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

총몽 - 삶의 자세를 가르쳐준 만화

공현 2008. 11. 12. 19:29

(출처 : 기시로 유키토 홈페이지)



이대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만화방이 폐업해서 만화책들을 싸게 팔길래 들어가봤다가,
오랜만에 총몽을 보고 질러버렸다. 총 9권...

고1(그러니까, 2003년) 때 보고서 반했던 작품이었는데,
그 뒤로 Last Order도 열심히 보다가 한동안 못 봤는데... 지금은 얼마나 나왔는지 모르겠네



지금 와서 보니까, 총몽이 내 삶의 방식이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줬다는 걸 깨달았다.

고2 때부터 행동하는 나의 삶의 방식과 사유하는 나의 삶의 방식을 분리시키고 행동하는 나의 삶의 방식으로 삶을 돌파해나가겠노라고 결심했었는데, 그것이 총몽에서 받은 인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총몽을 다시 읽다보니 이영도 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가 생각났다.
(홍정훈 씨의 <비상하는 매>도 조금)
총몽을 다시 읽다보니 마르크스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물론 고철마을이나 자렘, 그리고 자렘 사람들의 비밀 같은 요소들은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총몽에서는 수없이 많은 존재와 삶에 대한 의문들이 던져진다. 그러나 그 의문들에 답변하기 위한 말이나 해답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돌파한다.

행동하고 투쟁하면서 돌파한다.

물론 갈리는 가끔씩 멋있는 척하며 잠언 같은 깨달음, 말들을 툭툭 던지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런 말들이 아니라 갈리가 사는 방식이고 세계와 싸우고 나아가는 방식이다.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이영도 씨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라고 갈파하며 온갖 이유와 합리화와 정당화들을 뭉개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다만 살아갈 뿐"이라고 한 것의 연장선일지도.
그것은 실존주의를 연상케 하는 태도이지만, 동시에 실존주의를 넘어선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총몽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철학을 읽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 운동을 하며 그리고 내 삶을 긍정하며 살고 있는 것은 이런 작품들 덕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총몽은 사회운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니, '버잭전기'편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계관 속에서 집단적 저항을 통한 사회 변혁이라는 구상은 거의 무의미하다.
자렘과 고철마을은 거의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교류도 없으며 물리력/과학력의 차이도 압도적이다.
공중에 떠있는 자렘에 접근할 방법조차 많지 못하다.
그나마 후반부에 제시된 케이어스의 바벨탑 쌓기가 유의미한 저항이 될 것이다.

자렘과 예루의 붕괴와 보완은 고철마을에서 올라온 한 투사, 갈리(+노바 - 노바는 자렘출신이면서 자렘으로 돌아와 자렘을 붕괴시킨다.)에 의해 이루어지긴 한다.
(사실 좀 결말이 급전직하인데, 이건 예기치 않은 연재 종료로 작가가 할 이야기를 다 못하고 급하게 마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말을 취소하고 이어서 다시 그린 게 Last Order.)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영웅담이지만,
뭐랄까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사회변혁, 이라기보다는 삶의 자세와 인생-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라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