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략 한두 달 즈음, 매양 끼니를 거르던 때가 있었다. 2019년 12월 정도부터였던가… 도무지 식욕이 생기지 않아서 굶었다 먹었다 했다. 그러다 굶어 죽어도 괜찮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별달리 운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4~5kg 정도가 빠졌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그때에는 시간 감각마저 모호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1달은 넘는 기간이었다. 이불 속에 누워서 계속 불안한 미래를 상상했고 잠깐 잠이 들면 그 사람이 떠나는 꿈을 꾸고 깨버려서, 새벽 내내 일어나 앉아 있곤 했다. 생물로서 내가 존속하는 것이 이런 사회적인 이유로 위태해질 수가 있구나, 나는 이렇게 불안정한 존재구나, 실감한 체험이기도 했다.
그 일에 결말이 지어지고 나서도 나의 고통에 바로 결말이 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모양새의 고통이 이어졌다. 가령, 10여 년을 쓴 칼럼들을 모은 책의 원고를 퇴고하던 밤에 문득 엉엉 울었다. 이 글에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이토록 배신당하고 그토록 모욕당했는데. 중얼거리며 책상에 엎드려 밤새 울었다. 이제 그만큼의 파고는 아니지만 지금도 나는 한번씩 닥쳐오는 감정의 파도를 감당하곤 한다. 그 빈도는 아마 타인의 예상보다 잦을 것이다.
- 상처받았다느니, 고통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들에 나는 시큰둥하다. 그런 것들이 그리 중요한 것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남들이 나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도덕적 비난거리가 아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잘 모른 채로 나를 더 고통받게 만들었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나 나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몰랐으며,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돌보라고 할 개연성이 없다. 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에 대해 평가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원래 우리는 남의 고통을 모른답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것이 공평한 일 아닙니까. 왜 어떤 여러분은 특정한 상처만이 더 가치 있다는 듯 말합니까.
상처나 고통은 옳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만약 고통이 옳음의 근거가 된다면 그 세상은 끔찍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고통받은 사람, 정확히는 가장 진정성 있게 고통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올바른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 말이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충동적으로 한강 다리 위에 서서 뛰어내릴지 말지를 고민하던 새벽이 있었다. 먼 바다로 나가는 배의 티켓을 예약하고서 대양 한가운데에서 죽을 계획(시신을 처리할 일 없도록)을 구체적으로 세운 적도 있었다. 정의당사 앞에서 분신하는 것은 수십 번 상상했다. - 물론 나의 이런 말들은 얼마든지 과장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나는 그걸 입증할 수도 없고 내 고통을 남이 느끼게 할 수도 없다. 그저 30회가 넘는 심리상담 기록과 약이라도 타보려고 예약 없이 센 약을 팍팍 준다는 신경정신과를 찾아간 흔적 정도뿐. 만일 내가 그걸 실행에 옮겼다면 내 고통이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고통은 아집과 광기의 부산물로 평가받을 뿐이니까. 무엇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옳음을 증명하길 원하지 않는다.
- 나에 대해 '왜/어쩌다/언제 저렇게 망가졌냐'라는 식의 말을 남긴 사람을 보았다. 글쎄, (운동사회 내) 주류와 언어와 태도가 다르면 '망가진' 건가? 일단 그렇게 따지면 “강정 투쟁 망해라” 하고 공개적으로 남기던(사유: 단체 실무담당자가 일 팽개치고 강정마을 연대한다고 가서 몇날 며칠 있었음) 15,16년 전에 나는 이미 망가진 존재였을 터이다. 아니, 내가 뭔가 인간으로서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감각은 10대 때부터 내가 항상 품어온 것이었다. 그 기준을 ‘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으로 잡는다면 나는 아마 9살쯤에도 이미 망가져 있었을 것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망가져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운동을 하다보니 망가지는 경험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생겼다. 2005년 처음 열어본 학생인권 집회에 20여명밖에 안 왔을 때? 입시폐지 집회에 100명도 안 왔을 때? 오전 10시에 같이 회의해야 할 사람들이 촛불집회에서 밤을 새고는 회의는 펑크 냈을 때?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받으러 간 무상급식 책 출판한 학부모단체 행사에서 잡상인 취급받으며 쫓겨났을 때? ...... 나는 망가지기로 결단한 사람이고, 망가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이며(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지 않나?), 망가진 채로 걸어가는 길을 사랑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 망가집시다. 그리고 2019-2020년의 그 일(최근에 어떤 문건에는 '정의당의 청소년인권운동 독자성 침해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봤더랬다)도 그런 망가짐의 일부로, 조금 큰 망가짐으로 소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 뒤틀리고 망가진 모양새를 보고서도 고통을 짐작하지 않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옳다는 확신 속에 나를 손가락질하곤 한다. 뭐,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겪어 본 바 사람들은 대체로 그랬다. 흔한 일이지요... 내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까진 기대하지도 않고, 내가 싫으면 욕해도 된다. 나는 내가 남을 욕하고 저주하는 만큼 남도 나를 욕해도 될 권리를 주겠다.
다만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말하고 싶다. 정치적 결정/입장이 다른 것은 배신이 아니며 윤리적 단죄거리도 아니다. 심지어 내가 동의한 적이 한번도 없고 당신이 설득한 적도 없는 정치적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동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있을 수 없고,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편이기 때문이다.(최유기를 너무 많이 봤음…)
(몇 주 전에 써둔 글을 조금 짬이 나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