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equality, equity, justice, "평등은 정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화 출처

공현 2021. 8. 9. 14:31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많이 쓰이고 있고 다양한 파생형을 낳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만화나 만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야구 경기를 관람하려고 하는데 나무 울타리가 관람을 가로막고 있다. 여기에 나무상자를 쌓아서 딛고 올라가 울타리 너머로 경기를 보려고 한다. 어린이-청소년들마다 각각 키의 차이가 있는데, 나무상자를 어떻게 쌓아야 할까? 모두에게 같은 높이의 디딤대를 주는 게 옳을까, 아니면 키가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은 디딤대를 주는 게 옳을까?

이 이미지는 "평등과 공정의 차이" "평등과 공평의 차이" "평등은 정의를 의미하지 않는다(Equality doesn’t mean justice)." 등 다양한 제목으로 언급되고, 무엇이 원본이었는지, 원래 붙어 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등도 혼란스럽게 인용되고 있다. 관련해서 확인된 출처 그리고 원본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정리해 본다.

 

먼저 많이 사용되는 이미지는 "EQUALITY"와 "EQUITY"라는 이름과 같이 2개의 상황이 제시된 만화이다. 여기에 붙어있는 이름(단어)을 바꾸거나 세 번째, 네 번째 컷을 추가한 다양한 변주들이 존재하는데, 일단 원본은 이 이미지로 보인다.

 

(변형 버전의 예시. 세 번째 컷으로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진 '현실', 네 번째 컷으로 울타리가 사라진 '해방'이 추가되었다.)

 

 ※ EQUALITY를 '평등'으로 EQUITY를 '공정'으로 번역한 한국어 버전도 존재하는데, 이는 사전에 실린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번역이지만,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지는 못한 번역이다. 여기에서 EQUALITY는 형식적 기계적 1차적 평등이란 의미이고, EQUITY는 '형평'의 개념에 더 가깝다. 물론 공정의 의미가 다의적이니 만큼 '공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존 롤스도 '공정으로서의 정의'란 개념을 얘기했듯, 미국에서는 Fairness[공정]가 결과의 평등이나 형평에 더 가까운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흥미로운 차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라 하면 경쟁의 공정이나 기회의 평등 등과 연결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아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한국적 맥락을 생각하면 [형식적 평등 / 실질적 평등], [기회의 평등 / 결과의 평등], 아니면 [평등과 정의] 정도로 옮기는 게 더 나을 듯싶다. 한국의 용례를 고려하면 사전이 제안하는 역어와 정반대로 [공정(EQUALITY) / 평등(EQUITY)]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의 원 출처는 IISC(Interaction Institute for Social Change, 사회변화를 위한 교류 협회? 정도의 의미)라는 단체가 Angus Maguire에게 의뢰하여 그린 것이다. 2016년의 게시물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As a gift to the world of equity practitioners, IISC engaged artist Angus Maguire to draw a new version of an old favorite (since we could only find pixelated versions of the original)."

 

https://interactioninstitute.org/illustrating-equality-vs-equity/

 

Illustrating Equality VS Equity - Interaction Institute for Social Change

IISC has long believed that this image, illustrating the difference between equality and equity, is worth a thousand words. As a gift to the world of equity practitioners, IISC engaged artist Angus Maguire to draw a new version of an old favorite (since w

interactioninstitute.org

 

그런데 이 단체의 게시물에서는 '오래된 인기작의 새 버젼을 그렸다'라는 언급이 있고, 좀 더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보면 원본 작성자의 게시물이 링크되어 있다.

즉, IISC나 Angus Maguire가 이 그림의 원본 창작자가 아니란 뜻.

 


IISC 게시물을 경유해 확인해 본 바, 이 그림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고 세상에 구체화하여 내놓은 것은 Craig라는 사람이다. 자기소개를 통해 찾아보니 이 사람은 신시내티 대학교의 Craig Froehle 경영학 교수이다.

https://medium.com/@CRA1G/the-evolution-of-an-accidental-meme-ddc4e139e0e4#.pqiclk8pl

 

The Evolution of an Accidental Meme

How one little graphic became shared and adapted by millions

medium.com

 

이 사람이 처음 만든 이미지는 아래의 것으로, 좀 더 단순하고 여러 요소들이 합성된 듯한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원본에는 각 컷에 붙어있는 단어가 "EQUALITY to a conservative / to a liberal"인 점도 눈에 띈다. 옮기자면 '보수/진보에게 평등이란' 정도일까? 즉 보수주의자가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고 자유주의자(리버럴, 미국 정치 맥락에선 진보주의자)가 말하는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겠다.

 

Craig의 글에서는 이 이미지를 구상한 계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Back in 2012, shortly after the US elections, I had crafted up a graphic to illustrate my point in an argument I was having with a conservative activist. I was trying to clarify why, to me (and, I generalized, to liberals), “equal opportunity” alone wasn’t a satisfactory goal and that we should somehow take into consideration equality of outcomes."

("2012년으로 돌아가서, 미국 대선 얼마 후, 나는 내가 보수주의적 활동가와 논쟁했을 때 내 주장의 요지를 묘사하는 그래픽을 제작하였다. 나는 어째서 나에게는(그리고, 일반화하자면, 리버럴들에게는) "평등한 기회"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목표가 아닌지, 왜 우리는 어떻게든 결과의 평등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노력했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미지의 원본은 본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른 '평등'의 내용 차이를 보여주려 한 것이지, EQUALITY와 EQUITY, 또는 JUSTICE의 개념 차이를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원본에 있던 정치적 입장, 진영이 삭제됐다는 의미에서는 IISC의 변형 버전이 다소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참고로, 링크된 Craig의 홈페이지 게시물에서 이 이미지가 다양하게 변형, 활용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서 가공, 변형된 예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이 그림-만화-이미지는 의외로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2012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2016년에 미국의 사회운동단체에서 리드로잉 한 것이다. 앞으로는 이 이미지를 활용할 때 Craig가 아이디어와 원본을 만들고, IISC 및 Angus Maguire가 다시 그린 그림/만화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적절한 출처 표기와 가공/변형 여부 표기 등을 한 뒤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