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시 - 나의 분노

나의 분노 나의 분노에는 답이 없다 구부러진 골목길 아무런 낙서조차 없는 벽 앞에 선 갈색 고양이처럼 나의 분노에는 꿈이 없다 더러워진 일기장을 팔랑이다 알람시계를 맞추고 곯아떨어진 자동입출금기보다도 잠이 부족한 알바생의 얼굴처럼 나의 분노에는 이름이 없다 희미한 눈썹의 꿈틀거림 더부룩한 뱃속의 뒤틀림 낙상한 적도 없이 눈두덩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던 눈물방울처럼 나에게는 분노가 없다 내 손으로 부숴버린 휴대전화와 슬픔으로 부어있는 몸뚱아리 말고는 나에게는 분노가 없다

어설픈꿈 2010.05.05

시 - 도시의 생활

도시의 생활 도심에서 숨쉬기란 얼마나 모호한가 먹는 일도 걷는 일도 앉는 일도 구르는 일도 한발짝 떨어져서 흘러가는 일들 도심에서 말하기란 또 얼마나 뻑뻑한가 걸레처럼 쥐어짜는 한마디 두마디도 건조한 피로로만 돌아온다 서걱거리는 나날들이 한줌씩 퇴적된다 끝에서는 검은 아스팔트가 솟아오른 벽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 걸음만큼이나

어설픈꿈 2010.03.16

창틀 위의 시집 - 김행숙 『사춘기』

2007년 11월에 썼던 글. 비평이라기엔 좀 덜 본격적이지만........... 미완성 교향곡 등등 지금도 읽으면 좋다. 창틀 위의 시집 - 김행숙 『사춘기』 저번 주말에 결국 김행숙 시인의 『사춘기』를 샀다. 사기 위해서 이 서점 저 서점을 돌아다녀봤지만 도무지 없고 어디에는 '절판'이라고 떠서 좌절하다가 5번째로 찾아간 서점에서 겨우 발견한 것이었다. 찾아 헤매던 책을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음 그렇게 크거나 격렬하지는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자꾸만 히죽거리게 되는, 뭐 그런 거랄까나. 우훗. 김행숙 시인의 『사춘기』는, 고2 때 전북대에서 열린 어느 작은 백일장에서 가작을 받으면서 그 부상으로 내게 찾아왔다. 사실 그때 다른 약속 때문에 수필을 써서 휙 내놓고 직접 시상식 참가하지도 않고 다른 ..

흘러들어온꿈 2010.01.19

시 -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모든 것이, 잃은 것 같았다 눈을 감는 것이 괴로웠다 눈을 뜨는 것은 외로웠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려웠다 문에 기대어 있었다 벽이 아닌 신문지들처럼 넘어졌다 아니 글자조차 잃고서 그냥 어느 종이조각처럼 휴지처럼 넘어지고 있다 넘어진 종이조각을 주워 말을 거는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글자를 보여주지 않겠다 테두리만 남은 점선들을 쏟아놓지 않겠다 신도림역을 걷는 것이 두렵다 지하로 전철이 달리는 것이 지상으로 전철이 달리는 것이 네가 없는 것이 아무것도 갈아탈 수 없었다 -------------------------------------------------------------- 그럴듯한데... 싶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직설적이기 때문일까? 호흡이 짧다는..

어설픈꿈 2010.01.04

시 - 어느 저녁 무렵

어느 저녁 무렵 불그스레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오면 힘이 빠진 사람은 계단가나 길바닥에 주저앉아도 좋다. 해지기 얼마 전 공원가, 머리칼 없이 뽀얀 두 살배기가 젊은 엄마를 보채며 앙앙대고 있으니까, 벤치에 앉은 양복이 펴든 신문뭉치엔 빽빽한 활자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갈아놓고 있으니까, 검푸른 잠자린 물결에 구겨지는 연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으니까, 그 건너엔, 호수와 백조보트와 다리와 물결에 흔들리며 저무는 텅 빈 하늘이 침묵하니까 힘이 빠진 사람들 불야성의 도시에 등을 보인 사람들은 공원을 거쳐, 저녁을 거쳐, 다시 불빛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해돋이와 해거름 사이에 유리파편 같은 가래를 목이 따갑도록 삼켜 보고는 하는 사람들은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 ------------------------------..

어설픈꿈 2009.12.14

시 - 부러진 선풍기

부러진 선풍기 날개가 가출했다 어느날 문은 열려있지 않았지만 날개들은 가출했다 집을 나간 날개들이 어디를 갔는지는 하얗게 떨어뜨리고 간 바람의 자취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누구에게 날을 세웠는지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홀로 남은 날개만이 창살 속에서 궁금해 할 뿐 창살 속 허공이 외로운 날개를 흔든다 흔들리는 날개는 돌지 못한다 혼자 쓰게 된 방 안에서 제대로 숨쉬지 못한다 ---------------------------------------------- 2005.08 쓴 시. 어째서인지 난 썩 맘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꽤 싫어하지 않더라. 실제로 선풍기가 부러지면 버리거나 고치세요.

어설픈꿈 2009.12.11

시 - 겨울강을

겨울강을 겨울의 강에서 배가된다 나무배는 차가웁고 무르다 언강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푸른물빛 뱃길을 만든다 투명한 겨울이 깨지는소리 투명한 소리에 잠긴뱃전엔 나무색 상처들이 드러난다 겨울강 피부가 잘게 깨어진다 나무배 피부가 긁혀 찢어진다 흐르는 강위에 길만 남는다 상처, 상처, 그리고 저 건너편으로 닿은 뱃길 +개굴, 누리와 여행갔던 때, 청령포에서 배를 타면서 떠오른 이미지들을 정리해봤던 시인데 다소 조악하다는 생각이 든다. +2006년 12월에 쓴 시. +예전 블로그에서 옮겨오는 과정에서 약간 수정했다.

어설픈꿈 2009.12.07

시 - 낙엽 무게

낙엽 무게 나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지만 낙엽도 한 잎 한 잎 나를 밟는다 어느새 걸음이 무거워져 앞을 보던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면 밟고 지나친 낙엽들을 흘러버렸다 생각했던 낙엽들을 몇은 업고 몇은 끌며 나는 걸어가고 있다 내가 이 거리를 계속 걷게 해준 것도 나에게 밟혔던 낙엽들이었으니 낙엽이 발등을 밟는 소리는 어깨를 살쩍 두드리는 소리는 잠든 네가 내는 마지막 날숨소리처럼 언제나 너무나 은근해서 알 듯 모를 듯 나의 발자국을 숨결만큼씩 깊게 하고 나중에 이 거리 저 어디쯤 가서 낙엽 무게 너희들 숨결 무게가 너무 무겁다 싶을 즘이면 나도 조금 큰 낙엽이 되어 이 거리를 걸어가는 너의 어깨를 두드려주고서 그 발에 밟히고서 멈춰서고 싶다 옛날에 쓴 시들 옮겨오기-

어설픈꿈 2009.12.06

그것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소나기는 세차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래 가는 장마도 언젠간 그친다 아무 비도 내리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그런 날이면 하늘이 보이지만 하늘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더라도 없을지도 모른다 너의 품은 너무 넓어서 뛰어도 뛰어도 계속 갈 것 같았다 끝나지 않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더라도 없을지도 모른다 시라고 하기에도 조악하다. 그냥 두세 가지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혀서.

어설픈꿈 2009.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