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9. 5. 27. 03:02


저기 저 사람은 얼마나 삼킨 말이 많았으면
저렇게 길가에 붉은 내장을 토해놓을까
저기 저 사람은 얼마나 삼킨 눈물이 많았으면
저렇게 길가에서 하얀 눈물을 토해놓을까

토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저 사람
강아지도 잠꼬대에 떠나버리고
아무도 부축하는 사람이 없이
검은 아스팔트에 토해내는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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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9. 4. 15. 14:53



비의 이유

내 한때 묵묵히 무거운 몸 이끌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햇살과 바람과
발작소리 말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
모두를 내속에 담아두려만 했다

그러나 끝내 끝끝내
후두둑 무너지고 만 것은

무너져내리고 만 것은
어제밤 달무리가 유독 아름답게 번졌기 때문도 아니요
개구리들 그토록 서럽게 서럽게 울었기 때문도 아니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게 흔들렸기 때문도 아니요
새들조차 고개 숙인 채 낮게 날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내 혈관 하나
하나에 번져있는
누군가의 눈물들 증발한 눈물들
알콜섞인 오줌발로 튀어오르고
거리에서 물대포로 뿜어지고

땅 밑을 흐르며 들어야 했던
소리들 비명소리들 울음소리들
그런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일 뿐이었으니

후두둑 무너지는 것
그건 단지 다시 무너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떠돌고 떨어져내리고 만나고 다시 떠도는
슬픈 과정을 위해서일 것이다



-------------------------------------------------------



며칠 전에 착안해서 이러쿵저러쿵 살을 붙여본 것인데
사실은 바람과 구름에 대한 인상이 먼저였고... 그 다음에 자연스레 비가 연결된 건데
어느새 비가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구름이 비가 내리면서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형상화해보려고
아래로 올수록 행의 길이가 짧아지고 음보가 줄어드는 걸 구상했는데
쓰다보니까 너무 귀찮아서 포기 -_-;;;

물에 대해 좀 더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초점이 흐려질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길게 끌고 가기엔 내 내공도 딸려서... '물'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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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9. 3. 6. 03:26


낯선 얼굴 낯선 별

내 곁에 누워 있는 얼굴은 오직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낯선 얼굴 뿐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낯선 얼굴은 낯설기에 말이 없다

한구석에 등 댈 땅을 포기하고서
별 하나 없이 불투명한 밤을 헤아린다
하나하나 눈을 뜨는 낯선 별들
어떡하면 꿈이 덜 무서워질까
어떡하면 별들이 덜 낯설어질까

얼굴에 난 머리칼들 헤아린다
머리칼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본다
한움큼씩 뜯어낸다 토끼풀처럼
너의 얼굴 구석에 겨우 낯익은 별 둘이 뜬다











농성장 당번이라서 농성장에서 밤을 보내던 때 초안을 잡은 시.
왠지 마지막이 좀 가학적으로 읽힐지도?;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닌데-
예전에 인터뷰할 때, 표 씨가 관계맺음은 어느 쪽에서인가 먼저 상처를 줄 수밖에 - 그러니까 폭력적인 개입을 감행해야 성립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 느낌에 가깝달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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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9. 2. 21. 22:50



2월 14일 신도림에서


0
죽음에 달리는 주석들이
지하철 가판대를 장식하고
말이 필요 없는 죽음이란
사치스럽기만 한 어느 날
한 세입자가 신도림역 앞을 걷고 있네

1
검붉은 아스팔트 위에 늘어서
밋밋하게 으르렁대는 차들은
신도림 영등포 노량진을 지나 용산까지 가고
용산에서 으르렁대는 경찰버스들도
검붉게 도열한 전의경들의 구호도
차들을 밟고 밟고 메아리쳐오네
주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본문보다도 더 길게 외치고 있네

2
구석진 어디는 축축하게 썩어가는 반지하
닫을 수도 없는 창문 너머로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면
죽은 척하는

매년 2월 말이면 골목골목을 떠도는 세입자
벼룩시장을 기웃거리는 벼룩 같은 삶은
500만원 뚜껑 아래서 폴짝이고 있네

3
여기저기 주석이 달린 죽음들과 검붉은 정체
골목골목을 떠돌며 썩어가기를 준비하는 세입자
신도림과 용산 사이보다도 더 가깝게 다가오는 숨소리들









2월 14일에 일단 올려둔 시를 고쳐서 다시 올린다. 아직도 마지막 행은 좀 스스로 흡족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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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9. 2. 9. 23:30



정전기

춤을 춘다
머리칼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흔드는 바람도 없고
손대는 사람도 없이
자기끼리 하늘하늘 속삭인다

혼자서 위태한 몸을 맞대고
어디로도 흐를 수 없는 감정을
혼잣말로 하늘대는 삶을 배웠다

하얀 겨울은 고요하지만
검게 먹먹한 머리카락은
들리지 않는 정전기
내 귀만 따갑게







오랜만에 싸이 미니홈피를 뒤지다가 발견한 시... 스스로 그렇게까지 맘에 썩 들진 않아서 블로그엔 안 올렸었나?
여하간 옛날에 썼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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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1. 23. 02:35


너는 홀로 촉촉했다


너에게 손을 대면 촉촉했다
때로는 파랗게 때로는 빠알갛게
감추지 못한 습기들이 묻어나왔다

비는 오지 않았다

너는 샘처럼 홀로 촉촉했다

숨막힌 개구리가 뺨을 비비며 울어도

비는 오지 않았고
너도 울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둔 습기를 너는

단지 홀로 숨쉬고 있었다



------------------------



초안에서는 빠알갛게 가 아니라 바알갛게 였지만 빠알갛게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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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야..하다? ㅋ;;

    2008.11.26 19:1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렇게 읽힌다면 그것 또한 이 시의 의미겠지;;
      그런 걸 의식하고 쓴 건 아니지만;

      2008.11.28 03:04 신고 [ ADDR : EDIT/ DEL ]
  2. 이런게 바로 심의 대상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선정적이고 음란한 것’(?)

    그리고 작성자의 특징 상,
    ‘범죄(소위 반정부 집회 및 행동)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반사회적/비윤리적인 것(권위 부정)’

    Tag로 봇 돌아다니는거 조심해.

    2008.12.02 07:51 [ ADDR : EDIT/ DEL : REPLY ]

어설픈꿈2008. 10. 25. 21:39
지하철 안에는

지하철 안에는 시선이 희박하다
희박한 시선에 시선의 희박에
사람들이 질식할 법도 하건만
살아남은 우리는
허약하다

지하철 안에서는 허가받지 아니한
잡상인의 물건을 구입하지 말라고
짐짓 존댓말로 겁을 줄 때
허가받은 광고들은 시선을 쫓아낸다

도망친 시선들을 좇아가는 건
조금씩 떨고 있는 아픈 물방울



- 서울 지하철에서는 얼마전부터 지하철 기초질서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내 성범죄 근절 같은 것들은 당연히 환영할 일입니다만... 그 기초질서 항목들 속에는 폐지를 수거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며 신문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지 말라고 하거나, 허가받지 않은 상인 분들의 물건을 사지 말라고 하거나, 구걸하는 분들에게 동정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지하철을 타면 어디로 시선을 두든 눈에 들어오는 온갖 광고들이 더 끔찍합니다. 폐지수거하는 분들, '잡상인'들, 구걸하는 분들, 이런 분들을 모두 철거해버리는 기초질서란 건 정말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집니다. 휴- ㅠㅠ
\


(옛날에 쓴 시인데 이사할 때 안 옮긴 걸 깨닫고 뒤늦게 주워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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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08.10.28 16:09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10. 2. 22:38

임시 야간 숙소 (1931년)


                   - 베르톨트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방법이 있기에 한겨울에 동사(凍死)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줄어들 것이고 또 누군가는 한순간이라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자에게 나는 분노하거나 냉소하겠지.
그 알량한 투쟁으로 누구를 행복하게 해왔느냐고 물어보겠지.
누구누구를 행복하게 해왔노라고 하면
그것이 저 사람들이 자신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

저 사람들은 착취의 시대를 짧게 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겠지. 그러니까 그것을 근거로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겠지, 나나 당신처럼.


나는 항시 다른 사람에게 별로 상처주지 않고 그렇게 하는 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 한비야 씨나 테레사 씨 등을 보다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부러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타자화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 나 자신이 그러한 '자선'을 정치적으로 부정하는 쪽에 속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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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

    저거 너가 준 만화책에 나오는데.

    2008.10.04 00:08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와 동시에 그 사람들은 그저 그런 것에서 머무르기 마련이지.
    테레사가 정치적으로 어떤 의도로 그런 자선을 해왔는지를, 그런 종류의 자선이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를.

    2008.10.14 01:07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 것에 머무르는 걸 비판하는 게 우리의 위치지만, 그러나 그 비판이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은 그리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는 비판이겠지.

      2009.05.28 12:29 신고 [ ADDR : EDIT/ DEL ]

어설픈꿈2008. 8. 29. 20:56


흘러가기


너에게로 가는 길이면 유독
버스는 침착하게 흘러간다

버스에 실려서 간다 나는
때론 실려서 흘러가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다는 걸 안다

종이에 받아쓴 도로의 굴곡은
묻어둔 신음들의 질곡이 되고 어느새
질곡은 기울어진 바람이 된다

어제부터 휘청이는 바람이
너와 나 사일 비껴가는 바람이
바람을 맴도는 말들이
타인의 고통에 관한
말들이

켜켜이 쌓여오는 말들 속에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되고
무겁게 휘어진 눈꺼풀 틈새를
뚫고나오는 샘물은 다만
너에게로 흘러가려는 마음이었다







-------------------------------------------------
몇 개월 전에
"켜켜이 쌓여오는 피로감 속에 / 감정은 습관처럼 화석이 된다 / "라는 구절만 생각하고 나서
주욱 메모해뒀다가 너무 짜임새도 없고 앞부분 뒷부분 모티브가 연결이 전혀 안 되어서...
맘에 안 들어서 묻어두었던 시.
지금 중간 부분을 다 고쳐서 다시 써서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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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제가 쓴 시랑 비교가 안되게 잘쓰셨네요 ㅜ.ㅜ

    2008.08.29 23:4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8. 14. 04:55
계약직-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김명환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나는 껌을 씹지 않는다.
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
봉지 커피도 티백 보리차도
드링크도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
물티슈도 내프킨도 종이컵도
나무젓가락도 볼펜도 쓰지 않는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아스테이지에 돌돌말려
빨간 리본을 단
장미 한 송이 받아들고

나는 울었다
내가 불쌍해서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제복을 입고 스카프를 두르면
어느 삐에로의 천진난만한 웃음보다
따뜻하고 화사하게 웃어야 했지만
웃으면 웃을수록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사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구차하고 비굴하고
가슴이 미어질 줄은 몰랐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흐르고 넘쳐
자꾸자꾸 밀려오는
파도란 것을 알았다


--------------------------------

어색한 휴식
                           김명환

나는 오이에게 미안하다
나이 스물이 되면서
이 땅의 시인이려면
민주화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고추에게 미안하다
나이 서른이 되면서
이 나라의 시인이려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호박에게 미안하다
자식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아버지는 늦도록 고생만하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콩에게 미안하다
어머니는 집도절도 없이
몇 년을 떠돌아 다니셔야했다
나는 토마토에게 미안하다
아내는 첫아이를 낳고도
남편 얼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딸기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늦게 본 아들 녀석이
쑥쑥 자라는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
내 철들 무렵 바라본 세상은 암흑이었다
지금은 새벽동이 터오고 있다
나는 가지에게 미안하다
조합 활동을 하다 시골 역으로 쫓겨나고
오랜만에 휴식을 갖는다
길에서 벽돌을 주워오고
산에서 흙을 퍼 나르고
베란다에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오이 고추 호박 콩 토마토 딸기
가지 부추 파 생강 수박 참외 상추
채송화 맨드라미 사르비아 양분꽃
봉숭아 해바라기 이름 모를 들꽃들
내 불쌍한 화초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휴식은 어색하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며
나는 어색한 휴식을 즐긴다



----------------------------------------------------------------------------------------


경향신문에 난 <비정규직의 애환·농촌현실 고발…노동문학, 다시 숨을 쉬다>(07.08.23.)라는 기사를 보고서 김명환 씨의 시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봤던 시들인데...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홍보물을 하나 만들다가 생각이 나서 다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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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

    2008.08.19 17:56 [ ADDR : EDIT/ DEL : REPLY ]

어설픈꿈2008. 7. 16. 03:43


에스컬레이터


검은 계단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발 아래로 숨어드는 계단들
노란선을 밟고 있던 사람들은
넘어지듯 주춤주춤 떨어지고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게
그 사람들의 신발이다

계단은 좁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사라진 계단들은
지구의 반대편을 다시 돌고
계단 바닥 너머에는 거울은 아닌
신발들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한
만날 수 없이
안내방송에 맞춰 넘어지듯 걸어가는,
미끌거리는 신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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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는꿈2008. 7. 9. 23:55
(시)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문재철

막차는 떠나 버렸다
못 쓰게 된 차표 위에
묵은 추억이 흐르는 대합실
나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미처 작별을 고하지 못한
슬픈 어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행착오와 고독한 결별
눈물 같은 흰 눈이
내 어깨 위에
떠나는 기적 소리로 쌓인다
마지막 열차는 보이지 않고
무릎 꿇은 운명 앞에
너는 또 내일을 재촉하고 있다
기다리는 봄은 멀리서 돌아오지 않고
꿈속에서 그 정류장을 배회 했지
화사한 봄을 싣고 올
그 소문의 봄은 오지 않고
무거운 그림자만 거기 두고 왔지
그 어느 날 막차가 되어 버린
나의 첫차가
고장 난 시계를 안고
쓸쓸한 기적을 울릴 때
떠나지 못하는 내 가슴 속엔
먼 봄을 이야기하는 겨울비가
떠나간 사람을 위하여
세레나데보다 슬픈
이별가를 부른다.



(노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박은옥, 정태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 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싸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박은옥 씨와 정태춘 씨가 예전에 공연을 하면서,

이 노래를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이어서 어느 세대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라고 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신도림역 버스 정류장이 생각난다.



위의 시는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은 건데,

어느 쪽이 원작인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표현들이 일부 있는 걸로 봐서 우연히 제목만 같은 건 아닌데...

하긴 어느 쪽이 먼저냐, 가 중요한 건 아니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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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4. 19. 13:00


7시42분과

7시42분은 희미한 신음소릴 흘리고 있다
그때 그는 익숙하게 흘리던 신음소리가
기관지 오른쪽에 매연처럼 달라붙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7시42분엔 째깍대는 신음소리가 고여 있다
한눈금 한눈금 건너뛰는 마른 통증들
찡그린 주름살 같은 눈금들 폐를 찌를 때
악몽에 시달리던 꿈들을 깨워야 한다

7시42분에 꿈들은 자살한다
자살보단 섹스라는 충고는 꿈들에겐 소용없다
누군가가 엄격히 그어둔 1초 1분의 눈금을 넘지 못하고
매연을 마시고 질식사한다 매연에 목을 매단다

이 모든 게 7시45분에 시로 쓰여진다
시는 5분씩 건너뛰며
자살한 꿈들을 징검다리 삼는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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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3. 26. 00:34


시대착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소양강 댐에서 보았던
철조망 앞에서 농성하던 낙엽들

삐라처럼 구겨진 얼굴들이
시멘트 표면을 굴러다니며
썩지 못한 꿈으로 모여 있었고

계절에서 소외된 꿈들을
철조망 뒤의 사람들은
밟지도 줍지도 않고 있었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서
우린 모두 시멘트 바닥에서
검게 검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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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3. 18. 02:06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

이름모를 벌레가 그의 엉덩이로 기어온다
손가락이 시려운 그와
키스하는 아파트 옆 공원 벤치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가
실눈 뜬 내게로 기어온다

나는 그의 허리를 간질이며
조심스레 슬쩍
인기척을 낸다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는
놀라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고
나 벌레가 된다
내 등을 쓰다듬는 그의 더듬이에
이름을 숨긴 벌레가 된다

알 것 같은 이름을 굳이 숨긴
벌레 셋이 넷이 다섯이
조용히 만나고 있는데
나는 숨을 죽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을 듯한 밤이면
우리는 벌레가 되어 서로 더듬이를 비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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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3. 17. 09:34


하얀 털을 따라가는


집으로 오는 길에 꽉 조여진
샌달끈을 풀고서 어두워진
오르막을 올라가면 까매진
아스팔트, 발자국이 없는

가로등 불빛이 휘어진
모퉁이에 점점이 흩어진
하얀 털,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

긁힌 자국 같은 털을 따라
눈물의 낙차가 변해온 시간만큼
구겨진 공기 속을 헤집으면
전봇대 밑에 소심하게 찢어진 쓰레기봉투
수거되지 못한 오래된 쓰레기봉투

푯말 하나 없이 집으로 가는 밤
집은 없고 찢어진 봉투만 있는 밤
하얀 털을 따라가는, 까만 밤
 
 

 
------------------------------------------
 
 
숨을 가다듬고 정말 아주 느린 걸음으로 명상을 실천할 때,
집에 오는 밤길 검은 아스팔트 위에 흰 털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감정, 기억, 털갈이의 흔적.
그걸 본 순간 집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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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3. 17. 09:32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증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남자

냄비처럼 파여가는 작은 방에는
달빛이 떨어지는 메마른 소리
당신이 누워있던 닳은 자리엔
우울처럼 고여있는 먼지덩어리

달의 바다엔 물기가 없고
고이는 달빛에도 눈물은 없고
가열해도 가열해도 끓지 않는 남자
검은 바다에 고여있는 먼지 같은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물처럼은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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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2. 29. 11:15



이제 나는


나의 눈빛은 그를 묶어두기엔 충분히 무거웠지만
잠시 거리를 보는 사이에 떠난 그를 쫓아가기엔
너무나 무거웠네

뱃속부터 그림자처럼 떨려오는 몸뚱아릴
어느 전철 파란 의자에 풀썩 던져두고
시청역을 지날 때면 그의 이름을 기대하고
어느 호선 어느 종점 어느 역에 기대 서서
꼭 지구가 도는 만큼 움직이며
그를 찾아 움직이고 움직이고 움직이며

그저께 어느 전철에 두고 내려 차량기지로 떨어져간
마음들을 줍네
한결 가벼워져 돌아온 나의 마음들

이제 나는 등 뒤 거리에서 그가 앞서오길 기다릴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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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첫 구절은 지금을 표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시는 전체적으로 과거를 보고 있다.

이제 나는 내가 너무 앞서갔다고 자책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다릴 수 있다. 다른 방향에서 앞서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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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2. 22. 18:29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1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시계의 눈금은 열둘밖에 없어서
때론 수십년이 지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게 오랜만에 눈을 뜨게 되어도
시간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감촉은
여전히 서늘하고 아릿하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다
나의 발치에 꿈이 수백개 쌓이는 동안에도
벽에 핀 곰팡이만큼밖에 삶들은 흐르지 않는다

2

그래 무엇이 날 깨웠나 저기를 살피려다
잊었던 숨을 들이쉬면 깨닫는 건
옷자락에 묻어 있는 투명한 냄새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 것이고
나는 또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할 것이고
아무데도 없는 분노를 웅얼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또 불현듯 눈을 뜰 것이다
옷자락에 배어 있는 건 투명한 슬픔의 냄새뿐이기 때문에
눈을 감은 동안 켜켜이 쌓여오기 때문에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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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2. 20. 09:38


나는 손이 차다

절망은 손이 차다
사랑했던 사람처럼
조금 창백하다

식사를 많이 한다
살기가 싫어질까봐
조금 숨이 차다

홍조가 도는 얼굴은
살짝 깨진 카메라속에나
남아 있는 것

나는 나처럼 차거운
손을 잡고 걸어 내려간다
가파른 숨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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