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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터 검은 계단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발 아래로 숨어드는 계단들 노란선을 밟고 있던 사람들은 넘어지듯 주춤주춤 떨어지고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게 그 사람들의 신발이다 계단은 좁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사라진 계단들은 지구의 반대편을 다시 돌고 계단 바닥 너머에는 거울은 아닌 신발들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사라지지도 숨지도 못하는 한 만날 수 없이 안내방송에 맞춰 넘어지듯 걸어가는, 미끌거리는 신발들

어설픈꿈 2008.07.16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시)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문재철 막차는 떠나 버렸다 못 쓰게 된 차표 위에 묵은 추억이 흐르는 대합실 나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미처 작별을 고하지 못한 슬픈 어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행착오와 고독한 결별 눈물 같은 흰 눈이 내 어깨 위에 떠나는 기적 소리로 쌓인다 마지막 열차는 보이지 않고 무릎 꿇은 운명 앞에 너는 또 내일을 재촉하고 있다 기다리는 봄은 멀리서 돌아오지 않고 꿈속에서 그 정류장을 배회 했지 화사한 봄을 싣고 올 그 소문의 봄은 오지 않고 무거운 그림자만 거기 두고 왔지 그 어느 날 막차가 되어 버린 나의 첫차가 고장 난 시계를 안고 쓸쓸한 기적을 울릴 때 떠나지 못하는 내 가슴 속엔 먼 봄을 이야기하는 겨울비가 떠나간 사람을 위하여 세레나데보다 슬픈 이별가를 부른다. (노래) 다시..

소리나는꿈 2008.07.09

시 - 7시42분과

7시42분과 7시42분은 희미한 신음소릴 흘리고 있다 그때 그는 익숙하게 흘리던 신음소리가 기관지 오른쪽에 매연처럼 달라붙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7시42분엔 째깍대는 신음소리가 고여 있다 한눈금 한눈금 건너뛰는 마른 통증들 찡그린 주름살 같은 눈금들 폐를 찌를 때 악몽에 시달리던 꿈들을 깨워야 한다 7시42분에 꿈들은 자살한다 자살보단 섹스라는 충고는 꿈들에겐 소용없다 누군가가 엄격히 그어둔 1초 1분의 눈금을 넘지 못하고 매연을 마시고 질식사한다 매연에 목을 매단다 이 모든 게 7시45분에 시로 쓰여진다 시는 5분씩 건너뛰며 자살한 꿈들을 징검다리 삼는다

어설픈꿈 2008.04.19

시 - 시대착오

시대착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소양강 댐에서 보았던 철조망 앞에서 농성하던 낙엽들 삐라처럼 구겨진 얼굴들이 시멘트 표면을 굴러다니며 썩지 못한 꿈으로 모여 있었고 계절에서 소외된 꿈들을 철조망 뒤의 사람들은 밟지도 줍지도 않고 있었다 봄에도 낙엽이 많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서 우린 모두 시멘트 바닥에서 검게 검게 물들고 있었다

어설픈꿈 2008.03.26

시 -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 이름모를 벌레가 그의 엉덩이로 기어온다 손가락이 시려운 그와 키스하는 아파트 옆 공원 벤치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가 실눈 뜬 내게로 기어온다 나는 그의 허리를 간질이며 조심스레 슬쩍 인기척을 낸다 이름을 알 것 같은 벌레는 놀라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고 나 벌레가 된다 내 등을 쓰다듬는 그의 더듬이에 이름을 숨긴 벌레가 된다 알 것 같은 이름을 굳이 숨긴 벌레 셋이 넷이 다섯이 조용히 만나고 있는데 나는 숨을 죽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을 듯한 밤이면 우리는 벌레가 되어 서로 더듬이를 비빌 것이다

어설픈꿈 2008.03.18

시 - 하얀 털을 따라가는

하얀 털을 따라가는 집으로 오는 길에 꽉 조여진 샌달끈을 풀고서 어두워진 오르막을 올라가면 까매진 아스팔트, 발자국이 없는 가로등 불빛이 휘어진 모퉁이에 점점이 흩어진 하얀 털,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 긁힌 자국 같은 털을 따라 눈물의 낙차가 변해온 시간만큼 구겨진 공기 속을 헤집으면 전봇대 밑에 소심하게 찢어진 쓰레기봉투 수거되지 못한 오래된 쓰레기봉투 푯말 하나 없이 집으로 가는 밤 집은 없고 찢어진 봉투만 있는 밤 하얀 털을 따라가는, 까만 밤 ------------------------------------------ 숨을 가다듬고 정말 아주 느린 걸음으로 명상을 실천할 때, 집에 오는 밤길 검은 아스팔트 위에 흰 털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감정, 기억, 털갈이의 흔적. 그걸 본 순간 집..

어설픈꿈 2008.03.17

시 -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증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남자 냄비처럼 파여가는 작은 방에는 달빛이 떨어지는 메마른 소리 당신이 누워있던 닳은 자리엔 우울처럼 고여있는 먼지덩어리 달의 바다엔 물기가 없고 고이는 달빛에도 눈물은 없고 가열해도 가열해도 끓지 않는 남자 검은 바다에 고여있는 먼지 같은 남자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물처럼은 증발하지 못하는 남자

어설픈꿈 2008.03.17

시 - 이제 나는

이제 나는 나의 눈빛은 그를 묶어두기엔 충분히 무거웠지만 잠시 거리를 보는 사이에 떠난 그를 쫓아가기엔 너무나 무거웠네 뱃속부터 그림자처럼 떨려오는 몸뚱아릴 어느 전철 파란 의자에 풀썩 던져두고 시청역을 지날 때면 그의 이름을 기대하고 어느 호선 어느 종점 어느 역에 기대 서서 꼭 지구가 도는 만큼 움직이며 그를 찾아 움직이고 움직이고 움직이며 그저께 어느 전철에 두고 내려 차량기지로 떨어져간 마음들을 줍네 한결 가벼워져 돌아온 나의 마음들 이제 나는 등 뒤 거리에서 그가 앞서오길 기다릴 수 있네 -------------------------------------------------------- 이 시의 첫 구절은 지금을 표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시는 전체적으로 과거를 보고 있다. 이제 나는 내가 ..

어설픈꿈 2008.02.29

시 -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1 갑자기 눈뜨는 것에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시계의 눈금은 열둘밖에 없어서 때론 수십년이 지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게 오랜만에 눈을 뜨게 되어도 시간이 피부를 어루만지는 감촉은 여전히 서늘하고 아릿하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다 나의 발치에 꿈이 수백개 쌓이는 동안에도 벽에 핀 곰팡이만큼밖에 삶들은 흐르지 않는다 2 그래 무엇이 날 깨웠나 저기를 살피려다 잊었던 숨을 들이쉬면 깨닫는 건 옷자락에 묻어 있는 투명한 냄새들 세상은 생각보단 얼마 바뀌지 않는 것이고 나는 또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할 것이고 아무데도 없는 분노를 웅얼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또 불현듯 눈을 뜰 것이다 옷자락에 배어 있는 건 투명한 슬픔의 냄새뿐이기 때문에 눈을 감은..

어설픈꿈 200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