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15. 12. 12. 12:31

표현의 자유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다. (O)

차별선동, 전쟁선동, 테러 주장 등은 표현의 자유 제한의 사유가 된다. (O)


그러나 

"반국가적인 것이나 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나 김일성만세를 외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합당한 제한이다."는 옳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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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 사실 김일성만세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북한체제가 독재정이며 매우 군사주의적이고 인권침해를 구조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규정한다면

광범위하고 반인륜적 인권침해의 가해자/독재자에 대해 '만세'를 외치는 것이, 

학살선동이 될 우려나 피해자의 존재를 고려할 때 제한되어야 하지 않냐는 것.


이 부분에 대해 박경신 교수도 국가보안법과 차별금지 문제를 연관지어 다룬 적이 있다.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자 우리 사회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라고 본다. 공청회나 토론회를 수십 번은 할 법한 문제다.


참고  : [시론]일베와 국가보안법, 차별금지법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5242115065

"자, 공짜는 없습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 조항을 폐지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북한 입장에 대한 동조는 학살자 찬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 앞에서 나치를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결국 차별금지법으로 ‘국가범죄 피해 사망자 혐오발언’을 금지시킨다면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 조항을 폐지하기도 어려워질 겁니다. 어떤 길을 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충분히 논의한 뒤에."



그러나 적어도 현행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처벌조항이 이러한 합의에서 제정된 것이 아님은 명백하지 않은가.

또한 우리 사회 지배적 세력의 말마따나 박정희나 전두환을 '공과'를 평가할수있다면 김일성도 공과를 평가하여 공에 대해 만세를 외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만약 인권침해 피해자 고려와 역사적 국가범죄에 대한 반성, 군사주의와 독재에 대한 경계 때문에 금지된다면, 그 법적 금지 사유에 따라서는 "김일성만세"를 외쳐선 안 된다는 합의에 따를 의사가 있으나, 김일성이 "적국 북한의 지도자"였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해가 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라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김일성만세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 금지한다면

이승만만세(이승만의 부정선거 책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4.3과 4.19시 희생자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이승만을 숭배하던 것이 결과적으로 부정선거와 데모진압 등으로 이어졌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유신)만세, 전두환만세도 금지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이는 북한/남한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 의한 총체적 반성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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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만세(金日成萬歲)'


                               김수영


'김일성만세(金日成萬歲)'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김수영의 수필 중에 보면 이 시의 제목을 '잠꼬대'로 했다가, 또 김일성만세를 한글로 표기하느냐 한자 그대로 표기하느냐 하는 것으로 문학지 측과 갈등을 빚은 이야기가 있다. 김일성을 굳이 한자로 김일성이라 쓰려 한 것은 물론 국한문 혼용의 시대적 배경도 있겠지만 그것이 북한의 그 김일성임을 분명히 하려던 의도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교한 논리 이전에, 체제에 의해서 가장 금기시되는 표현, 체제를 부정하는 표현마저 보장되어야 언론-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라는 김수영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국기를 불태우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것을 보장해야 하듯이.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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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5. 2. 21. 00:23

성폭력 | 피해자 중심주의 | 2차 가해/피해

 

 

이 글은 ‘성폭력’과 그를 둘러싼 몇몇 개념들에 대해서 많은 정보 부족과 오해가 있기에, 이 문제를 정리해두기 위해서 쓴 것이다. 기존의 여러 논의들을 참고하여 쓰지만, 어느 정도는 내 해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참작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컨대 성폭력 개념에 관해서는 법적인 개념과 운동사회 안에서 쓰이는 개념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혼용되는 여러 용어들의 정리를 주로 시도했으며, ‘피해자 중심주의’와 같은 복잡한 개념에 대해서는 내가 활동해온 단체들 안에서 논의해온 것이 반영되어 있는 등, 여러 맥락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권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나 투명가방끈 등 내가 활동하는 단체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성폭력

 

․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일종이다. 특히 성적인 표현과 행위에 관련된 자기결정권의 침해이며, 원하지 않는 성적인 표현이나 행위를 하거나 당하지 않을 소극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보통 성폭력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성적 접촉이나 성관계를 의도한 접근뿐만 아니라, 성의 표현 및 행위에 관련된 비난과 공격 등도 일부 포함한다. (예 : 상대 여성을 위축시키고 위협하기 위한 의도나 맥락을 가지고 성적 표현을 하는 것)

 

․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 속에서 성폭력의 피해자는 높은 비율로 여성이다. 바꿔 말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가해-피해자의 수적 비율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외형상 동일한 사건처럼 보이더라도 남성이 당했을 때와 여성이 당했을 때 그 의미는 다를 수 있으며, 연애 각본이나 성역할 이데올로기 등은 성폭력을 조장한다. 물론 남성 역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여성 역시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 성폭력의 하위 범주로서, 직접적 강제력이나 폭행, 위협에 의한 강간, 신체접촉 등을 ‘성폭행’이라 부른다. 성폭력과 혼동하지 말 것. ‘성폭행’은 대체로 강간을 가리킬 때만 쓰이며 국어사전에도 강간의 다른 말로 실리기도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성기 결합 성교를 중심으로 둔 개념으로 좀 더 넓혀서 성적인 신체접촉 등을 포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성폭행’과 일부 교집합을 가지는 개념으로서, 성적 수치심 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치 않는 신체접촉이나 성적 언행을 가리켜 ‘성추행’이라고도 한다. 성폭력 중에서도, 지위 등을 이용하여 성적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주는 언행이나 원치 않는 성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성희롱’이라고 부른다.(성희롱은 본래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라는 의미였으며, 이는 직장에서의 지위 등 권력관계가 개입하여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밖에 다른 유형의 언어적 성폭력 등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성폭력-성폭행-성추행-성희롱은 행위의 강도나 악질성에 따른 위계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의 경중은 논할 수 있으나 이는 피해자의 경험과 사건의 내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할 문제이다.

 

․ 물리적인 강제력, 폭력, 언어폭력, 협박 등이 동원되지 않더라도 성폭력은 성립할 수 있다. 가령 형법에서도 ‘추행 목적의 유인’을 성폭력범죄에 포함시키고 있다.(물론 형법상 ‘유인’은 이후 사실적 지배관계에 두는 것을 포함하기는 한다.) 강제력에 의하지 않더라도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의해서 원하지 않는 형태의 성적 관계를 맺도록 한 경우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점에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피임과 콘돔 사용을 요구했는데 남성이 콘돔을 썼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한 경우도 성폭력일 수 있다.)

 

․ 넓은 의미에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범주가 존재한다. 예컨대 과거 이화여대 축제에 고려대 남학생들이 집단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되자 이화여대 학생들은 이를 남성에 의한 집단적인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당시 가해자들의 언행(“이대생은 우리 것”) 중에는 성폭력인 것이 있으나, 행위 전체를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제기된 남성성과 여성성 구도 위에서 남성 집단이 여성 집단의 공간과 행사를 침해한 것이라는 해석에 따른다면, 이를 젠더 관계에 바탕을 둔, 성폭력을 포함하고 있는 ‘성-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 등을 포함하며, 여러 가지 성적 구조와 배경에 기반을 두고 일어나는 폭력 전반을 가리킨다.

 

․ 성폭력은 드물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며, 충분히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가해자의 인성이나 의도와도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인간관계는 다양한 폭력의 가능성을 안고 이루어지며, 성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쉽게 성폭력이 일어난다. 우리는 단체 안에서 형법상 성폭력범죄나 강간 등에 비하면 훨씬 더 넓은 범주로 성폭력을 규정한다. 이는 성폭력이 범죄이든 아니든, 법적 문제를 떠나서 우리가 스스로 규율하고 고쳐나갈 사회적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해자 역시 성폭력 가해자라는 판단을 자신에 대한 심각한 인격적 비난이나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 역시 사건의 원인을 가해자의 인성만으로 돌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 피해자 중심주의

 

․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을 해석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특히 여성인 피해자의 관점과 경험을 중시할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남성중심적인 통념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으며, 사건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해석하는 데도 남성 또는 가해자의 관점이 많이 반영되어왔다. (예 : “여자가 모텔에 따라 들어갔으니까 성관계에 동의한 거 아냐?”, “어깨에 기댄 것 정도가 왜 성폭력이야?”)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성폭력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한 장치이다.

 

․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건 해석에 있어서 가해자의 의도보다는 피해자의 경험과 관점을 중심에 둔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우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의 언행을 막으며, 피해자의 피해 호소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려는 노력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피해자의 주관을 절대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주관 - 경험과 감정과 해석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주관에 객관적인 성폭력 개념을 적용시켜 봤을 때 그 사건을 성폭력이라고 할 만한지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설령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성차별이나 반인권적 행위일 수 있으므로,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충분한 이해와 논의가 필요하다.)

 

․ 피해자 중심주의는 종종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의 말만을 믿는다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 현실에서는 성폭력 사건에서 최대의 어려움은 사실관계의 확인일 때가 많아서 특히 더 논란이 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실관계의 확인을 하지 않거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관계 파악은 당사자나 목격자들의 진술이나 기타 증거들을 살펴서 판단한다. 애초에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피해자’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실관계 확인 과정에서 피해자가 부당하게 비난받거나 위축되지 않도록 유념하며, 또한 사실관계 확인 후에 그 사실의 맥락과 의미를 해석할 때 적용된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해석은 여성-피해자의 입장이 남성-가해자의 입장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 : 한 쪽에서는 애정의 표현인 것이 당한 입장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 사건 해석에 관한 ‘피해자 중심주의’ 외에도, 성폭력에 관련해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거나 조사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사건 해결에서 피해자의 치유에 초점을 맞추는 피해자를 중심에 둔 접근방법 등의 개념이 존재한다.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차별 구조가 개입되어 일어난 반인권적 행위 문제에서는 마찬가지로 피해자 중심주의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반 인권적 행위 내규 <◎ 적용과 범위> 중 4항 “반인권적 행위 중에서 성폭력과 같이 이 사회의 반인권적이고 지배적인 인식과 구조가 뿌리깊게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대해선, 피해자의 ‘주관적 피해 인식’에 기반한 사건 해결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를 따른다.”]

 

 

◎ 2차 가해/피해

 

․ 2차 피해는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모욕, 비난, 책임 전가, 괴롭힘이나 불이익, 신상정보 공개, 훼방 등을 당하여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를 주는 것을 2차 가해라고 부른다. 2차 가해는 피해자에 대한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 사건에 대한 해결을 방해하고 피해자 또는 잠재적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며, 사건을 호소하고 해결 절차를 밟는 것을 어렵게 한다.

 

․ 성폭력에서 2차 가해의 역사는 매우 뿌리 깊다. 특히 피해를 입은 여성이 먼저 유혹한 것 아니냐고 하거나, 여성이 유별나게 예민해서 호들갑이라고 하거나, 피해를 입은 여성을 더럽혀진 것처럼 비난하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 또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근거 없이 거짓말쟁이로 단정짓거나, 별다른 사실 근거 없이 가해자를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옹호하고 피해 호소를 무조건 불신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2차 가해로 본다. 그리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거나 축소시키려는 목적으로 해결 절차를 훼방놓는 것을 2차 가해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 2차 가해는 본 사건의 가해자에 의해 일어나기도 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자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제3자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 사실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확인하는 것이나, 성폭력 여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2차 가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띠고 관계없는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논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그 내용과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예 : 사실관계 조사에서 누락된 중요한 문제가 있고 조사가 불충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2차 가해가 아니겠지만, 썸 타는 사이에 기습키스를 한 것이 무슨 성폭력이냐 피해자가 유달리 예민한 것이라고 하면 상황에 따라선 2차 가해일 수 있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역시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피해자 책임론 등을 내포한 질문 또는 발언을 하여 2차 가해를 하지는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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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4. 7. 26. 18:10




3년 전에 1번을 쓰고 들어간 글을 겨우 3편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홀가분하다...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1 : 글쓰기의 일반적 기본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2 : 주장하는 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3>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 : 기획안, 회의록 등

 

  설명하는 글이라고 하면, 보통은 ‘설명문’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하다가 써야 하는 ‘설명하는 글’은 그런 산문 형태의 글은 아닐 때가 많다. 뭐, “○○라는 개념/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글을 쓸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에는 인터넷검색이나 자료 편집의 기술이 더 요구될 때도 많다. 여기에서는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로 ‘기획안’과 ‘회의록’을 설명하려고 한다. 기획안이나 회의록은 보통 우리가 ‘글쓰기’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글들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것들이 ‘글’이기는 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기획안과 회의록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글의 종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획안과 회의록은 둘 다 회의에 관련된 글이다. 기획안이 회의 등을 하기 전에 자료로서, 함께 보고 논의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회의록은 회의의 결과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글이다. 둘 다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는 글인 셈인데, 회의록이 실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와 결론 등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기획안은 우리 머릿속의 구상, 계획,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획안과 회의록 역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내용으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매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매체는 기획안이나 회의록이 이용되는 환경, 사용처라고 넓게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읽는 사람에게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인가? 쓰는 사람이 설명하고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이러한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라도 설명해보겠다.

 

 

① 기획안

 

기획안은 말 그대로, 일을 기획한 것을 정리한 문서이다. 기획의 대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대외활동, 워크샵이나 MT, 토론회, 캠페인… 몇 년 이상의 활동을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고 일회성 30분짜리 행사를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1박2일 놀러갈 때도 어디를 갈지, 몇 명이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는지, 뭘 하고 놀지 등의 계획을 짠다. 기획안이란 본질적으로 그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기획안을 어떤 경우에 쓰고 어디에 쓰이는지부터 생각해보자. 기획안은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활동, 할 활동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그 공유를 바탕으로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수정한 기획안에 따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른 단체 등에 기획안을 보냄으로써 활동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즉 기획안은 ① 논의를 위한 기초 자료 ② 활동할 때 지침 ③ 타 단체나 외부로의 전달 등의 용도로 쓰인다. 이런 용도들을 보면 기획안이 하나의 ‘설명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안의 구성에 정답은 없다. 어떤 활동이냐, 어떤 용도냐에 따라 어느 정도 수준의 세밀함이 요구되는지, 어떤 항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들을 제시하겠다.


기획안의 구성은, 일단은 육하원칙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물론 여기에서 ‘어떻게’나 ‘무엇을’ 안에 다종다양한 정보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획안의 항목들은 그 자체로 기획안의 개요가 될 것이다. [1.취지 2.장소 3.내용] 등…. 우선은 뭐, 기획안에는 당연히 활동의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이름은 기획안 제목에 들어가기도 하고, 중간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활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잘 짓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은, ‘왜’이다. 즉 이 활동을 제안하게 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이유 또는 배경. 활동의 취지라는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배경 설명을 우선 한 뒤에 활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와 ‘어디서’, 즉 시간과 장소가 있다. 이는 기획안에 상대적으로 짧게 들어갈 때가 많지만, 그런 주제에 많은 고려를 요구한다. ‘왜’가 우리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라면, 시간과 장소는 외부의 요건에 가장 많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부분에는 활동하는 기간을 포괄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일시를 다 넣는 경우도 있다. 장소 자체가 활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장소 후보는 몇 개의 안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집회신고라든지 대관신청이라든지 날씨라든지 상황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 활동을 기획하는 경우는 전체 기획안에서는 별도의 장소 서술을 하지 않거나, 포괄적으로 지역만을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과 ‘어떻게’는 활동의 내용과 방법을 뜻한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들어가게 된다. 행사라면 행사의 구체적인 진행 순서, 토론회라면 담을 주제와 내용 등이 들어가야 한다. 대규모의 기획안이라면 활동 방법에 대한 총론부터 각론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기획안은 실제 활동을 위한 제안이므로, 일의 진행순서나 일정표를 첨부하기도 한다. 예산이나 재정에 관한 항목도 들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항목들은 처음에는 가장 생략할 일이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디어 논의를 위한 초안 수준에서 구체적인 진행 순서나 내용이나 일의 진행순서 등을 담을 필요는 없다. 예산을 생략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조정해서 더 풍성하게 보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 처음 기획안을 만들어볼 때 너무 겁먹지는 말자. 외부로 보내는 기획안에서는 분량과 가독성, 보안을 위해 일부러 생략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누구’가 있다. 이는 물론 활동을 누가 하는지를 말하며, 기획안을 제안하고 논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사의 참가자가 누가 될 것인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를 적어줘야 할 때도 있다. 또한 다른 단체에 제안하는 경우, 어떤 단체들이 참여해서 어떤 역할들을 함께하길 기대하고 요청하는지 명확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아래는 토론회 기획안의 예시이다. 일의 진행 순서 등 좀 더 채워지면 좋을 것들이 눈에 띄는데, 동시에 그런 부분을 생략해서 어떤 내용의 행사를 하려는 것인지는 더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기획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세밀하게 하고 어떤 부분을 간략하게 할 것인지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그때그때 고려할 문제이다. 여러분이 이런 내용의 행사를 준비한다면 기획안을 어떻게 쓸지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학교 휴대전화 규제 문제 관련 청소년인권 토론회 기획안>

1. 행사명 청소년인권 토론회 <학교, 휴대폰금지압수 괜찮?>

 

2. 행사 취지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거나 압수하는 등의 일은 사실 몇 년 전부터 벌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2007년은 특별히 휴대폰 금지 및 압수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전지역 교장단은 <휴대전화 안 가져오기 운동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원 청명고등학교에 대해 휴대폰을 전면 금지하는 교칙 조항이나 휴대폰을 압수하는 등의 행위는 인권침해이니 시정하라는 권고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4월 14일에 열렸던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청소년인권 집회도 그 요구사항 중 하나로 “휴대폰 등 소지품 검사 압수 폐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겨레와 방송3사 등의 언론이 학교의 휴대폰 금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휴대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휴대폰 금지에 대한 논쟁지점의 설정과 내용 있는 토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각 단체들도 뚜렷하게 입장을 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휴대폰 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담론은, 오직 언론에 나온 단편적인 인터뷰와 인터넷 뉴스에 달린 별 내용 없는 덧글들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휴대폰 문제가 명백한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 휴대폰 문제에 대하여 교사단체, 학부모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의 입장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3. 행사 일시와 장소

2007년 6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 (변경될 수도)

??? (미지센터, 청소년문화의 집, 전교조 서울지부, 노동사목회관, 대학교 등 검토 중)

 

4. 토론회 패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인 (참교육실장이나 학생생활국장으로 요청)

참교육학부모회 1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인 (청소년)

인권단체나 사회단체 활동가 1인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에 요청)

 

5. 진행

◎ 사회자가 5분 정도 학교 휴대폰 문제에 관한 올해 상황을 정리하고 행사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 (5분)

◎ 청소년 -> 교사 -> 학부모 -> 인권사회단체 순으로 약 3분씩 자기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여 발제. (15분)

◎ 사회자가 발제 내용에 따라 쟁점을 하나나 둘 뽑아 패널들에게 질문을 하여 토론을 시작하고 각 패널들이 자유롭게 주고 받는 토론. 사회자는 논의를 벗어나거나 이야기가 계속 공전할 때만 개입. 시간이 다 되면 사회자가 짧게 정리. (1시간)

◎ 질의응답 및 플로어 참여 자유토론 (20분~30분)

 

6. 예산

장소대여료 (0원~10만원)

다과 및 음료수 (1만원)

각 패널 토론비 (3만원~6만원 문화상품권 등으로 지급)

약 5만원~17만원 예상됨.

 


기획안의 포인트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이다. 그런 점에서 기획안은 내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또 읽는 사람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많은 고려를 해야 하는 글쓰기이다. 내가 이 기획안을 회의 자리에서 받는다면, 이걸로 충분할까? 또 무엇이 궁금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쓴 기획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그 사람이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아이템이 된다. 그리고 기획안도 혼자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의견을 반영하여 함께 완성해간다고 생각하자. 처음 논의를 위한 기획안을 쓴다면, 아예 어떤 항목과 정보가 들어가면 좋을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람마다 궁금한 부분이나 판단에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는 제안을 받는 사람들에게 맞춤형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획안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더 독자에 맞춘 글쓰기가 가능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회의록

 

회의록이야말로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종류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회의에서 나온 발언, 회의의 내용, 결과를 기록한 것을 회의록이라고 한다. 그냥 “회의 기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회의록은 작성하여 이메일로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인터넷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며, 또는 다음 회의에서 자료로 첨부가 되기도 한다.


회의록은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회의란 우리가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공통의 의견을 만들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견과 결정을 제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기록을 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억력에만 의존을 해야 하고, 기억력이 나쁘거나 건망증이 있는 사람이 활동에 펑크를 내면서 각종 트러블이 발생하고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현실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해서 공유해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 회의록에 잘못 기록된 게 있으면 나중에는 그것이 다툼이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의록 작성을 맡는다면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회의록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속기형 회의록이고 다른 하나는 요점정리형 회의록이다. 속기형 회의록은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모두 기록하는 방식이다. 모든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말투를 바꾸거나 윤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건 주된 내용은 모두 담는 것이다. (법원이나 정부기관의 회의록이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곤 한다.) 조금 더 덜 힘들게 회의 중에 나온 반복된 발언이나 농담 등은 일부 생략하고 주된 논의의 내용만 따라가며 속기하듯이 작성하는 방법도 있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각 안건에서 굵직하게 논의된 내용과 결론만 적는 방식이다. 회의록을 쓰는 사람의 취사 선택과 편집 능력이 요구되는 방식이라 하겠다. 여기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안건의 내용과 결론만 적는 간단한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각 안건에 무엇이 쟁점이 되었고 이 쟁점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까지 설명하는 형태도 있다. 어떤 회의록이든 회의 시간과 장소, 참가자, 무슨 회의였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시작해보자.


속 기형 회의록을 쓰는 것은 보통 회의의 논의가 중요할 때이다. 논의의 흐름이나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토론의 맥락 등이 중요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면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또는 논의가 복잡해서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기 어렵고,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논의의 맥락과 결론을 이해시켜야 할 때도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논의를 정리해가며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정리할 목적으로 속기형 회의록을 선택하기도 한다. 구글드라이브 등 공동으로 회의록을 실시간 작성하는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그런 경향도 생겨났다. 속기형 회의록에서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기록 속도, 기억력 등이다. 아무리 속기형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속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취사선택하여 편집해가며 쓰는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논의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이 은근히 많이 요구된다.


요 점정리형 회의록은 단체 회의에서 쓰는 일반적인 회의록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글쓰기 능력이 필요한 회의록이기도 하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에 들어가야 할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② 안건에서 주되게 논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③ 결론은 무엇이었는지. 이 3가지만 잘 기록해도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다 쓴 셈이지만, 당연히 말만큼 쉽지는 않다. ②가 특히 어렵다. 무엇이 주되게 논의된 것이며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만만치 않은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 어렵다면 일단은 ③번, 결론만이라도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보자. 결론 부분에도 역시 육하원칙이 어느 정도 적용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기로 했는지. 물론 안건에 따라서는 누가라든지 어디서 등을 생략해도 좋은 안건들도 있다. 안건 논의가 끝난 후에 결론이 뭔지 한 번 문장의 형태로 정리를 해보자고 하는 것도 회의록을 쓸 때 정리를 수월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②의 내용을 판별하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예를 들어 회의 참가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을 벌인 쟁점 사항은 무엇이 쟁점이었으며 누구와 누구가 어떤 입장 차이로 논쟁을 벌였는지 기록하는 것이 좋다. 쟁점이 아니었어도 ‘우려사항’이라고 지적한 것이나 활동을 진행하면서 ‘염두에 둘 것’으로 언급한 것은 기록하는 것이 좋다. 결론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논거가 있다면 그것도 적자.


회 의록을 쓸 땐 매체는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 속기형으로 쓸지, 요점정리형으로 쓸지 정도만 고려하자. 헷갈릴 때는 이를 미리 함께 확인하고 회의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회의록에서 안건에 따라 어디에는 속기형을, 어디에는 요점정리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의록에서 ‘쓰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회의의 내용을 ‘내가’ 무엇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전달할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슨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정보인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록의 어려운 점이다. 최종적으로 회의록 작성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역시나 ‘읽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읽는 사람은 회이에 참석하지 않은 제3자이거나 미래의 회의 참석자들이다. 나중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회의록을 보게 될 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한두 달 뒤에 이 회의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무엇을 궁금해할까, 무슨 정보를 찾으려 할까 상상해가며 쓰는 것도 회의록을 내실 있게 만드는 요령이 될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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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4. 3. 28. 11:20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에 대해


: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진냥이 지적했던 것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도 '정치'와 '올바르다'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올바르다는 말은 윤리적인 말에 더 가깝다.


: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소위 PC한 언어라는 것이, 말을 바꾸는 것이 무슨 차별을 없애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정치적인 문제를 윤리적이고 단순한 문제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두 가지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우리의 일상과 상식 속에서 당연시하던 것들 안에도 편견과 이데올로기, 권력관계가 들어와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문제의식 환기이자 계기로서 이런 이야기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연이나 교육 등에서도 종종 예시를 들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이것이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소수자의 감정을 고려하게 한다는 것이다. '올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해서 이런 언어의 교정은 필요하다. 단적인 예로, "게이새끼"를 욕으로 쓰는 모임에 동성애자가 참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남자는 군대에 가야지" 같은 말이 통용되는 모임에 병역거부자가 참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PC에 대한 반발이랍시고 "병신"이란 말이 실제로 장애인들에게 불쾌하게 느껴지기 십상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 소수자 차별의 경우와 별도로 어떤 이데올로기(자본주의, 군사주의 등등)와 연관된 언어들도 PC의 문제에 포함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신중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이다. '효용', '유연화', '효율', '투쟁', '사각', '전술' 등의 말이 반드시 자본주의나 군사주의의 맥락으로만 배치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달까.


: 나는 병역거부를 전후해서 '전략' '전술'이란 표현이 지나치게 전쟁 냄새가 난다고 느끼고 그 뒤로는 이를 되도록 '계획', '방법' 같은 말로 바꾸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이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또한 그게 옳은지도 잘 모르겠고- 어쨌건 우리는 싸우고 있기는 하니까.


: '올바른' 말을 써야 한다는, 그래야 착하거나 훌륭한 사람이라는 강박관념은 벗어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 타자-소수자들이 공존하기 위해 바뀌어야 하는 것들은 많다. 나 또한 하나의 타자이고 소수자이기에 나는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린 'PC'의 역사에도 일부 감사를 표하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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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31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주 장하는 글은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이다.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주장을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글이라고 다 똑같을 리야 없다.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글, 개인적으로 쓰는 글, 언론에 발표하는 글, 토론회 때 쓰는 글 등등이 같을 수야 없다. 쉽게 말하면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밑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고 붙는 것과 “공현”이라고 붙는 것과, 한 10명 모인 토론회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과 수만명이 읽는 신문 지면에 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장하는 글의 종류를 대표적인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나는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성명과 논평이다. 성명과 논평은 단체 회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단체의 정해진 입장을 알리는 글이며, 동시에 언론 등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발표하는 글이다. 두 번째는 칼럼이나 언론기고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명의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발표하는 형태의 글이다. 가장 전형적인 논설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발제문이나 토론문이다. 발제문이나 토론문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는 칼럼과 비슷하지만 발표 방식이 언론에 직접 전문을 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성명이나 논평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주로 토론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자료집에 실린다.

이제부터 이러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이나 자잘한 방법 같은 걸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중 어떤 글이든 내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하자.



① 성명/논평


성명/논평에 관해서, 우선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그건 바로, 대체 성명과 논평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글이 성명이냐 논평이냐 하는 것을 구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의 성격을 비교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 설명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성명이 어떤 사안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고 외치는 거라면, 논평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분석하고 평하는 것이다. 성명은 요구 사항이 비교적 뚜렷하고 논평은 주장이나 입장은 드러나지만 요구 사항을 그렇게 뚜렷하게 적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성명은 상대적으로 길고 완결된 글이고, 논평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결하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성격과 색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며, 또한 보도자료 등에 첨부하여 주장을 표현하거나 행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밝힐 수 있는 글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직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우선 성명이나 논평으로 입장과 주장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대충 면피를 하곤 한다.(별로 좋은 관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명/논평은 ‘연명’(성명서 내용에 동의하고 거기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하는 단체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명을 받아서 발표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연명해서 성명/논평을 내는 것은 그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핵심 단체들을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열심히 성명 쓰고 제안하고 활동하는 건 1, 2개 단체인데, 언론에 “133개 시민사회단체들은…”이라고 나가면 그 1, 2개 단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해야 할지 역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명/논평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단체의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라서 어떤 내용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자. 성명/논평을 쓰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사안을 우리는 어떤 성격의 사안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기로 했는가? 어떤 정책에 대해서라면, 찬성인가, 반대인가, 부분적 찬성/반대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반드시 언급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얽힌 복잡한 사안일 경우 각각 비중은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 (심지어 문단의 개수나 분량까지도 생각해가며 써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장이 딱 찬성 반대로 나눠지지도 않고, 다양한 입장들이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의 입장과 주장을 표현 하나에서부터 분량까지 잘 컨트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교원평가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입장이 현재 안에 대한 찬/반인지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찬/반인지, 대안은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지, 전교조의 입장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현재 정세 돌아가는 걸로 볼 때 이런 말은 필요하긴 하지만 비중을 줄이는 게 좋겠다든지, 여하간 이런저런 골치 아프고 미묘한 조정이 필요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표현이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성명/논평의 틀을 지나치게 딱딱하게 정해놓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재미가 없고, 단체의 개성도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혀서 막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순서 정도는 소개하겠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 성명서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어떻다.” 거기에서 어떤 말을 사용해서 이 사건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규정하고 있는지를 읽는 이가 알게 하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대충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리드’(리드 : 신문의 뉴스 기사에서 본문의 앞에 그 요점을 추려서 쓴 짧은 문장.)를 떠올리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를 쓰게 된 배경, 즉 사건의 개요를 간추려서 넣어줘야 한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부분에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거나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한 정보는 안 쓰기도 하고, 짧은 논평 등에서는 간단한 한 문장 정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쓴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서 심층적인 분석을 써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은 교사가 사학재단에 의해 해임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는 학생인권과 진정한 교권이 상충되지 않으며, 억압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쓴다거나 뭐, 기타 등등…. 이 분석 속에도 물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단체의 주장과 입장이 반영될 것이다.

성명의 경우에는 마지막에 주장과 요구사항이 들어가곤 한다. 요구를 하는 대상이나 책임을 묻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면 좋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다면, 써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전체 요지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평의 경우에는 특별히 요구사항을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우려를 표한다.”, “다시 한 번 충고한다.”, “지적한다.” 같은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_-)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성명/논평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참신한 성명/논평을 만들 수 있다. 성명/논평은 논리적인 글이지만, 꼭 딱딱한 논리적 표현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비유나 패러디 등을 알맞게 활용하는 것은 성명/논평을 더 널리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말이나 다른 글 등의 형식을 차용하는 패러디는 성명/논평에 곧잘 사용되는 인기 있는 방법이다.


성 명/논평을 쓸 때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문체’ 문제이다. 하나의 글은 아무래도 한 명이 쓰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이 한 문단씩 써서 글을 조립한다면, 오 내용이 중언부언 겹치게 되고 글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성명/논평은 한 사람 개인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성명/논평을 쓸 때는 지나치게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성명/논평을 한 개인이 쓰고서 바로 발표하는 일은 별로 없다.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가며 고치는 작업도 여러 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한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때부터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명/논평이 어떻게 발표되고 읽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 역시 성명/논평을 어떻게 쓸지, 성명/논평의 분량을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명/논평이 발표되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3가지다. ▲ 언론에 배포해서 보도 ▲ 단체 홈페이지, 이메일 등을 통해 ▲ 직접 인쇄하고 배포.

마지막의 직접 인쇄, 배포하는 방식은 과거 외국에서는 많이 이용된 듯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배포용이라면 전단지 형태로 더 알아보기 쉽게 꾸며서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모임 안에서 나눠주거나 돌려 읽기 위해 성명을 인쇄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행사에서는 성명 자체를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기관에 성명/논평을 팩스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성명/논평은 그 분량이 2페이지(즉 양면 인쇄했을 때 1장 안에 들어가도록)를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길어도 3~4페이지 이내의 분량이어야 한다.

성명/논평이 언론에 발표될 때는 성명/논평의 전문이 실리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은 일부를 인용하여 실리곤 한다. 따라서 성명/논평을 쓸 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딱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 성명/논평의 핵심적인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강조해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선정적이거나 재치 있는 표현 등을 넣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입시가 사형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와 “입시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의 수가 적지 않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언론에 잘 보도되겠는가? (뻔한 소리지만, 사실과 다른 표현, 억지스러운 표현, 반감을 살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수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홈페이지나 이메일 등 웹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 있다. 웹의 유연한 특성상 이 방식의 경우에는 별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지는 않다. 여기저기 퍼나르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바꿈을 자주 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충분히 띄우거나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 혹은 웹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련된 링크를 함께 삽입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성명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이 땅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는 오래전부터 무시당해 왔다. 특히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들은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치사찬란한 태클을 걸고있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에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짜증의 마음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잠 시 과거를 상기하자면, 2003년에도, 2005년에도 청소년들의 집회에 대해 정부는 까칠하게 반응했었다. 법을 개정해서 ‘미성년자’를 집회에 동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교사들과 장학사들을 동원해서 청소년들의 내신등급제 반대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참가를 봉쇄하려고 했었다.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집회 뒤에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2008 년, 올해에도 발전은커녕 퇴보한 뻘짓들만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점점 커지자, 교육부와 교육청은 또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집회 참가를 막도록 하는 지침을 학교로 내려 보내고 있다. 교사들을 동원해서 집회장 주변에 배치하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돌려보내는 괴악한 짓도 여전하다. 몇몇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놓고 “연필 대신 촛불”을 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이 몇 마디 하니까 10대 팬들이 무작정 따라 나왔다, 아직 미성숙하고 충동적이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에 속은 거다, 등등 헛소리를 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놀이문화가 없어서 청소년들이 놀러 나오는 거라는 이상한 분석을 내놓으며 청소년들을 어떻게든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고 있다.

올 해에는 경찰과 검찰까지 가세해서, 5월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를 얼토당토않게도 “업무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수사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인권의식 미성숙한 검찰총장부터 인권교육을 시켜야 한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경찰이 문자메시지를 추적해서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만나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교장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짓이며, 이미 인터넷에서는 ‘미성년자가 촛불집회 참가하면 사법처리 된다.’라는 식의 사실과는 다른 공포 조성 유언비어가 떠도는 판인데, 이에 대해 경찰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도 대체 경찰이나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가?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는 교육청 같은 애들을 막는 것 아닌가 싶고, 만일 정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교육부, 교육청, 학교는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여러분에게는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고 거기에 참여할 권리,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류의 캠페인이라도 전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들이 정말 민주 정부이고 인권 경찰이라면 해야 할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저 안타까운 정부기관들은,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건지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또 한 아수나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들이 비단 정부나 경찰, 일부 언론들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 청소년들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철없는’ ‘충동적인’ ‘미성숙한’ ‘미래로 유보된’ 존재로 보는 인식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할 청소년들조차 거리로 내모는 정부”라는 표현 속에도, “철없고 순진한 아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주장에서도, “어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못해서 어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미래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여는 주최측의 “미성년자들은 부모동의서가 없으면 연행당할 수도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 청소년들은 자진 귀가 조치시킵니다.”라는 안내 문구에서도,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도 가입한 아동권리협약 등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의견반영권 등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을 비청소년들과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왔다. 비단 정부나 언론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과 때로는 몇몇 ‘청소년들’ 또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행동 자체에 반대하진 않더라도 그 행동의 의미를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이고 시혜대상인 것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청소년들은 누가 내몰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학업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냥 철없고 순진하지도 않고, 부모동의서가 없다고 연행당한다거나, 밤 10시 이후에 집회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도 없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는 운동의 주체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사회를 ‘물려받는’ 그런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이며,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학교자율화 조치 등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와 언론들, 그리고 행사 주최측과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언론 등은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고 깎아내리는 모든 조치와 발언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1.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행동 등에 개입하고 있는 주최 측과 참가자들은 청소년들을 보호주의적, 시혜적, 차별적 태도로 대우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우하라.

청 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다른 항의/불복종 활동,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응팀 구성, 청소년들이 평등한 주체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과 발언 등을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함께 적극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08년 5월 8일


이 성명은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발표한 성명 중에서도 '그나마' 널리 알려지고 웹에서 ‘펌질’이 된 성명들 중 하나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이라는 시의적 상황 때문에 여러 촛불모임, 게시판, 아고라 등에 ‘펌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이 성명 자체로도 촛불 정국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과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는 좋은 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며 평가해보자.



② 칼럼 등 언론기고문


칼 럼 등 언론기고문은 글 전문을 언론을 통해 대중에 공개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잘 써야만 하는, 부담 백배의 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소재가 별로 주목 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언론에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의 문체와 발상, 그리고 단체의 주장 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언론기고문이 언론에 실릴 경우에는 그만큼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주장을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잘 써야 하고 쓰기 어렵지만 잘 써서 잘 발표할 경우에는 효과가 큰 글”이라는 것이다. 뭐, 언론기고문을 써서 숱하게 언론에 실려도 완전 무반응인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언론기고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한층 더 꼼꼼하게 주제와 개요를 검토하고 준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언론기고문은 다른 그 어떤 글보다도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독자가 가장 많고 독자층이 가장 폭 넓은 글이기 때문이다.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라. 웬만큼 많이 공론화가 되어서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 이상은 사안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지 말고, 간단한 설명이라도 넣는 게 좋다.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해야 할 때라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일반인’이 아니라 기고하는 언론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독자와 「경향신문」 독자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조선일보」에서 여러분의 글을 실어줄 일도 별로 없겠지만…) 뭐, 「레디앙」처럼 활동가들 좌파들만 주로 읽는 좌파 오타쿠스러운 언론이나 「교육희망」, 「우리교육」처럼 교사들이 주로 읽는 언론의 경우에는 좀 더 독자층을 좁게 상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언론기고문에서는 매체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분량과 문체이다. 보통 일간지 등 지면에 글이 실리는 언론에서는 원고지 10매 이내(A4로는 1장 이내)로 글을 써야만 한다. 종이 지면이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체 역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실리는 글에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를 요구하는 것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신문지면의 한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간지나 월간지 등 잡지 형태의 매체의 경우,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종이 지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간지보다는 제약이 적다. 일간지처럼 한 면 안에 글 여러 개를 배치해넣는 방식이 아니라 책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월간지 등에서는 일간지보다 더 심층적이고 자세한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소한 원고지 20~30매 이상의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간행물이 나오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긴 원고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월간지가 원고지 20~30매 이상을 요구한다면 계간지는 원고지 40~50매 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반면, 인터넷 언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량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인터넷 지면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지만 않다면 글의 분량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A4로 2장 분량이든 4장 분량이든, 그 인터넷 언론의 서버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인터넷 언론에서는 문체에 대해서도 다소 관용적인 편이다.

마지막으로, 언론기고문은 글이 언론에 실리고 배포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글이 간행물이 언제 나오고 배포되는지 이것저것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아예 글 중에서 글을 쓰는 시점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시점에 맞춰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밖에 언론기고문을 쓰는 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론기고문은 특별히 표준화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뭐 그냥 일반적인 논설문 식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거나, 두괄식 등 여러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칼럼 등 언론기고문은, 여러 가지 형식이 가능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모양새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능성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언론기고문은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개인의 문체와 사상이 잘 드러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언론기고문은 보통 개인의 이름을 달고 발표하더라도 "(단체 이름) (직함)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를 단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므로, 단체의 입장과 개개인의 개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쓰는 것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체에서 사업의 일부로 회의를 거쳐서 기획적으로 기고하는 언론기고문의 경우에는 단체의 공식 입장 역시 녹아들어가도록 써야 한다.



③ 발제문, 토론문


발제문과 토론문은 토론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내용과 요지를 정리해서 쓰는 글이다. 이 역시 통상의 주장하는 글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성명서나 칼럼에 비해서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형식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줄글로 써도 되고, 짤막짤막하게 "~임." "~라고 생각함." 같은 문장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토론문을 만들어도 된다. 경우에 따라선 자료들과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해석만 잔뜩 제시한 발제문도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그 안에서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면 훌륭한 발제문 및 토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원래의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정리해두고 넘어가자. 발제문은 토론을 시작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해 정리하고 토론할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토론문은 그 발제문에서 제시한 자료와 토론 거리 등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즉 발제문은 단순히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토론에 필요한 자료, 방향, 내용을 제시하는 글이며, 토론문은 이 발제문을 보고 쓰는 글이다. 상대적으로 발제문이 길이가 더 길고 토론문이 길이가 더 짧을 때가 많다.

발제문을 쓸 때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발제문에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발제문은 단순히 주제를 설명하기만 하는 글도 아니고, 특정한 입장과 주장이 없이는 좋은 발제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문은 어디까지나 토론의 시작을 여는 글이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겠는가.

토론회는 대개는 발제자 1~2인이 발제를 하고 토론자들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 토론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발제자가 발제를 한 뒤에 바로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제자가 1~2인일 때야 뭐 어려울 것 없겠으나,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발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발제자들은 어떤 성격의 발제자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교수 등 학계 사람, 정부 관계자, 활동가는 각각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발제를 할 것이다. 또는 한 사안을 놓고도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발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서 토론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 맡는 발제문을 쓰면 된다. 토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제와 토론을 할 때 한 가지 팁을 전하자면, 절대로 토론회를 할 때 발제문이나 토론문을 줄줄 읽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이고 토론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안다.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점자책이든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이든 통역이든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여하튼 토론회에서 자기 발제문과 토론문을 줄줄 읽는 것은 토론회를 매우 지루하게, 여러분의 발제/토론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때는 자기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압축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상 깊은 일화나 예시를 들면 아주 좋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일부러 발제문 및 토론문에는 쓰지 않고 토론회 현장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하나 정도 준비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을 그대로 읽지 말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발제 및 토론을 발표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짧으면 5분 정도 주어진다. 20분이라고 해도 A4 용지로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분량이고, 5분이라면 A4 용지로 한 페이지 얘기하면 끝난다. 그러므로 글을 그대로 읽지 말고, 발표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팁. 발제자와 토론자를 3, 4명 이상 요구하는 '그런 류의' 토론회들은 미리 준비된 발표자들의 발제 및 토론만 1시간씩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계획을 짤 때 시간을 40분 정도에 맞추더라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넘겨 발표하기 때문에 1시간을 넘는 게 다반사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오는 청중들은 대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따분해하고 집중력을 잃고 있기 십상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위트 있고 재미있게 쓰고 발표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보자. 아 물론 아주 엄숙한 학자들이 모인 학계 발표회 같은 데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뭐든지 독자들과 청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발제문과 토론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과 토론문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자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토론회를 할 때는 단지 토론회를 여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그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보도하도록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명 및 논평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기자들이 뽑아서 쓸 만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문구가 부각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은 발표를 할 때도 강조하도록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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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이런 상상을 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성명서’라는 걸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근데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단체의 입장은 회의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에 뭐라고 쓸지는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러이런 걸 철폐하라고 하면 되는구나. 대안으로 이런 걸 요구하자고 했지.” 그런데 결론을 먼저 써놓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아 우리 단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몇 줄 쓰면 되지 대체 뭘 쓰란 거야?!” 막막한 마음에 회의록을 보자 “~~이런 부분을 짚어야 할 듯.” “A가 B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해.” 뭔 놈의 회의록에 요구사항들만 많다. 짚긴 뭘 어떻게 짚으란 거야? ㅅㅂ!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글은 운동에서 많이 쓰게 되는 몇 가지 유형의 글들에 있어서, 시대의 명문장가 타이틀을 딸 정도로 잘 쓰게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럭저럭 욕 안 먹을 정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운동을 위한 실용적인 글들도 글은 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모든 글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제1편은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에 대해 알아보자.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아와 개성의 표현이라거나 우주의 영감을 수신하여 원고지에 글자를 심는 일이라거나…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심플하고 평범하게 말하면 그건 문자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심플한 정의에서부터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3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사람 ② 글을 읽는 사람 ③ 매체. 운동을 하면서 쓰는 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이 3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에 여러분은 “글 쓰는 사람은 나잖아. 바로 여기 있는데 뭘 더 생각해?”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글을 쓰는 여러분 자신을 잘 모른다. 실제로 글을 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대체 뭘 쓰려고 한 거지?”라는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가 이 글로 대체 뭘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를 확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헷갈려 하며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경험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주제이다. 주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략 1~2문장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한 글 안에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제는 복합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아래의 짧은 글만 보아도 글 안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체벌금지 해야 한다」
/ C모님 / 체벌금지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최종안

요 즘 들어 체벌금지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육감이 새로 뽑힌 탓인지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는 이미 체벌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경우도 교사들의 체벌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중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그걸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겠나.
체 벌은 폭력이다. 내 주위 어른들이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것들을 생생하게 재현까지 하면서 말하는걸 보면 그런 폭력의 경험이 기억에 오래남긴 남나보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오장풍’ 사건을 두고 “아직도 저런 체벌이 있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런 폭력들이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말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어느 몇 명의 교사들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은 때릴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에서부터 비롯된 문제다. 오장풍처럼 손으로 학생들을 퍽퍽 날려보내지 않더라도, 단 한 대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있다.
교 육감들이 체벌금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회에서 학교의 체벌만을 문제 삼고 있는 요즈음에도, 가정에서의 체벌은 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꼭 없어져야하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나쁘다는 논리가 가정에 체벌만 비켜갈 순 없다.
공 익광고에서는 가정이 우리의 안식처인 양 이야기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교보다 더 무서운 곳일 수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폭력을 몸으로 깨닫고, 학교에서 맞고 오면 가정에서도 또 맞고, 교사에게 맞고 오면 잘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체벌을 부추기는 것도 가정이다. 학교나 가정이나 체벌이 있는 이상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학습시키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동학대 수준까지 가야 폭력으로 인정할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체벌을 ‘사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특히 가정에서의 체벌은 학교의 체벌보다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이 더 심각하다.
학 교에서의 체벌금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정에서의 체벌금지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가정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청소년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체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일단 사건 하나 터졌으니 막고 보자는 식으로는 정말 청소년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 글에서 주제가 뭔지, 전하고 싶은 부수적인 메시지들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연습문제다. 킁. 어쨌건 주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라는 건, 결국에 이 글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개요’를 짜라는 것이다. 개요는 쉽게 말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써내겠다는 계획표 같은 것이다.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듯이 “서론 - 본론1 - 본론2 - 결론” 이런 식으로 개요를 짤 필요는 없다. 그런 개요는 논설문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가끔 그런 형식을 벗어난 논설문도 있고, 논설문 외의 글들도 그런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결론 내용이 제일 앞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런 방식의 개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쓰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서로 해서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대략적인 계획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에 숙련되면 그런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 미숙할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메모해두는 게 좋다. 개요를 짜지 않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다보면 “어라 내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더라?” 하며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개요가 있다면 그럴 때 개요를 확인해보면 되지만 개요가 없다면 혼란스러운 글이 되고 만다. 물론 글을 쓰던 중에 삘 받아서 짜뒀던 개요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다. 개요는 자기가 이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을 가진 채 써가다가 계획을 수정하는 것과, 애초에 계획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② 글을 읽는 사람
  불행한 이야기이지만, 미숙한 글쓴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하얀 모니터 화면과 깜빡거리는 커서 혹은 하얀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벅찬데 그 너머에 눈에 안 보이는 독자들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궁극적으로는 “이 글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독자의 존재를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글쓰기의 일반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독자를 생각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매우 위대한 예술가이며 작가여서 예술적이며 상식 파괴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다. 이상처럼 “13인의MB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써도 된다. (그게 인정받거나 팔릴지는 별개로) 하지만 일단 우리는 실용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용 글쓰기에서 이상의 시처럼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용 글쓰기의 경우에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망한다.
  그럼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예상독자/가능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 독자들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나? ▲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등등.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벗어나 벅차게 사랑할련다.」
/ R모님 / 학생 연애 탄압 관련 언론 기고문 초안

나는 동성애자다. 동성애자지만, 뭐 다를 거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뭐, 그냥 청소년집단을 걸고 넘어진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드 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경수-태섭 커플을 보고 부러워서 흑흑 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불편하신 분이 있었나보다. 뭐 영화 ‘친구사이?’의 마지막 키스신에서 한 외국인이 ‘하나님의 보편적 세상시청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계신데 안 두렵냐’라는 말이었지만, 뭐 나한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했었는데 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봤는데 세상에 가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이 대책없는 구호를 보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학교는 청소년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조차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무성적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알면 써서 내게 하라는 이반검열이 그렇고, ‘불건전한 이성교제’ 처벌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억압과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이 어우러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린다.
수많은 학교의 징계규정에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징계하는 규정이 있다.
불 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그 두 어절 뭣도 아닌 단어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이성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거지.), 나의 사랑조차 부정당하고, 나 자신조차 부정당한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난 게이니까 그래, 학교에서 애인 만들어서 뽀뽀하고 키스해도 상관없는 거지?)
이제 좀 집어치우자 그 단어. 그 이성애중심주의적이고, 연애탄압적이고, 순결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그 단어.
이제는 좀 게이여도, 좀 문란해도 봐줘라.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진다.
걱정하지마라, 아 걱정된다면 콘돔사용법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해라. 음순 음경 운운하는 그 따위 성교육이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을 부르는거니까.
이제 좀 다시 보길 바란다. 100일, 500일, 1000일되서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연애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게 뭐하는 짓인가.
이제 내가 연애를 해도, 그게 설상 남자여도 걔랑 성관계를 가져도 상관없는 ‘미성숙한 이성교제’라는 단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 커플들과 게이, 레즈비언 커플도


  이 글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을 쓰게 된 배경이나 여러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던져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중 다수가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한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없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거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독자들도 설득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휘나 정보를 섞어가며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경우는 비교적 그 잘못이 명백한 편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두발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주로 읽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정부 관계자가 읽을 글, 어른들이 읽을 글은 서로 다른 어조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로 읽게 될 매체에 “두발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라는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학부모들이 두발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라고 쓰는 게 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단체 내부 사람들끼리 읽을 기획서나 제안서를 쓸 때와, 외부의 사람들이 읽을 기획서나 사업 설명을 쓸 때는 다르게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일부러 불친절하고 막 나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글들은 독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글은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매체
  매체는 쉽게 말해 글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발표되고 전달되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으로 매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량이다. 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혹은 요구되는 글의 분량은 얼마인가? 분량은 글의 주제와 메시지, 전개 방식 등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그밖에도 이 글이 인터넷 언론에 실리는 글인지, 신문지면에 실리는 글인지, 책에 들어가는 글인지, 토론회 자료집에 실리는 글인지, 말로 옮겨야 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인지, 이메일로 보내는 글인지, 첨부할 사진은 칼라인지 흑백인지 등등 여러 가지 매체의 형식들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매체를 고려하는 글쓰기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해 신문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은 “최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의 도입부를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몇년 몇십년 동안 간행되고 팔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책에 실릴 글에 그런 표현이나 도입부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분량과 발표형식, 전달시기 등이 매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다. 이런 여러 매체를 고려한 글쓰기는 구체적으로는 기고문(칼럼 등), 성명서, 토론회 발제문/토론문 등등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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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3. 12:05

- 분리주의 이야기에 대한 부연.

-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연대를 '개념'에 근거해서 생각한다. '단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인권운동"이라거나 "진보"라는 등. 즉 같은 기표를 사용하는 사람들, 또는 같은 역사와 배경을 공유하는 말들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동질감.

- 그러나 개념에 근거한 연대는 취약하고 쉽게 무너진다. 개념은 맥락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 이걸 극복하기 위해 '논리'를 동원한다. "자본주의에 맞서는..." 등등. 이 논리가 어떤 점에서 비논리적인지 혹은 어떤 난점을 안고 있는지 과거에 충분히 살펴보았다. 이는 '관념론'이거나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하더라도 그래서 실천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분리주의 메모는 '개념'과 '논리'에 근거하여 연대를 정당화하는 것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 '개념'과 '논리'가 아니라 무엇으로 연대를 정당화할 것인가?
하나는 아예 그것 방법, 전략의 문제로 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사람의 문제로 보자는 것이었다.

(애초에 연대가 왜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건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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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돌

    연대라는 말이 너무 큰 범위를 눙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음... 분리주의 메모들이 답을 주는 메모들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많은 질문들을 하게 하는?) 머리 아파오게 하는군요 하지만 좋아요 (응?)

    2011.09.05 22:32 [ ADDR : EDIT/ DEL : REPLY ]
    • 음? 제가 눙친다구용? ㅎㅎ

      2011.08.26 16:47 신고 [ ADDR : EDIT/ DEL ]
    • 곰돌

      아뇨 공현님의 글을 보고나서 '연대'와 '협력'이라는 단어가 되게 넓은 범주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느꼈어요

      2011.08.30 12:49 [ ADDR : EDIT/ DEL ]

딱딱한꿈2011. 6. 25. 17:56
실무주의 명사

발음〔---의/---이〕



[명사] 실무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경향이나 태도. ≒사무주의.



Q. 실무주의자. 일상에서는 잘 안 쓰이는 말 같은데 굳이 이 말을 들고 나온 이유는?

A. 실제로 그렇게 불리기도 하고, 대충 그게 나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Q. 실무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드는지?

A. 글쎄, 다소 야유가 섞인 호칭이긴 하지만... 그럼 실무 아니면 뭐가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Q. 그런데 그럼 다른 같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실무주의자가 아니란 말인가?

A. 음... 실무주의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사전적인 정의 말고, 나에게 적용되는 맥락 속에서의 정의 말이다.
그 건 결국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 가장 의미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한,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을 희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 운동을 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Q.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뭐든지 필요하면 한단 말인가?

A. 실무주의자 일반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좀 다르다. 말하자면,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 "하기 싫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상당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기 싫은 것"과는 다르다. 가능하면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적게 하는 것이 하나의 대원칙일지도 모르겠다.


Q.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A. 글쎄... 회의의 예를 들면, 쓸데없는 논쟁을 최소화시키고 회의를 진전시키는 게 실무주의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목표다. 반면 자신의 옳음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관철시키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물 론 실무주의자에게도 자기 주장이 최대한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어차피 나 혼자서 뭘 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단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슨 일을 하는 데 내 입장만을 관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나 활동을 더 실무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해서 해내려고 하는 게 실무주의자의 자세다.
실무주의자가 자기 원칙을 고집하고 회의를 마비시킨다면, 그건 논의를 마비시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계속 자신의 논의 틀을 고집할 때 뿐일 것이다.
실무주의자는, 자신의 욕망과 목적, 그리고 그 욕망들을 둘러싼 상황들을 놓고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한다.


Q.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막막할 때, 혹은 서로 다른 틀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다보니 진전이 없을 때는 좀 더 실무적인 태도를 취해줬으면 한다.
결국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 이 두 가지가 모든 질문의 핵심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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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ㅅ날에 네이버블로그에 올렸던 건데.

    2011.06.25 17:5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저는 전체온라인회의를 할때 실무주의자가 되곤하죠(먼산)

    2011.06.26 00:56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1. 3. 31. 11:07

분리주의 메모 1  http://gonghyun.tistory.com/244
분리주의 메모 2  http://gonghyun.tistory.com/297



* 반자본주의 연대론?

서로 다른 조건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르게 전개되는 운동-정치들은 왜 '연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단순히 수단적 협력 이상의 무언가로) 연대를 강조해온 사람들 중 일부 그룹은 결국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해왔던 셈이다.
"서로 다른 운동이지만 각각의 (진보) 운동들은 모두 자본주의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철폐나 근본적 개혁 없이는 각각의 운동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운동들은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 반자본주의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자본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가진) 운동들은 연대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가'에 대한 답 또한 가지고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형태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논리구조는 그대로 둔 채 '인권'이나 '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논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내가 분리주의 메모1, 2에서 비판한 것은, 애매하거나 인상적인 수준의 비판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는 사실은 단일한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총체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운동들은 사실은 단일한 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2) 만일 운동들이 모두 자본주의에 문제제기하고 맞서는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굳이 연대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반자본주의 운동들'은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로 모두 자본주의로 연관되어 있다면, 중고생들의 두발자유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 혁명에는 도움이 되겠지.
 3)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 힘을 합친다는 것만으로는 그래서 어떤 정치,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해주지 않는다. (불충분하다.) 또한 그런 식의 연대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차이를 사장시킨다. (혹은 내부의 차이 자체를 적으로 삼는다.)
 4) 그것이 좀 더 효율적인 투쟁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수단적인 협력 정도로 충분하다. 연대와 협력을 혼용해서 쓰면 뉘앙스로 인한 착각이 일어난다. 수단적인 협력으로 명확히 하자.



* 물구나무 선 독단

사실 나는 '자본주의 철폐'라는 목적을 위해서 연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물구나무 선 논리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에 대한 관념과 이론으로 현실에서의 실천과 운동을 디자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목표나 목적으로부터 현재의 구체적 실천 계획을 역으로 도출하는 것은 목표나 목적이 시공간적으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때나 온당한 일이다. 즉 목표 역시 경험적 현실의 차원에 있을 때, 그 목표로부터 현실의 실천 계획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철폐할 혁명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을 목적으로 삼아서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을 역으로 그려나간다? 물론 그 관념을 공유하는 열성적인 활동가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조건에 놓여 있는 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할 법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비유하자면, 배가 고파서 당장 밥을 먹기 위해 장을 보고 밥을 하는 등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최고의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막연한 목적을 가지고 지금 어떤 재료를 사야 하고 어떤 조리를 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막연한 목적에 대해서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 요리를 배우고 연구해서 그런 요리를 실현시키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스스로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세계요리체험여행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인터넷이나 신문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걸 단지 하나의 꿈으로만 간직하고 구체적 노력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목표'와 '지향'

나는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이 비현실적이라거나 그러한 목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철폐나 혁명을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거기에 이르는 경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자본주의 철폐는 '목표'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향'이나 '가치'의 범주에 두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대략적인 방향성을 규정해줄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실천까지 규정해줄 수는 없다. 지향과 목표를 혼동하면, 막연한 가치를 위해 구체적 실천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비약과 독단이 일어나곤 한다. 막연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 연대를 주장한다면 그 실천 역시 그런 차원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진보, 좌파 등을 규범적으로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어떤 연대를 요구한다는 것은, '규범' 즉 일정한 실천과 행동양식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같은 인권?

이런 문제는 '반자본주의'뿐 아니라 '인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약간 다르지만)
"노동자의 인권이나 청소년의 인권이나 같은 인권이므로 연대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같은 인권'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어째서 그게 '같은' 인권인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다른 성격의 다른 양태의 권리와 욕망인데. 인권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거쳐서 현실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끌어내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 논리적 간극 - 역 미끄러운 내리막길 논증

예컨대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라거나 지금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이라고 이야기하며 연대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드는 근거는 결국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철폐에 대한 논리이다.(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고는 동성애자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거나)
그런데 쌍용자동차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결국 동성애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경험적으로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철폐라는 가정에서부터 논증된 것은 결국 자본주의가 철폐되기 전의 상황, 더군다나 자본주의 철폐가 꽤나 멀게만 보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반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구호로부터 이를 끌어내는 것은 일종의 왜곡된 관념론으로 보인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 철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이상, "쌍용자동차 투쟁은 동성애자 해방에 필수적이다."라는 묘한 명제는 현실의 삶에서 경험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거짓이다. 아니, 적어도 참인지 거짓인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역(逆) 미끄러운 내리막길 논증이다.

(그리고 사실 쌍용자동차 투쟁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고리라거나 하는 판단은 도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내리는 것인가? 그에 대해서 차별금지법이나 일제고사 투쟁이 더 중요한 고리라고 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다의성과 맞닥뜨리지는 않는가? 애초에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진보', '좌파'라는 범주를 '규범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안에서의 위계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규범적인 규정은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합시키려고-동일화하려고 하는 담론을 필요로 하고,(그게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권이든 뭐든) 그 담론의 핵심 개념이나 논의는 특정한 해석-실천-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해석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간혹 나는 마르크스에게 이 말을 이렇게 돌려주고 싶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을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닌 실천이라면, 어떤 운동이 왜 반자본주의적인지 혹은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무엇에/무엇과 연대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게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지금 자본주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이나 가장 약한 고리가 뭔지 해석하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 연대의 불가능성 : 운동의 분리성

연대라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연대를 '서로 다른 운동/정치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사실 근본적인 난점을 전제하고 있다.
A라는 운동과 B라는 운동이 전혀 다른 운동이라면 두 운동은 만날 수 없다.
A라는 운동과 B라는 운동이 만약 운동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고 그 영역에서 만난다면, 그 두 운동은 그 영역에서는 사실 서로 다른 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만남'이라기보다는 운동의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어떤 복수의 운동/정치들을 '서로 다르다'라고 규정한 순간, 운동/정치는 만날 수 없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나 관념적으로는.

연대 활동은 많은 경우에 각 운동/정치의 개성을 죽인다. 예컨대, 어떤 집회나 활동에 연대해서 참여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활동을 하는 사람', '~ 이념을 가진 사람', '~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참여하지 않는다. 그저 집회에 참여한 사람 몇 명, 을 셀 때 집계될 뿐이다. '~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히 한 명의 '시민' 내지는 '인민'으로서 '연대 참여'할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연대 활동'을 과연 운동과 운동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다. ~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한 채로 어떤 운동에 연대한다면 (예를 들어 청소년운동이 차별금지법 운동에 함께 한다면) 그것은 다른 운동과의 만남이라기보다는 그저 ~운동의 일부 영역이 다른 운동과 겹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채로 연대한다면, 그것을 과연 '~운동의 연대'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지지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경험적, 실천적으로 볼 때 그런 게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 같지가 않다. 언론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교사 집회에 교사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장애인 집회에 비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 많이 신경 쓰지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처럼 전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분석과 논의의 대상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런 것들이 얘기거리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 사람

그럼 서로 다른 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일반적으로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여하간 만나고 있고, 또 만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결국 그 답은 개념적인 운동/정치의 외부에 있다. 그것은 운동과 정치가 텍스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외부의 실천으로 ― 인간의 실천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운동은 이념이나 개념, 또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사람들에 그 기반을 두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항상 이념적으로나 정체성적으로나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구성된 존재이다. 운동/정치는 오직 그 사람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이지만, 동시에 20대 대학생이며,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고 인권사상이나 매커니즘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나를 통해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에 대해, 여성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하고 다른 여러 인권운동들과 만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운동을 하는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인 동시에 성소수자이며 동시에 어느 지역의 주민이고 빈민일 수 있으며,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어떤 단체나 사람이 어떤 다른 종류의 활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그 단체/사람에게 왜 이것이 반자본주의 전체 운동에서 중요한지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인가 아니면 여러 과정을 통해 활동에 실제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운동의 내용과 감성에 익숙해지게 되고 친분이 생김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인가?


* 개념과 이론 외부 - 정당화의 불필요

결국 답이 '사람'이라는 식의 이런 이야기는 뻔한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이 주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이는 결국 우리가 운동과 운동 사이의 연대에 관해 "과연 굳이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한지" 되묻는다.
운동과 정치는, 우리가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정의하고 있는 이상 독자적이고 고립적이다. 그것은 심지어 연대를 강조한다고 하는 단체/운동에 있어서도 그렇다. (여기서 고립적이라는 말은 '타자'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서로 다른 운동/정치 사이의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연대는, 개념과 이론 외부의 구체적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라거나 "자본주의적 구조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라는 일반화된 명제는 여기에서 부정된다.

모든 정치와 운동은 분리되어 있다. 바디우의 말마따나 본질적으로 먼저 존재하는 것, 주어진 것은 차이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운동/정치는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여러 운동/정치와 운동/정치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재하고-경험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에 의해"


* 문제설정 전환

연대를 이러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게(끌어올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것에 연대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논의를 어떤 단체 안에서 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가 제일 처음 할 일은 협력과 연대를 구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연대요청'이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오는 것들은 '협력요청'일 경우가 많다.
협력에 관해 논의할 때는 여기에 협력하는 게 우리의 운동/정치에 어떤 의미(이익)를 가지는 일인지, 필요하고 가능한 일인지, 우리 운동/정치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을 힘을 합칠 수 있는지 검토하고 논의하면 된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으로 연대하느냐 연대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만약 있다면, 그럴 때 그 이야기는 그 연대가 이론적으로 정당하냐 혹은 반자본주의적이냐 하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동은 다른 그 운동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운동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등에 관한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끝

분리주의 메모를 여기에서 마친다.
이상, 이 글은 연대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나 특정한 이론 ― 태도들을 비판하고, 연대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히 한 후, 협력과 연대를 구분하며 연대에 덧씌워진 뉘앙스를 해체하고, 서로 다른 운동과 정치는 서로 다르게 운동한다는 논지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산만한 메모였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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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요즘 글쓰는 부분과 비슷한 생각이 교차하는 지점이 있네요. 그런데 같지는 않지만요. 저는 "연대는 명예를 공유하는 일"이란 주제로 쓰고있어요. 그 명예를 주고 받는 문제에서 "소수자이기 때문에, 자기도 약자면서.."라는 식으로 불편한 한집살이를 하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나 뭐 그런거죠. 그렇게 불편하게 할말도 못하면서 뭉쳐있어봤자 결국 따로 놀 수밖에 없거든요. 자유주의에 마음가는게 이런 마찰이나 이를테면 순리를 생략하는 편리성에 마음이 뺏겼는데 자유주의 마져도 한계가 있어서요. 배우고 가네요 ㅎ잘 읽었어요

    2011.03.31 13:2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연대가 명예를 공유하는 거라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네요 ㅎㅎ; 색다른 해석입니다. 실제 '연대'라는 걸 하면서 주고받게 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탐구해봐도 괜찮을 거 같아요

      2011.04.04 14:38 신고 [ ADDR : EDIT/ DEL ]
  2. 아직은 모르겠다는. 이런 활동이나 운동을 한 것 자체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이런 일을 조금이나마 하게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ㅇㅅㅇ 아직은.

    2011.04.01 00:55 [ ADDR : EDIT/ DEL : REPLY ]
  3. 비밀댓글입니다

    2011.08.22 06:36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1. 2. 3. 01:44



욕망은 분석보다 실천적이다


1
내가 욕망은 분석보다 실천적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반지성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반지성적"이라기보다는 "반정답적"이라고 변명해보겠다. 여기에서 '욕망'은 일종의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비유라고 해도 좋다.


2
그렇다, 문제는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정답'을 바라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서 평한다. 양비양시론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여하튼 양비양시론이 아니더라도 어떤 문제를 특정한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린 특정한 입장에서 파악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여러 입장에서 - 혹은 아무 입장도 없이 - 평하고 그것을 어떤 퀴즈나 문제풀이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의외로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런 경향은 곧잘 비대칭적으로 나타난다. 기존 사회에서 승인받은 욕망(예컨대 돈을 버는 것, 출세하는 것, 학벌을 획득하는 것 등)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대하고 또 그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 사회에 대해 저항적인 의미를 가진 욕망으로부터 사람들을 차단시키고 '한 걸음 떨어지게' 만들 때, 그러한 '정답적 태도'는 그 쓸모를 보여주곤 한다. "그건 너무 편향되어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게 전부 옳지는 않잖아?" 나는 도대체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교사가 편향적이라는 욕을 먹는 건 들어본 적 있어도, 부동산이나 해서 돈 벌라는 교사가 편향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설문문항 자체의 중립성을 달성하더라도, 객관적인 여론조사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흉악 범죄가 발생한 직후에 사형제에 관한 설문을 하는 것은 객관적인가? 수많은 신문과 방송들이 체벌금지가 교권을 붕괴시킨다는 식의 보도를 한 직후에 체벌금지에 관한 설문을 하는 것은 객관적인가?


문제를 풀 때는 사회적 배경과 그 문제의 선택지 속에
이미 답이 강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3
나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객관화라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경험을 객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한 걸음 물러나서 평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할 줄 알아야 한다'(능력)라는 말은, '객관화해야 한다'라는 것과는 그 의미 자체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4
그런 것들을 떠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적"이라는 데 있다. 모든 분석이 실천적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욕망과 함께하는 분석만이 실천적이다. 내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만이 나를 행동하고 실천하게 만든다. 어떤 일에 대해 분석하는 것 그 자체는 사람을 관찰자로 만든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욕망하는가, 그 욕망은 어디에서 왔는가 ― 물론 이런 질문과 반성은 중요하지만, 어쨌건 욕망이 없어선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차라리 노골적으로 이기적인 태도가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보다 건강하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같이 활동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공부하고 토론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직접 조직하고 홍보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자기가 어떤 것을 바라고 있고 어떤 것이 불만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그럴듯해 보이는 정교한 논리들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5
나(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에게 지적 편향성이나 주장의 당파성을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심지어 나는 때로는 그런 지적을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 어떤 세상에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어떤 공부를 하는 것 역시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인용하거나 사용하는 정보에 오류가 있다면 모를까, 그 인용 자체의 편향성 등을 지적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학자이거나 연구자라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이미 나에게 방향성은 주어져 있다 ― 혹은 나는 이미 내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혹 어떤 이가 어떤 것을 공부하거나 분석함으로써 그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 사람이 얼마나 얄팍하고 세상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 스스로를 놓는 데 익숙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사고방식일 뿐이다. 분석은 내가 걸어가는 길이나 걷는 방식 등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내가 걸어가는 것 자체 혹은 내가 걸어가는 방향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내 욕망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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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브라운 신부 시리즈 같은 번역된 소설 쪽을 읽다보니 문체가 좀....

    2011.02.03 01:4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난다

      나도 가끔 그러는뎈 다른책 읽다가 내가 글쓰면 글이 좀 달라짐

      2011.02.05 23:23 [ ADDR : EDIT/ DEL ]
  2. 피엡

    어줍잖지만 이것저것들을 '떨어져서' 보고 공부하려 하면서 오히려 점점 더 속물이 되어가고 있는걸 느끼고 혼란스럽던 차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

    "편향되지 않게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던 교수는 대학 안 권위에 안주하면서 들뢰즈를 운운하던...

    2011.02.03 11:58 [ ADDR : EDIT/ DEL : REPLY ]
    • 연구나 학문을 하고 싶으면 '한 발 떨어져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할 줄은 알아야 해
      하지만 사실 연구나 학문을 하고 싶다는 것 자체에도 욕망이 포함되어야....
      요즘은 편향되어야만 - 특정한 욕망이 있어야만 - 학문도 깊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2011.02.03 13:14 신고 [ ADDR : EDIT/ DEL ]
  3. ㅇㅅㅇ

    2011.02.03 19:42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0. 12. 21. 16:41


- 예전에 한 번 쓰려고 기획했지만 결국 쓰지 못한 리포트랄까, 소논문 중에 이런 주제가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와 금욕은 과연 배타적인 것인가. 소비하는 소비자와 금욕적 노동자 이 모순적인 둘을 짜맞추는 것이 자본주의의 인간 교육은 아닌가?" 뭐 이런 문제의식인데,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하는 소비 주체와 금욕적인 노동 주체의 형성에 관한 사례 분석"이라고 해야 할까.


- 주로 휴대전화 문제 관련해서 했던 생각인데,
스스로 좌파적이라고 하는 교사들이나 활동가들 중에서는 "청소년에게 휴대전화 사용을 규제하는 것을 반대한다."라는 요구가 휴대전화 이동통신 자본의 손에 청소년들을 무책임하게 던져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즉 그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규제하는 것은 소비를 절제할 줄 알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자본주의적/대안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근데 진짜 그럴까?


- 금욕적이고 자기 절제를 할 줄 아는 인간은 근대 자본주의가 요구한 참고 절약하고 축적하고 노동하는 노동자 상에 가깝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를 많이 하는 소비자들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서는 이런 금욕적 존재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공장이나 직장에서는 이러한 금욕적 자기 통제(노동시간 중에는 휴대전화나 메신져 등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 시간을 엄수할 것 등등)가 요구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규제하는 것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규제하는 것과 닮아 있다."
즉 학교의 휴대전화 규제나 학생 통제는 전혀 대안적이지도 반자본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오히려 "일터에서는 묵묵히 규율을 지키며 일을 하고 일터를 벗어나면 소비자가 되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자본주의적 시민"의 모습과 일치한다.



- 온라인게임 셧다운제에 관해서 그것이 결국 "게임 소비의 자유"를 외치는 것이며 게임업계나 자본주의적 욕망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판을 보았다. 그러나 그 비판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그럼 청소년을 (게임에서든 휴대전화에서든)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은 대안적/반자본주의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서 '소비'='자본주의적'이라는 단순한 도식만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그런 식으로 통제하는 것은 외려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재생산되기 위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훈육은 아닌가??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도입이야말로, 아동/청소년을 구분하고 억압하고 차별하고 보호해온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 아닌가??



- 사실 모든 인간은 소비하고 향유해야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이든 뭐든지 간에 먹고 일하고 노는 등 모든 것들은 소비되고 향유되는 것이다.
그 소비가 다만 화폐로 거래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원론적으로 접근하면 게임은 놀이의 일종이다. 인간은 놀지 않고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놀이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대안적 방식으로 돈을 쓰지 않는 다른 놀이 문화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말이다.



- 상품이 좋은지 나쁜지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해서 규제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반적 사실이다.
무조건적인 판매와 소비의 자유를 주장할 사람은 없다. 당연히 사람에게 해로운 상품은 규제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게 굳이 일반적인 모든 시민들이 아니라 '청소년'인가? 또, 게임에 관해서라면 게임의 내용이 과연 인류 보편의 가치-인권이나 평화 등-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고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왜 게임을 밤에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인가? 게임은 그 자체로 마약이나 독극물 등등 만큼이나 유해한가? 청소년의 경우에 밤 시간에 하는 게임은 일반적으로 유해하단 말인가?

청소년의 문화적 자기결정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청소년들의 참여와 주체 형성을 통해서, 혹은 대안적 문화와 놀이가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게 "청소년에 대한 교육적 책임의 방기"라는 언설은, 역시 청소년들의 입장은 무시하는 꼰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단순히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반대에 그치지 말고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적 놀이 문화나 시설, 제도, 여건을 요구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당연히 옳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강제야자/보충수업에 반대하고 학원과 사교육을 비판하고 입시경쟁교육을 폐지하려고 하고 청소년 문화에 관한 예산과 정책에 그렇게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반대 자체가 소비의 자유를 옹호하고 기업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적 입장이라는 식의 주장은 청소년의 인권 문제와 자본주의 문제 사이의 상호작용을 무시한 단견이다.



-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몰라도, 나는 '분류적으로는 좌파'에 속하겠지만, 어떤 좌파적 도그마("소비는 나쁘다"거나)가 우선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의 경우에는 어떤 사회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인가, 어떤 사회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할 기회가 보장된 사회인가 등등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런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좌파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는 처음 운동을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활동가일 뿐이다.



- 게임업계의 이해관계와 청소년들의 이해관계가 갈리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http://gonghyun.tistory.com/806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밖에 2010년 12월 22일 토론회에서 발표될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사의 발제문 또한 일독해보신다면 청소년보호정책의 노림수와 문제에 관해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문화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문화를 극복하는 방식은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오늘.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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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0. 9. 20. 22:19





임시 야간 숙소 (1931년)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임시 야간 숙소」에서 말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가끔 나도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라고.
그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 소통 부족이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열린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 투쟁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론장을 형성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가 정착된 사회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모습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세계를,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의 가장 큰 오류는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은 중산층-중간계급적인 태도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사회 구조인 현실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사이의 관계나 소통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거나 대안일 수는 있어도 수단이 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서로 다른 사회적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데, '열린 토론'을 통해 '합리적 대안'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러한 '합리성'을 독점한 자들의 자기들에게 유리한 생각은 아닌가?
우리가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 또한, 그저 그 의견이 탄압받지 않도록 하는 정도의 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립하는 것을 놓고 '불통'이라거나 다른 것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난감하다.

이 세계의 문제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문제, 권력의 문제,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소통'이나 '토론' 같은 언어에서가 아니라 행동과 사건에서 나온다. '소통'과 '토론'은 그러한 행동과 사건을 뒷받침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만 의미있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렇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착취의 시대'라는 것이다. 불통의 시대가 아니라 착취의 시대. 불통은 그러한 착취적 관계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
마르크스 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평등한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그것이 소통과 열린 토론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는 소통을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p.s. 쉽게 말해, 4대강 삽질에 관해서 소통을 백날 해도 4대강 삽질에 얽힌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발자유에 관해서 소통을 백날 해도, 두발규제-두발자유에 얽힌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동의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설득과 선전, 소통의 과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소통의 역할에 과한 비중을 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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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이야기가 꽤 마음에 많이 남았는지, 요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활동 고민하다가, 뭐 저공비행 수업을 듣다가, 계속계속 요 이야기가 떠올라.

    2010.09.29 23:00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0. 8. 16. 09:59



우리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다시 우리의 현실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우리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하고 재조립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성을 확보하겠답시고 우리의 관념의 지도와 인식의 틀을 재조명하고 반성하는 일은 부질없다.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관념과 의식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쩌구 하는 도덕 교과서적인 처방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효능이 없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그게 아니다.

우리의 관념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경향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이분법'이다. 한나라당 정권이나 수구 반공주의에 비판적인 모두를 '빨갱이'로 모는 사람. 두발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북으로 가라"라고 말하는 사람.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거나 청소년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도 두발규제 심한데요?" 이런 반문은 무의미하다. 그 사람들의 관념은 실로 명확하게 현실로부터 이 연결고리를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재구성하고 있다. 2010 청소년활동가대회 쳇에서 "폭력과 통제가 아닌 치료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역을 맡은 어른 캐릭터를 까면서 "지금 학교가 하고 있는 건 보호를 빙자한 폭력, 통제잖습니까?"라며 따지고 든 한 청소년의 이분법도 마찬가지이다.

(별 상관 없는 팁. 한윤형 씨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이념 문제라는 게 북한 문제밖에 없다, 라고 레디앙에 기고한 '누구를 위한 진보정당 운동인가'에서 말했던 적이 있다.)


이분법을 예로 드니 꼭 내가 주관적 관념이 현실을 왜곡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조심스럽다.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하자면, 우리의 관념과 인식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관념과 인식의 내용, 재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건 대단히 실용적인 문제다. 우리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데 사용하는 인식 틀, 관념들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목적에 쓸만한가 쓸만하지 않은가. 그것을 평가해봐야 할 문제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욕망을 느끼게 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세상이 생각 같으면 좋겠다."라는 욕망. "내 머리 속의 관념처럼 현실이 깔끔하게 딱딱 구분되었으면 좋겠다." 같은. 심지어 과학자들은 일종의 '과학적 미'로 이론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현실이 복잡하고 모호하고 지저분해 보일 때, 우리의 관념과 어긋날 때.

그러나 "현실은 이론보다 풍부하다." 주관적 관념의 한계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줍잖은 객관성의 환상에 매달리는 일 같은 것이 아니다. 경험이 관념을 만들고 다시 관념이 경험을 재구성한다면, 우리가 돌아갈 것은 다시 '경험' 뿐이지 않은가. 머리 속으로 열나게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성을 찾아 헤매느니, 직접 발로 손으로 몸으로 세계를 겪도록 하라. 그 속에서 실용적인 형태로 다시 우리의 주관을 구성하라.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 현실을 재구성하라. 관념은 주인이 아닌 수단이다.



------------------------------------ 이 아래는 아수나로 활동 관련한 디테일한 얘기 ------------------------------------



회칙 등은 결국 우리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관념이다. 개중에는 운영을 위해 꼭 필요하다 해서 박아놓은 규칙의 내용도 있고, 아니면 활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안내하고 권유하기 위한 내용도 있다. 회칙은 실용적으로 기능할 때만 의미가 있다.

특히 '지부 명칭'이나 '지부 범위' 같은 경우는 우리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대표적인 것이다. '경남중부'지부라니... 참 어디까지가 중부라는 얘기인지, 알쏭달쏭한 이름이다. 사실 나는 '경남중부'지부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근데 뭐 그게 딱히 회칙에 어긋나서라거나 애매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지부가 이미 있어버리니까 사람들이 "경기북부지부"(경북지부?;) "전남남부지부" 등 사람들이 그런 단위를 상상하게 돼버리지 않냐는, 실용적인 이유다.(게시판에 계속 올라오는 그런 류의 글들을 보면)

어쨌건 중요한 건, 지부를 만들든 뭐를 하든 자기 관념,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게 깔끔하고 멋있고 간편할 거 같아 보이는 대로 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운동은 수학 증명도, 도서관 책 분류도 아니다. 지부를 만든다는 것은 머리를 굴리는 일보다는 손과 발을 놀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아주 실천적인 일이다. 나는 언제나, 아수나로 회원 분들에게 실천적 경험을 해보시라고 하고 싶다. 괜히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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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0. 6. 13. 12:44



  "고집이라면 너도 나만큼 부릴 줄 아는 녀석이지. 마음껏 고집을 부려라. 집념을 발휘해라.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는 무시해.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려. 그리고 목적인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지. 그런 것들은 무시해."

눈물을 마시는 새. 양장본 4권. p.33.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내 사고방식은 '윤리'라는 틀에서 벗어나버리게 되었다.
내 행위든 감정이든 마음이든 무엇이 윤리적인가를 판단하고 거기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윤리로 내 삶을 판단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
(거기에는 눈마새의 영향도 분명 있을 거야, 조금은.)


다만 내 행위, 감정, 마음이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또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지에 대해서, 즉 일종의 '실용성'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었다.
뭐, 물론 그 실용성은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생활적인 것에까지 두루 미쳐있다.

그러한 실용성에 따라 행동하면 사실 통상의 윤리/도덕에서 사실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부터 이미 나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윤리'나 '도덕'을 말한다면 그것이 일종의 정치적이거나 관계적 필요 때문에 차용하는 수사(라고 쓰고 거짓말이라고 읽는다)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이다.


내가 '윤리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은, 그 윤리성이 정치성과 배치되는 독선과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심리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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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흠, 부러워... ㅠㅠ

    내가 공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 3-4할 정도는 이러한 윤리관 때문인듯? 예전에도 말했듯이 적응은 안 되지만... -_-;;

    2010.06.20 11:23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0. 4. 27. 02:38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데까지."라는 자유주의적인 경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단순 명쾌하게 정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실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내 자유의 범위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그 타인의 자유의 범위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나의 자유를 기준으로 삼아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양쪽 모두 그 범위를 규정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아주 순수하게 저 명제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자유에 대해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이 안 되는 결론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이런 사고실험을 해보자. 나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없는 좁은 세계를 가정한다. 그 세계에는 타인이 없기 때문에 나의 자유에 한계를 짓는 요소는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타인이 생겨난다면? 그 타인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그 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데까지"라는 명제에서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할 자유조차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붉은색을 두드러기 날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싫어하는 색을 안 보고 편하게 길을 다닐 자유"를 위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붉은색 옷을 입을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 경우에 사람들은 "좋아하는 색의 옷을 입을 자유"(법적, 인권적 이름을 붙인다면 개성발현의 자유, 자기결정권, 표현의 자유 등)를 침해하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 역은 성립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싫어하는 색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붉은 옷 착용은 왜 자유로 인정되는가?

곧,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데까지."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우선시되는 자유의 범위가 이미 규정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애초에, 자유는 내가 다른 사람 -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행위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개인과 개인이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뭘 하든 아무 상관 없다는 뉘앙스를 가진 이런 자유론은 비현실적이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자유들에서 나타나는 온갖 양상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자유의 범위가 이미 규정되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자유가 관계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도 그렇고, 우리는 자유가 지극히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자유'의 범위나 내용은 항상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규정되는 것이다. 애초에 자유('스스로에게서 비롯됨')의 원천인 자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가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항상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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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은 '사회적 존재' 이니까요. 당연한 말.

    2010.04.27 14:29 [ ADDR : EDIT/ DEL : REPLY ]
    • 저 긴 사유를 이런 식으로 결론지우는 건 좀 무책임(?)하지 않니?

      2013.04.30 02:25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13.04.30 03:01 [ ADDR : EDIT/ DEL : REPLY ]
  3. 비밀댓글입니다

    2013.04.30 03:12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러네요 애초에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자유관을 탈피한다면, '자유'라는 게 관계성 속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 혼자서는 오히려 부자유한, 불가능해지는 것들도 많죠.

      2013.09.13 13:35 신고 [ ADDR : EDIT/ DEL ]

딱딱한꿈2010. 2. 15. 02:19







1

  한국 사회에서 우려되는 현상 중 하나가 조직의 부재이다. 어쩌면 이 말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조직만 있고 개인은 없다, 전체주의적이다, 집단주의적이다 같은 류의 이야기들이었으니까는.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로 들리는 조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분명 쌩뚱맞게까지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지적과 조직이 약하다는 지적은 모두가 사실성을 담고 있다.

  여기서 조직(뭐 커뮤니티나 공동체라고 표현해도 좋다.)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자발성/자기이익/공익에 근거하여 사회적으로 구성된 집단,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을 말한다. 예컨대 지역의 커뮤니티,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학생회, 공익단체, 정당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 개념을 빌자면 이런 조직들을 '자발적 결사체'나 '시민사회'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결사체들은 사회에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집단적 정치 참여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강한 조직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조직들은 대부분 국가 권력이나 대자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로는 보기 어렵고,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인은 없고 조직만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조직은 주로 국가, 학교, 군대, 대기업, 지연, 학연, 그밖에 군사 독재의 부산물로 탄생했으면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조직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일부 친목적 기능을 수행하는 커뮤니티들(부녀회라거나)도 여러 요인들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가능성은 미미하다 하겠다. 요컨대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자본이 조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며, 자발적인 조직화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것으로, "한국은 시민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하다."라는 분석과 비슷한 의미일 뿐이다.



2

  조직의 부재는 개인의 원자화라는 결과를 낳는다. '학생운동'이라는 형태로 80년대-90년대 초에 비교적 높은 자발적 조직화율을 보여주던 20대-대학생들의 현재를 관찰하면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최근에 각광받는 "88만원 세대"(박권일,우석훈)나 "자기계발하는 주체"(서동진) 등의 논의들을 보면 각각의 이론적 틀에서 그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라고 쓰면서 정작 아직 서동진 씨 책은 안 읽어봤다 -_- 서평만 읽어봤지;;) 그렇지만 20대의 경우에 이러한 '변화'가 더 눈에 잘 띈다는 것 뿐, 이는 비단 20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낮은 노조조직률, 껍데기뿐인 학생회, 지역 기반 운동의 부진,(지역주의적이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정당들을 제외한) 정당들의 적은 당원 수 등등… 우리는 한국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개인의 원자화가 사회의 보수화를 불러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은 사회 변화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없으며 사회 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된다. 무력감 속에서. 문제들은 항상 개인화되고,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정치적/집단적 해결책은 사라지고 윤리적/개인적 해결책들만이 제시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당한 부당한 피해를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여 행동하고 정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 제도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한다. '신고'처럼 권력기관에 의한 제도적 구제를 요청하는 방식. 아니면, 자신이 사회적 권력자(또는 일종의 영웅.)가 되는 방식. 이 두 방식 모두 대단히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들만이 '현실적'인 방식들로 받아들여진다.

  무력감이 없어야만 민주주의라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지적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계급상승의 꿈이나 출세의 꿈을 꿀지언정 스스로 사회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하여 해답을 도출해내기보다는 권리를 위임하고 권력 기관에 의존한다. 시민 사회가 약하고 국가가 강력한 상황이 역으로 국가 권력을 더 강고하게 한다는 것은 우울한 재생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이라는 말은 기껏해야 공직선출권-피선거권과 선거권 이상으로 얼마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건강하고 잘 굴러가는 정당이 없이는 국회나 정부 등이 잘 기능하기 어렵듯이, 다양한 조직들이 존재하지 않는 - 시민 사회가 약한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운영될 수 없다.




3

  운동의 영역에서, 조직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가진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운동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제도적인 기구들에 의존하는 대응, 이슈파이팅, 입법운동 등등... 파업 등의 방법도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더 두드러지는 문제점이다. (한국의 운동들이 많은 경우 입법운동에 치중하게 되는 것은 이런 우울한 현실 탓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 같은 말들이 시민단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단체들의 운동 방식을 더 개선하기 위한 연구들도 있어야겠지만, 한국 사회 전체가 조직화가 안 되는 판에 그것을 단체들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른바 '대중'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경로들이 매스미디어와 거리선전 등 외에는 거의 없는 상황은 운동 주체들에게 끊임없이 두통이나 과로 같은 건강상의 문제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들의 자발적 봉기가 가장 건강하다는 식의 주장은 낭만주의자의 근거 없는 환상이다. 비조직 대중들의 자발성을 역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아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발성이 있죠."라고 말해준 다음에 그런 '대중들' 속에서 기존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현실들을 수없이 많이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구조[조직/공론장]조차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게 될 것임을 과거의 사례들을 들어가며 들려줄 수 있다.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개개인들의 자발성은 촛불집회처럼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아무리 암울하고 원자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사회성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지속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팬클럽이나 인터넷 카페, 동호회 등의 조직들이 촛불집회에서 한 활동들을 연구해보는 게 더 나을지도.)

  그리하여 우리의 과제는 조직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조직이 없다면 조직을 만들면 된다. 긴 시간이 걸리고 매우 어려운 일이더라도, 여하간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조직이 없는 이 현실이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하고 조직화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 청소년 대중 조직화나 청년 조직화 등은 장기적인 해결책 중 일부를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 때 조직화를 경험하고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해결 방식을 경험한 사람들이 30대 40대 50대 60대...(후략)... 가 되어도 조직화되기 쉽다고 가정한다면, 혹은 한나 아렌트 표현대로 '정치적/공적 자유'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말이다.(과거 20대 때 학생운동[조직화]을 경험한 사람들이 꼭 그 이후에 조직화되어 있느냐, 하는 반문이 분명 가능하며, 따라서 이걸 주된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건 매우 뻘쭘한 일이다. 동시에 추진되는 다양한 해결책 중 하나 정도의 위치로 이해해야 한다.) 어쨌건 그런 류의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10대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0대든 80대든, 조직화는 필요한 일이니까.

  여하간, 그리하여, 문제는, 조직화다.






(네스티캣 님의 미디어다음 연재 웹툰, 트레이스에서....)







# 이 글에서 '조직화'나 '조직'을 사람에 따라서 '함께하기'라고 읽든 '공동체'라고 읽든 딱히 반대하지는 않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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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척 공감하는 글.

    그런데 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에 신경쓰기 보다는 촛불을 미화시키고 다시 촛불이 일어나길 소망하는데만 급급한걸까?
    그렇게 하는게 (마음이든 몸이든) 편해서?

    2010.02.15 10:54 [ ADDR : EDIT/ DEL : REPLY ]
    • 혁명적 상황이란 게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별 부담없이 나서는 상황인 건 맞는 말 같은데, 그렇지만 조직화가 일정 이상 되어 있지 않으면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보이는데 말이지-
      마음과 몸이 편해서라기보다는; 당장 정부에 대응은 해야겠는데, 조직화라는 건 성과를 보려면 길게는 10년을 내다봐야 하는 일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싶기도 -_-;

      2010.02.15 12:50 신고 [ ADDR : EDIT/ DEL ]
  2. ㄹㄷ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건강 지킴이 내 병은 내가 고친다

    2010.09.22 23:12 [ ADDR : EDIT/ DEL : REPLY ]
  3. 곰돌

    이 글이 나왔을 땐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 와서야 이해하겠다는 -_- 모종의 성장이 있었던건지, 여하간 멍청했고 (지금도) 그러한 거 같단 건 사실인둡 흑

    2011.02.08 00:36 [ ADDR : EDIT/ DEL : REPLY ]
  4. 곰돌

    읽을 때 마다 몹시 다른 느낌들이 느껴지는군요...

    2012.03.18 22:42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10. 2. 2. 15:20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속에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겠지. 고의적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 입히길 원하여 상처 입히는 경우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불일치와 한계 또는 조건과 상황의 차이 때문에 상처 입히게 되는 경우. 이 두 경우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고의로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유발하는 심리 상태를, 대체로 복수심, 분노, 증오, 적의 등의 감정으로 명명하지. 그렇잖아?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화가 나있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상처 입히고 싶어 한다는 뜻이지.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난 너에게 화가 났었어."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난 너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입히려고 했어."라는 말에는 이해심을 보일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어제 밤에 했어. 응, 이건 내가 너에게 한 말에 대해 네가 좀 더 이해하기를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야. 아마도 너에게 좀 더 익숙할 말로 번역하면, 그날 내가 너에게 한 말은 "그건 내가 너에게 화가 나서 한 거야."라는 것과 동의어(엄밀하게는 포함관계겠으나-)라는 것을 말야.(그리고 "네가 나에게 상처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너에게 화를 낸 것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데?"라는 행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까진 굳이 읽어내지 않아도 좋아.)

  내가 그때 화가 난 것은 네가 활동에 대해 보인 무관심, 불성실, 무성의에 의해서 내가 외로움, 슬픔, 짜증을 느꼈기 때문이지. 역시 이 대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로 번역하면 너에게 상처 받았다고 해도 큰 오류는 없을 거야. 그 결과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너에게 화가 난 것이고. 지금도 내가 너에게 그때 상처를 입힌 것 자체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들지 않아. 내 입장에서는 너에게 경고 또는 복수를 한 것이고, 한 발 물러나서 보더라도 너에게 그런 '의미'를 전달한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너에게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아. 모든 상처, 증오, 분노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배척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서로를 미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 않은 관계,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관계라는 건 얼마나 비인간적일까?)

  다만 내가 너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 미안해해야 할 것은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으며 후회하는 부분일 거야. 내가 너와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 내게 익숙한 방식이 너에게 익숙한 방식은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너에게는 더 민감하거나 원하지 않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그저 내게 익숙한 방식(감정을 명명하기보다는 의도를 설명하는 식으로)으로 내 의미를 너에게 던졌으니까. 그것이 너에게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만큼의 충격, 상처, 고통을 주었다면 그것은 내 방식의 잘못일 것이고, 따라서 나는 그것을 후회하고,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

  너의 감정에 공감해주기를 바라지는 마. 내가 의도적으로 너에게 상처를 준 부분에 있어서는, 나는 너에게 공감할 수 있고, 또 그것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네가 아파하고, 잘못한 걸 알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니까. 하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난 너의 감정을 분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동조적-공감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그러니까 예상하지 못한 것이겠지? 하지만 네가 바란다면 공감-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공감-이해하는 척할 수는 있을 거야. 너는 그런 걸 원하는 걸까? 잘 모르겠어, 거기까지는, 여전히.


  글을 이렇게 길게 쓴 건, 내가 "내가 너에게 화를 낸 걸 잘못했다고 생각진 않지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같은 류의 성의 없어 보이는 사과를 하게 될까봐, 우선 나를 너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야. 너도 그런 사과를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 긴 글이 또 다른 가식으로 보이진 않으면 좋겠군.


추신 : 그리고, 네가 없는 것보다는, 내가 없는 게 공익적 관점에서 더 나은 것 같고, 따라서 정 네가 나를 보기 싫다면, 내가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여하간 나는 네가 결정하는 데 있어 인권활동가대회 때 나랑 있었던 그 일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 너에게 미안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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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체벌한 교사가 체벌당한 학생에게 쓰는 편지같은 형식인건가.
    이거 연작으로 만들 생각 없어?
    괜찮으면 성채 외전으로 쓰고싶다!!

    2010.02.04 14:0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별로 '연작' 같은 것으로 할 생각 없음.
      그리고 여러 차례 쓰게 되더라도 그런 곳에 쓰게 허락하지 않음.

      2010.02.04 14:37 신고 [ ADDR : EDIT/ DEL ]
    • 이게 왜 체벌에 비유되는지는 딱히 묻지 않겠음. 너의 머리 속 구도가 대충 상상은 가니까. 뭐 그 상상이 맞지는 않겠지만.

      2010.02.04 14:39 신고 [ ADDR : EDIT/ DEL ]

    • 아니었나;;;;
      미안;;;;;;;;;
      현실에서 그러는거라면 뭔가 심각한 일일텐데
      어느 쪽이든 상처입은 쪽이 웃는 쪽으로 끝나길 바랄게.

      2010.02.04 23:28 신고 [ ADDR : EDIT/ DEL ]

딱딱한꿈2009. 10. 24. 22:49



아수나로에서 공부모임 할 때 쓰려고 정리한 겁니다.
이것 외에도 탈학교(deschool이라고 해야 하나) 이론 쪽도 다른 사람이 정리...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가장 많이 참고했고 인터넷에서 검색도 하고 해서 정리한 겁니다.





경제재생산

  경제재생산 이론은, 요컨대 학교 교육이 경제 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우선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제도는 경제적 성공이 개인의 능력과 자격증, 교육적 성취에 의해 좌우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계급구조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난 엄마 아빠가 부자니까 나도 잘 삼 ㅋ”이면 사람들이 기분이 매우 나쁘겠지만, “난 (엄마 아빠가 부자라서 이것저것 지원을 받아서)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니까 능력이 있는 거고 능력이 좋은 내가 잘 사는 건 당연함” 식이라면 사람들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크게 분노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면 학교 교육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계급이 대물림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재생산 이론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학교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하는 문제이다.(보울즈와 진티스(긴티스?)라는 학자들이 주장한 건데, 미국 교육을 주 모델로 한 분석이다.) 학교 교육을 살펴보면, 어떤 학교냐에 따라서 다른 교육 방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에서는 강한 규율을 강조하고, 대학교는 자율성을 강조한다. 상류층이 다니는 사립고등학교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규율이 약하다. (한국 학교의 경우는 반례가 많이 발견되긴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대학이 자율성이 줄어들고 규율이 강화되어가는 것은 전 고등학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상류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성격이 약화되었기 때문일지도.)
  규율과 통제, 감독을 강조하는 교육에서 학생들은 지위와 권위에 복종하도록 유순함을 배운다. 반면에, 지배계층을 양성하는 학교나 대학에서는 자율적 판단을 강조함으로써 지도력을 개발한다. 학교의 수준이나 종류에 따라 학교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위계적 역할 분업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학교 졸업 후 자신이 사회에서 가지게 되는 위치(노동자, 관리자, 자본가, 전문직 등등)를 더 쉽게 받아들이고 적응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학교교육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있고 사회는 누구에게나 능력과 업적에 따라 높고 권위 있는 지위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에 의한 사회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도 특목고-자사고 및 서울대 진학률 등의 통계는 그런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는 한국의 교육이 어째서 그토록 경쟁적인가에 대해 사회학적 해답을 준다.

 

요약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교육은 노동계급의 자녀는 노동계급으로, 자본가계급인 자녀는 자본가계급으로 재생산하는 역할을 함. 그리고 불평등한 구조를 은폐, 정당화함.

비판 : 경제재생산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딱 학교의 형태와 사회경제적 구조가 대응하지는 않음. 경제적 불평등과 체제가 학교 교육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음. 반례들이 많음. 학생들의 능동적 역할이나 교육, 문화의 자율성 간과 (폴 윌리스의 저항이론. 노동계급 학생들의 반항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계급 재생산으로 이어지는지 ‘간파’와 ‘제약’ 개념으로 분석...) (문화재생산 이론 등)

 



문화재생산

  이러쿵저러쿵 비판이 있어도 경제재생산 이론은 학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기초를 제공한 이론이다. 문화재생산 이론은 경제재생산 이론에 대한 비판, 보완의 성격이 있다. 문화재생산 이론을 쉽게 간추리면, 경제재생산 이론의 기본 성격을 공유하면서도 “잘 사는 애들이 어떻게 학교에서 잘 성공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문화재생산 이론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문화에 주목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식적인 지식, 문화는 지배계급 내지는 중류계층의 지식이고 문화이다. 지배계급의 학생들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이런 형태의 지식, 문화를 습득하며 익숙해져 있다.(독서라는 이름이든 교양이라는 이름이든 뭐든...) 이런 것을 ‘문화자본’이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자본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학업성취가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 잘 사는 집의, 전문직 부모를 둔, 지배계급의 학생들은 이미 유리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클래식이나 가곡을 가르칠지언정 대중가요나 힙합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클래식이나 가곡 등에 더 익숙한 쪽은 좀 사는 애들일 가능성이 높다. 음악 뿐 아니라 활자화된 지식들, 교과서에 사용된 단어 등 거의 모든 교육내용에서 그런 자본의 불평등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탓에 문화자본의 불평등이 경제자본의 불평등과 차이가 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90년대 이후로는 점점 일치하고 있다. 서울대에 가는 학생은 돈이 좀 있는 전문직 부모를 둔 아이들이 많다는 통계 등.
  학교의 기준이 되는 문화나 지식 자체가 계급적인 것이지만, 과학/학문 등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는 잘 알아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학교교육에서의 문화재생산은 계급간의 불평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학교에서 좋은 학생, 나쁜 학생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가 제공해준다.
  문화재생산 이론은 경제재생산 이론에 비해 교육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경제적 성공과 학문적 성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좀 잘 사는 집 학생이라고 해도 학교에서 실패할 수는 있다. 교육체제는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성취를 가늠한다.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는 더욱 정당화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학업 성취가 100%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자녀는 동일한 졸업장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약 : 제도교육에서 가르치는 문화는 잘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친함. 이 문화는 학생들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해줌. 그래서 특정한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학교교육에서 더욱 성공함. 교육에서의 성공은 가정에서 얻은 교양이니 배경지식이니 그런 것의 영향을 받음. 교육에서의 성공/실패가 꼭 경제적 성공/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데, 잘 사는 애들은 이런 성공을 더 잘 써먹을 수 있고 실패해도 어느 정도 커버 가능.

 

# 경제재생산과 문화재생산 모두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 학교 교육은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체제와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외의 것을 잘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교육은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에서 군말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 재생산이론은 학교의 역할, 기능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경제재생산과 문화재생산 이론을 공부함에 따라, 우리는 학교에서 당연한 것으로 주어지는 수업, 공부, 규율 등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정당하고 중립적인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단지 “교육은 ~~해야 하는데 현실은 이렇지 않다.”라는 관념을 벗어나서 교육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도대체 불합리해 보이는 이런 경쟁과 규율들은 왜 있는 건지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 이는 음모론은 아니다. 재생산 과정은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며 ‘자연스럽게’ 관련되고 있는 것. 특정한 사람들의 의식적인 의도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활동조차도 중립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활동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교육과 이데올로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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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09. 10. 17. 15:56

비판 批判  명사
 
발음〔비ː-〕  
[명사]
1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비판을 받다
비판이 일다
비판이 제기되다
신랄한 비판을 가하다.

2 <철학>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
[관용구] 비판의 날을 세우다
[북한어]원칙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풍을 세우다.

 

 


일단 '비판'이 위와 같다는 의미임을 숙지하고 들어가자. 단, 일반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짐." 중에서 그름을 따지는 쪽으로 많이 사용한다.

 

 

1
많은 사람들이 "대안 없는 비판 =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공식을 사용한다. 즉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비판만 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소리인데, 도대체 그게 왜 성립하는지 나는 우선 언어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비 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말은 비판의 목적이 비판이란 말이며 이는 그 비판이 그 자신 외에 아무런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반면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비판은 문자 그대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소리지, 그 비판의 목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념의 내포상 그 둘이 일치하지 않는다. 외연으로 공통된 부분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일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함 관계(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 대안 제시 같은 귀찮은 것은 없을 가능성이 높으므로)라면 모를까.
그런 관계로 나는 그 둘을 동시에 비판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서 각자 비판해보고자 한다.


2
세상에 과연 '비판을 위한 비판'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이 말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상대방의 목적을 예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 를 들어 악플을 다는 것 자체가 삶의 낙이요 그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다는 악플은 악플을 위한 악플이다. 마찬가지로 비판 자체가 삶의 낙이요 그 외에는 어떠한 목적 의식도 없이 그냥 글로 쌈박질하거나 트집 잡는 게 재밌어서 비판하는 것이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을 종종 쓰는데, 적어도 그렇게 함부로 쓸 말은 아니다.
비 판은 본래 어떤 기준-준거에 근거하여 어떤 주장 등을 까는 것이다. 분석하고 무엇이 그른지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다. 일단 어떤 일관된 가치관-기준을 견지하며 뭔가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을 위한 비판", 하고 싶어도 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비판이라는 게 뭔가를 딱 보고 "맘에 안 든다." "뭔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보통 수행하게 되는 귀찮은 작업인데, 그런 생각이 드는 과정을 생략하고 "비판하자~"해서 비판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쉽지 않다는 거다. 그건 마치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from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질문을 연상케 한다. 한 현상의 목적이 단지 자기자신일 수 있다니, 이런 자기완결적이어서 아름다운 녀석을 봤나!

여하간 세상에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을 그대들은 너무 남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3
대안 없는 비판, 하니까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다. 전에 환경운동가 한 분이, "아니 한 달에 활동비 70만원 받고 겨우겨우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 사람들한테, "그렇게 반대할 거면 대안정책을 a, b, c까지 자세하게 제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공무원들이랑 연구원들은 월급 100만원 넘게 타면서-. 우리가 대안의 방향은 제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책이나 법안을 자세하게 다 짜내라는 건 직무유기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뭐 이런 여담은 일단 대충 기억만 해두길.
본 론으로 들어가서, "대안 없는 비판"이 잘못인가, 과연? 대안 없는 비판은 물론 질문일 뿐 답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하지만 질문으로서는 완전하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인지 자체를 놓고 논쟁이 붙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비판을 전개한 사람은 그 부분이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따라붙는 게 "어떻게 고칠까?"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은 비판을 한 이가 제시한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가치관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해답이 굳이 비판 안에 제시되어야 하는가? 기실, 소위 말하는 "대안 없는 비판"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자 이런 게 잘못되었어. 동의해? 동의하면 어떻게 고칠지 생각 좀 해보자. 어쩔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권유하는 것이다.
대안 제시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년놈으로 몰아붙이는 것 좀 그만하자. 만일 그대들이 그런 식으로만 반응한다면, 결국 그대들은 스스로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귀찮으니 비판한 사람이 알아서 대안도 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래 이거 잘못되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게 당연한 거 아냐? 다른 게 가능해? 있으면 말해봐." 대충 이런 거다.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 대안에 필요하지 않은 이상은 자신의 상상력과 사고력 부족, 게으름을 탓하는 게 나을 거다. 그리고 앞 여담에서 말했듯이 대안의 abc까지 다 나올 필요는 없다. 어떠어떠한 대안이 있을 수 있는지는 정도는 조금만 머리 굴리고 상상력 발휘하고 조사해주면 알 수 있다.
어차피 완전한 대안은 있기가 어렵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딱 떨어지는 정답"에 익숙하다 보니 대안제시에도 완벽주의 강박관념에 찌들었는지 왜 이리 겁이 많은지. 이보세요, 완전할 필요는 없어요. 완전하려고 노력은 해도.
우스개소리인지, 예전에 학회에서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그래서 뭐 어쩌자고"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공리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래서 공리주의 무작정 밀어붙이면 되는 걸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걸까? 적어도 공리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공리주의의 폐해들을 억제하려는 노력들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4
그러니까 결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은 함부로 쓸 말이 아니란 것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그 잘못된 걸 어떻게 고칠지 꼭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열 심히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 같네요." 같은 말 한 마디만 툭 던지는 사람 보면 짜증이 백회혈을 뚫고 치솟는다. 왜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하는지 이유를 우선 대라고 하고 싶고, 그리고 내 비판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멋대로 판단하고서 말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내 나름 일관된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한 비판만 해왔다.
"대안 없는 비판이다."라면서 욕하는 것도 좀 그만두자. (아, 그 사람한테 추가질문으로 "그래서, 그쪽이 생각하는 대안은 뭐죠?"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말이지.) 뭔가가 잘못된 걸 알았으면 그걸 어떻게 고칠지 같이 고민해야지, 도대체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고? 배째."식으로 나오면 어쩌잔 거냐. 설령 인간 사는 곳에서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 악 같은 것들이 완전히 없어질 수 없고 또 없어지면 오히려 안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줄이고 없애려는 노력조차 않고 순응해버릴 거면 대체 왜 사는 거냐. 그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결국. - 게다가 그 근거가 상당히 비겁하다는 점(어쩔 수 없는 것=바꿀 수 없는 것=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잘못된 것에 순응)에서 차라리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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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09. 10. 8. 12:20


답이 안 나오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질문과 풀이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질문과 풀이방법은 괜찮은데 아직 기술이나 자원이 부족해서 답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내 입장에서는 계급갈등, 사회주의, 인권 투쟁 등은 원론적으로는 후자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질문과 풀이방법의 원칙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풀이방법의 디테일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이나 자원의 부족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기술이나 자원 수준에 맞춰서 질문과 풀이방법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제시된 질문이나 풀이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다만, 현실에 맞춰서 새로운 풀이방법을 고안해야 하긴 한다.


(아직까지 답이 안 나왔다는 이유로)
이념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느니, 어쩌니, 중도와 통합이 대세니 어쩌니 하는 것을 보면 유쾌해진다.
우스워서. ^^

질문과 문제설정, 사고의 전개 과정, 언어의 선택 등등을 좀만 더 성의있고 정교하게 하면 적어도 저런 식의 거친 발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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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 점에서 무조건 합치자, 중도가 짱이다 하는 사람들은 불편해요. …이번에 민주대연합 논의에서 진보신당이 불참하게 되었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뭉뚱그리는 것은 별로 싫어하던 차에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

    2009.10.08 19:13 [ ADDR : EDIT/ DEL : REPLY ]
    • 근데 또 수단적인 협력의 요구는 다른 맥락이 있어서리리리리

      2009.10.10 16:43 신고 [ ADDR : EDIT/ DEL ]
  2. 리잔느

    신념이고 뭐고 이런 거 이야기 들으면 요즘 혼란스럽.
    대체 어떤 마인드로 살아가야하는건가 우우.. ㅠ
    뭔가 두리뭉실한 느낌이고 딱딱 개념정리가 안 됨
    예전에는 그래도 뭔가 명확했던 것 같던데 말야 ㅋㅋㅋ

    2009.10.09 09:2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