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언어 사이에서
내가 인권운동사랑방과 처음 연을 맺은 것은 2006년의 일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마련한, 청소년인권운동의 진로를 모색하는 워크숍 자리였다. 워크숍의 결과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지금의 청소년인권운동이 자랄 수 있도록 흙을 갈고 거름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은 때로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때로는 입장을 밝히고 운동론을 정제할 수 있는 지면을 제공해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운동에 함께한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가장 든든한 존재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그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 함께했던 인권운동사랑방 교육실 활동가들은 현재는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은 인권 문제의 현장에 가서 연대하고 몸으로 부딪히기도 했고, 인권 문제에 대한 보고서나 이론서를 읽고 개념을 정리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인권의 문제의식으로 사회 현상이나 정책을 살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주는 성명이나 논평을 냈다. 나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아니었지만,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또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운동을 보고 듣고 모방하면서 인권운동이란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혔다.
사실 인권운동사랑방 같은 인권단체가 의외로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중 일이었다. 나는 한 2-3년은, 인권운동사랑방 같은 조직과 문화(대표가 없는 운영 체제, 활동가 사이의 비교적 평등한 관계,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것 등)가 인권운동에서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마도 오늘날 인권운동계에서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원칙과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단체들도 적지 않으리라.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의 지평을 넓히고 들리지 않던 이야기를 들리게 만들었다. 청소년인권운동도 그 한 예였고, 노숙인-홈리스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연대하고 활동을 하고 주거권 개념을 제기한 활동도 있었다. 과거에는 감옥인권 문제를 다루었으며, 북한인권 문제를 '한반도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고민하고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 낯설었던 '사회권'을 공부하고 적용하며 더 풍부하게 만들었고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도 함께했다. 경찰 폭력에 대응하고 집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등 인권단체로서 당연한 일도 물론 해왔다.
나에게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활동가들은, 자칫 추상적이고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인권'의 언어를 현장의 문제와 연결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 활동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 남았고, 변화로 이어졌다.
계속 넓어지고 나누어온 단체
1993년 꾸려진 인권운동사랑방이 한국 사회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유서 깊은 단체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권운동사랑방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게 풍족하지도 못하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스스로 명성과 자원을 얻는 방식으로 운동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사랑방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계속 '분열'해왔다는 것이다. 인권교육을 인권운동으로서 처음 인식하고 활동해왔던 인권운동사랑방 교육실은 '인권교육센터 들'이 되었다. 국제인권 문서를 번역하고 '진보적 인권운동'의 이론을 만들어온 부설 인권연구소는 '인권연구소 창'이 되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주관했던 서울인권영화제도 별도의 단체로 독립하였다. 이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자기 조직을 키우기보다는 인권운동을 계속 넓혀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권운동사랑방이 후원 행사를 한다. 내가 알기론 25년의 역사 속에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후원 행사로, 드문 일이다. 매년 후원 행사를 하면서 단체를 운영하는 시민사회단체들도 흔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소리소문 없이(?) 활동해온 인권운동사랑방의 성격을 알 법한 일이기도 하고.
리워드에 박힌 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함께 살자. 함께 싸우자. 함께 지키자."
함께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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