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세월호 참사, 그 이후의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들

공현 2015. 12. 9. 17:40
2015년 12월 
세월호와 청소년 토론회에서 발제문으로 쓴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그 이후의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우리 사회가 사건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말도 있었을 것이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사람들 각자가 사건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 필요한 말들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그 수많은 말들 중에서도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들이 유독 많았고 눈에 띄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중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기 때문이다. 음모론적 접근이든 신중한 접근이든 참사의 원인 분석에서부터 해결을 촉구하는 동기 혹은 제안되는 해법에까지 두루 거론되곤 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하면서 청소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거론되는 것을 보다보면, 우선 그런 논의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정을 “아이들아 미안하다”라는 구호로 표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조건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다.”라는 규정, 유가족을 ‘자식 잃은 부모’로 그리는 모습, 1년 뒤 수능시험일이 오자 나오는 여러 말들, 더 나아가서 “세월호 참사는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라는 분석(참사로 죽은 것 대다수가 비청소년들이었다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교육은 어른의 말이다.”라고 하며 세월호 참사를 교육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어느 대학 교수진의 스승의 날 성명 등…. 심지어 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살아남은 학생들은 대개 모범생/우등생이 아니라고 하더라, 어른들 말을 잘 안 듣는 학생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같은 카더라 분석(?)마저 들은 적이 있다.

세월호-청소년 논의의 과잉이 정점을 찍은 것은 ‘4.16 교육체제’ 같은 것을 교육청에서 진지하게 꺼내들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5.31 교육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교육체제가 4.16 교육체제이며 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교육체제라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조희연 교육감)은 4.16 교육체제를 ‘일등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꽃피우는 교육이라고 했으며 고교서열화 극복, 학교혁신, 학교민주주의 등을 과제로 열거했다. 경기도교육청이 연 4.16 교육체제에 대한 토론회 자료집 서두에서 이재정 교육감은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한 교육>,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참사를 잊지 않는 일이고, 또 교육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한 발제자는 4.16 교육체제의 모델학교는 혁신학교이며 핵심 가치는 협력과 협동이라고 했다. 뭐, 다 나쁠 것 없는 주장인데, 문제는 그게 왜 ‘4.16 교육체제’냐는 것이다. 솔직히 그 각론들을 보면 그동안 교육운동이 해오던 주장과 논의들을 모아서 이름을 붙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굳이 이런 예들을 문제인 것처럼 열거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세하게 따진다면 각각의 이야기들의 문제점을 따로 논해야겠지만, 크게 봐서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지배적인 청소년관들은 공통적으로 청소년을 피해자의 위치에, 비청소년을 책임자‧권력자‧주체의 위치에 놓는다. 물론 양적으로 따진다면 청소년들보다는 비청소년들이 현재의 사회 체제에 대해 조금 더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집단에게 사회적 책임이 더 있는지 재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을 나누는 구도와 맥락이다. 청소년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고 간주한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이 너무나 자연스레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에 초점을 맞춘 논의들은 세월호 참사를 마치 청소년 또는 교육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참사를 바라보는 초점을 흐린다. 비청소년과 청소년이라는 구도 속에 이루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간과하는 듯이 보일 때도 있고, 그 결과물 중 일부는 간혹 등장하는 아전인수격의 해석들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청소년들을 삶의 주인으로 하자거나 학생들을 존중하자거나 하는 말들도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떤 존재로 만들어내려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나타나고 있다.

그 옳고 그름이나 바람직함의 여부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그런 청소년에 대한 논의의 밑바탕에는 어떤 동기, 어떤 감정이 있는지부터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말들 속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당혹감과 무력감이었다고 하면 좀 과한 것일까? 수백 명이 죽은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하면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답을 원했다. 4.16 교육체제라는 명명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교사/교육청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 못되게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만들며 안심하기, 좋게 말하자면 무력감을 피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 세월호 참사 앞에서 수많은 말들이 나오는 현상은 마치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청소년에 관한 문제는 없다

청소년에 대한 담론이 과잉되어 있는 와중에, 내가 그 모든 것이 문제이고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그 중에도 의미 있고 더 많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다수가 청소년이라는 사실보다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여러 모습들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세월호 참사 이후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추모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나 하라고 다그치는 학교의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애도하고 슬퍼하지 않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애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든지.

교육부나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표현과 행동을 금지하고 제재하는 사례들은 청소년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과 함께 세월호 참사가 정부로부터 어떤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에 대응하여 청소년들이 이것은 순수한 추모 및 애도일 뿐이라고 말하는 모습도 청소년들이 마주하고 있는 한계와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한계를 드러낸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몇십 년 동안 그래왔고, 청소년만이 아니라 비청소년들도 양상은 다를지언정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경제나 소비 심리를 말하며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고 세월호 참사에 관한 집회나 시위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동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만의 문제는 없다. 청소년들도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준 숱한 문제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청소년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청소년에 대해 특별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지는 바로 그 현상에 대해 짚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왜 고등학생들이 죽었는가?”를 묻는 것보다는, 차라리 왜 그런 질문을 하려고 하는지 묻는 것이, 청소년에 대한 말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그 현상을 메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그려내고 어떤 역할로 소환하는지를 말이다. 그런 그림 속에서 세월호 참사와 연관된 청소년들(유가족, 친구, 생존자 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후의 이호연 등의 발제에서 좀 더 귀를 기울여보도록 하자.)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일어난 추모나 진상규명 요구 투쟁 속에서 청소년의 이미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실제로 투쟁에 참여한 분들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경험상으로는, 아마 좀 더 조사를 해봐야 분명히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나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사람이 출산‧육아의 경험이 있는지 ‘부모’인지 여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곤 했다. 부모인 이들은 ‘아이들의 죽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투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정서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왔는지 이야기할 때 청소년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고, 여기에서 나 같은 사람들이 가족주의 내지 청소년보호주의의 냄새를 맡는 것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또한 김현경은 세월호 참사 직후 ‘아이들’이라는 기표에 대해서 그것이 전쟁의 관점으로 연결될 위험성, 국가주의 속에 배치된 그 상징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서 '아이들'이라는 기표가 국가주의에서 수행하는 독특한 기능을 상기하도록 하자. … 모든 정치 세력은 이 기표를 전유하려 애쓴다. 세월호에 아이들을 빼앗긴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독재자는 아이들을 내세우고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 …… 세월호에 대한 국민적인 애도가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일반인들'이 부각되는 것은 그들이 아이들을 구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때뿐이다. 우리는 더 가치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안타까운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나누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전쟁의 관점이다. 전쟁은 공동체의 심장과 손발, 살아남을 사람들과 희생될 사람들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재난은 점점 전쟁을 닮아 간다. 하지만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재난에 대처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기에 앞서 전쟁의 관점 자체와 단절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김현경, 오늘의 교육 21호, 「'아이들'이라는 기표 -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제까지 그럴 여유는 없었고 앞으로도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럴 여유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다면 세월호 운동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해결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낳고 있는 ‘효과’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청소년/아이들”을 부르는 일이 어쩌면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일은 아닌지, 인권의 보편성과 상반되지는 않는지, 가족주의적 관계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세월호 참사 이후에 등장한 청소년에 대한 과잉된 논의들을 치워내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논의로 그런 것들을 제안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