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가출”과 “독립” 사이 - 청소년의 주거권

공현 2008. 7. 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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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과 “독립” 사이 - 청소년의 주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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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너 도 나도 집 걱정 하는 시대지만 청소년이 집 걱정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주거정책. ‘혼자 살 나이’가 아니라고 쳐다보는 사회를 ‘혼자’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청소년이다. 여전히도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청소년 주거권. 하지만 너무도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청소년 주거권이다. <진보복덕방 14호>에서는 "청소년 주거권"에 대한 생각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청소년의 주거권이라는 개념은 아직 낯설고, 그 내용이 분명하지가 않다. 아직 정리된 이야기거리들과 지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청소년의 주거권과 관련하여 딱히 사회에 충격을 던져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혹은, 관련된 사건이 있었더라도 주거권 문제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의식주 중에서도 ‘결식아동’이나 ‘급식’을 비롯하여 아동·청소년의 먹거리에 대해 사람들이 쏟는 지대한 관심에 비하면, 청소년들의 주거권 문제가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놓고 청소년들의 주거권에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청소년의 주거권이라는 개념이 낯선 것은 주거의 문제를 가족 단위로 사고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며, 청소년들은 그 가족-가정에 종속되어 있는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진지하게 주거권의 주체로 고려되어 본 적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주거권의 주체는 일단 비청소년들(‘어른들’)이며, 청소년의 주거권 또한 어른들의 주거권에 종속되어 있다. ‘거소결정권’이 친권의 일부로 당연하다는 듯 명시되어 있는 민법만 보더라도 이런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주거권은 단순히 누구나 발 뻗고 누워서 잘 수 있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주거의 최소한일 뿐이다. 주거권은 안정적인 집, 안전한 집, 가능한 한 좀 더 편안한 집, 내가 원하는 생활방식, 집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 등의 내용을 포함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생활을 옮기거나 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의 주거권이라면, 청소년들의 주거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의 주거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다. 바로 “가출”과 “독립”의 문제이다. 우리는 “독립”이라는 말과 “가출”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사용한다. 독립과 가출은 분명히 다르긴 하다. 지금까지 살던 집/가정을 떠난다는 것은 같으나, 독립은 어느 정도 지속적이거나 영구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비해 가출은 일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보통 사용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판단적 부분도 있어서, 독립은 보통 정당한 것,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지칭하는 데 반해 가출은 일탈적인 것, 잘못된 것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이 가출이란 말에는 집요하게 청소년이 따라다닌다. 국어사전 예문에도 “가출 청소년”, “집안 형편이 어렵자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그는 가출을 감행하였다.”, “어머니는 가출한 아들이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이런 것들만 나와 있으며, 정부에서는 청소년 가출에 대한 통계를 따로 낼 정도이다. 비록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이를 위반하는 일종의 무책임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가장의 가출”이나 “어머니의 가출” 같은 말이 사용되긴 하지만, 가출은 여전히 주로 청소년의 것이다. 가출이란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부정적 가치판단까지 포함해서.

이런 말 쓰임의 배경에는 청소년은 가정의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청소년은 ‘독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성년자’라는 말로 표현되는 청소년들의 ‘미성숙’에 대한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다. 앞서 내가 “가출”은 보통 일시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청소년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상, 가출로 명명되는 청소년들의 가정 탈출(다른 주거를 요구하는 일종의 저항)은 장기간 지속되기 어려우며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주거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가출 청소년들에 대해 국가가 제공하는 ‘쉼터’(6개월~1년 머무르는)는 청소년들에게 당장 먹고 잘 곳을 주긴 하지만 지속적인 주거일 수 없으며, 현재의 ‘그룹홈’은 그 수가 매우 적고 지원도 열악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쉼터 등은 아무래도 ‘가출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의 성격이 강하니까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치고, 청소년들의 ‘독립’ 문제에 관해 본격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 뭐 집 문제라는 게 항상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돈일 것이다. 눈 깜빡할 새 몇 백, 몇 억씩 오르는 집값이나 전세값, 보증금과 임대료 등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마는,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민사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계약 자체를 맺기가 어렵다. 청소년 알바라는 게 대부분 저임금이라서 돈 벌기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주택 대출은 꿈도 꿀 수 없다.

여러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책, 『88만원세대』에서는 첫 챕터에서부터 ‘독립’이 20대 후반까지도 지연되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데, 청소년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독립이란 얼마나 요원한 일이겠는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88만원세대』의 첫 챕터는 「첫 섹스의 경제학 -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들의 경제적 조건과 주거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읽다보면 역시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고 만다.

결국 이 사회에 살아가는 다수 ‘정상적인’ 사람들의 주거 사이클은, 청소년기에는 어떤 불만이나 독립에 대한 욕구가 있어도 가정에 종속되어 살다가 2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경제적/주거적으로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간혹 이 사이에 학교 진학 등을 이유로 경제적으로는 가정에 종속되어 있지만 집을 떠나서 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이런 주거 사이클을 벗어나려 하지만 이를 사회는 거의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가출과 같은 형태의 주거 저항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의해 청소년들의 주거권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대로 꺼내지지도 않은 채, 침묵 속에 묻히고 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신화 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나, 방향은 다르지만, 모두들 집값 걱정하는 시대이다. 정부에서는 집값을 낮추겠다고 호언장담하고 그래도 내집마련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주거복지정책'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여러 가지 이유로 배제를 경험하는 소수자들의 주거권 현실을 살펴본다면 주거권 실현이 집값잡기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거복지정책'은 오히려 배제를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집이 필요한 지를 묻지 않고 상품만을 찍어내는 주거, 부동산정책으로는 집값을 잡을 수도 없을 뿐더러 주거권 실현도 기대할 수 없다.

<진보복덕방>에서는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여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사례들을 짚어보면서 그 현실과 쟁점에 대한 연속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장애인주거권(9호), 노숙인주거권(10호), 주거용 비닐하우스촌 거주민주거권(11호), 뉴타운사업(12호), 동성애자 주거권(13호)의 현실과 쟁점을 살펴보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보편적 주거권 실현을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편집자 주]


2008년07월15일 13:4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