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분리주의 메모 1

공현 2008. 8. 8. 01:25
제목이 분리주의 메모 1인 까닭은 이게 아직 미완성이라서... 2, 3 하는 식으로 쓰는 대로 올리면서 연결해볼 생각입니다. -_-;;




분리와 연대에 대하여


- 분리주의 메모



* 분리주의자
  한 명의 분리주의자로서 이 메모를 쓴다. 애초에 분리주의라는 말 자체가 내가 쓰는 이 글 속에서 특수한 의미로 새롭게 규정된 말이기에 “한 명의 분리주의자”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전에도 ― 또는 동시대에도 분명히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한 명의 분리주의자”라고 쓴다.


* 분리주의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분리주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운동과 운동, 정치와 정치를 분리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의 분리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이영도 씨의 판타지소설 『피를 마시는 새』에서 빌려온 분리주의이다. 두 번째의 분리주의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이 분리주의는 온전하고도 평등한 통합을 위해서 분리를 주장한다. 아라짓제국에 의해 개성을 잃으며 흡수통합되고 있는 개인주의자 레콘들이, 일단 제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레콘 자신의 정치체를 건설하고 경험한 뒤에 다시 아라짓제국과 통합하자는 구상이다. 나의 분리주의는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나의 분리주의는 페미니즘운동에서 남성을 배제하는 것과 같은 분리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딱히 본질주의나 정체성주의는 아니다.
  분리주의의 시작은 단순하다. 다른 것은 다르게 운동한다는 동어반복적인 명제이다. 다른 사람/조건/목적/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서로 다른 운동들이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을 통합시켜야 하는가? 혹은 왜 그것에 “진보”나 “좌파”와 같은 묶음을 적용해야 하는가? 다른 운동은 다른 운동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분리되어야 한다 ― 더 정확히 말하면 당위적인 통합에 강제되지 말아야 한다.


* ‘진보’의 분류적 의미와 규정적 의미
  진보나 좌파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진보나 좌파라는 개념은 분류로서는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류가 아니라 당위나 동질성을 기술하는 데 진보나 좌파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진보진영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허구다. 그 개념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식의 이분법적이고 수단적인 틀(그리고 나는 동의하지 않는 인식 틀) 안에서나 타당성을 가진다. 그것은 특정한 일면을 강조함으로써 다양한 차이들을 은폐시키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운동, 정치, 삶은 결코 한 수직선 위에 표시되는 좌파-우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차원 좌표에다가 방향성과 크기를 가진 복잡한 벡터에 가깝다.
  진보나 좌파라는 개념은 분류의 용도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어떤 기준을 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면 좌파나 진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님. 이런 식으로 운동이나 사상,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진보나 좌파라는 말을 규정적, 선언적 의미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너는 좌파니까 이러해야 한다, 라거나 우리는 같은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라거나 등등. 물론 분류하는 행위 자체에 규정적 의미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진보나 좌파라는 말을 분류적으로 썼는지 규정적으로 썼는지, 그 의미와 용도는 그때그때 구별 가능하다.


* ‘반자본주의 운동’
  자본주의나 반자본주의라는 말은 중의적인 표현에 의한 기표와 기의의 혼동을 일으킨다. 온갖 권력 관계나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자본주의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시도들은, 오히려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근대사회’와 거의 비슷한 스케일로까지 확장시켜 버린 것 같다.
  “여성차별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아동억압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장애인 차별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빈부격차는 자본주의 때문이다. 생태계 파괴는 자본주의 때문이다. 노동자 착취는 자본주의 때문이다. 전쟁은 자본주의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아동(청소년), 장애인, 빈민, 노동, 반전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이(여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노동 관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노동자다. 그러므로 모든 반자본주의 운동은 노동계급 운동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주장 안에서 “자본주의”는 최소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최대 6가지 혹은 그 이상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할 때의 자본주의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노동착취를 근본으로 한 자본-노동 관계의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이다. 모든 문제들을 연관지어서 하나로 통합한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인간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소유한 자본이나 이윤의 증식을 우선시하는 특정 시대 이후에 나타난 사회 체제”라거나 여하간 뭐 이와 비슷하게 포괄적인 정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새롭고도 포괄적 정의(어쩌면 사회학, 정치학적인)와 자본주의의 고전적이고 좁은 정의(자본-노동 관계를 중심에 둔)를 혼용했기 때문에 저 주장은 잘못되어 있다. 그 잘못이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다양한 운동들이 계급운동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고의로 범한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비슷한 오류로, “자본주의”에 단일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다. 사회 구조는 단일한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복합적인 토대, 사건, 제도, 의식들 등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자칭 ‘좌파’들이나 어떤 사회주의자들이나 다함께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없다. 그들은 반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운동을 ‘좌파진영’, ‘진보진영’에 포함시키거나 운동의 지향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상정하거나, 아니면 그 표현을 노동계급중심성(최소한 노동계급에 대한 우호적 태도)을 주장할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의 ‘반자본주의’는, 이미 다의어가 되어버린 ‘자본주의’를 놓고 만드는 말장난일 뿐이다. 이러한 오류는 ‘정치’, ‘좌파’, ‘진보’ 같은 개념을 반성하고 변화시키기보다는, 단지 확대·확장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른다.


* “적의 적은 친구”와 “동병상련”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소수자들은 서로 뭉치고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반적이다. 이유는? 소수자이고 약자이기 때문이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등.
  이 주장은 그 전제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이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는 “적의 적은 친구”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공감하고 뭉쳐야 하지 않겠냐는 “동병상련” 논리이다.

  “적의 적은 친구” 논리는 어느 정도 ‘반자본주의 운동’ 이야기와 비슷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이 사회’는 단일하고 통일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며,(바로 당신들도 ‘이 사회’의 일부다!) 음모를 꾸미는 단일한 지배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적의 적은 친구” 논리는 운동들 사이의,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은폐시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 을 하건 말건, 저기 눈 앞에 큰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다 잊고 손 잡고 보자, 라는 식의 논리 아닌가?
  나는 그때그때의 판단에 따라 “적의 적은 친구”하는 식으로 협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협력은 어디까지나 수단적이고 제한적인 협력이지, ‘연대’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그러한 수단적 협력에 수단적 의미 이상의 ‘당위’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다.
 * 보통 우리가 ‘연대’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 말이 가지는 긍정적 뉘앙스(연대는 좋은 거지, 안 그래? 모두 연대해야지.) 때문인지 우리는 거기에 약간의 당위적 가치를 함축시킨다. 이 메모는 그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동병상련(대충 직역하면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연민을 느낀다.”라는 뜻인데) 논리 역시, 과연 서로 다른 운동을 같은 병이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 물어볼 수 있다. (아, 뭐 끝까지 파고들면야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처지가 다르고 존재가 다르니까 같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철학적인 다름을 떠나서,) 실제 운동(정치)을 함에 있어서 운동의 조건, 방식, 위치, 과제 등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같은 소수자’, ‘같은 약자’라면서 같은 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난센스(nonsense 무감각)가 있다.
  노숙인과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여성이 ‘같은 약자’로 서로 느낄까? 비정규직 노동자인 중년 여성과 체벌폭력에 찌들어 사는 청소년이 ‘같은 소수자’라고 느낄까? 당신이 느끼고 있는 동질감이 ‘소수자’나 ‘약자’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거꾸로 도출되는 ‘이미지’는 아닌가?
  이미 이 사회의 권력 관계, 지배-피지배, 억압-피억압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한 인간 속에도 수많은 복합적인 위치와 정체성이 있다. 그런데 같은 약자, 라거나 같은 소수자, 라는 말은 오히려 ‘무지’에 그 발을 딛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노숙인들이나 버마 민중들의 실제 삶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이 차별받거나 폭력을 당하거나 비민주적인 억압을 당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나와 같은 처지의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오, 그러나 그런 ‘알려고 하지 않음’이 더 큰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나는 왜 때로는 소수자나 약자라는 인식을 구성하는 정보들이 너무나 단편적인 것에 놀라곤 하는지.
  인간의 감정-의식에서 어쩌면 공감이나 동정,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에서 촉발되는 감정적 공명, 자연스러운 연민이나 지지는 일반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다른 정치들, 다른 운동들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나는 서로 다른 운동과 정치가 만나는 것은 결국 복합적 실체로서의 인간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공감, 동정, 연민, 감정적 지지 등에 의해 일어나는 행위를 부정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근거는 정치적인 연대, 운동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 사회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으므로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의식적으로 연대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모든 운동과 그 영향들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굳이 연대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연관된다.


* ‘적’
  마틴 니묄러의 「그들이 온다」를 연대를 이야기할 때 예문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건 연대가 결국 ‘적’에 대한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를 옹호해야 하는 까닭은 과연 내가 그들을 옹호하지 않으면 저 나찌가 나중에 나를 잡아갈 때 날 옹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 거대한 적에 대한 공포가 연대의 이유인가? 그것이 단지 살아남기 위한 수단적이고 제한적인 협력 이외의 어떤 정치나 운동의 연대를 의미할 수 있는가?
  ‘적’의 문제는 연대와 통합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루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