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이야기들 “고양이를 부탁해”

공현 2008. 4. 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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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이야기들 “고양이를 부탁해”



  벼르고 벼르던 <고양이를 부탁해>를 여성영화제에서 봤다. 여성영화제 씩이나 가서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왔다는 게 아깝다는 친구도 있었지만,(<고양이를 부탁해>는 DVD나 비디오 등으로 다른 때도 볼 수 있으니까) 쥬디스 버틀러 관련 다큐멘터리와 <고양이를 부탁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차피 쥬디스 버틀러 다큐멘터리 표가 매진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고양이를 부탁해> 표를 냉큼 샀다. 소문만 무성하게 듣다가 직접 보게 된 건 처음인, <고양이를 부탁해>.

  감상을 쓰기 위해 이렇게 조금 따뜻하게 빛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지금,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화관에서 나올 때 엘리베이터에서 수군대던 사람들의 목소리다. “무슨 교훈이 있는 거야? 알 수가 없네. 재미없어.” “이게 대체 왜 여성영화제에 있지? 무슨 얘길 하려는 거야?” 대충 이런 혹평들의 잔향을 간직한 채, 밤 10시 좀 넘은 시간에도 지나칠 정도로 현란한 신촌 거리를 건너가는 일은, 영화가 던져준 답답함과 함께 깊은 피로감을 선사해 주었다.
  확실히, <고양이를 부탁해>는 관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명확한 메시지도 없었고, 심지어 해결책마저 없었다. 태희와 지영은 떠나지만, 그 떠남은 그다지 유쾌하거나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그저 답답하고 끈질기게 현실을 묘사해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도통 고발 같지 않은 고발이었고, 대책 없는 갈등과 갑갑함이었다. 그래 거기에서 어떤 명확한 ‘교훈’이라거나, 여성의 현실에 대한 ‘고발’ 혹은 ‘주장’을 찾고 싶어 했던 관객들에게, 영화는 별로 친절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번지수를 잘못 잡은 관객들에게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었다.


‘연대’라는 좀 진부한 열쇳말

  나한테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많은 주저 끝에 동대문 지하상가 장면을 선택할 것이다. 동대문 지하상가에서 혜주, 지영, 태희, 비류, 온조는 자연스럽게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관심이 가는, 그리고 각자 지갑 사정에 맞는 상품들 앞에 선 소비자들이 된다. 그런 구조에서 가장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원래부터 가정의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고 최근에 일자리까지 잃어서 정말 가난한 지영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서 내가 잡은 열쇳말은 연대(우정이나 사랑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였다. 첫 장면에서 웃으며 요란하게 사진을 찍던 모습과 대비되는 다소 소원한 그들 5명의 사이는, 혜주 말마따나 “사회를 경험”해서이다. 고등학교 때는 별 의미가 없었던(그런데 과연 그럴까?) 경제적 균열이 선명한 의미를 가지는 요인이 되어버리는 이 사회라는 놈 때문이다. 5명의 관계 뿐 아니라 혜주가 증권회사에서 다른 여직원들과 다르게 대우받는 모습에서도 나는 연대가 불가능한 현실을 볼 수 있었다. 한 번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보기 시작하니까, 집이 무너져서 지영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죽는 것도 이 사회가 또 다른 방식으로 의지할 곳,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방법인 것만 같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다보니 한 평론가는 이처럼 집이 무너지는 설정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일상을 충실하고 꼼꼼히 그려낸 영화 전체와 잘 안 맞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비일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집이 무너질 걱정을 별로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닐까? 게다가 영화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끊임없이 무서운 쿠구궁 소리를 내며 가라앉고 있는 천장의 모습은, 관객이 집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예감케 하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게 만든다. 전혀 의외의 사건이 아니기에, 지영의 집이 무너지는 것은 영화를 끝내게 해주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거나 극적이거나 ‘비일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게, 돈이 없기 때문에 죽게 되는 것(집이 무너지건, 병에 걸리건, 굶건, 어떤 이유건)은 비일상적이지 않으며 이미 예고된 것이다. 다만 그 예고된 것을 극복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방법이 없을 뿐.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의 실업계(여상)를 나온 20대 여성들의 연대가 경제적 필연성의 ‘폭력’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거나 무력화되는지를 읽게 하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는 게,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의 내용을 재구성해보면서 든 생각이다.




답답해서 슬픈 영화

  같이 보러갔던 친구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전에 한 번 봤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무지 슬프다고만 이야기했다. 분명히 <고양이를 부탁해>는 슬픈 영화였다. 하지만 <고양이를 부탁해>가 느끼게 하는 슬픔은 눈물을 쥐어짜는 멜로드라마나 휴먼스토리(?)와도 다르고 비장한 죽음과 투쟁을 다룬 이야기와도 달랐다. 그것은 굉장히 답답하고 눈물이 나오지 않는 슬픔이었다. 중간 중간에 있던 유머라거나 통쾌하고 신선한 장면들까지도 오히려 그 답답한 느낌을 이루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았다.

  잠시 연대 이야기에서 이어 나가자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비류와 온조 등을 제외하고 주요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3명 ― 혜주, 지영, 태희 ― 은 마지막에 모두 누군가와 ‘함께’다. 혜주는 찬영을 불러내서 찬영과 함께 있는 게, 그리고 지영과 태희는 함께 어딘가로 떠나는 게 영화의 마지막이다. 회사에서, 경찰(소년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각각 상처받고 고립된 사람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일종의 연대?)으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견뎌내려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래도 연대라는 ‘희망’으로 매듭을 짓는 영화 같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혜주와 지영 사이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기에, 지영과 태희가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불안한 여행을 떠나기에, 뇌성마비 시인과 태희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무 해결이 없기에, 혜주는 여전히 회사에 가서 살아남아 ‘고부가가치 인간’이 되려고 바둥거릴 것이기에, <고양이를 부탁해>는 꾹꾹 뭉친 응어리 몇 개를 관객의 가슴에 떡하니 안겨준 채 끝나버린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영화에서 약간 아쉬웠던 것은 비류와 온조라는 캐릭터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약간은 내가 좋아하는 느낌의 푼수형(?) 캐릭터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중국인인 할아버지, 할머니라거나 그 부모 등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궁금증만 부채질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만약 비류와 온조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부탁해>의 흐름상 마지막에 티티를 맡는 것이 비류와 온조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자신들의 디테일한 이야기를 가진 캐릭터였다면, 티티는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비류와 온조는 고양이를 부탁받는 캐릭터이지, 고양이를 부탁하는 캐릭터가 아닌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왜 영화관에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는 너무 답답하게 우울하다. 선명한 해결도 없고 단일한 메시지도 없다. 하지만 충분히 많은 이야기들을, 그 카메라에 찍힌 수많은 공간들만큼이나 담고 있는 영화다.





(추신 : 저 영화 카피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섹스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라는 걸 넣은 의도를 알 수가 없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