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분리주의 메모2

공현 2008. 12. 4. 13:41



* ‘적’

  마틴 니묄러의 「그들이 온다」를 연대를 이야기할 때 예문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건 연대가 결국 ‘적’에 대한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를 옹호해야 하는 까닭은 과연 내가 그들을 옹호하지않으면 저 나찌가 나중에 나를 잡아갈 때 날 옹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 거대한 적에 대한 공포가 연대의 이유인가? 그것이단지 살아남기 위한 수단적이고 제한적인 협력 이외의 어떤 정치나 운동의 연대를 의미할 수 있는가?

  ‘적’의 문제는 연대와 통합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일반의지'라는 일종의 연대-통합의 원리를 제시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루소는 서로 다른 의지가 어떻게 합쳐질 것인지를 논의할 때 적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썼다.

  루소는 이러한 다두적인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 믿을 수없을 만큼 단순하고 그럴듯한 예에 의존했다. 루소는 두 가지 대립적 이익(세력)이 자신들을 동시에 반대하는 제3의 이익(세력)에직면했을 때, 이들이 서로 결속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단서를 도출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실존을전제했고 국민 공동의 적(敵)이 지닌 통합력에 의존했다.
  ......
 그 는 국내 정치에도 타당한 민족 자체 내의 통합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따라서 대외 문제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공동의 적을어디서 발견하는가가 그의 문제였으며, 그러한 적이 시민들의 가슴 속에, 즉 그의 특수한 의지와 이익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해답이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특수의지와 이익들을 합치기만 한다면, 이 숨어 있는 특수한 적이 공동의 적 - 내부에서 민족을통합하는 - 의 반열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민족 내부의 공동의 적은 모든 시민들의 특수의지의 총합인것이다. 루소는 아르장송(Marquis d'Argenson)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 가지 특수 이익의 일치'는 제3의 이익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된다. (아르장송은) 모든 이익의 일치가 각자의 이익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

(한나 아렌트. 홍원표 옮김. 『혁명론』. pp.157-158. 도서출판 한길사.


   공동의 적의 존재가 연대를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과연 그 연대의 성격은 무엇인지 나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게다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루소의 지적(제안?)은, 내부의 특수의지들을 적대시함으로써 형성되는 일반의지의 출현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부의 적[차이]들을 공격함으로써 단결하는 통합된 전체이다.

  공동의 적으로부터 비롯되는 연대는, 자기 자신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적의 존재에 집중한다. 그것은 적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자신의 일부들을 부각시킬 수는 있지만 더욱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자신을 만들거나 움직이지는 못한다. 공동의 적으로부터 비롯되는 연대는 정세와 상황에 휘둘리며, 수단적이고 협소하다. 적에 대한 적대를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자기 부정적이고 지속적이지 않다. 자기 자신을 '적'의 존재로부터 반작용으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적'에 대한 나의 행동은 자기 자신의 기반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꼴이다.
     사르트르의 경우를 또 들어보면, '산재집단'과 '융화집단'을 구별하면서도 융화집단의 형성에서 '공통의 위협'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 융화집단이 결국 고정적이고 형식화되고 틀에 맞춘 집단으로 타락하게 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그 집단의 형성이 공통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 아닐까?

  물론 모든 운동은 현재의 사회에 대한 대응-반응이며, 그런 점에서 언제나 '적'에 의해 유발되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성격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행위의 주된 이유이자 정당화 논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적으로부터 유발된 실천은 수세적이고 제한적이다. 설령 그것의 겉모습이 공세적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적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연대는, 오히려 운동 자체의 논리와 가능성을 깎아먹는다.


(나는 이 메모에서 줄곧 '협력'과 '연대'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의 구별은 중요한 문제다. 각 개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좀 더 뒤에 나올 것이다. 분리주의 메모1이 다른 연대를 강조하는 논리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면 분리주의 메모2는 연대 개념 자체에 대한 분석이 더 많을 것이다.)





* 연대의 다의적 의미

  연대는 그 용례를 대부분 포괄할 수 있는 정의들을 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렇기에 "연대는 때때로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불명료한 개념으로서 사용된다."(인권오름, 류은숙 씨.)라고 했던가. 여기서는 부족하지만, 세 가지로 연대의 의미를 나눠보겠다.

  "연대"는 우선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행위-욕망-권리를 의미하여 사용될 수 있다. 말하자면 근본적인 관계성으로서의 연대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하든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든, 여하간에 인간은 일반론적으로 타인이 없을 때보다는 있을 때를 선호한다. 또한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를 욕망한다.(--- 여기서 긍정적이라는 것은 마냥 사랑하고 마냥 좋아하는 관계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사랑하고-사랑받고, 인정하고-인정받고 이러한 관계를 선호하기는 한다.) 덧붙여서, 인간은 자신과 유비할 수 있는 다른 인간에게, 동종으로서의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 이에 대해 인류학적/생물학적으로 그것이 생존을 위한 전략적 본능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이 경우 이는 두 번째의 협력으로서의 연대와 혼합된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서 근원적인 레벨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 ~ 예를 들어 식욕 같은 ~ 을 우리는 수단으로 봐야 할까 목적으로 봐야 할까? 생물학적 차원에서라면 흥미로운 주제지만, 실제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에 대해 논할 때 이를 다시 수단으로 위치시키면서 생존과 살아남음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환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물론 그 관계가 굳이 다른 인간과의 관계일 필요는 없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든, 인간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이든, 관계성으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맺음으로서의 연대는 기본적 권리이자 욕망이다.

  두 번째로 "연대"는 '협력'의 의미로, 특히 운동사회에서 사용된다. 이는 협동을 위한 역량의 재배치이다. 연대 활동, 연대 대응이 필요하다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주로 이런 의미로 "연대'란 말이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연대에서는 다양한 성격이나 구성, 수위가 있을 수 있는데, 단지 '힘'(또는 몸빵, 인력, 노동력...)만을 합치는 경우에서부터 일정한 방향성이 있는 입장이나 질적인 정치성이 결합되는 경우, 아예 조직적 실질적 통합까지 의미하는 때가 있다.
  물론 이런 의미의 연대는 운동 사회 뿐 아니라 더 폭넓게 사용될 수도 있다. 자선, 복지, 봉사활동 등은 운동 사회 안에서뿐 아니라 협력으로서의 연대의 의미가 적용될 수 있는 한 예가 된다. 그러나 이런 자선, 복지, 봉사활동 등의 경우는, 시혜-연민의 감정 및 연대의 1번 의미로서의 인간의 관계성 그 자체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협력이나 협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흔히 이야기하는 농촌에서의 품앗이 등도 협력으로서의 연대의 한 형태인데, 이때도 관계성으로서의 연대가 일부 섞여 있다. 정치영역이나 직접적 대결, 갈등 양상에서 우리는 협력으로서의 연대를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것 같다.
  
  세 번째로 "연대"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서로 다른 정치-정체성-운동(편의상 이후 운동으로 씀.)의 만남과 조화를 의미한다. 이때의 연대는 협력으로서의 연대와 분명히 다르다. 이는 서로 다른 운동들이 좀 더 총체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만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운동들이 더 풍부해지고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만남으로서의 연대라고 불러도 될까? 하지만 이 연대는 때로는 단순한 '만남'을 넘어 다른 무언가를 생산해내거나 '결합'에 가까운 것을 이루기도 한다. 여하간 편의상 이를 만남으로서의 연대라고 하자.
  이 연대는 운동 자체의 논리와 가능성을 존중하면서도 소통을 통해 서로가 흔들리는 과정이다. 이런 연대의 실제 사례를 무엇으로 들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간혹 협력으로서의 연대로 만났던 운동들이 이를 계기로 이러한 연대의 한 실타래를 잡는 경우도 있긴 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일상적이거나 기획된 소통들 속에서 이런 연대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 연대의 특징은, 직접적인 역량의 재배치 - 협력을 요구하거나 적의 존재에 대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뜻한다는 것이다.




* 기표, 기의, 뉘앙스(어감)

  갑자기 기호학적인 이야기인데.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다. 기표는 표시이고, 기의는 그 표시의 의미이다.
  예컨대, 배라는 기표는 여러 가지 기의를 가지고 있다. 물 위에 뜨는 탈 것, 먹는 과일의 일종, 가슴 아래 부분.

  그런데 어떤 경우에, 기표의 의미는 어느 정도 유사한 의미들의 범위 안에서 흔들린다. 이 경우에 그 의미를 확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각의 용례들을 분석할 수밖에 없다. 서로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기의들 사이를 오가며 사용되는 기표들. 이 메모에서 예를 든다면 메모1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다양한 개념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뉘앙스-어감은 기표에 따라다닐까, 기의에 따라다닐까?
  물론 뉘앙스-어감은 맥락에 따라다닌다.(사실 의미도 맥락-언어구조와 같이 다닌다.) 그러나 뉘앙스-어감은 종종 기표에도 따라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맥락으로 볼 때 다른 의미인데도, 우리는 뉘앙스-어감이 계속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운동을 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연대"라는 말들은 굉장히 포괄적이다. 연대체, 연대활동, 연대운동, 연대제안 기타 등등등. 이 연대는 매우 낮은 수위의 수단적이고 제한적인 협력에서부터 매우 높은 수위의 통합까지, 때로는 이 높고낮고로 평가할 수 없는 다른 형태의 만남이나 결합, 조화까지 모두 아우르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연대"라는 말에는 계속 따라다니는 어떤 '인간적인', '당위적인'(긍정적인), '끈끈한' 뉘앙스가 있다. 이 뉘앙스는 강하고 약하고는 있지만 아주 사라지는 일은 많지 않다.
  나는 이러한 뉘앙스가 관계성으로서의 연대가 협력으로서의 연대의 의미와 뒤섞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성으로서의 연대가 워낙 긍정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협력으로서의 연대에 긍정적 뉘앙스가 덧씌워진다. 때에 따라서는 만남으로서의 연대의 의미가 협력으로서의 연대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 메모는 연대에 대한 개념적 고찰, 연대를 정당화하는 많은 논리들 기타 등등을 모두 조금씩 건드리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시작한 첫 문제의식 중 하나는 '연대'라는 말이 가지는 이러한 뉘앙스-어감의 효과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협력과 연대

  이런 뉘앙스의 문제를 탈출하기 위해서 나는 '협력'과 '연대'를 구별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즉 '협력으로서의 연대'는 모두 '협력'으로 지칭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실 '협력'은 뉘앙스 면에서 '연대'보다는 훨씬 건조해 보인다.
  협력과 연대를 구별해서 사용하자는 것은, 정세와 필요성과 역량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협력의 문제들을 "연대"라는 말로 서술하는 것은 협력의 문제들이 당위성이나 긍정적 수사 또는 일종의 도덕적 판단들이 섞인 문제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연대라는 말을 지나치게 다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협력으로서의 연대와는 성격이 다른) 관계성으로서의 연대나 만남으로서의 연대의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다. 관계성으로서의 연대와 만남으로서의 연대 또한 구별될 필요가 있으나, 일단 여기에서는 협력이 여타의 연대와 구별되어 사용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만족하도록 하겠다. 관계성으로서의 연대와 만남으로서의 연대는 목적의 의미가 있다는 데서 그나마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협력은 다른 두 의미와는 다르게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며 훨씬 덜 총체적인 양상을 띤다.
  게다가 '공통의 적'에 대한 대응이나 '공통 목표'를 위한 역량의 재배치나 협동은 협력으로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적에 대한 대응은 특히 제한적이고 수단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단적이고 제한적인, 또는 사안에 따른 '연대'는 '협력'으로 불러야 옳다. 연대는 이보다 더 총체적이거나 더 목적적인 서술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어울리는 개념이다.