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1

비어 있는 책꽂이로부터 어떤 친구를 떠올리며

비어 있는 책꽂이로부터 어떤 친구를 떠올리며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넉넉잡아 50권은 되는 일본 라이트노벨들이 꽂혀 있지만,(현재 사는 서울 집과 대구 부모 집 포함해서...) 과거 내가 모은 라이트노벨은 거의 80-90권 정도에 이르렀었다. 내 라이트노벨 30-40권을 먹고 하늘나라로 튀어버린 녀석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다. 결국 지금 와서 어느 라이트노벨(예를 들면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라거나...)이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 때에도, 혹시 그 책이 그 녀석에게 준 그 30여권들 중에 있었다면, 나는 책장에서 가볍게 그 책을 뽑아 화장실에 가거나 잠이 안 오는 어느 명절 밤을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랑 같은 고등학교 만화동아리에 있던, 나보다 1학년 늦게 들어온 ..

어설픈꿈 2010.09.26

수필 - 가로수 아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2005년 4월에 썼던 수필. 딱 4년 정도 됐구나. 가로수 아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죽음이란 언제부터였을까’라고 묻게 되지만, 아마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었을 것 같다. 시체가 굴러다니는 일이 흔한 것이 세계다. 그 진술은 생명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용 가능하다.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현대가 특히 더 불안한 시대인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것뿐일 터이다. 병사(病死)가 줄어들고 평균 수명이 연장된 대신에 교통사고와 가스 폭발, 전쟁 등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보면 객관적인 수치 면에서는 아마 후자가 전자를 대신했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어설픈꿈 2009.04.26

수필 - 굴 속의 전화번호들

굴 속의 전화번호들 1 살다보니까, 가슴 한켠에 묻어뒀던 것들이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더 깊은 속으로 굴을 파고 숨어 버려서, 마음 속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구멍은 뚫려 있지는 않아서 시린 바람이 드나들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먹먹하고 허전하긴 하다. 예컨대 몇 년 전에 즐겨가던 식당을 갔는데 식당 대신 부동산 중개업소가 들어서 있을 때, 그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던 커피숍이 간판 자국만 남기고 경양식 식당으로 바뀌어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이 거리가 낯선 간판들로 뒤덮여 있을 때, 유치원 시절 즐겨 봤던 만화책이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거나 제목조차 잘 생각이 안 나서 찾지도 못할 때….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그 속에서 달라져가고 없어져가는 것들은 좀 지나치..

어설픈꿈 2009.04.21

장 그르니에 - 어느 개의 죽음

2004년에, 장그르니에 씨의 "어느 개의 죽음"을 읽고서 썼던 글이네요. 옛날 블로그에서 발견하고 집어옵니다. ---------------------------------------------------------------------- 뭐... 전에도 말했다시피, 장 그르니에 전집이 나온 바 있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 그래서 4개, 일상적인 삶, 까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섬, 을 뽑아서, 장 그르니에 선집, 이란 이름으로 나온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지요. 장 그르니에 책은, 적당히 어려우면서 적당히 이해할만하고, 적당히 사색적이면서 적당히 감성적이고..(그만해!) 여하간 수필로서는 귀감 중의 귀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수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들이 많긴 하지만..

흘러들어온꿈 2009.02.11

수필 -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옛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 예전에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간 몇 번 동창회니 동문회니를 오라는 연락이 왔지만 전부 다 가지 않았다. 한 번은 계속 연락을 해오는 담당자(누군지도 모르지만)가 안쓰러워서 어차피 저는 안 가니까 문자를 안 보내시는 게 절약일 듯하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문자가 오던 걸로 봐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이신가보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동창회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히 벗어나려고 "나도 가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이 영 안 나네."라고 립서비스를 한 적이 있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여기에서라도 말해둔다. 여하간에 동창회야 그렇다쳐도, 내가 예전에 한 번 친한 친구들의 모임이나 내가 친하게 ..

어설픈꿈 2008.11.24

수필 - 이웃 거미 씨

이웃 거미 씨 (2006.08.) 내 기숙사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거미 씨 세 명이 집을 지어놨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이웃들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거미집 일부를 건드려서 부숴버리기도 했다. 주로 벽 쪽에 붙어 있는 거미1(편의상의 이름) 씨의 집을 부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와 거미1 씨 둘 다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한두 번 그러고 난 후에는 거미1 씨의 집을 파악하고 움직이다가 거미2 씨나 거미3 씨의 집을 부순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은 그쪽에서 타협을 보았는지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에 안 닿는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 만일 거미 씨들이 없어지기 전에 내 방에 올 일이 있다면, 그 집이 어떻게 절묘한 대각선으로 배치되어서 내 통로를 만들어 주고 있는지 관찰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흔히 ..

어설픈꿈 2008.03.17

수필 -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동창회 가입을 거부하는 데 대한 변명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얼마 남지 않은 때이다. 내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동창회에서 1만 원씩을 내라고 하고 있다. 동창회 가입 명목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 돈을 내지 않겠노라 다짐했으며, 지금은 한 발 양보해서 돈을 내더라도 적어도 그 돈을 냄으로 인해 내 이름이 동창회 명부에 오르는 일만은 거부하겠노라고 굳게, 굳게 다짐하고 있다. 공동체의식이 부족하다든가 혼자 튄다든가 모교를 우습게 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나 나는 나의 어설픈 생활 원칙과 알량한 기분을 위해서 그 돈을 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놈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업무상의 경우를 제외하면 내가 사람을 사귀는 기준은 어디..

어설픈꿈 2008.02.17

수필 - 예외와 반례 사이

예외와 반례 사이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내 자신이 우리 주변의 여러 일들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도 대략 실존감각의 문제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또 그렇게까지 평범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1988년 4월 11일 생임에도 주민등록에는 1988년 2월 25일로 신고가 되어있다. 학교를 일찍 들어가기 위해서 같은 이유가 아니다. 나 태어난 날 기분 좋아서 약주 몇 병(?) 하신 할아버지께서 음력 날짜로 올렸다고 한다. 생일을 앞당겨 신고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드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의도성 같은 것도 없..

어설픈꿈 2008.02.08

수필 - 순수를 망가뜨릴 때

순수를 망가뜨릴 때 눈의 이미지 중 하나는 순수함이다. 새하얗기 때문일까. 그 눈이 산성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 내게 눈은 순수한 시간이다. 특히 조금밖에 내리지 않은 눈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순간이다. 더욱이 그것이 몇 줌 남지 않은 첫눈이라면. 눈은 순수하기에 망가져야 한다면 순수하게 망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리 오래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겨울의 한복판 일부에나 머무르는 눈인데, 그나마 있는 눈마저 순수하지 못하게 파괴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단 것, 그리고 그 순수가 세상 속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건만. 눈을 가장 순수하게 망가뜨린다는 것, 그건 바라보고, 생각하는 ..

어설픈꿈 2008.02.02

수필 - 최선을 다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우리는 종종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쓴다. 그 말이 언급되는 것은 삶의 지혜를 말하는 자리에서일 때도 있으며, 어떤 일에 대해 변명하는 자리일 때도 있다. 최선을 다한다. ― 이는 실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모호한 말이지만, 고3 교실에서 사용될 때는 종종, 고상하게 말하면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에 투자하는 것, 대놓고 말하면 사회적․유희적 인간으로서의 여러 가지 욕망들을 최대한 죽이고 입시용 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3 교실에 앉아서 속으로는 죽어라 욕을 해대며 작년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주는 세계사 선생님을 노려보고 있다 보면 "어문 데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해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해..

어설픈꿈 2008.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