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미성년자”, “아이들이 무슨 죄냐”, “촛불소녀” 그 공통점

공현 2008. 6. 19. 16:16


“미성년자”, “아이들이 무슨 죄냐”, “촛불소녀” 그 공통점



완고한 청소년 차별/대상화/보호주의

  ‘그들’은 이야기한다. 촛불집회를 처음에 시작한 주역은 청소년들이었다고. 청소년들은 대단하다고. 청소년들은 역사적인 주체라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한다. 청소년들이 기특하고 (마음 놓고 공부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어른들이 해주겠다고.
  집회현장에는 아이들/청소년들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혼재해있다.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들을 대상화하려고 한다. 내 눈에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힘과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축소시키고 청소년들의 정치적 활동을 예외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어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두려는 마음들이 엿보인다. 반드시 어른들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집회현장의 많은 청소년들도 그런 사고방식들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렇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촛불집회 현장에서의 청소년들에 대한 태도는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보수적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그랬다. ‘미성년자’(차별적인 표현이다.)는 부모 동의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촛불집회 웹홍보물, 밤 10시 이후에 ‘미성년자’는 자진 귀가시키겠다는 방침,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눔문화의 종이피켓과 집회현장에서의 구호들, 중고등학생들의 등교거부는 백안시하면서 대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지지하는 ‘여론’, 등교거부를 포함하여 청소년들의 행동을 알리는 홍보물을 삭제하는 안티명박카페와 정책반대시민연대 카페 운영진, 예비군들의 여성과 청소년 등은 뒤로 물러나라는 폭력적인 방식들, 집회가 경찰과의 충돌로 좀 위험한 상황이 될 거 같으면 가끔씩 다가와서 말을 걸며 위험하니까 그만 집에 가라고 반말로 말하시는 어르신들, 연행자들 중에서 ‘미성년자’는 석방하라는 구호들, 연행되는 여성 청소년의 사진에 사실과 무관하게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캡션을 다는 기사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대상화는 완고했고, 그 완고함은 청소년들의 ‘도전’조차 ‘흡수’해버렸다. 밤샘 가두시위가 경찰의 연행 등으로 대충 소강상태에 빠지고 시청 광장에 마련된 소규모 자유발언-토론의 장에서 한 청소년이 청소년들에게 반말을 쓰는 사례,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 위험하다고 ‘미성년자’는 가두시위 중에 일찍 집에 가라고 하던 사람 등을 예시로 들면서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 그 발언에 대해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을 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그 박수와 환호가 그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년이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나☆문화의 손피켓을 패러디하여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락카로 거리에 글씨를 새겼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 문구를 본 촛불집회 사회자는 “자신들이 지켜줄 테니 어른들은 마음 놓고 촛불을 들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어른들이 더 열심히 하자.”라는 식으로 진행 중 발언을 했다. 연행되었던 청소년이 쓴 「“미성년자 석방하라”의 함정」이라는 글을 비롯하여, 청소년들이 자신의 주체적인 면을 강조하고 촛불 속에서의 차별과 보호주의, 대상화를 비판한 표현들은 오히려 어른들이 더 미안해하고 더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인 것 같았다. 몇몇 사람이라도 그런 청소년들의 문제제기에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전반적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좀 우회해서, 패러디해가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그들에게는 ‘도전’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기특한 행동이거나 재롱이었을지는 몰라도.

“촛불소녀”에 거는 태클

  이런 상황에서 나눔☆화의 “촛불소녀”가 등장했다. 촛불소녀가 설령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하더라도, 촛불소녀는 그런 식으로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기존의 여성 청소년들의 약자로서의 이미지(‘촛불’이라는 상징물과 결합하여 더욱 강화된)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촛불소녀, 촛불백수, 촛불노동자, 촛불대학생, 촛불국회의원… 이런 말들을 만들어서 나열해보면 “촛불소녀”가 ‘소녀’로서 가지는 독특한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눔문☆는 여전히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우리들”이란 표현도 문제다.)라는 종이피켓을 나눠주고 있었고, 촛불소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촛불소녀는, 현재 집회현장이나 운동 속에서의 청소년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문제작이었다.
  ≪촛불소녀의 코리아≫ 카페의 공지에 올라가 있는 <촛불소녀에 대해 많이 궁금하셨죠? 질문이 많아 올립니다^^>라는 글에는, 촛불소녀가 만들어진 것이 청소년들을 대상화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해주는 말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 10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하며, “우리사회에서 가장 순수한 정신과 민감한 감성을 가지고 / 정의와 용기를 간직한 촛불소녀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마지막 희망”이라면서, “아이들의 깜찍하고 용감한 행동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지켜주자고 말하는 것과 KBS를 지켜주자고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아이들이 무슨 죄냐고, 아이들을 지켜주자면서 “촛불소녀”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청소년들을 대상화하는 입장을 청소년(촛불소녀)의 이름으로 표방하는 것이 가지는 모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청소년들을 순수하고 특수한 존재로 신비화시키고 있었고, 청소년들을 미래의 존재로 만드는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행동을 “깜찍하다”라고 ‘어른’이 말하는 것 속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진짜 도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눈치 보면서 빙 둘러 말하던 방식을 포기하겠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그것을 성년/미성년(어른/아이) 구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청소년들을 대상화시키고 보호주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들은 이 사회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의 행동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청소년들에게는 미안하고 기특해 하는 태도가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직접 도전하겠다. 그런 차별과 대상화에 맞서서 직접 비판하고 도전하겠다. 촛불집회에 나오는 이른바 ‘시민’들은, 이명박 반대를 외칠 때는 함께하는 사람들일지 몰라도, 청소년인권의 문제에서는 단지 ‘시민’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