태안이 다른 사건들과 고립된 맥락 속에서 해석되며 한국사회의 그리고 국제적인 여타 생명들의 죽음, 공동체의 파괴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여기서 보여준 선의들은 1회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태안은 해석되는 맥락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화석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로서, 근대화에 따른 지역 공동체의 파괴의 연장선상에서, 환경문제를 과학기술적 문제로만 다루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자연통제가 환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맥락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연결들 속에서 태안에 보여준 선의를 1회성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태안 사건을 단순히 저곳의 문제가 아닌, 내가 살아가는 사회적, 물적 토대와 연관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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