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익명성 - 자유의 확대

공현 2008. 1. 8. 02:02

익명성 - 자유의 확대


 전자기기들 위에 만들어진 가상공간이 점점 발달하여 일상적인 것이 되어가면서 익명성(匿名性, anonymity)에 관련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가상공간에서 나타나는 악의적인 비방, 무책임한 발언 등은 익명성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사실 가상공간 이전부터 익명성은 대중화된 현대에 나타난 특성 중 하나였으며 반드시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도시인들의 생활이 가장 일상적인 사례이며, 정치적으로는 비밀투표의 원칙에서 익명성을 볼 수 있다. 익명성이 가상공간의 발달과 함께 특히 주목받는 것은 가상공간이 익명성을 확대시키기 때문일 뿐이며, 따라서 익명성에 관한 문제는 단지 가상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공간에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익명성은 자유의 면에서 볼 때 긍정적이다. 근대적인 형태를 띤 개인의 자유는 익명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익명성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예로는 앞서 언급한 비밀투표의 원칙이 가장 대표적이다. 또, 사생활 및 개인정보 보호와 같은 것들도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분을 묻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책임도 묻지 않는 것 ― 익명성은 인간을 여러 가지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장치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하늘의 뿌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찬사를 받았는데, 여기에서 특히 재미있는 점은 에밀 아자르가 사실 로맹 가리가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 몇몇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작품을 쓸 수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후일 유서에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자신을 틀에 박힌 기성작가로 생각하고 평가를 끝내놓은 채 박한 점수를 주는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반응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익명성을 이용하여 자기자신을 기존의 자신에 대한 평가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익명성 덕분에 가상공간의 자신은 현실공간의 자신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얻는다. 또, 현실공간의 자신도 가상공간의 자신에 대해 책임을 덜 진다. 이러한 현상이 가상공간만의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가상공간에서는 현실공간의 신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전화기에 음성변조기까지 동원하는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여러 모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가상공간의 익명성은 현실공간에서 보이던 것보다 좀더 넓게 확대된 익명성이며, 따라서 가상공간에서 인간은 좀더 자유로워진다.



 비록 익명성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지만, 이러한 자유가 항상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칠 수도 있는 일이며, 소방서에는 장난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오고는 한다. 가상공간에서는 악의적인 비방 때문에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는가하면 채팅방에서는 자기 신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잘못된 정보가 순식간에 생산·유포되기도 한다. 서로 얼굴을 잘 아는 동네 가게에서 강도질을 하기는 힘들어도, 어쩌다 한 번 들르고 들어가면서 인사도 하지 않는 길가의 편의점은 강도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익명성이 보장해준 자유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경우라 하겠다.
  악용되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자유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익명성이 보장해주는 자유는 '소극적 자유'로 볼 수 있는데, 적극적 자유로 발전하지 못한 소극적 자유는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주장하듯 소극적 자유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을 원자화시켜 무력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종종 뉴스에 보도되는 아파트에서 누가 죽었는데 그 이웃들은 몇 달 동안 몰랐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자기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도시의 익명성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익명성을 없애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다. 이는 마치 자동차가 있어서 교통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있으니 모든 자동차를 없애자고 하는 것과 같다. 헤겔은 역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가는 방향으로 진행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본다면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역사적인 진보이다. 가상공간에서도 익명성이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모두 실명제를 시행할 일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익명성은 지켜져야 한다. 익명성이 악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반성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제도적으로도 악용되는 경우에 대해서만 제재해야한다. 익명성 때문에 일어나는 깊이 없는 인간 관계, 고립 등의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적극적 자유를 이루어 가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결국 익명성이라는 자유를 얻게 된 사람들이 그 소중함을 알고 그 자유를 잘 사용해나가야 익명성은 제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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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저는 현재로서는 환경오염 문제 때문에 자동차를 없애야 한다는 측입니다만 -_- 기차나 자전거 타고 다닙시다! 랄까요. 무공해 자동차가 나오면 그 때 다시 고려해보지요.


저는 인터넷의 익명성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그런 이유로 블로그에 제 사진 같은 것은 절대 올리지 않지요. 제 이름도 사실 안 밝혀지면 좋겠지만, 얼마 전에 누군가가 써버려서...;

애초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글쟁이의 기분으로 시작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제가 누군지 같은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제 글을 평가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익명성을 사랑하는 만큼, 익명성을 악용하는 경우를 저는 매우 싫어합니다.

예전(도 벌써 몇 년 전이냐...)에 같은 동아리 사람과 그런 문제로 싸운 적이 있었지요.

악의없는 사칭은 장난으로 봐줄 수 있어도, 악의적인 사칭은 강력히 제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저는 그 사칭사건을 근거를 갖고 악의적이라고 판단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 본인은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