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2008. 1. 13. 22:31
유령

 하얗게 차가운 시멘트벽을 더듬자 톡 튀어나온 모난 스위치가 닿았지만 불은 켜지 않았다
 형광등 속을 어렴풋이 낮이 뛰놀지만은 불은 켜지 않는다

 줄이 맞지 않는 책상들
 제멋대로 구석에 쌓인 빗자루와 대걸레
 약간은 검고 약간은 흰, 동강난 분필들

 녹색으로 흔들리는 비상구 표시 하얀 사람이 그 속에서 달리지만 뛰쳐나오지 못한다 창틀 그림자가 앉는다
 멀리서 복도가 울린다

 제목은 다 지워지고 푸르스름한 실루엣
 색을 알 수 없는 얼룩이 묻어있는 덩어리
 형광등 없는 자리에 뛰어든 밤 가로등

 복도 우는 소리 다가온다 귀를 막는다
 째깍째깍 초침소리도 이내 들리지 않겠지, 그렇겠지
 눈을 감고 유령이 앉는다 녹아버린 서리처럼 투명하게 소리 없이 무게 없이 부푸는―

 타타탁!
 튀기듯 밤이 쫓겨간다 햇볕에 탄 얼굴 낮을 들고 수위가 화를 낸다
 가방을 메자 발소리가 쿵, 복도를 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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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3. 11:45
까칠하고 비좁은 욕조 속에서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 하나요?"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데미안』

 
욕조는 작다
나는 크다

욕조는
나를 거부하는 미끄럽고 까칠한 물
로 되어있고
그 안에 나를 우겨넣는다
추억 속에 내 몸을 구겨넣는다
조그만 나를 받아주던 부드러운 물은
몇 년 새에 까칠하게 건조한 물이 되었고
나는 눈이 따가워 바둥거린다

벌거벗고 웅크린 몸
균형이 맞지 않는
자신을 구겨버린 웅크린 예술에
인간의 이름조차 붙여줄 수 없어서
희미하게 "무제"라 써붙이고
나는 눈을 뜨지 못한다

작은 욕조보다는
대중 목욕탕이 어울릴 만큼
늘어난 몸뚱아리
이젠 다리를 구부리고 구겨넣을 수도 없는
여기저기 붉게 얽은 회색 몸뚱아리

네가 욕실 문을 두드리며
너무 오래 욕실을 쓴다고 투덜거리고
종소리 종소리 맞추지 않은 알람시계 소리

나는 커다란 글씨가 수놓아진
부드러운 수건으로 까칠한 물을 닦아내며
내 이름을 고민한다

욕조에 번지는 파문으로
추억은 깨져나가고
나는 내 이름을 고민하며 되도록 천천히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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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1. 13:58

복도


운동화 소리가 달려간다
먼저 간 발작소리를 그 다음 소리가 서둘러 밟는다
발소리는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려도 보며 무쇠로 된 창틀을 흔들어도 보며
달려간다 길게 웅크린 복도를
누구와 부딪힐 뻔한 것 같다
아니다 아무와도 부딪지 않았다
저기에서는 누가 풀을 뜯는 듯하다
그래도 뿌리가 삶을 놓치는 소릴 들을 수 없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온 벽을 차며 달음박질친다
화장실을 지나친다 하얀 비상구 표시가 보인다 계단도 지나쳐버린다
막힌 벽으로 빨려 들어간다
막힌 벽은 막히지 않아서, 막힌 벽에 닿으면
발소리는 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벽에는 거미도 죽은 거미줄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끝내 누구의 예술처럼 길어질 순 없는 하루들이
그 껍데기들이
먼지처럼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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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1. 13:32
황사주의보
 

난방비를 아낀다고 창문을 바꿔 달았지
그런데 새 창도 신통치가 않은걸
일기예보에선 별 얘기 없었는데도
황사가 종종 날아 들어오지

복도를 타고 울려오는
계집애도아닌데왜이리조잘대
몰려다니는 남자애들이 흘린
나이스바디미스코리아폭탄엉클장
상표만 없는 알록달록한 별명들
오분만더공부하면남편직업이달라진다
수업 시간의 노신사 분은 모래를 털기도 하지
목구멍에 걸리는 따끔따끔한 황사 먼지들

베란다에선 남자애들이 가래침을 카악대며
먼지를 일으키지
환상이 깨졌다며 눈살을 찌푸리지
햇볕 아래서 조잘대던 우리들 다리에
프라이팬 기름처럼 튀지

그렇게 황사는 계속 심하고
저 선생님은 페미니즘적이라 인기가 없지
그러고 보면 이모는 마흔이 넘게 시집을 안 갔지 어거지로 선을 보는 족족 차버리더니 발톱이라도 깨졌는지 황사에 목이 막히는지 우울증에 걸려선 드레스룸이 없어 못 죽는 댔어

나는 입을 꾹 다물지만
때가 탈까 검은 옷을 입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 다 먼지에 절어 버리지
아무도 황사주의보를 내려주지 않는 데 좀 지친 채
황사가 묻은 몸을 씻어 보지만
눈도 코도 목도, 밤새 따끔거리지

 

 

 

 

 

 

 

양성평등 글짓기던가.. 2005년에, 7월 여성주간을 기념하여 4월 30일인가까지 공모를 해야 하는 관계로 썼던.
무슨 시장 어쩌구 차원의 상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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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1. 13:30
편의점

24시 편의점은 노랗다
거기에서 노란컵라면이나 검은삼각김밥을
사먹을 수도 있다

졸지 못하는 카운터 위에 맴도는
잠이 없는 노릿한 컵라면 냄새가
숨막히게 배고프다

배가 고프지 않던 사람도
노랗게 물든 그 앞을 지나다보면
허기에 물든다

다섯 대의 소방차가 앵앵
언덕을 넘어간다
붉은 사이렌에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뒤따르는 하얀 앰뷸런스에도
아랑곳 않고
편의점은 노랗다

오늘밤도 가로등 침침한 거리
편의점 노오란 불면증인데
충혈된 간판이
거리를 먹어치우고 있는데









2005년 봄인가, 여하간 초에 썼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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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0. 14:55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이 베란다서
수다를 떨고,
잔디밭에 둘러쳐진
하얀 로프와,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
화창한 점심시간 벤치에서
소소한 얘기소릴 엿들으며
손톱을 하나하나 깎았어요

잔디 깎기 훑고 간 잔디밭엔 싸한 피 냄새
나른한 한숨 같은 비행기 소리
서서히 주위를 덮었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고
공기만 한 움큼

또각또각
물어뜯긴 손톱이 화난 듯 내게 튀어 오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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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0. 14:54


새벽녘, 방에서


째깍 얼핏 들었던 잠이 초침 소리에 깼다
꿈속에 떠돌던 귀가 시계에 머문 때문이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 두리번대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
깜빡대는 형광등
파르르 숨을 떠는 방

창 밖을 본다
북향방도 내일에 설렜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겨진 창문으로 내다본
어슴푸레 풍경은 희미한 얼굴에 가려질 뿐
거울이 된 유리창,
방이 흘린 웃음이 나가지도 못하고
잔향만 속삭이며 간질거린다

물러나서 몸을 기대면
등에 닿은 벽이 하얗게 시리다
벽에는 꽃들이 피어 있지만
꽃들도 떨고 있다

내가 잠들던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한숨을 내쉰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가 코를 풀고 뺨을 닦던, 자꾸만 나를 삼키던 그 방은
이 방이 아닌가
내 방은 이제
개미 같은 귀울림과 아련한 기시감에서만
겨우 엿볼 수 있는가
그래서 내 주머니의 열쇠는 문에 맞지 않는가

접힌책 부러진샤프심 지우개가루
헝클어진 책상 앞에 앉아보지만
이 방엔 손수건조차 휴지조차 없다
나는 제대로 쓰지 못한다
일기도 편지도 유서도

창 아래로 누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주먹을 쥐고 유리창을 두드려본다
창 아래로 누가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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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10. 12:48
개구멍

반에 반쯤 뜯어진 철조망
종종 애들이 개구멍으로 써먹는
꼬불꼬불 꼬여 갸웃거리는 철조망
얘, 네가 보기에 난 철조망이니 개구멍이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곤 땡땡이 치는 학생애에게 물었는데
학생애는 대답 없이 슬쩍 옷자락만 확인하곤 가버린다.

그 눈길이 되려
얘, 난 사람이니 개니?
하고 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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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난 개니 벽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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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랜만에 보는군, 개벽이

    2008.01.10 13:4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어설픈꿈2008. 1. 8. 11:55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을까

화초에게 늘어놓는
나직한 외롬
그 뒤편에 흐르는
마앍은 달빛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달의 바다엔 물도 없다지
때문에 흘리울 눈물도 없어
오직, 투명한 달빛만이
이 빠진 빈 그릇에
고여들 따름이고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열린 창가 스치는 은근한 바람
말없이도 즐거운 둘만의
도란댐

 

전화해도 받을 사람 없는 밤
오래 간 함께 산 화초 하나
무릎 새에 끼우고 중얼거림은
아아 당신 꿈을 꿀까봐
오늘밤은, 뜬눈으로 샐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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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8. 01:28
노을로 날아가다


노을이 지는 게 싫어서
두 팔로 구름을 안고서
새들이 지평선으로 날아간다
지평선에 별 하나 겨우 떠오르자
새도 노을도 그 너머로 사라진다

노을을 포기한 도시에서
달에는 못 닿을 소리를 동네 개가 울고
오늘은 교통 체증이 유달리 끈적댄다 검은 아스팔트에
엔진 소리에 경적이 소리치지만
지평선 안쪽, 개도 차도 어디에도 닿지 않고 흩어진다
사람들 끝내 회색 현관을 밀고 들어가 소파 품에 안기고
고삐를 풀고 가방을 내려놓고
실 끊어진 듯 잠이 든다

하얀 별 대신 가로등 아파트 하나하나 켜진다
노을에 물든 가로등이 가로수 잎에 번진다
다들 자기 둥지로 사라지고 나면
주황 별 아래 혼자 깨어

일기를 쓴다
날개 없이 무거운 내
꿈 대신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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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를 감상하기 위하여 링크 타고 달려왔어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성명이 없어서????

    2008.01.08 22: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향로 / 제가 쓴 거라서 따로 이름을 달진 않았습니다 ^^;

    2008.01.10 12: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어설픈꿈2008. 1. 8. 01:25

가을 아침


찢어지는 비명이 눈꺼풀을 찢어놔
해가 잠결에 뱉은 뿌옇게 흐린 새벽만 살짝 번졌는데
무표정하게 비명을 지르는 짧은 바늘, 형광이네
두들겨 꺼버리곤 몸을 일으켜, 고갤 돌리니 창틀이야
화분에는 아침이라며 활짝 열린 꽃봉오리,
난 물을 마구 뿌려버렸어

김치가 좀 시었어 빨간 김칫국물이 묻은 손을
대충 닦아서 주머니에 꽂고
고양이처럼 구부정하게
거리로 나가

손끝에서 보푸라기가 굴러
발끝에서 낙엽들이 굴러
나도 굴러, 굴러서 보기가 흉해

호두알 같은 까만 얼굴의 환경미화원이
녹색 비로 쓸어내, 낙엽들을,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난 왜 쓸리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구를까
나도 바싹 마른 다음에야 그만 구를까

살려고 꼬리를 버리는 도마뱀
비늘 같은 타월로 벅벅대도
계속 나오는 때처럼은, 아직은 말야
조금 있으면 까만 호두에 주름이 더 잡혀 계속 계속
으르렁, 검은 차바퀴에 무심코 밟혀

힘이 빠져서 빨간 우체통 옆 벤치에 앉아
우체통은 낙엽을 뚫고 솟았어
하지만, 16시 반에 우체부는 오지 않아
해가 넘어가고서야 오거든
겁먹은 개처럼 아무 말도 못 걸어

또 비명이 찢어져
또 숨결이 깔렸어
그리고 또,
창틀엔 잉잉대며 날던,
어제가 쌓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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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꿈2008. 1. 8. 01:23
밤 기찻간


  알록달록 등산가방 껴안고 문간에서 잠이 든 청년도 있었고 애를 안아 어르고 또 달래는 주름파인 둥근 얼굴 아줌마도 있었고 술냄새를 살짝 입고 웅크린 할아버지도 있었다.
  밤중을 달리는 무궁화호 기찻간, 2호차와 3호차 사이 끼익대며 고무살을 맞비비는 이음샛소리와 바퀴가 자갈에 튀는 소리, 덧붙이자면 담배 냄새만으로도
  서울을 뒤로 하고 도망치는 어둑한 기차 객실 사이는 만원
  사람들은 그 틈새에 어거지로 몸을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새우잠을 청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속에 맺힌 이슬은 흐르지 않았다.
  웅크렸다 기지개 펴는 야행성 고양이처럼 일어나서
  창밖을 본다.

  에어컨 바람, 하얀 형광등, 그 아래서는
  탄핵, 비리, 병역, 의문사, 불황, KTX…
  신문의 검은 활자는 선명한 요원
  ―애초에 편히 잠들긴 글른 2호차인 게지.
  혀를 차는 소리는 슬쩍 묻혔다.
  쓸쓸하게 일어난 목소리로 기차소리 헤치고
  객실을 나가 서서 머얼리
  창밖을 본다.

  논 위에 점점이 번지는 노랗고 하얀 인가의 별빛
  창문에 희미히 비치는 낯설고 그늘진 인간의 눈매
  저 뒤론 어슴푸레 쫓아온 웅성대는 도시의 불빛
  문득 반대편으로 달려지나간 기차 한 대, 그 안의 아무와도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덜컹댈 때마다 속으로 이슬 맺힌 눈매가
  흔들리며 불빛을 흐렸지만
  불빛은 지평선에 계속 쫓아왔다.
  처진 눈빛과 불빛들을 노려본다.

  객실 사이 노란 조명등 어둑한 바깥 풍경
  누구의 목소리와 사람 그림자 떠돌다
  허공에 떨어져서
  건널목가, 들꽃봉오리에 겹쳤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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