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0. 13. 23:10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복합차별에 대해 아시는지?

발새


사실 페인걸은 매번 복합차별을 다루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로, 이번 페인걸 주제, 복합차별이다.

지하철 난투극

60이 넘은 여성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배경이 지하철이라 “지하철 난투극”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동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어린 것이 싸가지 없다’던 네티즌들은 나중에 그 여성청소년이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폭언을 한 상황을 듣고 여중생 vs 할머니의 싸움에서 여중생 편을 들었다. 싸움의 발발은 그 여성청소년이 신발의 흙을 실수로 옆의 그 사람의 옷에 묻힌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조건을 비틀어 보자. 실수로 옷에 흙을 묻힌 사람이 여성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조건에서도 그 사람은 폭언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을까? 영상 속의 사람은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두 가지 약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틀을 각각 들이대면 보이지 않던 이 상황은 여성-청소년이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보여 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복합된 차별은 합집합이라기 보단 교집합의 문제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과 여성 운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여성운동과 청소년 운동이라는 단일한 틀로 잘 담아 지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내부에서도 여성 청소년들은 종종 소외된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중요 의제인 두발이나 체벌 등은 여성청소년보다는 남성 청소년에게 더 압박스러운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에게 예민한 사안인 외박이나 섹스, 임신 등은 어느새 뒤로 밀려난다.

여성운동 속의 여성 청소년들의 존재는 더욱 미미하다. 결혼, 출산, 취업 등 여성 운동에서 주목해온 의제는 주로 성인 여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여성청소년들이 복합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청소년운동+여성운동=여성청소년운동’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은 여성 청소년 고유의 경험이다.

청소년과 여성의 사이에서

너희는 안 꾸며도 예쁜 나이다.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가 안 꾸며도 예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여드름 나고 한창 살찌는 신체 나인데 말이다. 이런 어조는 여성청소년에게 ‘여성’보다 ‘청소년’이 되라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애나 성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외모를 치장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순종적인 청소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에게서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어떤가.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판매하는 대중매체, 외모로 서열을 매기곤 하는 또래 여자 친구들. 여성 청소년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으로서의 이미지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은 물론 ‘외모에 치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몹시 상반되는 것이라 양쪽의 장단을 맞추기가 힘겹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학생부의 눈을 피해 긴 치마를 입었다가, 학교에 오면 다시 바느질을 해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하던 모범생들이라도 수학여행을 갈 때면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놓치는 순간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와 생각 없이 노는 날라리 중 하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위 사진:여러번 바느질한 교복치마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도 청소년기를 복합차별의 대상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담고 싶은 나의 차별 경험담이 없었다. 나의 외모는 지금이나 그때나 성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때 난 철저하게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난 차별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차별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청소년기에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건들을 언어로 바꿔 기억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적절한 언어가 있어야 제대로 기억된다.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도 사랑, 우정, 동경 등 많은 단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단어가 없다면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당한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지 못했고 나의 경험들은 반편이가 되어 여성이나 청소년으로서 겪은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큼직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그 일을 다시 복합차별을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합차별이란 새로운 단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는 길목에서 옳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합차별은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한 체 당사자들의 언어 뒤로 숨어버리고 있다.

약자들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이 참 실감난다.
덧붙이는 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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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2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12일 22:48:4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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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9. 8. 23:15

[페미니즘인(in)걸]"부모님 모셔와"가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면?

청소년과 여성,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 내기

공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뭔가 규정을 어기거나 학교 눈 밖에 나는 짓을 했을 때 가장 두려운 조치는 뭘까? 그야 당연히 체벌이나 욕설, 또는 퇴학 같은 징계들 모두 다 무섭긴 무섭다. 그런데 내 경험상 가장 손써볼 도리가 없으면서도 껄끄러웠던 것은 “집에 전화하는 것”, “부모님(혹은 집안 어른, 보호자) 불러오는 것”이었다. 뭐 이런저런 집안 사정에 따라 다들 조금씩 느끼는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부모/보호자 소환은 공식적인 징계도 아니고 직접 두들겨 패는 폭력도 아니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부담될 것 없으면서, 학생 입장에서는 참 대응하기도 어렵고 압박스러운 스킬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탄압은 버텨냈으면서도 이 집안의 압박 ― 가정탄압 앞에 굴복해야 했다.

교사들의 이 “부모님 모셔와” 스킬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반을 모두 규율할 권력이 부모/보호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사의 권한을 정당화하는 주된 논리 중에서 “부모/보호자로부터 교육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부모/보호자에게는 청소년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또 부모/보호자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하고 지도할 권리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벌을 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가 힘들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부모/보호자들은 청소년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력도 가지고 있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대놓고 대들고 반항하기가 껄끄러운 문화적 심리적 장벽들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학교에서 집에 전화를 하고 부모/보호자를 부르는 일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청소년들 입장에선 저항하기도 힘든 권력자를 불러들이는 조치인 셈이다. 학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은 가족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라면 문제제기를 할 거리가 되는 일들도, 부모/보호자에 의해 집안에서 이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곤 한다. 예컨대 학교 안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해서 징계를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식이 그런 전단지를 나눠줬다고 어머니가 자식을 혼내거나 용돈을 깎거나 외출금지를 내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학교가 학교에 반항적인 학생의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거나 하면 사회적 논란이 일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걱정해서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부모/보호자와 자식/청소년의 관계가 권력관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부모’라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정상가족 중심적인 용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언제부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은 “친권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페미니즘 : 가족 비판의 동지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끊임없이 좋은 곳, 회복되어야 할 곳으로 일컬어진다. 학교에서도 음악시간이면 “즐거운 곳에서 나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동요도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나 화목한 가정을 소재로 한 게 많다.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먹고 싶은 것이나 놀고 싶은 것이나 모두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라고 노래하는 「피노키오」라거나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하는 「어른들은 몰라요」가 가장 투쟁적일 정도?) 영화에서 공익 광고에서 신문에서 법에서 가족은 계속 건강하게 회복되어야 할 곳, 삭막한 사회에서 마지막 안식처 정도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 한편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에 속한 청소년들은 ‘정상 가족’을 당연한 걸로 전제하고 있고 가족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는 사회에서 ‘정상 가족’을 가지기를 소망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들의 삶을 살다보면 과연 가족이 그런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청소년들은 가족에서는 정(情) 같은 것 말고도 생활을 하나하나 규율하고 명령하는 권력도 경험할 수 있다. 가족이 안식처라는 것은 노동에 지친 남성 가부장을 위한 판타지는 아닐까? 청소년에게 가족은 등을 누이고 쉬는 곳이 되기도 하지만 공부하라는 압박을 받는 곳, 또 다른 일터, 친권자에게 잘 보이고 생활비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에서는 친권자들에 의해 사랑과 교육의 이름을 달고 체벌이나 감금 같은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때로는 소유욕과 의무감이나 권력의 행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진로나 생활을 놓고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청소년과 친권자 사이의 갈등은, 가족이 순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가족’ 안에서도 충분히 많은 폭력과 권력관계, 사회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가족 비판의 영역에서 청소년운동의 ‘선배’인 셈이다. 페미니즘은 결혼이 불평등한 계약이고 가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으며 여성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가족 제도에 의해 여성들의 성은 통제받는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일터와 사회는 남성들의 공간이고 가족은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여성들에게 가사노동, 양육노동, 감정노동 등을 부담시킴으로써 가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왔다. 여성들에게 가족은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일터이다. 그것도 그 일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처럼 가족이 자연스러운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이 얽혀 있는 사회적인 제도라는 관점이 만들어진 것에는 페미니즘의 기여가 컸다. (사회주의-공산주의나 아나키즘 역시 이러한 관점을 만드는 데 일부 기여했다.)

페미니즘에 따르면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할 책임을 어머니-여성에게 떠맡기는 걸 정당화하는 ‘모성’ 역시 자연스러운 게 아닌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비판은 청소년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이다. 친권자들이 가진 양육의 책임은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할 권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 이데올로기 등을 비판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가족 안에서 겪는 억압과 갈등을 어느 개인의 문제 또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에서 가장 많은 부분 맞물려 있다. 체벌이나 가정폭력,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과 억압 등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여성과 청소년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할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점,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도 동일하다. 양육의 책임과 그 권력의 문제에서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의 경우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같이 극복해야 할 얼키고설킨 굴레가 된다. 여성 청소년들이 남성 청소년들에 비해 가족 안에서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현실에서도 페미니즘과 ‘청소녀니즘’(청소년+이즘ism)이 만나는 교차점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성 가부장 역시 가족 제도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 등의 담론을 보면 지금의 가족 제도가 남성 가부장에게 어떠한 부담을 주고 있고 또 가족의 판타지가 이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가족 제도를 바꾸기 위해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거기에 저항할 동기가 있는 주체는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다. 가족을 비판하고 스크래치를 내고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은 동지 관계에 있다.


연대가 가능하든 말든

그러나 현실을 보면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이 연대해서 가족을 바꿀 수 있을지, 나는 좀 의문스럽다. 이른바 ‘정상 가족’ 속에서 청소년들은 여성-어머니와 많은 충돌과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 아버지는 좀 더 무게 있는 라스트 보스 급, 권력자로 존재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만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상 가족’ 안에서는 어머니가 청소년들의 일상생활 속에 권력자로 등장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저항할 때는 청소년과 여성-어머니가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여성-어머니가 연합하여 청소년의 삶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남성 청소년과 아버지가 여성-어머니를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어머니와 청소년은 지금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대할 수 없다. 하긴 애초에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이 사회에서는, 가족의 문제를 느끼더라도 그걸 가족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 짓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판이니 이 또한 하나의 탁상공론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청소년운동에게 가족은 같이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청소년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즘 운동 역시 그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을 충분히 비판하고 바꾸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가족을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하나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로 보고 그 제도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끼리 서로 존중합시다.”, “서로 대화하는 가족을 만듭시다.” 같은 류의 캠페인을 넘어 가족이 사회적인 운동과 정치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시작할 때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가족 안에서의 이야기를 공론화하고 우리의 다른 이해관계를 내세워 가족 제도에 스크래치를 내고 태클을 검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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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8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08일 17:46:26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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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8. 4. 21:16

[페미니즘인(in)걸] 납량특집 -공포영화

그 영화가 무서웠던 더 무서운 이유

발새


이번 페인 걸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납량특집, 공포영화 속의 여성청소년들이다. 생각해보면 다른 장르에 비해 공포물은 유독 ‘학교’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10년 째 장수중인 <여고괴담>시리즈, 최근에 속편이 개봉한 <고사>시리즈 등이 모두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입시위주로 모든 학생들을 경쟁자·적으로 만드는 ‘학교’라는 공간은 이제 한국에서 공포영화의 단골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포 영화가 이런 학교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업 영화의 메커니즘 안에 있는 장르 영화의 하나인 공포영화는 대부분의 경우 사회 비판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상황 혹은 공간이 가지는 폭력성은 어떤 인물의 부도덕함이나 싸이코틱함으로 대치되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공포 영화 속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 청소년들을 사회적인 약자로서 묘사한다고 한들, 이것이 어떤 현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돋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장치인 경우가 다반사다.


지못미 소녀들
위 사진: 영화 <아랑> 포스터

그렇다면 여성청소년들은 공포영화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여성 청소년들은 보호해야 할 존재로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아랑>이란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소녀를 지키지 못해 그녀를 강간하고 죽인 범인들을 연쇄 살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 청소년들은 성폭행이나 죽임을 당하여 남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러블리 본즈>, <살인의 추억>, <마더> 등등 말이다.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은 사회적 약자의 대표격인 셈이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가 여성 청소년을 무기력한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더 아니꼬운 것은 영화가 의도하는 것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과 영화 밖의 관객들의 ‘순결한 소녀’의 보호에 대한 합의란 것이다. 이 사회에서 순결한 소녀는 당연히 보호받아야할 대상들일 뿐이다. 때문에 이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을 때, 관객들은 이들의 사건을 수사하거나 이들의 복수를 하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주로 남성들)에게 더 쉽게 몰입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설정을 가진 영화로 <추격자>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호의 대상으로 순결한 소녀가 아닌 순결하지 않은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 여성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녀가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임을 강조한다.


공포와 에로 사이

이런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성 청소년은 다른 한편으론 에로틱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공포영화는 애초에 비명을 지르고 칼에 찔리는 여성들의 이미지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었다. 여기에 소녀·여고생의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다.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소녀나 여고생의 순결한 몸을 파괴하는 쾌감을 주는 것이다.
위 사진:<여고괴담4> 중, 끔찍하게 살해당한 여고생의 몸


<여고괴담>시리즈를 보라. 3편부터 5편까지는 본격적으로 난도질당하는 여고생의 몸이 등장한다. <고사>는 좀 더 자극적으로 수조 안에서 죽어가는 여고생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공포 영화들이 재수 없는 것은 이렇게 보여줄 건 다 보여주면서도 남성들에게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은 것 같은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고괴담>시리즈에서 여고생들의 몸이 난도질당하고 관절이 꺾이는 것은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여성들 본인의 탓이고, <고사>의 경우 관객은 문제를 풀어서 수조안에서 여고생을 구출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공포 영화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재미로 차용하는 것일 뿐 결코 약자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에로 코드의 또 다른 형태로, 성적인 금기를 범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주로 임신, 동성애나 사제 간의 사랑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적인 금기를 어기는 소녀는 성인여성보다 더 도발적인 법이다. 예로 <여고괴담>시리즈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 동성애 코드, <여고괴담4>에서 다룬 사제 간의 사랑, <여고괴담5>에서 다룬 임신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금기를 어긴 여성 청소년들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된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불완전한 존재?

또 하나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는 불완전성이다. 여성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인 여성과 청소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캐릭터의 극대화를 노리는 공포영화에서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공포 학원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청소년들이 외모나 성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캐릭터는 주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초자연적인 무엇과 결탁하거나, 죽어서도 계속 특정한 공간에 머물거나 하는 등의 형태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드물게 공포영화에서 이성적이고 침착한 역할을 하는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더라도 다른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로 <4교시 추리 영역>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대신 폐쇄적인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출중한 외모, 명석한 두뇌 그리고 리더쉽까지 갖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또 이런 불완전함의 이미지는 여성 청소년들을 우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여성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공포영화에 동성애 코드를 남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주체적인 귀신들

반대로 공포 영화에서 여성 청소년들은 앞서 말한 것과는 다르게 주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고괴담>시리즈의 1,2편, <분신사바>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여성 청소년들이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귀신과 거래를 하거나, 직접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여성청소년들이 제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선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포영화는 굳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를 깨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 사진:여고괴담> 중 한 맺힌 여고생 귀신



그 영화가 무서웠던 이유

공포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을 불편하지 않으면서 무섭게 만드는 일이다. <여고괴담>에서 친구들한테 괴롭힘 당하다 죽은 여고생이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돈다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여고괴담>의 줄거리가 주인공 여고생이 살아서 자신을 괴롭히고 배신한 친구들을 한 명씩 살해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영화를 편히 볼 관객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또 반대로 만약 <추격자>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적인 무능함을 무시한 여성들에게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이라면 누가 이 영화를 재밌게 보겠는가. 이렇듯 공포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관객이 어떻게 여성과 남성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공포물은 상황이나 공간의 폭력성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장르보다 사회의 병리 현상을 다룰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여태 그런 공포영화가 잘 없었을 뿐이다, 좋은 예로 <샤이닝>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어느 평범한 아버지-남편이 한순간에 폭력적인 살인마가 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지만 덮어두었던 아버지-남편의 폭력적인 모습을 잘 포착하여 뛰어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처럼 공포영화는 반드시 이미 구성된 세계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나는 더 이상 공포영화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들의 캐릭터도 역할도 너무 뻔하다. 그렇다고 신개념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으로서 학교 안에서 한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여성으로서 가부장사회의 약자란 위치에 있다. 이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포착하여 훌륭한 공포영화로 탄생시킬 수는 없는가?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바로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는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훌륭한 매체가 아닌가. 한 명의 영화팬으로서 공포영화에 여성 청소년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어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지못미: 인터넷 용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
덧붙이는 글
발새 님은 청소년 인권 활동가 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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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14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04일 15:50:1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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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7. 7. 20:14

[페미니즘 인(in) 걸?] 잔혹한 소년만화의 테제

‘소녀’ ‘정규직’ 오타쿠가 본 소년만화 씹어주기

둠코



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들을 보면 거의 사족을 못 쓴다. 흔히들 말하는 ‘오타쿠’ 이다. 어떤 한 분야에 꽤나 심하게 열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음악 오타쿠, 와인 오타쿠, 이런 식으로도 쓰이지만 그냥 ‘오타쿠’라고 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일정 장르의 게임(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던가, 애니,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 같은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어쨌든 애니메이션에 엄청 빠져서, 하루에 거의 여덟 시간씩 착실히(?) 보는 ‘정규직 오타쿠’ 였다. 지금도 하루에 8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애니메이션을 본다.

그런데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러다가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 마냥 재미있던 애니메이션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가 접하는 많은 만화에서, 혹은 주류라 불리는 많은 만화들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언제나 비중이 적거나 존재감이 옅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에게 가려져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기도 했지만 결국 오타쿠짓은 습관이어서 그런지 금단 증상에 져 버리고 말았다.

보통 만화는 크게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로 나뉜다. 소년만화는 초, 중, 고등학생 남성층을 주로 겨냥해 만든 것으로 스포츠만화나 전투만화가 주를 이룬다. 슬램덩크, 테니스의 왕자, 우에키의 법칙, 나루토, 원피스, 블리치, 은혼 등이 있다. 반면 소녀만화는 한국에서는 흔히 순정만화라고 불리고 있는데, 초, 중, 고등학생 여성층을 대상으로 애틋한 로맨스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떠올리면 된다. 대표작으로 캔디 캔디, 나나, 토라도라 등이 있다. 이렇듯 독자층을 구분한 이 단어들도 여성과 남성의 고정화된 성 역할에 따라 나눠 놓은 것이다.


모에(*)!! 만화 속의 여성 찾기

소년만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캐릭터로 여성이 나온다. 첫 번째는 ‘서비스 캐릭터’이다. 이 때 서비스란 여성캐릭터를 이용한 성적 흥분을 남성에게 서비스 한다는 노골적 의미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만화계에서 서비스 캐릭터라는 말이 쓰인다. 이건 거의 모든 주류 소년만화에 빠지지 않는 요소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제일 기분 나쁜 캐릭터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많은 경우에 그런 여성 캐릭터가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열 명 가까이 나와서 주 독자층인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고를’수 있게 했다. 독자가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만화에 나오는 여성들이 자신을 따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런 만화로는 『에반게리온』, 『왕도둑 징』(이건 매 화마다 주인공에게 반하는 서로 다른 여자들이 한 번씩 등장하는, 뭔가 본드걸 같은 느낌이긴 한데) 같은 만화들, 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서비스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있고(이 미.연.시** 같은 경우는 그냥 그 서비스 캐릭터를 즐기는 것 자체가 목표다.) 전투만화 같은 경우에도 여성들이 노출이 많은 복장을 하고 나오게 하거나 가슴, 엉덩이 등을 강조한다. 『절망선생』이라는 만화에는 매번 어떤 일이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절망하는 선생이 나오는데 그 선생을 좋아하는 열댓 명의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그 여학생들은 제각기 두드러지게 다른 성격을 가지는데 스토커, 귀국자녀, 은둔형 외톨이, 동인녀(***), 초 포지티브 소녀(****), 뭐든 계획적으로 딱 부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여자애 등이 나온다. 정작 선생은 그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피해 다닌다는 느낌이다. 결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무도 ‘선택’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맘에 드는 여성캐릭터를 고르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노림수가 있다.



두 번째는 ‘서포터 캐릭터’이다. 서포터 캐릭터는 스포츠 만화라던가, 전투만화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여성이 주로 남성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스토리가 진행 될수록 주인공과 여성 캐릭터 사이에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전투만화에서는 여성이 적에게 납치되어 남성인 주인공이 여성을 지켜주는 구도이다. 여성들도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 남성인 주인공보다 강하지 않다. 여성이 열심히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남성 주연 캐릭터가 독식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남자다움’ 혹은 ‘사나이들의 세계’ 같은 것이 굉장히 부각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나이들의 세계를 좋아한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잡지 ‘점프’의 3요소는 승리, 우정 사랑으로 모두 ‘남자의’ 승리, 우정, 사랑이다.



『블리치』, 『나루토』, 『원피스』 같은 전투만화와 『테니스의 왕자』, 『슬램덩크』같은 스포츠만화에서 여성들이 주로 서포터로 나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애처로운, 보고 있으면 화가 치미는 서포터로 등장하는 만화는 『데스노트』라고 생각한다. 『데스노트』에 나오는 아마네 미사는 데스노트를 손에 넣어 사람을 죽이는 라이토가 세계적 탐정인 ‘L’에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L’에게 구속되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자신에게 두 번째 데스노트를 준 사신(*****)과 거래를 해서 수명을 두 번이나 깎아먹는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바보이니 라이토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고 공언할 정도로 의존적인 캐릭터이다.


『미래일기』 분홍머리 여자애 가사이 유노

서비스나 서포터 등 여성을 부차적인 존재로 다루는 캐릭터 외에 예외적인 경우들도 많이 있다. 세 번째는 전투미소녀 캐릭터이다. 이 경우 남성 주인공보다 여성이 강하다. 남성은 주로 여성에게 보호받는다. 하지만 만화의 골자가 전투라고 해도 전투 능력이 높은 여성이 주체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전투는 주로 남자 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것이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남성주인공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는 패턴이다. 결국 정신적으로 남성에게 기대고 있다는 식의 전개로 이어진다. ‘예쁜데다 강하기까지하다’ 는 식의 외모지상주의는 기본으로 깔려있다.

『웨딩피치』, 『세일러 문』, 『카드캡터 체리』, 『울트라매니악』, 『신풍괴도 쟌느』 같은 변신물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적들과 싸우지만 위기일 때 달려오는 건 남성들이다. 『미래일기』 같은 경우 각자 고유의 능력을 지닌 일기의 소유자들이 서로를 죽여서 승자를 가리는 게임을 하게 되는 내용이다. 일기를 이용한 일종의 능력자 배틀물의 형식이다. 남자 주인공은 소심하고 매사에 주눅 들어 있다. 가사이 유노라는 우등생에 역시나 일기의 소유자인 여성이 주인공을 열렬히 좋아해서 위기에 처한 남자주인공을 위해 싸운다. 일기를 파괴해서 상대방을 처치하는 마지막은 남자주인공이 하는 걸 봐서 가사이 유노가 서포터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주인공이 너무나 하는 게 없다. 이 마지막 경우가 가장 질이 나쁘다. 여성이 고정된 역할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다가 결국은 ‘그래봤자 여자’ 라는 메시지가 읽히니까.




언니들이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에서 부차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캐릭터가 있는데, 이른바 ‘언니 캐릭터’ 이다. 『원피스』(물론 원피스 자체는 굉장히 뜨악할 정도로 마초스럽다.)라는 만화에는 언니 캐릭터가 증장한다. 『원피스』 주연급 캐릭터는 9명인데(지금까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457화 기준으로) 모두 ‘밀집모자 해적단’의 일원이다. 그 중에 여자 캐릭터는 딱 두 명이다. 참 난감한 성비이다. 한 명이 니코 로빈이고, 또 한 명이 나미이다.

위 사진:『원피스』 그림 순서대로 로빈, Dr.리누, 벨메일


니코 로빈, 벨메일, Dr. 리누. 내가 좋아하는 세 언니의 이름이다. 니코 로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었던 ‘오하라’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로빈은 어린 나이에 고고학 자격을 취득했지만 ‘오하라’의 연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세계정부’가 섬을 통째로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는 여러 암흑의 조직에 몸담고 사는데 그 모든 조직들이 그녀 하나를 생존자로 남기고 괴멸한다. 그녀의 특기는 배신, 거짓말, 암살. 그녀는 모든 것을 내다보고, 꿰뚫고 있다. 조직이나 권력을 이용하고 배신할 줄 아는 ‘악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주인공들 ‘밀짚모자 해적단’을 뒤에서 받치고 있다. 벨 메일은 주인공중 하나인 여자애 나미의 의붓 엄마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 해병이 되겠다고 마을을 뛰쳐나가 입대하는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나미와 누군지도 모를 나미를 어르고 있던 노지코를 발견한다. 두 아이를 살리겠다는 마음에 죽을 각오로 고향에 돌아와서 친딸도 아닌 두 여자애를 강하게 길러낸다. 해적인 아론이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도 당당히 맞서 싸우다가 “태어난 시대를 원망해서는 안 돼. 살아있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녀의 자식을 위한 희생은 전통적 ‘모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딸들에게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Dr. 리누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선의인 쵸파의 스승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데리고 있던 인간사슴 쵸파를 맡아서, 자신의 의술을 모두 전수한다. 섬 가장 높은 산의 성에 살며 가끔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러 ‘쳐들어와서는’ 치료를 해 준 후 그 집 재산의 절반을 뜯어간다. “Happy 하냐? 나는 아직도 팔팔한 130대라구!”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아름다움의 비결이 알고 싶나?” 라고 당당히 외치는 여자. 성격이 괄괄하고 똑부러지지만 쵸파가 정든 고향을 망설이지 않고 떠나게 해 주는 사려 깊음도 있다. 자신의 나이나 외모에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다리가 아픈 아이의 팔을 꾹 눌러서 “봐라, 다리 아픈 거 다 잊었지.”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의 넉살과 “내 환자가 침대에서 나갈 때는, 완치 되거나, 죽거나. 두 경우다. 낫지도 않았는데 맘대로 돌아다니면 죽여 버리겠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괴상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다. 다들 어느 정도 롤모델로 삼고 싶은 언니들이다.

위 사진:『은혼』 『가구라』


그것 말고도 『은혼』이라는, 일본의 개화기를 판타지로 바꿔서 그린 만화에도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일본이 서양의 국가가 아닌 우주인들에게 개항했다는 설정. 그래서 우주인들이 (만화 안에서 천인天人이라고 부른다.)사회의 지배층이 된 세계를 그린다. 주인공인 긴토키는 은발의 사무라이이다. 사무라이는 폼도 뭣도 없는, 집세가 5달 정도 밀려있고 당뇨병 위험에 시달리는 뭐든지 해 주는 해결사(결국 돈은 못 버는)이다. 해결사 사무실에 얹혀사는 가구라라는 여자는 우주에서 유명한 전투민족인 야토족 소녀인데 스쿠터 정도는 한 손으로 세울 수 있고 총 맞은 구멍은 좀 있으면 막히는, 엄청난 신체 능력을 지닌 여자애이다. 무기로 총알이 나가는 우산;;을 쓴다. 전기밥솥 째로 밥을 마실 정도로 먹성이 좋고, 엉뚱한 성격이다. 사다하루라는 커다랗고 사람 머리를 덥석 물어버리는 견신犬神을 키운다. 해결사 일행이 범죄사건에 휘말려 경찰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조사를 끝내고 풀려나오면서 ‘경찰이 엄청 열 받으니 경찰서 문간에 토해주겠다.’ 는, 만화의 여주인공 이미지가 절대로 아닌 여자애이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조직에 들어가면 짱을 먹자는 게 좌우명이라나. 만화에 나오는 여성 주연급캐릭터는 어느 정도 예쁘고, 도를 넘는 더러운 짓이나 막 되먹은 짓은 하지 않는다는 틀을 확 깨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에 살고 있다

멋진 언니들이 많지만 애니메이션 전체에서 여성의 위치는 한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소년만화들은 남성들‘만을’ 독자로 지정하고 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여성 팬 층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좋아하게 되어도 마초 세계관을 수긍하고 내면화하기 전에는 편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도가 남성이다 보니 아무리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와 봤자 ‘멋진 조연’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것으로 만화 안의 성 역할 구분 짓기가 해결될 수 없다. 특정 캐릭터 하나가 남녀의 성역할의 구도를 깼다고 한들,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 낸 수많은 여성캐릭터들에 대한 면죄부 혹은 변명정도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좋은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애니메이션, 만화가 여성의 인기를 위한 수단 혹은 보조물로 대하지 않는 시각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여성이 ‘남성들의 뒤에서 받쳐주는, 남성들이 보기에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 걸 좋아하는 독자들이 없어져야 하고, 현실에서 성별에 따른 위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니 참 어려운 일이로세..;ㅅ;

주류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많이 읽히고 팔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들, 혹은 현실보다 훨씬 현실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중에 가장 부각되는 것이 성역할의 구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세계가 그렇다는 것을 과장되게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현실의 복사판이라는 걸 알면 ‘이건 애니메이션이고, 현실이 아니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질 것이다. 불편해진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간다면 언젠가 불편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에: 패티쉬와 비슷한 개념으로 어떤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어떤 캐릭터의 특징에 팬덤을 가지는 것. 대개는 아이템이나 성격, 그 사람의 신분, 직업 등이다. 안경모에, 소꿉친구모에와 같이 쓰인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남성 주인공이 등장, 그것이 플레이어가 된다. 주변에 ‘선택’ 할 수 있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특정 캐릭터와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지를 골라 행동하면서 마지막에는 원하는 여성 캐릭터와 맺어지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 동인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2차 제작물인 동인지를 만들어 내거나 읽는 여성을 지칭. 만화의 주인공들을 엮어서 BL(남성간의 사랑을 그림)로 만드는 종류의 2차 제작이 주를 이룬다. 다른 말로 야오녀 라고도 한다.

**** 초 포지티브 소녀: 절망선생이 모든 것을 부정적을 생각하는 반면, 이 소녀는 도저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 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 사신과의 거래: 데스노트에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죽일 수 있다. 단 본인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하고 본명을 풀네임으로 적어야 한다. 사신과 거래를 하게 되면 사신의 눈의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이 능력이 있으면 사람 얼굴 위에 그 사람의 본명이 보이게 된다. 댓가는 남은 수명의 절반.


덧붙이는 글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210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07일 17:13:16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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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창 유희왕 TCG 할때 대회장이나 미카엘에서 남자들만 득실 거린 것도 관련있을려나..
    생각해보니 카드 일러스트도 거기에 해당될지도

    2010.07.08 00:30 [ ADDR : EDIT/ DEL : REPLY ]
  2. 뭐죠 이 향기는

    2010.07.08 02:13 [ ADDR : EDIT/ DEL : REPLY ]
    • 생각하시는 그 향기인 듯 하군요. ㅎ

      어쨌든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

      2010.07.08 11:15 [ ADDR : EDIT/ DEL ]
  3. 대단한 글이군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여기서 보고 갑니다.
    저도 남자이지만, 우연히 안티페미니즘 주제로 어느 분의 논문을 읽고 기존에 제가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틀이 약간 변형되었습니다. 그런다고 전 그렇게 많이 아는 것도 아니오. 페미니스트도 아닙니다.
    단지 애니메이션오타쿠문화가 남성으로부터 시작되어 거기에 담겨진 캔디이데올로기, 신데렐라컴플렉스, 할렘구조 등에서
    이것은 왠지 아니다라는 기분이 많이 들었습니다.
    최근 케이온에서 저는 이 작품이 기존 틀을 깬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수동적이 아닌 능동, 남성들의 머리속에 나오는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만든 여성이라(허벅지와 다리. 달릴때 팔이 앞뒤가 아닌 좌우, 신체사이즈 등)
    물론 순정만화로 시작한 세일러문처럼 강력한 여전사라도 남자가 없으면 결국 안되는 인식이
    박힌 어느과학의 초전자포같은 작품이 나온듯이 제법 공감이 큰 글이네요

    2010.07.09 11:59 [ ADDR : EDIT/ DEL : REPLY ]
    • 문화 컨텐츠가 기존 사회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속에서도 어떻게 대안적인 모델을 만들거냐 또는 어떻게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창작할 거냐- 이런 걸 생각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가진 글이라고 생각해요

      2010.08.30 04:31 신고 [ ADDR : EDIT/ DEL ]
    • 이 별거 없는 글에 공현만큼 그럴듯한 해석을 달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라는;;; 저는 단지 제 오타쿠 혼과 운동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감동에 허우적 거리며 썼을 뿐이라는;;;

      2010.09.02 05:56 [ ADDR : EDIT/ DEL ]
  4. 비밀댓글입니다

    2010.08.24 19:29 [ ADDR : EDIT/ DEL : REPLY ]
  5. 테오

    하지만 만화나 라이트노벨에서의 왜곡된 여성상에 대해 논했다간 바로 팬에게 융단폭격맞기가 일쑤죠 ㄱ-
    국내 라이트노벨 중 [미얄의 추천]을 읽다, 남성판타지가 지나치게 담긴 여성상 밖에 안나오고 그나마 주체성있어보이는 여자는 무조건 악역으로 등장한다, 라는 내용으로 비평문을 작성해 블로그에 게제했는데...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무슨 개소리냐, 라노벨의 스토리 진행을 위해 그런 캐릭터가 나온거지 비하하는 시선 때문에 일부러 만든게 아니다! 라고 외치며 맹비난 받았어요. ;ㅁ;
    뭐... 그렇지, 일부러 만든건 아니었겠지, '일부러'는 아니었겠지, 일부러 만들었으면 정말 손도 쓸 수 없을 정도일테니.

    ...좀 현실적인 여성상, 남성상이 나오는 라노벨이 늘었으면 하는 마음인데, 이 글 보고 왠지 공감되서 덧글 달았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ㅎㅁ

    2010.09.15 10:15 [ ADDR : EDIT/ DEL : REPLY ]
  6. 지나가던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소년만화을 이런 눈으로도 볼 수도 있구나 하는 깨우침을 주는 글이였습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ㅎ

    2011.08.16 21:59 [ ADDR : EDIT/ DEL : REPLY ]
  7. 지나가던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소년만화을 이런 눈으로도 볼 수도 있구나 하는 깨우침을 주는 글이였습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ㅎ

    2011.08.16 21:59 [ ADDR : EDIT/ DEL : REPLY ]
  8. 여니

    여자로서 만화책좋아하는데...공감많이 되네요
    특히 소년만화에는 비현실적인 몸매를 가진여자가 많이 나오는데
    남자들의로망인가봐요 ㅋ ㅌ늑히 멋진조연으로밖에 있을수없다..그점도.
    하지만 레이브에서는 여주인공 엘리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더라구요..그래서 잘봤어요 ㅋㅋ
    여자들도 원나블같은 소년만화를 정말 즐길수있는데 여자를 위한 디테일이 좀빠져서 슬프네요 ㅎㅎ

    2011.12.09 10:24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12. 9. 16:05

[페미니즘인(in)걸] 밑바닥에 깔린 청소녀 알바

44만원에 그치지 않는 노동현실

윤티



44만원, 청소년 비정규직 알바


나는 청소녀 알바생이다. 시사in에서 얼마 전에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름붙이길, 일명 “44만원 세대”라고 했다. 나는 여성이며, 청소년이고,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다. 요즘 청소년노동인권 토론회나 언론 인터뷰 등에서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여러 번 우려먹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게 뭐 비밀도 아니고 계속 말해서 닳고 닳을 얘기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ㅋㅋ 그래서 이번에도 내 경험을 가지고 한 번 청소녀 알바생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탈학교 청소년인 나는 부모의 눈치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내가 번 돈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알바를 시작했고, 내가 처음 일했던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일을 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뒤편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남자애들의 일보다 더 편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기준으로 책정된 건지 잘 몰랐지만) 남녀의 시급에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에 대해 별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이게 그리 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계산대를 두드리고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여성다움’을 같이 팔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야 알았다. 난 주문을 하러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맑은 목소리를 선사해야 했고, 버거를 만드느라 지친 몸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여성스럽게 가다듬고, 언제나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하는 ‘험한 일’을 해야 했다.

청소녀들, 돈을 벌려면 성을 이용하라구?

어쨌든 돈은 벌어야 했기에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그만두게 된 뒤에도 다른 일을 구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참 커다란 ‘일’이었다. 사무직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나가서 서류 정리 조금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루 4~5시간 일하고 일당은 2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갔는데 가자마자 내게 설거지와 청소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자기가 혼자 일하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못하고 있다고. 이래서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도 잘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돈이 필요하니까 한다고 얘기했고, 그렇게 그 사장의 사무실(인지 집인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급을 받는 날, 그 기러기 사장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에 나는 큰 반항 한 번 못하고 ‘당해야’ 했다. 처음엔 다리를 쓰다듬더니, 나중에는 안아달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냥 박차고 나와 버릴 수도 없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더 치가 떨린다. 나는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사장이 원한 건 내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다른 일이었다는 것이 무서웠다. 여성청소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구하려면 일단 이런 수모는 미리 각오하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사실 처음엔 이런 일을 당했어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장의 해코지가 두려워서, 또는 이제 와서 하소연해봤자 뭐가 있겠나 싶은 마음에, 내 마음 속에만 꽁꽁 숨겨왔던 것 같다. 많은 청소녀 알바생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위 사진:청소년 알바를 모집하는 광고.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밑바닥 노동, 청소년 노동인권 현실

얼마 전인 11월 27일에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발표한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실태’를 보면, 청소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88만원 세대만도 못한 44만원 세대인 청소년 알바. 그래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밑바닥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급이 3770원이었을 때도 2100원, 2500원 등등 햄버거 한 개 값만도 못한 시급을 받으며 청소년 알바는 그렇게 '헐값노동' 취급을 받아 왔다. 그나마 올해부터 시급이 4000원으로 올랐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 환경 또한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가혹하다.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일하는 도중에 휴식 시간과 휴식 공간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휴게시간 따로 없다/휴게실 없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62.0%, 62.8%로 꽤나 높게 나왔다. 근로기준법에도 4시간 일을 하면 30분은 꼭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들에겐 쉬는 것도 사치일 뿐인 것 같다. 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할 때 매일 똑같은 버거만 먹으면서 좁은 곳에서 딱 30분 쉬게 해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30분이 너무 짧게 느껴졌으니까.

우리가 청소년이기 때문에 고용주(비청소년)들은 우리를 더 쉽게 대한다. 실제로 어떤 청소년은 일하는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소년'노동자가 아니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일테다. 일단 '청소년'에 대해, 거기다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해야 할 청소년이 '알바'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딱히 칭찬해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만만한 존재다. 그래서 서비스업, 주문을 받는다거나, 전화를 건다거나 하는 업종에 있다 보면 손님들까지 우리를 막 대할 때가 있다.

용모단정(?)과 밑바닥을 벗어날 날은

나도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확실히 변하지 않는 건, 여성청소년에게는 주어진 일자리조차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는 난 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편의점 야간알바는 대부분 남자를 뽑고 오토바이배달이나 다른 배달 쪽 일도 거의 남자가 대부분이다. 청소년 알바도 성별분업이 되어 있다. 여성들은 상냥하고 예쁘고 얌전한 일, 남성들은 힘쓰고, 몸 부딪히고, 강하고, 험한 일. 우리는 그런 식의 험한 일은 여성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교육받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들에서도 여성의 직업과 남성의 직업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보여준다. 그리고 남성 직업인데 그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 소위 말하는 '여성 엘리트' 을 보여주며, 이례적인 일이라는 투로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다른 여성들을 향해 말한다.
"너도 네 재주껏 해봐."
남성은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여성은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다시 내가 알바를 구할 때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 시간을 써야할 것 같은 두려움이 스물스물 생겼다.

여성청소년으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안 그래도 '밑바닥 노동'인 청소년 노동에서 그 '밑바닥'을 뚫고 한참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초초저임금인) 시급에 남녀차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손님들을 대할 때 아무리 토 나올 것 같은 손님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급 더 올려 줄테니, 애인이 되어달라는 마초 아저씨들의 더러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들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과 청소년, 여성 청소년의 노동 현실은 언제쯤 밑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윤티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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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182 호 [기사입력] 2009년 12월 09일 15:14:28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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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 그러고 보니 난 참 운좋게도 좋은 알바를 구한 듯 하네.

    2009.12.09 22:03 [ ADDR : EDIT/ DEL : REPLY ]
  2. 반한나라당유격전투쟁단대장

    소녀동지들이여!

    투쟁을 해야지

    안하고 억울하게 당하기만 할 것인가?

    내가 여러분이었으면 짤릴 각오하고 소녀고용살이노조를 만들어서 우리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었다.

    당하기만 할 것인가?

    나의 동지들이여!

    2009.12.17 00:54 [ ADDR : EDIT/ DEL : REPLY ]
    • 제가 아무래도 활동가 입장이다보니- 그런 말은 쉽게 못하겠습니다 ㅋ;;;;; 노조 만들려고 하면 짤릴 게 뻔한 게 비정규직 파트타임이니까요.
      제가 청소년노동운동 쪽에 뛰어들 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노조를 만드는 건 '우리들의 처지를 이해해달라' 이상이기도 하지요

      2009.12.17 17:19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09. 10. 16. 18:59

[페미니즘인(in)걸]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도대체 어쩌라고~

한낱


한낱 활동가의 자기 고백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 나는 ‘모범적인’ 여학생이었다. 민망하지만, 그랬다. 공부도 곧 잘했고, 반장도 몇 번 해봤다.선생님들의 예쁨도 꽤 받았다. 학교 안에서 가끔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그 날 재수가 없어서 그랬던거였다. 청소년 인권? 그런 거 전혀 몰랐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 그만큼 성과도있었고, 보상도 받았다. 당시에 내가 성차별을 받았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학업성적과 임원직 수행으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뛰어넘은 나는 여느 찌질한 남학생들보다 훨씬 인정받았다.

차라리 객관적인 점수로 평가받았던 그 시절이 여성인 나에게 더 행복한 시간이었던 걸까? 요즘 국방부가 군가산점 부활을 운운하는걸 보면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졸업성적이 좋아도 '용모준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군필자 우선' 앞에서 고개를숙여하는 학교 밖보다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렇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우세가 학교 안에서는 가능한 거고,여남평등은 학교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평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내 이야기를 해보자.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 “찰흙으로 고추를 만들어 붙여줘야지.” 등등의 농담을 많이 했었다. 내가그다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갖추고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엄마는 언니에게는 보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기대감을 내게품었고, 나는 내가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무게를 어릴 적부터 지고 살았다. 지금도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엄마가했던 말이 기억난다. “엄마가 미안하다. 예쁘게 낳아주지 못해서. 그만큼 너는 공부를 잘해야 돋보일 수 있어. 열심히 해.엄마가 밀어 줄게.” 엄마의 진솔한 충고는 나의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변호사든, 기자든 뭔가 똑똑하고멋져 보이는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야 했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탈학교 청소년 활동가는 자퇴를 고민하던 시절 담임교사가 했던 말을 생생히기억하고 있다. “너 자퇴 해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니?” 나의 엄마도, 이 담임교사도 여성인 우리가 맞이하게 될쓰디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들이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나눠 준 것일 수있다. 비록 그 지혜가 우리가 가진 조건 자체를 성찰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여학생들,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소 팔아서 장남만 대학 보내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여성도 남성과 나란히 취학의 문에 들어설 수 있게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되었고, 기회 자체만 본다면 성차가 두드러지지 않는 시점에 온 것 같다. 학업 성취도평가 분석이나, 특목고 진학률을 보면 여학생들의 학업 수행 능력이 남학생들을 앞질러 가고 있다고 한다. 남학생 학부모들은 내신에대한 불이익 때문에 남녀공학을 기피하고 있으며, 남고/여고로의 전환 신청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 일부 학교에서는‘남녀 내신 분리 산출’이 관행이기도 했다. 남녀의 뇌구조 차이를 근거로 남녀공학 폐지론을 주장하는 보수논객들도 활개를 친다.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생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의 크기까지 들먹였던 것이 우생학 아니었던가. 이제는 여성의 생물학적우수함을 거꾸로 반증하고 있는 셈이니 도리어 반가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실 이런 분석들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 자체가 이들의 논리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그 분석에는 문제가 있어. 여학생들이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우리 여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잘하고 있나? 좀 못하도록 노력해 볼게.” 얼마나 우스꽝스런답변인가. 왜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것은 ‘문제’가 되는 걸까?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되 남학생들 보다는 살짝 못하는오묘한 성적 관리 기술을 익혀야 하는 걸까? 이러한 현상이 정말 ‘문제’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데 어떤사회적 장벽이나 차별이 있고, 그것이 성적에 영향을 미침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성적으로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는평가제도 자체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애꿎은 여학생들의 성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이 낳은 역설적 상황

여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좋은 것은, 그만큼 그녀들이 성적 관리에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차별의 상황에 놓여있기때문에 성적도 뛰어나다는 거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야 비로소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따놓을 수 있는 데서 점수를충분히 따놓지 않으면,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잠재적인’ 능력자로인정받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항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 후, 20대 여성들이남성들보다 어학 공부에 더 많이 열중한다는 통계는 그런 점에서 의미 있다. 여성 할당제 등 여남 간의 실질적 평등을 보완하려는정책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나 실업률이높고, 고용이 불안한 시기에는 그마저도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무원 시험 합격률이높은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거나,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임용고시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암암리에사립학교에서 남교사를 선호하고, 우선 채용하기 때문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군가산점제가 부활하면 이런 ‘여초 현상’ 조차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다 시 돌아와서, “정말 여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고 싶다. 평균이라는 통계의 가장 큰 함정은변량들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중간 값으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부를 잘하는일부 여학생들이 있고, 그녀들이 한국 사회의 여학생을 대표한다. 많은 여학생들이 힐러리나 박근혜, 나경원을 동경할 순 있지만모두가 그녀들처럼 소위 ‘성공’하는 여성이 될 수는 없다. 여학생들이 내신관리 능력이 뛰어난 건 학교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에부합함으로써 생존하려는 전략이다. 그냥 여성이 아닌, ‘똑똑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남성과 비등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그녀들을 ‘명예 남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교사들은 ‘참한 여학생이 반장이 되어야 교실이 안정적이다.’라고 말한다. ‘참한 여학생’이 교실을 주도해야 교실 안 폭력도줄어든다는 거다. 참한 여학생은 누구인가? 성격은 기본이고 성적도 좋아야 한다. 학생과 교사의 갈등을 조절하고, 교실 안을침착하게 돌보는 ‘조용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순간,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훅 느껴진다. 이제는 기술과 가정을 분리하지 않고여남이 함께 배운다고 한다. 출석부에 남학생 이름이 먼저 기재되어 있던 문화도 사라졌다고 한다. 학교가 옛날보다는 많이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학생의 ‘능력’을 바라보는 기준은 획일적이다.


평균을 갉아먹는 존재들의 반란


이 러한 학교 안의 능력주의가 깨지지 않으면, 통계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여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소외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없다. 끊임없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여학생들, 학교의 기준을 비웃으며 학교가 아닌 거리를 택하는 여학생들에게 “그러니깐, 공부를좀 더 하라니깐!”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 명, 한 명 천천히 빛나는 사람들. 그이들이 자기만의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없는 학교에서 성평등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연재 글들이 청소년 인권에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시도였다면, 이번 글은 청소년인권을 통해 자칫 페미니즘이 놓치고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학교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성적 제일주의)’다. 학교에서는못생겨도 공부를 잘하면 일단 인정받는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내면 역시나 인정받는다. 소수성에기반한 다양한 차별들이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과해 그 빛깔을 낸다. 여성주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학교 평균을 갉아먹는존재들’의 반란을 기획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한낱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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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174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12:51:46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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