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0. 13. 23:10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복합차별에 대해 아시는지?

발새


사실 페인걸은 매번 복합차별을 다루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로, 이번 페인걸 주제, 복합차별이다.

지하철 난투극

60이 넘은 여성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배경이 지하철이라 “지하철 난투극”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동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어린 것이 싸가지 없다’던 네티즌들은 나중에 그 여성청소년이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폭언을 한 상황을 듣고 여중생 vs 할머니의 싸움에서 여중생 편을 들었다. 싸움의 발발은 그 여성청소년이 신발의 흙을 실수로 옆의 그 사람의 옷에 묻힌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조건을 비틀어 보자. 실수로 옷에 흙을 묻힌 사람이 여성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조건에서도 그 사람은 폭언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을까? 영상 속의 사람은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두 가지 약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틀을 각각 들이대면 보이지 않던 이 상황은 여성-청소년이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보여 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복합된 차별은 합집합이라기 보단 교집합의 문제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과 여성 운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여성운동과 청소년 운동이라는 단일한 틀로 잘 담아 지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내부에서도 여성 청소년들은 종종 소외된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중요 의제인 두발이나 체벌 등은 여성청소년보다는 남성 청소년에게 더 압박스러운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에게 예민한 사안인 외박이나 섹스, 임신 등은 어느새 뒤로 밀려난다.

여성운동 속의 여성 청소년들의 존재는 더욱 미미하다. 결혼, 출산, 취업 등 여성 운동에서 주목해온 의제는 주로 성인 여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여성청소년들이 복합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청소년운동+여성운동=여성청소년운동’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은 여성 청소년 고유의 경험이다.

청소년과 여성의 사이에서

너희는 안 꾸며도 예쁜 나이다.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가 안 꾸며도 예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여드름 나고 한창 살찌는 신체 나인데 말이다. 이런 어조는 여성청소년에게 ‘여성’보다 ‘청소년’이 되라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애나 성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외모를 치장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순종적인 청소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에게서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어떤가.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판매하는 대중매체, 외모로 서열을 매기곤 하는 또래 여자 친구들. 여성 청소년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으로서의 이미지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은 물론 ‘외모에 치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몹시 상반되는 것이라 양쪽의 장단을 맞추기가 힘겹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학생부의 눈을 피해 긴 치마를 입었다가, 학교에 오면 다시 바느질을 해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하던 모범생들이라도 수학여행을 갈 때면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놓치는 순간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와 생각 없이 노는 날라리 중 하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위 사진:여러번 바느질한 교복치마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도 청소년기를 복합차별의 대상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담고 싶은 나의 차별 경험담이 없었다. 나의 외모는 지금이나 그때나 성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때 난 철저하게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난 차별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차별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청소년기에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건들을 언어로 바꿔 기억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적절한 언어가 있어야 제대로 기억된다.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도 사랑, 우정, 동경 등 많은 단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단어가 없다면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당한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지 못했고 나의 경험들은 반편이가 되어 여성이나 청소년으로서 겪은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큼직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그 일을 다시 복합차별을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합차별이란 새로운 단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는 길목에서 옳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합차별은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한 체 당사자들의 언어 뒤로 숨어버리고 있다.

약자들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이 참 실감난다.
덧붙이는 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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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2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12일 22:48:4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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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12. 9. 16:05

[페미니즘인(in)걸] 밑바닥에 깔린 청소녀 알바

44만원에 그치지 않는 노동현실

윤티



44만원, 청소년 비정규직 알바


나는 청소녀 알바생이다. 시사in에서 얼마 전에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름붙이길, 일명 “44만원 세대”라고 했다. 나는 여성이며, 청소년이고,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다. 요즘 청소년노동인권 토론회나 언론 인터뷰 등에서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여러 번 우려먹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게 뭐 비밀도 아니고 계속 말해서 닳고 닳을 얘기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ㅋㅋ 그래서 이번에도 내 경험을 가지고 한 번 청소녀 알바생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탈학교 청소년인 나는 부모의 눈치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내가 번 돈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알바를 시작했고, 내가 처음 일했던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일을 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뒤편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남자애들의 일보다 더 편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기준으로 책정된 건지 잘 몰랐지만) 남녀의 시급에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게 그리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계산대를 두드리고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여성다움’을 같이 팔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야 알았다. 난 주문을 하러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맑은 목소리를 선사해야 했고, 버거를 만드느라 지친 몸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여성스럽게 가다듬고, 언제나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하는 ‘험한 일’을 해야 했다.

청소녀들, 돈을 벌려면 성을 이용하라구?

어쨌든 돈은 벌어야 했기에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그만두게 된 뒤에도 다른 일을 구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참 커다란 ‘일’이었다. 사무직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나가서 서류 정리 조금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 4~5시간 일하고 일당은 2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갔는데 가자마자 내게 설거지와 청소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자기가 혼자 일하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못하고 있다고. 이래서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도 잘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돈이 필요하니까 한다고 얘기했고, 그렇게 그 사장의 사무실(인지 집인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급을 받는 날, 그 기러기 사장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에 나는 큰 반항 한 번 못하고 ‘당해야’ 했다. 처음엔 다리를 쓰다듬더니, 나중에는 안아달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냥 박차고 나와 버릴 수도 없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더 치가 떨린다. 나는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사장이 원한 건 내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다른 일이었다는 것이 무서웠다. 여성청소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구하려면 일단 이런 수모는 미리 각오하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사실 처음엔 이런 일을 당했어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장의 해코지가 두려워서, 또는 이제 와서 하소연해봤자 뭐가 있겠나 싶은 마음에, 내 마음 속에만 꽁꽁 숨겨왔던 것 같다. 많은 청소녀 알바생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위 사진:청소년 알바를 모집하는 광고.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밑바닥 노동, 청소년 노동인권 현실

얼마 전인 11월 27일에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발표한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실태’를 보면, 청소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88만원 세대만도 못한 44만원 세대인 청소년 알바. 그래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밑바닥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급이 3770원이었을 때도 2100원, 2500원 등등 햄버거 한 개 값만도 못한 시급을 받으며 청소년 알바는 그렇게 '헐값노동' 취급을 받아 왔다. 그나마 올해부터 시급이 4000원으로 올랐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 또한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가혹하다.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일하는 도중에 휴식 시간과 휴식 공간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휴게시간 따로 없다/휴게실 없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62.0%, 62.8%로 꽤나 높게 나왔다. 근로기준법에도 4시간 일을 하면 30분은 꼭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쉬는 것도 사치일 뿐인 것 같다. 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할 때 매일 똑같은 버거만 먹으면서 좁은 곳에서 딱 30분 쉬게 해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30분이 너무 짧게 느껴졌으니까.

우리가 청소년이기 때문에 고용주(비청소년)들은 우리를 더 쉽게 대한다. 실제로 어떤 청소년은 일하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소년'노동자가 아니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일테다. 일단 '청소년'에 대해, 거기다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해야 할 청소년이 '알바'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딱히 칭찬해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만만한 존재다. 그래서 서비스업, 주문을 받는다거나, 전화를 건다거나 하는 업종에 있다 보면 손님들까지 우리를 막 대할 때가 있다.

용모단정(?)과 밑바닥을 벗어날 날은

나도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확실히 변하지 않는 건, 여성청소년에게는 주어진 일자리조차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는 난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편의점 야간알바는 대부분 남자를 뽑고 오토바이배달이나 다른 배달 쪽 일도 거의 남자가 대부분이다. 청소년 알바도 성별분업이 되어 있다. 여성들은 상냥하고 예쁘고 얌전한 일, 남성들은 힘쓰고, 몸 부딪히고, 강하고, 험한 일. 우리는 그런 식의 험한 일은 여성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교육받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들에서도 여성의 직업과 남성의 직업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보여준다. 그리고 남성 직업인데 그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 소위 말하는 '여성 엘리트' 을 보여주며, 이례적인 일이라는 투로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다른 여성들을 향해 말한다.
"너도 네 재주껏 해봐."
남성은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여성은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다시 내가 알바를 구할 때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 시간을 써야할 것 같은 두려움이 스물스물 생겼다.

여성청소년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안 그래도 '밑바닥 노동'인 청소년 노동에서 그 '밑바닥'을 뚫고 한참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초초저임금인) 시급에 남녀차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손님들을 대할 때 아무리 토 나올 것 같은 손님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급 더 올려 줄테니, 애인이 되어달라는 마초 아저씨들의 더러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과 청소년, 여성 청소년의 노동 현실은 언제쯤 밑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윤티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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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182 호 [기사입력] 2009년 12월 09일 15:14:28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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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 그러고 보니 난 참 운좋게도 좋은 알바를 구한 듯 하네.

    2009.12.09 22:03 [ ADDR : EDIT/ DEL : REPLY ]
  2. 반한나라당유격전투쟁단대장

    소녀동지들이여!

    투쟁을 해야지

    안하고 억울하게 당하기만 할 것인가?

    내가 여러분이었으면 짤릴 각오하고 소녀고용살이노조를 만들어서 우리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었다.

    당하기만 할 것인가?

    나의 동지들이여!

    2009.12.17 00:54 [ ADDR : EDIT/ DEL : REPLY ]
    • 제가 아무래도 활동가 입장이다보니- 그런 말은 쉽게 못하겠습니다 ㅋ;;;;; 노조 만들려고 하면 짤릴 게 뻔한 게 비정규직 파트타임이니까요.
      제가 청소년노동운동 쪽에 뛰어들 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노조를 만드는 건 '우리들의 처지를 이해해달라' 이상이기도 하지요

      2009.12.17 17:19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09. 6. 16. 10:22
촛불세대? 도전과 자살 사이
[김용민 교수 비판] 계급을 말하지 않는 촛불세대 찬양론



최 근 잘못된 교육제도로 인한 10대들의 자살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고, 그 유형도 참 다양한 편이다. 가장 최근에는 5월 28일, 성적에 대한 부담으로 거짓말을 해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중학생 자매가 자살하였고, 그 외 성적비관으로 고교생이 투신자살, 학교에서 체벌 110대를 맞은 후 자살, 무단 조퇴 후 투신자살 등등.

어쩌면 10대들의 각종 자살 소식은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전 대통령의 '서거'에 비해선 주목해야 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최근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정리한 청소년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06년에 하루 평균 1.8명의 청소년이 자살하였다고 하니,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안타까운 자살과는 정반대 방향으로의 이슈도 끊이질 않는 다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시사평론가이자 한양대 겸임 교수인 김용민씨의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충대신문> 6. 8)」는 제목의 칼럼이 그 대표적 사례인데, 촛불시위 초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사회의식을 형성한 10대가 대학생이 되거나, 혹은 투표권을 얻게 되면 사회가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치에 눈뜬 10대 여학생들’…?

사실 이런 류의 주장은 반복되어 제기되어 왔는데, ‘10대 여학생들이 정치에 눈뜨게 되었다’거나 ‘때 묻지 않는 세대의 발랄함’, ‘10대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현상을 봤을 때 이들이 성인이 되면 무엇인가 사회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 서울광장의 촛불소녀들 (사진=손기영 기자)

사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슈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반대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서울시와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입시경쟁을 강화하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대 또한 중요한 이슈였다.

이번 촛불시위에 참여한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설문조사나 연구결과를 봐도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가 촛불시위에 참가하게 된 주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더구나 촛불시위의 아이콘은 다름아닌 ‘촛불소녀’였는데,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이 참가한 거대한 직접행동이 있고 나서도 여전히 그 주역인 10대들의 억압적인 일상생활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의문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10대들이 “대학에 들어올 내년 또는 내후년쯤이면 아마 우리 대학 사회도 생존의 쟁투장이 아니라 가치와 사상이 꽃피는 진정한 지성의 전당”이 될 것이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인데 이들 소위 촛불세대들이 대학을 바꾸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만한 이들이라면 왜 당장 자신이 다니는 중고등학교, 아르바이트 현장을 바꾸거나 개선하지 못 하고 자살을 선택하느냐이다.

촛불… 바뀐 게 없다

물론 안타깝게 자살을 선택한 10대들은 촛불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학과 사회를 변화시킬 위대한 세대가 왜 자신이 당장 속한 교육환경을 바꾸지 못할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실 프랑스 68혁명 사례만 봐도, 10대들이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대학평준화 및 국유화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현상이 ‘촛불시위’를 ‘세대론’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시도의 결과이며, ‘세대’라는 개념이 ‘계급’을 대체한 사회분석의 단위가 된 것의 귀결이자, 보수화된 민주화운동 세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우선 ‘촛불시위’에 대한 세대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2002년으로 돌아가보면 이 문제는 명백해진다. 사실 2002년에는 ‘촛불세대’가 아니라 ‘광장세대’라는 명칭이 붙었고, 10대와 20대의 정치적 의식과 집단적 경험을 분리하지도 않았다.

월드컵 응원과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로 인해 광장문화에 익숙해진 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투표권을 얻으면 공공적 관심과 토론이 증대할 것이라는 내용이 그 당시 ‘광장세대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바로 그 광장세대가 현재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며, 뭘 해도 늦은’ 88만원세대 혹은 IMF세대가 되어버렸다.

소위 촛불세대론의 문제는 현 ‘촛불세대’와 전 ‘광장세대’의 차이 및 다른 결과를 예상하는 타당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광장세대’의 부모들은 70년대 학번의 특권적 세대였고, ‘촛불세대’의 부모들은 386세대였다는 설명은 마치 부모세대의 정치성향을 그대로 물려받거나, 자식이 순응하는 영향을 받는다는 가정이 있는데, 과연 386세대의 부모님들은 어떤 정치성향이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설명으로는 현 ‘촛불세대’는 우열반 등장, 0교시 부활 등 억압적 경쟁이 정치적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것이고 이것이 미친 소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반해, ‘광장세대’는 억울하게 깔려 죽은 두 여중생과 무죄판결난 미군과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분노 등으로 참여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즉 ‘광장세대’는 즉자적 의식을, ‘촛불세대’는 대자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인데, 자신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모순과의 관계를 깨닫는 계급의식적 자각이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일 뿐더러, ‘광장세대’는 그러한 계급의식적 자각을 왜 하지 못 하였고, ‘촛불세대’는 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광장세대와 촛불세대를 가르는 어거지

만약 ‘촛불세대’가 그런 계급의식적 자각을 할 수 있었다면, ‘광장세대’도 그런 계급의식적 자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수단을 사고하고 주목해야지 현 20대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세대 간 갈등과 분열 조장은 그야말로 오래되고 낡은 계급적 단결 만큼의 유용한 함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사회분석으로서의 ‘세대’ 개념, 촛불세대론이 20대에게 퍼붓는 비난과 조롱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의 보수화, 386 및 민주화 운동세대의 보수화라는 맥락과 관련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과연 그들은 20대 때 ‘계급’ 아니라 ‘세대’를 사회분석의 기본단위로서 사고하였는지, 혹은 ‘계급’을 ‘세대’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에게 공통된 ‘계급에 대해서 말하기 않기’는 역설적으로 기득권화된 그들의 계급적 성격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촛불세대 찬양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위대한 촛불세대가 대학에 입학하면, 혹은 투표권을 획득하면 사회가 바뀔 것이라는 것인데 왜 그들이 대학에 입학해야 꼭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지, 왜 투표권이 없는 당장, 지금의 청소년으로 사회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꿀 수 없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촛불세대 찬양론은 마치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이므로, 지금 당장은 인권을 유예당하고 공부에 매진해야 되는 존재로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68혁명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그 당시에 거리로 나온 10대들은 대학생도 아니었고, 투표권도 없었으나 대학생, 노동자와 연대하며 교육제도와 사회를 바꾸어 냈다.

어른 돼서 하라고요?

지금 촛불세대 찬양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68세대의 용기와 담대함, 상상력은 잊어버리고 보수화되어버린 채로 촛불세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를, 그들이 투표권을 얻는 시기를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16살 때부터 꾸준히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오며, 20대 중반인 지금까지 내가 만든 청소년인권단체의 회원인 내 입장에선 촛불세대는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연대’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촛불세대에 판돈을 걸겠다고 하지만, 과연 어떤 연대를 하였는지, 정말로 판돈을 걸어본 적은 있는지 궁금하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장 죽음을 선택하는 10대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다른 민중열사처럼 ‘열사’라는 칭호도 얻지 못 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처럼 추모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나는 ‘촛불세대’를 마냥 찬양하지 못 하겠다.

대신 노동자, 철거민, 청소년의 안타까운 죽음도 전직 대통령의 서거만큼 추모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면서, 위대한 촛불세대의 서거를 추모하겠다.


2009년 06월 15일 (월) 09:59:18 무직인꿈틀이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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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이가 현재 아수나로 회원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ㅎㅎ 활동을 안 한 지 어언 1년이 넘었기에.
뭐 여하간 글 내용에 대해 아수나로 내에서 큰 반대가 없다면 굳이 태클 걸 이유는 없는 듯.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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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3. 10. 00:28



열정세대 - 10점
김진아 외 지음, 참여연대 기획/양철북


열정세대 - 상상력과 용기로 세상을 바꾸는 십대들 이야기.
양철북 출판사.
김진아 외 지음.
참여연대 기획.
2009년 2월 인쇄/발행.
정가 9800원.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 등은
http://blog.peoplepower21.org/CivicEdu/21171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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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만드는 일을 약간 거든 바 있는 『열정세대』를 일제고사 반대 청소년 농성장에 앉아서 다 읽었다.

  참여연대에서 친절하게 우편으로 보내준 『열정세대』를 펼 때, 참여연대 홍성희 씨에게 이 책 만드는 일 때문에 만났을 때 빌렸던 DVD를 아직도 돌려주질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는데,
  일단 그건 뭐 그렇다 치고(……) (출판기념회나 뭐 그런 게 있으면 그때 돌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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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제목을 보고 좀 닭살이 돋았다. “열정세대”라.
  “청소년NGO활동 가이드” 이런 딱딱한 제목보다야 낫긴 하지만.

  “열정세대”라는 말이 80년대스럽다거나 구닥다리스럽다거나 뭐 그렇게 느낀 건 아니다.
  오히려 “열정세대”라 그러니까 무슨 최근에 지하철 같은 데서 나오는 젊은이들이여 도전정신을 가져라, 뭐 그런 공익광고 같은 느낌이 든다. 일종의 체제내적인 세련됨이랄까.
( 어쩌면 약간 참여연대 사무실 건물 같은 느낌? -_-; 흠 그거랑은 또 좀 다른가... 어쨌건 책 내용을 보면서도 좀 참여연대가 위치한 정치적 포지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부 글 같은 경우는 초안과 다르게 좀 덜 빡세게(??) 수정한 거란 이야길 언뜻 들었던 듯도. 그게 참여연대가 부담스러워 한 건지 양철북이 부담스러워 한 건진 모르겠으나-)



  그런데 과연 지금의 청소년들이 “열정”을 자기 삶의 중심에 품고 있는 세대이긴 한 걸까?

  아니, 그래, 그 ‘청소년들’이야 어떻든, '이 책에 나와 있는 청소년들'은 “열정”을 가슴 속에 품고 있긴 한 걸까?
  내 룸메이트이자 이 책의 첫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따이루의 경우에, 이 녀석은 과연 그 가슴 속에 “열정”이 넘치고 있나?


(따이루 사진 -_-)

  운동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열정으로 뭔가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대개 운동이라는 게 일종의 운명적인, 아니면 숨쉬는 듯한,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시작하고 계속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일반론적으로, 보편적인 정의라거나, 열정이라거나, 그런 건 사후에 정당화하고 갖다붙이는 것만 같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그렇기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이고 만다.

  애초에 “열정”이라고 하면 뭔가 열혈소년만화스럽거나 장인 정신이나 프로 정신,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꿈’ 같은 말이 등장해야 할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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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머리글에는
  “우리가 만난 십대들은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싸워서 쟁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어떤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면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민주주의였습니다.” 
  라고 붙이고 있지만,

  글쎄 오히려 민주주의를 싸워서 쟁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이 책에 나온 여러 사람들이라고 느꼈는데...;
  이런 식으로 미시적으로, 생활 속에 이미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약간은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상상력과 용기로 세상을 바꾸는 십대들 이야기"라는 부제는 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열정" 쪽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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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08년 촛불집회 정세를 배경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은 촛불집회와 그리 큰 상관이 있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촛불집회에서 주역이었던 십대들을 탐험하고자 한다", 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책 내용은 촛불집회와는 별 상관이 없는 ‘NGO 활동’을 하는 십대들이 더 많지 않나 싶다.
  뭐 그런 것이 지금의 십대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째서 촛불집회가 가능했나 하는 촛불집회의 배경과 십대 내부의 동인을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일정한 공통점, 단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서의 십대(사회적 취급이나 규정이 아니라)라는 게 과연 성립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나로서는 그런 게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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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촛불집회 관련 챕터에서는 읽으면서 많이 아쉬웠던 건 역시 여기서 인터뷰한 청소년들은 ‘청소년으로서’ 촛불집회를 보고 참여한 게 아니라 그냥 ‘국민’으로서 촛불집회를 보고 참여했다는 느낌이다.
  촛불집회 안에서 청소년들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런 부분들은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긴 아마도 촛불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의 다수가 그럴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촛불집회의 주역이 십대였다 청소년이었다 라고 말하는 건 미묘한 오류가 있다. 촛불집회의 주역 또는 촛불집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나이가 10~20대 정도의 ‘국민’ 또는 ‘시민’이었다.
  기회가 닿으면 2008년 '촛불집회'에 관한 내 생각들을 정리해서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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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좀 읽으면서 구성상의 문제가…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한 명씩 관련된 사람들이 부연하는 글 같은 것을 붙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좀 글 청탁할 때 전달이 잘못된 것이거나 구성할 때 실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

  가장 문제가 있는 챕터는 “유쾌, 상쾌, 통쾌한 정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YMCA 창숙님과 참여연대 지현님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보통 이야기를 하거나 소개를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다른 챕터와 다른데,
  그 대화의 내용에서도 실제 활동에 대한 소개나 이야기는 참여연대 이야기가 더 많고 정작 창숙님의 활동은 많이 이야기되어 있지 않다.
  뒤에 붙은 참여연대 글 같은 경우는 그냥 참여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소개하는 내용에 가깝고, 정작 창숙 님의 정치적 활동이나 청소년들의 정치적 활동, 정치적 권리 등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행복한 학교 만들기”의 경우에는 윤지님 이야기는 아주 좋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은 희망 박철우님의 글은 그냥 희망 단체 소개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망 활동, 성격 등 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같이 활동하면서 종종 얼굴 보는데 이렇게 썼다고 해서 화내시진 않겠지 -_-;)

  연주님의 언론 활동에 대해 지식채널e의 김진혁 씨가 쓴 글은, 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주님에게 조언을 하는 형태로 마무리를 하고 있어서 그래도 음, 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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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책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위에 언급한 챕터들 말고 다른 이야기들은 부연하는 글들과 본문 이야기들 사이에 호응이나 조화가 부자연스럽지 않다. 전반적인 내용도 알차다.

  청소년들의 다양한 활동을 알고 싶은 분들, 이런저런 영감이나 정보를 얻고 싶은 분들에게는 추천.
  따이루, ‘품’, 리타님, 리인님, 윤지님, 연주님, 강강수월래 등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읽어볼 만하다.


  단지, 솔직한 내 욕심으로는, 청소년들의 NGO 활동 이야기, 이런 식으로 따로 책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것뿐. 청소년들의 그런 활동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 사회면 좋겠다는 거다.

  “열정세대”라는 제목이 껄끄럽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지금의 청소년들, 십대들을 너무 특별하게 의미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내가 참여한 부분은, 간접적으로는 청소년 언론 활동이나 학생인권 관련 활동에 대해 내용 구성 전반을 놓고 조언을 한 것,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제일 뒤에 실린 이 사진 속 청소년 단체 리스트 초안을 뽑는 작업을 같이 한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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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성희

    공현~~~ 고마워요~~~ 곧 봐요~~~

    2009.03.11 07:35 [ ADDR : EDIT/ DEL : REPLY ]
  2. 기사에서 배울 많이.

    2013.01.23 16:37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