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에 해당되는 글 239건

  1. 2018.11.30 체벌거부선언문
  2. 2017.04.27 '실수'가 보여주는 것 (1)
  3. 2016.09.11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
  4. 2016.07.06 [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5. 2016.06.23 [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청소년 억압의 뿌리, 나이주의를 발견하다
  6. 2016.03.24 [공현의 인권이야기] ‘소비자’의 권리를 넘어서
  7. 2016.02.18 [공현의 인권이야기] 청소년운동? 청소년‘인권’운동? 인권, 함께해서 좋지만 또 조금 부담스러운 그것
  8. 2015.04.27 [한겨레 2030 잠금해제] 10년째 두발자유 운동 중 / 공현
  9. 2015.03.30 체벌이 인권침해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
  10. 2015.03.30 [한겨레 2030 잠금해제] 하루 6시간 학습 / 공현
  11. 2015.02.12 게임 셧다운이 아니라 학습시간 셧다운!
  12. 2015.02.08 [인권오름]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
  13. 2014.10.12 [논평] 무엇을 위한 기숙사인가,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라!
  14. 2014.09.16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제2호 (2014.09.10.)
  15. 2014.08.11 한겨레 - [2030 잠금해제] 멸종 위기의 방학 / 공현
  16. 2014.06.02 [논평] 세월호 참사가 교육에 남긴 교훈 - 교육감 선거에 즈음하여
  17. 2014.05.28 학생 휴식에 관한 서울지역 학생 설문조사 (2014년 5월 17일~6월 14일)
  18. 2014.05.14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1)
  19. 2014.03.30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 제1호 (2014.03.30.)
  20. 2014.03.21 『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_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걸어가는꿈2018.11.30 17:39

체벌거부선언문


두려움


체벌이라고 하면, 벌써 십수년 전 일이지만 중학교 과학 수업 중 정기적으로 돌아오곤 했던 일종의 즉문즉답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과학 교사가 학생 1명 1명에게 그 전 시간까지 배운 것 중에 아무거나 질문을 하고, 5초 안에 대답을 못 하면 손바닥을 맞는 시간이었다. 대답을 더듬거리거나 한 음절 틀리기만 해도 손바닥을 맞았다.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질문을 받고 5초 안에 대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뇌를 작동시켜야 했던 시간, 그 두려움과 조바심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 시간만 되면 교실 안의 공기는 마치 손에 잡힐 듯 목에 걸릴 듯 팽팽해지곤 했다.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을 리는 없으니 그저 내가 숨을 제대로 못 쉴 만큼 긴장했던 것뿐이겠지만.

우스운 것은 반 이상의 학생들은 체벌을 피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맞고 말겠다는 자세로 임했고, 나는 어떻게든 한 대도 안 맞고 넘어가 보려고 열심히 외운 끝에 한 질문 한 질문 클리어할 때마다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는 점이다.(그래도 종종 삐끗해서 매번 하나씩은 틀리곤 했다.) 끔찍한 것은, 뭐 그런 방식으로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려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교사는 나름 열의 있는 좋은 인품의 사람이었고 스스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으리라는 점이다. 나는 지금도 ‘체벌’이라고 하면 그 교사의 즉문즉답 시간과 더불어 그 교사가 수업 시간에 상습적으로 자는 학생에게 쓰레기통에 물을 받아 끼얹은 사건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교사에 대한 미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아마 그것이 사적 감정 없는 ‘교육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가까운 형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끔찍함과 내가 기억하는 충격, 두려움의 시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이없어했던 체벌들 ― 2학기 개학을 했으니 정신 차리고 공부하잔 의미에서 전원 1대씩 매를 맞자던 영어 교사라든지, 체육 시간에 집합이 늦었다는 이유로 반 학생 전원을 ‘엎드려뻗쳐’ 하게 했던 체육 교사라든지 ― 보다도, 그 중학교 과학 교사의 체벌이 더 ‘아프고’, ‘굴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건 그 교사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불합리한 사람이라 벌어진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체벌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그 교사가 바라는 대로, 학생이 지정된 범위를 달달 외우고 벌벌 떨며 5초 안에 대답을 쥐어 짜내도록 통제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조금 울먹이고 싶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딱히 그 교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체벌 이야기를 하면 체벌을 가한 사람의 선악을 판별하고, 그 체벌이 효과적이고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묻곤 한다. 감정적이진 않았는지, 심하진 않았는지, 체벌을 당한 사람이 맞을 만한 잘못을 했는지, 반성을 하게 만들었는지 등……. 그러나 체벌을 한 사람이 선량하고 합리적인 사람인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체벌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얻든 그 과정 자체가 폭력에 굴복한 경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순종하고 두려워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체벌이 아니라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제도화된/허락된)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정부에서는 체벌의 원칙적 금지와 교사들의 자제를 요구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체벌이 너무나 흔한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폭력을 가한 학교 교사, 학원 교사, 택견 도장 사범, 그리고 아주 드물긴 했지만 부모까지도, 모두 미워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나 다른 사람들이 겪은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회였으니까 그런 것일 뿐임을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선 안 되는 사회가 되긴 했던가?


감옥보다도 못한 점


"우선 학교는 감옥이다. 어떤 점에서 학교는 감옥보다 더 잔혹하다. 예컨대 감옥에서 교도관들과 교도소장은, 당연히 읽고 쓸 수 없다면 교도관도 소장도 되지 못했을 테지만, 재소자들에게 읽고 쓰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무엇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때리거나 달리 벌을 주지도 않는다. 감옥에서는 적어도 간수들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재소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는, 끌리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주제로 강연하면서 들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다. 그대가 감옥에 있다고 가정하자. 간수들이 그대의 신체에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대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생각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게다가 간수들은 다른 재소자들에게 얻어맞거나 잔혹한 짓거리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그대를 보호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서상복 옮김,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길동무로 살아가기》, 연암서가, 64-65쪽


내가 살면서 중·고등학교 적과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은 병역거부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적이다. 외출과 통신이 금지된 것만 더해진 (자유형(刑)의 본질이 자유와 사회적 관계의 박탈이니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긴 하겠지만) 기숙사 고등학교 생활 같았던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저러한 글을 쓴 20세기 초반보다야, 감옥도 학교도 모두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 부분에서 한국의 감옥은 한국의 학교보다 낫다. 감옥에서는 수용자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폭력을 가하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제한되어 있다. 구속구를 사용하거나 생활환경이 가혹한 징벌방에 수용자를 보내는 처벌이 있으나 일단은 불가피할 때 절차를 거쳐서 집행된다. 물론 밉보인 수용자에 대해서 편법적이고 불공정하게 구속구를 사용한 신체적 처벌을 내리는 경우 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발각되면 감옥 직원이나 소장이 규탄과 처벌을 받으리란 점은 확실해서, 정당한 사유와 절차를 밟으려 하고 가혹한 행위는 은폐하기 위해 애쓴다.

반면 청소년의 경우에는 어떤가. 청소년에 대한 폭력, 체벌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2015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가정, 학교, 학원 등에서 여전히 체벌이 벌어지고 이를 딱히 감추려고 들지도 않는다. 문제가 돼서 처벌을 받으면 그게 오히려 재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청소년인권이 너~무 잘 보장돼서 문제이고, 체벌이 없어져서 요즘 애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소리나 나오려나. 〈세계인권선언〉도 〈대한민국 헌법〉도, 권리 중에서 존엄성과 차별 금지의 원칙 다음에 신체의 자유가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권리로서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존중이 이런 지경이니 우리 사회가 아직 청소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근절부터 확실하게 이루어 내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법과 권리의 입법


〈아동복지법〉은 만18세 미만 아동에게 그 보호자(친권자, 교사를 포함하여 보호·양육·교육할 의무가 있는 자, 업무·고용 등의 관계로 사실상 아동을 보호·감독하는 자)가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을 금지한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학생을 지도할 때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경기도,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는 체벌 등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렇게 법적으로 한국은 체벌 금지 국가다. (만18세가 된 고등학생에 대한 일부 체벌에 대한 법리적 공백이 없지 않으나 이 문제를 생략한다면.) 그러나 체벌이 금지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학교 체벌은 금지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도 제대로 금지된 상황은 아니지만, 가정 체벌을 포함한 모든 체벌이 금지된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 반은 넘을 거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의식 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48.7%는 체벌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 조사 중 최초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비율이 50%를 넘긴 고무적인 결과이긴 했으나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체벌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우울하다. 많은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가 그렇듯, 체벌은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허용되고 있다.

“권리라는 것은 결국 ‘양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영도 지음, 《눈물을 마시는 새 2》)이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권리는 권리가 되지 못하고 법이 사문화된다. 따라서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는 그 법이 실제의 삶을 규율하는 선이 되고 뿌리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체벌 금지를 대대적으로 선언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청소년은 참정권이 없고 ‘아직’ 시민이 아니며, 체벌 금지를 선언했다가는 친권자·교사 등의 반감만 살 거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비록 체벌의 발생 빈도나 강도는 줄어들고 있지만, 체벌 근절을 기대하기에는 전망이 어둡다. 2016년 국가인권위 조사에 의하면 학교에서 ‘직접체벌을 받았거나 목격한 경험’은 중학생 29.5%, 고등학생 27.1%, ‘간접체벌을 받았거나 목격한 경험’은 중학생 35.1%, 고등학생 36.3%나 된다. (사실 이렇게 체벌을 ‘직접’, ‘간접’ 나누는 것도 지극히 체벌을 가하는 사람의 관점이다!) 이 비율이 학생인권조례 시행 지역에서도 20-30% 선인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체벌을 지지하는 바탕이 되는,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혐오는 더 강해지는 경향마저 관찰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체벌거부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언이 결국 청소년의 신체의 자유,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 체벌을 당하지 않을 권리, 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을 권리를 입법하는 데 한 몫 하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럼으로써 체벌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과거에 있었던 체벌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사과하고, 예를 들어 공직자를 선출하고 검증할 때 그 사람의 체벌 전력을 문제 삼기도 하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리라 믿는다. 입법의 완결은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표결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나 역시, 학교에 인권교육이나 강의를 가서, 체벌의 흔적을 목격하거나 증언을 듣더라도, 굳이 나서기엔 부담스러워 같이 욕이나 하고 넘어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와 함께 노력하거나, 적어도 학교에 문제 제기라도 해야겠다.

비록 나는 청소년은 폭력을 당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나보다 여러 모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나의 분노나 짜증을 표현할 때 물리적 위협이 되는 방식이나 폭력적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때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반성한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잘못을 곱씹는다. 체벌거부선언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일이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나와 우리의 습관을 바꾸기 위한 실천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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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거부 약속하기!!
https://stophit.me


체벌거부 선언하기!!
stophit.me/speakout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7.04.27 19:24


문재인이 jtbc 토론회에서 홍준표의 "동성애 반대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럼요." "반대합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합법화 찬성하지 않습니다."(심지어 문맥상으로는 '인정'하지도 않는다.)라고 발언한 게 시끄럽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했는지 갖고서도 말이 많아서, 동영상을 직접 보면서 받아 적었다. 아래와 같다.

홍준표 "그럼 군에서 동성애가 굉장히 심합니다. 군 동성애는 이 국방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어떻습니까? 거기는?"
문재인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준표 "그렇죠?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문재인 "반대하지요."
홍준표 "동성애 반대하십니까?"
문재인 "그럼요."
홍준표 "박원순 시장은 동성애 파티도 서울, 그, 그 앞에서 하고 있는데? 서울시청 앞에서?"
문재인 "서울 광장을 사용할 권리에서 차별을 주지 않은 것이죠. 차별, 차별, 차별을 금지하는 것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거하고 같습니까?"
홍준표 "아니, 차별금지법이라고 국회 제출한 게, 이게 동성애 사실상 허용법이거든요? 문 후보 진영에서, 민주당에서 제출한 차별금지법인가 그게 하나 있는 게..."
문재인 "차별금지하고 합법화하고 구분을 못합니까?"
홍준표 "아니, 합법화가 아니고... 분명히 동성애는 그, 이제 반대하는 것이죠?"
문재인 "네, 저는 뭐, 좋아하지 않습니다."
홍준표 "좋아하는 게 아니고, 반대하냐고 찬성하냐고 물어보잖아?"
문재인 "합법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문재인의 실수/실언'이라는 변명이 많이 나오고 있다. '동성혼에 반대한다' 내지는 '군대 내 동성애(혹은 성폭력. 어떻게 이 둘이 혼동되는지 미스테리하지만...)에 반대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홍준표가 '동성애 반대하냐'라고 물으니까 대답하다 보니 표현이 꼬인 거라는 것이다. 문재인 선거운동 공보단장의 해명 역시 그런 식이다.


 

  문재인 선거운동본부가 4월 27일에 공식 발표한 입장도, 대략적으로 취지가 그런 건 아닌데 표현을 잘못했다는 논지란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물론, 문재인 후보 및 선거운동본부가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반대하는 입장인 점 등 실질적으로 인권 문제에서 이해하기도 어려운 후퇴를 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비판받을 일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실수'나 '실언'이라고 하는 해석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실수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


대선을 앞두고 교육운동 단체들이 모여서 대선 후보들에게 제안할 교육정책을 정리, 발표하기 위한 연대체가 만들어졌다. 그 연대체에서 나온 정책 제안을 보다가 놀랐는데, '18세 선거권 등 청소년 참정권 보장'은 주요 정책 과제로 들어가 있는데 정작 학교교육 문제에서 주된 의제인 학생인권 보장 등의 사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공개 원탁 토론회에서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그 연대체의 활동가이기도 한 토론회 사회자 '실수'였다고 했다. 최근에 촛불집회를 계기로 18세 선거권을 비롯해서 청소년 참정권 논의가 이슈화되어서 그걸 반영한 것이고 그러다가 학생인권 보장 등은 빠뜨렸다고...  내가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들었던 생각이, '흠 그럼 뭐 가령 전교조 법외노조화가 이슈니까 단결권 보장만 넣고 교원의 정치적 자유나 학교 민주주의 같은 건 실수로 빼먹어도 됐을 텐데...'였다.


  실수였다는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뭐, 그래 아마도 실수였겠지. 그런데 그런 '실수'는 별도의 사건이 아니고 맥락과 배경과 이유를 가진 연속성 있는 사건이다. 실수가 일어난 맥락과 배경이 개인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라면 쉽게 정정할 수 있단 점에서 차라리 다행인데, 집단적이거나 지속적인 거라면 더 문제다. 그러니까 '실수'를 그냥 실수라고 넘길 게 아니라, '실수'로부터 무엇을 읽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그 연대체에 청소년운동 단체들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런 실수가 생긴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교사/학부모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느끼는 직접적인 학생인권 사안을 넣기보다는 참정권을 넣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한 건 아닌가 의심할 법도 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인권의 문제를 절차나 참여의 문제로 축소시켜 온 것이 학생인권운동이 싸워온 오랜 악습이고 사이비 인권 담론이다.) 어쨌건 교육주체 간 중요한 갈등의 축이었고 운동 의제이자 '학생인권조례' 등으로 정책 의제이기도 했던 학생인권 문제를 그들이 어느 정도로 경시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러므로 문재인의 '실수'라는 것도, 도대체 어떤 실수인지, 왜 일어난 실수인지를 이야기해야 의미가 있다. 단지 '실수'라고만 하고 넘어가 버린다면 그것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문재인 개인이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동성애자 등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평소부터 갖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라든지 등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텐데, 나는 개인의 신념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재인과 민주당의 성소수자 및 차별금지 문제에 대한 불명확한 입장에 주목하고 싶다. 단순히 '동성애는 소수자의 문제이므로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정답 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서 제대로 입장도 갖고 있지 않고 막연하게 '차별에 반대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심지어 차별금지법조차도 오락가락하고 지금은 제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군대 내 동성애'라는 기괴하고 의미도 불분명한 조어를 계속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얼마나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토론회에서의 발언 한 번은 '실수'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실수가 보여주는 배경과 맥락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이며, 그런 점에서 '실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9.11 15:38

1995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가 나왔습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저와 둠코 님이 공저했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청소년운동과 청소년활동가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
- 과거에 청소년운동에 참여&관여했던 분들
- 앞으로 청소년운동을 하실 분들
- 학생인권조례 등이 만들어진 맥락과 역사가 궁금하고 조사해야 하는 분들
- 소수자 인권 운동이 만들어지고 발달하는 사례와 과정을 연구하고 싶은 분들


YES24  http://www.yes24.com/24/Goods/31090355?Acode=101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1320221





청소년 벗


인물로 만나는
소년운동사


저자  공현, 둠코
펴낸 곳  교육공동체 벗
발행일  2016년 9월 12일
정가  15,000원
쪽수  332쪽
책 크기 신국판(152×225mm)
ISBN  978-89-6880-027-6 (03300)
분류  사회과학 》 사회학





+ 목차


들어가는 글 | 시대를 바꾼 청소년들


1부 인간을 꿈꾸다


청소년운동의 여명기 | 김한울·나정훈
1998년 학생 인권 선언


특이한 청소년들, 세상에 말 걸다 | 박준표
2000년 노컷 운동과 2002년 선거권 운동


상처투성이 첫걸음이 남긴 것 | 장여진
2000~2001년 학생 인권 운동


2부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서


부당함은 본능이 먼저 알지요 | 박정훈
2003~2004년 NEIS 반대·청소년 참정권 운동


자치의 시대, 청소년 정치를 고민하다 | 신정현·김종민
2004년 18세 선거권 운동


기억되지 않는 ‘우리의 촛불’ | 남궁정
2005년 내신등급제 반대·두발 자유 운동


3부 존재감 다지기
 
내 법인 듯 내 법 아닌 내 법 같은 너 | 조만성(따이루)
2006~2007년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


청소년이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 한지혜(난다)
2008년 촛불 집회·2010년 기호 0번 청소년 후보 운동


일제고사만 나쁜가요? | 윤가현(꽥쉰내)
2008~2009년 일제고사 반대 운동


학교의 중심에서 인권을 외치다 | 성상영(밤의마왕)
2007~2009년 경남 지역 학생 인권 운동


4부 진도 나갑시다


간도 쓸개도 빼 주고 얻어 낸 학생인권조례를 넘어서 | 전혜원
2010~2011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 운동


날 도태시키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 김동균(어쓰)
2011년 대학/입시 거부 운동


낮추자 아니, 내놔라! | 정재환(검은빛)
2012년 청소년 참정권 운동


나가는 글 | 청소년이기 때문에


청소년운동 단체 소개
청소년운동사 연표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7.06 11:33

[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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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혐오’, 아마 당신이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소수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명명하는데 사용하는 용어로는 혐오, 차별, 배제, 폭력, 낙인 등이 있다. 모든 소수자 집단이 혐오와 차별과 배제와 폭력과 낙인을 겪고, 이 용어들의 의미는 종종 중첩되지만, 집단에 따라 그 양상이 미묘하게 다르다. 특히 어떤 집단에 대한 어떠한 대우는 특정한 용어로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거나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혐오'로 명명되어 분석된 적이 아직 한국에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청소년을 비하·경멸하고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는 청소년혐오로 해석되어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비하와 경멸은 일상에서 만연하게 드러나며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는 제도를 정당화한다. 청소년을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는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유독 나이를 강조하여 ’무서운 십대들‘이라고 수식하는 언론, 청소년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들, 청소년이 길에 모여만 있어도 무섭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드러나고 재생산된다. 이 글에서는 청소년혐오라는 용어를 소개하고,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청소년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혐오어와 체벌을 중심으로 청소년혐오 현상을 간략히 분석해보려고 한다.

청소년혐오, 'Ephebiphobia'

청소년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이론화 작업을 하는 '청소년운동 우물모임'에서는, '성인중심주의(Adultism)'에 맞선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미국의 단체 'The Freechild Project'에서 발간한 자료들을 함께 읽었다. 그 중 ‘Ephebiphobia’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가 있었다. Freechild Project는 ephebiphobia를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공포로 정의하고, 미디어와 정치, 그리고 학교 현장 등에서 만연한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전사회적 공포를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하여 거대 미디어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강화된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Freechild Project는 이 ephebiphobia가 민주주의, 사회문화, 교육, 그리고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청소년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것, 정치인이나 정치 조직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청소년을 악마화(demonize)하는 현상, 가족 안에서 부모가 청소년 자녀와 자녀의 친구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현상 등으로 결과가 나타난다. 교육의 측면에서 의무교육제도, 체벌, 학교에서의 나이(학년)구분은 ephebiphobia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19-20세기 많은 청소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자,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 사회와 어른들이 학교를 의무화하여 청소년이 낮 시간동안 거리에 모여 있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가 나이(학년)구분이라고도 설명한다. 경제 측면에서는 청소년이 의미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구조, 가게들이 ‘보호자 동행 없이 18세 미만 출입 금지’ 간판을 내거는 현상, 청소년이 거리에 많이 보이는 동네를 어른들이 피하는 바람에 상권이 변화하는 현상도 ephebiphobia의 결과라고 말한다.

우물모임에서는 위 자료를 읽고 한국 사회가 청소년을 대우하는 방식을 ephebiphobia 개념을 차용해 분석하는 것이 유의미하며, 한국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ephebiphobia를 청소년혐오로 번역했다. -phobia는 개인의 병리적인 공포증과 사회적 혐오 현상을 설명할 때 모두 쓰이지만, 비슷하게 –phobia의 결합어인 호모포비아의 경우 한국의 맥락에서는 ‘공포증’보다는 ‘혐오’로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고, 실제로도 동성애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로 번역되어 쓰인다. 공포증으로 번역하였을 때는 폐소공포증이나 첨단공포증처럼 개인의 병리적 증상을 나타내는 뉘앙스가 강해, 그것이 일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사회적 현상이라는 맥락이 옅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혐오어의 등장과 확산

다음의 말들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어떤 뜻일지 짐작해보라.
1. 급식충
2. 등골브레이커
3. 중2병

위 세 가지 단어는 최근 온오프라인에서 청소년을 지칭할 때 흔히 쓰이는 말들이다. 언어로 드러난 혐오만이 혐오의 전부는 아니지만, 혐오현상을 진단하는 데 특정 집단에 대한 어떠한 용어들이 통용되는가를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위 세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이 사회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간주하고 혐오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급식충, 너넨 무상급식 먹을 자격 없어!

급식충은 ‘급식’ ‘충(벌레)’의 결합어이다. 급식을 먹는 초․중․고 학생을 경멸하는 말이면서, 무상급식의 맥락에서 (사회에 기여도 안 하면서) 복지의 수혜를 받는 집단이라고 청소년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학생은 ‘중급식충’, 고등학생은 ‘고급식충’으로 이르기도 한다. 무상급식 먹을 자격 없다는 맥락에서 청소년을 급식충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이전에도 청소년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그러면서 특혜를 누리거나 의무를 면제받는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은 만연했다. 형사처벌의 감경을 특권으로 묘사하며, 청소년이 그 특혜를 누릴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주로 청소년이 위법한 행위를 했을 때 대중이 분노하는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의 감경을 근거로 청소년은 ‘책임을 다하지 않으므로’ 성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하기도 하는데, 청소년의 참정권을 논할 때도 성인과 동등하게 처벌받지 않는 존재가 참정권을 가질 자격이 있냐는 반응이 되돌아오는 식이다.

부모님 등골 빼먹는 등골브레이커들

(부모의)등골을 부수는 존재라는 의미의 ‘등골브레이커’도 청소년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 말은 모든 청소년이 부모의 부양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편견에 기댄 말이기도 하면서, 청소년이 부모의 부양에 기대어 살아가게끔 만드는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대신 청소년을 기생하는 존재로, 기생하면서 고마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존재로 비하하는 말이다. 청소년의 소비와 관련해서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청소년이 입시공부와 관련 없는 소비-옷, 화장품, 신발 등-를 할 때면 ‘등골브레이커’라는 딱지가 붙는다. 여성의 소비를 사치로 간주하고 남자의 돈으로 그것을 샀을 것이라 간주하며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이 청소년의 소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위 사진:2014년 '취재파일K'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 중2병이 교실과 교사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방송을 함.

중2병을 치료하자?!

중2병은 비교적 예전부터 흔히 사용되어온 말이다. 초기에는 주로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지나친 진지함이나 ‘오글거리는’ 말과 행동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점차 그 의미가 약간 변질되어 쓰이기 시작하는데, 초기의 의미에 더해 부모나 교사에 반항하거나, 우울하거나 염세적인 것, 성적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공부를 안 하는 것 등 매우 포괄적인 언행에 중2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은어처럼 쓰이던 단계를 지나 현재는 각종 언론, 심지어는 공공기관이 개최하는 강의명에도 쓰이고, 교육감 후보의 공약에서도 활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중2병이라는 병은 없다. 의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은 병인데도 이 단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며 청소년 집단을 병리화하고 있는 상황은 청소년혐오를 이 사회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방증한다.

체벌의 혐오범죄적 특성

혐오범죄는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소수자집단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의도를 가지고 소수자집단에 속한 특정 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이다. 혐오범죄 가해자가 목표하는 바는 무엇일까. 가장 큰 목표는 해당 소수자집단이 위축되거나 사라지는 것일 테지만, 자신이 마주한, 구체적인 개인으로 드러난 피해자에 대하여 목표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로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거나,‘ ~하는 행동이나 특성을 고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흡연하는 여성에 대한 구타는 여자가 길거리에서 건방지게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싶다는 욕망을 기반으로,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하는 ‘교정강간’은 성적지향을 고쳐놓고자 하는 목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체벌의 혐오범죄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체벌은 청소년으로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특성을 고치도록’ 만들기 위해 목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물론 단순히 분풀이를 위해 행해질 때도 많지만, 그렇더라도 청소년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는 관철된다). 때로는 청소년 집단이 특정 청소년이 체벌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집단 전체가 위축되도록 하는 의도를 달성하기도 한다. 교사가 굳이 반 전체 학생이 보는 앞에서 특정 학생을 체벌하는 것은 한 명을 때리지만 그 위축감을 반 전체 학생들이 공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그 반의 학생 모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고분고분해지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체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 행해지는 체벌만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벌과 혐오범죄의 가장 극명한 형태는 오히려 뚜렷한 목표를 갖고 행해지는 형태이다. 체벌은 비청소년에 의해 (어린이) 청소년에게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밝힌 그러한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자식, 교사-학생, 비청소년-청소년 간의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혐오범죄적 특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청소년혐오, 앞으로의 이론화 작업

청소년혐오는 청소년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근저에 깔린 사회적 감정이며, 나이에 따라 권리와 자원을 차등 배분하는 나이주의의 양상이다. 지면상 이 글은 청소년혐오 현상에 대해 몇몇 혐오어들과 체벌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데 그쳤지만, 앞으로 청소년운동에서는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청소년혐오의 내용을 채우고 그 개념을 활용하여 사회현상을 분석해나가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쥬리 님은 우물모임 멤버이자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91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29일 13:21:56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6.23 10:35

[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청소년 억압의 뿌리, 나이주의를 발견하다

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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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청 소년인권운동은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 ‘나이주의’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사실 나이주의(Ageism)라는 개념은 노인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서부터, 그리고 페미니즘에서까지 사용되던 개념이다. 청소년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며 ‘한 우물만 파는 모임’인 우물모임에서는 지난 1년 여 동안 나이주의에 대해 자료를 찾고 토론하며 청소년운동이 이야기하는 나이주의가 어떤 것인지 정리했다. 그 결과 중 일부를 인권오름을 통해서 공유하고자 한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 여러 가지 도전을 했던 청소년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방과 후 학습을 강요하는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헌법 소원을 내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종교 강요를 거부하며 단식을 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스타일을 획일화시키는 학교 규칙들을 바꾸려고 서명운동을 했다. 어떤 사람은 미성년자는 밤 10시에 귀가시킨다는 촛불집회 주최 측 방침에 항의하며 청소년에게도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발언했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들은 밤 12시 이후에 온라인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법에 대해 헌법 소원을 청구했다. 이들이 겪은 차별과 억압은 ‘청소년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었다. 이처럼 ‘청소년이기 때문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움직임이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청소년인권운동은 가장 근본적인 하나의 질문과 씨름해야만 했다.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과 억압은 무엇으로 인해 생기는가?’ 처음에는 구시대적인 학교 문화와 비청소년(어른)들의 편견, 유교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진행되면서는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없기 때문, 또는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없는 것이나 경제력이 없는 것 자체가 청소년 억압과 차별의 결과 중 하나라는 점에서 좀 더 거시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때문, 사회재생산 과정의 문제라는 논의로 나아갔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등의 사회 체계 자체가 원인이라는 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좀 더 세분화하여 청소년 억압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위해 ‘나이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려고 한다. (단, 정확히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

나이주의(ageism)는 성차별주의(sexism), 인종주의(racism)와 같은 맥락의 조어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나이주의는 나이에 따른 차별, 나이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의 특성을 섣불리 규정하고 그 규정을 바탕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규정 뿐 아니라 긍정적인 규정 역시 포함된다. 또한 나이주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나 인식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시장, 국가 제도, 사회 구조 전반에 존재한다.

나이는 자연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지구가 일정한 주기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사람이 시간에 따라 성장하고 노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를 나이 개념으로 파악하고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이다. 국가가 인구를 관리하고 효과적인 사회적 재생산을 꾀하기 위해서 나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현대 국가는 사람들의 나이를 셈하고 나이에 따라 학교, 노동, 결혼, 은퇴와 노년생활, 복지 체계 등의 제도를 적용한다. 이에 따라 생겨나는 나이에 대한 관념과 문화, 그리고 제도와 사회 구조가 곧 나이주의이다.

이런 설명에서 알 수 있겠지만 나이주의는 단지 청소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주의는 처음에는 노인차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이주의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사회 구조이며, 그 속에서도 도드라지는 것이 노인과 청소년인 것이다. 우리는 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청소년이 겪는 나이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나이주의는 청소년의 권력을 빼앗고, 청소년을 사회적 소수자로 만든다. 슬프게도, 나이주의는 이견이 없는 진실 내지 상식, 사회적 합의라고 받아들여질 만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상태이다. 그만큼 나이주의는 사고방식 속에, 사회 체계 속에 깊숙하게 침투해있고, 지금의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 되고 있다.

나이주의의 사례들

나이주의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가족은 대단히 나이주의적인 제도이다. 나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양식이 있다거나, 청소년은 친권자(법적으로 청소년에 대한 친권을 갖는 사람, 소위 부모 등)의 경제적 사회적 법적 통제 하에 있으며, 친권자의 판단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생각을 깨닫기에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이 널리 퍼져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친권자들은 청소년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 “애면 애답게 굴어라”
-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나한테 말대꾸 하지 마”
- “너도 나처럼 나이 먹으면 알게 될거야” / “너도 니 자식 키워보면 알 거다”

이는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관계에서 나이주의로 인해 권력차가 생긴 것이다. 청소년이 이런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권자는 나이주의로 인해 청소년의 입장보다는 청소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하며 기존의 관계를 지속시키려 한다. 국가는 친권자가 청소년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이주의적인 제도로 기존의 관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환경을 유지시킨다. 청소년의 특성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이와 같은 협력(?)으로 계속 단단하게 유지되고 있다.

또한 청소년은 정치로부터 배제되어야 하고, 정치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나이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여기에는 청소년이 아직 미성숙해서 정치적 결정을 함께할 시민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라는 것은 나이주의 체계 속에서 청소년이 부여받는 주요한 위치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치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더러운 것으로 보며 청소년이 정치에 쉽사리 휩쓸려 희생당하거나 타락해선 안 된다는 인식도 더해진다. 청소년이 타인을 속이거나 이용해먹을 줄 모르는 순수한 존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참정권 문제를 포함하여 청소년이 순수한 존재,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하는 것은 청소년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며 정치를 금지시키자는 비청소년들에게, 어떤 청소년이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선거권을 돌려줄 리는 없다. 결과적으로 국가기관에서의 판단이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강제로 막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돌려받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정치로 인해 물들어버렸다’,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의 근원이다’라는 나이주의적인 판단이 우선되면서 청소년의 요구는 묻힐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은 여전히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고, 국가는 청소년을 기르는 존재로 대할 뿐 청소년을 대변하는 정책을 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청소년인권운동은 나이주의를 통해서 ‘청소년이기에 받는 차별과 억압’을 더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주의가 무엇인지, 나이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를 계속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다.

청소년을 차별하는 나이주의 개념, Adultism

그런데 이건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의 'Freechild project’에서 모여있는 자료들은 나이주의를 ‘Adultism'이나 ’Pedophobia', 'Ephebiphobia’, ‘Adultcentrism' 등으로 부르며 청소년 프로그램 기획자나 유아의 친권자, 학생, 청소년인권 연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이주의를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다. 그 곳에서 발견한 청소년을 차별하는 나이주의(Adultism)의 정의를 간략하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청소년을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침묵하고 얕잡아보고 탄압하는, 비청소년(이른바 ‘성인’)들의 습관적인 태도·사고방식·생각·믿음·행동.
- 비청소년이 청소년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청소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청소년을 위한 행동을 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
- 비청소년들이 조직적으로 청소년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 청소년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신뢰하지 않으며 의미 있는 결정과정에서 배제하는 것.
- 청소년들에게 삶의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 것.
- 청소년 개인의 권익이 아니라 청소년 집단 전체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점을 기준으로 청소년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


Freechild project의 자료들은 위와 같은 식으로 나이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나이주의의 특징을 분류하고, 나이주의가 끼치는 영향을 소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Paul Kivel에 의하면 청소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권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규제당하고 통제당하고 학대당했고 그것이 청소년에게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내면화되어 청소년이 겪는 모든 문제를 청소년 개인의 문제로 여긴다고 한다.

Freechild project를 운영하고 있는 Adam Fletcher는 나이주의로 인한 비청소년 중심적인 시선이 결국 청소년 본인에게까지 옮겨져 “나이 어린 비청소년(little adults, 청소년 본인이 아니라 ‘만들어진 어른’에 가까운 사람)”현상을 일으킨다고 주장했고, 청소년에 대한 차별을 언어 차별, 청소년활동에서의 차별, 학교에서의 차별, 사회에서의 차별로 분류하였다.

청소년 프로그램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John Bell은 청소년을 통제하려 하는 나이주의가 학생을 억압하는 교칙과 법률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어린이 발달문학과 교육담론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또한 나이주의로 인해 존중받지 못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는 것은 점점 그 고통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결국 다른 억압에도 마찬가지로 무감각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Freechild project는 나이주의를 뛰어넘기 위한 여러 실천사항들을 풍부하게 제안하고 있다. 나이주의와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소개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교육안까지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Freechild project의 자료 중에서 사람들이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나이주의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았더니,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 비청소년에게 하는 것처럼 청소년에게도 눈을 맞추며 성의를 다해 이야기하라.
- 비청소년에게는 쓰지 않을 말들을 청소년에게만 쓰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라.
- 타인에게 나이주의를 지양하는 자신의 방식을 드러내고 권유하라
- 나이주의에 저항하는, 특히 청소년 당사자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라
- 비청소년의 나이주의가 어느 수준인지, 어디의 문제인지를 파악하자.
- 나이주의를 고수하는 비청소년에게 청소년을 향해 분노를 표출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자.
- 다른 비청소년들에게 나이주의에 대해 탐구하자고 요청하고 동료를 모으자.


한국에서도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에서 주최한 ‘꼰대와 동지 사이, 나이주의를 고민하다’ 워크숍에서 나이주의 사전을 만들며 나이주의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밝힌 적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인권오름에서 기사 <[인권교육, 날다] 허깨비 같은 나이주의, 개념으로 잡아내다>로 다뤄졌고, 이 워크숍에서 만들어진 나이주의 사전은 다듬어 다시 발표되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나이주의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거듭하고 있다. 다음 순서부터, 나이주의의 한 현상으로서 청소년혐오와 한국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나이에 따른 서열과 ‘예의’ 문제 등을 소개할 것이다. Freechild project에서 나온 말처럼, 반(反)나이주의의 가치를 정리하고 전파하다 보면 청소년 억압의 뿌리가 분명 뽑힐 것이라고 믿는다.


* 여기서 말하는 청소년은 주로 0세부터 만 19세까지인, 실질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필부 님은 노원지역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와 청소년운동 우물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오름 제 490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22일 13:40:23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3.24 13:34

[공현의 인권이야기] ‘소비자’의 권리를 넘어서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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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소비자여야 하는가 아닌가

“우리가 교육의 소비자인데 학교/교사가 우리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학생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만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간혹 듣게 되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교육을 ‘서비스’로 보고, 학교도 ‘교육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수요자(소비자)의 요구에 맞추라고 하는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 속에서 학생들이 겪는 현실은 모순적이다. 어느 서비스에서 소비자, 고객을 그렇게 막 대한단 말인가.

물론 답은 명확하다. 어느 대학 총장이 “학생은 피교육자일 뿐”이라고 밝혔듯이, 교육의 그림 속에서 학생들은 소비자가 아니다. 그 친권자‧부모들이 소비자일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차라리 ‘상품’에 가까운 위치다. 교육의 결과물로 Before(이전) After(이후)를 보여줘야만 하는 존재들. 노동자처럼 밤늦게까지 학교나 학원에 붙잡혀 공부를 해서 ‘스펙’을 높여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임금이나 노동3권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성적을 입증하고 전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제발 소비자 정도의 대우만 받아도 좋겠다.”라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는 과연 학생이 소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을 반대해온 사람들은 교육소비자니 교육수요자니 하는 말 자체에 경계심부터 가지고 보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육을 시장적 모델로 보게 되고 경쟁과 차별이 만연하고…’ 하는 이야기 말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소비자이면 안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매력에 따른 차별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공교육은 일단은 많은 부분이 무상이라서 와 닿는 소리는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험은 대개가 ‘제법 괜찮은’ 것이다. “손님은 왕이다” 같은 말로 대표되듯이 많은 감정노동자들의 친절과 봉사도 받을 수 있다. 물론 불량한 제품과 서비스 제공, 알 권리 무시 등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겠지만 수는 적은 편이며, 소비자는 그런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 결국 ‘학생인권 보장’이라는 게 학교가 학생을 고객처럼 모시는 것, 또는 학생이 소비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도 생겨난다.

시장주의적 접근, ‘소비자’ 모델이 가지는 한계를 나는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곤 한다. “소비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의결할 수 있나요?” 소비자는 구매력이 있다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고 봉사를 제공받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 중에서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소비자는 기업의 바깥, 결정과 생산 영역의 바깥에 있다. 만일 학생이 소비자라면, 학생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교육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참여할 권리도 없을 것이고, 학교의 편의에 따라 소비자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지금 정부가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듯이. 우리가 민주적인 학교를 요구하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그것은 ‘소비자’의 위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애초에 ‘교육’이라는 과정은 교사에 의해 제공되는 서비스를 학생이 받기만 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소비자’라는 개념에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위 사진:교육청의 시각을 보여주는 홍보포스터

소비자에 머물지 말아야 할 이유

운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도, 정부가 인권이나 복지를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을 ‘소비자’처럼 생각하는 많은 경우와 마주치게 된다. 여러 복지정책이 그렇고, 심지어 정치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이제는 ‘정치 소비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소비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소비자로서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를 보면, 학생들이 소비자 대우라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정치소비자협동조합’을 표방한 조직이 직접민주주의와 능동적 참여를 주창하는 것을 보면 약간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문제점도 명확하다. 먼저 구매력이 적은 사람들은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일례로, 거대 정당들의 주류 정치인들은 이번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표가 적을 것 같아 보이는’ 성소수자보다는 혐오세력에 동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밖에도 많은 소수자들, 표가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의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 아예 정치구매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논외가 되어 버린다. 경쟁은 ‘공급자’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표로 정치를 사고, 정치인들이 표를 받고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를 ‘판매’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보편적 인권 보장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표의 주인을 넘어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 ‘소비자’는 함께 참여하고 만들고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다. 주어진 상품들 중에서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함께 만들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일견 소비자는 많은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선택할 권리 말고는 많은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본래 왕은 단지 좋은 대접을 받고 호화로운 의전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의 주권자이며 결정권자이다. 왕은 ‘고객’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비자’와 ‘왕’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많은 경우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소비자의 권리 이상으로 주인의 권리가 필요하고, 평등한 참여와 공동의 연대(책임)가 필요하다.

상품이나 노예, 없는 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의 자리는 신분상승처럼 느껴지기 쉽다. 모든 것이 시장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위치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권은 ‘소비자’의 권리와는 다르다. 인권운동이 ‘소비자 마인드’를 경계하는 것은 단지 시장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그 걸로는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야기하고 추구하는 인권은 그 이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78 호 [기사입력] 2016년 03월 23일 18:37:31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6.02.18 15:57

[공현의 인권이야기] 청소년운동? 청소년‘인권’운동?

인권, 함께해서 좋지만 또 조금 부담스러운 그것

공현



“노동인권운동이라고 안 하고 노동운동이라고 하고, 여성인권운동보다는 여성운동이라고 더 많이 쓴다. 성소수자운동도 그렇고. 그런데 왜 우리는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더 많이 쓰지?”

우 리가 하고 있는 운동을 소개할 때면 이런 소박한 의문을 느끼곤 한다. 그냥 단체의 이름에 인권이 들어간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의 중요한 과제는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진영을 만드는 일이었다. 2006년 만들어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그 목표로 “△청소년인권운동 내부의 일상적 소통 강화, △청소년인권운동의 전략 마련과 현안 대응, △청소년인권활동가 역량 강화를 위한 배움터 개설과 연구 작업, △민간 청소년인권운동 진영의 형성”을 꼽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사실상 막연한 이미지와 말만 있던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것을 내외적 실체를 가진 것으로 쌓아올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소수자운동이나 정체성을 표방한 운동들은 인권 이야기를 주로 하더라도 굳이 ‘인권’을 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운동이라는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우리는 ‘인권’을 운동의 정체성으로 표방해야 했던 것일까? 우리는 왜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청소년단체, 청소년운동의 ‘전통적’인 뜻

“청 소년운동”이란 단어로 책이나 논문 검색을 해보면, 청소년 운동(Sports) 선수에 대한 내용들 외에도 은근히 많은 내용들이 검색 결과에 나온다. 그것들 대부분은 대학 청소년학과나 청소년지도사에 관련한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소년운동이 청소년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2004년에 나온 <새 시대 청소년운동의 방향>이라는 책 소개를 보자. “청소년관련 정책과 청소년문제, 청소년 육성 등에 대한 청소년운동의 지침서.” ‘청소년운동’이란, 오랜 시간 동안 청소년을 육성하고 선도하며, 청소년들의 건전한 사회 참여를 조직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선교와 종교적 훈련 활동을 가리키기도 했다. 다양한 청소년수련활동들이나 국제교류, 자원봉사활동 등이 대표적이다.

‘청소년단체’란 말도 마찬가지다.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는 현재 청소년기본법에 의해 지원을 받는 특수법인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청소년운동의 대표격인 연합 조직인데, 그 회원단체 목록 중 눈에 띄는 몇 개만 나열해보자면 이러하다. 어린이재단, 서울가톨릭청소년회, 대한적십자사청소년적십자, 대한불교청년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합, 한국스카우트연맹,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 한국해양소년단연맹, 한국화랑청소년육성회, 흥사단 등. 이런 이름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청소년단체라는 개념 역시 청소년 당사자들의 조직 또는 청소년들의 권익과 해방을 위해 운동하는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YMCA나 적십자, 보이스카웃 등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육성하고 수련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청소년단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청소년운동> (이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기존에 사용되어 온 의미의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으로, 내가 하는 청소년의 권익과 해방을 위한 운동은 청소년운동으로 표기하겠다.)의 이러한 의미와 용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소년운동’ 속에서 소년보호/소년수양(계몽)/소년해방의 담론이 혼재했지만, 결국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계몽하고 교육하는 운동이 주류가 되면서 소년운동의 맥을 이어받은 광복 이후의 <청소년운동> 역시 이러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근대 국가가 청소년들을 관리하고 보호하고 사회화시키려는 기획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마치 장애인의 인권을 주장하고 행동하는 운동이 대두되기 이전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장애계’, ‘장애단체’라고 불리던 상황과 비슷한 셈이다.

따라서 청소년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흐름이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이후로, 이러한 오래된 <청소년운동>과 선을 긋고 새로운 개념으로 운동을 정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념들이 대두되었다. 일부에서는 1980년대 고등학생운동을 이어받은 ‘학생 운동’으로 이야기했고, 일부에서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았고 계속 쓰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청소년인권’이라는 단어 역시 <청소년운동>이나 국가기구에 의해서 전용되기도 하지만, 청소년운동이 주로 인권/기본권의 언어를 사용해왔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다룬다는 점, 인권 자체가 가지는 해방적인 의미, 그리고 인권운동의 연대에 힘입어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위 사진청소년운동은 '인권', '우리도 인간이다' 등을 주된 운동의 언어로 사용해왔다

인권, 계속 붙이고 갈 것인가?

청 소년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에는 그 개념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다. <청소년운동>과의 구분점으로 청소년 당사자성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당사자성만을 강조하는 운동으로는 청소년 정체성의 특성상 운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했다. 우리가 스스로 청소년인권운동이라는 개념을 가지면서 어떤 운동인지 누구와 함께하는 운동인지 등이 더 분명해졌고 운동이 계속 이어져올 수 있었다. 인권운동의 이해와 연대와 지원 속에서 청소년운동이 성장해올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이 담고 있는 자유와 평등, 해방을 향하는 지향성은 청소년운동의 소수자운동이자 사회 보편적 문제를 다루는 운동으로서의 주장을 벼리고 체계화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인권’이 붙어 있었기에 청소년운동은 여기까지 왔으며 청소년운동에게 인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 나 청소년운동이 청소년인권운동으로 스스로를 부르고 인권을 주된 언어로 사용하며 운동을 하는 것이 과연 괜찮을지, 머뭇거리게 되고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는 점들도 있다. 첫 번째, 인권이라는 단어로 운동을 규정하면 우리 사회가 인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와 편견들도 함께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은 왠지 훌륭하고 착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나오고, 청소년 대중들에게는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운동인 것 같다는 거리감도 가지게 만든다. 인권이 주로 헌신적인 구호활동이나 법에 관련된 활동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도덕적이고 엘리트적인 운동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더 많은 청소년 대중들을 조직하고 함께하는 운동이 되기에는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런 걸림돌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 ‘인권’의 언어로는 청소년운동이 다루는 문제들을 모두 다 포괄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물론 청소년들의 자유와 평등의 문제는 대부분 인권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권익에 관련되거나 의견을 내야 할 문제는 그밖에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교운영이나 교육정책에 대해 의견을 낸다고 할 때 학교의 학사일정이나 교과목 구성에 대해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인권의 언어만 가지고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여러 학생들이 민주적으로 의견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학생들에게 과도한 학습 부담이 가해져선 안 된다는 등의 원칙 정도만 말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구체적 의견들은 여러 여건을 고려하며 학생들의 토론을 통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청소년운동이 더 조직화하고 발전하여 청소년들의 집단적인 요구와 의견을 표출하는 운동이 된다고 하면 ‘인권’ 외의 문제들도 다루게 될 것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부르기는 다소 어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주류적인 인권 담론이 청소년운동의 청소년인권 주장과 불일치하는 면들이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국제인권법 등의 내용이 현재 한국의 현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 그만큼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국제인권법에는, 아직 크게 쟁점이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들도 있다. 예를 들면 가족을 사회의 기초 단위로 보고 보호하려는 관점이나, 청소년의 노동 금지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나, 청소년보호를 위해서 문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내용 등 말이다. 국제인권법의 규범과 해석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져왔고 그 안에도 다양하며 때로는 모순되는 입장들이 병존하고 있다. 청소년(아동)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청소년(아동)관과 인권적 원칙에 따른 입장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인권 담론이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권위를 얻을 수 있고 여러 유용한 지원도 받을 수 있지만, 인권을 밀고 나갔을 때 우리 운동이 미래에는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되고 가능성을 제한받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든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나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운동을 가리키는 이름에 대해서는 ‘청소년인권운동’보다는 ‘청소년운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이는 <청소년운동>으로부터 ‘청소년운동’이란 말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어느 활동가는 수십 년, 거의 100년 가까이 된 용례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을 거라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청소년운동은 인권과 계속 함께 가겠지만, 이름도 그렇고 인권이 청소년운동의 어느 위치에 어떤 모양새로 있어야 적절한 건지는 운동의 발전과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다른 소수자운동들이나 사회운동들은 어떤 고민과 역사들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다. 여하간,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인권’자를 빼고 청소년운동으로 부른다고 해서 다른 인권활동가들이 서운해 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74 호 [기사입력] 2016년 02월 17일 15:58:43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4.27 11:44

[2030 잠금해제] 10년째 두발자유 운동 중 / 공현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8489.html



2005년 5월 다시 한번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청소년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것도 그해였다. 그래도 그땐 두발자유화가 금방 될 줄 알았다. 헤어스타일은 개인의 자유로 보장되어야 할 문제이고, 학교들은 규제를 할 그 어떤 합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으니까. 길이든 색깔이든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같았다. 같이 활동하던 지인이 “두발자유를 위해 뼈를 묻을 각오가 있느냐”는 낯간지러운 질문을 했을 적에 나는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정말로 뼈를 묻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길어야 10년 정도면 되겠거니, 그렇게 막연히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 5월이면 이제 내가 두발자유 운동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된다. 10년째 두발자유 운동을 해온 셈이다.






이걸로 한겨레 2030 잠금해제 연재가 끝났네요.

작년 5월부터 딱 1년, 총 13번을 썼던가 그런데. 저에게 지면을 내주고 원고료도 줬던 한겨레 신문사에 일단 감사드리고, 읽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3.30 15:05

어린이책시민연대 소식지 원고로 청탁받아서 쓴 글이에요







체벌이 인권침해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체벌금지 관련 현황

  UN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대해 아동체벌금지를 처음으로 권고한 것이 약 19년 전, 1996년의 일이다. 그 뒤에도 ‘모든 곳에서의 체벌금지’는 한국 정부에 대한 단골 권고 사항 중 하나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에서 체벌금지 문제는 제대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선 학교 체벌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 김대중 정부에서 학생인권에 대해 최초로 논의를 했으나 교사 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체벌을 정당화하며 체벌 도구 등을 지정하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그 뒤 수많은 학교에서의 체벌 사건과 희생자들, 그리고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행동들 위에 학교 체벌금지가 공론화됐다. 2011년에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서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학교 체벌금지 조항이 명시됐다. 경기도, 서울, 광주, 전북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 역시 학교에서의 체벌금지를 명시했다.

  이런 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학교 체벌금지도 뭔가 딱 떨어지지 않는 불투명한 점이 많은 실정이다. 교육부는 시행령을 개정해놓고도 직접 때리는 방식이 아닌 다른 체벌은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들에선 체벌이 일어나고 있고 ‘때리는’ 형태의 체벌 역시 교육청과 교육부가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음에 따라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학생인권조례의 체벌금지가 상위법 위반이라 무효라는 주장까지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이다. 실제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여러 조사에서 50~60% 가량은 체벌을 경험한다고 답한다. 경험 빈도나 정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는 경향이 있으나 경험 비율 자체는 여전히 상당히 높아서, 체벌의 근절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학교에서 체벌과 달리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가정에서의 체벌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경험 비율은 학교에 비해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부모나 친권자의 지도권 행사로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점으로는 학교 체벌 이상이다. 그것이 적절한 양육 수단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이를 금지한다거나 아동-청소년의 인권 문제로 접근하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2012년 제정된 서울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금지하는 조항이 있지만 서울시에서는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아서 그 존재감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에 각종 아동학대 관련 제도가 강화되면서 그 해석을 두고 가정체벌도 학대법 적용 대상인지 말이 나오고 있는 정도다. 이에 관해 정부의 입장은 역시나 불투명한데, 법무부 등은 ‘체벌은 ‘학대’와 구분해야 한다‘, 즉 체벌은 허용된다는 입장에 가깝다. 반면 검찰과 경찰은 아동학대 관련 법을 체벌 사건에도 일부 적용한 사례가 있었다.

  학교와 가정 외에 학원이나 교습소, 그밖의 장소에서도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체벌은 가해지고 있다. 예컨대 거리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청소년을 어른이 ‘훈계’ 차원에서 체벌하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는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학원에서도 조사에 따라서 25~40% 정도의 청소년들이 체벌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학원에서의 체벌 등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폭행일 뿐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일부 지역 교육청에서는 조례에 학원에서 학원생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고 학원체벌 금지 입장을 천명했으나, 사회적 용인 분위기 때문에 단속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체벌금지가 제대로 되고 있는 영역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실질적으로 체벌을 없애는 문제로 들어가면 더 심각하다. 한쪽 편에서 미디어 등이 체벌이 사라져서 문제인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것이다. 체벌에 대한 대중적 논란은 “그래도 뺨을 때리는 건 좀 아니지”라든지, 좀 심각한 수준의 체벌이 되냐 안 되냐 하는 감정적인 판단에 그치고 있다. 종종 ‘체벌’과 ‘처벌/징계’ 자체를 혼동하는 모습마저 보이는 것은 체벌에 대한 대중적 공론화가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리고 체벌이 사라지거나 금지되지 않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체벌 그 자체에 긍정적이고 관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과 인권침해의 기준


  체벌의 대략적인 정의는, 어떤 잘못에 대해 징계하거나 개선시키기 위해서 신체적 고통이나 불편함을 주는 처벌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체벌 외에도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수치를 주는 처벌 역시 체벌과 같은 범주에서 반(反)인권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다. 국제인권기준에서 체벌이 인권침해이며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인정되어온 내용이다. 2009년 유엔고문방지협약 특별보고관은 고문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국제 규약이 ‘교육 또는 훈육수단으로서의 체벌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확대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고서에 담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한다는 점에서 체벌을 고문과 같은 범주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보고관은 “국제법적으로 체벌은 가장 예외적인 상황에서조차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금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는 단순 명확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처벌은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사라져야 한다. 형법에서도 태형 등의 신체형이 사라지고, 징역형 등 자유형/감금형이 일반화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존재 자체인 신체에 고통을 가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인권의 본질,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린이․청소년 역시 평등한 인간이며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린이․청소년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폭력, 특히 약자에 대한 폭력을 반대한다면 체벌은 허용될 수 없다. 직접 폭행을 하는 것이든, ‘손 들고 서있기’나 ‘엎드려뻗쳐’, ‘오리걸음’ 등의 신체적 고통을 주는 벌을 가하는 것이든 모두 폭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행위를 예컨대 상사가 부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손님이 서비스노동자에게 한다고 하면 그것이 폭력이라고 판단하는 데에 별다른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유행하는 말로 ‘갑질’이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독 특정한 관계나 신분 속에서만 폭력이 폭력처럼 보이지 않곤 한다. 어린이․청소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 착시 속에는 어린이․청소년들을 온전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잘못’을 했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근력이 약한 어린이․청소년은 반격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나, 미성숙한 그들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있다(=비난받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크다.

  앞서 체벌이 고문과 같은 범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다른 차원에서도 체벌 문제는 고문 문제와 닮아있다. 가령 고문을 없앰으로 인해 경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증거 수집과 처벌에 실패하는 일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고문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과학수사나 다른 수사기법을 발전시켜서 해결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체벌을 없앰으로 인해 교사나 부모(친권자) 등의 훈육과 통제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길 것이며 바라는 대로 통제와 교육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체벌을 옹호할 이유가 되는가? 다른 교육 방식이나 기술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고문과 체벌의 차이는, 단지 고문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체벌은 얼마든지 선택 가능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결국 체벌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것은 저울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인권침해와 폭력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갖고 있고,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체벌과 학대 : 누구의,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체벌은 학대의 한 유형이며 사회통념상 허용되어온 체벌이란 약한 수준의 학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체벌이라고 여기는 행위이든, 학대라고 여기는 행위이든, 부정적 자아정체성과 공격성 및 폭력선호도를 증가시키는 등의 부작용은 동일했다. 그러나 여전히 체벌이 학대의 부분집합이라는 규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어보더라도 곰곰이 따져보면 행위만을 가지고 학대와 체벌을 나누는 기준선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체벌과 학대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기준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가해자의 의도’이다. 아이를 위해 선의를 가지고 한 것은 교육적인 체벌이고, 아이를 괴롭히거나 악감정을 가지고 한 것은 학대라는 식인 것이다. 그래서 학대 가해자는 종종 악마화된다.

  이런 논변은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행위의 정당성을 행위의 내용이나 피해자의 경험이 아니라 가해자의 의도를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데서부터 커다란 잘못이다. 가해자의 의도는 참고 사항일 수는 있어도 폭력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학대인지 아닌지를 논할 때 재판에서는 주로 ‘사회통념’이 언급되곤 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애매모호하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회통념’이 판단 근거가 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노릇이다. 거기에서도 역시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폭력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고려가 없거나 부족하다. 특히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 자체가 비청소년들 위주로 만들어진단 걸 생각하면 이는 가해자 중심의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행위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인가, 피해자가 신체적 고통이나 모욕감을 느꼈는가, 그런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현재 개념상 아동학대는 어린이․청소년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행위라고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상적 발달’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소극적으로 해석한다면 눈에 띄는 신체 손상이나 질병 없이 자라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폭력을 경험하고 폭력에 우호적인 성격이나 공격성을 가지게 되거나, 차별과 폭력을 내면화하게 되거나, 인격의 존엄성을 짓밟히는 경험을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이 인간과 인권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비폭력적이며 자유로운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을 ‘정상적인 발달’의 목표로 삼는다면, 체벌은 충분히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행위, 곧 학대라고 판단할 수 있다.

  사실 의학적인 영역에서든 교육학적인 영역에서든 체벌이 부작용이나 위험이 크고, 기대할 만한 효과가 별로 없다는 연구 결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이고,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체벌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것이 손쉬운 방법이고, 어린이․청소년이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폭력에 우호적인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고 연대 없이 뿔뿔이 파편화된 관계 속에서, 어린이․청소년 당사자들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저들을 좀 때려주라며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체벌에 찬성한다는 사람 중에 바로 자신이 체벌당하는 경우를 상정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 다른 누군가에게 체벌을 해달라는 것이었지.) 체벌은 인권침해일 수밖에 없을 뿐더러 다른 면에서도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체벌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떤 조치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이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세상, 어떤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3.30 14:35
걸어가는꿈2015.02.12 20:53
게임 셧다운이 아니라 학습시간 셧다운!
학생에게도 휴식을…<아수나로>의 다섯 가지 제안
<여성주의 저널 일다> 묵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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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학습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현실을 지적하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청소년의 삶과 권리에 대한 고민과 제안을 담은 이 기사의 필자 묵은지님은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낯섦’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 학교

 

모 든 것이 낯설어야 했다. 0교시 시작 시간에 늦지 않으려 새벽부터 일어나는 것도, 가파른 등교 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도, 턱없이 짧은 점심 시간 안에 배를 채우려 먹을 것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에 졸지 않으려 제 손으로 뺨을 찰싹 찰싹 때려가며 앉아있는 것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교문 밖을 나서는 것도.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공간에 처음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그 모든 것은 낯설어야 했다.

 

하 지만 나에겐 낯섦을 느낄 귄리조차 없었다. 부족한 수면 시간에 하루 종일 눈 밑이 퀭해도, 급하게 먹다 체한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학교는 ‘왜 아직 적응하지 못했느냐’고 도리어 나의 낯섦을 타박했으니까. 결국 신입생들 대다수는 생존하기 위해 모든 것에 순응하며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그리고 곧 그들이 처한 모든 부조리에 무심해졌다.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 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했다. 그 ‘낯섦’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이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거나, 교실 한 구석의 이방인이 되거나,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나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탈학교를 결심해 지금은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새삼 학교 안에서 받는 고통을 해결하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은 ‘학교에 있지 않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씁쓸하기도 하다. 학교 밖으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것을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학교 안에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까.

 

과잉 학습으로 채워지는 학생들의 시간

 

학교가 이렇게 끔찍한 공간이 된 이유 중 하나는, 학교가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   2010년 발표된 통계청의 생활 시간 조사 ‘학생의 학습 시간’ 통계  © 아수나로 제공

 

2010 년에 발표된 통계청의 생활시간 조사 ‘학생의 학습 시간’ 통계에 따르면, 한국 고등학생의 평일 평균 학습 시간은 10시간 47분이다. 주말의 시간까지 합쳐 계산하면 학생들은 주당 약 64시간을 오로지 학습만을 위한 시간으로 쓰고 있다.

 

또 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실시한 ‘2013년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 연구’에서는 일반/특목/자율고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의 평균 수면 시간은 5.5시간이었다. 이들 중 절반에 육박하는 48.4%가 평일 여가 시간이 1시간이 채 안 된다고 답한 것으로 발표됐다.

 

▲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와 전교조에서 실시한 ‘2014 전국 학생인권 실태 조사’   © 아수나로 제공

인 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실시한 ‘2014 전국 학생인권 실태 조사’ 결과도 살펴보자. ‘방과후학교,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을 강제로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자주 있다’가 37.8%, ‘가끔 있다’가 16.1%로, 총 53.9%의 학생들이 강제 학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실태 조사들의 결과를 묶어 요약하면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오로지 학습을 위해서 소비하고 제대로 잘 수도, 쉴 수도 없으며 이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은 이를 강제적으로 하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휴식 시간이 부족한 게 게임과 스마트폰 탓?

 

사실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런데 기성 세대가 이 문제에 대해 파악한 원인과 해법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학생들의 휴식 시간이 부족한 것은 밤 늦은 시간에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게임 셧다운제’를 시행하고 스마트폰 규제 앱을 만들어 학생들을 통제하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처한 환경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해결책이다. 학생들의 휴식 시간이 지켜지기 위해서 규제해야 할 것은 게임도, 스마트폰도 아니다. 바로 ‘과도한 학습 시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입시경쟁 교육 속에서 폭주하는 학습 시간을 사회적으로 규제하자는 운동이다. 노동 시간에 제한을 두듯이, 적절한 학습 시간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만들고 학생들의 시간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수나로가 주장하고 있는 요구를 소개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진행중인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 

①  오전9시 등교 오후 3시 하교, 하루 6시간 학습!

 

‘별 보고 학교 갔다 별 보고 집에 온다’는 말은 이미 익숙한 문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학교는 학생들을 하루 온종일 한 자리에 붙잡아 놓고 학습만을 강요한다.

 

2009년 OECD 국가들의 15-24세 평균 학습 시간은 1주일에 33.92시간이었다. ‘하루 6시간 학습’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 13-14시간을 학교에 붙잡아두는 것이 이상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②  방학일수 늘리고, 수업일수 줄이고!

 

길어봤자 4주가 조금 안 되는 방학, 그조차도 보충이다 뭐다 하면 방학이 1주일이 채 넘지 않는 학교도 굉장히 많다.

 

방학은 쓸모 없는 시간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여유롭게 쉴 수 있는 꼭 필요한 기간이다. 법에 정해진 수업일수 역시 현재의 ‘190일 이상’이 아니라 180일~185일로 줄여야 할 것이다.

 

③  보충, 야자, 학원 등 강제 학습 금지!

 

대 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도, 하고 싶지 않은 보충 수업과 학원 수업을 듣도록 강요당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학생보다 부모나 교사의 의견이 훨씬 더 중요시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학생의 시간은 학생의 것이다. 학생의 의견에 반하는 강제 학습은 사라져야 한다.

 

④  야간, 주말, 휴일엔 학생들도 휴식을!

 

밤 10시가 넘어가도 온통 환하게 빛나는 학교 건물들, 주말에도 어김없이 등교하는 학생들…. 이런 풍경들은 부지런함의 상징이 아니라 슬픈 교육 현실의 상징이다. 모두가 쉬어야 할 야간, 주말, 휴일에는 학생들 역시 쉴 수 있도록 학교와 학원의 문을 닫아야 한다.

 

⑤ 과잉 학습으로 밀어 넣는 경쟁교육 개혁!

 

위 의 요구들을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학습 시간을 줄인다고 학교를 일찍 마치게 하면 사교육이 더욱 횡행할 것이다’, ‘학습 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 입시경쟁 교육, 학력 차별과 학벌 차별, 무한 경쟁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수업을 줄이고 사교육을 규제한다 해도 학생들의 실질적인 학습 시간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경쟁 교육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목표이다.

 

청소년에게 밤과 휴일의 시간을 보장하라

 

▲  아수나로 광주 지부에서 진행한 캠페인  © 아수나로

<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교육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는 ‘과도한 사교육’이 단골처럼 불려 나왔다. 그리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강화하는 것이 주된 해법 중 하나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청소년들의 삶과 학습 부담에 대해 간과한 접근이 아니었을까?

 

공 교육 역시 입시경쟁 체제 속에서 학생들에게 공부할 것을 강요하고, 과도한 학습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이미 너무 긴 학교 수업 시간과 수업일수를 줄이자는 주장을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공교육과 사교육을 막론하고 야간 학습, 휴일/주말 학습을 없애서 학생들이 밤과 휴일만은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학 생들에게 더 많은 공부를 하도록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인 학교, 가정, 사교육 등에서 모든 강제 학습을 없애자는 주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하루 6시간을 기준으로 학습 시간을 실질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또한 경쟁교육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도 담아서, 과도한 학습 시간을 유발하는 근본적 원인을 함께 개혁해나가자는 메시지 역시 전하고자 한다.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교육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학생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문제인 ‘학습 시간’이라는 이슈를 통해, 학생들의 삶을 중심에 둔 교육 운동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누 구나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면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낯섦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설렘이라고 치환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겪는 것들에 대한 설렘. 지금의 학교는 그러한 감정들이 허용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저 공부만을 쉴 틈 없이 강요하는 학교가 아닌, 제대로 된 여유와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슴 뛰는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꿈꾼다. 우리의 교육 운동이 학교에서의 낯섦을 허용케 하는 순간을. 그리고 상상한다. 그 공간에서의 벅찬 설렘을.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5.02.08 15:02

[벼리]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①

검은빛, 공현, 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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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청소년 운동이 지금 놓인 현재와 고민, 그리고 새롭게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거나 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담겨있습니다. 인권오름에서는 선언에 담긴 내용과 그에 대한 설명과 맥락을 다양한 사람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다만 웹으로 글을 읽을 때의 한계로, 부득이하게 하나의 글을 두개의 글로 나누어 담습니다.

2015년 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청소년활동가마당’이 열렸습니다. 지난 2014년에 처음 ‘청소년활동가마당’을 연 뒤 횟수로 두 번째였습니다. 청소년활동가마당은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청소년운동의 의제나 활동들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청소년활동가들이 모여 교류하고 토론하자는 취지로 열린 활동가대회 성격의 행사입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 여긴 어디? 나는 누구?>는 그 제목 그대로 청소년운동의 현주소와 청소년활동가들의 현재를 함께 확인하는 자리로, 청소년활동가들 30여 명이 각 단체의 활동을 공유하고, 질문과 고민을 나누고 토론을 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의 마지막 순서는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셋째날에 기획단이 미리 준비해온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 초안을 놓고 수정 및 보완하는 토론을 했으며, 참여자 중 자신의 이름이 이 선언에 명기되는 것에 동의한 활동가들의 연명으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기획단에서 굳이 선언을 제안하고 채택한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개별 단체 소속을 넘어 ‘청소년활동가’로서, 함께 청소년운동의 목표와 현재를 명문화된 형태로 발표하자. 둘째, 새로 청소년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청소년운동이 어떤 것인지를 안내해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자. 셋째, 청소년운동과 부대끼고 있거나 청소년운동을 잘 모르는 다른 운동/활동가들에게 청소년운동에 대한 내용을 좀 더 합의된 형태로 제시하자. 청소년운동의 단체와 흐름들이 다양해지면서, 한 단체의 강령이나 운동원칙 합의 정도로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언은 총 11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이 그간 논의해온 수많은 의제들과 고민들을 모두 내용으로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적으로 함께 인식해야할 중요성이 있는 내용들을 모아 만들게 됐습니다.

선언의 전반부는 주로 청소년운동이 무엇인지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청소년에 관련된 단체나 활동이 여러 종류가 있고 ‘청소년’ 자체의 개념도 모호한 까닭에 대체 무엇이 또는 어디까지가 청소년운동인지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선언을 통해서 청소년운동의 정의와 방법론 등 그 중심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시선, 또는 청소년운동과 다른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 등을 다루는 내용이 있습니다. 운동의 정체성이란 다른 이들과의 관계나 외부로부터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을 보는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고, 청소년운동의 정치성과 독립성, 연대성 등의 원칙과 성격을 적었습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그 이름 그대로 2015년 시점에서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과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청소년운동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면서 새로운 문제의식과 발전한 내용을 담은 선언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을 통해 청소년운동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길 바라는 한편으로 그런 변화의 여지 또한 염두에 두시길 청합니다.

2015 청소년활동가 선언

지 금 우리의 청소년운동은 새로운 기로에 서있다. 청소년운동은 쌓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더 깊어지고 다양해진 목소리와 실천을 바탕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청소년운동의 새로운 모습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등과 같은 새로운 과제와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운동의 존속에만 급급하던 시대를 넘어, 이에 더해 발전과 변화 또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해방을 위한 경로를 찾기 위해서는 현재 위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해 있는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청소년운동 안팎으로 알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는 <2015 청소년활동가마당 - 여긴 어디? 나는 누구?>에 참여하여 청소년운동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를 마무리하며, 우리들은 각자의 소속 단체를 떠나서, 한 사람의 청소년활동가로서 청소년운동에 대해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우리의 청소년운동이 서있는 위치와 걸어갈 방향, 그리고 걸음걸이를 밝히고자 한다.

1. (청소년운동의 목표)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 차별, 폭력, 착취에 저항하며, 청소년들이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개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2. (청소년의 정의)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은 사회에 의해 ‘미성년’이라고 구분되는 모든 사람들이다. 연령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제도적․관습적․문화적 구분의 기준이 청소년운동의 당사자를 결정한다. 그 범위는 대개 만18세~20세 미만이 되며, 경우에 따라 더 적은 나이나 더 많은 나이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3. (청소년의 성격) 청소년은 소수자인 동시에 보편적인 집단이다. 현재 청소년인 사람은 사회적으로 억압과 차별을 받는 소수자의 위치에 있으나, 모든 청소년은 언젠가 청소년이 아니게 되며 모든 비청소년은 한때 청소년이었다. 또한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계급성을 가지지만, 그러면서도 속한 가족의 계급의 영향을 받는다. 청소년은 한 마디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한 채 유예된 존재이다. 청소년운동은 단지 현재 청소년인 사람들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투쟁할 뿐 아니라, 특정 연령의 사람들을 ‘청소년’으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현상과 사회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4. (청소년억압의 성격)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국가와 자본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생각되며,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수단, 또는 미래를 준비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청소년억압은 신체적・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을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맞춰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억압의 대표적인 사회구조는 학교와 가족이다. 학교제도는 청소년이 자본주의적인 경쟁 및 차별 논리,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국민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현 가족제도는 청소년을 친권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고 양육과 생존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계급을 재생산한다. 학교와 가족뿐만 아니라 비청소년 중심의 각종 제도와 문화 역시 청소년억압의 중요한 요소이다.
5. (청소년 안의 다양성) 청소년들은 단일한 존재들의 모임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계급, 성(性), 사상 및 이념, 신체적 상황, 그밖에 다양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각자 다른 억압을 경험한다. 청소년은 여러 차원의 중첩된 억압을 겪는 존재이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은 다양한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저항한다.
6. (청소년운동의 주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소년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이다. 청소년 당사자가 정치적인 힘을 가진 주체로 나서고 연대를 통해 집단적인 세력이 되는 것은 청소년해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소수의 엘리트나 ‘선한 어른들’이 청소년해방을 대신 이루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청소년운동과 나이주의)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에 반대한다. 나이주의는 연령에 따른 위계, 나이에 따른 차별 등의 문화와 제도를 가리킨다. 청소년들은 나이주의에 의해 사회 전반에서 차별과 억압을 겪기에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나이주의는 운동사회에도 존재하며, 그로 인해 청소년활동가들은 동등한 활동가로서 존중받지 못하기도 한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이 나이를 이유로 운동의 참여가 제한되거나 업무에서 배제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평등하게 참여하고 활동가로서 존중받으며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조직 구조와 문화를 지향한다.
8. (청소년운동의 정치성) 청소년운동은 정치적인 운동이다. 사회를 운영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결정하는 모든 과정이 정치이고, 따라서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겪는 일상적 억압과 차별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이에 저항하는 청소년운동도 정치적인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주장하며, 정치적 활동이 청소년이 접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반대한다.
9. (청소년운동의 독립성) 청소년운동은 다른 운동에 종속되지 않은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에 ‘배후’가 있다고 여기거나, 청소년활동가들이 다른 비청소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자 거짓이다. 또한 청소년운동은 다른 사회운동의 ‘준비과정’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동등한 사회구성원이므로 청소년의 사회적 참여는 당연한 것이지 특별하거나 대견한 일이 아니다.
10. (청소년운동의 고유성)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만의 문제의식과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 청소년억압은 다른 구조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관점에 의한 정세 판단과 가치 기준, 우선순위를 갖고 활동한다.
11. (청소년운동의 연대성) 청소년해방은 인간해방과 분리되지 않는다. 청소년억압은 우리 사회의 각종 억압적인 구조와 제도,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청소년운동은 우리 사회의 인간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한다. 그리고 인간해방과 우리 사회 전체의 변화를 위해 청소년운동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청소년운동의 지향을 함께 선언하며,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모든 청소년의 해방을 향해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와 단체에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도, 해방을 위한 단결의 필요성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운동과 구별되는 고유한 청소년운동을 하면서도, 청소년해방은 전체 사회구조의 변혁과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투쟁에 연대할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활동가이고, 우리의 옆에는 청소년해방을 함께 이루어낼 동료가 있다. 우리는 더욱 많은 청소년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많은 청소년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투쟁할 것이다.

2015년 1월 15일
※ 이름 뒤의 단체명은 참여자의 소속 단체를 참고삼아 알리기 위한 것이며,
해당 단체가 공식 입장으로 이 선언에 참여했다는 뜻이 아님을 밝힙니다.
검은빛(관악청소년연대여유), 공현(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난다(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델라(관악청소년연대여유), 둠코(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루블릿(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마카롱(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목성돼지(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미쁨(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박씨(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별다(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선우(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윤서(희망의우리학교), 이응이, 자유(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쥰(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최준호(중고생연대), 치이즈(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플린(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필부(노원지역연합청소년인권동아리화야), 하루유키(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호야(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덧붙이는 글
검은빛 님은 관악청소년연대여유 활동가 입니다. 공현 님은 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입니다.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5 호 [기사입력] 2015년 02월 05일 14:20:47


















[벼리] ‘2015청소년활동가선언’을 소개합니다②

검은빛, 공현, 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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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주]

'2015 청소년활동가선언'은 청소년 운동이 지금 놓인 현재와 고민, 그리고 새롭게 청소년 운동을 시작하거나 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담겨있습니다. 인권오름에서는 선언에 담긴 내용과 그에 대한 설명과 맥락을 다양한 사람에게 들려주려 합니다. 다만 웹으로 글을 읽을 때의 한계로, 부득이하게 하나의 글을 두개의 글로 나누어 담습니다.

선언 해설

먼저, 선언의 앞머리에는 청소년활동가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과 문제의식을 담았습니다. 짧게 보면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청소년운동은, 정치적 권리 부재와 경제적 독립의 어려움이라는 청소년 집단의 특수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지속하고 성장시켜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 운동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결의로 성장해온 청소년운동은, 이제 불충분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속가능한 운영과 활동가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지금이 앞으로 더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문에서는 선언이 나온 그런 현실 인식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1. (청소년운동의 목표)
2. (청소년의 정의)
3. (청소년의 성격)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운동’이라고 하면, 청소년들을 선도․보호․육성하는 종류의 단체들이 많이 떠오르고 ‘청소년단체’라고 하면 여전히 그런 단체들이 주류입니다. 청소년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는 우리의 운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일부 충돌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실 1920년대에 ‘소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운동이 청소년에 대한 보호․교육과 청소년 해방,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함께 안고 있던 것에서부터 예언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선언 1항에서부터 청소년 해방을 운동의 목표로 명시하며, ‘청소년운동’이라는 이름을 재정립하기를 바랐습니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이 무엇인가 역시 설명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는 그것이 어떤 자연적인 나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분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운동이 특정한 세대의 성격이나 문화(청소년들은 순수하다, 정의롭다, 충동적이다, 발랄하다 등)로 인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 억압이라는 사회구조에 맞서는 지속적인 운동이라는 것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적 특수성이 있습니다. 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청소년 집단은 소수자이며,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소수자이지만, 청소년기의 경험과 억압은 모든 사람들이 겪고 (보통은 미화되거나 왜곡되곤 하지만)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보편적인 성질을 지닙니다.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을 철폐하는 일은 전체 인간의 해방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4. (청소년억압의 성격)
5. (청소년 안의 다양성)
다음 4항에서는 ‘청소년억압’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억압이 단지 비청소년들의 고정관념이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논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유교 문화, 신자유주의, 권위주의 문화 등 다양한 것들이 거론되었었지요. 이번 선언에서는 청소년억압의 원인을 국가와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어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서 자본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청소년기를 희생당하는 것을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나아가서 억압적 사회구조에 맞춰서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라고 짚어봤습니다.
청소년기는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와 구조를 내면화하도록 요구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기본권을 억압당한 채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과 차별 등을 내면화합니다. 또한 핵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은 미성년 자녀의 권리를 그 보호자에게 양도하는 친권제도와 청소년의 성과 생활에 대한 통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청소년들에게 계급재생산/상승을 위해 사회에 순응할 것을 종용하고, 양육의 책임을 부모 개인에게 떠넘기기도 하며,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굴레 속에서 자녀의 삶을 책임지고 관리하느라 가정과 가부장에 종속되게 만듭니다.
5항에서는 청소년들이 여러 다른 조건에 놓여 있기에 여러 중첩된 억압을 겪는다고 적었습니다. 이는 청소년들이 겪는 다양한 억압에 복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들이 단지 청소년억압에 대한 인식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거나 대처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5항에 관해서는 무엇을 조건의 예시로 나열할지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졌는데요. 초안에서는 일단 청소년운동이 지금까지 다루어온 경험이 있는 계급(경제상황)이나 성(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을 나열하자고 제안했고, 이에 더해 몸과 마음의 문제를 대표격으로 넣어서 사상 및 이념과 신체적 조건(예를 들어 장애, 외모 등이 얘기됐습니다.)을 명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6. (청소년운동의 주체)
6항은 청소년운동의 주체를 다룹니다. 준비 과정에서는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을 다룬 항과 주체를 다룬 항이 따로 있던 것을 논의 끝에 합쳐서 만들어진 항이기도 해서, 방법론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의 주체는 청소년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이지만, 청소년 당사자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청소년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인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활동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청소년으로서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으며, 운동에서 늘 가장 중요한 주체가 ‘당사자’인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체마다 회원 자격이나 운영 방식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청소년 당사자의 주체적 활동은 청소년운동에서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7. (청소년운동과 나이주의)
7항은 ‘나이주의’에 대한 것입니다. 나이주의적 제도나 문화는 청소년이 미성숙·무능력하다는 편견에 따라 많은 억압과 차별을 가하며 보호라는 미명 하에 청소년의 경험과 참여를 차단하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사회 안에서도 이런 나이주의 문제에 부딪히고,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청소년활동가들은 이런 문제로 다른 운동에 몇 차례 항의를 하고 사과를 요구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서울교육감 후보를 뽑는 경선과정에서는 청소년들을 배제하는 결정에 반발하여 연대체를 탈퇴했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주의가 청소년운동이 다른 운동과 함께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 중 하나라고 보고, 이런 청소년운동의 문제의식을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선언을 기획하던 과정에서부터 반드시 넣어야 할 내용으로 상정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청소년 집단 내의 나이주의에 대해 특별히 더 언급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나이의 차이로 인한 위계가 특히 심각하기도 하니까요. 청소년 집단 안의 나이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대체로 동의가 되었지만, 청소년 집단이 그러한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현상은 나이주의 외에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나이주의에 관한 항에서만 특별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는 의견에 따라 따로 담지는 않았습니다. 청소년운동 단체들의 여러 조건상 이를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단체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8. (청소년운동의 정치성)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에 관한 항 중 대표적으로 들어간 것이 정치성에 대한 것입니다. 청소년운동은 종종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제도권의 정치 등에 참여하면 순수성을 잃는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청소년해방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입니다. 넓은 의미의 정치도 그렇고, 좁은 의미에서 정부나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 사건 역시 국가의 정책과 법률, 예산 배분 등이 모두 관련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의 정치’를 할 것이고, 또 청소년들이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에 반대합니다. 또한 청소년운동이 여러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도 봅니다.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은 각자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겠으나, 적어도 청소년운동이 정치적인 운동이며 또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9. (청소년운동의 독립성)
청소년운동을 바라보는 관점 중에 가장 힘을 얻는 것은 사실 청소년운동을 다른 데 종속된, 독립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어른들에게 의존적이라는 편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수언론 등 한쪽에서는 청소년운동에 어떤 배후 세력이 있어서 청소년들을 조종하고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이른바 진보적인 운동을 한다고 하는 쪽에서도 사실상 궤를 같이 하여 청소년운동을 마치 다른 운동의 준비과정이고 청소년활동가들은 나이가 든 이후에 당연히 (대학생운동이든 청년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뭐든) 다른 운동을 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들에 대해 대견하거나 기특하다고 말하며 우리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이고 평등한 사람이라고 본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양쪽 모두에 문제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선언 9항에 이와 같은 내용을 넣었습니다.

10. (청소년운동의 고유성)
11. (청소년운동의 연대성)
선언 중 마지막 항들은 청소년운동과 다른 운동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청소년운동이 좀 더 청소년운동 자신의 이슈에 집중해야 하는가, 또는 좀 더 다른 사회운동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이는 청소년운동 내부에서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사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언에서는 청소년운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을 고유하게 가진다고 했고, 청소년억압의 문제가 독자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선 강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소년운동이 전반적인 사회의 변혁과 인간해방을 위해 타 운동과 연대해야 할 필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청소년운동의 고유성과 연대성 중 어떤 것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활동가마다 판단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정도의 차이이고 강조점의 차이였기에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선언에서 “청소년운동으로서” 고유한 판단을 토대로 하여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로 고유성과 연대성에 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검은빛 님은 관악청소년연대여유 활동가 입니다. 공현 님은 대학입시거부로삶을바꾸는투명가방끈들의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입니다.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입니다.
인권오름 제 425 호 [기사입력] 2015년 02월 05일 14:30:36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10.12 01:04

[논평] 무엇을 위한 기숙사인가,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라!

 

 

과도한 학습시간으로 휴식시간이 부족한 기숙사 학생들

 

휴식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한국의 학생들은 과도한 학습시간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PISA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의 일주일 학습시간은 OECD 평균 33~34시간 정도인 데 반해한국은 49시간에 이른다또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일주일에 약 70시간평일 하루 약 10시간 이상 공부를 한다.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너무나 이른 등교시간과 그에 비해 늦게 끝나는 정규수업, 거기에 더해지는 방과 후 학교,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으로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오로지 입시 경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의 교육 현실 속에서, 기숙사 학생들은 비기숙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습에 투자하길 강요받고 있다. 그들은 적절한 휴식시간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그나마 있는 휴식시간마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쉬기도 어렵다. 이에 관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부(이하 인천지부’)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휴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과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숙사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휴식권은 잘 보장되고 있을까?

  


수면시간을 선택할 권리

 


먼저, 휴식에 있어서 잠을 언제, 얼마나 잘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본인에게 적절한 수면 시간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그 시간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천지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수면 선택권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모든 학생들은 기상 및 취침시간이 똑같고, 이 정해진 시간을 강제적으로 지켜야 한다.

 

심지어 인천지부가 조사한 학교 중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하여 학생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해준 A(미추홀외고 1학년 재학 중)기숙사 내에 감시 장치가 층별로 2~3개씩 설치되어 있다사감실에 폐쇄회로 텔레비전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가 있다. 평소에는 많이 보지 않는 것 같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새벽 3시까지 모니터를 보며 소등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잡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해진 취침 시간 이후의 개인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수면을 취하고 싶지 않은 학생도 강제로 취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수면 시간을 누군가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될 경우 이것은 학생이 자율적으로 휴식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 휴식권 침해이다. 

   

 

학습을 위한 도구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기숙사의 모든 생활은 오로지 학습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휴대폰 사용은 학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고, 노트북은 학습을 위한 용도가 아닌 이상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휴식시간에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싶은 학생들은 기숙사 규정에 의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제한받는 것이 옳은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휴식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보낼 것인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이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이들에게 전자기기를 학습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길 강요하고 있다.

  


기숙사 학생들의 휴식을 제한하는 모든 규정을 없애라!

  


학생들은 본인의 휴식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강제적으로 정하지 말아야 하며,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학생들의 취침여부를 감시해서는 안 된다. , 전자기기와 휴대폰 사용을 포함하여 학생들이 휴식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요구한다. 인천지역 기숙사 학교들은 학생들의 휴식권을 침해하는 모든 규정을 없애라!

 

더불어, 인천시 교육청 역시 책임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청은 학생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책임져야 하며, 학교가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했을 경우에 마땅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제기한 기숙사의 여러 문제점들을 간과했다는 것은 분명히 각성할 일이다.

 

인천시 교육청에 촉구한다. 기숙사 학생들의 휴식권이 보장되는지 감시하고, 휴식권을 보장하지 않는 학교들에 대해서 적절한 제재를 가하라!

 

  

 

 

 

2014. 10. 06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부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9.16 03:27
걸어가는꿈2014.08.11 00:07
걸어가는꿈2014.06.02 14:57

[논평] 세월호 참사가 교육에 남긴 교훈
- 교육감 선거에 즈음하여
경쟁교육과의 결별과 학생인권 보장 없이 안전한 학교란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세월호에 과적된 탐욕과 부패만큼이나 무거운, 이 나라의 조직적 무책임과 지독한 반인권성을 목도해 왔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단 하나로 돌릴 수 없듯, 참사로부터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할 교훈이 하나로 수렴될 순 없다. 다만 이틀 앞으로 다가온 교육감 선거에서 후보들이 앞 다투어 학생 안전을 책임지겠다 호언장담하는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가 우리 교육에 남긴 교훈을 환기해본다.


침몰한 세월호는 침몰해버린, 지금도 침몰하고 있는 학교의 모습과 정확히 닮아 있다. 이윤을 위해 각종 안전조치를 삭제해버린 국가의 모습은 입시 효율을 위해 최소한의 학생인권 보장 조치마저 밀어내버린 탐욕의 교육과 겹쳐진다. 심야 학원교습을 제한하는 조례도, 학생인권조례도 불필요한 규제로 공격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나마 있던 안전조치마저 깡그리 무시했던 선박회사는 눈치껏 또는 대놓고 학생인권을 짓밟는 학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올해 우리는 세월호뿐 아니라 순천에서 일어난 교사의 체벌로, 진주 기숙사학교에서 일어난 학생통제형 폭력으로, 그리고 모욕과 절망 끝의 자살로 수많은 학생들을 잃었다. 학생들이 갇힌 채 야간학습을 강요당할 때, 대자보가 찢기고 징계 위협이 뒤따랐을 때, 차별과 모욕으로 휘청거릴 때, 세월호에서처럼 국가는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것이 흔히들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다고 말하는 '웃음꽃 핀 교실'의 현재 모습이다. 비극적 일상을 내버려두는 한, 비극적 참사는 이미 예비되어 있다. 학교는 과연 안전한가.

이번 참사는 희생자들 중 학생들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다. 이는 학생들을 권력위계 속에 편제하는 현 교육의 무능함과 체계적 훈육의 잔혹한 결과를 만천하에 드러낸 모습이었다. 입시를 위한 허약한 공부만이 허락되는 사이, 삶에 대한 지혜와 사회에 대한 통찰을 일깨울 '삶을 위한 교육'은 학교로부터 추방당했다. 전문가나 권위자의 지시에 복종하는 태도만을 훈육해오는 사이, 정부와 학교가 지시하는 대로 잠자코 가만히 있기만을 강요당해온 사이, 학생도 교사도 질문하는 힘, 판단하는 힘을 빼앗겨왔다. 희생된 학생들은 '어른들의 말만 믿고 얌전히 기다린 착한 학생들'이 아니라, '권위자의 지시와 통제에 무력화된 학생들'이었던 셈이다. 참사 이후 학생들에게는 애도할 여유도, 애도할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교사들의 입과 손발에도 족쇄가 채워졌다. 숨은 붙어 있으되 사회적 생명체로서의 존엄은 빼앗긴 공간, '가만히 있으라'는 통제만 넘실대는 공간, 잘못된 지시와 권위를 의심할 자유를 빼앗긴 공간, 학교는 과연 안전한가.

수학여행을 금지해 학생들의 발을 묶고, 안전 점검과 안전 교육을 아무리 강화한들 비극을 멈출 수는 없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가르쳐준 교훈은 스스로 판단할 자유,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자유가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해병대 캠프 참사 역시 학생들에게 원치 않는 캠프를 거부하고 위험한 지시를 거부할 자유가 보장되었다면 피할 수 있던 사고였다. 안전할 자유, 그것의 다른 이름이 학생인권이다. 교육에 의해 목숨을 잃고 상처받는 학생들의 비극적 일상 역시 진정한 학생 안전 대책이라면 학생인권정책을 포함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희생된 학생들에 대한 범사회적 애도가 학생인권에 대한 지지로 화답되어야 할 이유다.


학생인권 정책에 대한 국가의 악의적 훼방을 여러 해 목도해 온 지금, 국가를 향해 다시금 학생인권법을 제정하고 학교를 제대로 감독하라 요구한들 먹힐지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국가의 의무를 촉구하는 동시에 스스로 변화를 일굴 자유와 책임이 있다. 경기, 광주, 서울, 전북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시민들이 일군 결실 가운데 하나다. 경쟁교육과의 결별과 학생인권 보장 없이 안전한 학교란 없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 교육에 알려준 교훈이 교육감 후보들을 검증하고 향후 교육정책을 견인해낼 기준이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여 학생·청소년이 아닌 분들을 포함하여 세월호 희생자들 모두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과 생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014년 6월 2일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

강원교육연대/ 건강세상네트워크/ 경기학생인권실현을위한네트워크/ 경북교육연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관악동작학교운영위원협의회/ 광주교사실천연대 ‘활’/ 광주노동자교육센터/ 광주비정규직센터/ 광주여성노동자회/ 광주인권운동센터/ 광주인권회의/ 광주청소년인권교육연구회/ 광주청소년회복센터/ 광주YMCA/ 교육공공성실현을위한울산교육연대/ 교육공동체 나다/ 국제앰네스티대학생네트워크/ 군인권센터/ 노동자연대 다함께/ 녹색당+/ 대안교육연대/ 대한민국청소년의회/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동성애자인권연대/ 무지개행동 이반스쿨팀/ 문화연대/ 민주노총서울본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불교인권위원회/ 서울교육희망네트워크/ 서울장애인교육권연대/ 서초강남교육혁신연대/ 시민모임 즐거운교육 상상/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양평교육희망네트워크/ 어린이책시민연대/ 원불교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법률공동체 두런두런/ 인권운동사랑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공무원노동조합서울지역본부/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부설 한국아동청소년인권센터/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진보교육연구소/ 진보신당연대회의 청소년위원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청소년다함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 통합진보당서울시당/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학벌없는사회/ 학생인권을위한인천시민연대/ 학생인권조례제정경남본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흥사단교육운동본부/ 희망의우리학교/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5.28 20:35





학생 휴식에 관한 서울지역 학생 설문조사

기간: 2014년 5월 17일~6월 14일
대상: 서울지역 중·고등학생 누구나
방법: http://rest.asunaro.or.kr/ 에서!


2014 서울, 학생 휴식은 안녕?
질높은 삶을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과 휴식이 필요하죠!
누구나 적절한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휴식과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환경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학교, 학원, 숙제, 야자... 제대로 쉬기엔 방해물이 너무 많지 않나요?
선생님, 부모님의 눈치없이, 공부와 시험의 압박없이 잘 쉬고 있나요?
학생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기 위해서, 설문조사에 참여해주세요!


[어떻게 발표 되나요?]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http://rest.asunaro.or.kr/ 에서 참여하세요!

[결과는 언제 발표 되나요?]
2014년 7월 8일 화요일 오후1시, (시청역)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설문조사 발표회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발표회입니다. 학생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려요!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5.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3.30 22:48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입니다. 수신거부는 hwalgy@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http://cafe.daum.net/Life2010   |   http://hwalgy.tistory.com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3.21 22:10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889346&start=slayer



『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글들 등을 모은 책이 나왔다.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요청을 받아서 급히 써서 보낸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이 책 막바지에 실려 있다. 다만 내가 책에 원고 싣는 걸 동의하는 서류 몇 가지를 까먹고 못 보내서 내 이름이 안 실렸다 -_-;;;; 책 제일 뒤에 이 원고(두 개로 나뉘어 실렸음)를 보시면 제가 썼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하다고들 답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안녕하지가 못한 기분이 듭니다.

  2013년에, 한 중학생이 코치에게 목검으로 ‘체벌’을 당한 뒤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청소년이 가족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죽은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맞아서’ 죽은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쉽게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다들 너무나 안녕히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학교폭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 사회이지만 말입니다.

  꼭 직접 때리고 죽게 하는 것만이 폭력인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폭력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을 원격으로 감시하고 조종하는 각종 어플리케이션들, 청소년의 게임 및 인터넷 이용 등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책들, 청소년들의 정보를 마음대로 수집하고 이용하게 하는 ‘학교밖청소년정책’ 등. 청소년들의 생활을 국가가 학교가 친권자가 나서서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가며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는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성적을 높이기 위한 공부. 교육이 아닌 입시와 경쟁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공부시간 속에 청소년들에게는 쉬고 놀 시간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봤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학교 수업시간이란 무의미하고 괴로운 시간 때우기일 뿐입니다. 성적 때문에, 입시 때문에, 공부 때문에 청소년들이 죽고 불행해져도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말합니다.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성적으로 학교로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문제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생들의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8년째 해왔습니다. 제가 하기 이전부터 있던 역사를 돌아보면, 약 15년은 두발자유화를 요구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발자유는 멀게만 보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몇 지역에서만 두발규제가 완화되거나 사라졌을 뿐, 다수의 지역과 학교들에는 두발규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발자유 하나조차도 15년 동안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 살고 있어서 저는 도무지 안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참 안녕하게 살아갑니다. 두발자유 그런 것은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서요.

  이번에 여러 청소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대자보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고등학교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그 대자보를 철거하고, 학생들의 의견 표현을 짓밟았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에 대자보를 붙여본 적이 있었고, 징계를 하겠다는 위협도 당해보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서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고등학교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청소년자유언론을 만들어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들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지금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규칙과 편견에 막히고 기본적인 말할 자유조차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물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옆의 삐딱선에서

  제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생각한 것은 내가 안녕하냐 아니냐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삐딱한 생각이었습니다. ‘안녕하냐고 묻고 답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데도 자격 유무가 갈리는 것일까?’ 누구는 대자보를 금지당하고, 대학을 거부하거나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안녕하냐는 대자보를 붙일 마땅할 공간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격’은 사람에게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에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철도민영화는,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는 일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며 이루어지는 송전탑 건설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어집니다. 청소년들의 삶의 현실은, 모두에게 안녕하냐고 물을 중요한 일이 아니냐고.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각종 억압과 폭력과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찌 안녕하실 수 있냐고 물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거냐고. 학벌과 학력과 성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러분은 안녕들 하시냐고. “청소년들이 ‘체벌’이라며 여전히 폭력을 당하고 두발단속을 당하는 이 끔찍한 세상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이 어색하게 들리신다면, 안녕하냐고 물을 수 있는 ‘주제’ 역시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차라리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제대로 물을 수도 답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모두의 문제, 공공의 문제랍시고 불려나올 수도 없는 문제들입니다. 정치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는 청소년 같은 소수자들, 그리고 공공의 문제라고 생각조차 안 되고 있는 현실들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적어도 청소년인권의 문제,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의 문제 등을 가지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저는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사랑하기에 저는 참으로 안녕하고, 행복하기도 하겠지만요.)

  그러므로 안녕들 하냐는 질문에 대해 제가 삐딱하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그 질문은, 정말 모두에게 묻는 것입니까? 모두가 물을 수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