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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 밤이 지나치게 늦어질 무렵 손톱발톱 홀로 깎는 소리 튀는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 괜한 꿈에 몸을 떨며 눈을 떠서는 괜시리 아푸아푸 세수하는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 쉽게 듣던 노래들이 텅빈 늑골에 모래처럼 알알이 박혀오는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말라버린 사랑을 뽑던 때에야 심장까지 닿은 뿌릴 깨닫는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나의 지구는 이미 한 번 부스러졌는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것 빼곡한 달력이 넘어간다는 것 나를 고독하게 하는 그것

어설픈꿈 2009.11.08

시 - 아 이런

아 이런 길 잃을 일도 없는 대로변에서 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안아주지도 달래주지도 못하고서 아 이런, 나는 그냥 집으로 데려와버렸다 집에서도 나 자신은 계속 울었다 파아란 하늘도 회색빛 하늘도 아랑곳없이 아무리 말 걸어도 달랠 수 없어 아 이런, 나는 그냥 나가서 삶을 던져댔다 아 이런 집에서 나 자신이 울고 있어서 이제 나는 울 수가 없게 되었다 아 이런 눈물 총량 불변의 법칙이 아 이런, 안구가 점점 건조해지고 있다 아 이런 ---------------------------------------------------------------------------------- 아 이런 아 이런 아 이런 아이러니 내용은 재미있지 않은 시지만 계속 읽다보면 뭔가 재밌어진다. 아 이런 아 이런 아이런 ..

어설픈꿈 2009.09.03

시 - 라일락보다 쓴

라일락보다 쓴 두 번째로 마셔본 소주 몇 잔은 처음으로 씹어본 라일락보다 썼다 까맣게 방울지는 독백을 삼켜가며 돌아오는 오르막길 위로는 하얀 별이 둘 있는데 멀다 별과 별 그 사이는 멀고 그 까만 거리가 소주처럼 씁쓸해서 눈물나게 씁쓸해서 자꾸만 방울지는 가락에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몇 해 전이었나 인생을 알겠다며 라일락 잎을 씹던 게 이젠 왜 라일락보다 쓴 소주를 마시는지도 알게 됐지만 나는 아직 2006년 5월에 초안. 처음엔 '라일락보다 쓴 거리감'이었는데 그 뒤에 제목에서 '거리감'을 뺐다. 마지막 행의 "나는 아직" 다음에 "사랑을 한다"가 있었는데 초안을 쓸 때부터 고민하다가 뺐다.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 것도 같아서. 더 적당한 게 없는 이상은, "나는 아직"에서 끝나는 시로 ..

어설픈꿈 2009.08.16

시 - 구멍에는 무게가 있다

구멍에는 무게가 있다 손을놓고 걸어온지 아마6개월쯤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니 잡히는건 커다란 구멍뿐이다 가리지못한 손가락이 꼼지락대며 고개드는 허전히 찢어진 구멍 반지도 구멍으로 흘리고왔고 유에스비 메모리도 흘리고왔고 받지못한 답장도 잃어버렸다 무엇을 잃었는지 메모조차도 그리고 또, 또렷하진 않지만 햇살로 그리움을 그리는 방법이나 눈꺼풀 뒤쪽에 기록한 시간들도 잊어버렸다 주머니의 구멍을 움켜쥐고 더이상 널흘리지 않기위해서 천천히 조심조심 걸어가지만 어느새 구멍이 하나둘늘고 구멍들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내 걸음은 점점 더 느려만진다 구멍들을 짊어지고 간다 구멍만큼 숨소리도 발소리도, 깊어진다 - 나를 흘리는 게 아니라 너를 흘리는 건데 내가 부서진다. 연기설? ... 이라는 메모가 달려 있다. 2006년 ..

어설픈꿈 2009.08.04

시 - 사춘기?

사춘기? 아이들이 달려서 내옆을 스쳐간다 홀쭉한 가방들 빵빵한 가방들 제각기 흔들리며 학생들의 휜등을 리드미컬하게 탁탁탁 때려가며 재촉한다 돌기둥 녹슨철문 반듯한 교문 교문을 지키고선 대머리 교사가 늦겠다 뛰어라 연거푸 소리쳐도 나는 태연하게 걷는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종이 운다 평소완달리운이좋네 감탄하건 말건 걷고 싶으니까 걸었어 어쩌면 그건 주위 사람들이 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난 걷고 싶어 특히 아침엔 수업이 시작하면 우리는 끝날뿐 난 창가에서 찾는 것이 있을 따름 집중집중 선생마다 시간마다 한마디씩 난 창틀에서 찾는 것이 있어서 하나둘 시체를 헤아려 본다 딱딱딱 경쾌하게 분필이 칠판에 우는 게 거슬린다 여기봐요다죽었어 딱딱딱 몇 명이 졸고 있다 짝이 교과서에 낙서를 한다 앞자리는 필..

어설픈꿈 2009.07.28

시 - 종소리

종소리 종은 울리지 않아요 상표를 달지 않은 종 푸른 리본을 빼입은 종 둔탁한 금색 종 문에 달아둔 기다림 3월로 달려나간 당신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 창 틈으로 웃음소리만 찔끔찔끔 흘려 보내고 있더군요 늑장부린 눈 속에서 눈을 쓰는 싸르락싸르락 소리만 귓등을 스쳐가더군요 문에 달아둔 종을 잠옷바람으로 무릎 꿇고서 바라보고만 있어요 사실 오래 전부터 종은 숨도 쉬지 않고 먼지가 굳어진 얼룩 곰팡이만 퇴적되고 있음을 밤이 되고야 별빛 덕에 알아버렸죠 문에 달린 침묵 이젠 멀리서 흩날려오는 소리 보이지 않는 당신의 모습 아직 거기에 있나요? 거기에 있어줄 수 있나요? 발돋움하여 문에 달아뒀던 웃음을 떼어내요 숨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요 지문이 얼룩 위에 남고 긴 잔향이 발자국 위에 맴돌아요 길게 기지개를 늘..

어설픈꿈 2009.07.20

시 - 길이 걸어간다

길이 걸어간다 길 앞에는 신호등이 노란색의 비보호를 깜빡이고 있다 붉은 길은 내 명치를 스치듯이 관통하고 약간 더 붉은 길은 내 가슴을 지나치고 길들은 생일처럼 어느날 주어졌다 빨간신호 횡단보도 그 위로 나의 길들이 비보호를 드리운다 길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추억처럼 하얗게 돌출하는 과속방지턱 페인트를 횡단보도를 밟으며 나를 지나쳐간 길들의 속력은 늦춰지지 않는다 길이 걸어간다 길들이 걸어간다 =-------------------------------------- 2005년에 쓴 시. 길과 나의 분리와 비분리.

어설픈꿈 2009.07.13

시 - 구두, 장화, 샌달

구두, 장화, 샌달 이 어깨를 선뜻선뜻 스치는 것은 시간인가 바람인가 빗방울인가 뜨겁게 기침하며 힘들게 빗은 머리칼도 비바람이 드나드는데 계절에 어긋나게 검은 구두엔 비가 젖어오고 발가락이 불어가고 막아보려 해도 네가 스며오고 너는 몸을 던져온다, 모든 방향에서 그래서, 그들은 샌달을 신나보다 비바람 앞에 맨발을 내놓고 시간 앞에 맨살을 드러내고 합성수지 장화로 삶을 가두느니 세계 속에 발톱을 내놓고 걸어가나보다

어설픈꿈 2009.07.04

시 - 소크라테스 파스타

소크라테스 파스타 1 열아홉살 그녀의 그림에는 파스타가 잠을 자네 웅크리고 잠을 자는 순진한 파스타들 키가 크기 싫어서 벽에 기대선 노래를 불러주는 불면 파스타들 몇이서만 미아 같은 눈을 하고는 노크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네 크림소스를 덮어쓰고 쑥쑥 자라려고 잠을 청하던 파스타들이 화를 내고서야 불면 파스타들은 자장가를 부르네 크림처럼 끈적이는 자장가를 부르네 어딘지 방울맺힌 자장가를 부르네 2 어른들이 그녀에게 제목을 물어보자 그녀는 "먹음직스런 파스타"라며, 웃어보이네 노크할 줄 모르는 어른들이, 노크할 줄 모르는 다 자란 파스타들을 먹네 * 이 시는 어쩌면 계몽적으로 읽힐지도 모르고, 저급한 동화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이건 계몽적인 의도를 갖고 쓴 시는 아니다. 이건 오히려 자조적인 시..

어설픈꿈 2009.06.13

천주교인권위원회 뉴스레터 교회와 인권 칼럼 - 시인과 법

천주교인권위원회 뉴스레터 교회와 인권 2009년 5월 156호 [칼럼] 시인과 법 2009년 05월 27일 (수) 21:59:28 좌세준(인권위원, 변호사) chrc@chol.com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시 인 김남주의 이라는 시입니다.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지던 시절, “네 벽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어둠뿐인” 광주교도소에서 종이와 연필이 주어지지 않아 빈 우유곽에 못으로 시를 쓰면서도 시인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볼라치면 세상이 다시 몽둥이로 다스려지는 듯합니다. ‘법’은 또 어떤가요. ‘법’ 축에도 못 드는 ‘고시’라는 놈이 법 중..

흘러들어온꿈 2009.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