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횡설수설, 고등학교를 사는 방식

공현 2008. 2. 8. 16:33

횡설수설, 고등학교를 사는 방식

 

 

나 자신으로 알차게 살기 위해


 우리는 주관시간(단적으로 말해서 시간감각)과 객관시간(단적으로 말해서 시계), 두 가지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주관시관과 객관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대개 서로 상대적으로 느껴진다. “주관시간은 빠르게, 객관시간은 느리게!”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굳이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소리다. 후회를 줄이도록 노력하란 소리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알차게 살지 못한다. 그 주범은 유예, 곧 미루는 것이다. 피씨방에서 와우를 하려고 공부를 뒤로 미루었다가 시험 망치고 후회하지 말라. 지긋지긋한 공부하겠답시고 피씨방 가는 걸 미루었다가 나중에 재미없었다고 후회하지 말라. 수능 공부한다고 사랑을 미루었다가 후회하지 말라. 시간과 능력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우리는 항상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미룰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디에 더 의미를 두고 어떤 것을 더 알차고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하는지다. 그것을 모르면 후회만 잔뜩 남는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만일 노는 게 당신에게 의미있는 유일한 일이라면 놀면 되는 것이고, 지금 공부를 할 필요가 정말로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하다고 느낀다면 공부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세상에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볼멘 소리를 종종 하다가 지금 하는 공부가 의미있다면 공부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중학교 때에야 깨달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공부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 안 된다. 내가 권유하는 것은 성찰이다. 지금 하는 공부가 필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진정으로 느낀다면, 공부를 할 때 간혹 지루할 때가 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입시위주의 욕 나오는 학교 공부가, 수능 공부가 아무리 봐도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성찰해보지도 않고 주위에서 “지금 공부해야 나중에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들 떠들어대니까 공부하는 것은 정말이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유예하는 미친 짓이다. 미친 짓이기야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무작정 거리를 쏘다니면서 공허한 비행(卑行)에 몰두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여기서 초점은 “비행”이 아니라 “공허한”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튼이 카르페 디엠을 설파한지가 대체 언제인가.
 또한 나는 그냥 성찰이 아닌 인간적인 성찰을 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나를 슬프게 했던 말 중 하나가 바로 내 고등학교 친구가 2학년 때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이제 곧 고3이니까 잊겠다고 한 말이었다. 제발, 그렇게는 살지 않으면 좋겠다. 백 번 양보해서 만나는 일 정도는 잠시 미룰 수도 있다고 치더라도 잊겠다니! 소중한 감정과 인간관계 그 자체가 수능공부보다 덜 중요하다는 생각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혹 그것이 그 사람 나름의 깊은 성찰을 통해 나온 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으며 지금 떠올려도 슬프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을 살며 성찰이 필요한 것은 고등학교가 억압이 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억압은 인간을 몰아부친다. 억압에 직면한 고등학생들은 그 억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거나, 그 억압에 무작정 반발하려들기 쉽다. 양쪽 모두 전혀 알차지 않다.
 성찰의 기본은 정언명제를 가언명제로 바꾸는 일이다. 무조건적인 “~해라!”를 “~라면, ~해라.”로 바꾸는 일이다. 고로 젊은이는 상식과 싸우는 전위대다. 사회는, 학교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상식을 더 익힐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젊은이에게 ‘상식’(예절이나 버릇 등)이 부족하며 그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하라거나 옷을 홀딱 벗고 길로 뛰쳐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조건적 규범으로 환원하란 소리다. 예를 들어,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차에 치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다면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이다. 그렇게 되면 차에 치일 가능성이 애초에 0에 가까운 상황(주위에 달리는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없다고 믿을 있는 상황)에서까지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지킬 필요는 없게 된다. 여러분의 종교(상식이건 뭐건)를 깨고, 그 담벼락을 무너뜨려라. 경계선은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그 둘 사이에 높게 세워진 담벼락을 무너뜨리거나 낮출 수는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찰은 불가능하다.

 고등학교 시기에 많은 억압과 상식(특히 학생다움, 학생의 본분 등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억압을 경험한 자만이 제대로 억압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모든 고등학생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억압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고등학교 3년 동안 갖추길 바란다.


  분명히 말하건대, 세상은 배배 꼬인 곳이다. 어떤 길을 택하건 장애물을 만날 가능성은 낮지 않다. 행복을 확실히 약속해줄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으며 상처입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고자 의사가 되고 싶은데 성적이 안 나와서 의대에 입학하지 못 한다든지.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면 온 우주가 그를 돕는다는 둥의 코엘료식 헛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없다. 자기 자신의 길을 가면 반드시 행복할 거라거나 하는 소리도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현재」와 「최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으며 자유롭다. 여러분은 살아있으며 자유롭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




친구로서, 자식으로서, 제자로서 살기 위해


 인생에서 중요한 게 친구다. 대학교보다는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 만드는 우정이 더 순수하다고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우정이 티없이 맑은 우정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고등학교쯤 되면 사람들의 개성이나 성격이 어느정도 확립되기 때문에 각양각생의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정말 비열한 짓을 하는 친구도 있고, 이런저런 재주가 많아서 부러운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친구로 삼으면 믿는 편이 좋다. 배신당해서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일단은 믿는 게 좋다. 『내가 정말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택시기사들을 잘 안 믿지만 실제로 택시기사 중 70~80%는 선량한 사람이며 승객을 잘 속이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0명의 친구를 신뢰하면 적어도 7명의 친구는 남을 가능성이 높달까. 믿지 않으면 아무도 남지 않겠지만 말이다. 해볼 만한 도박이지 않은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오래 간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자기자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에서 만든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사람이 변하는 일은 많다지만, 고등학교가 이미 그 2차적 변화의 초입이자 변화 전의 1차적·기본적 변화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함께 한 친구는 각별하게 느껴질 공산이 크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단, 친구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신뢰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힘들 때 조금 기대거나 고민을 상담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자신의 삶을 그 친구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데도 안 좋을 뿐더러, 만약 친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되면, 그 친구는 상당히 피곤해할 것이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친구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처럼 대등한 관계가 아닌 사랑은 전적으로는 믿지 않는 게 좋다.(친구의 경우도 대등하지 않으면 믿지 마라.) 그런 건 구속으로 변하기 쉽다. 부모자식 관계나 사제 관계는, 언제나 60% 정도만 믿는 게 좋다. 물론 부모나 스승의 성격에 따라 판단해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그들이 중요한 문제에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윗사람은 자신들의 기대를 멋대로 아랫사람의 삶에 투영하여 (은근하게든 노골적으로든) 강요하려 하기 십상이다. 대등한 관계가 아닌 한, 그들이 말하는 사랑을 온전히 믿으면 안 된다. 스승이나 부모와 단순히 부모자식 관계나 사제 관계 이상의 대등하고 깊이 있는 인간 관계를 따로 맺어왔다면 모를까.

 친구건 부모건 스승이건,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큼은 좋고싫고를 명확히 해두는 게 편하다. 이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니면 별 느낌이 없는지 정도는 구별을 해둬야 행동 방식을 정하기 쉽다. 그 느낌을 밖으로 그대로 드러낼지 우회해서 드러낼지는 사람 성격에 따라 다른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어느정도 짐작하려고 노력해두는 게 인간 관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좋을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휘둘리지는 않되 신경은 써두는 게 편하다.
 그러나 공사를 구별하는 것은 확실히 익혀둬야 한다. 싫은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께 숙제를 해야 한다거나 공적인 사안(학생회 일이라거나, 동아리 일, 또는 순전히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야 한다면 제대로 대해야 한다. 사적인 문제에서 좋고 싫고를 분명히 표현할지 표현하지 않을지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지만, 공적인 문제에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편이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좋다. 동아리에서 축제 준비를 하는데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사사건건 싸운다면 그건 동아리의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 부모나 교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대우(교사의 권위나 부모의 권위를 반드시 지켜줄 필요는 없다. 단, 인간으로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을지도.)는 해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의 이야기다.





고3을 사는 방식


 고등학교 3학년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사람들은.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으로 맞이하는가, 대입시험을 앞둔 학년으로 맞이하는가. 이런 마음가짐이 고3 생활에 많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실은 둘 다일 테지만,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는지가 문제다.

 나는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으로서 고3을 살았다. 그래서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고, 그 순간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서 수능을 몇 주 앞두고도 좋아하는 사람과 몇 시간씩 수다를 떨기도 했고, 수능 이틀 전에 신문에 낼 글을 쓰기도 했다. 삶은 죽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고등학교는 졸업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고3은 수능보고 대학 가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고3은 그저 고3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수능을 몇 달 앞두고 공부를 안 하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고, 공부를 해야 그나마 안심이 된다면 공부해도 좋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난 아마도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부터 자문(自問)할 테지만.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성찰. 괜스레 일어나는 감정은 가능한 한 살펴서 털어버리는 게 좋다. 주변 사람들이 초조해한다고 자신도 초조해진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감정의 경우는 털어내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 정체를 알게 되면 그나마 줄어든다. 자기자신을 좀 더 응시하면 된다.

 사실 나는 고3이 그렇게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별 거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글을 쓰고는 있지만. 고3 동안 죽은 걸로 생각해라? 웃기지 마라. 설령 다른 건 보지도 않고 공부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선택이 아니라면 불행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숙학원에서 방학 동안 매 맞으면서 성적 올랐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노예가 된 것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래서, 부모가 강요해서 노예의 정신으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걸 자랑하지는 않으면 좋겠다.

 완전히 노예가 되지 않은 한은 자기 선택에는 항시 책임을 지는 게 권장사항이다. 고등학교를, 또는 고3을 어떻게 살았든,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살았다면 그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줘야 다른 사람들이 피곤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어중간하게 공부하다가 취미생활하다가 하느니, 공부가 싫다면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공부하기 싫어하는데 부모는 억지로 공부시켜서 이도저도 아닌 꼴 나면, 자식은 부모를 탓하고 부모는 자식을 탓한다.

 고3은 특별하다는 인식과 맞서야 했다는 점에서만큼은 내 고3 생활도 고3이기에 특별했다고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은, 고등학교의 마지막 한 해로서 고3을 살 것인가, 수능을 몇 달 남겨둔 시간으로서 고3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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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졸업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