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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가을 아침

가을 아침 찢어지는 비명이 눈꺼풀을 찢어놔 해가 잠결에 뱉은 뿌옇게 흐린 새벽만 살짝 번졌는데 무표정하게 비명을 지르는 짧은 바늘, 형광이네 두들겨 꺼버리곤 몸을 일으켜, 고갤 돌리니 창틀이야 화분에는 아침이라며 활짝 열린 꽃봉오리, 난 물을 마구 뿌려버렸어 김치가 좀 시었어 빨간 김칫국물이 묻은 손을 대충 닦아서 주머니에 꽂고 고양이처럼 구부정하게 거리로 나가 손끝에서 보푸라기가 굴러 발끝에서 낙엽들이 굴러 나도 굴러, 굴러서 보기가 흉해 호두알 같은 까만 얼굴의 환경미화원이 녹색 비로 쓸어내, 낙엽들을,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난 왜 쓸리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구를까 나도 바싹 마른 다음에야 그만 구를까 살려고 꼬리를 버리는 도마뱀 비늘 같은 타월로 벅벅대도 계속 나오는 때처럼은, 아직은 말야 ..

어설픈꿈 2008.01.08

시 - 밤 기찻간

밤 기찻간 알록달록 등산가방 껴안고 문간에서 잠이 든 청년도 있었고 애를 안아 어르고 또 달래는 주름파인 둥근 얼굴 아줌마도 있었고 술냄새를 살짝 입고 웅크린 할아버지도 있었다. 밤중을 달리는 무궁화호 기찻간, 2호차와 3호차 사이 끼익대며 고무살을 맞비비는 이음샛소리와 바퀴가 자갈에 튀는 소리, 덧붙이자면 담배 냄새만으로도 서울을 뒤로 하고 도망치는 어둑한 기차 객실 사이는 만원 사람들은 그 틈새에 어거지로 몸을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새우잠을 청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속에 맺힌 이슬은 흐르지 않았다. 웅크렸다 기지개 펴는 야행성 고양이처럼 일어나서 창밖을 본다. 에어컨 바람, 하얀 형광등, 그 아래서는 탄핵, 비리, 병역, 의문사, 불황, KTX… 신문의 검은 활자는 선명한 요원 ―애초에 편..

어설픈꿈 2008.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