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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모든 비는 눈이었다

모든 비는 눈이었다 모든 비는 한때 눈이었다 세상보다 먼저 온기를 만나 조금 일찍 흘러버린 눈물 그러니 모든 슬픔도 한때는 반짝이는 기쁨이었을지 모른다 말라버린 뒤뜰을 덮어줬던 녹아서 질척해진 빗물만이 땅속까지 적실 수 있듯이 아름답기만 하던 우리의 시간들도 체온을 만나 숨결에 부딪혀 아픔으로 슬픔으로 눈물로 흐르고 비로소 나는 너에게 스민다

어설픈꿈 2018.12.13

시 - 우리의 항해

우리의 항해 홀로 새벽을 표류할 때면 무얼로 알 수 있을까 나의 경도를 별도 지워진 골목에 서면 별로 까닭도 없이 불안해진다 부지런한 걸음들이 부질없는 구름으로 감춰질까봐 지켜보던 나침반도 지쳐버린 침묵 아래 멈춰질까봐 햇빛이 눈썹까지 번져올 때야 입술로 기억해낸다 너의 번호를 널 부를 순 없지만 함께 탈 차편을 예매하기엔 우리의 예정이란 애매한 일이지만 외워둔 번호가, 외롭다고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것 바라볼 사랑이 있다는 그 사실로 나는 출범할 수 있는 것이다

어설픈꿈 2018.04.28

시 - 이유 없음

이유 없음 그때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저 습관 같은 것일지 모른다 힘내야 할 것도 인내해야 할 것도 이유도 없이 정해진 노선 따라 아무도 정해주지 않은 목적지로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어깨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모르는 사람의 머리가 얹혀있다 고작해야 나란히 앉았을 따름인 다른 사람의 무게를 머리칼을 조금의 알콜냄새를 숨소리를 입을 다물고 지지하며 휘어질 때마다 빨라질 때마다 남겨져서 휘청이고 무거워진다 가속도는 무게다 가속도는 만남이다 죄도 없이 대가도 없이 이유도 없이 짊어져야 한다 삶은 이유가 없어도 기각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유 없이 정한 목적지면 된다 나는 곧 일어나야 하겠지만 어깨에 놓여있던 무게에 주저하긴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슬퍼하고 있다

어설픈꿈 2017.09.08

시 - 도망

도망 불광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던 길, 거리는 이미 태양으로부터 뒤돈 지 오래, 모래가 흐르는 듯한 광대뼈, 아킬레스건은 여느 때처럼 걸은 시간의 무게에 시달려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런 밤. 몇 해 전 애인과 갑작스레 4호선을 타고 오이도까지 갔던 밤이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과 그럼에도 고작해야 만들어진 해안선으로 실려가던 막차. 그날 전철 안에서는 빌려쓰고 나온 사무실에 불이 났더라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더랬다. 우리는 바다냄새 섞인 대나무통술을 마시며 모래를 토해냈을 조개들을 뒤적였다. 망친 일은 많은데 도망칠 곳은 없고, 어디로 훌쩍 떠나기엔 너무 많이 떠나왔고, 온탕에 몸을 담아도 조개들처럼 모래를 토해내지도 못하고, 불려 나오는 때조차 없이, 이미 불가역적으로 떼어낼 수 없는 나이 시..

어설픈꿈 2017.04.29

시 - 햇빛 아래서

햇빛 아래서 당신을 보낸 뒤 정류장에 앉아 햇빛에 절여진다 똑같은 햇빛이 폐 속까지 스며들지만 우리가 흘리는 땀의 냄새조차 같지 않고 태양조차 평등하지 않더라는 소문이 섬뜩하게 떠다닌다 하얀 햇빛에 탈색되는 공기 선명해지는 세계의 색깔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좀 더 선명해지길 바랐는데 아무리 공기가 투명해지고 아무리 색깔이 선명해져도 볼 수 없는 너의 세계, 적록부터 다른 시각, 유아적인 두려움은 여백 사이로 선뜻하게 떠오른다 당신을 보낸 뒤 정류장에 앉아 이별을 되뇌인다 나는 그저 말과 맘이 표정과 감정이 좀 더 나란한 관계를 바랐는데 태양은 원래부터 나란하지도 않았고 지구는 언제부터 기울어져 있었고 나는 그저 다른 각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설픈꿈 2016.08.22

시 - 사레들린 삶

사레들린 삶 가끔 숨 쉬는 방법을 잊을 때가 있어 아무렇지 않은 나에게 의문을 가지는 순간 멈춰선 자전거가 넘어지듯이 곧잘 가슴 속을 무어로 메울 때가 있어 들인 것과 뱉은 것을 맞추지 못한 잠깐 사레처럼 잘못 든 경로의 도중 질식할 것 같은데 기침도 못하겠는 시간이 있어 수없는 호흡 중에 따져보면 약간이지만 무수한 감정들이 갈비 속에 쿵쾅대고 사실은 알고 있어,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음을 너와 나의 공통점, 사레들린 삶과 질식하는 아픔 --------------- 들인 것과 뱉은 것 삼킨 것과 뱉은 것 삼킨 것과 토한 것 뭐가 낫지....

어설픈꿈 2016.02.04

시 -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빨라진다 피할 곳을 찾아서 뛰어가는 사람들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바람들 새겨진 발자국과 조각들의 자취도 빈틈없는 비에 맞아 빠르게 희미해진다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신발들 바짓단들 습기속을 헤쳐가는 벌레의 날개짓 말려놨던 아픔들과 추억들의 망각도 가라앉는 비에 맞아 느리게 희미해진다 둔탁해진 세상 속에 씻겨 내려가는 많은 것들 때로는 자취가 떠내려가고 때로는 망각이 떠내려가고 비가 내리면 나의 마음이 남는 것이 아니고 남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차마 씻기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많은 것들아 ------------------------------ 빈틈없는 비에 맞아 빠르게 / 빠르게가라앉는 비에 맞아 느리게 / 느리게 라고 쓸까, 희미해진다로 통일..

어설픈꿈 2015.09.01

시 - 실려가며

실려가며 눈꺼풀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몇센치의 동작으로 블라인드를 친다 잠드는 법을 잊은 듯하다 눈꺼풀 뒤편에 숨어 쉬는 와중에 끌어안은 꿈들이 가위 눌린 듯 쓰러지고 숨을 쉬는 법도 한번씩 재활이 필요한 법이다 내려둔 차양에도 새어들어 오고만다 인기척 웃음소리 어떤 고백 방 안을 헝클며 튀어다니는 당신의 여린 마음들 내릴 곳을 앞두고야 걱정들이 날아다닌다 눈 뜨기를 망설이다 지나치진 않을까 너무 많은 짐들이 끼이진 않을까 이제는 나를 안아온 맘들을 배웅하며 내가 알아온 것들로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하는 법이다

어설픈꿈 201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