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허유세이

공현 2008. 10. 2. 22:41


** 2005년 9월 13일에 썼던 글인데, 어제 바람과 대화하다가 문득 화제가 되어서, 기억난 김에 옮겨옵니다.



오늘 담임 선생님이 세계사 시간에 별안간 일장연설을 하시더군요.

친구 하나가 사학과를 갔는데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조건 안 좋다고 결국 차더라, 지금 교수로 있는데, 투자한 시간에 비해 재산도 적고... 역시 대학 나와서 한 40대 될 때까지 돈부터 왕창 벌어야 한다.

가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앞자리, 교단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였는데 옆의 아이에게 귀마개를 빌려달라고 해서 귀에 끼니까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며 수업시간에 귀마개를 하냐고 하시더군요.

해서 "선생님 귀 좀 씻고 오게 화장실에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저를 한 번 보시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세계사 수업을 진행하시더군요.

그러더니 수업 끝나고 제게

"니가 무슨 허유, 소부냐. 귀를 씻게."

"아뇨. 설마요. 그럼 선생님은 요임금이게요."

 

 

그런 고로 제목은 허유세이(許由洗耳)입니다. 아래는 배경지식.

 

 허유(許由)는 본시 중국의 패택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던 어진 은자(隱者)였다. 그는 바르지 않은 자리에는 앉지도 않았고, 당치도 않은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의(義)를 지키고 살았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요(堯)임금은 천하를 그에게 물려 주고자 찾아갔다. 이 제의를 받은 허유는 거절하며 말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천하를 잘 다스리신 요임금을 어찌하여 저같은 자가 이를 대신하여 자리에 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저같이 볼품없는 인간이 어찌 광대한 천하를 맡아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말없이 기산(箕山) 밑을 흐르는 영수(穎水) 근처로 가버렸다.

요임금이 다시 뒤를 따라가서 그렇다면 구주(九州)라도 맡아 달라고 청하자 허유(許由)는 노여운 마음마저 들어 이를 거절하고 속으로 '구질구질한 말을 들은 내 귀가 더러워졌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아무 말없이 자기의 귀를 흐르는 영수 물에 씻었다. 

이때 소부(巢父)라는 사람이 조그만 망아지 한 마리를 앞세우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며 그 광경을 보고 허유(許由)에게 물었다.

"왜 갑작스레 강물에 귀를 씻으시오?"

"요임금이 찾아와 나더러 천하나 구주(九州)라도 맡아 달라고 하기에 행여나 귀가 더러워지지 않았을까 하고 씻는 중이오."

이 말을 듣자 소부(巢父)는 "하, 하, 하!" 하며 목소리를 높여 크게 웃는 것이었다. "여보, 소부(巢父)님, 왜 그리 웃으시오?" 하고 허유가 묻자 소부는 답하였다.

"평소의 허유(許由)님은 어진 사람이지만 숨어 산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니 그런 산뜻하지 못한 말을 듣고 낭패를 당하게 된 것이오. 숨어 사는 은자(隱者)라는 것은 애당초부터 은자라고 하는 이름조차 밖에 알려지게 하여서는 아니 되는 법이오. 안 그렇소? 헌데 그대는 여지껏 은자라는 이름을 은근히 퍼뜨려 명성을 얻은 것이오".

그리고서는 소부는 망아지를 몰고 다시 영수(穎水)를 거슬러 오라 가더니 망아지에게 물을 먹이며 말하였다.

"그대의 귀를 씻은 구정물을 내 망아지에게 먹일 수 없어 이렇게 위로 올라와 먹이는 것이오."

 

 

 

굉장히 순결주의적인 고사입니다만...

만약 제가 허유씨였다면, 아마 제가 신뢰하는 영어 선생님께서 순결주의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제게 할 수 있다면 좋은 대학교를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을 때도 귀를 씻었겠지요.

저는 저입니다. 허유씨와 소부씨라면 저를 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제 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한 소리도 요임금님처럼 천하를 맡아서 잘 경영해달라는 것보다는 격이 한참 낮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되는데, 허유/소부에 요임금은 무슨. 주제를 좀 알아야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쉬는 시간에 세면대에 가서 귀를 씻었답니다.

더러워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