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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유령

유령 하얗게 차가운 시멘트벽을 더듬자 톡 튀어나온 모난 스위치가 닿았지만 불은 켜지 않았다 형광등 속을 어렴풋이 낮이 뛰놀지만은 불은 켜지 않는다 줄이 맞지 않는 책상들 제멋대로 구석에 쌓인 빗자루와 대걸레 약간은 검고 약간은 흰, 동강난 분필들 녹색으로 흔들리는 비상구 표시 하얀 사람이 그 속에서 달리지만 뛰쳐나오지 못한다 창틀 그림자가 앉는다 멀리서 복도가 울린다 제목은 다 지워지고 푸르스름한 실루엣 색을 알 수 없는 얼룩이 묻어있는 덩어리 형광등 없는 자리에 뛰어든 밤 가로등 복도 우는 소리 다가온다 귀를 막는다 째깍째깍 초침소리도 이내 들리지 않겠지, 그렇겠지 눈을 감고 유령이 앉는다 녹아버린 서리처럼 투명하게 소리 없이 무게 없이 부푸는― 타타탁! 튀기듯 밤이 쫓겨간다 햇볕에 탄 얼굴 낮을 들고..

어설픈꿈 2008.01.13

시 - 까칠하고 비좁은 욕조 속에서

까칠하고 비좁은 욕조 속에서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 하나요?"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데미안』 욕조는 작다 나는 크다 욕조는 나를 거부하는 미끄럽고 까칠한 물 로 되어있고 그 안에 나를 우겨넣는다 추억 속에 내 몸을 구겨넣는다 조그만 나를 받아주던 부드러운 물은 몇 년 새에 까칠하게 건조한 물이 되었고 나는 눈이 따가워 바둥거린다 벌거벗고 웅크린 몸 균형이 맞지 않는 자신을 구겨버린 웅크린 예술에 인간의 이름조차 붙여줄 수 없어서 희미하게 "무제"라 써붙이고 나는 눈을 뜨지 못한다 작은 욕조보다는 대중 목욕탕이 어울릴 만큼 늘어난 몸뚱아리 이젠 다리를 구부리고 구겨넣을 수도 없는 여기저기 붉게 얽은..

어설픈꿈 2008.01.13

시 - 복도

복도 운동화 소리가 달려간다 먼저 간 발작소리를 그 다음 소리가 서둘러 밟는다 발소리는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려도 보며 무쇠로 된 창틀을 흔들어도 보며 달려간다 길게 웅크린 복도를 누구와 부딪힐 뻔한 것 같다 아니다 아무와도 부딪지 않았다 저기에서는 누가 풀을 뜯는 듯하다 그래도 뿌리가 삶을 놓치는 소릴 들을 수 없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온 벽을 차며 달음박질친다 화장실을 지나친다 하얀 비상구 표시가 보인다 계단도 지나쳐버린다 막힌 벽으로 빨려 들어간다 막힌 벽은 막히지 않아서, 막힌 벽에 닿으면 발소리는 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벽에는 거미도 죽은 거미줄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끝내 누구의 예술처럼 길어질 순 없는 하루들이 그 껍데기들이 먼지처럼 걸려있다

어설픈꿈 2008.01.11

시 - 황사주의보

황사주의보 난방비를 아낀다고 창문을 바꿔 달았지 그런데 새 창도 신통치가 않은걸 일기예보에선 별 얘기 없었는데도 황사가 종종 날아 들어오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계집애도아닌데왜이리조잘대 몰려다니는 남자애들이 흘린 나이스바디미스코리아폭탄엉클장 상표만 없는 알록달록한 별명들 오분만더공부하면남편직업이달라진다 수업 시간의 노신사 분은 모래를 털기도 하지 목구멍에 걸리는 따끔따끔한 황사 먼지들 베란다에선 남자애들이 가래침을 카악대며 먼지를 일으키지 환상이 깨졌다며 눈살을 찌푸리지 햇볕 아래서 조잘대던 우리들 다리에 프라이팬 기름처럼 튀지 그렇게 황사는 계속 심하고 저 선생님은 페미니즘적이라 인기가 없지 그러고 보면 이모는 마흔이 넘게 시집을 안 갔지 어거지로 선을 보는 족족 차버리더니 발톱이라도 깨졌는지 황사에 ..

어설픈꿈 2008.01.11

시 - 편의점

편의점 24시 편의점은 노랗다 거기에서 노란컵라면이나 검은삼각김밥을 사먹을 수도 있다 졸지 못하는 카운터 위에 맴도는 잠이 없는 노릿한 컵라면 냄새가 숨막히게 배고프다 배가 고프지 않던 사람도 노랗게 물든 그 앞을 지나다보면 허기에 물든다 다섯 대의 소방차가 앵앵 언덕을 넘어간다 붉은 사이렌에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뒤따르는 하얀 앰뷸런스에도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오늘밤도 가로등 침침한 거리 편의점 노오란 불면증인데 충혈된 간판이 거리를 먹어치우고 있는데 2005년 봄인가, 여하간 초에 썼던 것-

어설픈꿈 2008.01.11

시 - 닿을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이 베란다서 수다를 떨고, 잔디밭에 둘러쳐진 하얀 로프와,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 화창한 점심시간 벤치에서 소소한 얘기소릴 엿들으며 손톱을 하나하나 깎았어요 잔디 깎기 훑고 간 잔디밭엔 싸한 피 냄새 나른한 한숨 같은 비행기 소리 서서히 주위를 덮었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고 공기만 한 움큼 또각또각 물어뜯긴 손톱이 화난 듯 내게 튀어 오르는 날.

어설픈꿈 2008.01.10

시 - 새벽녘, 방에서

새벽녘, 방에서 째깍 얼핏 들었던 잠이 초침 소리에 깼다 꿈속에 떠돌던 귀가 시계에 머문 때문이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 두리번대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 깜빡대는 형광등 파르르 숨을 떠는 방 창 밖을 본다 북향방도 내일에 설렜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겨진 창문으로 내다본 어슴푸레 풍경은 희미한 얼굴에 가려질 뿐 거울이 된 유리창, 방이 흘린 웃음이 나가지도 못하고 잔향만 속삭이며 간질거린다 물러나서 몸을 기대면 등에 닿은 벽이 하얗게 시리다 벽에는 꽃들이 피어 있지만 꽃들도 떨고 있다 내가 잠들던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한숨을 내쉰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코를 풀고 뺨을 닦던, 자꾸만 나를 삼키던 그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 방은 이제 개미 같은 귀울림과 아련한 기시감에서만 겨우 엿볼 수 있는가 그래서 ..

어설픈꿈 2008.01.10

시 -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을까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을까 화초에게 늘어놓는 나직한 외롬 그 뒤편에 흐르는 마앍은 달빛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달의 바다엔 물도 없다지 때문에 흘리울 눈물도 없어 오직, 투명한 달빛만이 이 빠진 빈 그릇에 고여들 따름이고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열린 창가 스치는 은근한 바람 말없이도 즐거운 둘만의 도란댐 전화해도 받을 사람 없는 밤 오래 간 함께 산 화초 하나 무릎 새에 끼우고 중얼거림은 아아 당신 꿈을 꿀까봐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어설픈꿈 2008.01.08

시 - 노을로 날아가다

노을로 날아가다 노을이 지는 게 싫어서 두 팔로 구름을 안고서 새들이 지평선으로 날아간다 지평선에 별 하나 겨우 떠오르자 새도 노을도 그 너머로 사라진다 노을을 포기한 도시에서 달에는 못 닿을 소리를 동네 개가 울고 오늘은 교통 체증이 유달리 끈적댄다 검은 아스팔트에 엔진 소리에 경적이 소리치지만 지평선 안쪽, 개도 차도 어디에도 닿지 않고 흩어진다 사람들 끝내 회색 현관을 밀고 들어가 소파 품에 안기고 고삐를 풀고 가방을 내려놓고 실 끊어진 듯 잠이 든다 하얀 별 대신 가로등 아파트 하나하나 켜진다 노을에 물든 가로등이 가로수 잎에 번진다 다들 자기 둥지로 사라지고 나면 주황 별 아래 혼자 깨어 일기를 쓴다 날개 없이 무거운 내 꿈 대신 날린다

어설픈꿈 2008.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